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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종주(26. 6. 6) & 남한산 정상과 벌봉..

작성자산사랑|작성시간26.06.07|조회수35 목록 댓글 0

현충일을 맞이하여 우리 민족의 치욕의 현장(?)인 남한산을 종주하면서 당시 조선의 임금과 신하들의 대응을 생각하면서  현재 가장 이슈가 되고 있는 선관위의 투표용지 부족사태로 야기된 참정권 제한에 대한 이대통령의 대응이 적절한 지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오늘 산행은 남한산성 입구 ~ 남문 ~ 동문 ~ 남한산 정상 ~ 벌봉 ~  북문 ~ 서문 ~ 수어장대 ~ 남한산성 종로로 진행하였다. 산행을 마치고 남한산성 입구역 주변 가게에서 돈가스와 치맥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벌봉 인근에 있는 남한산 정상석..

【남한산성】인기 백대명산 제95위

 

남한산성은 북한산성과 함께 도성(都城)을 지키던 남부의 산성으로 동·서·남문루와 장대(將臺)·돈대(墩臺)· 암문(暗門)·우물·보(堡)·누(壘) 등의 방어 시설과 관해(官해), 군사 훈련 시설 등이 있다. 이 산성의 주변 지역에는 백제(百濟) 초기의 유적이 많이 분포되어 있어서, 일찍부터 온조왕대(溫祚王代)의 성으로도 알려져 왔다.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 13년(673)에 한산주(漢山州)에 주장성 (晝長城, 일명 일장성(日長城))을 쌓았는데, 둘레가 4,360보로서 현재 남한산성이 위치한 곳이라고 믿어져 내려온다. 고려시대의 기록에는 보이지 않으나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誌)에 일장산성(日長山城)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둘레가 3,993 보이고, 성내에는 군자고(軍資庫)가 있고, 우물이 7개인데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또한 성내에 논과 밭이 124 결(結)이나 되었다고 하였다.

 

남한산성(南漢山城)이 현재의 모습으로 대대적인 개수를 본 것은 후금(後金)의 위협이 고조되고 이괄(李适)의 난을 겪고 난 1624년(인조(仁祖) 2)이다. 인조는 총융사(摠戎使) 이서(李曙)에게 축성할 것을 명하여, 2년 뒤에 둘레 6,297보·여장(女墻) 1,897개·옹성(甕城) 3개·성랑(城廊) 115개·문 4개·암문 16개·우물 80개·샘 45개 등을 만들고 광주읍의 치소(治所)를 산성 내로 옮겼다. 이때의 공사에는 각성(覺性)을 도총섭(都摠攝)으로 삼아 팔도의 승군을 사역하였으며, 보호를 위하여 장경사(長慶寺)를 비롯한 7개의 사찰이 새로 건립되었으나, 장경사만이 현존한다. 그 뒤 순조(純祖) 때에 이르기까지 각종의 시설이 정비되어, 우리나라 산성 가운데 시설을 완비한 것으로 손꼽히고 있다. 처음 축성의 목적을 대변해 주듯이 유사시 임금이 거처할 행궁(行宮)이 73칸 반의 규모이고, 하궐(下闕)이 154칸이나 되었다.

 

1798년(정조(正祖) 22) 한 남루(漢南樓)를 세우고 1624년에 세운 객관(客館)인 인화관(人和館)을 1829년(순조(純祖) 29)에 수리하였다. 관해(官해)로는 좌승당(左勝堂)·일장각(日長閣)·수어청(守禦廳)·제승헌(制勝軒)을 비롯하여, 비장청(碑將廳), 교련관청(敎鍊官廳)·기패관청(旗牌官廳) 등의 군사시설이 갖추어져 있었다. 또한 종각(鐘閣)·마구(馬廐)·뇌옥(牢獄)·온조왕 묘(溫祚王廟)·성황단(城隍壇)·여단(여壇) 등이 이루어졌고, 승도청(僧徒廳)을 두어 승군을 총괄하였다. 남한산성의 수어(守禦)는 처음에 총융청(摠戎廳)이 맡았다가 성이 완성되면서 수어청(守禦廳)이 따로 설치되었다.

 

병자호란 때 왕이 이곳으로 피신하였는데, 이때 수어사인 이시백(李時白)은 서성을, 총융대장(摠戎大將) 이서(李曙)는 북성, 호위대장(扈衛大將) 구굉(具宏)은 남성, 도감대장(都監大將) 신경진(申景縝)은 동성 망월대, 원두표(元斗杓)는 북문을 지켰다. 그러나 강화가 함락되고 양식이 부족하여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수항단(三田渡受降檀)으로 나가 항복하였으나, 그 뒤 계속적인 수축을 하여 경영되었다. (출처 : 문화재청)

 

산행은 남한산성 입구 ~ 남문 ~ 동문 ~ 남한산 정상 ~ 벌봉 ~ 북문 ~ 서문 ~ 수어장대 ~ 종로(행궁)로 진행..

남한산성 유원지 입구에서 약 10분 정도 올라가면 만나는 건양대..

야외체육관 앞에 있는 약수터인데 모처럼 음용이 적합하다고 합니다.. 약수 물 한잔을 마시고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현충일을 기념하는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순국선열과 호국영령들의 숭고한 희생을 생각하며 잠시 묵념을 하였다..

조선시대 임금들의 출입문인 남한산성 정문인 남문으로 4대 문 중에 규모가 가장 크며, 

1,779년(정조 3년) 성곽을 보수할 때 개축하고 지화문(至和門)이라 하였다고 한다.

오늘 산행을 함께 한 동료들..

새로 보수 완료한 제1 옹성과 멀리 검단산이 보입니다..

오늘 산성을 달리는 시합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늘은 맑고 금계국이 활짝 피어 있는 남한산성길을 달려가고 있네요.. 

남한산성의 성곽 축성술이 특이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수 있도록 일조를 하였다..

제3남옹성..

 산성 밖의 마을과 첩첩산중..

금계국이 밭을 이루고 있습니다..

한흥사지 암문(제10 암문) / 남한산에는 15개 암문(본성 11개, 봉암성에 4개, 한봉성 1개)이 있습니다..

뒤를 돌아보니 건각들도 오르막은 힘들어 걸어가고 있습니다..

동문은 경기도 광주지역을 연결하는 성문으로 산성 내 행궁을 중심으로 좌측에 위치하고 있어서 좌익문(左翼門)이라 불렀습니다.

동문 가기 전 동암문( 제11암문/시구문) 안쪽 계곡에는 신유(1801년)/기해(1839년)/병인(1866년)박해 당시 천주교 신자들이 300여 명이 순교했고 시신이 이 문을 통해 바깥에 버려졌다고 합니다..

정면에서 본 동문..

남한산 성벽 중 가파른 곳에 설치된 특이한 형태의 성벽.

송암정의 生과死의 나무인데, 살아있는 소나무도 지난 폭설의 영향인지 죽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송암정】

황진이가 금강산에서 수도를 하다 하산하여 이곳을 지나는 도중 기생 2명과 함께 술을 마시던 유생이 황진이를 희롱하려 하자 황진이가 심명한 불도를 설법하므로 이에 감명받은 기생 하나가 자괴하여 투신자살한 지역임.

장경사 절입니다..

1638년(인조 16년) 건립한 장경사는 1624년 남한산성을 개축하면서 전국의 승병들을 수용하기 위해 지은 9개의 사찰 중 하나였다. 지금은 개원사, 망월사, 장경사만이 남아 있는데, 승병들의 숙소라는 목적에 따라 불전보다는 요사채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장경사는 창건 당시의 모습을 가장 잘 간직한 절이라고 합니다.. 

제2 암문으로 들어가서 본 장경사 신지옹성

동장대터 앞 여장은 여전히 보수를 안 하고 그냥 두고 있네요..

벌봉으로 가는 길..

멀리 북한산과 도봉산이 아스라이 보입니다..

벌봉 & 남한산 정상으로 갈 수 있는 제3 암문..

남한산 정상 표지석에서 인증을 합니다..

벌봉 가는 길 무너진 성벽 밖에 죽은 소나무가..

벌봉입니다..

벌봉 부근에 있는  봉암산성 신축비로 바위에 글이 새겨져 있는 데 잘 식별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남한산 제13암문..

성 바깥에 있는 소나무인데 아쉽게도 죽었습니다..

하남시의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집니다..

성 바깥에 있는 멋진 소나무..

북문(전승문)입니다..

1936년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 내에서 바깥의 청나라군과 45일 동안이나 대치하고 있던 300여 명의 군사들은 북문을 통해 성 밖으로 나가 적을 기습 공격했다. 하지만 기세 좋게 나갔던 병사들은 적의 계략에 말려들어 몰살당하고 말았다. 이를 ‘법화골 전투’라 부르는데, 남한산성에서 벌어진 전투 중 가장 대규모의, 그리고 가장 크게 패한 전투였다. 140여 년이 지난 조선 정조 3년인 1779년 성곽을 개보수할 때 ‘그때의 치욕을 잊지 말고 앞으로 모든 전투에서 승리하자’는 뜻으로 ‘전승문’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출처 : 월간 산)

 

서문 가는 길의 소나무들도 많이 상했습니다..

서문(우익문)입니다..

인조는 남한산성 항전 45일 만인 1637년 1월 30일, 죄인의 신분으로 남색 옷을 입고 정문인 남문 대신 서문으로 성 밖으로 나갔으며, 지금의 서울시 송파구 송파동 부근인 삼전도 나루터로 가 청나라 태종에게 네 번 절하고 아홉 번 고개를 조아리는 ‘사배구고두(四拜九叩頭)’의 굴욕을 당하며 항복했다.

 

서문밖 남한산 최고의 전망대에서 본모습으로 서울의 전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습니다..

관악산과 구룡산 대모산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북한산과 관악산이 멀리 보이고

롯데타워 뒤로 한강대교들과 그 너머 남산이 보입니다..

인조가 죄인의 신분으로 남색 옷을 입고 성 밖으로 나간 서문도 이제는 고즈넉합니다..

수어장대 뒷모습입니다..

수어장대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400년 된 향나무..

남한산 4개 장대 중 현재 유일하게 보존되어 있는 수어장대..

수어장대는 다른 장대와 마찬가지로 단층이었지만, 영조 27년(1751년) 중층의 누각형태로 지어졌습니다. 영조는 수어장대 2층 누각의 내부에 병자호란의 치욕을 잊지 말자는 뜻으로 '무망루(無忘樓)'라는 편액을 내걸었습니다. 1896년에 재건된 현재의 수어장대는 조선시대 국방건축의 일단을 보여주는 건축사적 평가를 뛰어넘는 가치가 있습니다.

 

수어장대 앞에 있는 명품 소나무..

남문 가는 길에서 본모습..

중간에 방향을 틀어 만해기념관으로 내려갑니다 / 장승들도 있고..

산딸나무가 만개하였습니다..

물개형상(?)의 석상 뒤로 인화관이 있습니다..

 행궁의 객사건물인 인화관을 개방했네요..

남한산 행궁입니다..

【남한산 행궁】

남한산성의 행궁은 광주행궁 또는 남한행궁이라 하였으며, 1624년(인조 2) 9월 서장대(西將臺) 아래쪽에 건립되었다. 남한산성 행궁은 다른 행궁과 달리 종묘와 사직에 해당하는 좌전(左殿)과 우실(右室)을 갖추었다. 행궁의 규모는 상궐(上闕) 73칸, 하궐(下闕) 154칸으로 모두 227칸의 규모이다. 상궐은 행궁의 내행전으로 정면 7칸, 측면 4칸으로 평면적 180.4㎡(55평)이다. 그중 왕의 침전인 상방이 좌우 각각 2칸씩이고, 중앙의 대청이 6칸, 4면의 퇴칸이 18칸으로 모두 28칸이다.

 

행궁은 한양도성을 임시로 대신할 용도로  건립되었고 병자호란 때 아픈 역사를 품고 있다. 행궁 및 부속시설은 인조 이후 건립된 것으로 19세기 초까지 계속 증축, 보수되었다. 일제 강점기 때 파괴되었다가 10여 년의 공사기간을 거쳐 현재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약 30,000㎡ 부지에 상궐, 하궐로 나뉘는데 정자, 좌전, 광주 유수의 집무사, 외행전, 임금의 처소인 내행전, 정문인 한남루 등이 있다. 행궁을 둘러보기 위해서는 행궁 매표소를 거쳐야 한다.(출처 : 대한민국 구석구삭 등에서 발췌)

 

남한산 산행을 마치고 남한산성 입구역 인근의 재래시장을 잠시 들러 보았는데 시장이 아주 적은 규모더군요..

재래시장을 둘러본 후 남한산성 입구역 인근에 있는 가게에서 치맥으로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선관위의 투표용지 부족사태에 대한 이대통령의 대응에 대한 소고..

 

지난 6.3일 지방선거 당시 송파구를 위시하여 전국의 투표구 중 약 50여 곳의 투표지에서 투표용지가 부족하여 선거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한 사태가 발생하였다. 국민의 신성한 투표권 행사가 선관위의 부주의로 제한된 엄청난 사건인데도 당시 이를 보고 받은 이대통령의 반응은 다음과 같다. "이재명 대통령은 관계기관에 행정부의 모든 권한과 책임을 동원해 문제의 원인을 명확히 밝히고, 책임이 있다면 분명히 물을 것을 지시했다. 또한 국민의 참정권이 훼손되는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신뢰할 수 있는 대책을 신속히 마련하라고 당부했다." 어찌 보면 대통령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말 같지만 자세히 보면 너무나 평범하지 않을 수 없는 반응이었다. 이번 사태에 대해 선관위가 책임이 있다는 것은 불을 보듯이 뻔한데도 책임이 있다면 묻겠다는 말은 너무나 안이한 자세라 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얼마 전 발생한 스타벅스의 탱크데이에 대한 반응에 비하면 뜨뜻미지근하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대통령은 5·18 민주화운동 46주년을 맞아 SNS에 스타벅스의 ‘탱크데이’ 마케팅을 “저질 장사치의 비인간적 막장 행태”라고 비판했다. 닷새 뒤인 23일 스타벅스가 2년 전 진행한 ‘사이렌’ 이벤트도 문제 삼았다. 세월호 참사일인 4월 16일에 그리스 신화 속 인어 ‘사이렌’을 이벤트에 활용한 점을 지적하며 “악질 장사치의 패륜 행위”라고 비판 수위를 높였다. 또 탱크데이 마케팅에도 “금수 같은 행태에 국민적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질타했다. 5월 20일, 이대통령은 엑스에서 7년 전 '탁 치니 억'을 홍보 문구로 사용했던 무신사의 사례를 질타하였다. 이대통령의 강한 질책의 여파로 정부부처 내 불매 움직임이 확산한 가운데, 보건복지부도 스타벅스와 함께 진행해 온 노인일자리 교육 사업을 잠정 보류하기로 하였다. 

 

사상초유의 투표용지 부족사태와 사기업 스타벅스에 탱크데이에 대한 이대통령의 대응을 보면 어떤 것이 더 중요한 사안인지에 대한 인식부족을 여실히 엿볼 수 있다고 할 것이다. 국민의 참정권을 제한한 엄중한 사태에 대하여 정부의 수장으로서 책임감이 결여된 인식은 어떻게 봐야 할까? 1960년대 4,19 부정선거에 이후 최대의 선거스캔들이라 할 수 있는 이 사건에 대하여 특검 등을 통해서라도 제대로 밝혀야 할 것이다.. 이대통령의 대응과 향후 처리방향에 대하여 국민들은 두 눈을 부릅뜨고 지켜볼 것이다..

 

* 사태 발생 후 4일이 지난 6.7일 오후 비판 여론이 단시간에 확산하자  이대통령은 사태 초기의 기류와는 확연히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 이대통령은 검·경 합동수사본부 구성을 지시하고 국회 차원의 조속한 국정조사를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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