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의자신문조서(제1회)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피의자 성원경[成元慶]
右 반민법 위반 피의사건에 관하여 4282년[1949] 8월 3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서 서기 김윤현[金潤顯]을 입회시키고 피의자에 대하여 신문함이 如左함.
문 성명, 연령, 신분, 직업, 주거 及 본적지는 如何.
답 성명 성원경, 연령 당 59세, 신분 양반, 직업 지주
주거 서울市 東大門區 敦岩洞 458의 228
본적 忠淸南道 禮山郡 禮山邑 香泉里136-1
출생지 同道 牙山郡 道高面 農隱里 번지不詳
문 작위, 훈장, 기장을 受하고 연금, 은급을 受하여 又는 공무원이 아닌가.
답 해당사항 없습니다.
문 于今것 형사처분, 기소유예 又는 훈계방면 등을 受한 사실유무
답 해당사항 없습니다.
문 학력 及 경력은 如何.
답 학력 단기 4243년[1910](20세時) 서울 隆熙學校( 中央學校前身) 졸
4251년[1918](28세時) 東京 中央大學 政經科 專門部 졸
경력 단기 4251년[1918] 湖西銀行行員으로 취직
단기 4273년[1940] 同行 지배인으로 퇴직
단기 4273년[1940] 忠南製絲會社 전무 취체역으로 취임
단기 4273년[1940] 同社 사장으로 사임
敵政 大正 12년[1923] 민선 도평의회원 당선(天安郡)
敵政 대정 15년[1926] 同(천안군)
敵政 소화 3년[1928] 同道會 의원 당선(禮山郡)
敵政 소화 7년[1932] 同道會 의원 당선(同)
敵政 소화 11년[1936] 중추원 참의원 被任
문 종교 及 정당관계는 如何.
답 신앙하는 종교는 없습니다. 정당관계 없습니다.
문 재산 及 생활상황은 如何.
답 부동산 토지 약 15만평(시가 약 3백만원), 건물 瓦家 3동80간(시가 약 6백만원), 가구 시가 약 1백만원, 계 약 1천만원. 가족 12인, 모(65), 처(45), 長子婦(42), 2남(27), 2남처(23), 3남(23), 4남(21), 5남(18), 2녀(23), 3녀(19), 손(19).
생활정도 중류 이상, 연수입 30만원
玆而 피의사건을 고하고 其 사건에 대하여 진술할 事의 유무를 問한 즉 피의자는 左와 如히 대답함.
문 隆熙學校의 교과목 如何.
답 기구의 차이는 있을지나 대개 현행 중학 정도와 흡사합니다.
문 일어로 학습하였던가.
답 약간 학습하였으나 학생들이 배일사상이 농후하였던 시절인 만큼 대체로 학습하려고 노력치 않았습니다.
문 서울에도 전문 정도의 기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渡日하여 중앙대학에 입학한 동기 如何.
답 서울에 기관이 있었다 하나 각항 시설이 불충분할뿐더러 훌륭한 교사도 없었던 관계로 洋行 진학하려 하였으나 가정에서 불허함으로 近地를 택한 것이 渡日하게 되었습니다.
문 정치경제과에 입학하게 된 동기 如何.
답 원래 정치학의 원리에 있어서는 作者의 如何에 불구하고 변할리 없고, 또 당시 가정에서도 계통적으로 실업 방면에 등한하였을 만큼 이 방면을 희망하게 된 것입니다.
문 그 당시 양반의 遺裔요, 자산이 넉넉하면 대개가 5백년간 인습에 의하여 문과를 선택할 것이 아닌가.
답 첫째는 정치학에 흥미가 있었던 것이고 만일 時 불리하더라도 경제학을 전공해두면 실업방면에 바로 진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막연한 생각으로 정경과에 입학한 것입니다.
문 그러면 졸업 후 즉시 은행으로 취직한 것은 정치 방면에 愛想을 잃은 까닭인가.
답 정치 방면에서 특히 애상을 잃은 것도 아니지만 관리되기는 싫고 또 가업이 은행업인 만큼 가업을 계승하여 취직케 된 것입니다.
문 한일합방 당시 如何한 감상을 가졌던가.
답 怨憤慷慨하고 통탄을 不禁하며 혹은 이재명[李載明]이가 이완용[李完用]을 자살하려듯 안중근[安重根]이가 伊藤博文이를 암살하듯, 그런 일들을 모방하려고 하였습니다.
문 직접 행동을 한 일은 없는가.
답 그 당시 청년학생층의 존경을 받고 있던 선배로서 대종교의 시조인 나철[羅喆](仁榮)씨, 전총리 김홍집[金弘集]씨의 재종손인 김교헌[金敎獻]씨 대한매일신보의 양기탁[梁起鐸]씨, 천도교의 양한묵[梁漢黙]씨, 실업계의 신규식[申奎植]씨이었었는데, 그분들의 의사가 지금 청년들이 궐기해 보았자 희생만 많고 공은 적을 터이니 실력을 기르기 위하여 열심히 공부하라는 훈계이었으므로 직접 행동은 않았습니다.
문 당시 국정으로 보아 이완용이 취한 태도를 어떻게 보는가.
답 당시 국정의 혼란하여 이완용이가 매국치 않더라도 독립이 존속되었으리라고는 보증 못하나 그렇다고 총리대신으로 있으면서 국세를 만회하려고는 않고 매국한 역적 이완용이야 물론 죽일 놈이라고 노리고 있었지요.
문 己未運動 당시 어디서 무엇을 하였던가.
답 禮山서 湖西銀行 행원으로 있었습니다.
문 그 당시 피의자가 취한 태도 如何.
답 2월 중에 중앙에서 여운일[呂運一](故 여운형[呂運亨]氏 종제) 동지가 내방하여 3월 중에 중앙에서 一大 民族運動을 전개할테니 가담하라고 권해 왔으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가담 못하고 말았습니다.
문 여러 가지 사정이란 무슨 사정인가.
답 嚴視時下요. 가업이 있고 한 관계 말입니다.
문 솔직히 말하자면 保家庭安身命이 상책이요, 국가니 민족이니 忘念했단 말이 아닌가.
답 그렇게 보아도 할 수 없습니다.
문 己未 이후에도 민족운동에 관여한 일은 전연 없던가.
답 직접으로 관여한 일은 없고 간접으로 東亞日報․ 朝鮮日報 及 時代日報 등 수지 안 맞는 신문에 물질적 원조한 일은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그 관계로 「排日新聞에 부정대부한다」고 재무국에 불려서 문책받은 일이 수차 있었습니다.
문 제1차로 天安郡서 도평의회원으로 입후보한 동기 如何.
답 기미운동 이후 齋藤이가 소위 문화정치의 第1階段으로 민간의 여론을 듣자고 각도에 평의원을 두게 되었으나 내심에 「이놈들 역시 朝三暮四의 기만정책일 테지」하고 제1차에는 출마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조선에서 총독정치가 갑자기 물러갈 것도 같지 않으니, 그나마라도 발언권을 얻어 만일이라도 시정함만 같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제2차 때 출마하여 당선된 것입니다.
문 어떠한 방법으로 선거운동을 하였던가.
답 주로 운동원이 호별방문하였을 뿐 직접 운동은 한 일이 없고 소위 요주의인물이라고 하여 군경의 방해공작이 심하였으나, 그러면 그럴수록 민족진영에서는 반동적으로 궐기 응원해 주었으므로 무난히 당선되었습니다.
문 제1회 당선 후 주로 어떠한 발언을 하였는가.
답 비교적 발언이 많았던 만큼 일일히 기억 못합니다만은 기본정신만은 언제든지 일관하였습니다. 즉 「구속이 심한 조선인의 입장으로 도평의회원에게 허여된 최대한의 권리를 발휘하여 민족을 위하여 주장하여야하고 투쟁하여야 할 것」은 철두철미 발언하였습니다. 그 期의 일로 지금까지 기억에 남은 것은 그네들 정책이 교육은 모조록 경시하고 勸業에 주력을 쓰는 정책이었었습니다. 그때 교육비는 일반경영비도 물론 부족하였으려니와 학년연장비의 計上이 없으므로 교육비 증액의 필요를 통감하고 勸業豫算을 삭감하여 교육비로 증액할 것을 呼說舌戰하여 필경 요구대로 수정시켜 통과시킨 일이 있습니다.
右 본인에게 讀聞시킨바 相違가 無하다 하고 서명, 날인함.
공술자 성원경 ㊞
단기 4282년[1949] 8월 3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충남도조사부 조사관 정헌극[鄭憲亟] ㊞
입회인 서기관 김윤현 ㊞
피의자 성원경[成元慶]
右 반민법 위반 피의사건에 관하여 4282년[1949] 8월 3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서 서기 김윤현[金潤顯]을 입회시키고 피의자에 대하여 신문함이 如左함.
문 성명, 연령, 신분, 직업, 주거 及 본적지는 如何.
답 성명 성원경, 연령 당 59세, 신분 양반, 직업 지주
주거 서울市 東大門區 敦岩洞 458의 228
본적 忠淸南道 禮山郡 禮山邑 香泉里136-1
출생지 同道 牙山郡 道高面 農隱里 번지不詳
문 작위, 훈장, 기장을 受하고 연금, 은급을 受하여 又는 공무원이 아닌가.
답 해당사항 없습니다.
문 于今것 형사처분, 기소유예 又는 훈계방면 등을 受한 사실유무
답 해당사항 없습니다.
문 학력 及 경력은 如何.
답 학력 단기 4243년[1910](20세時) 서울 隆熙學校( 中央學校前身) 졸
4251년[1918](28세時) 東京 中央大學 政經科 專門部 졸
경력 단기 4251년[1918] 湖西銀行行員으로 취직
단기 4273년[1940] 同行 지배인으로 퇴직
단기 4273년[1940] 忠南製絲會社 전무 취체역으로 취임
단기 4273년[1940] 同社 사장으로 사임
敵政 大正 12년[1923] 민선 도평의회원 당선(天安郡)
敵政 대정 15년[1926] 同(천안군)
敵政 소화 3년[1928] 同道會 의원 당선(禮山郡)
敵政 소화 7년[1932] 同道會 의원 당선(同)
敵政 소화 11년[1936] 중추원 참의원 被任
문 종교 及 정당관계는 如何.
답 신앙하는 종교는 없습니다. 정당관계 없습니다.
문 재산 及 생활상황은 如何.
답 부동산 토지 약 15만평(시가 약 3백만원), 건물 瓦家 3동80간(시가 약 6백만원), 가구 시가 약 1백만원, 계 약 1천만원. 가족 12인, 모(65), 처(45), 長子婦(42), 2남(27), 2남처(23), 3남(23), 4남(21), 5남(18), 2녀(23), 3녀(19), 손(19).
생활정도 중류 이상, 연수입 30만원
玆而 피의사건을 고하고 其 사건에 대하여 진술할 事의 유무를 問한 즉 피의자는 左와 如히 대답함.
문 隆熙學校의 교과목 如何.
답 기구의 차이는 있을지나 대개 현행 중학 정도와 흡사합니다.
문 일어로 학습하였던가.
답 약간 학습하였으나 학생들이 배일사상이 농후하였던 시절인 만큼 대체로 학습하려고 노력치 않았습니다.
문 서울에도 전문 정도의 기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渡日하여 중앙대학에 입학한 동기 如何.
답 서울에 기관이 있었다 하나 각항 시설이 불충분할뿐더러 훌륭한 교사도 없었던 관계로 洋行 진학하려 하였으나 가정에서 불허함으로 近地를 택한 것이 渡日하게 되었습니다.
문 정치경제과에 입학하게 된 동기 如何.
답 원래 정치학의 원리에 있어서는 作者의 如何에 불구하고 변할리 없고, 또 당시 가정에서도 계통적으로 실업 방면에 등한하였을 만큼 이 방면을 희망하게 된 것입니다.
문 그 당시 양반의 遺裔요, 자산이 넉넉하면 대개가 5백년간 인습에 의하여 문과를 선택할 것이 아닌가.
답 첫째는 정치학에 흥미가 있었던 것이고 만일 時 불리하더라도 경제학을 전공해두면 실업방면에 바로 진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막연한 생각으로 정경과에 입학한 것입니다.
문 그러면 졸업 후 즉시 은행으로 취직한 것은 정치 방면에 愛想을 잃은 까닭인가.
답 정치 방면에서 특히 애상을 잃은 것도 아니지만 관리되기는 싫고 또 가업이 은행업인 만큼 가업을 계승하여 취직케 된 것입니다.
문 한일합방 당시 如何한 감상을 가졌던가.
답 怨憤慷慨하고 통탄을 不禁하며 혹은 이재명[李載明]이가 이완용[李完用]을 자살하려듯 안중근[安重根]이가 伊藤博文이를 암살하듯, 그런 일들을 모방하려고 하였습니다.
문 직접 행동을 한 일은 없는가.
답 그 당시 청년학생층의 존경을 받고 있던 선배로서 대종교의 시조인 나철[羅喆](仁榮)씨, 전총리 김홍집[金弘集]씨의 재종손인 김교헌[金敎獻]씨 대한매일신보의 양기탁[梁起鐸]씨, 천도교의 양한묵[梁漢黙]씨, 실업계의 신규식[申奎植]씨이었었는데, 그분들의 의사가 지금 청년들이 궐기해 보았자 희생만 많고 공은 적을 터이니 실력을 기르기 위하여 열심히 공부하라는 훈계이었으므로 직접 행동은 않았습니다.
문 당시 국정으로 보아 이완용이 취한 태도를 어떻게 보는가.
답 당시 국정의 혼란하여 이완용이가 매국치 않더라도 독립이 존속되었으리라고는 보증 못하나 그렇다고 총리대신으로 있으면서 국세를 만회하려고는 않고 매국한 역적 이완용이야 물론 죽일 놈이라고 노리고 있었지요.
문 己未運動 당시 어디서 무엇을 하였던가.
답 禮山서 湖西銀行 행원으로 있었습니다.
문 그 당시 피의자가 취한 태도 如何.
답 2월 중에 중앙에서 여운일[呂運一](故 여운형[呂運亨]氏 종제) 동지가 내방하여 3월 중에 중앙에서 一大 民族運動을 전개할테니 가담하라고 권해 왔으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가담 못하고 말았습니다.
문 여러 가지 사정이란 무슨 사정인가.
답 嚴視時下요. 가업이 있고 한 관계 말입니다.
문 솔직히 말하자면 保家庭安身命이 상책이요, 국가니 민족이니 忘念했단 말이 아닌가.
답 그렇게 보아도 할 수 없습니다.
문 己未 이후에도 민족운동에 관여한 일은 전연 없던가.
답 직접으로 관여한 일은 없고 간접으로 東亞日報․ 朝鮮日報 及 時代日報 등 수지 안 맞는 신문에 물질적 원조한 일은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그 관계로 「排日新聞에 부정대부한다」고 재무국에 불려서 문책받은 일이 수차 있었습니다.
문 제1차로 天安郡서 도평의회원으로 입후보한 동기 如何.
답 기미운동 이후 齋藤이가 소위 문화정치의 第1階段으로 민간의 여론을 듣자고 각도에 평의원을 두게 되었으나 내심에 「이놈들 역시 朝三暮四의 기만정책일 테지」하고 제1차에는 출마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조선에서 총독정치가 갑자기 물러갈 것도 같지 않으니, 그나마라도 발언권을 얻어 만일이라도 시정함만 같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제2차 때 출마하여 당선된 것입니다.
문 어떠한 방법으로 선거운동을 하였던가.
답 주로 운동원이 호별방문하였을 뿐 직접 운동은 한 일이 없고 소위 요주의인물이라고 하여 군경의 방해공작이 심하였으나, 그러면 그럴수록 민족진영에서는 반동적으로 궐기 응원해 주었으므로 무난히 당선되었습니다.
문 제1회 당선 후 주로 어떠한 발언을 하였는가.
답 비교적 발언이 많았던 만큼 일일히 기억 못합니다만은 기본정신만은 언제든지 일관하였습니다. 즉 「구속이 심한 조선인의 입장으로 도평의회원에게 허여된 최대한의 권리를 발휘하여 민족을 위하여 주장하여야하고 투쟁하여야 할 것」은 철두철미 발언하였습니다. 그 期의 일로 지금까지 기억에 남은 것은 그네들 정책이 교육은 모조록 경시하고 勸業에 주력을 쓰는 정책이었었습니다. 그때 교육비는 일반경영비도 물론 부족하였으려니와 학년연장비의 計上이 없으므로 교육비 증액의 필요를 통감하고 勸業豫算을 삭감하여 교육비로 증액할 것을 呼說舌戰하여 필경 요구대로 수정시켜 통과시킨 일이 있습니다.
右 본인에게 讀聞시킨바 相違가 無하다 하고 서명, 날인함.
공술자 성원경 ㊞
단기 4282년[1949] 8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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