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서갱유에 대해 쓰려고 배경 설명에 한 커트를 채우고
한 차례 본론으로 들어가려는 참에, <고사성어 문화답사기> 2편이 배달되었습니다.
지난 봄, 상기 책의 1편을 구해보고 인터넷에 그에 대한 글을 쓴게 있었는데,
우짜다가 그 글이 저자의 눈에 뜨였던 모양입니다.
내 글에 오류가 있다는 저자의 쪽지가 왔길래
감사의 말과 겸해서 질문을 던졌더니... 답과 함께 2권을 보내주신 겁니다.
저자는 이화여대 교수로 계신 강영매(姜姈妹)님.
영: 姈--- 슬기로울 영...
대만 사범대학에서 중문학을 전공하신 분답게 드물게 쓰는 한자로 이름을 지으셨네요,ㅎㅎ
1권은 하남성, 산동성에 관련된 고사성어였는데,
2권은 섬서, 산서성 고사성어 편... 마침 두번째 글이 <분서갱유>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런 즐거울 일이... ㅎㅎ.
분서갱유의 내용은 전문가의 글을 빌려서 간단히 쓰겠습니다.
시황제 34년(BC 213년)... 그러니까 천하를 통일하고 8년이 되었을 때,
전국의 유생들이 군현제에 반대하며, 봉건제 부활을 주장했답니다.
시황제가 함양궁에 군신을 모아놓고 대연회를 베풀었는데
제나라의 박사 순우월(淳于越)이 다시 봉건제를 회복하자고 거론했고요...
승상 이사(李斯)는 법가(法家)로 일관한 사람인데, 분봉에 반대하였고...
더 나아가 진나라의 정치를 비판하는 일체의 행동을 봉쇄할 것을 주장합니다.
이리하여 의약, 점복, 농업 관계 서적을 제외한 모든 서적을 없앨 것을 건의합니다.
진시황은 흔쾌히 오우케이...
그리하여 역사서는 <진기: 秦記>를 제외하고 깡그리 소각...
그외 시경, 서경 등 유학 서적을 30 일내에 모조리 태우도록 합니다.
그리고 내린 법령이 <협서율: 挾書律>... 挾: 낄 협. 書: 글 서. 律: 법률 률(율)...
<옆구리에 책을 끼고 다니면 직이삔다....>인 것으로 해석을 했더니만,
여기의 <협(挾)>자는 <(옆구리에) 끼다>의 뜻이 아니고 <감출 장: 藏>의 뜻이랍니다.
즉, 책을 몰래 감추어 두었다가 걸리면 골로 보내준다... 는 의미랍니다.
이 협서율은 진나라가 망하고도 한~~참 있다가 22년만인 한나라 혜제 4년(BC 191년)에 풀렸답니다.
사실은 협서율이 분서 사건과 직접 관련이 있다는 기록은 없다고 하네요.
분서 사건이 있었던 다음 해, 즉 시황제 35년 (BC 212년)
갱유... 선비들을 구덩이에 묻어 버리는 일이 일어납니다.
진시황은 불로장생을 꿈꾸고, 신선술을 믿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방술사들을 곁에 두고 불로장생 약을 만들어 바치도록 했지요.
그래서 동남동녀 500 인을 삼신산에 보내 불로초를 구해 오도록 했다는 야그를 들으셨지요???
삼신산이란 봉래산(蓬萊山) ·방장산(方丈山) ·영주산(瀛洲山)의 세 산을 말합니다.
우리의 제주도 한라산을 영주산이라고 하여, 서불이란 자가 왔었다고 하는데... 글쎄...
영주(瀛洲)란 말이 "큰 바다 가운데의 땅"이란 뜻이니 제주도를 연상시키기는 합니다.
몇년 전 진용(秦俑)이란 영화가 있었습니다.... 오래 되어 내용은 가물가물한데,
그 소재가 불로초를 구하러 가는 동녀-- 당연히 미녀--와 호위 무사간의 사랑이야기.
그때 이루지 못한 사랑을 20세기에 환생하여 다시 이어가려는 무사...
20세기의 배우로 환생한 미녀는 옛 인연은 모르고 좇고 쫓기는 이야기.
난 재미있게 보았는데도 이젠 줄거리도 가물거립니다,ㅎㅎ
암튼, 진시황 시절의 방술사들 중에 후생(侯生)과 노생(盧生)이란 작자가 있었는데
불로약을 만들겠다고 큰소리를 쳐서 거금을 받아내어, 단(丹)을 만들어 올렸는데...
효험이 안 나타나자 처벌이 두려워 꺼꾸로 진시황을 비방하고 도망.
이 둘을 찾다보니 유생(儒生) 들이 연관됐다는 말도 있고하여
방술사들과 이와 연관이 있는 유생을 합하여 460명을 생매장하여 버립니다.
460명... 전국시대 말기에 진나라와 조나라가 전쟁을 하여
패한 조나라 병사 40만을 생매장 했다는 말이 있는데, 460명은 조족지혈 아닙니까???
아무튼 <분서갱유>란 말은 후대에 유가(儒家)에 의해서 과대포장된 느낌입니다.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은 봉건제도의 모순이 극대화 되어서 생긴 측면이 있으므로
법가사상에 충실했던 진시황은 봉건제를 버리고 중앙집권적인 군현제를 실시한 것인데,
인의와 예악을 중시하던 유가에서는 왕도정치의 이념에서 시황제를 곱게 보지 않고
공자가 흠모하던 주나라의 정치제도인 봉건제의 부활을 계속 고집했으니...살짝 뜨거운 맛을 보여준 것인데,
이후 유가사상이 국가이념으로 자리 잡으니 진시황은 나쁜 넘이 돼 버린 것이지요.
분서갱유 사건은 한나라 시대에 금고문 논쟁(今古文論爭)의 원인이 되는데,
이것도 다음 쉬어가는 기회에 다루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