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농민 봉기
유랑을 면할 수 있었던 농민들도 지주와 탐관 오리에게 압박과 수탈을 당해야 하였다. 그러나 무조건 순응하지만은 않았다. 그들은 현실의 어려움에 대처하기 위하여 공동으로 대응 방안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농촌에서는 계와 두레가 성행하였다. 계는 특히 경제적 어려움을 공동으로 타개하기 위한 조직으로서, 군포계, 제언계, 농구계 등이 있었다. 그리고 두레는 농민들이 농경의 힘든 노동을 함께 나누면서 유대관계를 돈독하게 하였다.
사회가 동요하는 가운데 농민들의 사회 의식은 보다 강해져 갔다. 비리와 부정을 마구 자행하는 탐관 오리, 수탈을 일삼는 지주, 그리고 현실의 모순을 미봉책으로 모면하려는 무능한 정부에 대하여 농민들은 더 이상 희망을 가질 수 없었다. 농민들은 이제 자신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즉, 그들은 자신들의 운명은 자신들이 스스로 개척하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터득하였다. 그리하여 농민들은 소청이나 벽서 등 이제까지의 소극적인 움직임에서 벗어나 사회 모순에 보다 적극적으로 대응하고자 하였다.
홍경래의 난
농민들은 항조 또는 거세 등의 방법을 통하여 지배 체제에 항거하였다. 농민들의 집단적인 항거는 마침내 이른바 민란으로 발전하였다. 세도 정권 초기에 몰락 양반인 홍경래는 평안도 가산에서 대규모의 민중봉기를 유도하였다(1811). 그는 세도 정권의 부패와 지주제의 모순을 신랄하게 비나하였다. 이에 몰락 농민, 중소 상인, 광산 노동자들이 그를 적극 지지하였다. 그리하여 한때 그들은 청천강 이북 지역을 장악하고, 크게 위세를 떨치기도 하였다. 그러나 결국은 정부군에 의하여 5개월 만에 진압되고 말았다.
전국적인 농민봉기
평안도에서 홍경래의 난이 실패한 이후, 사회 불안은 더욱 심해졌다. 민중의 집단적 저항이 진압되었다고는 하지만, 그 원인이었던 사회의 모순은 전혀 시정되지 않았다. 지배층의 부정과 탐학은 오히려 더 심해지고 있었다.
마침내 농민들은 19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전국적으로 봉기하였다. 농민들의 항거는 진주 민란을 계기로 하여 북쪽의 함흥에서부터 남쪽의 제주에 이르기까지 전국에 걸쳐 일어났다. 이를 임술 농민 봉기라 한다(1862). 이 때의 농민 항거도 결국은 진압되고 말았지만, 근본적인 대책이 강구되지 않는 한 민중의 동요는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정부는 삼정이정청을 설치하여 삼정의 문란을 시정한다고 약속했지만, 그것은 제대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당면한 시대적 과제는 수취 체제와 지주 전호제가 가지는 모순을 해결해야 하는 것이었다.
특히, 농민들이 지향하였던 사회 개혁의 방향은 농민들이 토지를 소유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정부로서는 양반 지주들의 이해를 뒤엎는 지주제를 개혁할 만한 능력이 없었고, 농민들로서도 그것을 변혁시킬 만한 역량이 부족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 농민들의 봉기는 농민들이 사회의 모순을 자율적으로, 그리고 보다 적극적으로 변혁시키려 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매우 크다.
4. 문화의 새 기운
사회 구조의 모순이 크게 드러나고, 변혁의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는 속에서 양반들의 가치 규범인 성리학은 더욱 경직되어 갔다. 현실 문제의 해결 능력을 상실한 성리학은 기존의 사회 체제를 고수하기 위한 보수적 가치관으로 굳어져 갔다.
이에 재야 지식인 사회에서는 성리학의 사상적 한계성을 비판하면서, 아울러 학문의 사회적 기능을 강조하였다. 양명학의 수용과 실학의 연구가 그러한 움직임이었다. 특히, 실학 운동은 조선 후기 사회의 문제점을 개혁하고 민족의 긍지를 내세우려는 것으로 현실을 철저히 인식하고자 하였고, 민중의 이해를 대변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움직임 속에서 서민들도 문화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문학 작품과 예술 작품에 자신들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고자 하였다. 문화계에도 근대 사회를 지향하는 새로운 기운이 감돌고 있었던 것이다.
1. 조선 후기에 성리학적 질서가 강화된 배경과 그 의미는 무엇인가?
2. 성리학의 한계성에 대한 비판적인 움직임은 어떻게 나타났는가?
3. 조선 후기 사회 개혁론은 어떠한 현실 인식을 토대로 하였는가?
4. 실학 운동의 역사적 의의와 그 한계는 무엇인가?
5. 조선 후기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은 어떠하였는가?
1. 조선 후기에 성리학적 질서가 강화된 배경과 그 의미는 무엇인가?
성리학은 수직적 질서를 바탕으로 하는 명분론과 지주 전호제를 중심으로 하는 농업 사회의 지배 이념인데, 조선 후기 생산력의 변화로 수직적 질서가 무너지고, 상공업 중심의 사회로 변화하면서 사회의 모순이 드러나고, 변혁의 움직임이 일어나면서 양반 지배 체제는 크게 동요하였다. 양반 지배층은 이러한 모순에 대해 근본적인 대책을 강구해 내지 못하고, 오히려 사회 변화의 움직임을 억압하고 자신들의 특권을 계속 유지하기 위하여 성리학적 질서를 강화하였던 것이다.
2. 성리학의 한계성에 대한 비판적인 움직임은 어떻게 나타났는가?
성리학이 더 이상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잃게 되자, 이에 대한 비판의 움직임이 일어났다. 교조화된 성리학에 대한 비판으로 주자와 다른 해석을 하는가 하면, 더 나아가 지행 합일의 실천성을 강조하는 양명학의 수용으로도 나타났다. 또한,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 바탕을 둔 학문이었던 성리학이 조선 사회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자, 이에 대한 반성과 비판으로 우리의 역사, 강토, 언어 등을 연구하는 국학이 발달하게 되었다.
3. 조선 후기 사회 개혁론은 어떠한 현실 인식을 토대로 하였는가?
양반 사회의 모순이 심각함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지배 이념이었던 성리학이 그 사회적 기능을 다하지 못하자, 일부 학자들은 사회 모순을 시정하기 위해 사회 개혁론으로 실학이 제기되었다. 실학자들의 개혁론은 당시의 사회 현실을 인식하고 해결하는 방안으로 크게 중농 학파와 중상 학파의 두 가지로 나타났다. 중농 학파는 농촌 사회의 안정을 가장 심각한 사회 문제로 여기고, 농촌 사회의 동요는 토지 소유의 편중에 있다고 파악하여 토지 분배론에 바탕을 둔 여러 가지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반면, 중상 학파들은 농업뿐만 아니라 상공업의 진흥과 기술의 혁신 등 물질 문화에 더 많은 관심을 두고, 상공업을 진흥시켜 나라 살림을 튼튼히 해야 한다는 성장론에 초점을 두었다.
4. 실학 운동의 역사적 의의와 그 한계는 무엇인가?
실학 운동은 우리 문화에 대한 독자적 인식을 강조하는 민족주의적 성격, 사회 체제의 개혁과 생산력의 증대를 통해 사회 발전을 도모하는 근대 지향적인 성격, 농민을 비롯한 피지배층의 입장을 대변하고 옹호하는 민중적 성격의 학문으로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 그러나 실학은 대체로 정치적 실권과 거리가 먼 몰락 지식인층의 개혁론이었기 때문에 당시의 정책에 반영되지 못하였다는 한계성을 지니고 있다.
5. 조선 후기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은 어떠하였는가?
조선 후기 서민층의 경제력 향상과 의식 성장으로 사회적 지위가 상승하여 종래 양반 중심의 문예 활동에 대신하여 일반 서민들이 창작하고 향유하는 문학과 예술이 대두하였다. 역관이나 서리 등 중인층의 문예 활동이 활발하였고, 상민이나 광대에 의해 판소리가 보급되기도 하였다. 내용에 있어서도 전기와는 달리 인간의 감정이 적나라하게 묘사되고, 사회의 부정과 비리를 신랄하게 고발하였다. 그 주인공들도 영웅적인 존재에서 이름 없는 서민적인 인물로 전환되어 갔고, 그 배경 또한 비현실적인 세계보다는 현실적인 세계로 옮겨 갔다. 문학에 있어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한글로 쓰여진 작품이 많이 나타나고, 그 형식도 소설이나 사설시조가 주류를 이루었다는 점이다. 예술의 경우는 더욱 뚜렷한 자아 의식을 바탕으로 하여 우리의 자연을 직접 눈으로 보고 사실적으로 그리는 등 화풍의 변화가 나타났다. 이른바 진경 산수화가 출현한 것이다.
(1) 사상과 학문의 동향
성리학적 질서의 강화
양반 사회의 모순이 드러나는 가운데에서도 지배층은 사회 변화의 움직임을 외면하고, 오히려 자신들의 지위를 공고히 하고자 하였다. 그들은 중앙에서는 붕당 정치를 통하여 지배층의 결속을 꾀하면서, 향촌에서는 유교적인 향약을 강요하여 지배 신분으로서의 특권을 계속 유지하고자 하였다.
지배층인 양반들이 내세운 사회의 가치 규범은 성리학적 질서였다. 성리학에서의 모든 인간 관계는 충효를 핵심 내용으로 하는 수직적 질서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즉, 성리학에서는 명분론(名分論)을 내세워, 그 직분이나 신분에서 분에 넘치는 행위는 천리(天理)에 어긋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1) 따라서, 지배 계층의 정통성과 봉건적 질서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성리학적 질서하에서는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아들, 지아비와 지어미, 주인과 노비, 그리고 양반과 상민 사이의 종적인 지배 예속 관계가 절대시되었고, 그러한 관계를 밝히고 있는 삼강 오륜의 가르침이 기본 덕목으로 중요시되고 있었다.
이러한 성리학적 질서는 지배 체제가 동요하고 있던 조선 후기에 이르러 보다 더 강조되었다. 지배층은 성리학적인 질서를 강화하여 사회 변화의 움직임을 억압하고자 하였다. 그것이 사태를 보다 악화시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위정자들은 사회 모순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을 강구해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의 이론적 바탕이었던 성리학은 이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 가고 있었다.
물론 이러한 성리학계에 대하여 비판적 움직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성리학계에서는 비판적 견해나 주장을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 하여 배척하는 등 사상적 경직성을 보이고 있었다. 오히려 성리학을 이론적으로 더욱 강화시키고자 하였다.
성리학의 발달
성리학의 연구는 정국의 흐름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진행되었다. 그것은 성리학이 지배층의 이론적 도구였고 사상적 무기였기 때문이다. 17세기의 붕당들은 그들의 붕당이 정통성을 가지기 위해 학연에 유의하면서 학문적 토대를 굳히는 데에 힘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영남 학파가 주로 동인 계열을, 기호 학파가 주로 서인 계열을 이끌었다.
당초에는 동인이 정국의 흐름을 주도하였다. 그리하여 영남 학파가 정계에 많이 진출하였고, 그들의 학문 활동이 두드러졌다. 그러나 동인은 곧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졌다. 처음에는 유성룡 등 남인 계열이 중용되었으나,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북인 계열이 실권을 장악하였다. 그런데 북인 계열은 대체로 영남 학파 중에서도 조식의 학통을 이었으며, 특히 절의를 중시하였다. 그리하여 정인홍, 곽재우과 같은 의병장이 많이 배출되었다. 한편, 남인 계열은 이황의 학통을 내세웠는데, 정계에서 보다는 향촌 사회에서 그 영향력이 컸다.
서인에 의해 인조 반정이 단행되고, 그들에 의해서 정국이 주도되면서, 이후에는 기호 학파가 위세를 떨쳤다. 서인은 장기간 집권하였는데, 숙종때에 이르러 분파되었다. 정책의 수립과 상대 붕당의 탄압 과정에서 보수와 혁신, 강경과 온건 등 노장 세력과 신진 세력 간에 갈등이 나타난 것이다. 그리하여 노론과 소론이라는 붕당이 생겨났다.
자운서원 사당(경기 파주) 송자대전
송시열을 중심으로 하는 노론은 이이의 학풍을 정통으로 이었다고 자부하였다. 이에 대해서, 윤증을 중심으로 하는 소론은 성혼의 사상을 바탕으로 이황의 학설에도 호의를 보이는 반면, 이이에 대하여는 비판적이기도 하여 성리학의 이해에 탄력성을 보여 주었다. 그리하여 소론은 송시열이 사문난적으로 배격한 윤휴의 학설을 두둔하였는가 하면, 양명학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노론이 정계와 학계를 주도하면서 한동안 주기론이 우세하였으나, 그 안에서 다시 분파가 생겨 18세기에 이르러서는 주기론을 획일적으로 고집하는 충청도 지방의 노론과, 주리론도 포괄적으로 이해하고자 한 서울 지방의 노론 사이에 논쟁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한편, 17세기 후반 이래로 정국에서 거의 배제된 남인 계열의 영남 학파는 향촌에서 학문의 본원적인 연구에 힘써 이황의 학설을 보다 심화시켰다.
양명학의 수용
노론의 일당 전제화로 정국이 경직되면서 성리학도 지나치게 보수적 성향을 띠어 갔다. 그러나 조선 후기의 사회․경제적 변동은 성리학 일변도의 사상 체계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반성을 요구하였다. 교조화된 성리학에 대한 비판은 일찍부터 제기되었는데, 17세기 후반의 윤휴는 유교 경전에 대해서 주자와 다른 해석을 내려 당시 학계에서 유학의 반역자라는 규탄을 받았다. 윤휴와 같은 시기에 박세당도 주자학을 비판하다가 학계에서 배척되었다.
성리학에 대한 비판적 동향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양명학의 수용으로 나타났다. 지행 합일(知行合一)의 실천성을 중시하는 양명학의 사상 체계는, 두 차례의 전란을 겪으면서 그 의미가 새로이 인식되었다.1) 양명학에서는 알았다고 하여도 행하지 않으면 그 앎은 진정한 앎이 아니라고 하여, 앎이 있다면 곧 행함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강화 학파의 계보
양명학은 주로 경기 지방을 중심으로 재야의 소론 계열 학자와 불우한 종친 출신의 학자들 사이에서 많이 연구되었다. 16세기 말부터 양명학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는데, 양명학이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초 정제두가 양명학에 깊은 이해를 보이면서부터였다.
정제두는 강화도로 옮겨 살면서 존언, 만물일체설 등을 써서 양명학의 학문적 체계를 세웠다. 그리하여 그의 영향하에 이른바 강화 학파라 불리는 양명학자들이 배출되었다.
국학 연구의 확대
성리학에 대한 반발은 국학에 대한 관심으로도 나타났다. 본래 성리학은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 바탕을 둔 학문이었으므로, 여기에 심취한 성리학자들은 우리 문화를 중국 문화의 일부로만 인식하였다. 더구나 성리학이 사회 변화에 대하여 능동적으로 대응하지 못하자, 이에 대한 반성과 비판으로 실학 운동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민족의 전통과 현실에 대한 깊은 관심에서 우리의 역사, 강토, 언어 등을 연구하는 국학이 발달하게 되었다.
먼저, 실학자들은 민족의 역사적 전통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익은 체계적인 역사서를 남기지는 않았으나, 중국 중심의 역사관을 비판하여 민족에 대한 주체적 자각을 높이는 데 이바지하였다. 이익의 역사 의식을 계승한 안정복은 동사강목을 저술하여 종래 중국 중심의 역사 인식에서 벗어나 민족의 역사적 정통성을 밝히고자 하였다. 그리고 역사 사실들을 치밀하게 고증하여 고증 사학의 토대를 닦았다.
한편, 한치윤은 해동역사에서 외국 자료까지 인용하면서 민족사 인식의 폭을 넓히는 데 이바지하였고, 이긍익은 연려실기술에서 실증적이고 객관적인 서술로 조선 시대의 정치와 문화를 정리하였다. 또, 이종휘와 유득공은 각각 고구려사와 발해사 연구에 큰 공적을 남겼는데, 고대사 연구의 시야를 만주 지방에까지 확대시킴으로써 한반도 중심의 협소한 사관을 극복하는 데 힘썼다.
대동여지전도
시간성에 대한 관심이 국사의 연구로 나타났다면, 공간성에 대한 관심은 국토의 연구로 나타났다. 그리하여 우수한 지리서가 편찬되고 새로운 지도가 제작되었다.1) 이 시기에 편찬된 지리서로는 유형원의 여지지, 이중환의 택리지, 정약용의 아방강역고, 김정호의 대동지지 등이 유명하였다. 특히, 택리지에는 우리 나라 각 지방의 자연 환경과 인물, 풍속, 인심의 특색 등이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지도 제작에는 정상기와 김정호의 업적이 뛰어났는데, 전자는 동국지도를, 후자는 청구도, 대동여지도를 제작하였다. 그 이전의 지도 제작은 행정적, 군사적인 목적이 주가 되었으나, 이 시기의 지도에는 산업, 문화에 대한 관심이 반영되어, 산맥과 하천, 포구, 도로망의 표시가 정밀해진 점에 특색이 있었다.한편, 우리의 언어, 즉 한글에 대한 학문적 연구도 활발하여, 음운학과 어휘의 수집 등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음운에 관한 연구 성과로는 신경준의 훈민정음운해, 유희의 언문지 등이 유명하고, 어휘 수집에 관한 것으로는 이성지의 재물보, 권문해의 대동운부군옥, 이의보의 고금석림 등이 있다.
이들 연구의 성과는 한글의 우수성에 대한 인식, 즉 문화적 자아 의식을 크게 높여 주었다.
문화 인식이 넓어짐에 따라서 백과 사전의 성격을 띤 저서가 많이 편찬되었다. 일찍이 이수광은 지봉유설을 지어 문화의 각 영역을 항목별로 나누어 기술하였는데, 18, 19세기에는 이러한 학풍이 한층 더 발전하여 이익의 성호사설, 이덕무의 청장관전서,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 등이 편찬되었다.
(2) 사회 개혁론의 대두
실학의 대두
양반 사회의 모순이 심각함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지배 이념이었던 성리학은 그 사회적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일부 학자들은 사회 모순을 시정하기 위한 사회 개혁론을 적극 제기하였다. 이른바 실학이 대두한 것이다. 즉, 실학은 조선 후기의 사회․경제적 변동에 따른 여러 가지 사회적 모순에 직면하여, 그 해결책을 구상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사회 개혁론이었다.
성리학을 비판하면서 현실 생활과 거리가 먼 당시의 정치와 문화를 혁신하려는 움직임은 18세기를 전후하여 활발하였지만, 그 싹은 이미 16세기 말에 움트고 있었다. 정인홍 등은 성리학 이외의 사상을 폭넓게 수용하여 정신 문화와 물질 문화를 균형 있게 발전시켜 부국 강병과 민생 안정을 달성해 보고자 하였다. 그러나 새로운 문화 운동은 학문적 체계를 세우기도 전에 성리학만을 고집하는 보수적 학자들의 반발로 좌절되고 말았다.
이어서 17세기에는 안으로 분열된 사회를 다시 통합하고, 밖으로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대처할 수 있도록 국가 역량이 강화되어야 한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만연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배경으로 하여 한백겸, 이수광, 유형원 등은 국가 체제를 개편하고, 민생을 안정시킬 수 있는 개혁의 방안을 나름대로 제시하였다. 특히, 한백겸은 토지 소유의 지나친 편중을 개탄하고, 농민들이 균등하게 토지를 소유할 수 있기를 기대하는 한편, 민생의 안정과 국가 재정의 확충을 위하여 대동법의 확대 실시를 추진하기도 하였다.
그 후 실학 운동은 서양에서 전래된 과학적 지식, 청나라의 고증학 등의 영향을 받으면서 보다 깊이 있게, 그리고 폭넓게 전개되었다. 개혁에 관심이 많았던 진보적 지식인들은 현실을 철저히 분석하였고, 비판적이고 실증적인 논리로 자신의 개혁론을 제시하였다.
농업 중심의 개혁 사상
실학자들의 학문적 관심은 먼저 농촌 문제에 쏠렸다. 당시 농촌 사회의 안정 여부는 매우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었다. 농민층의 분화가 날로 심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실학자들은 농촌 사회의 안정을 추구하여, 농민층의 입장에서 토지 제도, 조세 제도, 군사 제도, 교육 제도 등의 폐단을 시정하려 하였는데, 그 때문에 이들을 중농 학파 또는 경세 치용 학파라고 한다.
실학자들은 특히 토지 소유의 편중으로 인하여 농민의 생활이 안정되지 못한다고 여겨, 토지 제도의 개혁을 가장 중요시하였다. 그러나 실학자들 사이에서도 토지 제도의 개혁 방안에는 차이가 있었다.
유형원은 반계수록에서 균전론을 내세웠다. 그는 관리, 선비, 농민 등에게 차등을 두어 토지를 재분배하자고 하여,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진보적 입장에서 자영농을 육성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자영농을 바탕으로 농병 일치의 군사 조직과 사농 일치의 교육 제도를 확립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대하여 성호학파(星湖學波)1)를 이룰 정도로 많은 제자를 키워 낸 이익은 한전론을 주장하였다. 즉, 그는 한 가정의 생활을 유지하는 데에 필요한 일정한 토지를 영업전으로 하고, 그 밖의 토지는 매매할 수 있게 하여 점진적으로 토지 소유의 평등을 이루자고 제창하였다. 나아가 그는 나라가 빈곤하고 농촌이피폐한 것은 양반 제도, 노비 제도, 과거 제도, 사치와 미신 숭배 대문이라고 하여 그 시정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한편, 실학을 집대성하여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 5백여 권의 저술을 남긴 정약용은 여전론을 주장하였다.
정약용
여전론이란, 한 마을을 단위로 하여 토지를 공동으로 소유하고 공동으로 경작하여 그 수확량을 노동량에 따라 분배하는 일종의 공동 농장 제도를 말하는 것으로 당시로는 획기적인 방안이었다.
정약용은 더 나아가 농민 생활의 안정을 토대로 하여 향촌 단위의 방위 체제를 강화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통치자는 백성을 위해 존재한다고 하여, 백성의 이익과 의사가 적극적으로 반영될 수 있는 정치 제도에 대한 개선 방안까지도 제시하였다.
농촌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실학자들은 토지 소유 문제뿐 아니라 농경 기술의 개발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들은 수리 시설의 확충, 종자와 농기구의 개량, 경작 방법과 시비법의 개선 등을 제시하였다. 농업 기술에 관해서는 특히 북학론자들의 관심이 컸는데, 그들은 청나라의 선진 농업 기술을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상공업 중심의 개혁 사상
18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국내 상공업의 발달과 청나라 문화의 영향으로 농업뿐만 아니라 상공업의 진흥과 기술의 혁신 등 물질 문화에 관심을 보인 학자들이 나타났다. 물질 문화와 부국 강병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이들을 중상 학파 또는 이용 후생 학파라고 하는데, 청나라 문물의 수용을 주장했으므로 북학파(北學派)라고도 한다.
북학파의 선구적 역할을 한 유수원은 우서에서 중국과 우리 나라의 문물을 비교하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친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그는 지나치게 농업에만 의존해서는 안 되고 상공업을 진흥시켜 나라 살림을 튼튼히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사, 농, 공, 상의 직업적 평등화와 전문화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북학의
한편, 노론 명문 출신인 홍대용은 청나라에 왕래하면서 얻은 경험을 토대로 임하경륜, 의산문답 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는 균전제를 주장하여 농업 문제에도 관심을 보였으나, 기술 문화의 장려와 신분 제도의 철폐, 그리고 성리학의 극복이 부국 강병의 근본이라고 믿었다.
박지원에 이르러 북학 사상은 한층 발전되었다. 일찍이 그는 과농소초 등을 통해 농업 생산력을 높이는 문제에 관심을 쏟은 바 있었는데, 청나라에 건너가서 생산과 유통의 중요성을 실감한 다음부터는 상공업 진흥에 보다 관심을 기울였다. 즉, 수레와 선박의 이용이나 화폐 유통의 필요성을 강조하였으며, 양반 제도의 비생산성을 비판하였다.
박지원의 사상은 박제가에 이어져서 보다 확충되었다. 박제가는 청나라에 다녀온 후 북학의를 저술하여 청나라 문물의 수용을 적극적으로 제창하였다. 그는 상공업의 발달을 도모하기 위한 방안으로 청나라와의 통상을 강화할 것과, 수레나 선박의 이용을 늘릴 것, 그리고 절약보다는 소비를 권장하여 생산을 자극시킬 필요가 있음을 지적하였다.
18세기를 전후하여 크게 융성하였던 실학은 민족적, 근대 지향적 성격의 학문으로서 그 역사적 의의가 매우 컸다. 그러나 실학은 대체로 정치적 실권과 거리가 먼 몰락한 지식인들의 개혁론이었기 때문에 당시의 국가 정책에 반영되지는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