◆ 웨베르 보고서
1895년 을미년 10월 8일 새벽 경복궁을 난입한 일제 낭인들은 조선의 국모인 명성황후를 강간한 후 처참하게 시해하고 시신을 불태우는 세계역사상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참담한 만행을 저지른다. 이 사태는 인간으로서 아니 국가로서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후안무치한 사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이라는 나라는 오늘날까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듯 발뺌으로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전 모스크바 대학 박종효 교수가 1995년 러시아 외무부 문서보관소 소속 제정러시아 대외정책국에서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현장에서 생생하게 기록하여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보고한 문서를 찾아내어 이를 공개하였다. 이는 2001.11월 KBS역사스페셜에서 방송됨으로써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전말은 낱낱이 밝혀지게 되었다.
이 문서는 당시 카를 이바노비치 웨베르(Karl I .Waeber) 주조선 러시아 대리공사가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전말을 기록한 A4 용지 무려 3백장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다. 이 보고서에는 사건 발생 직후 고종이 발표한 성명서, 전 대한제국 러시아 공사 이범진(李範晉). 당시 궁정경비대 부령이었던 이학균(李學均). 한 상궁. 사건 현장을 직접 목격한 러시아인 건축기사 세르진 사바틴(A.J.Scredin Sabatine) 등 당시 궁내에 있었던 사람들의 증언록, 주한 외교 공사들의 회의록과 당시 신문자료 등 다각도의 정보와 증거 자료가 첨부됐다.
▲웨베르보고서와 싸인(KBS 역사스페셜 제공)
결론적으로 말하면 웨베르는 이 보고서에서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했으며 황후의 최후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일본 낭인들은 왕비 마마가 복도로 달아나자 뒤쫓아가 바닥에 쓰러뜨리고, 가슴 위로 뛰어 올라 세 번 짓밟고 칼로 시해했다. 몇분 후 시신을 소나무 숲으로 끌고 갔으며 얼마 후 그 곳에서 연기가 피어 오르는 것을 보았다”
◆ 옥호루에서 시해하다
시해 현장에서 일본 행동대와 맞닥뜨린 사바틴은 중요한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그들은 내말은 듣지도 않고 황후가 어디 있는지 황후가 누구인지 만 물었다 ' 시해범들은 황후 찾기에 만 혈안이 돼 있었던 것이다. 총칼로 무장한 일본낭인들은 황후를 찾아 왕의 침전에 쳐들어 온 것을 꾸짖는 고종의 어깨에 무례하게 손을 얹어 폭행을 하여 주저앉혀 고종의 어의(御衣)가 찢겼고, 태자의 상투를 잡아당겨 방바닥에 내팽개치고 칼등으로 목줄기를 후려치는 행패를 부려 의식을 잃게 했다.
▲조선왕비 살해(리옹프와이어 1895)
특히 고종이 목격한 증언서에는 칼을 들고 왕의 내실에 침입한 일본인 이름을 거명하였다. “짐의 눈앞에서 일본인들 오카모토 류노스케와 전 조선 군부의 고문 스즈끼,와타나베가 칼을 빼 들고 궁궐로 쳐들어 왔고 조선 군부대신 고문관을 지낸 오카모토와 스즈끼가 황후를 잡으러 나갔다"라고 진술하다 말고 실신했다라고 보고서에는 기록하고 있다. 일본 낭인들이 황후를 잡겠다고 나간 뒤에도 고종은 황후가 무사할 것으로 믿었던 것 같다. 왕의 처소에 일본군 침입 사실을 알리러 달려간 이학균 연대장이 "황후는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라고 묻자 고종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황후는 지금 안전한 장소에 있다." 그러나 이 시간에 황후의 처소인 옥호루에서는 이미 참담한 학살극이 벌어지고 있었다.
한 상궁은 이렇게 증언했다. "왜인들이 황후와 궁녀들이 있는 방으로 들이닥쳤다. (중략) 일본군은 궁녀들을 밀치며 황후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고, 우리는 입을 모아 여기에 황후는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왜인들은 (옥호루) 아래로 궁녀들을 집어 던졌다. 이때 황후가 복도로 도망쳤고, 한 왜인이 왕비를 따라잡는 데 성공했다. 그는 황후를 마룻바닥에 넘어뜨리고 가슴을 발로 세 번 짓밟았다. 그리고는 칼로 가슴을 내리 찔렀다."
사바틴은 보고서에 이렇게 진술하고 있다. “새벽 5시경 궁정 서쪽에서 총소리가 들려 황후의 처소로 급히 가니 25명 가량의 일본 낭인들이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그 중 절반 가량이 황후의 방으로 들어갔다” “내가 뜰에 서 있는 동안 일본인들은 10∼12명 가량 되는 여인들의 머리채를 끌고 와 창문 너머 마당으로 이들을 내던졌다. 창문의 높이는 6피트(1m80cm)쯤 되는 듯했다. 마당에 나뒹구는 여인들은 아무도 신음 소리나 고함 소리를 내지 않았다."
“일본 낭인들이 황후가 있는 방으로 들어오는 것을 궁내 신하(궁내부 대신 이경직)들이 막자 칼로 팔을 베어 버렸다. 황후가 상궁 옷을 입고 상궁 무리 안에 섞여있어 누가 황후인지 알아볼 수 없게 되자 일본 낭인들은 한 명씩 끌어내 250cm 높이에서 아래로 떨어뜨렸다. 두 명이 떨어진 뒤 황후가 복도를 따라 도망갔고 일본 낭인들이 쫓아가 발을 걸어 넘어뜨린 뒤 가슴을 세 번 짓밟고 칼로 가슴을 난자했다. 몇분 후 시신을 소나무 숲으로 끌고 갔으며 얼마 후 그 곳에서 연기가 피어 오르는 것을 보았다.” 이상은 웨베르가 전해 들은 내용을 보고서에 기술하였다.
▲명성황후기념관에 재현되어 있는 국상 장면
"특히 무리들은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왕비(王妃)를 끌어내어 두세 군데 칼로 상처를 입혔다(處刃傷). 나아가 왕비를 발가벗긴(裸體) 후 국부검사(局部檢査)(웃을(笑) 일이다. 또한 노할(怒) 일이다)를 하였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기름(油)을 부어 소실(燒失) 시키는 등 차마 이를 글(筆)로 옮기기조차 어렵도다. 그 외에 궁내부 대신을 참혹한 방법으로 살해(殺害)했다." 이것은 에조보고서에서 다시 거론하겠지만 낭인 속에서 직접 목격한 일본인 에조가 일본 본국에 보고한 내용으로 낭인들이 명성황후를 발견하고 강간 후 살해했다는 것은 우리를 더욱 전율케 하고 있다.
◆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단 말인가
당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는 웨베르 보고서를 직접 읽은 뒤 표지에 친필로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단 말인가. 정말 놀라운 일이다”라고 적은 뒤 즉각 한반도에 가까운 아무르주(州) 군에 비상대기령을 내렸을 정도로 당시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사건 직후인 10월9∼10일 제물포항에 정박해 있던 일본 군함과 선박 2척이 연이어 황급히 일본으로 떠났다는 자체 첩보에 의거해 이 배가 시해범들을 실어 날랐을 것이며, 따라서 이것이야 말로 일본 정부가 시해사건에 개입한 증거라고 나름으로 결론을 내린 대목도 있다.사건 직후 각국 공사 앞에서 사바틴이 했던 증언은 영어·프랑스어 등으로 번역되어 각국에 우송되었다. 1895년 발행되던 성 페테르부르그 신문, 루스코에 슬로보 신문, 모스콥스코에 베도 모스티 신문 등은 시해 현장에서 목격한 러시아인 사바틴의 증언과 워베르보고서를 인용하여 연일 이 사건에 깊은 연민을 표시하고 일본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일제 낭인들은 강간을 하고 처참하게 시해한 명성황후를 증거 인멸을 위해 시신을 불태우고 건청궁 동쪽 숲속에 묻어 버렸다. '전쟁도 아닌 평화 시 군대를 동원해
▲웨베르보고서에 있는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친필
궁궐을 습격하고 한나라의 국모를 서슴없이 시해한 사상 유래 없는 만행' 이라고 이 보고서는 밝히고 있는 것이다.
◆ 낭인(浪人)이란
일본에서 낭인이란 일반적으로 깡패나 무뢰한들을 지칭하고 있다. 19세기 말 당시 일제는 정한론을 심봉하고 있던 3류 사무라이들이 조선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하여 조선낭인을 파견하였고, 만주를 비롯한 중국일대에는 광개토태왕비문을 조작한 사코와 같은 대륙 낭인들을 파견하였다.
일제는 밀정으로 파견한 이들을 낭인이라 치부한 것은 일제의 처사를 숨기기 위한 조치였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도 은폐하기 위하여 낭인들의 소행으로 치부하고 말았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동
▲한성신보사 앞에서 기념 촬영한 일본 행동대원 낭인들
원된 낭인들은 이러한 뜻과는 전혀 다르다. 시해에 참가한 낭인들은 군인.경찰도 일부 있었지만 양복과 일본 정통복장을 입고 총과 칼로 무장한 행동하는 재야 정치인으로 자칭 일본의 정신적 지주 역활을 한 지식층들이었다.
이들 낭인들은 메이지(明治)시대 일본의 계몽사상가로 불리는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절대적 영향을 받았다. 후쿠자와는 1872년 '학문의 권장 (勸奬)' 이라는 책 머리말에서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았고 사람 밑에 사람을 만들지 않았다"고 했지만 조선.중국 등 제 아시아 국가들을 '터럭만큼도 도움이 안 되는 악우 (惡友)'로 비하했다. 그리고 그는 일본은 이러한 국가들의 대열에서 벗어나 서양 문명 국가들과 진퇴를 같이하라는 소위 탈아입구론(脫亞入歐論)을 주장했다. 이러한 후쿠자와의 사상은 일본인의 인권은 존중했지만 다른 나라 국민의 인권은 철저히 멸시했고 일본의 대외 침략정책을 강력히 옹호했던 비열한 이중성을 가진 학자였다.
최근 일본은 경제성장으로 배가 부르게 되자 일본인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 1만엔 지폐에 기존 쇼토쿠태자의 초상화를 슬그머니 밀어내고, 이러한 학자적 양심이 없는 후쿠자와의 초상화로 대체시켜 일본 국민들에게 그의 이중성을 심봉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영향으로 오늘날 일본국민성을 논할 때 속(혼네-本音)과 겉(다테마에- 建前)이 완벽하게 다른 ‘무서운’ 일본인으로 고착화시켰다. 어쨌든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했던 낭인들은 이 자의 주장에 충실했으며, 오늘날 일본인들의 평균적인 인식으로 자리잡고 있는 우익의 근간이 되는 자들이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은 낭인들 중 주범 이노우에가 입안하고, 무식한 무장 미우라고로는 행동대장이자 시해 사건의 종범이며, 한성신보사 사장 아다치 겐조는 낭인들을 모으고 동원한 총괄 모집책이었다.
이들 낭인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당시 일본의 내상과 외상을 역임한 정치 실세로 이토우 히로부미와 함께 일본의 정계를 움직인 자
-- 미우라 고로(三浦梧樓)
시해 사건 성공 이후 일본 정치계의 거두로 큰 영향력을 행사함.
-- 아다치 겐조(安達謙藏)
겐조는 구한말 조선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발행하던 한성신보사의 사장이다. 한성신보사라는 것은 창립기금에서부터 모든 운영비를 일본공사관에서 지원하고 있는 일본국가 소유 신문사이다. 한반도에 기자로 위장한 자들을 들어와서 조선정세에 대한 염탐과 정보수집을 한 기관이다. 아다치 겐조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행동대 책임자 중의 한 사람으로 낭인들을 동원하고, 그들에게 행동 지침을 하달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한성 신보사의 기자들은 대부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행동대로 가담했다. 아다치 겐조는 명성황후 시해 성공으로 후일 체신상과 내상(지금의 내무부 장관)을 지냈다.
-- 호리구치 구마이치(掘口九萬二)
행동대원 호리구치 구마이치는 도쿄대 법학부를 졸업하고 사건 후 브라질 전권공사를 역임함.
-- 시바 시로우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작전 참모로 하버드 대학과 펜실베니아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자칭 엘리트다. 시바 시로우는 그 후 일본에서 정치 소설가로 더 큰 명성을 얻게되며 중의원 의원을 수 차례 당선된다.
그 외 스기무라 후카시(杉村濬:공사관 서기), 오카모토 류스노케(岡本柳之助:공사관부무관 겸 조선군부고문), 구스노세 사치히코(楠瀨幸彦:포병중좌), 히라야마 이와히코(平山岩彦), 토우카츠아키(藤勝顯), 하기와라(외무성경찰), 구미모도(한성신보 주필.한학자), 시부다니(통역관), 야마타(신문기자), 니니와(의약품판매상), 사사키(의사), 기구치(신문기자), 무라이(육군대위), 사토(농민), 마쓰무라(교사), 고바야가와 등 총 48명이 참여했으며 시해사건 후 이들은 일본에서 대부분 정치 요직에 발탁되거나 사회적인 부와 명성을 얻게 된다.
1892~1896년까지 약 4년간 권력을 잡기위해 대원군과 명성황후는 경쟁을 하였다.
만약 이 두명이 의기투합하여 일본에 대항했다면 일본에 무참히 짖밟히는일은 없었을지도...
혹은 명성황후가 여우사냥에서 살아남아 좀더 오래살았더라면 러시아와 구미열강을 이용해
일본을 몰아냈을지도 모를일이다.
철의여인 명성황후가 마지막으로 남긴말이 아쉽기만 할뿐이다.
"내 나라가 지금은 힘이없어 너희에게 이런수모를 당한다만 언젠가 부국강병을 이루어 오늘의
빚을 꼭 갚을것이다. 오늘의 이일들을 내 백성들이 어찌 잊겠느냐"
1895년 을미년 10월 8일 새벽 경복궁을 난입한 일제 낭인들은 조선의 국모인 명성황후를 강간한 후 처참하게 시해하고 시신을 불태우는 세계역사상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참담한 만행을 저지른다. 이 사태는 인간으로서 아니 국가로서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후안무치한 사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이라는 나라는 오늘날까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듯 발뺌으로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전 모스크바 대학 박종효 교수가 1995년 러시아 외무부 문서보관소 소속 제정러시아 대외정책국에서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현장에서 생생하게 기록하여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보고한 문서를 찾아내어 이를 공개하였다. 이는 2001.11월 KBS역사스페셜에서 방송됨으로써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전말은 낱낱이 밝혀지게 되었다.
이 문서는 당시 카를 이바노비치 웨베르(Karl I .Waeber) 주조선 러시아 대리공사가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전말을 기록한 A4 용지 무려 3백장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다. 이 보고서에는 사건 발생 직후 고종이 발표한 성명서, 전 대한제국 러시아 공사 이범진(李範晉). 당시 궁정경비대 부령이었던 이학균(李學均). 한 상궁. 사건 현장을 직접 목격한 러시아인 건축기사 세르진 사바틴(A.J.Scredin Sabatine) 등 당시 궁내에 있었던 사람들의 증언록, 주한 외교 공사들의 회의록과 당시 신문자료 등 다각도의 정보와 증거 자료가 첨부됐다.
▲웨베르보고서와 싸인(KBS 역사스페셜 제공)
결론적으로 말하면 웨베르는 이 보고서에서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했으며 황후의 최후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일본 낭인들은 왕비 마마가 복도로 달아나자 뒤쫓아가 바닥에 쓰러뜨리고, 가슴 위로 뛰어 올라 세 번 짓밟고 칼로 시해했다. 몇분 후 시신을 소나무 숲으로 끌고 갔으며 얼마 후 그 곳에서 연기가 피어 오르는 것을 보았다”
◆ 옥호루에서 시해하다
시해 현장에서 일본 행동대와 맞닥뜨린 사바틴은 중요한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그들은 내말은 듣지도 않고 황후가 어디 있는지 황후가 누구인지 만 물었다 ' 시해범들은 황후 찾기에 만 혈안이 돼 있었던 것이다. 총칼로 무장한 일본낭인들은 황후를 찾아 왕의 침전에 쳐들어 온 것을 꾸짖는 고종의 어깨에 무례하게 손을 얹어 폭행을 하여 주저앉혀 고종의 어의(御衣)가 찢겼고, 태자의 상투를 잡아당겨 방바닥에 내팽개치고 칼등으로 목줄기를 후려치는 행패를 부려 의식을 잃게 했다.
▲조선왕비 살해(리옹프와이어 1895)
특히 고종이 목격한 증언서에는 칼을 들고 왕의 내실에 침입한 일본인 이름을 거명하였다. “짐의 눈앞에서 일본인들 오카모토 류노스케와 전 조선 군부의 고문 스즈끼,와타나베가 칼을 빼 들고 궁궐로 쳐들어 왔고 조선 군부대신 고문관을 지낸 오카모토와 스즈끼가 황후를 잡으러 나갔다"라고 진술하다 말고 실신했다라고 보고서에는 기록하고 있다. 일본 낭인들이 황후를 잡겠다고 나간 뒤에도 고종은 황후가 무사할 것으로 믿었던 것 같다. 왕의 처소에 일본군 침입 사실을 알리러 달려간 이학균 연대장이 "황후는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라고 묻자 고종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황후는 지금 안전한 장소에 있다." 그러나 이 시간에 황후의 처소인 옥호루에서는 이미 참담한 학살극이 벌어지고 있었다.
한 상궁은 이렇게 증언했다. "왜인들이 황후와 궁녀들이 있는 방으로 들이닥쳤다. (중략) 일본군은 궁녀들을 밀치며 황후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고, 우리는 입을 모아 여기에 황후는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왜인들은 (옥호루) 아래로 궁녀들을 집어 던졌다. 이때 황후가 복도로 도망쳤고, 한 왜인이 왕비를 따라잡는 데 성공했다. 그는 황후를 마룻바닥에 넘어뜨리고 가슴을 발로 세 번 짓밟았다. 그리고는 칼로 가슴을 내리 찔렀다."
사바틴은 보고서에 이렇게 진술하고 있다. “새벽 5시경 궁정 서쪽에서 총소리가 들려 황후의 처소로 급히 가니 25명 가량의 일본 낭인들이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그 중 절반 가량이 황후의 방으로 들어갔다” “내가 뜰에 서 있는 동안 일본인들은 10∼12명 가량 되는 여인들의 머리채를 끌고 와 창문 너머 마당으로 이들을 내던졌다. 창문의 높이는 6피트(1m80cm)쯤 되는 듯했다. 마당에 나뒹구는 여인들은 아무도 신음 소리나 고함 소리를 내지 않았다."
“일본 낭인들이 황후가 있는 방으로 들어오는 것을 궁내 신하(궁내부 대신 이경직)들이 막자 칼로 팔을 베어 버렸다. 황후가 상궁 옷을 입고 상궁 무리 안에 섞여있어 누가 황후인지 알아볼 수 없게 되자 일본 낭인들은 한 명씩 끌어내 250cm 높이에서 아래로 떨어뜨렸다. 두 명이 떨어진 뒤 황후가 복도를 따라 도망갔고 일본 낭인들이 쫓아가 발을 걸어 넘어뜨린 뒤 가슴을 세 번 짓밟고 칼로 가슴을 난자했다. 몇분 후 시신을 소나무 숲으로 끌고 갔으며 얼마 후 그 곳에서 연기가 피어 오르는 것을 보았다.” 이상은 웨베르가 전해 들은 내용을 보고서에 기술하였다.
▲명성황후기념관에 재현되어 있는 국상 장면
"특히 무리들은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왕비(王妃)를 끌어내어 두세 군데 칼로 상처를 입혔다(處刃傷). 나아가 왕비를 발가벗긴(裸體) 후 국부검사(局部檢査)(웃을(笑) 일이다. 또한 노할(怒) 일이다)를 하였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기름(油)을 부어 소실(燒失) 시키는 등 차마 이를 글(筆)로 옮기기조차 어렵도다. 그 외에 궁내부 대신을 참혹한 방법으로 살해(殺害)했다." 이것은 에조보고서에서 다시 거론하겠지만 낭인 속에서 직접 목격한 일본인 에조가 일본 본국에 보고한 내용으로 낭인들이 명성황후를 발견하고 강간 후 살해했다는 것은 우리를 더욱 전율케 하고 있다.
◆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단 말인가
당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는 웨베르 보고서를 직접 읽은 뒤 표지에 친필로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단 말인가. 정말 놀라운 일이다”라고 적은 뒤 즉각 한반도에 가까운 아무르주(州) 군에 비상대기령을 내렸을 정도로 당시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사건 직후인 10월9∼10일 제물포항에 정박해 있던 일본 군함과 선박 2척이 연이어 황급히 일본으로 떠났다는 자체 첩보에 의거해 이 배가 시해범들을 실어 날랐을 것이며, 따라서 이것이야 말로 일본 정부가 시해사건에 개입한 증거라고 나름으로 결론을 내린 대목도 있다.사건 직후 각국 공사 앞에서 사바틴이 했던 증언은 영어·프랑스어 등으로 번역되어 각국에 우송되었다. 1895년 발행되던 성 페테르부르그 신문, 루스코에 슬로보 신문, 모스콥스코에 베도 모스티 신문 등은 시해 현장에서 목격한 러시아인 사바틴의 증언과 워베르보고서를 인용하여 연일 이 사건에 깊은 연민을 표시하고 일본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일제 낭인들은 강간을 하고 처참하게 시해한 명성황후를 증거 인멸을 위해 시신을 불태우고 건청궁 동쪽 숲속에 묻어 버렸다. '전쟁도 아닌 평화 시 군대를 동원해
▲웨베르보고서에 있는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친필
궁궐을 습격하고 한나라의 국모를 서슴없이 시해한 사상 유래 없는 만행' 이라고 이 보고서는 밝히고 있는 것이다.
◆ 낭인(浪人)이란
일본에서 낭인이란 일반적으로 깡패나 무뢰한들을 지칭하고 있다. 19세기 말 당시 일제는 정한론을 심봉하고 있던 3류 사무라이들이 조선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하여 조선낭인을 파견하였고, 만주를 비롯한 중국일대에는 광개토태왕비문을 조작한 사코와 같은 대륙 낭인들을 파견하였다.
일제는 밀정으로 파견한 이들을 낭인이라 치부한 것은 일제의 처사를 숨기기 위한 조치였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도 은폐하기 위하여 낭인들의 소행으로 치부하고 말았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동
▲한성신보사 앞에서 기념 촬영한 일본 행동대원 낭인들
원된 낭인들은 이러한 뜻과는 전혀 다르다. 시해에 참가한 낭인들은 군인.경찰도 일부 있었지만 양복과 일본 정통복장을 입고 총과 칼로 무장한 행동하는 재야 정치인으로 자칭 일본의 정신적 지주 역활을 한 지식층들이었다.
이들 낭인들은 메이지(明治)시대 일본의 계몽사상가로 불리는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절대적 영향을 받았다. 후쿠자와는 1872년 '학문의 권장 (勸奬)' 이라는 책 머리말에서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았고 사람 밑에 사람을 만들지 않았다"고 했지만 조선.중국 등 제 아시아 국가들을 '터럭만큼도 도움이 안 되는 악우 (惡友)'로 비하했다. 그리고 그는 일본은 이러한 국가들의 대열에서 벗어나 서양 문명 국가들과 진퇴를 같이하라는 소위 탈아입구론(脫亞入歐論)을 주장했다. 이러한 후쿠자와의 사상은 일본인의 인권은 존중했지만 다른 나라 국민의 인권은 철저히 멸시했고 일본의 대외 침략정책을 강력히 옹호했던 비열한 이중성을 가진 학자였다.
최근 일본은 경제성장으로 배가 부르게 되자 일본인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 1만엔 지폐에 기존 쇼토쿠태자의 초상화를 슬그머니 밀어내고, 이러한 학자적 양심이 없는 후쿠자와의 초상화로 대체시켜 일본 국민들에게 그의 이중성을 심봉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영향으로 오늘날 일본국민성을 논할 때 속(혼네-本音)과 겉(다테마에- 建前)이 완벽하게 다른 ‘무서운’ 일본인으로 고착화시켰다. 어쨌든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했던 낭인들은 이 자의 주장에 충실했으며, 오늘날 일본인들의 평균적인 인식으로 자리잡고 있는 우익의 근간이 되는 자들이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은 낭인들 중 주범 이노우에가 입안하고, 무식한 무장 미우라고로는 행동대장이자 시해 사건의 종범이며, 한성신보사 사장 아다치 겐조는 낭인들을 모으고 동원한 총괄 모집책이었다.
이들 낭인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당시 일본의 내상과 외상을 역임한 정치 실세로 이토우 히로부미와 함께 일본의 정계를 움직인 자
-- 미우라 고로(三浦梧樓)
시해 사건 성공 이후 일본 정치계의 거두로 큰 영향력을 행사함.
-- 아다치 겐조(安達謙藏)
겐조는 구한말 조선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발행하던 한성신보사의 사장이다. 한성신보사라는 것은 창립기금에서부터 모든 운영비를 일본공사관에서 지원하고 있는 일본국가 소유 신문사이다. 한반도에 기자로 위장한 자들을 들어와서 조선정세에 대한 염탐과 정보수집을 한 기관이다. 아다치 겐조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행동대 책임자 중의 한 사람으로 낭인들을 동원하고, 그들에게 행동 지침을 하달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한성 신보사의 기자들은 대부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행동대로 가담했다. 아다치 겐조는 명성황후 시해 성공으로 후일 체신상과 내상(지금의 내무부 장관)을 지냈다.
-- 호리구치 구마이치(掘口九萬二)
행동대원 호리구치 구마이치는 도쿄대 법학부를 졸업하고 사건 후 브라질 전권공사를 역임함.
-- 시바 시로우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작전 참모로 하버드 대학과 펜실베니아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자칭 엘리트다. 시바 시로우는 그 후 일본에서 정치 소설가로 더 큰 명성을 얻게되며 중의원 의원을 수 차례 당선된다.
그 외 스기무라 후카시(杉村濬:공사관 서기), 오카모토 류스노케(岡本柳之助:공사관부무관 겸 조선군부고문), 구스노세 사치히코(楠瀨幸彦:포병중좌), 히라야마 이와히코(平山岩彦), 토우카츠아키(藤勝顯), 하기와라(외무성경찰), 구미모도(한성신보 주필.한학자), 시부다니(통역관), 야마타(신문기자), 니니와(의약품판매상), 사사키(의사), 기구치(신문기자), 무라이(육군대위), 사토(농민), 마쓰무라(교사), 고바야가와 등 총 48명이 참여했으며 시해사건 후 이들은 일본에서 대부분 정치 요직에 발탁되거나 사회적인 부와 명성을 얻게 된다.
1892~1896년까지 약 4년간 권력을 잡기위해 대원군과 명성황후는 경쟁을 하였다.
만약 이 두명이 의기투합하여 일본에 대항했다면 일본에 무참히 짖밟히는일은 없었을지도...
혹은 명성황후가 여우사냥에서 살아남아 좀더 오래살았더라면 러시아와 구미열강을 이용해
일본을 몰아냈을지도 모를일이다.
철의여인 명성황후가 마지막으로 남긴말이 아쉽기만 할뿐이다.
"내 나라가 지금은 힘이없어 너희에게 이런수모를 당한다만 언젠가 부국강병을 이루어 오늘의
빚을 꼭 갚을것이다. 오늘의 이일들을 내 백성들이 어찌 잊겠느냐"
다음검색
댓글
댓글 리스트-
작성자월영혼 작성시간 04.11.07 릴렉스 릴렉스 생각하면 할수록 일본의 만행과 여태 반성하지않는 태도를 생각하면 -_-..정신건강에 대단한 악영향..한번 우리나라 힘강해지면 보자 ㅅㅂㄻ들아...
-
작성자다 가마 작성시간 04.11.07 아직도 친일파가 득실대고 있는한....한국인들은 하늘을 볼 면목이 없습니다. 명성황후가 남긴 마지막 말..부국강병을 이루어 빛을 갚는다..? 그날이 오긴 할런지..
-
작성자슈파이키 작성시간 04.11.07 그런 만행을 저지는 당시의 일본정부도 쳐죽이고 싶을정도로 밉지만 이런 역사를 숨기려고만 하는 지금의 일본정부 역시...그들과 다를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ㅆ 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