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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만행기록사진】][미성년자,임산부 클릭 금지][일제 식민지 시절의 사진 모음

작성자★혁명가☆|작성시간07.01.15|조회수1,720 목록 댓글 8
애국지사들의 순국


전국 곳곳에 있는 애국지사들의 순국현장.

수배된 의병들


경무분견대 앞. 의병들을 현상 수배하는 공고가 붙어 있다.

검진소에 끌려가는 위안부들


검진소에 끌려가는 일본군 위안부들.

여순 법정에서 공판을 받고 있는 안중근 의사


1910년 2월. 뤼순법정에서 공판을 받고 있는 안중근 의사. 옆에는 안 의사의 동지 우덕순, 조도순, 유동하.

형장으로 향하는 안중근 의사


만주 땅 뤼순에서 맞이한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아침. 안 의사가 마차에 실려 형장으로 이송되고 있다.

처형되는 간도의 조선인


처형되는 간도의 조선인들.

좁은 갱도에서 탄을 캐고 있는 조선인 광부


좁은 갱도에 누워 곡괭이로 탄을 캐고 있는 한국인 광부. 갱 속이 워낙 좁아 탄을 캐려면 누워서 작업할 수밖에 없다.

관동대지진을 묘사한 북한의 기록화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을 학살하는 일본인들. 북한 기록화다.

일본 전역에 방치된 한국인들의 유해


일본 전역에 방치된 한국인들의 유해. 현재도 우리 동포 30만여 명의 유해가 일본에 있다.

일제의 날조극에 희생된 조선인들


1911년 9월 신민회 주동인물을 포함해 서북지방 민족주의자 700명가량이 데라우치 총독 암살 음모를 꾸몄다는 혐의로 검거됐다. 그 뒤 1차 공판에서 이 중 105인에게 실형이 언도됐다.

의병


조선 의병들의 모습.

근로봉사에 동원된 소년들


근로봉사에 동원된 조선 소년들이 노역을 하고 있다.

 

일제 식민기의 근로 봉사대



1930년대 사진으로 동덕고등여학교의 자전차 부대 사열장면



 



1930년대 동덕고등여학교 학생들의 근로보국대 활동사진



 



이화여자고등학교 근로 보국대 감자 캐기(1944-청평)
http://www.ewha.hs.kr/history/oldalbum/link/album4/ab4_11.html



 



1940년대 동래고등학교 근로보국대의 모습
http://www.donggoya.net/product/product_act.html



 



1942년 이후의 동래고등학교 일제하의 강제 근로 봉사 작업광경
http://www.donggoya.net/product/product_act.html



 



경북기독전보근로봉사대
강제 노동에 동원된 목회자들 (1944년)
http://kcm.co.kr/korchur/chpic/1944-2.html



 



감리교평안교구 근로보국대
목회자를 노역장으로 끌어내기 위하여 1944년 조직되었다.
http://kcm.co.kr/korchur/chpic/1944-1.html



 



항만 하역연성대
http://user.chollian.net/~jkl1/hisa/ilja2.htm

근로보국대생활 수료증 - 보러가기



조선징용문답 - 황토문화 자료실에서...

이 책은 1944년 매일신보사에서 일본어와 한국어로 발행한 책으로 조선인의 강제 징용을 합리화하려는 문답식의 해설서이다. 일제는 1938년에 국가 총동원법을 제정하고, 1939년에는 국민 징용령을 공포하였다 . 그러나 조선에서는 한민족의 반발을 우려하여 징용제를 즉시 시행하지 않고, 모집 형식의 노무 동원 계 획을 실시하였다. 1941년에 일제는 국민 근무 보국 협력령을 시행하여 노동력 동원을 더욱 강력히 시행하 였고, 1942년에는 대규모의 국민 동원 계획을 세우고 근로 보국대라는 이름으로 조선인을 강제 동원하였 다.

1944년에는 국민 징용령에 의하여 강제 연행 방법으로 징용제를 시행하였다. 징용으로 끌려간 한국인 은 일본 각지의 탄광, 수력발전과 철도 등의 공사장, 군사 공장 등에서 참혹하게 중노동으로 혹사를 당하 였다. 일제에 의해 일본으로 강제로 연행된 한국인 노무자 수는 1939∼1945년 사이에 약 113만 명에 이르 렀다. 또한 일제는 1944년에 여자 정신대 근로령을 공포하고, 12∼40세의 미혼 여성들 수십만 명을 군수 공장이나 전선으로 연행하여 인간의 존엄성을 무참히 짓밟았으니 천추만대 일제의 만행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근로보국대

중일전쟁 후 조선인 노동력 수탈을 위해 일제가 강제연행하여 만든 조직.

근로보국대는 1941년 '국민근로보국령'에 의해 편성된 것으로 철도·도로·비행장 및 신사(神社)의 건립 ·확장공사에 동원되었다. 각종 직장보국대를 비롯하여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고등과에서 전문학교 ·중등학교 고학년에 이르는 학도보국대, 형무소 재소자들로 구성된 남방파견보국대 및 농민들로 조직된 강제노역보국대 등이 있었다.

농민보국대의 경우 징용·징발·징병에서 제외된 사람들이 다시 이에 강제연행되었다. 근로보국대 형식으 로 강제연행된 조선인의 숫자는 1938~44년까지 약 762만 명 정도였다.



일본 군부파시스트는

1929년 10월 뉴욕 증권시장의 주가폭락을 계기로 세계가 경제공황에 빠졌다. 세계대공황은 미국, 영국, 프랑스에 비해 취약한 일본 경제에 더 큰 타격을 주었다.

일제는 경제적 위그를 돌파하기 위한 일환으로 만주침략을 개시하면서 조선을 침략전쟁의 전진기지로 이 용하는 동시에 독점자본의 수탈을 안정적으로 보장하려고 했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일제가 세계대공황으로 인한 손실을 떠넘기는 데 대응하여 민족해방운동이 고조되었다 .

이에 일제는 문화통치의 허울을 벗어던지고 민족·4계급분열정책을 강화하는 한편 민족해방운동을 무자비 하게 탄압하는 파쇼적 지배정책을 펼쳐나갔다. 그 결과 1930~35년 사상사건으로 피검된 사람의 수가 2만여 명에 달했으며, 1930년 한 해에만 2,385건의 각종 집회가 금지되거나 제한·해산되었다. 특히 1930년대 전반기에 급속하게 발전하던 혁명적 농민조합운동·노동조합운동은 일제의 집중적인 탄압 을 받았다.

농가경제가 악화되어 농민들이 고향을 떠나 농업노동자가 되거나 화전민이 되었으며 만주, 일본 등지로 유랑했다.

만주와 일본으로 이주한 조선인의 수가 1925~27년 12만 6천 명에서 1933~35년 33만 2천 명으로 2.6배 이 상 증가했다.

1936년 일본에 체류한 조선인은 78만 명, 만주에 체류한 조선인은 93만 명에 이르렀다. 일본거주 조선인들은 대부분 토목, 건축, 항만 공사장과 광산 등지에서 일했으며, 공장노동자가 된 경우 에도 작업환경이 열악한 중소공장에서 민족적·계급적 차별을 받았다. 만주거주 조선인들도 일제 자본과 중국인 지주에 의해 자본주의적·봉건적 수탈을 당했다.

1930년에 접어들면서 노동자·농민의 투쟁은 전례 없이 고양되었다. 1926년 17건에 불과하던 소작쟁의는 1931년 57건으로 늘었으며 노동쟁의도 같은 기간에 85건에서 201건으 로 급증했다.

대중운동이 고양된 직접적인 원인은 세계대공황에 다른 노동자와 농민의 경제적 파탄에 있었지만, 1920년 대부터 급속히 증가해온 대중조직도 운동의 고양에 크게 이바지했다. 특히 1930년 말경부터 본격화된 신간회, 근우회, 청년총동맹의 해소과정에서 계급운동 강화방침이 결의됨 에 따라 농민조합과 노동조합이 각지에 새로 결성되거나 강화되었다.

1929년경부터 활발한 공산당재건운동을 벌인 조선공산주의자들은 1931년 말경부터는 혁명적 농민조합과 노동조합을 먼저 건설하고 이 과정에서 축적된 역량을 토대로 공산당을 재건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1930년대에 조직된 경성콩그룹, 전북공산주의자협의회, 왜관공산주의자협의회 등 수십 개에 달하는 지역 단위의 공산주의자 조직은 대체로 이런 방침에 따라 운동을 전개했다.

일본 군부파시스트는 중국 내 항일투쟁의 격화 등으로 일본·만주 블록 경제체제가 심각한 위협을 받자 독점자본과 동맹 체제를 강화하고 1937년 7월 중국을 침략했다. 이들은 반체제적인 노동자와 지식인들을 탄압하는 한편, 국가체제를 급격히 전시총동원체제로 전환했다. 일제는 임시자금조정법(1937), 국가총동원법(1938) 등의 법령을 제정 공포함으로써 국가의 모든 영역에 걸쳐 강력한 파쇼적 통제력을 행사했다. 나아가 1940년 9월 독일, 이탈리아와 3국 동맹을 체결했으며 1941년에는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2차 세계대 전에 가담했다.

일제는 1936년 8월 군부파시스트인 미나미南次郞를 신임 총독으로 파견하는 한편, 조선민중을 철저히 통 제하는 일에 착수했다.

이를 위하여 시국계몽운동을 벌이는 동시에 경찰력을 증강하고 그 기구를 개편·강화했다. 1938년에는 조선의 인적·물적 자원을 침략전쟁에 동원하기 위하여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을 조직했다. 일제는 조선민중을 강제 연행하여 공사장, 군수공장, 전쟁터 등지로 내몰았다.

1939년에 공포된 국민징용령은 그를 위한 법적 장치였다. 처음에는 민족적 반항을 우려하여 모집형식을 취했지만, 노동력 부족현상이 지속되자 강제로 연행해가기 시작했다.

태평양전쟁이 개시된 후에는 지역 유지와 관리·경찰 등 모든 행정력을 총동원하여 근로보국대와 정신대 등의 허울 아래 공공연하게 납치, 연행했다. 강제 연행된 조선인은 광산, 발전소, 도로공사장, 군사기지 공사장 등에서 노동자나 포로감시원, 군 위안 부 등이 되어 살인적인 착취와 학대에 시달렸다.

1939년 이후 일제가 가제연행해간 인원은 한반도 내에 480만 명, 일본열도에 152만 명, 군대요원으로 20~30만 명, 군 위안부 14만 명 등 총 700여만 명에 달했다.
▲ 김광우의 <일본 군부파시스트는>

 

◇ 남양군도로 이동 중 덕수궁 인근에서 가족과 상봉하는 장면 ⓒ 끼뉴스

8.15 광복절이 다가오는 가운데 경기도가 일제강점기 때 우리 민족을 징용했던 내용을 생생히 담은 사진들을 공개했다.

60여년 만에 최초로 공개되는 사진들은 일제강점 때 군인, 노무자 등으로 강제 동원돼 노역하던 모습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이들 사진들은 만주, 일본 본토, 북해도, 남양군도(필리핀, 뉴기니아 등), 사할린 등에 징용된 당시 상황들이 촬영된 사진들로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을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만주사변(1931년) 이후부터 태평양전쟁에 이르는 시기에 일제에 의해 강제 동원돼 군인, 군속, 노무자 등으로 생활했던 사람들이 60여년 간 소중히 보관하던 사진들로 당시 노역 상황과 훈련 모습, 덕수궁 등 옛 모습들을 생생히 전해주는 사진이다.

수원대 사학과 박환 교수는 11일 “지금까지 막연하게 강제동원에 관한 언급밖에 없었다”면서 “공개된 사진들은 강제동원 가기 전 환송 장면, 가족과 함께 찍은 사진, 현지 도착 후 단체 사진, 군인•광부 등 다양하고 구체적인 실상을 보여줘 의미가 크다”고 밝혔다. 박교수는 이어 “단체사진 등을 통해 그동안 밝혀지지 않은 많은 피해사례를 밝힐 수 있는 구체적인 계기가 될 것”이라며 사진에 대해 큰 의미를 부여했다.

경기도 역사규명팀 김차영씨는 “이번에 공개되는 사진을 통해 강제 동원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독도문제, 역사왜곡 등 경기도민에게 역사의식을 고취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며 “더 많은 국민들이 볼 수 있도록 순회 전시회 등을 기획, 진행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 징용 전 마을에서 환송식 모습. 일제가 화려한 환송식을 통해 징용을 유도했음을 보여준다. ⓒ 끼뉴스

◇ 만주 훈련소(제13053부대원) 아침 조회 장면 ⓒ 끼뉴스

◇ 남양군도로 이동하기 전 신사 참배하는 모습 ⓒ 끼뉴스

◇ 현 육군사관학교 인근 태릉훈련소에서 훈련받는 모습. ⓒ 끼뉴스

◇ 훈련소에서 목총으로 훈련받는 모습. ⓒ 끼뉴스

◇ 남양군도에서 부대 건설을 위해 철로를 놓는 등 토목공사를 하는 장면 ⓒ 끼뉴스

◇ 일본 1902부대 포대 진지에서 근무하는 모습 ⓒ 끼뉴스

◇ 일본 북해도에서 중국인과 함께 촬영한 사진. 당시 중국인들도 만주 등지에서 징용되었다. ⓒ 끼뉴스

◇ 일본 후쿠오카현 광업소에서 채탄 작업을 위해 막장으로 들어가기 전 촬영한 모습 ⓒ 끼뉴스

일본 순화교육



1930년 일본 순화교육 형무소 마당 신궁앞에서 교육을 받고있다.

 

한일 합방 동의 전달 1910년
1910년8월29일 순종이 마침내 한일 합방 조약을 공포하니
이로써 대한제국의 국권은 완전히 일본에 탈취 되었다

부관 연락선



1921년 부산 부관(부산~시모노새끼) 연락선 출항 직전
당시 이연락선은 조선인을 전쟁터 또는 공사장으로 수송 되어
일본 중국 등
제삼국으로 강제노동 에 동원 되었다.

(한많은 이배를 타고간 한국인은 되돌아 오지못했다)

놀이터가된 궁궐



1929년 놀이터가된 궁궐 궁궐처마 밑에 일장기로 장식되고
문짝은 유리로 바꾸어놓고 아동관이라 홍보하고있다

통감부 파출소



통감부 파출소 1909년 1910년
조선은 경찰권을 일본에 위임하는 각서를 조인했다,
사냥개 까지 동원하여 항거하는 독립군 수색 하는데 이용했다

명성황후 홍농도착



명성황후  홍농도착 1897년
홍농에 도착한 대여가 홍살문 입구에서 잠시 대기 하고있다.
한나라의 국모를 잃은 백성들은 일본의 만행을 규탄하였다.
그결과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서 항일운동을 벌였다

공진회 퍼래이드



공진회 퍼래이드 1915년 공진회퍼래이드 광경,
일본전통복장을 한 연주자들이 광화문앞을 지나고 있다.

형장으로 호송되는



1904 형장으로 호송되는 독립투사 눈을가리고
인력거에 태워져 형장으로 가는 독립투사

광화문 입구에는
일장기가 드리워져 경술국치의 비애를 느끼게한다.

옥호루



명성황후(민비) 시해된곳 (옥호루)
명성황후가 친러반일정책을 강력히 추진하자,
일제가 일본 낭인배(깡패) 를 동원
1895년 10월 8일 옥호루에 난입 하여 시해함.
일본낭인배들에의해 옥호루에서 시해된후
며칠이 지나 명성왕후의 새끼손가락이 문틈에서 발견되었다.
당시이건물은 궁중의나인들이 자주 사용하는곳이다,
오른쪽에 아궁이가 있어 나인들이 목욕을 즐기던 부엌이다,
뒷편에 박물관 상단이 보인다.

참고 : 민비는 일제가 명성황후를 함부로 부르기 위해 붙인 것.

명성황후 인산준비



명성황후 인산준비 1897년 궁중내시가 무엇인가 유심히
바라보고있다,
능을 준비했는데 봉우리가 약 40~50 피트나 되었다.
(프랑스인 알렉빅그 촬영)

살기위해 도전



부모님을 여의고 혼자 살아 남은어린소녀가
혼자서 짐보따리를 챙기고 있다

일제 수뇌부



일제 수뇌부 1940년 경부 철도 복선 개통식에 참가한
(왼쪽)나카무라 총사령관과
오른쪽 미나미 총독

학도병 출옥



1940년 형무소 출옥당시 모습(학도병)
피골이 앙상한 체구는 X선에 나타난 형상과 같아 보인다

호남선 개통식장



목포부두 호남선 개통식장

괘도 연결식



괘도 연결식 (개통)

통감부



전국 조선 통감부 소속

착취



항의하는 농민 처형 (1905년)
당시 일본통치하에 있는 한국인을 재판없이 체포되어
일본 관헌들에의해 즉석에서 처형되었다,
입은있어도 말하지 못하고 눈이있어도 볼 수 없는
민족의 애환은국권이 없는 무능정부로만 돌릴 수 없는 것이다.
중앙에있는 일본관헌은 복부의 내용물을 확인하고 있다.

행사에 강제 동원



한.일행사에 강제 동원 된 기생

항일 학생교화시간

 

1930년 항일 학생교화시간
일장기 좌.우 충효가 무엇을 강요하는 것일까?
모두 죄수복장으로 침묵을 지키고 있다!

민족해방 책임자

 

1936년 민족해방 책임자 체포 항일 투쟁본부 책임자 박달씨
우측에서3번째 (딸과함께)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압송되고 있다
심한고문으로 옥사 했다

이승만

 

1904년 좌측이 이승만씨(미국)

광복단 사건



1920년 광복단 사건 발생
광복단 사건으로 인하여 주동자를 즉석에서
총검으로 심장을 찌르고 있다.  

독립신문 인쇄소



독립신문 인쇄소

조선 신궁 참배
 
 

조선 신궁을 참배하는 아침조회 (1936)
모자를 벗고 충성을 다짐하는 광경이다.

조선인 유해



조선 유해 보관소1940 년
전쟁중 소식불명이 된유해가 일본에서 임시 보관되었다가
얼마후 한국에 인도 되었는데 성명을 알 수 없는 유해는
조선이란 보자기에 쌓여 있다.

1930년 시체수송

 
1930 년 시체수송
조선인 시체를 매장 하기위해 중국인 노무자들이 관을
운송하고 있다  

헌병 경찰 발족

 

헌병 경찰 발족 (1910 년)

경무 총감부



헌병 경찰 발족 (1910 년)
일본 통감부에서 경찰관제를 개정하고 경무 총감부를 신설 했다.
관심을 끌기 위해 초대한 노인에게 일장기앞에서
선서를 강요시키고 있다

영친왕과 이방자여사



1920년대 영친왕과 이방자여사 신궁참배(매일 아침마다)
영친왕의 장식 칭호는 영왕입니다.
일제시대에 조선왕실을 격하시키려고 친 이란 단어를 넣어서
영친왕으로 부르게 한 것입니다.
순종황제를 이왕으로, 의왕을 의친왕으로 개칭 격하 했다

의병처형



로일전쟁 당시의 의병처형 (1904년)
이와같은 장면은 일본 통치후 3.1 일운동 에도 재현되어
시민들에게 경각심을 심어 주기 위해 손을 뒤로묶고
철사줄로 목을 매어 치명적으로 처형시켰다.
비참한 이광경을 볼 때마다 탄압이 주는
일본의 만행은 무엇을 위한 선택일 것인가

농민 처형



항의하는 농민 처형 (1905년)
당시 일본통치하에 있는 한국인을 재판없이 체포되어
일본 관헌들에의해 즉석에서 처형되었다,
입은있어도 말하지 못하고
눈이있어도 볼 수 없는
민족의 애환은
국권이 없는 무능정부로만
돌릴 수 없는 것이다.

중앙에있는 일본관헌은 복부의 내용물을 확인하고 있다.

영천왕 일본유배



영천왕 일본유배 1905년 이등방문은
1905년 11월 강제로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고
초대 한국 총감이 되었다,
영친왕은 11세 어린나이로 도일 했으나 내용은
인질과 다름이없었다.

영친왕의 정식 칭호는 영왕입니다

일제시대에 조선왕실을 격하시키려고 친 이란 단어를 넣어서
영친왕으로 부르게 한 것입니다.

순종황제를 이왕으로, 의왕을 의친왕으로 개칭 격하 했다

한말 군인



한말 군인

독립신문 편집



독립신문 편집

일본관리 1925



유혹하는 일본관리 1925
한국민족의 저항을 두려워 했던 일본은
자신들의 정책을 미화하기위해
형식적으로 통감부 시대를 만들어
한국의 모든상권과 행정권리 까지 장악하여
본격적인 식민지 정책을 펴기 시작했었다.

끌려가는 안중근



1910 년 형장으로 끌려가는 안중근 의사 (당32세)
여순(만주)감옥에 서 형장으로 가는 마자막모습

창경궁 개관식



창경궁 개관식 일장기가 드리워져 있고
서울시민들이 입장하기위해 왼쪽 매표소 앞에 웅집하고 있는
한국관람객

아녀자 신사 참배



아녀자들 강제신사 참배

남산의 현분수대광장 근처에
일본신사와 조선신궁을 참배하고나오는
부녀자들, 손에 든 일장기가 망국의 설움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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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답댓글 작성자남강촉석루 | 작성시간 06.12.18 지진이 일어나 가라안든지
  • 작성자최번개 | 작성시간 06.12.29 저런 씨발놈들
  • 작성자고구려를꿈꾸며 | 작성시간 07.01.12 이렇게 몇점 안봤는데도 화가 솟구치는구만....남벌해버러야 해...
  • 작성자호동과 낙랑 | 작성시간 07.12.06 이 많은 자료들을 아무튼 감사드립니다. 이소중한 자료를 활용하여 초등학교부터 상세히 가르켜야한디...민족혼을 일으켜야해요~~
  • 작성자결。 | 작성시간 08.06.15 아 진짜 죤나열받는다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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