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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친일의 상징, 조선귀족들은 해방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

작성자합리주의|작성시간08.03.16|조회수850 목록 댓글 0

친일의 상징, 조선귀족들은 해방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

 

※ 이 글은 <진상(眞相)> 1960년 3월호에 수록된 것으로 과거 일제시대에 '조선귀족'이라는 이름으로 권세와 영화를 누렸던 이들의 그 후 행적을 해방된 지 15년이 되는 시점에서 정리해 놓은 것이다.

 

비록 많은 경우에 개개인의 세밀한 이력까지 추적하지는 못하였고, 그들의 후손이 행방불명되었거나 소식을 알지 못한다고 적어놓은 것이 대부분이지만 그나마 개괄적인 현황을 파악하는데는 그런대로 참고할 만한 내용이라 여겨진다.

 

다만 군데군데 이들을 바라보는 시각이 균형을 찾지 못하고 자주 흐트러진 점이 눈에 거슬리고, 특히 마지막 대목에 이르러 윤치호(尹致昊)를 독립지사인양 묘사한 구절은 명백한 오류라고 하겠다.

 

따라서 이러한 부분만 잘 가려내어 읽고 여기에다 사실관계를 좀 더 보완한다면, 조선귀족들에 관한 기초자료를 정리하는 데는 분명 도움이 되는 글이지 않을까도 싶다.

 

일제한인귀족(日帝韓人貴族)의 근황(近況)

연성숙(延聖淑)

<진상(眞相)> 1960년 3월호

 

1910년 8월 29일, 이 날은 국치일이기도 하지만 또한 일본천황의 소위 칙력으로 일제치하 한국인귀족이 태어난 날이기도 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있듯이 해방된 지 15년을 맞은 오늘날 그들의 생활환경도 엄청나게 변했다.

 

한일합방과 귀족령

 

1910년 8월 29일! 이날은 우리 민족이 일제에게 국권을 빼앗긴 치욕적인 국치의 날인 동시에 일본의 황제 명치(明治)의 소위 칙명이란 명목하에 귀족령(貴族令)이 발포되었던 날이기도 하다.

 

왜정 36년 동안 우리 민족이 일제에게 받은 갖가지의 서러움은 이루 형용할 수가 없지만 간악하고 요사스러운 일제는 자기네들이 저질러 놓은 죄과의 일면을 무마하기 위한 수단방법으로서 소위 이와 같은 사특한 계교를 꾸민 나머지 '한국귀족'을 형성하고 이에 작위(爵位)를 주는 한편 대우와 따라서 막대한 은사금을 주었던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서 일본은 이 나라 민족의 울분을 조금이라도 무마하려고 획책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한국을 강제로 뺏앗은 그날로 소위 허울좋은 귀족령이라는 것을 공포하게 되었으니 비극의 운명은 여기에서도 엿볼 수가 있었다.

 

그때 그날······ 우리 민족은 얼마나 울었던가! 이강공과 이희공을 '공전하(公殿下)'라고 부르게 하였으며 이하 후작, 백작, 자작, 남작 등의 귀족의 작위를 내렸으니 뜻있는 애국지사들은 발을 구르며 머리를 쥐어 뜯으면서까지 나라의 비극에 통탄을 금치를 못하였다.

 

76명의 이들 귀족들을 보고 어떤 사람은

"죽일놈··· 망할놈···"

하며 욕을 마구 퍼붓기까지 하였다. 심지어 이것을 반대하는 군중중에는 돌을 들고 작위를 받은 사람을 찾아 헤매며 위협을 하려고도 하였다.

 

한편 작위를 받은 사람들 중에는 애국적인 행위를 감행한 자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민족의 의분은 어린 아이가 벽을 향하여 공을 던지듯이 아무런 위력도 나타낼 수 없는 반항행위에 불과하였을 뿐이었다.

 

이렇듯 당시의 분위기는 어수선하였던 것이다. 그렇다고 이들 76명이 모두가 작위를 받기를 원했거나 찬성을 한 것은 아니었다. 개중에는 일본정부로부터 작위를 받으라는 통고가 있을 때 "나는 내나라 백성을 위한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하겠지만 그대들의 충신노릇은 죽어도 못하겠다······."

하며 그와 같은 모욕을 받는 것보다 깨끗이 죽음을 선택한 우국지사도 있었으며 작위를 거절하여 평생을 왜놈의 눈총을 받으며 굳세게 지조를 지킨 애국지사도 있었던 것이며 설사 받았다고 해도 그것은 주던지 안주던지 너희들 마음대로 하라는 태도로 내버려 두면서 절개를 지킨 사람들도 적지 않았었다.

 

그러면 일본 정부가 작위를 내렸던 76명은 누구 누구였던가?

 

한국귀족 76명

 

이제 작위가 놓은 순서로 76명의 명단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중에는 작위를 거절하거나 탈작한 사람들도 있다.)

 

후작(候爵) 이재완(李載完), 이재각(李載覺), 이해창(李海昌), 이해승(李海昇), 윤택영(尹澤榮), 박영효(朴泳孝)

백작(伯爵) 이지용(李址鎔), 민영린(閔泳璘), 이완용(李完用)

자작(子爵) 이완용(李完鎔), 이기용(李埼鎔), 박제순(朴齊純), 고영희(高永喜), 조중응(趙重應), 민병석(閔丙奭), 이용직(李容稙), 김윤식(金允植), 권중현(權重顯), 이하영(李夏榮), 이근택(李根澤), 송병준(宋秉畯), 임선준(任善準), 이재곤(李載崑), 윤덕영(尹德榮), 조민희(趙民熙), 이병무(李秉武), 이근명(李根命), 민영규(閔泳奎), 민영소(閔泳韶), 민영휘(閔泳徽), 김성근(金聲根)

남작(男爵) 윤용구(尹用求), 홍순형(洪淳馨), 김석진(金奭鎭), 한창수(韓昌洙), 이근상(李根湘), 조희연(趙羲淵), 박제빈(朴齊斌), 성기운(成岐運), 김춘희(金春熙), 조동희(趙同熙), 박기양(朴箕陽), 김사준(金思濬), 장석주(張錫周), 민상호(閔商鎬), 최석민(崔錫敏), 한규설(韓圭卨), 유길준(兪吉濬), 남정철(南廷哲), 이건하(李乾夏), 이용태(李容泰), 민영달(閔泳達), 민영기(閔泳綺), 이종건(李鍾健), 이봉의(李鳳儀), 윤웅열(尹雄烈), 이근호(李根澔), 김가진(金嘉鎭), 정낙용(鄭洛鎔), 민종묵(閔種默), 이재극(李載克), 이윤용(李允用), 이정로(李正魯), 김영철(金永喆), 김용원(金容元), 김종한(金宗漢), 조정구(趙鼎九), 김학진(金鶴鎭), 박용대(朴容大), 조경호(趙慶鎬), 김사철(金思轍), 김병익(金炳翊), 정한조(鄭漢朝), 이주영(李胄榮), 민병식(閔炳植), 조동윤(趙東潤)

 

생존자 이기용(李埼鎔)씨

 

그런데 이 많은 소위 일본 귀족들 중 현재 생존해있는 사람은 이기용(李埼鎔)씨뿐이다. 그외 몇사람이 생존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행방이 묘연하다. 그의 나이 지금은 70이 넘었지만 말씨도 또렷하고 아직도 매우 건강하다.

 

사변 전에는 이종건(李鍾健)씨가 서울 명륜동에 거주하고 잇어 가끔 말동무가 되었다고 하는데 그 후 이종건씨는 불우하게도 북한인민군에게 붙잡히어 이북으로 끌려갔고 그의 나이가 고령이니 아마도 객사하였으리라고 추측이 되는데 그러고 보니 오로지 그만이 이땅에 살아 있는 셈이 된다.

 

이기용씨는 1889년에 출생하여 젊었을 때 서울서 '수학원 중학과(修學院 中學科)'를 우수한 성적으로 마친 보기 드문 수재였었다.

 

그의 내력과 경력을 살펴보면 유명한 대원군의 형의 손주로서 고종 때 수학원 중학고 시절에 남달리 학과 성적이 우수하여 임금께서 상장을 받은 바도 있었다.

 

이 일로 우리 나라가 망할 때 일제는 그에게 작위를 주었으니 자작(子爵)이었다.

 

그는 작위를 받은 사람 중에서도 가장 연소한 사람이었다.

 

"찾아왔으니 사실대로 말하리다. 나는 그때 나이가 불과 20밖에 안되었고 외국인 집에서 영어를 공부하고 잇던 중이었는데 돌연 합방이 되면서 작위가 내렸다고 하며 돈을 받아 가라고 통고를 하두군······. 내가 시골에 있을 때 마지 못해 대신 딴 사람이 돈을 받아 왔는데 그때 돈으로 2만 5천원을 주었지요."

 

모처럼 찾아간 기자에게 이렇게 말하였는데 몸이 퍽으나 불편한 모양이었다.

 

"어떻게 이곳을 찾아 왔지? 에, 나 3년전에 중품이 걸렸요. 그리고 몸도 아픈데 그만 하지요."

 

이상 더 말을 하고 싶지 않다는 눈치였다. 3년전만 하더라도 그는 정동(貞洞) 일우에서 꽤 큰 집을 쓰면서 살아 온 것이다. 그러다가 점점 가산이 기울어져서 정동집을 팔았다는데 현재 그는 홍제동 부근에 양옥 한채를 짓고 부인을 잃은 몸에 그리 넉넉치 못한 생활을 하는 듯 보였다.

 

앞장을 선 이완용

 

어쨌든 일제가 무서워서 받았던 간에 작위를 받은 사람들은 싫은 것을 억지로 주었건 상당한 은사금이라는 것을 받았었다.

 

그 은사금을 밝히면 대략 이러하다.

 

일제치하인 한국인 귀족은 구한국시대에 명문거족이거나 특별히 뛰어난 사람 그리고 매국행위에 협력한 무리들이었는데 같은 작위를 주면서도 금액은 그들 멋대로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어떤 사람든 급이 후작(候爵)이었으나 의외에도 적은 돈을 받았었고 어떤 사람은 백작(伯爵)이었으나 후작에 가까운 돈을 받았던 것이었다.

 

그런데 일제가 작위별로 최고액을 한정하였던 은사금은 후작의 최가가 32만 원에서 16만 원, 백작 최고가 10만 원, 자작 최고가 5만 원, 남작 최고가 2천 5백 원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에는 엄청난 금액이었기 때문에 일반은 감히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이러한 막대한 금액을 이들에게 뿌림으로서 일제는 호감과 이용을 하려고 획책하엿던 것이었다.

 

아무튼 그때 위의 금액은 굉장히 많은 돈이었다. 그 실례를 방증하는 실화 한토막이 숨어 있다.

 

한일합방 후, 일제는 이들 귀족 이외에 두루 우리 민족을 금전으로 무마하기 위하여 기묘한 전술을 썼던 것이다.

 

즉 구한국 관리로서 종사하던 사람들에게 다소 얼마간의 돈을 준 바 있었다. 그리하여 가난한 관리 한 사람은 이 돈 3백 원을 받아 가지고 관청에서 물러나와 시골서 벼락 부자가 되었다.

 

그는 그때의 돈 3백 원을 방아 가지고 시골에 내려가서 많은 밭을 샀고 또한 집도 사서 시골서 이름난 부자노릇을 하였다는 것이다.

 

이 돈을 일제는 은사공채로 발행해 주었던 것이라고 한다.

"이서방네가 벼락갑부가 되었대."

"아니야 이서방뿐인가! 작위를 받은 사람은 거의 모두가 부자가 됐다면서······."

구석구석에서 혀를 차는 말들이 오고갔다.

그래서 작위를 받아 부자가 되고 대지주가 된 것은 한두사람이 아니었다.

 

그 중에서도 뜻있는 사람의 얼마가를 제외하고는 일제 36년 간에 남부럽지 않은, 아니 남이 부러워 할 여유있는 생활을 영위해 왔었다.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할까, 서글픈 현상이었다고 할까?

 

더욱이 민족의 역적이던 이완용이가 일제에 편승하여 소위 귀족회관(貴族會館)을 조직함으로써 이들 귀족들의 앞장을 서서 야난법석을 쳤었다.

 

한일합방 때에 그도 역시 한국인이었건만 조국을 일제에 넘겨주는데 있어 가장 유공한 충신 노릇을 한 민족의 역적 이완용은 소위 서울 을지로 2가 현 조선전업(朝鮮電業) 자리에 한국귀족회관이란 간판을 버젓이 내어걸고 여전히 친일행위의 최선봉을 맡아 했던 것이니 영원히 매국노의 이름은 벗지 못할 것이다.

 

또한 이완용은 '귀족회관'의 으뜸 노릇을 할 때 조선총독부의 힘을 빌어 귀족들이 받고 있던 소위 은사금 이외에 이들의 생활조로 연불 혹은 한달에 한번씩 다소의 돈을 받게 하였다 한다.

 

그때 귀족회관에서는 비밀리에 돈을 주었던 것이어서 연불에 대하여는 잘 알 수 없지만 한달에 한번씩 주었던 돈만은 한사람에 2백 원씩을 지불하였던 것이라고 한다.

 

이토록 일제치하의 한국인 귀족들은 일시불로 받았던 돈 이외에 연불과 다달이 지불하는 것으로 호강스러운 생활을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일제치하 36년간ㅡㅡ 이들 귀족들의 대부분은 별로 하는 일이 없어도 편안히 놀고 먹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여하간 일제가 표면상으로는 이들 귀족을 지극히 우대하고 보호한 것은 그만한 야심과 목적이 있었던 것은 두말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은 한일합방이 되자마자 미리 이러한 획책을 꾸며 한국귀족들을 마수의 손아귀에 넣어 용신도 못하게 할 뿐더러 마음대로 이용을 하려고 하였음을 더 의심할 바가 아니다.

 

가족들의 근황

 

이토록 지나간 30년 동안을 일제가 베푸는 소위 은사금으로서 호의호식을 하며 양지(陽地)에서 살아 오던 대부분의 귀족들은 그 후 어떻게 되었는가······?

 

해방된 지도 어언 15년이 흘렀고 소위 한국귀족들의 황금시대도 일제의 패망과 더불어 종극의 막을 내리었으니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으며 도한 어떻게 생활하고 있을까?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는데 과연 어찌 되었을까? 여기 이들의 경력과 근황을 더듬어 보기로 한다.

 

이재완(李載完, 후작)= 구한국시대에 궁내부대신(宮內部大臣)을 지낸 바 있고 작위를 받은 후에는 아들과 함게 서울 가회동(嘉會洞)에서 큰집을 스고 살았으나 부자가 모두 사망을 하고 현재는 그 손자가 사진예술인으로 안국동(安國洞)에서 궁색치 않게 살고 있다.

 

이재각(李載覺, 후작)= 해방 전 서울에서 꽤 부유한 생활을 하였던 것인데 사망후 자손조차 없다 한다.

 

윤택영(尹澤榮, 후작)= 구한국 최후의 황제인 순종(純宗)의 장인으로서 일제때 계동(桂洞)서 부유하게 살았으나 그 후 사망을 하여 아들 윤씨가 계동서 1남 2녀를 두고 간신히 직업도 없이 살아 가고 있다.

 

박영효(朴泳孝, 후작)= 세상이 너무나 잘 아는 개화당의 선봉자였었는데 작고하고 현재 손녀인 박여사가 운현궁(雲峴宮)에서 살고 있다.

 

이지용(李址鎔, 백작)= 대원군의 서형으로 치욕의 을사보호조약 때 내부대신으로 있었다. 일제시대 작위를 받은 사람 중에서도 가장 부유하게 살았다는 말도 있는데 사망 후 그 자손조차 행방불명이어서 소식을 알 길이 없다.

 

이완용(李完用, 백작)= 구한국시대의 국무총리로 있음을 기화로 나라를 팔아 먹은 그는 왜정 때 서울 옥인동(玉仁洞)에서 가장 큰집을 쓰며 호강히 지냈으나 신병으로 사망을 하였다. 그의 손자 이병길(李丙吉)은 수년 전에 밀선을 타고 일본에 도피를 하여 오무라(大村)수용소에 갇히게 되자 자기는 이완용의 자손임을 일본당국에 밝히고 제발 살려 달라고 애걸복걸하여 현재 일본에 머무르고 있다고 하는데 선대가 이 민족에 저지른 죄과를 아직까도 뉘우치지 못하는 그 꼴은 가련타고나 할까?

 

이기용(李埼鎔, 자작)= 현재까지 생존해 있는 사람인데 일제 때에는 정동에서 꽤 부유하게 살았으나 재산이 기울어졌음인지 3년 전에 홍제동에 집을 짓고 이사를 하여 그날그날을 사는 모양인데 그는 대원군의 형의 손주인 것이다.

 

이완용(李完鎔, 자작)= 왕족 일가로서 구한국 말엽에 수원(水原)서 군수를 지낸 바 있었고 왜정 때 계동 은언궁(恩彦宮) 주인으로 손꼽는 갑부로 잘 살았는데 슬하에 자손이 없어 쓸쓸히 지내다가 노년에는 양자를 맞아 들인 일도 있었으나 현재 그 양자의 소식마저 분명치 않다.

 

박제순(朴齊純, 자작)= 역시 그도 서울서 남부럽지 않게 잘 살았는데 그 후 사망하였고 아들은 일제 때 중추원 서기관으로 있었다.

 

고영희(高永喜, 자작)= 그의 자손은 현재 알 길이 없고 다만 조카가 잇어 서화로 활약하고 있다.

 

조중응(趙重應, 자작)= 일제 때 퍽 부유하게 살았는데 아들이 현재 서울서 호텔을 경영하고 있다.

 

민병석(閔丙奭, 자작)= 작위를 받은 후 계동서 살아왔으며 현재 슬하에 아들이 있어 서울에 거주하고 있다.

 

이용직(李容稙, 자작)= 과거 문장가로서 서울 평동(平洞)에서 잘 살았는데 그 후 소식이 묘연하다.

 

김윤식(金允植, 자작)= 역시 이도 글을 잘 하였는데 그 후 자손들의 소식조차 알 길이 없다.

 

권중현(權重顯, 자작)= 일제 때 통의동(通義洞)에서 윤택하게 살았고 현재 손자가 있어 한국 고미술협회에서 일하고 있고 거주지는 명륜동(明倫洞)이다.

 

이근택(李根澤, 자작)= 왕가의 종친인데 일가 5대감으로 일제시대에는 호화로운 생활을 하였으나 현재 자손들은 행방불명이다.

 

송병준(宋秉畯, 자작)= 한일합방 당시의 일진회(一進會) 회장으로 있으면서 일제에 협력을 다한 자인데 서울서 호탕하게 살다가 사망을 하엿다고 하는데 자손이 다 있다고는 하나 행방이 자세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재곤(李載崑, 자작)= 일제 때 광나루에 큰 별장도 있어 노경에 호강하게 지냈고 자손들은 세종로(世宗路)에서 부유하게 살고 있다.

 

윤덕영(尹德榮, 자작)= 옥인동(玉仁洞)에서 부유하게 살았고 손자가 현재 서울에서 병원을 경영하고 있다.

 

민영규(閔泳奎, 자작)= 부자가 계동(桂洞)서 잘 살았으며 손자는 해방 후 우리나라에서 해안경비대에 있다가 죽었다.

 

민영휘(閔泳徽, 자작)= 귀족의 자손 중에서도 가장 부호하게 사는 집이 이집 자손들이다. 그는 과거 손꼽는 갑부로 경운동(慶雲洞)에서 웅장한 집을 쓰고 잘 살았다. 현재 아들은 서화에 종사하고 있다.

 

김성근(金聲根, 자작)= 본래부터 잘 살았는데 지금도 그 자손들은 괜찮게 살고 있다. 아들 김씨가 서울모처에서 살고 있다.

 

한창수(韓昌洙, 남작)= 일제의 한국인 귀족 남작 중에서도 가장 부유하게 살았는데 부자가 사망을 한 후 현재 손자가 돈암동에서 잘 살고 있다.

 

이근상(李根湘, 남작)= 이도 남부럽지 않게 서울서 잘 지냈으나 사망 후 자손마저 없다.

 

김춘희(金春熙, 남작)= 부자가 사망을 하고 손자가 서울대학교 교수로 있다.

 

조동윤(趙東潤, 남작)= 일제 때 통의동(通義洞)에서 살았는데 아들이 있었으나 행방불명이다.

 

민영기(閔泳綺, 남작)= 서울 모처에서 잘 살다가 사망하였는데 아들 한명도 이미 사망하였다.

 

이종건(李鍾健, 남작)= 부자가 명륜동(明倫洞)에서 호강하게 살았으나 6.25 후 부자가 납치되어 도무지 무소식이다.

 

정낙용(鄭洛鎔, 남작)= 명륜동(明倫洞)에서 큰집을 쓰고 살았으나 모두 사망하고 현재는 손자가 충남 예산(禮山)에서 살고 있다.

 

이재극(李載克, 남작)= 서울 연지동 일우에서 살았는데 아들이 있었다고 하나 행방이 묘연하다.

 

이윤용(李允用, 남작)= 이완용의 형으로 왜정 때 퍽 잘살았고 아들이 있었으나 이미 사망하였고 손자 한 사람이 이북에 납치되었다.

 

이정로(李正魯, 남작)= 서울 옥수동(玉水洞)에 거주하였고 아들이 있었으나 사망을 하엿고 현재 손자가 정릉(貞陵)에서 살고 있다.

 

김종한(金宗漢, 남작)= 창신동(昌信洞)에 살았는데 현재 남은 자손으로서는 증손자가 효자동(孝子洞)에서 셋방살이를 하면서 교사 노릇을 하고 있다.

 

김학진(金鶴鎭, 남작)= 서울서 거주하고 있었는데 현재에는 자손조차 없다.

 

박용대(朴容大, 남작)= 왜정 때에는 여유있게 살았으나 현재에는 증손자가 미아리에서 근근히 겨우 생활을 하고 있다.

 

김사철(金思轍, 남작)= 과거 수화동 부자로 잘 살았고 아들이 사망한 후 손자마저 해방 후 사망을 하였다.

 

김병익(金炳翊, 남작)= 충남 홍성(洪城)에서 살았는데 손자는 습작을 거절하고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한 바 있었는데 지금은 소식이 묘연하다.

 

정한조(鄭漢朝, 남작)= 서울서 과거에는 잘 살았으며 슬하에는 아들과 손작 있었으나 다 사망하였다.

 

이 외 자작 임선준(任善準), 조민희(趙民熙), 남작 박제빈(朴齊斌), 성기운(成岐運), 박기양(朴箕陽), 장석주(張錫周), 민상호(閔商鎬), 최석민(崔錫敏), 남정철(南廷哲), 이건하(李乾夏), 이용태(李容泰), 이봉의(李鳳儀) 등이 있으나, 이들 자손들은 있는지 없는지 자세한 생활근황을 알 수가 없으니 행방불명의 의문(?)을 남길 수밖에 없다.

 

거의 보편적으로 이들의 생활을 볼 때 조부가 남겨 놓은 재산이 있어 생활에는 별로 걱정을 느끼지 않고 사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이것은 적은 숫자이고 대다수가 지난 날의 부유한 생활에서 가산이 기울어져서 생활곤란을 받는다는 것이 옳을 것만 같다.

 

남의 가산을 객관적으로 추측하는 것은 모순된 일이라고 하지만 실례를 들어 밝힌다면 후작에서 습작을 이어 받은 모씨는 가산이 탕진된 나머지 최근에는 말이 아닐 정도로 생활곤란을 받고 있었다.

 

아무튼 그는 과거에는 생활 걱정이란 해보지 못한 정도를 부유하게 살아왔기 때문에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조차 모를 정도였던 것인데 해방 후 15년이 지난 오늘날 그는 그렇게 많던 재산도 잃고 생의 터전에서 허덕이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부모의 작위를 받고 호강히 지내던 그였으니 특별한 기술이 있을리 없고 하여 고생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렇다고 먹지는 않고 살 수가 없어 행여나 하여 이리저리를 떠돌아 다닌다는 것이다.

 

언젠가 기자가 그를 만났더니 피로한 모습의 얼굴에 남루한 옷을 입고 담배조차 없어 남에게 얻어 피우은 것이었다. 그는 오늘날의 심경을 묻는 기자에게

"부끄럽소······. 할 말이 무엇 있겠습니까? 내 생활이요? 그저 그렇게 살고 있습죠. 정말 부끄럽습니다. 꼭 양지(陽地)에서 음지로 들어온 셈이지요."

하고 말하다가 슬그머니 피해 버리는 것이다.

 

그가 자리를 뜨자 곁에 있던 사람들이 한마디씩 말을 던지었다.

"정말 그렇지요. 그러한 사람들이 오직 저 사람뿐만이 아니지요. 그네들의 생활은 대개가 말이 아니더군요."

"과거에는 일제가 주는 돈을 받아서 잘 살다 저렇게 되었으니 호강하게 자란 그들이 농사를 짓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노동을 하겠습니까?"

그도 그럴 듯한 말이었다.

 

이처럼 그들의 생활은 일제가 패망하면서부터 몰락하엿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개중에는 조부의 재산을 계승하여 잘 사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는 것이다.

 

납북(拉北)된 사람들

 

그 반면 이들 일제치하의 한국인 귀족 중에는 6.25사변 당시 비극이 있었다. 가혹한 6.25의 여파는 이곳에도 불었었는데 북한 괴뢰들으 이들 중 미처 피신치를 못한 이해승(李海昇)씨를 비롯한 몇사람을 납치하여 이북으로 끌고 갔다.

 

예기치 않던 6.25로 갈팡질팡 남하하지를 못하였던 이들은 불우하게도 납치의 몸이 되고 말았다.

 

이중에 있어서 이종건(李鍾健)씨 댁은 더욱 비참하였다. 서울을 침범한 괴뢰군이 이종건씨를 동대문서로 끌고 갔을 때 그의 아들은 아버지의 소식이 궁금하여 자신의 신변마저 위험했음에도 불구하고 모험을 하여 동대문서로 찾아 갔었다.

 

그러자 괴뢰들은 공교롭게도 이종건씨의 아들이라고 하여 같이 북한으로 납치 호송해 갔으니 이 집의 비극은 어디에다 비하랴······?

 

매국노(賣國奴)의 희극(喜劇)

 

그러나 당시 귀족령이 내렸을 때 귀족명에 올린 모두가 그들의 달갑지 않은 혜택을 받은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개중에는 일제가 작위를 내리면서 받으라고 통고할 적에 즉각 그것을 거절한 수절자도 있었으며 혹은 비분을 금치 못하여 독약을 마시고 자살한 사람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그 반면에 열열한 찬성의 뜻을 표명하면서 쌍수를 들어가면서 작위를 받은 자도 있었으나 이것은 극소수에 국한된 경우이고 작위를 받은 사람들의 대부분은 만약 일제의 지시대로 받지 않으면 후환이 두려울까봐 마지못해 받았다고 한다.

 

여하간에 귀족령이라는 것이 내리었을 때의 그 분위기는 각양각색이었다.

 

1910년 8월 29일······. 작위를 내리던 그날ㅡㅡ.

 

그날의 공기는 자못 험악하여서인지? 작위를 받는 집에서는 문을 굳게 잠그고 혹시 어떠한 사태가 발생하지 않은가 하여 마음을 졸이었던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마지 못해 작위를 받은 사람들을 제외하고 일제의 귀족령에 찬성한 자는 이완용, 송병준을 비롯한 몇명이엇다고 하는데 그들 중에는 귀족령이 내리자마치 미리부터 그것을 고대하고나 있었다는 듯이 일본 옷에 게다짝을 끌고 다닌 쓸개 빠진 자도 있었다고 하며 어떤 작자는 그때까지는 한국에서 유례없던 온돌방 아닌 다다미 방을 급조하여 추운 겨울에 덜덜 떨면서도 좋아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어떻게나 일제에게 충성을 바쳤던지 혹자는 딸마저 애써 왜놈에게 출가시킨 사실도 있었다.

 

이렇게 귀족 중에는 국가와 민족을 모르는 어처구니 없는 사람도 있었는가 하면 귀족령이 내리었을 때에 자기에게 내려진 작위가 낮다고 하여 불평을 토하면서 받은 자도 있었다는 것이다.

 

조국을 일제에 빼앗긴 민중들의 서름을 3천리 방방곡곡에서 울음바다를 이루었건만 이들의 귀와 눈에는 그와 같은 정경이 들었거나 보이지 않았던지?

 

작위(爵位) 낮다고 투정질

 

일제에게 작위를 받은 것도 민족에게 수치스러운 일인데 뻔뻔스럽게도 자기가 받은 작위가 낮다고 하며 불평을 토한 나머지 심통을 피우다가 마지못해 그냥 받은 자가 있다. 이 자는 저 유명한 매국노 이완용과 송병준이었다.

 

이들이 도중에 작위가 오르게 된 경위는 이러하다.

 

이완요잉 그는 을사보호조약 때 역적 중 누구보다도 제일 선참으로 도장을 찍은 자인데 한일합방과 더불어 귀족령이 내리자 한국귀족원을 조직하여 일제에 열열한 충신노릇을 하였다. 그는 며느리까지 어쨌다는 추악한 소문이 떠돌은 자인데 이완용이가 매국행위 즉 일본에 충성한 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현재 국민학교에 다니는 아동들도 다 알고 있기에 더 말한 흥미조차 없다.

 

그리고 송병준은 그도 역시 이완용 못지 않게 역적 노릇을 하엿는데 한일합방 당시 소위 일진회를 조직하여 자신이 회장이 되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하엿을 뿐만 아니라 귀족령이 내리었을 때 일진회의 간부로 있음을 기화로 여기에 적극 찬성의 일장기를 들고 미친 듯 광분하던 자이다.

 

그러한 일로 일제는 두중에 이들의 행동에 감사의 뜻을 표한다고 하면서 일작(一爵) 등급의 상장을 수여하였으니 처음에는 백작이었던 이완용은 후작이 되었고 따라서 자작이던 송병준은 백작이 되었다.

 

한편 일제는 도중에 엉뚱하게도 이완용의 아들이었던 이항구(李恒九)에게는 남작의 특전을 부여하였으니 이완용의 세력은 하늘을 충천할 듯 하였었다.

 

그리하여 또 하나의 일제치하의 한국인 귀족이 늘게 되었던 것이다.

 

수절자(守節者)들도 있었다

 

반면 당시 일본황제 명치(明治)가 귀족령을 내려 작위를 받으라는 통고가 내렸을 때

"죽었으면 죽었지······ 너희들이 하는 더러운 벼슬을 가지지는 않는다."

하고 정면으로 항의를 하면서 끝까지 민족의 수절을 굳게 지킨 애국지사들도 있었다.

 

이들 수절자는 윤용구(尹用求), 홍순형(洪淳馨), 김석진(金奭鎭), 한규설(韓圭卨), 유길준(兪吉濬), 민영달(閔泳達), 조정구(趙鼎九), 조경호(趙慶鎬)씨 등인데 혹시 여기에서 누락된 분이 있을지 모르겠다.

 

일제의 명령에 반박을 하엿다고 하여 과거 식민지 통치하의 36년간을 이들의 자손들까지 사상이 불온하다는 구실하에 형사가 미행하면서 못살도록 갖은 위협과 방해를 일삼았었다.

 

그러나 이들 갸륵한 수절자들은 중도의 갖은 수단을 다한 최후정책에도 끝까지 불응하고 나아가서는 조국을 빼앗긴 울분을 참을 길 없어 일제와 용감히 싸우기도 하였었다.

 

그래서 그들은 일제시대에 생활위협을 극도로 받았다.

 

이중에서도 김석진씨와 조정구씨는 귀족령이 내렸을 때 비분을 참다 못한 나머지 마침내는 죽음을 선택하였던 것이었다.

 

조정구(趙鼎九)씨는 자기집 골방에서 자물쇠를 잠구어 놓아 다른 사람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여 놓은 다음 가위로 목을 찔러 죽으려는 순간에 주위 사람들이 이것을 발견코 즉시 치료를 하였기 때문 상처는 심했었으나 죽지는 못하고 자살미수가 되고 말았다.

 

그 후 그는 "내 어이 일본놈들이 들끓는 이당에서 여생을 보내랴······."

하며 탄식으로 나날을 보내던 끝에 마침내 중이 되어 금강산에서 수절을 지키다가 한많은 세상을 이별하였었다.

 

김석진(金奭鎭)씨는 가족 몰래 독약을 마시고 깨끗이 나라를 위하여 자살을 하였으니 그는 나이 18세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이호예형(吏戶禮刑) 오조참판, 홍무관 부제학, 삼도육군통어사(三道陸軍統御使), 형조판서를 역임하였던 구한국 말엽의 유공한 분이었다.

 

그는 순국을 하였으나 현재 그의 자손들은 우리 나라의 유망한 인물로 혁혁한 생활을 하고 있다.

 

그리고 작위를 거절하여 받지를 않았던 윤용구, 유길준시 등도 유공한 인물로서 손꼽는 인물이었으니 그들의 경력을 살펴보면 윤용구(尹用求)씨는 구한국 말엽에 법부대신(法部大臣)과 궁내부대신(宮內部大臣)을 지낸 학자였었다.

 

그도 작위를 거절한 후 골방에 파묻혀 외부와는 일체 면회를 거절하면서 '뒤지'에 사약을 숨겨 놓고 자살하려고 하였던 것이었으나 신명으로 세상을 하직했었다.

 

현재 슬하에는 70이 넘은 딸 윤백영(尹佰榮) 여사가 계동서 살고 있으며 손자도 서울에 살고 있다.

 

유길준(兪吉濬)씨는 국운이 기울어진 구한국 말엽에 궁내부대신과 내무부대신을 역임항면서 나라를 위해 많은 공을 세웠던 인물이었었다. 내무부대신으로 있을 때에 저 유명한 삭발령을 내려 자신이 먼저 삭발을 하면서 개화정책을 부르짖은 사람 중의 한사람이었다.

 

그래서 삭발령을 내렸을 때에 유씨댁에는 상투를 고집하는 완고한 사람들이 작당을 하여 돌을 던진 일도 있었다.

 

그러나 씨는 개명을 부르짖으면서 제일 먼저 미국으로 건너가 3년간 미국을 순회하면서 선진문명을 흡수하였던 것이다.

 

유씨는 고관일 뿐만 아니라 어학자요 또한 시인이기도 하였다. 그의 시 한 수를 소개한다. 이 시는 미국 순시를 끝내고 돌아와 어지러운 시국을 탄식하면서 읊은 것이었다.

 

歲暮終南野  孤燈意轉新 

三年遠遊客  萬里始歸人 

國弱深憂主  家貧倍憤親

梅花伴幽獨  爲報雪中春

 

세월이 덧없이 이해도 가니

이런 생각 저런 생각 잠 못이루네.

3년 동안 딴 나라로 헤매던 몸이

멀리로서 이제 겨우 돌아왔느니

이때문에 나라 약함 근심 더하고

어비 위해 집걱정이 간절하구나.

매화만이 고적함을 알아 주는 듯

찬눈 속에 곱게 곱게 피어 놓다.

 

이렇듯 그의 시는 유명하건만 미국에서 귀국 즉시로 쇄국정부에 의해서 구금된 몸이 되었었다.

 

당시 포도대장이었던 한규설(韓圭卨)씨에 의하여 겨우 사형만은 면하고 7년형을 언도받았었는데 감방에서 벽지를 뜯어 서유견문(西遊見文), 대한문전(大韓文典)을 저술하였으며 후에 서유견문은 우리 나라에서 교과서로 널리 애용했다는 말도 있다.

 

그런데 그가 옥중에 있을 때에도 나라 일을 근심하여 공을 세운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었었다.

 

구한말 당시 부패한 관리로 나라 일을 복잡 다단하였고 또한 국고금도 부족하여 나라는 점차적으로 기울어지기를 시작하였을 때 미국상인들은 상선을 갖고 교역을 하자고 우리 나라 여러 항구에 빈번히 왔었다. 이 때에 나라에서는 고관들 중에서 영어를 잘 아는 사람이 없어 정부에서는 마지 못해 유길준씨를 통역관으로 대신을 했었다 한다.

 

또 한번은 이러한 일도 있었다. 이 틈을 이용하여 미국상인이 우리나라에 전차를 운행하겠다고 하면서 1백만 원의 계약금으로 체결하자고 하였다.

 

그래서 국고금도 고갈상태였기 때문에 정부에서는 이 돈을 받고 계약체결을 하려고 하였던 것이었는데 전차의 실정을 모르는 정부에서는 유길준씨를 면회하여 가부를 타진하게 되었다.

 

그 결과 위기일발을 모면하게 되었으니 천만원은 받아야 되는 것을 약바른 미국상인들은 불과 1백만 원 계약금을 체결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이 일로 나라에서는 3년만에 특사의 은전을 베풀어 주었으나 그 후에는 관직을 사양하고 쓸쓸한 생활을 하였었다.

 

합방 후에는 집에 파묻혀 사서를 저술하여 세월을 보냈으며 지금 그의 손자인 유병덕(兪炳德)씨는 심계원의 과장으로 나라 일에 이바지 하고 있다.

 

한규설(韓圭卨)씨······. 작위를 거절한 사람 중에서도 그는 가장 높은 벼슬에 있으면서 당시 우리 정부에 기여한 공이 많았었다.

 

구한국 말엽에 포도대장을 거쳐 한일합방 당시에는 최고의 벼슬인 국무총리를 역임하였다.

 

그런데 일제가 고의적으로 한일합방을 꿈꾸고 이 땅을 침범할 때 누구보다 이를 강력히 반대한 사람도 바로 한규설씨였다.

 

그래서 일제는 그가 서명치 않는 고로 이모저모로 달래어 보았으나 듣지 않으니 나중에는 위협도 하여 보았으나 송죽 같은 그의 마음이 역적노릇을 할 리가 만무였던 것이다.

 

일본이 수단과 방법을 다해도 끝내 듣지 않으므로 그들은 새로운 계책을 부렸으니 어전회의 때 그를 골방에 구금해 놓고는 대신 역적 이완용을 기용하여 비극의 한일합방이라는 것이 실현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후 한규설씨는 이로 말미암아 가혹한 탄압을 받았었음은 물론 한일합방조약체결된 여러 날 후에도 일본은 기마병을 동원하여 그의 집을 포위하며 감시를 게을리 하지 않았었다.

 

그는 과거 이승만(李承晩) 박사가 국내에서 저명한 우국지사로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극형언도를 받았을 때 정부에 호소하여 이박사의 형을 삭감토록 하는 등 이박사를 적극 후원해 주었던 은인이기도 한 것이다.

 

그의 자손 역시 우리 나라에서 유명한 명사의 한분으로서 육영사업과 상업에 종사하고 있는데 한학수(韓學洙)씨라고 하면 모를 사람이 없으리라.

 

이외에 작위를 거절한 홍순형(洪淳馨)씨나 민영달(閔泳達)씨, 조경호(趙慶鎬)씨들도 모두 과거 우리나라의 유공한 충신들로서 그 이름들은 도저히 잊을 수 없는 분들이다.

 

그렇지만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황금덩어리를 밟아버리고 곧게 굳은 절개를 지켰던 이들 애국충신들은 그 까닭에 일제 36년을 학대와 멸시를 받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중간에도 일제의 달콤한 설유공작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헐벗고 굶주리는 눈에는 황금덩어리가 번쩍거렸다.

 

그러나 이들을 굶주린 창자를 움켜 잡으면서도 결코 그 절개를 굽히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그들도 지하의 고인이 되고 말았지만은 광복된 조국을 얼마나 기뻐할 것인가?

 

이밖에도 독립운동과 혹은 불의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작위를 버리거나 상실당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중간에 호화로운 생활에 실증을 느꼈던지 몰래 아편을 먹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조금씩 먹던 아편이 고질이 되어 결국 아편중독자가 되고 말았는데 이 사실을 안 일제는 즉각 그를 탈작시켰던 것이다.

 

이래서 아편을 피우다가 귀족벼슬을 잃고 말았지마는 그의 자손은 훌륭하여 아들은 일제 때 노령에서 독립운동을 한 바 있었으며 손자는 현재 서울 모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

 

한편 윤웅렬(尹雄烈), 김가진(金嘉鎭)의 두 분은 중간에 독립운동을 하다가 탈작을 당하였는데 김가진씨는 상해임시정부에서 활약타가 탈작을 당했었고, 윤웅렬씨는 그의 아들대에 와서 당시 조선총독이던 테라우치(寺內)를 암살음모하였다는 '105인사건'으로 말미암아 탈작되고 말았었다. 이 분은 본래부터 작위를 바라지도 않았었다.

 

특히 윤치호(尹致昊)씨는 열렬한 항일투사로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이 많은데 민족운동을 하는 중 '105인사건'의 주모자로 일경에 피체되어 허구한 날을 형무소에서 보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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