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4년 11월 만주철도의 상징, 특급 '아시아'호

작성자조동화|작성시간22.07.20|조회수129 목록 댓글 0

  자유인 조동화는 인간의 삶을 영상을 통해 구현해 보고자 노력하는 사람이다. 인간의 삶이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이 세상에 왔으니 삶에 이유가 없고, 그냥 태어났으니 사는것이다. 인간의 삶이란 정답이 없는 것이 정답인 것 같다. 정답없는 인생, 내가 하고자 하는것 하면서 행복 느끼며 살면 그것이 행복아닐까 생각해본다. 오직 한번의 인생 소중한 시간을 즐겁게 살기 위하여 나날이 최선을 다하자. 영상을 통한 인간의 행복, 선과 악, 전쟁, 대학살, 권력 만행의 기록을 더듬어보자.     건강관리  잘 하시고   무궁한 행운을 기원합니다.>

1934년 11월 만주철도의 상징, 특급 '아시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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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타파-경의선, 멈춰진 한반도 시계

   젊음은 두 번 다시 오지 아니하며 세월(歲月)은 그대를 기다려주지 아니한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人生). 자고이래(自古以來)로 모은 재물(財物)을 지니고 저승까지 간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시간(時間)이란 누구에게나 똑같이 부여(附與)되는 것. 느끼기에 따라 길고 짧은 차이(差異)가 있나니 즐거운 시간은 천년(千年)도 짧을 것이며 괴로운 시간은 하루도 천년(千年)같은 것 그러므로, 시간이 짧게 느껴지는 사람은 오히려 행복(幸福)한 것. 시간이 길게 느껴지는 사람이 어찌 행복(幸福)하다 하리요? 세월(歲月)은 그대를 기다려주지 아니한다.

1934년 만주철도 아시아호 특징

-유선형이며 최고속도 134k/h, 당시 기술로는 상상초월
-동륜의 지름 2m로 사람키보다 크다.
-다롄(大连)~창춘~하얼빈 간 옛 고구려 우리땅 광활한 만주땅 운행
-일본은 한국을 거쳐 만주까지 영토 확장을 꾀했다.
-일본이 2차대전에서 전쟁에 패했으니 말이지 일본의 속국이
  될뻔 했네
-역사를 잊어서는 않되야

 

만주사변으로 일본은

1932년 만주괴뢰정부를 세웠다.

일본은 1932년 상하이 사변을 일으켜서 중국 본토까지 진출했고세계의 이목이 상하이에 집중된 틈을 타서 만주국을 세웠다.

1932년 3월 1일 일본은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다가 퇴위한 선통제 푸이를 처음에는 집정으로그리고 나중에는 황제로 내세웠다일본 제국에 철저히 종속된 괴뢰국가였던 만주국은 1945년 8월 18일 붕괴되었다.

 

南滿州鐵道株式會社

줄여서 만철(滿鐵/満鉄, まんてつ, 만테쓰).[5] 만주국에 있던 철도회사. 동양척식주식회사나 동인도회사처럼 사실상 수탈기업이자 일본 제국의 공기업이었다. 처음에는 일본 정부가 지분 50%를 보유한 형태였으나, 이후 일본 정부가 주식 100%를 보유하게 된다.

 

1906년 러일전쟁에서 일제가 승리하면서 랴오둥반도가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일제로 넘어가게 된다. 이때 할양받은 철도[6]와 부속지를 바탕으로 설립되었으며, 초대 총재는 대만총독부 민정장관으로 대만 식민정책을 총 지휘했던 문관출신 고토 신페이(後藤新平)였다. 철도 사업을 경영하는 것을 주 목적으로 하여, 군수업, 광업, 유통업, 제조업, 출판업 등 만주국의 산업 전반을 지배하였다. 만철의 성립 자체가 러일전쟁 중 만주군 총참모장 고다마 겐타로가 고토 신페이의 영향을 받아 헌책한 계획에 따라 설립되었다. 그 요지는 러일전쟁 이후 만주 경영의 유일한 요결은 철도 경영에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성립 취지에 따라서 만철은 철도는 기본으로 광산, 항만, 유통업, 제조업, 출판업, 정유업, 학교, 병원 등 다양한 분야로 뻗어나가서 실질적으로 만주국의 경제를 지배하였다. 단순한 철도 회사가 아니었던 것.[7]

 

한편 1910년 한일병탄이 기정사실화된 배경에는 만주 철도의 중립화를 둘러싼 미일러 간의 암투가 촉매 역할을 했다는 주장이 있다. 러일전쟁 끝나고 미국이 만주철도에 개입하려는걸 눈치챈 일본이 바로 전쟁끝낸 러시아와 협상하고 미국에 앞서서 만주철도 관련 이권을 선수친 것. 그런 관계로 만주-중국으로 향하는 이권의 교두보를 위해서 한일합방을 공고화했다는것이 이 글의 요지이다. 만철에 근무하는 일본인들의 경제적 보상 역시 좋은 편이었다. 만철에 근무하는 일본인들은 2만 명이 넘었는데, 이들은 중국인 하인을 고용하는 등 귀족과 같은 삶을 만주에서 누릴 수 있었다.

 

그 거대한 스케일에 비해 직접 운영한 철도 노선은 의외로 짧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러면서도 굵직한 노선을 운영했다. 장춘(신징) ~ 다롄 구간의 701km이 주 간선이었고, 그 다음으로 굵직한 노선이 쑤자툰 ~ 신의주 노선이었다. 함북선 남양 ~ 나진 구간의 전신이 되는 북조선선도 단독 선구로서 운영했다. 그 외 장춘 ~ 하얼빈 구간을 포함한 광대한 만주 철도망은 만주국 국유철도가 직접 운영했다. 다롄에서 장춘을 넘어 만주국 국유철도가 운영하는 하얼빈에 이르는 구간에서는 아시아 최고속으로 유명한 특급열차 '아시아'가 운영되기도 했다(1932~1943).

 

1920년대에는 일본 정부의 1년 세입의 4분의 1에 달하는 막대한 연간 수익을 기록하였을 정도로 규모가 거대화되었다. 실제로 만철은 1923년 부터 일본제국이 패망하는 1945년 사이에 일본제국 내 모든 법인 중 자본금 규모 1위 법인이다. 민간기업과 직접 비교는 무리겠지만 당시 일본의 3대 재벌이었던 미쓰비시그룹, 미쓰이 그룹, 스미토모 못지않게 당시 일본제국의 경제에 미치는 영향력이 컸던 회사다.

 

1917년부터 1925년까지 조선총독부에서 한반도 내 철도를 위탁경영하기도 하였고[8], 동양척식주식회사와 동업으로 만주 이민계획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다나카 상주문에서도 중요한 역할로 언급되고 있다.

 

만철도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1960년대까지도 대한민국 철도청에서 만철이 생산한 화차를 사용하였다고 하니 의외로 그 흔적은 끈질겼다. 심지어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오지에선 1980년에도 만철제 화차가 현역으로 굴러다니고 있었다. 더 뜨악할 사실로, 북한에서는 만철에서 쓰던 푸레사(プレサ) 형 증기 기관차[9]2015년에도 현역으로 구르고 있었다.

 

2차 세계 대전으로 일제가 패망한 뒤에는 만주를 점령한 소련이 남만주철도를 모두 차지했으며, 중국이 공산화된 후 스탈린이 공산화 축하 선물로 1952년 반환했다.

                                                   ===나무위키===

 

만철의 상징, 특급 '아시아'호

아시아호 특급은 기관차의 바퀴가 지름이 미터가

넘을 정도로 거대한 대형이다.

그리고 당시의 증기 기관차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유선형 외장을 했다.

유선형의 실용화 개념은 오늘날 새마을 호 기관차나 KTX

설계의 기본과 같은 것이다.

아시아 고속은 그 당시에는 열차로는 꿈에도 생각지도 못할 냉방 장치가 되어 있었고 식음료를 위한 냉장고도 있었다.

 

아시아 특급은 1934년 11월 대련과 신경[지금의 장춘]

구간을 달리는 운행을 시작했다.

최고 속도는 당시 증기 기관차로서는 믿기 힘든 134 킬로 미터였다.

아시아호는 여섯 량의 초호화 객차를 달고 대련 신경 구간 700킬로를 7-8시간에 주파했었다.

 

최첨단 유선형의 대형 기관차가 6량의 담록색[淡綠色]

호화 객차를 달고 평원을 달리는 것을 보고 만주의 가난한 백성들은 일본 기술과 국력과 위용에 기가 죽을 수 없었다.

아세아 호기관차는 지금 중국 심양 인근 소가둔[蘇家屯]

심양 철로 증기 기관차 진열관 박물관에 가면 그 옛 모습을 볼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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