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영감설에 대한 소고
영감을 의미하는 헬라어는 데오프뉴스토스(theopneustos)는 데오스(theos, 하나님)와
프네오(pneo, 숨쉰다)의 합성으로서, 딤후3:16에만 나오는 낱말로서
하나님께서 성경(원본)을 기록하는 사람에게 기록자가 인간적인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영적인 통제력을 행사하셨다는 것입니다.
벧후1:21은 "예언(豫言)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聖靈)의 감동(感動)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성경영감설은 일찍이 유대교의 전통과 신약성경(딤후3:16과 벧후1:21 등)을 기초로 하여 형성된
성경관이지만 종교개혁 때까지는 로마 카톨릭교회의 강한 교황권 때문에
상대적으로 위축되어 있다가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란 구호를 외쳤던
종교개혁자들에 의하여 그 권위를 확립하였습니다.
그러나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부정적인 성경비평학으로 인해
성경의 영감설 내지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의 권위가 도전을 받다가
금세기에 와서는 바르트의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Die Theologie des Wort Gottes)에 의하여
다시 그 권위를 되찾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의 권위에 관한 논쟁은
그 후로도 바르트와 불트만 및 그의 제자들 사이에서 계속되는 논쟁으로 이어졌고,
미국에서는 1929년 메이첸(G. Machen)이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세움으로써
프린스턴신학교의 분열을 가져오기에 이르렀습니다.
영감의 성질(性質), 영감의 방법(方法), 영감의 범위(範圍) 등을
제대로 정리하려면 한 한기를 공부할 수 있는 분량입니다.
첫째, 성경의 영감(靈感)은 그 성질(性質)에 있어서
기계적 영감(mechanical inspiration)이 아니고
유기적 영감(organic inspiration)혹은 목적(目的) 영감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고백입니다.
이렇게들 간단하게 말할 수 있지만 유기적(有機的) 영감이란 말도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습니다.
극단적,맹목적 보수주의 신학자들은 기계적 영감설은 주장해 오다가
자신들이 무지하게 기계적 영감설을 주장하는 것이 온당치 않다는 것을
최근에 와서야 자신들의 잘 못을 깨닫고 있는 정도입니다.
멍청하고 게으른 사람들은 공부도 해 보지 않고 아직까지 기계적 혹은
축자적 영감설을 주장해야만 보수요 정통이요 개형주의라고 떠들고 있습니다.
한 때 유기적(有機的) 영감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이상한 눈으로 바라 보았던
극단적, 맹목적 보수주의자들이 결국은 유기적 영감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이
개연성이 있고 옳다는 것을 속으로는 시인하면서도 겉으로는 자존심 때문에
많이 머뭇거리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의 저자를 기계적(機械的)으로 사용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개인적인 지식이나 경험, 사상이나 개성 등을 그대로 사용하시면서
당신의 메시지를 기록하도록 성령으로 감동하셨다는 유기적, 혹은 목적 영감설은
이제 와서는 재론의 여지도 없는 정설(定說)로 수용(授用)되고 있습니다.
성경을 읽어 보시면 기록자의 개인적인 지식, 경험, 사상, 개성 등 뿐 아니라
심지어 그들이 즐겨 쓰는 용어나 문체까지도 반영되어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둘째, 성경의 영감은 그 방법에 있어서
축자적 영감(verbal inspiration)이 아니고
개념적 영감(conceptual inspiration)이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기록할 때 하나님께서 개입하신 영감의 방법은 기록자의 이성과 인격을 무시하고
글자 한 자 한 자에 이르기까지 축자적으로 주관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타내고자 하시는 내용을 개념(의미)상으로만 바로 기록하도록 영감하시고,
어휘의 선택이나 표현의 기술 방법 등은 저자에게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원본이 있었다 해도 다음과 같은 차이는 그대로였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부활에 관한 기록의 차이같은 것입니다.
기독교 교리를 두고 말할진대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과 부활의 교리는
매우 중요한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아래와 같이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1. 무덤에 찾아간 사람에 대하여 네 복음서는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마태 :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
마가 :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
누가 :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와 또 저희와 함 께 한 다른 여자들"
요한 : "막달라 마리아"
2. 그들이 무덤에 간 시각에 대하여는
마태 :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미명에"
마가 :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은 때에"
누가 :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요한 :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
3. 무덤에 나타난 실체에 대하여
마태 : "주의 천사"
마가 : "흰옷을 입은 한 청년"
누가 :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
요한 : 언급이 없음
무덤에 찾아간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만이 네 복음서에 공통으로 기록
무덤에 간 시각에 대해서는 안식 후 첫날 새벽이라는 점에서는 네 복음서가 공통
무덤에 나타난 실체에 대해서는 기록된 네 복음서가 다 다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한 신앙고백의 내용에 대해서도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복음은 각각 다음과 같이 달리 기록하고 있다.
마태 : "주는(당신은)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가 : "주는(당신은) 그리스도시니이다"
누가 :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요한 : 기사 자체가 없음
위의 예에서 보면 베드로의 고백에서 그리스도라고 한 점은 세 복음서에 공통되나
그 이외는 고백의 내용으로나마(마태에서는 "하나님의 아들"로도 고백),
그 표현에 있어서나(마가에서는 "하나님의 그리스도") 다르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활의 사건이 네 번이나 일어난 사건이 아니고 한 번 일어난 사건이요,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가이사랴 빌립보 도상에서는 한 번만 있었던 사건으로 믿을진대,
그리고 그 이야기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것을 믿을 수 있다고 해도
그 영감이란 축자적 영감이 아니고 개념적 영감,
혹은 목적 영감이라는 것이 너무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러한 경우에 성경 저자에 대한 하나님의 영감을 믿으면서
축자적(문자적) 영감을 고집하는 것은 하나님과 교회를 위하는 줄로 알고 떠들지만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영감을 불어넣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불일치를 초래했다고 하는 결과를 가져와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는 중대한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성령께서 한 글자 한 글자 축자적으로 영감을 불어 넣어 주관하셨다면
4 개의 복음서가 한 글자도 틀리지 않게 기록되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만약 원본의 기자가 한 글자도 틀리지 않게 기록했었던 것을 사본 기자들이
저렇게까지 변개 했다면 이는 그야말로 크나큰 죄를 면치 못할 일이라 할 것입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3년 동안 함께 했던 사도였지만
그의 기록은 많이 누락되어 있었습니다. 후에 누가가 정밀하게 살펴 본 후에
누가는 마태복음과 마가 복음에서 누락된 사실들은 약 30 가지나 더 보충하게 됩니다.
이 정도면 마태복음을 기록한 마태라는 사람의 기록이 완전하지 않았다는 것을
신학을 제대로 한 사람이면 다 알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누가가 30가지 이상을 보충을 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누가가 그렇게 많이 보충했지만 그래도 빠진 것이 상당히 많아서 요한복음이 필요합니다.
요한의 복음서를 잘 살펴 보시면 거기에는 먼저 기록된 3 복음서, 이른바 공관복음에 없는
특수한 자료가 18가지 정도 더 증보된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은 어떤 사람의 기록도 완전하지 않았다는 것을 사복음서 대조를 통하여 금방 파악할 수 있습니다.
셋째, 영감의 영역을 두고도 많이 연구 되어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가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벧후 1:21)"
베드로는 분명히 제한 하기를 성경의 요소 중에 예언(豫言)적인 부분을 확실하게 했습니다.
누가 보아도 예언은 예언자 자신의 말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서의 경우는 많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또 딤후3:16절의 경우 [모든 성경]이라고 했지만 바울이 말했던
모든 성경은 신.구약 66권을 두고 한 말이 아닙니다.
또 예수님께서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요10:35)하신 말씀에서의 성경도
신구약 66권 전체를 말씀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더 정직하게 말하자면
신약의 기자들이 말하는 [성경]이라는 단어는 우리말 성경의 경우 46 회나 나오지만
이들 중에 단 한번도 신약을 지칭했다고 볼 수 있는 경우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때는 신약이라는 개념이 아직은 정립 되지도 않았고
어떤 신약 문서는 아직 기록되지도 않았던 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마 21:42, 마 22:29, 마 26:54, 막 12:10, 막 12:24, 막 14:49, 눅 4:16, 눅 24:27,
눅 24:32, 눅 24:45, 요 2:17, 요 2:22, 요 5:39, 요 7:38, 요 7:42, 요 10:35,
요 13:18, 요 17:12, 요 19:24, 요 19:28, 요 19:36, 요 19:37, 요 20:9,
행 1:16, 행 8:32, 행 13:29, 행 17:2, 행 17:11, 행 18:24, 행 18:28,
롬 1:2, 롬 4:3, 롬 9:17, 롬 10:11, 롬 11:2, 롬 15:4, 고전 15:3, 고전 15:4,
갈 3:8, 갈 3:22, 갈 4:30, 딤전 5:18, 딤후 3:15, 딤후 3:16, 히 3:15, 벧후 3:16)
위에서 성경이라고 말씀하실 때는 예외 없이 구약만을 두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역대상하서 기자는 사실을 진실하게 기록했다가 보다는 목적(目的)을 가지고
자유롭게 기록한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다윗의 범죄한 사실을 의도적으로 누락시키고 있고
솔로몬의 타락에 대하여 일언반구도 언급이 없이 잘 한 것만을 극대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악의적으로 누락은 아니었지만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자유롭게 온갖 자료를 검토하면서
필요에 따라 역사적 사실이라도 첨삭을 하면서 기록했다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또 역대상하서의 경우는 기계적인 영감을 받아서 기록한 것이 아니라
여러 사료들을 참고해서 인용도 하면서 기록했다는 것을 누구라도 알 수 있습니다.
역대상하여 기자는 아래와 같은 책을 참고하고 인용한다는 출전까지 밝히고 있습니다.
1. 잇도의 족보책(대하12:15)
2. 이사야의 묵시책(대하32:32)
3. 호세의 사기(대하33:19)
4. 잇도의 주석책(대하13:22)
5. 선견자 나단의 글(대하9:29)
6. 선지자 아히야의 예언(대하9:29)
7. 잇도의 묵시책(대하9:29)
8. 선견자 사무엘의 글(대상29:29)
9. 선견자 갓의 글(대상29:29)
10. 예후의 글(대하20:34)
하나님께서는 놀랍게도 이러한 사료들을 기록하게 하셨고 보존하게 하셨으며
바벨론으로 포로되어 갈 때도 이러한 사료들을 보존하여 두셨다가 역대상하서를
기록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참고하고 인용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39권의 구약(그들은 39권으로 나누지 않지만)문서들 중에서
토라를 제일 중요하고 거룩한 책으로 중시하고 있습니다.
느비임을 그 다음 중요한 책으로 중요시 하고 있습니다.
케투빔을 비교적 덜 중요한 책으로 분류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리도 후서를 쓸 때 개인적인 감정을 많이 토로하고 있습니다.
이때 바울 자신은 주님의 영감으로 쓴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자기도 화가 났기 때문에 기탄 없이 말하겠다고 선언하고 있기도 합니다.
(고후 11:17) 내가 말하는 것은 주를 따라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어리석은 자와 같이 기탄 없이 자랑하노라
물론 이 말은 고린도 후서에만 국한해서 한 말씀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말했지만 우리는 그가 항상 그리스도 안에 있었던 사람으로 믿어서
바울 자신은 느끼지 못했더라도 언제나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서 글을 썼다고 믿는 것입니다.
넷째, 성경의 영감이란, 엄밀히 말하면 원본의 저자에 한한 것입니다.
성경의 내용은 영감을 받은 저자에 의해서 기록되었던 원본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지금에 와서는 구약은 물론 신약의 원본의 한 조각도 존재하지 않고 또 만져도 본 사람들이 없습니다.
[원본은 일점 일획도 오류가 없었다.]
이렇게 마침표를 찍어서 선언하는 것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말이야 할 수 있지만 아무도 증명을 할 수는 없습니다.
원본성경이 한 페이지도 없기 때문에 이런 주장은 쉽지 않습니다.
[원본은 일점 일획도 오류가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바램이지만 역시 어렵습니다.
정직하게 말해서 그것은 짐작에 불과하지 확증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원본은 일점 일획도 오류가 없었을 것으로 믿는다.]
이렇게 하는 말은 신앙고백적인 말일 뿐이지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증명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 사람의 성경관을 엿볼 수 있는 것이고
그의 신앙의 기초를 가늠할 수 있는 척도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성경을 충분하게 읽어 보지도 않고 면밀히 살펴 보지도 않은채
마구잡이로 주장만 한다고 해서 사람들 마음속에 건전하 믿음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설(說)은 여전히 하나의 학설(學說)로만 남아 있는 것 뿐입니다.
대한예수교 장로회가 고백하는 12 신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1.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니 신앙(信仰)과 행위(行爲)에 대하여
정확무오(正確戊午)한 유일(唯一)의 법칙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신앙과 행위]의 기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다른 목적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신앙과 행위를 지도하기 위하여
특별히 구별되게 기록되었기 때문에 다른 문제를 가지고 트집을 잡은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께서 영감을 사본의 필사자(筆寫者)에게도 주어졌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소하기는 하지만 사본끼리 오류가 있는 것을 두고 논의하자면 복잡해집니다.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본은 파피루스, 양피지 사본을 합쳐서
대문자 사본, 소문자 사본, 성서일과표 등 모두 5,500개도 넘는데
그 중의 단 둘도 완전히 동일한 것이 없기 때문에
사본을 기록하는 사람들까지 영감으로 기록했다고 주장하게 되면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권위을 높이겠다고 해서 그런 말을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필사자에게까지 영감설을 주장하게 되면 이야기는 더 길어지고 복잡해지면서
자칫하면 증명할 수도 없는 것을 가지고 의미 없이 주장하는 공론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본을 기록하는 필사자에게 영감을 주셨다면
"왜 한 두 단어가 더해지고 누락되고 또 약간씩 변개 되도록 방치하셨는냐"
하는 의문이 당연히 나오게 될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반대 의문도 당연히 예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감이 겨우 원본을 기록했던 몇 사람들만 미칠 수 있었다면
사본을 만드는 사람들에게까지는 미칠 수가 없었느냐 하면 이것도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원본이 완벽했다고 해도 이미 원본이 사라지고 난 후에는
사본을 다시 사본으로 필사하여 만드는 자가 제멋대로 변개 해 버리면
원본이 없어진 후에는 큰 일이 날 수도 있는데 왜 사본을 만드는 사람들에는
영감으로 도와 주시지 않았는가 하는 문제도 분명히 제기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이 바르게 전해지는 것을 원하셨다면 원본을 기록할 때는 말할 것도 없고
사본을 만들 때에도 누락되거나 첨가 되거나 변개함이 없도록 지켜 주실 수 있었을 것이고
또 그렇게 해 주셨어야 할 것이데 어찌하여 오늘날 이렇게 많은 사본들이
단 두권도 완전히 일치하는 책이 없을 정도로 잘 못되는 것을 방치하셨느냐고 의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본 뿐만 아니라 성경을 번역한다는 것은
원본기록이나 사본기록보다 훨씬 더 어려울 수 있습니다.
아무리 원본이 완벽했고 사본이 오류가 없었다고 해도 번역하는 사람이 실수하거나
변개 해 버리면 교회가 큰 혼란에 빠질 수도 있는 문제요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일이
너무나 방대한 일인데도 성령께서 전혀 영감을 주시지도 않으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영어나 한자(漢字)성경에서 우리말 성경이 번역될 당시에
한국 목회자들의 영어실력이나 선교사들의 한국어 실력을 생각할 때
지금의 개역 성경을 읽어 보면 찬탄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이야 헬라어 히브리어 사전이 발달하고 원어 분해성경까지 나와서
분위기가 많이 달라지긴 했지만 그래도 성경을 번역한다는 것은 실로 엄청난 일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는 사본을 기록하는 분들은 물론 번역하시는 분들에게도
성령님의 강력(强力)한 감동(感動)이 있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말쟁이들의 논쟁(論爭)이 될까 싶어서 절제(節制)하곤 합니다.
저 자신도 가끔씩 글을 쓰는 경우가 있는데 사실 제일 쉬운 것이 직접 저술입니다.
저술(著述)이란 저자가 뜻대로 저술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쩌면 제일 쉬울 수 있습니다.
사본(寫本)을 만든다는 것은 저술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번역(飜譯)이란 저술 보다도 어렵고 필사본보다 훨씬 더 어렵기 때문입니다.
다른 책도 아니고 성경을 번역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그 어떤 작업보다 어렵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어떤 모양으로든지 도우시지 않으면 번역은 불가능할 것으로 믿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아득한 그 옛날 즉 2000년 전 그 시대에 지금의 성경의 원본을 기록한 사람들에게
성령께서 영감을 주시지 않았다고 누가 감히 생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세익스피어는 만약 이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고
어떤 사람이 기록한 것이라면 나는 그 성경을 기록한 사람을
하나님으로 부르고 싶다고까지 했습니다.
젊은 사역자들이나 신학자, 그리고 성도들은 최소한 자기 나이 수 만큼이라도
성경 본문을 읽어 보시고 너무 헤프게 굳어지지 말고 유연한 자세로 공부를
성실하게 해 보신 후에야 건전한 성경관, 성경적 역사관, 성경적인 세계관,
그리고 성경적인 가치관을 정립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저를 만나 보지도 않고 또 저의 강의 풀코스를 들어 보지도 않고
신정통주의자 운운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저는 신정통주의나 구정통주의도 신뢰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개혁주의 복음주의 운운하는 사람들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경 66권 중에 제대로 한 권도 가르쳐 보지 않은 사람들이 개혁주의라고 떠드는 것과
칼빈의 기독교 강요라는 책도 한 번 제대로 읽어 보지도 않은 사람들,
칼빈처럼 알지도 믿지도 살지도 않으면서 칼빈주의라고 떠벌이는 사람들은
자기를 속이는 사람들일 수도 있기 때문에 결코 신뢰할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어느 노선의 기본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실력으로 너무 헤프게 무슨 주의를
표방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교회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칼 바르트가 그 유명한 [교회 교의학]이란 책을 썼는데
자그마치 4*6 배판으로 깨알같은 글씨로 8,000 페이지에 달하는 책입니다.
아직까지는 그 책을 다 읽어 본 사람이 한국에는 단 한 사람도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저도 물론 읽어 보지 못했습니다. 저는 칼 바르트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습니다.
칼 바르트가 쓴 글은 대략 20,000페이지 쯤 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저는 읽어 보지도 않았고 또 시간이 난다고 해도 읽어 볼 마음도 없습니다.
바르트가 쓴 글에도 옳은 말도 있을 것이고 유익한 말도 많이 있을 것으로 생각은 합니다.
그러나 진리를 그렇게 혼잡하게 만드는 사람들을 저는 제일 싫어하는 편입니다.
함부로 성경을 비평을 하려면 어중이 떠중이들도 별로 신뢰하지 않습니다.
비평을 하려면 불완전한 신학들을 비평해야지 어설픈 지식을 가지고
성경을 비평하겠다고 떠들어 대는 사람들은 별로 좋아 하지 않은 편입니다.
제가 믿기로는 진리는 단순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성경이 때로는 어려운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도대체 20,000페이지나 글을 일어 보아야
이해가 되는 책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바르트에 대하여 별로 매력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가 쓴 글들이 성경과 일치 한다면 성경을 읽으면 되었지 달리 그의 글을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가 쓴 글들이 성경과 일치 하지 않는다면 읽어줄 가치가 없을 것이니 읽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바르트 뿐만 아니라 서구의 신학자들이 거의 다 비슷한 우를 범하고 있어서
서양의 신학자들 중에 칼빈 외에는 존경하거나 신뢰하는 학자가 별로 없습니다.
그 이유는 그분들은 무시하자는 것이 아니라 저와 여러분이나 다 잘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 우리 나라 목회자들도 심한 혼란에 빠져 있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는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매우 훌륭한 성품과 지식과 은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성경을 모르면
본인도 힘들고 성도들까지 힘들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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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 복음 속에 있는 문제를 제가 강의 중에 지적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사야서 7장 14절을 마태는 그리스도께서 동정녀 마리아를 통하여 탄생하시게 될
예언으로 생각하고 인용한 사실에 대하여 보충 설명을 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서 7장 14절 앞뒤를 잘 읽어 보시면 이사야 선지자는 수백년 후에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통하여 탄생하시게 될 것을 예언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누구나가
어렵지 않게 분별할 수 있는 내용의 기록입니다. 이사야서 7장을 잘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해석하거나 인용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기본원칙을
유념하시고 조심하셔야 할 것입니다.
①언제, ②어디서, ③누가, ④누구에게, ⑤무엇을, ⑥어떻게, ⑦왜
그러한 말씀이 주어졌는지를 면밀하게 검토해 보아야 합니다.
①언 제 : 이 때는 아하스 왕 때의 일입니다.
②어디서 : 유다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③누 가 : 이사야 선지자가
④뉘에게 : 아하스 왕에게
⑤무엇을 : 아람왕 르신과 북왕국 왕 베가를
⑥어떻게 : 두려워 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⑦왜썼나 : 두려워 할 필요도 없는 것을 두려워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하스 왕 때에 북왕국 왕 베가와 아람왕 르신이 예루살렘으로 올라와
공격을 시도했지만 예루살렘을 함락 시키지도 못하고 물러갔습니다.
그 때 어떤 사람들이 아하스 왕에게 말하기를 아람왕 르신과
북왕국 이스라엘 왕 베가가 동맹(同盟)하였다는 정보(情報)를 흘렸습니다.
그러자 왕의 마음과 백성들의 마음이 삼림이 바람에 떨림같이,
사시나무 떨듯이 두려움이 사로잡혀 떨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보내어 아람왕 르신이나 북 왕국 베가가
아무리 큰소리 쳐도 연기 나는 두 부지갱이 수준 밖에 안되니까
전혀 두려워 하지 말고 염려 할 것이 없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도 아하스는 두려워서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하스 왕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지켜 주실 증거가 되는
징조라도 기도해 보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하스는 또 나는 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 같은 짓은 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이 때 이사야 선지자가 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하나님께 징조(徵兆)를 구하지 않아도 주께서 친히 한 징조(徵兆)를 주실 것인데
자 보아라 ! 지금 한 젊은 여자(알마 ; 처녀가 아니었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인데
그 아이를 낳거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인데 이 아이가 미쳐 선악(善惡)도
분별(分別) 못하고 겨우 젖 떨어져 버터와 꿀을 먹을 수 있을 때쯤에는
지금 아하스 왕이 두려워하고 미워하는 두 왕 즉 아람왕 르신과
북왕국 이스라엘 왕 베가의 땅이 폐한 바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은 앗수르 왕이 와서 아람과 북왕국 이스라엘을
쳐서 망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17절에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마리아가 잉태하여 예수님을 낳을 것을
예언한 것이라고 마태처럼 그대로 오해(誤解)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위에서 말씀하시는 14절의 처녀라는 번역은 오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단어는 처녀(뻬툴라)가 아니라 그냥 젊은 여자(알마)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알마(젊은 여자)는 마리아를 예언한 것은 전혀 아니고 아하스 당시,
즉 이사야 선지자가 말씀하시던 그 때에 살았던 어떤 여인이었습니다.
그 때 이사야 선지자는 전혀 동정녀 탄생을 예언할 생각도 없었고.
다만 지나치게 소심하여 벌벌 떨고만 있는 아하스 왕을 안심시킬 마음 밖에는
다른 어떤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본문의 배경을 다시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따라서 이 말씀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없이
마태가 무리한 인용을 하게 되어 많은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한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이사야 선지자가 무슨 말을 했던지
"마태가 그렇게 인용했으면 마태가 인용한 것이 맞는 것이지 뭐그리 말이 많으냐!?"
하는 식으로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인데 이러한 자세는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잘 모르고 그냥 그 말씀을
동정녀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할 예언으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면밀하게 보지 않으면 일반인들이 잘 발견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또 이러한 문제를 제기 했다가는 괜한 구절수에 휘말리게 될 것을
두려워하여 어떤 사람들은 알면서도 그냥 어물쩡 말 없이 넘어가고 있는 현실입니다.
신약 성경에 신약기자들이 구약을 인용한 구절에는
때로는 무리한 인용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 중에 마태복음에 주로 그러한 인용이 있습니다.
지금부터 마태복음 안에 무리하게 인용된 구절을 제시해 보겠습니다.
마태는 족보를 기록하면서 세 사람의 왕을 의도적으로 누락시키고 있습니다.
1장 8절에 요람 다음에 ①아하시야(1년 통치) ②요아스(40년 통치) ③아마샤(29년 통지)
세 왕을 빼먹어서 결국은 14대라는 이상한 틀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결국 마태는 14 대 이론에 맞추기 위하여 유대역사 중 70년을 무시해 버렸습니다.
그렇게 한 것까지도 성령께서 그렇게 하라고 지시하셨다고 하면 할 말은 없습니다.
성령께서 마태에게 3명의 왕을 빼고 14씩 맞추라고 영감을 주셨을 것으로 믿어야 할까요 ?
아니면 거기에 대하여 아무말도 하지 말아야 정통이고 보수이며 개혁주의가 되는 것일까요 ?
이런 것을 보면서도 오류가 있다고 말하면 안되고
무조건적으로 성경원본에서는 일점 일획도오류도 없었다고 믿어야 한다고
주장하시는 분들이 있다면 그런 분을 직접 만나 뵙고 싶습니다.
마태는 다윗의 이름을 가지고 지나치게 상상력을 발휘하다가 히브리어로 다비드의 철자
즉 달렛(4) + 와우(6) + 달렛(4)으로 다윗의 이름의 글자를 숫자로 더하여 표기하면
14 가 된다고 하는 이상한 틀을 만들고 그 틀에 맞추기 위해서 억지로 세 왕을 빼버리고
14 대를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가 무슨 목적으로 3 왕의 이름을 빼먹고
14 대 + 14 대 + 14 대라는 틀에 맞추려고 했는지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마다
납득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족보 이야기에서 또 다른 문제는 마지막 14 대 째라고 하는 데서도
한 대(브다야)를 누락시켜서 14 대를 맞추었다는 것입니다.
역대상 3:17-20을 정밀하게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사로잡혀 간 여고냐(여호야긴 혹은 고니야)의 아들들은 그 아들
스알디엘과 말기람과 브다야와 세낫살과 여가먀와 호사마와 느다뱌요
브다야 (마태가 누락시킨 사람) 아들들은 스룹바벨과 시므이요
스룹바벨의 아들은 므술람과 하나냐와 그 매제 슬로밋과
또 하수바와 오헬과 베레갸와 하사댜와 유삽헤셋 다섯 사람이요
스알디엘과 스룹바벨 사이에 분명히 브다야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태가 14 대를 맞추기 위하여 브다야의 이름을 누락시키고 있습니다.
누가 보아도 이러한 것은 잘 못된 것인데 이를 성령님의 실수라고는 할수 없는 일이고
또 실제로 성령님의 실수가 아니라 마태의 실수라고 볼 수 있는데도 이를 실수로 말하면
안된고 그냥 무조건 원본에는 사람의 실수도 오류도 없었다고 해야하는 것인지
제가 오히려 반문해 보고싶은 부분입니다.
(마 1:22)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예수님의 탄생은 마태가 이사야 7장 14절을 이루려 하심이라고 한 것은
누가 보아도 무리한 인용이었습니다.
(마 2:15)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호세아 선지자는 예수님을 애굽에서 불러내게 된다는 예언을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호세아 11장 1절)
(마 2:18)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렘 31:15)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도다. 이는 전혀 맞지 않는 무리한 인용이었습니다.
마태가 인용하는 예레미야 31장 15절은 전혀 베들레헴에서 아이들이 죽게 되고
그를 슬퍼할 베들레헴의 여인들을 예언한 것이라고 주장 근거가 없습니다.
(마 2:23) 나사렛이란 동네에 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이 부분도 무리한 인용이었습니다. 우리가 정경으로 인정하는 구약 39권 중에서는
메시야를 나사렛사람으로 예언한 구절이 단 한 구절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마 27:9)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하신 말씀이 이루었나니
일렀으되 저희가 그 정가 된 자 곧 이스라엘자손 중에서 정가한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이 부분은 예레미야서에 예언 된 것이 아니라 스가랴서 11장 13절에 예언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마태가 무리한 인용을 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이런 정도의 문제는 사본에서만 문제가 아니라
원본에서도 그렇게 되어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 본문이나 원어성경을 충분히 공부해 보시고 다시 연락을 주시기 바랍니다.
자 이제는 한 번쯤 질문을 하고 넘어 갈 수 있습니다.
마태가 이렇게 한 것이
첫째 , 마태에게 성령께서 위의 구절들을 인용하여 기록하도록 마태를 감동하셨는지 ?!
둘째 , 마태가 메시야 예언이 성취된 점을 강조하려고 무리한 인용을 것인지 ?!
셋째 , 마태는 그렇게까지 한 것이 아닌데 사본을 만드는 수 많은 필사자들이
마태가 써 놓은 것을 보고 마음에 들지 않아서 마치 약속이나 한듯이
꼭 같이 수 천 명의 필사자들이 무리한 인용을 했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지 ?!
어떤 이론이 사실이고 어떤 견해가 개연성이 있는 정직한 견해인지
스스로 정직하게 성경의 본문을 정확하게 읽어서 분별해 보기 바랍니다.
이렇게까지 보여 드려도 여전히 분별이 되지 않을 정도의 실력이라면 공부를 더 해보셔야 합니다.
또 그런 정도의 실력으로 누구의 신학을 진단하겠다는 생각은 분수에 맞지 않는 생각일 것입니다.
성경을 정밀하게 읽어 보지도 않고 어설프게 무슨 학설이나 무슨 교리니 하는 것을 들고
떠드는 사람들은 함부로 떠드는 사람들이야말로 교회를 어렵게 만드는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자신들 딴에는 하나님의 교회를 위한답시고 분별없이 나서서 함부로 말하고 있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교회와 분별력이 모자라는 어린 영혼들을 이상한 미신에 빠지게 하고 있습니다.
성경 본문에 이러한 고장이 나 있다는 사실은 기독교에 대하여 반감을 갖고 떠드는
안티 크리스챤들까지 다 알아 내 가지고 공격을 하고들 있는데 신학교에서 안일하게
무조건적으로 축자 영감설을 믿으라고 하면서 원본에는 일점 일획도
오류가 없었다고 하는 학설을 믿으라고 윽박지르기만 하면 되겠습니까 ?
성경에 상당한 부분이 단순히 사본하는 사람들만의 실수라고 볼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원본을 우리가 갖고 있는 것도 아니면서 독단적으로 무슨 주장들을 항부로 떠들면
그야말로 오늘날의 목회자 신학자들까지 비이성적으로 매도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바 성경을 기록함에 있어서 성령의 영감을 굳이 표현해야 한다면
인격적 영감(人格的 靈感)설 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성경기자의 인격을 무시하고 기계적으로 감동하신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영감(人格的 靈感)을 주셔서 하나님의 뜻을 기록하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돌이켜 보면 지금까지 여러 영감설들이 주장되어 왔습니다.
1. 기계적 영감설
2 . 유기적 영감설
3 . 축자적 영감설
4 . 직관적 영감설
5 . 사상적 영감설
5 . 개념적 영감설
6 . 목 적 영감설 등의 말이 난무하였습니다.
저는 위에 거론된 영감설 중에
유기적 영감설과 개념적 영감설을 어느정도 수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보다는 아직은 일반화되지 않았지만 [인격적 영감]을 주셨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런 용어는 아직까지는 일반화 되지 않은 용어라서 생소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유기적 영감설 보다는 훨씬 바른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입에 담지도 않았는데 일방적으로 다른 사람의 생각을 가지고
저를 사상 영감설을 신봉하는 목사라느니 하는 표현도
경솔하기는 마찬가지고 불쾌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토론을 별로 좋아 하지는 않지만 저의 주장에 대하여(별로 주장하는 것도 없지만)
이견(異見)이 있으면 다른 데 가서 저 없는 자리에서 제가 한 말의 부분을 가지고
왈가왈부하지 말고 이곳에서 직접 질문을 하시든지 토론을 벌이든지 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별로 실력은 없지만 제가 했던 말을 가지고 토론하겠다면
온 세상에 내노라는 학자들이 다 몰려와도 기꺼이 상대해 드릴 마음이 있습니다.
자신들이 스스로 성실하게 공부도 연구도 해 보지 않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이 뼈를 깎는 고통을 겪으면서 만들어 정리한 학설에 그냥 줄만 서 가지고
자기는 무슨 주의 무슨 주의라고 헤프게 말하고 다니는 사람들은 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무슨설 무슨설이라고 함부로 말하지 말고 스스로 성실하게, 그리고 정직하게 공부를 해 보고
연구를 충분히 해 본 후에 성경이 본래 말씀하시려 했던 원 목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되면
그 때 가서 남의 신학을 검증해 보든지 남의 사상을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30년 이상 연구한 것을 한 두 줄 문장으로 폄론 한다는 것은 참으로 황당한 일입니다.
더욱이 사람들의 영원한 생명과 운명이 걸려 있는 신학적인 검증을 하려는 사람이라면
당대 최고의 학문적인 소양과 덕망과 신뢰를 바탕으로 가능할 것입니다.
일반적인 학문에서도 한 분야에 전문가적인 실력을 갖추려면 최소한 10 년 이상을
학문적으로 갈고 닦은 사람이라야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신학의 세계는 10 년 가지고는 어림도 없고 평생을 바친 사람이라도
한 사람의 신학을 온전히 파악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게 됩니다.
샬 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