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미양요(辛未洋擾)
1866년 7월 11일,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에 도착했다. 배에는 대포 2문이 장착되어 있었고 선원들은 전원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셔먼호는 상품을 팔기 위해 왔는데, 조선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무력으로 위협을 해서라도 꼭 통상을 관철시키겠다는 계획이었다. 그들은 며칠 동안 머물며 검선하기 위해 올라온 조선 관리에게 통상을 요구했다. 그러나 쇄국정책이 지엄하여 지방관의 권리로 통상을 허할 수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
통상을 거절당하자 셔먼호는 돌아가지 않고 대동강의 수심을 측정했다. 배에 올라 퇴선을 요구한 평양 중군 이현익을 감금하는가 하면, 평양성을 향해 대포를 발사하고 소총을 마구 쏘아댔다. 그러다가 얕은 모래톱에 걸려 오도 가도 못하게 되었다. 불안해진 선원들은 성내를 향해 마구 대포를 발사하여 백성 7명이 죽고 5명이 다치는 사태가 발생했다. 허락도 없이 영해를 침범한 것으로도 모자라 내륙 깊숙이 들어온 데다 무구한 백성들을 살상까지 한 것이다.
평안감사 박규수는 셔먼호의 만행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어 조정에 셔먼호를 공격하겠다는 장계를 올렸고, 고종은 중신들의 의견을 물은 끝에 공격을 윤허했다. 1866년 7월 21일, 박규수는 셔먼호에 포격을 가하는 한편, 좌초한 셔먼호 상류에 식용유를 뿌린 뒤 불을 붙인 소형 배를 셔먼호와 충돌시켰다. 셔먼호는 삽시간에 불길에 휩싸여 선원들이 불에 타 죽거나 뛰어내린 자는 물에 빠져 죽었다. 간신히 뭍으로 올라온 자들은 성난 백성들에게 맞아죽었다.
미국은 청나라에 항의하고 진상을 탐문하는 한편, 1866년 12월 18일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국무부 관리 로버트 슈펠트를 조선에 파견했다. 그는 먼저 통상을 요구하는 미국 대통령의 서한을 보냈지만 조정에서는 접수조차 거절했다. 병인양요로 인해 양인들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 있기 때문이었다. 슈펠트가 빈손으로 돌아가자 1868년 4월 10일 미국 전함 셰넌도어호가 나타나 셔먼호의 생존 선원들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생존자가 없다는 대답에 셰넌도어호는 함포를 쏘며 시위를 벌였고, 조선 측에서 마주 공격을 가하자 소득 없이 돌아갔다.
1870년 청나라 주재 미국공사로 부임한 프레드릭 로는 조선에 서한을 보내 셔먼호 사건의 책임을 물으면서 거듭 통상을 요구했다. 대원군의 쇄국정책이 한층 강경해진 조선에서는 당연히 거절했고, 로 공사는 조선 공격을 결정했다. 1871년 3월 27일, 미국 함대는 왜국 나가사키를 출발했다. 함대는 군함 5척에 85문의 최신식 대포를 장착하고 있었다. 함대에는 해병 150명을 포함한 1200명의 장병이 승선하고 있었다.
1871년 4월 2일, 미군 함대는 아산만에 있는 풍도에 정박한 채 소형 탐사선을 내려 수로를 측정하는 등 공격로 확보에 나섰다. 경기감사 박영보가 미군을 찾아가 용건을 물은즉, 그들은 통상을 위해 왔을 뿐 백성을 살상할 의도는 없다고 둘러댔다. 박영보의 급보를 받은 조정에서는 어영대장 이재연을 진무중군에 제수하여 미군의 공격에 대비하도록 했다. 미 함대가 강화도 해역으로 올라오자 조선에서도 강화도 인근에 병력과 화력을 증강시켜 대비했다.
4월 14일, 미군 함대 2척이 강화도로 접근해오자 광성보에 있던 조선 수군이 먼저 포격을 가했다. 미군 측에서도 즉각 응사하여 첫 전투가 벌어졌다. 미군은 곧 나머지 3척도 가세하여 광성보에 집중포격을 가했다. 몇 차례 교전 끝에 아산만으로 돌아간 미군은 로 공사 명의로 재차 통상을 요구하는 서신을 보내왔다. 답신이 없으면 다시 공격하겠다는 협박도 덧붙였다. 조정에서는 무례한 미국의 통상 요청을 거부하면서 즉각 물러가라고 요구했다.
답신을 받은 미군은 4월 23일 대대적인 함포 사격에 이어 24척의 상륙정에 나눠 탄 미군 650명이 초지진을 급습했다. 수비대는 사력을 다했지만 하루도 버티지 못하고 궤멸되었다. 미군은 다시 광성진을 공격했다. 미군은 함포의 지원사격 아래 수레에 싣고 온 대포를 쏘아대며 삽시에 광성진을 파괴했다. 덕진과 손돌목 성곽도 미군의 함포 사격으로 모두 파괴되었다. 8시간에 걸친 광성진전투에서 조선군은 진무중군 어재연을 비롯하여 240명이 전사하고 100명은 염하로 뛰어내려 자결했다. 화력이 절대적으로 우세한 미군은 장교 1명과 병사 2명이 전사하는 데 그쳤다.
미군은 광성진을 불태우고 초지진으로 이동하여 주둔했다. 승전보를 전해들은 주청 미국공사 로는 조선이 백기를 들고 통상에 응할 것으로 낙관했다. 그러나 조선은 대대적인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4월 24일 밤, 초지진 첨사 이렴은 수하들을 인솔하여 초지진을 기습했다. 놀란 미군은 초지진을 버리고 배에 올라 물치도까지 후퇴했다. 그러잖아도 염하의 거센 물살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미군은 20일 가까이 더 머물면서 끈질기게 통상을 요구했다. 그러나 조선의 거부의사가 워낙 강경한데다 오래 버텨봐야 실익이 없을 것으로 판단하여 조선 포로들을 석방하고 왜국으로 돌아갔다. 미국은 승전을 자축하며 미군 장교 15명에게 훈장을 수여했지만, 무고한 조선 병사와 백성들만 대거 살상했을 뿐 얻은 것은 개뿔도 없었다. 조선인들에게는 서양인들에 대한 적개심만 잔뜩 높여놓았으며,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한층 공고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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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년 6월 10일 ~ 11일. 미군 진격도.

6월 10일. 전투의 2단계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