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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김익상(金益相) (1895 ~ 19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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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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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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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지 |
평안남도 강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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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활동 |
평양의 숭실학교(崇實學校)를 졸업하고, 기독교계 학교에서 교직에 종사하다가 서울에 올라와 광성연초공사(廣城煙草公司)에서 일하였다.
1920년 펑톈 [奉天]지점으로 전근갔으나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의열단장(義烈團長) 김원봉(金元鳳)을 만났고 그에게서 일본기관의 파괴, 요인암살이 곧 조국독립의 첩경이라는 설명을 듣고, 조선총독부를 폭파하고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를 암살할 것을 결심하였다.
1921년 폭탄과 권총을 휴대하고 서울에 잠입, 왜성대(倭城臺)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던져 내외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이듬해 3월 다시 상하이[上海] 세관부두에서 시찰차 들어오는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를 암살하고자 폭탄을 던졌으나 실패, 체포되었다.
일본 나가사키[長崎]로 호송되어 공소원(控訴院)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감형되어 출옥하였으나 미행하던 일본형사에게 살해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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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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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인물 |
김원봉 (의열단), 오성륜, 이종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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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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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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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비 |
서울시 중구 남산동(김익상선생 의거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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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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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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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출처 |
네이버백과, 한국위키피디아, 재봉틀의 국어방(네이버 블로그) -(http://blog.naver.com/kwank99?Redirect=Log&logNo=300243494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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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원문> 김익상(金益相.1895∼1925.6.6)
독립운동가. 경기도 고양 출신. 평양의 숭실학교를 졸업한 뒤 기독교학교의 교사로 근무하다가 서울에 와서 광성연초공사(廣城煙草公司)의 기계감독으로 근무하였다. 1920년 만주 봉천(奉天)으로 전근된 것을 기회로 비행사가 되기 위하여 중국 광둥(廣東)으로 갔다.
그러나 당시 중국은 국내전으로 혼란하여 비행학교가 폐교되어 있었으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상해로 돌아왔다. 상해에서 전차회사의 전차감독이 되어 잠시 일을 보다가 항일운동에 몸바칠 것을 결심하고 북경으로 가서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義烈團)에 입단하였다. 1921년 단장 김원봉(金元鳳)으로부터 총독암살의 밀령을 받고 국내로 들어와 전기수리공으로 변장하고 9월 12일 총독부에 잠입하여 2층 비서과를 총독실로 오인, 폭탄을 던지고 다시 회계과장실에도 던졌다. 비서과에 던진 폭탄은 불발이었으나 회계과장실에 던진 폭탄은 폭발하였다. 총독부가 이 폭발로 혼란상태에 빠진 틈을 이용하여 현장을 빠져나와 평양을 거쳐 중국으로 무사히 탈출하였다.
1922년 일본의 전 육군대신이며 육군대장인 다나카(田中義一)가 필리핀을 거쳐 상해에 도착한다는 정보를 의열단이 입수하고 다나카암살의 임무를 그에게 맡겼다. 이를 위해 동지 오성륜(吳成崙, 본명 李正龍)과 같이 치밀한 계획을 세워 1차 저격은 오성륜이 담당하고, 만약 실패할 경우 2차 저격을 담당하기로 하였다.
3월 28일 황푸탄(黃浦灘)에 선편으로 도착한 다나카를 계획대로 저격하였다. 처음 오성륜이 배에서 내리는 다나카를 향하여 권총을 발사하였으나, 발사순간 신혼여행차 상해에 오던 영국 여인이 다나카의 앞을 막아섬으로써 발사된 총탄은 영국여인에게 명중되어 실패하자, 김익상은 달아나는 다나카를 향하여 폭탄을 투척하였다.
그러나 그 폭탄마저 불발하여 거사가 실패하자 현장을 탈출하려 할 때 중국경찰이 추격하므로 공포를 쏘며 주장로(九江路)를 지나 쓰촨로(四川路)로 달아났으나, 그때 즉사한 영국여인의 남편이 앞을 가로막고 쏜 권총을 맞고 쓰러져 붙잡혔다.
4월 1일 상해 일본총영사관에서 예심을 마치고 5월 3일 일본 나가사키(長崎)로 압송되어 9월 25일 나가사키지방재판소에서 무기징역을 언도받았으나, 검사의 공소로 공소원(控訴院)에서 사형이 언도되었다. 그 뒤 이른바 은사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복역중 누차 감형되어 출옥하였으나 뒤를 쫓던 일본형사에게 암살당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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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익상의 의열 투쟁> - 박성수: ‘의열 투쟁’: 동아일보(1982. 9. 24)
1920년대의 의열 투쟁은 사건마다 극적인 요소를 띠고 있어서 그 자체가 연극이나 다름없는 장면이 자주 나타난다. 김익상 열사의 두 차례 거사는 특히 그러하다.
김 의사는 평남 강서 사람으로 1920년 6월 압록강을 건너 북경에 갔다. 북경에서 의열단에 가입한 그는 의열단의 지령에 따라 서울로 떠났다. 목적은 총독부에다 폭탄을 던져 재등 총독을 죽이는 일이었다.
1921년 9월 10일 일본 학생으로 변장하고 입경한 그는 이틀 뒤 전기 수리공으로 다시 변장하여 남산에 있는 총독부로 들어갔다. 정문을 통과할 때 조금도 수위의 의심을 받지 않았으니 어지간히 경비가 허술한 시대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먼저 총독의 방을 찾았다. 2층에 올라가니 제법 으리으리한 방이 있어 폭탄 하나를 던졌다. 그러나 아깝게도 그 방은 총독 방이 아니라 그 비서실이었다. 더욱 애석한 것은 그 폭탄은 불발탄이었다.
당황한 그는 나머지 한 개를 그 옆방에다 던졌다. 요번 것은 유리창을 깨고 들어가 보기좋게 폭발하였다. 그러나 텅 빈 회계과 방이었다. 폭음에 놀란 총독부 관리들은 우왕좌왕 어쩔줄 몰랐고 그 틈을 이용하여 그는 유유히 현장을 빠져 나왔다. 뿐만 아니라 그는 서빙고 한강변에 가서 일본 목수 차림으로 재삼 변장하고 그날로 용산역을 출발, 북경행 열차를 탔으니 참으로 신파극에 알맞은 줄거리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탈출에는 성공하였으나 총독을 폭살시키지 못한 것이 그를 몹시 슬프게 만들었다.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데 불과 6개월만에 다시 기회가 왔다. 일본 육군 대장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란 거물이 필리핀과 싱가포르를 거쳐 상해로 온다는 것이다. 당시로서는 호화스러운 유람항로였을 것이나 그에게는 총알이 기다리고 있었다.
요즘 사람이라면 한 번 거사를 치렀으니 아주 그만두거나 일선근무로부터 물러났음직하다. 그러나 그는 그렇지 않았다. 제일 먼저 일을 맡아 하겠다고 나선 것이 다른 두 동지도 양보하지 않았다. 두 동지란 오성륜(吳成崙), 이종암(李鍾岩) 두 의사였다. 세 사람은 서로 고집하였다. 결국 제1, 제2, 제3선을 정하여 제1선은 오성륜, 제2선은 김익상, 제3선은 이종암이 맡기로 합의했다. 그로서는 대단한 양보였다.
1922년 3월 28일 오후 3시 반,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가 탄 여객선이 상해 황포탄(黃浦灘) 부두에 도착하였다. 승객이 내리자 부두는 사람으로 가득차 혼잡했다. 다나카(田中義一) 대장이 마중나온 귀빈들과 악수를 나누고 있을 때 제1선을 맡은 오성륜이 먼저 세 발을 쏘았다. 탄환은 다나카(田中義一)에게 맞지 않고 하필이면 옆에 가던 신혼여행 중인 영국인 부인에게 맞았다.
오성륜 의사는 사람이 쓰러지는 것을 보고 다나카가 죽은 것으로 착각했다. 그래서 기쁜 나머지 ‘대한 만세’를 연창하였다. 다나카는 황급히 자동차 안으로 몸을 숨겼다. 이때 제2선을 맡은 김익상이 두 발을 쏘았다. 김 의사의 탄환은 다나카의 군모를 뚫었다. 그러나 녀석의 머리에서는 피가 나지 않았다. 제3선의 이종암 의사도 쏘았으나 때는 이미 명중하기 어려운 혼잡한 상황이었다.
황포탄 부두는 난장판이 되고 이종암 의사는 현장에서 피신하였다. 오성륜과 김익상은 그만 잡히고 말았는데 오 의사는 일본 영사관 경찰서에 구류되고 있을 때 같이 있던 일본인 죄수와 합동으로 벽에 구멍을 뚫고 탈출하였다.
이렇게 해서 혼자 잡힌 몸이 된 김익상은 일본으로 이송되어 재판을 받았다. 사형이 선고되었으나 1927년 특사로 감형되어 20년 만기로 출감하였다. 김 의사는 그리운 고향땅을 밟았다. 그러나 어느 날 일본 형사가 찾아와 같이 나갔다. 그리고 그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암살당한 것이다.
[출처] 독립운동가 김익상|작성자 재봉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