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대 총선 이슈 연구
10-19. 국제유태자본과 분단원흉 루즈벨트
한국에서의 프랭클린 루즈벨트 평은 대체로 호의적입니다. 한국의 대표적인 보수언론이라고 할 수 있는 월간조선에 등장한
프랭클린
루즈벨트에 관한 기사만 보더라도 잘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인터넷에서 검색해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루즈벨트가
한국인
입장에서는 안타깝게도 분단 원흉이기는 하더라도, 존경스러운 대통령이라는 것입니다.
스탈린, 처칠, 루즈벨트, 아이젠하워 모두 유태인?
http://gall.dcinside.com/list.php?id=worldwar2&no=24665
프랭클린 루즈벨트에 관한 월간조선의 견해
http://blog.naver.com/rosebach?Redirect=Log&logNo=110008772713
그러나 이 글쓰기를 다 읽은 다음에는 어떨까요?
하나, 시어도어 루즈벨트와 프랭클린 루즈벨트
프랭클린 루즈벨트를 이야기하기 전에 시어도어 루즈벨트를 말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아내가
시어도어
루즈벨트와 친척이라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시어도어 루즈벨트를 존경했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역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즈벨트에 관해서는 이미 많은 말씀을 드린 바 있습니다. 그가 러일전쟁과 한일합방의 주역인 국제유태자본 앞잡이로
활동하여
노벨평화상을 받았다고 말입니다.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1897년에 대통령이 된 매킨리가 암살된 후 1901년에 대통령에
오르게
됩니다. 그런데 내가 관심을 보이는 연도는 1897년입니다.
1897
년에는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조선에서는 그해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변모합니다. 명성황후가 죽은 뒤 아관파천을 한 고종이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이름만 바꾼 것이 아니라 광무개혁이라 하여 러일전쟁이 종전될 때까지 근대화 추진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실패합니다. 이유는 이제 여러분들이 잘 알 것입니다. 국제유태자본 때문입니다. 일본에서는 1897년에 금본위제를
실시하고,
교토제국대학을 설립합니다. 독일에서는 디젤박사가 디젤을 만들면서 독일인의 우수한 기술력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영국에서는?
존
콜먼은 말합니다. 300인 위원회가 최초로 결성된 해가 1897년경이라고 합니다. 이 비밀권력기관은 1897년경(이 시기는
스위스
에서 제1회 시오니즘 세계대회가 개최된 시점과 부합됩니다)에 확립되지만, 실질적으로는 그로부터 약 50년 전에 영국
동인도평의회를 계승 발전시켜 활동을 개시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음모의 지배계급 : 300인 위원회 요약
http://blog.daum.net/1985free/5725173
또한 중요한 지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가 재임하던 1907년에 공황이 발생합니다. 1907년 공황은 국제유태자본의 미국
연방준비은행을 만들기 위해 치밀하게 짜놓은 사전 각본의 시작이었던 것입니다. 모건이 공황 전에 유럽을 방문하여
로스차일드와
협의를 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당시 영국은행 금보유고가 바닥이다 등등의 소문이 퍼졌다고 합니다.
1907년 공황과 모건, 그리고 미국 연방준비은행
http://www.lightearth.net/zboard/zboard.php?id=freeboard&no=9515
그리고 연방준비법안을 만들어서 의회에서 통과시켜야 했습니다. 그러자면 대통령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약 80년 전에
앤드류 잭슨 대통령이 국제유태자본이 배후조종해서 의회에서 통과시킨 연방은행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부탁인데 노무현씨와 훌륭한 대통령인 앤드류 잭슨과 비교하지 말아주십시오.
집권하자마자 국제유태자본의 협박에 똥오줌 못 가리고
집권 내내 똥 싼 바지나 입고 있던 노무현씨와 목숨을 걸고 맞서 싸웠던
잭슨과 어디를 감히 비교합니까. 비교하려면 노무현 대
이완용, 이런 식으로 비교하길 바랍니다. 다른 여러 면에서야 마음에
들지 않지만, 딱 이 점에서 만큼은 이명박이 노무현보다
낫습니다.
노무현이 겉으로는 반미하면서 속으로는 알라뷰를 했다면,
이명박은 겉으로는 친미하면서 속으로는 장사꾼 잔머리를 굴리는
바람에 지금 저 고생을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나라의
이익을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이익만을 탐하는데,
우연히 이익이 맞아떨어지는 것이기는 합니다만.)
앤드류 잭슨과 은행과의 싸움
http://blog.naver.com/myelohim?Redirect=Log&logNo=20032506723
아무튼 앤드류 잭슨과 링컨 대통령 덕에 국제유태자본은 1913년까지 영국처럼 연방은행을 소유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해서,
국제유태자본이 다루기 쉬운 대통령을 만들어내어야 하는데, 윌리엄 태프트가 속한 당파가 링컨의 공화당이었던 것입니다.
링컨과 남북전쟁 비사
http://blog.naver.com/dabanggu?Redirect=Log&logNo=100009307155
윌리엄 태프트 대통령은 시어도어 대통령 시절에 부통령을 역임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태프트가 재선에 도전하자 시어도어가
이를
가로막고 나선 것입니다. 명분은 윌리엄 태프트가 도덕적이며 훌륭한 대통령이기는 하지만, 보호관세를 주장하는 등
보수적이고
소극적이라는 이유에서입니다. 해서, 공화당이 분열하였고, 이들이 민주당과 결합하면서 민주당이 의회에서
다수당이 되고 맙니다.
태프트와 윌슨
그런데 남북전쟁 배경과 링컨의 공화당에서 보듯 보호관세 주장은 전통적인 공화당 정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주장은
태프트 대통령이 트러스트 규제안에 노력하고 있는 등 유연한 지도력을 보여주었기에 얼마든지 타협점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오히려
문제는 다른 데에 있었던 것입니다. JP모건이 공황을 일으켰던 목적인 미국 연방준비은행법안을 통과시켜야
하는데, 태프트 대통령이
이에 대해 ‘소극적’이었던 것입니다.
국제유태자본 입장에서 보자면, 얼마나 속이 타는 일이겠습니까. 해서, 시어도어 루즈벨트가
은퇴한다던 약속 밥 말아먹고,
당내 경선에 뛰어듭니다. 그러나 시어도어 루즈벨트의 속셈을 훤히 아는 공화당은 태프트 대통령의
손을 들어주어 그를
낙선시킵니다. 시어도어 루즈벨트가 얼마나 쪽이 팔리겠습니까. 탈당하여 진보당을 만들어서 대선에 나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미국 대선사상 제 3당 후보로 가장 많은 득표를 획득하는 것입니다. 왜 나갔습니까. 이번 대선에 공화당에서
나온
제 3당 후보 밥 바인가가 있다고 합니다. 우스운 점은 공화당에 있을 때와 달리 제 3당 후보로 나와서는 종전 주장을 싹
바꾸고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 후보로 인해 과연 누가 유리하겠습니까. 지난 시기 랄프 네이더 후보 출마로 부시가 단연코
유리했다고들
합니다. 마찬가지로 당시 시어도어 루즈벨트의 출마로 인해 윌슨이 당선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태프트는 3위를 하고
맙니다.
역대 대통령 선거 결과
http://www.mediamob.co.kr/win0419/blog.aspx?id=196166
영국 토니 블레어 정권은 집권하자마자 현 총리이자 당시 재무부장관 브라운을 시켜서 영국 중앙은행인 영란은행
(Bank of
England)을 정부에서 독립시키고 독자적으로 금리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습니다. 그처럼 윌슨이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적극적’으로 한 일이 연방준비법안을 통과시켰던 것입니다. 이 법 통과로 인해 이듬해에 문제의
연방준비은행이라는
국제유태자본은행이 탄생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국제유태자본의 충실한 하인, 윌슨은 제 1차 세계대전에 임하여 유럽에 간여하지 않는다는 먼로주의 때문에 국민 눈치를
보지만
결국 참전을 결정합니다. 국제유태자본이 어디 보통내기입니까. 전쟁하면 공채 팔아서 수수료 챙기고, 무기 팔아서 벌고,
돈 벌
일투성이어서 자신들이 일으킨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초기에 전쟁에 참여하지 않다가 군함 서섹스호 침몰 사건을 일으켜서
전쟁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는 미국-스페인 전쟁 때 메인호 화재 사건을 빌미로 미국이 전쟁을 일으키고, 진주만 공격을 빌미로
전쟁을
벌인 것, 스탈린의 남침으로 유엔군을 구성하여 전쟁한 것 다 같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기만적인 자뻑질의 연속 : 서섹스호 침몰 사건
http://blog.naver.com/bnpassion?Redirect=Log&logNo=100033686148
여기서 보다 핵심으로 갑니다. 영국은 이미 1815년 이후로 군사력이 형편없이 약화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상징적인 예가 미국이
연방은행을 거부하니까 국제유태자본이 열 받아서 영국군을 미국에 보냈는데 앤드류 잭슨한테 참패를 당한 것입니다.
게다가
1860년대에 회심의 역작, 남북전쟁에서도 링컨에게 큰 낭패를 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시점을 전후로 하여
세계 각지에서도
영국의 식민지 경영에 상당한 곤란을 겪습니다. 영국군이 아프리카 수단인들에게 참패를 당하는 것이 예입니다.
따라서 국제유태자본은 세계 전략상 재배치를 결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여, 평화노선의 일본 막부를 붕괴시키고,
임진왜란을 일으켰던 세력을 정권을 잡게 만드는 명치유신을 하게 하여, 조선을 관리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또한 1897년에
이르러서는 미국의 식민지 활동이 본격화되는데, 이것이 모두 국제유태자본의 결정에 따른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당시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필리핀 대 스페인 전쟁에서 그간 관례를 무시하고 개전 선언과 함께 공격을 하여 스페인 함대를
초전박살을 내어서 승기를
잡았습니다. 일본군이 진주만 공격을 한 것은 이에 힌트를 얻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컬럼비아를
침략하는데, 침략하고서는 파나마를 독립시킵니다. 이 조치는 파나마운하를
거저먹겠다는 심뽀 다름 아닐 것입니다.
이런 시어도어 루즈벨트가 러일전쟁 중재했다고 노벨평화상을 받았던 것입니다. 역겹지 않습니까. 그리고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바로 이런
시어도어 루즈벨트를 존경했다는 것입니다. 해서, 글쓰기가 길어 다음 글쓰기에서는 경악스러울 정도로 위선적이며,
악랄한 루즈벨트의
면모를 가감없이 드러내보고자 합니다.
미국 정치는 1897년부터 변화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출처] 국제유태자본과 분단원흉 루즈벨트|작성자 인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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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구름사다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09.02.22 가쓰라 -테프트조약으로 조선과의 조약을 배신하고 주권을 일본에 넘겼던 시어도어 프랭클린이 노벨평화상을 받았다는건 국제유태자본의 명령에 충실한 자들에게는 어떤 보상과 명예도 가능하다는 것을 나타내 주는군요..그런데 남북분단의 원흉인 루즈벨트프랭클린이 바로 시어도어 프랭클린의 친척이라고 하니 이넘들의 종자는 남의나라 파탄내는게 특기인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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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상처받은짐승 작성시간 09.03.13 막연히 알고만 있었던 내용을 구체적으로 올려 주시니 고맙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