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문서 선교원

성경 원본에도 오류가 있었는가 ?

작성자에스라|작성시간09.04.29|조회수322 목록 댓글 0

어떤 까페에서 노우호 목사의 성경관에 이상이 있다고 하면서 이를 검증 한다고
저에게 성경의 영감설에 대하여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는지 질문을 해 왔습니다.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사람들의 모임으로 보이지만 정체는 잘 알 수는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서 불구하고 이런 글을 쓰는 것은 무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차제에 성경의 영감설에 대하여 어느정도 입장을 밝혀 둘 필요가 있다고 사료되어
간단하게 몇 줄은 적었습니다. 읽으실 때는 성경을 찾아 가면서 성실하게 보셔야 할 것입니다.
 

성경 영감설에 대한 소고

영감을 의미하는 헬라어는 데오프뉴스토스(theopneustos)는 데오스(theos, 하나님)와
프네오(pneo, 숨쉰다)의 합성으로서, 딤후3:16에만 나오는 낱말로서
하나님께서 성경(원본)을 기록하는 사람에게 기록자가 인간적인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영적인 통제력을 행사하셨다는 것입니다.

벧후1:21은 "예언(豫言)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聖靈)의 감동(感動)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성경영감설은 일찍이 유대교의 전통과 신약성경(딤후3:16과 벧후1:21 등)을 기초로 하여 형성된
성경관이지만 종교개혁 때까지는 로마 카톨릭교회의 강한 교황권 때문에
상대적으로 위축되어 있다가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란 구호를 외쳤던
종교개혁자들에 의하여 그 권위를 확립하였습니다.

그러나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부정적인 성경비평학으로 인해
성경의 영감설 내지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의 권위가 도전을 받다가
금세기에 와서는 바르트의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Die Theologie des Wort Gottes)에 의하여
다시 그 권위를 되찾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의 권위에 관한 논쟁은
그 후로도 바르트와 불트만 및 그의 제자들 사이에서 계속되는 논쟁으로 이어졌고,
미국에서는 1929년 메이첸(G. Machen)이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세움으로써
프린스턴신학교의 분열을 가져오기에 이르렀습니다.

영감의 성질(性質), 영감의 방법(方法), 영감의 범위(範圍) 등을
제대로 정리하려면 한 한기를 공부할 수 있는 분량입니다.

첫째, 성경의 영감(靈感)은 그 성질(性質)에 있어서
기계적 영감(mechanical inspiration)이 아니고
유기적 영감(organic inspiration)혹은 목적(目的) 영감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고백입니다.
이렇게들 간단하게 말할 수 있지만 유기적(有機的) 영감이란 말도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습니다.

극단적,맹목적 보수주의 신학자들은 기계적 영감설은 주장해 오다가 
자신들이 무지하게 기계적 영감설을 주장하는 것이 온당치 않다는 것을
최근에 와서야 자신들의 잘 못을 깨닫고 있는 정도입니다.
멍청하고 게으른 사람들은 공부도 해 보지 않고 아직까지 기계적 혹은
축자적 영감설을 주장해야만 보수요 정통이요 개형주의라고 떠들고 있습니다.

한 때 유기적(有機的) 영감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이상한 눈으로 바라 보았던
극단적, 맹목적 보수주의자들이 결국은 유기적 영감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이
개연성이 있고 옳다는 것을 속으로는 시인하면서도 겉으로는 자존심 때문에
많이 머뭇거리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의 저자를 기계적(機械的)으로 사용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개인적인 지식이나 경험, 사상이나 개성 등을 그대로 사용하시면서
당신의 메시지를 기록하도록 성령으로 감동하셨다는 유기적, 혹은 목적 영감설은
이제 와서는 재론의 여지도 없는 정설(定說)로 수용(授用)되고 있습니다.

성경을 읽어 보시면 기록자의 개인적인 지식, 경험, 사상, 개성 등 뿐 아니라
심지어 그들이 즐겨 쓰는 용어나 문체까지도 반영되어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둘째, 성경의 영감은 그 방법에 있어서
        축자적 영감(verbal inspiration)이 아니고
        개념적 영감(conceptual inspiration)이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기록할 때 하나님께서 개입하신 영감의 방법은 기록자의 이성과 인격을 무시하고
글자 한 자 한 자에 이르기까지 축자적으로 주관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타내고자 하시는 내용을 개념(의미)상으로만 바로 기록하도록 영감하시고,
어휘의 선택이나 표현의 기술 방법 등은 저자에게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원본이 있었다 해도 다음과 같은 차이는 그대로였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부활에 관한 기록의 차이같은 것입니다.

기독교 교리를 두고 말할진대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과 부활의 교리는
매우 중요한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아래와 같이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1. 무덤에 찾아간 사람에 대하여 네 복음서는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마태 :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
     마가 :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
     누가 :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와 또 저희와 함 께 한 다른 여자들"
     요한 : "막달라 마리아"

2. 그들이 무덤에 간 시각에 대하여는
     마태 :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미명에"
     마가 :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은 때에"
     누가 :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요한 :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

3. 무덤에 나타난 실체에 대하여
     마태 : "주의 천사"
     마가 : "흰옷을 입은 한 청년"
     누가 :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
     요한 : 언급이 없음

무덤에 찾아간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만이 네 복음서에 공통으로 기록
무덤에 간 시각에 대해서는 안식 후 첫날 새벽이라는 점에서는 네 복음서가 공통
무덤에 나타난 실체에 대해서는 기록된 네 복음서가 다 다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한 신앙고백의 내용에 대해서도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복음은 각각 다음과 같이 달리 기록하고 있다.

마태 : "주는(당신은)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가 : "주는(당신은) 그리스도시니이다"
누가 :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요한 : 기사 자체가 없음
위의 예에서 보면 베드로의 고백에서 그리스도라고 한 점은 세 복음서에 공통되나
그 이외는 고백의 내용으로나마(마태에서는 "하나님의 아들"로도 고백),
그 표현에 있어서나(마가에서는 "하나님의 그리스도") 다르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활의 사건이 네 번이나 일어난 사건이 아니고 한 번 일어난 사건이요,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가이사랴 빌립보 도상에서는 한 번만 있었던 사건으로 믿을진대,
그리고 그 이야기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것을 믿을 수 있다고 해도
그 영감이란 축자적 영감이 아니고 개념적 영감,
혹은 목적 영감이라는 것이 너무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러한 경우에 성경 저자에 대한 하나님의 영감을 믿으면서
축자적(문자적) 영감을 고집하는 것은 하나님과 교회를 위하는 줄로 알고 떠들지만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영감을 불어넣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불일치를 초래했다고 하는 결과를 가져와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는 중대한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성령께서 한 글자 한 글자 축자적으로 영감을 불어 넣어 주관하셨다면
4 개의 복음서가 한 글자도 틀리지 않게 기록되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만약 원본의 기자가 한 글자도 틀리지 않게 기록했었던 것을 사본 기자들이
저렇게까지 변개 했다면 이는 그야말로 크나큰 죄를 면치 못할 일이라 할 것입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3년 동안 함께 했던 사도였지만
그의 기록은 많이 누락되어 있었습니다. 후에 누가가 정밀하게 살펴 본 후에
누가는 마태복음과 마가 복음에서 누락된 사실들은 약 30 가지나 더 보충하게 됩니다.
이 정도면 마태복음을 기록한 마태라는 사람의 기록이 완전하지 않았다는 것을
신학을 제대로 한 사람이면 다 알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누가가 30가지 이상을 보충을 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누가가 그렇게 많이 보충했지만 그래도 빠진 것이 상당히 많아서 요한복음이 필요합니다.
요한의 복음서를 잘 살펴 보시면 거기에는 먼저 기록된 3 복음서, 이른바 공관복음에 없는
특수한 자료가 18가지 정도 더 증보된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은 어떤 사람의 기록도 완전하지 않았다는 것을 사복음서 대조를 통하여 금방 파악할 수 있습니다.

셋째, 영감의 영역을 두고도 많이 연구 되어야 합니다
.
사도 베드로가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벧후 1:21)"
베드로는 분명히 제한 하기를 성경의 요소 중에 예언(豫言)적인 부분을 확실하게 했습니다.

누가 보아도 예언은 예언자 자신의 말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서의 경우는 많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또 딤후3:16절의 경우 [모든 성경]이라고 했지만 바울이 말했던
모든 성경은 신.구약 66권을 두고 한 말이 아닙니다.

또 예수님께서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요10:35)하신 말씀에서의 성경도
신구약 66권 전체를 말씀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더 정직하게 말하자면
신약의 기자들이 말하는 [성경]이라는 단어는 우리말 성경의 경우 46 회나 나오지만
이들 중에 단 한번도 신약을 지칭했다고 볼 수 있는 경우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때는 신약이라는 개념이 아직은 정립 되지도 않았고
어떤 신약 문서는 아직 기록되지도 않았던 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마 21:42, 마 22:29, 마 26:54, 막 12:10, 막 12:24, 막 14:49, 눅 4:16, 눅 24:27,
눅 24:32, 눅 24:45, 요 2:17, 요 2:22, 요 5:39, 요 7:38, 요 7:42, 요 10:35,
요 13:18, 요 17:12, 요 19:24, 요 19:28, 요 19:36, 요 19:37, 요 20:9,
행 1:16, 행 8:32, 행 13:29, 행 17:2, 행 17:11, 행 18:24, 행 18:28,
롬 1:2, 롬 4:3, 롬 9:17, 롬 10:11, 롬 11:2, 롬 15:4, 고전 15:3, 고전 15:4,
갈 3:8, 갈 3:22, 갈 4:30, 딤전 5:18, 딤후 3:15, 딤후 3:16, 히 3:15, 벧후 3:16)

위에서 성경이라고 말씀하실 때는 예외 없이 구약만을 두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역대상하서 기자는 사실을 진실하게 기록했다가 보다는 목적(目的)을 가지고
자유롭게 기록한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다윗의 범죄한 사실을 의도적으로 누락시키고 있고
솔로몬의 타락에 대하여 일언반구도 언급이 없이 잘 한 것만을 극대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악의적으로 누락은 아니었지만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자유롭게 온갖 자료를 검토하면서
필요에 따라 역사적 사실이라도 첨삭을 하면서 기록했다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또 역대상하서의 경우는 기계적인 영감을 받아서 기록한 것이 아니라
여러 사료들을 참고해서 인용도 하면서 기록했다는 것을 누구라도 알 수 있습니다.
역대상하여 기자는 아래와 같은 책을 참고하고 인용한다는 출전까지 밝히고 있습니다.

1. 잇도의 족보책(대하12:15)
2. 이사야의 묵시책(대하32:32)
3. 호세의 사기(대하33:19)
4. 잇도의 주석책(대하13:22)
5. 선견자 나단의 글(대하9:29)
6. 선지자 아히야의 예언(대하9:29)
7. 잇도의 묵시책(대하9:29)
8. 선견자 사무엘의 글(대상29:29)
9. 선견자 갓의 글(대상29:29)
10. 예후의 글(대하20:34)

하나님께서는 놀랍게도 이러한 사료들을 기록하게 하셨고 보존하게 하셨으며
바벨론으로 포로되어 갈 때도 이러한 사료들을 보존하여 두셨다가 역대상하서를
기록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참고하고 인용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39권의 구약(그들은 39권으로 나누지 않지만)문서들 중에서
토라를 제일 중요하고 거룩한 책으로 중시하고 있습니다.
느비임을 그 다음 중요한 책으로 중요시 하고 있습니다.
케투빔을 비교적 덜 중요한 책으로 분류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리도 후서를 쓸 때 개인적인 감정을 많이 토로하고 있습니다.
이때 바울 자신은 주님의 영감으로 쓴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자기도 화가 났기 때문에 기탄 없이 말하겠다고 선언하고 있기도 합니다.

(고후 11:17) 내가 말하는 것은 주를 따라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어리석은 자와 같이 기탄 없이 자랑하노라

              물론 이 말은 고린도 후서에만 국한해서 한 말씀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말했지만 우리는 그가 항상 그리스도 안에 있었던 사람으로 믿어서 
바울 자신은 느끼지 못했더라도 언제나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서 글을 썼다고 믿는 것입니다.

넷째, 성경의 영감이란, 엄밀히 말하면 원본의 저자에 한한 것입니다.
         성경의 내용은 영감을 받은 저자에 의해서 기록되었던 원본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지금에 와서는 구약은 물론 신약의 원본의 한 조각도 존재하지 않고 또 만져도 본 사람들이 없습니다.

[원본은 일점 일획도 오류가 없었다.]
             이렇게 마침표를 찍어서 선언하는 것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말이야 할 수 있지만 아무도 증명을 할 수는 없습니다.
             원본성경이 한 페이지도 없기 때문에 이런 주장은 쉽지 않습니다.

[원본은 일점 일획도 오류가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바램이지만 역시 어렵습니다.
             정직하게 말해서 그것은 짐작에 불과하지 확증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원본은 일점 일획도 오류가 없었을 것으로 믿는다.] 
             이렇게 하는
말은 신앙고백적인 말일 뿐이지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증명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 사람의 성경관을 엿볼 수 있는 것이고
그의 신앙의 기초를 가늠할 수 있는 척도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성경을 충분하게 읽어 보지도 않고 면밀히 살펴 보지도 않은채
마구잡이로 주장만 한다고 해서 사람들 마음속에 건전하 믿음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설(說)은 여전히 하나의 학설(學說)로만 남아 있는 것 뿐입니다.

대한예수교 장로회가 고백하는 12 신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1.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니 신앙(信仰)과 행위(行爲)에 대하여
    정확무오(正確戊午)한 유일(唯一)의 법칙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신앙과 행위]의 기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다른 목적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신앙과 행위를 지도하기 위하여
   특별히 구별되게 기록되었기 때문에 다른 문제를 가지고 트집을 잡은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께서 영감을 사본의 필사자(筆寫者)에게도 주어졌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소하기는 하지만 사본끼리 오류가 있는 것을 두고 논의하자면 복잡해집니다.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본은 파피루스, 양피지 사본을 합쳐서
대문자 사본, 소문자 사본, 성서일과표 등 모두 5,500개도 넘는데
그 중의 단 둘도 완전히 동일한 것이 없기 때문에
사본을 기록하는 사람들까지 영감으로 기록했다고 주장하게 되면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권위을 높이겠다고 해서 그런 말을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필사자에게까지 영감설을 주장하게 되면 이야기는 더 길어지고 복잡해지면서
자칫하면 증명할 수도 없는 것을 가지고 의미 없이 주장하는 공론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본을 기록하는 필사자에게 영감을 주셨다면
"왜 한 두 단어가 더해지고 누락되고 또 약간씩 변개 되도록 방치하셨는냐"
하는 의문이 당연히 나오게 될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반대 의문도 당연히 예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감이 겨우 원본을 기록했던 몇 사람들만 미칠 수 있었다면
사본을 만드는 사람들에게까지는 미칠 수가 없었느냐 하면 이것도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원본이 완벽했다고 해도 이미 원본이 사라지고 난 후에는
사본을 다시 사본으로 필사하여 만드는 자가 제멋대로 변개 해 버리면
원본이 없어진 후에는 큰 일이 날 수도 있는데 왜 사본을 만드는 사람들에는
영감으로 도와 주시지 않았는가 하는 문제도 분명히 제기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이 바르게 전해지는 것을 원하셨다면 원본을 기록할 때는 말할 것도 없고
사본을 만들 때에도 누락되거나 첨가 되거나 변개함이 없도록 지켜 주실 수 있었을 것이고
또 그렇게 해 주셨어야 할 것이데 어찌하여 오늘날 이렇게 많은 사본들이
단 두권도 완전히 일치하는 책이 없을 정도로 잘 못되는 것을 방치하셨느냐고 의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본 뿐만 아니라 성경을 번역한다는 것은
원본기록이나 사본기록보다 훨씬 더 어려울 수 있습니다.

아무리 원본이 완벽했고 사본이 오류가 없었다고 해도 번역하는 사람이 실수하거나
변개 해 버리면 교회가 큰 혼란에 빠질 수도 있는 문제요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일이
너무나 방대한 일인데도 성령께서 전혀 영감을 주시지도 않으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영어나 한자(漢字)성경에서 우리말 성경이 번역될 당시에
한국 목회자들의 영어실력이나 선교사들의 한국어 실력을 생각할 때
지금의 개역 성경을 읽어 보면 찬탄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이야 헬라어 히브리어 사전이 발달하고 원어 분해성경까지 나와서
분위기가 많이 달라지긴 했지만 그래도 성경을 번역한다는 것은 실로 엄청난 일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는 사본을 기록하는 분들은 물론 번역하시는 분들에게도
성령님의 강력(强力)한 감동(感動)이 있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말쟁이들의 논쟁(論爭)이 될까 싶어서 절제(節制)하곤 합니다.

저 자신도 가끔씩 글을 쓰는 경우가 있는데 사실 제일 쉬운 것이 직접 저술입니다.
저술(著述)이란 저자가 뜻대로 저술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쩌면 제일 쉬울 수 있습니다.
사본(寫本)을 만든다는 것은 저술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번역(飜譯)이란 저술 보다도 어렵고 필사본보다 훨씬 더 어렵기 때문입니다.

다른 책도 아니고 성경을 번역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그 어떤 작업보다 어렵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어떤 모양으로든지 도우시지 않으면 번역은 불가능할 것으로 믿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아득한 그 옛날  즉 2000년 전 그 시대에 지금의 성경의 원본을 기록한 사람들에게
성령께서 영감을 주시지 않았다고 누가 감히 생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세익스피어는 만약 이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고
어떤 사람이 기록한 것이라면 나는 그 성경을 기록한 사람을
하나님으로 부르고 싶다고까지 했습니다.

젊은 사역자들이나 신학자, 그리고 성도들은 최소한 자기 나이 수 만큼이라도
성경 본문을 읽어 보시고 너무 헤프게 굳어지지 말고 유연한 자세로 공부를
성실하게 해 보신 후에야 건전한 성경관, 성경적 역사관, 성경적인 세계관,
그리고 성경적인 가치관을 정립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저를 만나 보지도 않고 또 저의 강의 풀코스를 들어 보지도 않고
신정통주의자 운운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저는 신정통주의나 구정통주의도 신뢰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개혁주의 복음주의 운운하는 사람들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경 66권 중에 제대로 한 권도 가르쳐 보지 않은 사람들이 개혁주의라고 떠드는 것과
칼빈의 기독교 강요라는 책도 한 번 제대로 읽어 보지도 않은 사람들,
칼빈처럼 알지도 믿지도 살지도 않으면서 칼빈주의라고 떠벌이는 사람들은
자기를 속이는 사람들일 수도 있기 때문에 결코 신뢰할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어느 노선의 기본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실력으로 너무 헤프게 무슨 주의를
표방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교회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칼 바르트가 그 유명한 [교회 교의학]이란 책을 썼는데
자그마치 4*6 배판으로 깨알같은 글씨로 8,000 페이지에 달하는 책입니다.

아직까지는 그 책을 다 읽어 본 사람이 한국에는 단 한 사람도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저도 물론 읽어 보지 못했습니다. 저는 칼 바르트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습니다.

칼 바르트가 쓴 글은 대략 20,000페이지 쯤 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저는 읽어 보지도 않았고 또 시간이 난다고 해도 읽어 볼 마음도 없습니다.

바르트가 쓴 글에도 옳은 말도 있을 것이고 유익한 말도 많이 있을 것으로 생각은 합니다.

그러나 진리를 그렇게 혼잡하게 만드는 사람들을 저는 제일 싫어하는 편입니다.

함부로 성경을 비평을 하려면 어중이 떠중이들도 별로 신뢰하지 않습니다.
비평을 하려면 불완전한 신학들을 비평해야지 어설픈 지식을 가지고
성경을 비평하겠다고 떠들어 대는 사람들은 별로 좋아 하지 않은 편입니다.

제가 믿기로는 진리는 단순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성경이 때로는 어려운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도대체 20,000페이지나 글을 일어 보아야
이해가 되는 책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바르트에 대하여 별로 매력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가 쓴 글들이 성경과 일치 한다면 성경을 읽으면 되었지 달리 그의 글을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가 쓴 글들이 성경과 일치 하지 않는다면 읽어줄 가치가 없을 것이니 읽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바르트 뿐만 아니라 서구의 신학자들이 거의 다 비슷한 우를 범하고 있어서
서양의 신학자들 중에 칼빈 외에는 존경하거나 신뢰하는 학자가 별로 없습니다.

그 이유는 그분들은 무시하자는 것이 아니라 저와 여러분이나 다 잘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 우리 나라 목회자들도 심한 혼란에 빠져 있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는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매우 훌륭한 성품과 지식과 은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성경을 모르면
본인도 힘들고 성도들까지 힘들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
마태 복음 속에 있는 문제를 제가 강의 중에 지적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사야서 7장 14절을 마태는 그리스도께서 동정녀 마리아를 통하여 탄생하시게 될 
예언으로 생각하고 인용한 사실에  대하여 보충 설명을 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서 7장 14절 앞뒤를 잘 읽어 보시면 이사야 선지자는 수백년 후에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통하여 탄생하시게 될 것을 예언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누구나가
어렵지 않게 분별할 수 있는 내용의 기록입니다. 이사야서 7장을 잘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해석하거나 인용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기본원칙을
유념하시고 조심하셔야 할 것입니다.

①언제, ②어디서, ③누가, ④누구에게, ⑤무엇을, ⑥어떻게, ⑦왜
그러한 말씀이 주어졌는지를 면밀하게 검토해 보아야 합니다.

①언   제 : 이 때는 아하스 왕 때의 일입니다.
②어디서 : 유다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③누   가 : 이사야 선지자가
④뉘에게 : 아하스 왕에게
⑤무엇을 : 아람왕 르신과 북왕국 왕 베가를
⑥어떻게 : 두려워 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⑦왜썼나 : 두려워 할 필요도 없는 것을 두려워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하스 왕 때에 북왕국 왕 베가와 아람왕 르신이 예루살렘으로 올라와
공격을 시도했지만 예루살렘을 함락 시키지도 못하고 물러갔습니다.

그 때 어떤 사람들이 아하스 왕에게 말하기를 아람왕 르신과
북왕국 이스라엘 왕 베가가 동맹(同盟)하였다는 정보(情報)를 흘렸습니다.

그러자 왕의 마음과 백성들의 마음이 삼림이 바람에 떨림같이,
사시나무 떨듯이 두려움이 사로잡혀 떨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보내어 아람왕 르신이나 북 왕국 베가가
아무리 큰소리 쳐도 연기 나는 두 부지갱이 수준 밖에 안되니까
전혀 두려워 하지 말고 염려 할 것이 없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도 아하스는 두려워서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하스 왕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지켜 주실 증거가 되는
징조라도 기도해 보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하스는 또 나는 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 같은 짓은 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이 때 이사야 선지자가 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하나님께 징조(徵兆)를 구하지 않아도 주께서 친히 한 징조(徵兆)를 주실 것인데
자 보아라 ! 지금 한 젊은 여자(알마 ; 처녀가 아니었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인데
그 아이를 낳거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인데 이 아이가 미쳐 선악(善惡)도
분별(分別) 못하고 겨우 젖 떨어져 버터와 꿀을 먹을 수 있을 때쯤에는
지금 아하스 왕이 두려워하고 미워하는 두 왕 즉 아람왕 르신과
북왕국 이스라엘 왕 베가의 땅이 폐한 바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은 앗수르 왕이 와서 아람과 북왕국 이스라엘을
쳐서 망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17절에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마리아가 잉태하여 예수님을 낳을 것을
예언한 것이라고 마태처럼 그대로 오해(誤解)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위에서 말씀하시는 14절의 처녀라는 번역은 오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단어는 처녀(뻬툴라)가 아니라 그냥 젊은 여자(알마)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알마(젊은 여자)는 마리아를 예언한 것은 전혀 아니고 아하스 당시,
즉 이사야 선지자가 말씀하시던 그 때에 살았던 어떤 여인이었습니다.

그 때 이사야 선지자는 전혀 동정녀 탄생을 예언할 생각도 없었고.
다만 지나치게 소심하여 벌벌 떨고만 있는 아하스 왕을 안심시킬 마음 밖에는
다른 어떤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본문의 배경을 다시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따라서 이 말씀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없이
마태가 무리한 인용을 하게 되어 많은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한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이사야 선지자가 무슨 말을 했던지
"마태가 그렇게 인용했으면 마태가 인용한 것이 맞는 것이지 뭐그리 말이 많으냐!?"
하는 식으로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인데 이러한 자세는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잘 모르고 그냥 그 말씀을
동정녀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할 예언으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면밀하게 보지 않으면 일반인들이 잘 발견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또 이러한 문제를 제기 했다가는 괜한 구절수에 휘말리게 될 것을
두려워하여 어떤 사람들은 알면서도 그냥 어물쩡 말 없이 넘어가고 있는 현실입니다.

신약 성경에 신약기자들이 구약을 인용한 구절에는
때로는 무리한 인용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 중에 마태복음에 주로 그러한 인용이 있습니다.

지금부터 마태복음 안에 무리하게 인용된 구절을 제시해 보겠습니다.

마태는 족보를 기록하면서 세 사람의 왕을 의도적으로 누락시키고 있습니다.
1장 8절에 요람 다음에 ①아하시야(1년 통치)  ②요아스(40년 통치)  ③아마샤(29년 통지)
세 왕을 빼먹어서 결국은 14대라는 이상한 틀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결국 마태는 14 대 이론에 맞추기 위하여 유대역사 중 70년을 무시해 버렸습니다.

그렇게 한 것까지도 성령께서 그렇게 하라고 지시하셨다고 하면 할 말은 없습니다.

성령께서 마태에게 3명의 왕을 빼고 14씩 맞추라고 영감을 주셨을 것으로 믿어야 할까요 ?

아니면 거기에 대하여 아무말도 하지 말아야 정통이고 보수이며 개혁주의가 되는 것일까요 ?

이런 것을 보면서도 오류가 있다고 말하면 안되고
무조건적으로 성경원본에서는 일점 일획도오류도 없었다고  믿어야 한다고
주장하시는 분들이 있다면 그런 분을 직접 만나 뵙고 싶습니다.


마태는 다윗의 이름을 가지고 지나치게 상상력을 발휘하다가 히브리어로 다비드의 철자
즉 달렛(4) + 와우(6) + 달렛(4)으로 다윗의 이름의 글자를 숫자로 더하여 표기하면
14 가 된다고 하는 이상한 틀을 만들고 그 틀에 맞추기 위해서 억지로 세 왕을 빼버리고
14 대를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가 무슨 목적으로 3 왕의 이름을 빼먹고
14 대 + 14 대 + 14 대라는 틀에 맞추려고 했는지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마다
납득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족보 이야기에서 또 다른 문제는 마지막 14 대 째라고 하는 데서도
한 대(브다야)를 누락시켜서 14 대를 맞추었다는 것입니다.

역대상 3:17-20을 정밀하게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사로잡혀 간 여고냐(여호야긴 혹은 고니야)의 아들들은 그 아들
스알디엘과 말기람과 브다야와 세낫살과 여가먀와 호사마와 느다뱌요
브다야 (마태가 누락시킨 사람) 아들들은 스룹바벨과 시므이요
스룹바벨의 아들은 므술람과 하나냐와 그 매제 슬로밋과
또 하수바와 오헬과 베레갸와 하사댜와 유삽헤셋 다섯 사람이요

스알디엘과 스룹바벨 사이에 분명히 브다야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태가 14 대를 맞추기 위하여 브다야의 이름을 누락시키고 있습니다.

누가 보아도 이러한 것은 잘 못된 것인데 이를 성령님의 실수라고는 할수 없는 일이고
또 실제로 성령님의 실수가 아니라 마태의 실수라고 볼 수 있는데도 이를 실수로 말하면
안된고 그냥 무조건 원본에는 사람의 실수도 오류도 없었다고 해야하는 것인지
제가 오히려 반문해 보고싶은 부분입니다.

(마 1:22)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예수님의 탄생은 마태가 이사야 7장 14절을 이루려 하심이라고 한 것은 
              누가 보아도 무리한 인용이었습니다.

(마 2:15)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호세아 선지자는 예수님을 애굽에서 불러내게 된다는 예언을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호세아 11장 1절)

(마 2:18)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렘 31:15)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도다. 이는 전혀 맞지 않는 무리한 인용이었습니다.

              마태가 인용하는 예레미야 31장 15절은 전혀 베들레헴에서 아이들이 죽게 되고
              그를 슬퍼할 베들레헴의 여인들을 예언한 것이라고 주장 근거가 없습니다.

(마 2:23) 나사렛이란 동네에 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이 부분도 무리한 인용이었습니다. 우리가 정경으로 인정하는 구약 39권 중에서는
              메시야를 나사렛사람으로 예언한 구절이 단 한 구절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마 27:9)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하신 말씀이 이루었나니
              일렀으되 저희가 그 정가 된 자 곧 이스라엘자손 중에서 정가한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이 부분은 예레미야서에 예언 된 것이 아니라 스가랴서 11장 13절에 예언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마태가 무리한 인용을 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이런 정도의 문제는 사본에서만 문제가 아니라
원본에서도 그렇게 되어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 본문이나 원어성경을 충분히 공부해 보시고 다시 연락을 주시기 바랍니다.

자 이제는 한 번쯤 질문을 하고 넘어 갈 수 있습니다.
마태가 이렇게 한 것이

첫째 , 마태에게 성령께서 위의 구절들을 인용하여 기록하도록 마태를 감동하셨는지 ?!

둘째 , 마태가 메시야 예언이 성취된 점을 강조하려고 무리한 인용을 것인지 ?!

셋째 , 마태는 그렇게까지 한 것이 아닌데 사본을 만드는  수 많은 필사자들이
          마태가 써 놓은 것을 보고 마음에 들지 않아서 마치 약속이나 한듯이
          꼭 같이 수 천 명의 필사자들이 무리한 인용을 했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지 ?!

어떤 이론이 사실이고 어떤 견해가 개연성이 있는 정직한 견해인지
스스로 정직하게 성경의 본문을 정확하게 읽어서 분별해 보기 바랍니다. 

이렇게까지 보여 드려도 여전히 분별이 되지 않을 정도의 실력이라면 공부를 더 해보셔야 합니다.
또 그런 정도의 실력으로 누구의 신학을 진단하겠다는 생각은 분수에 맞지 않는 생각일 것입니다.

성경을 정밀하게 읽어 보지도 않고 어설프게 무슨 학설이나 무슨 교리니 하는 것을 들고
떠드는 사람들은 함부로 떠드는 사람들이야말로 교회를 어렵게 만드는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자신들 딴에는 하나님의 교회를 위한답시고 분별없이 나서서 함부로 말하고 있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교회와 분별력이 모자라는 어린 영혼들을 이상한 미신에 빠지게 하고 있습니다.

성경 본문에 이러한 고장이 나 있다는 사실은 기독교에 대하여 반감을 갖고 떠드는
안티 크리스챤들까지 다 알아 내 가지고 공격을 하고들 있는데 신학교에서 안일하게
무조건적으로 축자 영감설을 믿으라고 하면서 원본에는 일점 일획도
오류가 없었다고 하는 학설을 믿으라고 윽박지르기만 하면 되겠습니까 ?

성경에 상당한 부분이 단순히 사본하는 사람들만의 실수라고 볼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원본을 우리가 갖고 있는 것도 아니면서 독단적으로 무슨 주장들을 항부로 떠들면
그야말로 오늘날의 목회자 신학자들까지 비이성적으로 매도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바 성경을 기록함에 있어서 성령의 영감을 굳이 표현해야 한다면
인격적 영감(人格的 靈感)설 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성경기자의 인격을 무시하고 기계적으로 감동하신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영감(人格的 靈感)을 주셔서 하나님의 뜻을 기록하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돌이켜 보면 지금까지 여러 영감설들이 주장되어 왔습니다.

1.  기계적 영감설
2 . 유기적 영감설
3 . 축자적 영감설
4 . 직관적 영감설
5 . 사상적 영감설
5 . 개념적 영감설
6 . 목   적 영감설 등의 말이 난무하였습니다.

저는 위에 거론된 영감설 중에
유기적 영감설과 개념적 영감설을 어느정도 수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보다는 아직은 일반화되지 않았지만 [인격적 영감]을 주셨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런 용어는 아직까지는 일반화 되지 않은 용어라서 생소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유기적 영감설 보다는 훨씬 바른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입에 담지도 않았는데 일방적으로 다른 사람의 생각을 가지고
저를 사상 영감설을 신봉하는 목사라느니 하는 표현도
경솔하기는 마찬가지고 불쾌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토론을 별로 좋아 하지는 않지만 저의 주장에 대하여(별로 주장하는 것도 없지만)
이견(異見)이 있으면 다른 데 가서 저 없는 자리에서 제가 한 말의 부분을 가지고
왈가왈부하지 말고 이곳에서 직접 질문을 하시든지 토론을 벌이든지 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별로 실력은 없지만 제가 했던 말을 가지고 토론하겠다면
온 세상에 내노라는 학자들이 다 몰려와도 기꺼이 상대해 드릴 마음이 있습니다.

자신들이 스스로 성실하게 공부도 연구도 해 보지 않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이 뼈를 깎는 고통을 겪으면서 만들어 정리한 학설에 그냥 줄만 서 가지고
자기는 무슨 주의 무슨 주의라고 헤프게 말하고 다니는 사람들은 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무슨설 무슨설이라고 함부로 말하지 말고 스스로 성실하게, 그리고 정직하게 공부를 해 보고
연구를 충분히 해 본 후에 성경이 본래 말씀하시려 했던 원 목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되면
그 때 가서 남의 신학을 검증해 보든지 남의 사상을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30년 이상 연구한 것을  한 두 줄 문장으로 폄론 한다는 것은 참으로 황당한 일입니다.
더욱이 사람들의 영원한 생명과 운명이 걸려 있는 신학적인 검증을 하려는 사람이라면
당대 최고의 학문적인 소양과 덕망과 신뢰를 바탕으로 가능할 것입니다.

일반적인 학문에서도 한 분야에 전문가적인 실력을 갖추려면 최소한 10 년 이상을
학문적으로 갈고 닦은 사람이라야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신학의 세계는 10 년 가지고는 어림도 없고 평생을 바친 사람이라도
한 사람의 신학을 온전히 파악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게 됩니다.

샬    롬

 


var md5_norobot_key = 'd41d8cd98f00b204e9800998ecf8427e'; // 글자수 제한 var char_min = parseInt(0); // 최소 var char_max = parseInt(0); // 최대

전순길 09-04-23 13:12
 119.194.199.130 답변 수정 삭제  
아멘
정주호 09-04-23 17:05
 116.39.225.164 답변 수정 삭제  
먼저 성경강좌 로서 많은 이들에게 은혜를 끼치신 노목사님의 수고에 감사를 드립니다!!~저는 통합측 신자로서 교회에 다닙니다!!~축자영감(통합측에서는 기계적 영감설로 인식하는 이들이 대다수라고 여겨짐)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합동측에서 한강의를 들었는데,.축자영감에 대한 오해와 편견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제 질문의 요지는,.성경기록상(번역이나 필사본의 과정)의 오류가 있는것이 분명하니,.목사님께서는 성경이라 하지만,.그안에 영감되지 않은 성경구절이나,.낱말이 있다고 보시는것 같은데,..이것이 맞는지요?..왜냐하면 이 부분이 아주 민감한 사안 이거든요!~그래서 모카페에서는 부분영감설을 옹호하는 분으로 인식 합니다!!~성경이 오류로 번역되거나 필사본으로 전슬되어 왔다면,..신앙에 있어 정확무오하다는 그 신조가 배치된다고 봅니다!!~부분영감설을 지지하는걸로 봐도 되는지요!!~그러면 성경무오설도 목사님은 지지하지 않는다고 보는데,..이 견해는 어떠신지요?..
정주호 09-04-23 17:12
 116.39.225.164 답변 수정 삭제  
목사님 말씀처럼 개인의 신학적 성향을 알기에는 많은 노력과 배려가 필요합니다!!~비난과 험담으로 되어서는 아니된다고 봅니다!!~모처럼 노목사님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일이 여기까지 와 버렸네요!!~목사님의 답변을 기대해 봅니다!!~늘 주님안에서 평안하시기를 바랍니다!!~
에스라 09-04-23 17:57
 121.156.16.114 답변 수정 삭제  
저는 부분 영감설이란 말을 쓴 적도 없고 그런 용어를 좋아 하지 않습니다.
제가 위에서 기록한 것을 더 자세하게 한 10번 정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성경전체를 기록할 수 있도록 전 성경의 기자들을
성령께서 감동하신 것에 대하여 의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 본문을 정직하게 성실하게 읽어 보시면
위에 제가 지적한 문제와 같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한 고장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우리가 가진 12신조나
신앙고백으로 인도하고 거룩한 행위를 규범하는 데는
정확무오 하다는 데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습니다.

12신조 중에 제일 먼저 나오는 부분인데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신앙과 행위에 대한
정확 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사본되고 번역된 성경에 더러는 첨가되고 누락되고 다르게 기록된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우리 믿는 교리나 신조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사본되고 번역된 성경을 대조해서 조사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대체로 독일의 학자들이 그렇게 해서 본문이 고장난 부분을 비평해서
각주를 달아 출판한 책들이 나와 있습니다.

그러한 책을 읽어 보시면 제가 쓴 글이 사실임을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알아 두실 것은 통합측 목회자들 중에는 기계적 영감설을 믿는 분들이 거의 없습니다.
유기적 영감설 내지는 인격적 영감설(人格的 靈感說; 이 말은 저 혼자 쓰는 말입니다)을 믿는 분들이 대부분입니다.

기계적 영감설은 지금은 고신이나 합동과 같은 보수 교단에서도 이미 외면한지 오래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자기의 종이라고 기계적으로 쓰시지 않으신다는 것은
제가 강의 시간에 수 차례 말씀 드렸습니다.

축자적 영감설도 지금은 거의 믿는 목회자가 없습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보수 진보를 통 털어 축자적 영감설을
신봉하는 목회자들은 거의 없습니다.

여전히 생각이 좁은 사람들, 내지는 신학이나 성경을 제대로 공부하지도 않고
다른 사람들의 책이나 글들을 별로 접해 보지도 않았던 소수의 사람들이
아직도 축자적 영감설 내지는 기계적 영감설을 주장하는 정도입니다.

위에 제가 쓴 글을 다시 차분하게 여러 차례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쓸 데 없는 염려나 흥분은 금물입니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름지기 냉철해야 합니다.
그리고 억지 주장을 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단속해야 합니다.  샬  롬
박홍섭 09-04-28 07:35
 122.44.14.32 답변 수정 삭제  
축자적영감설을 믿는 목회자가 거의 없다는 말을 하시는데 그리 쉽게 말할 내용이 아닌 것 같습니다.
아직 고신과 합동의 목회자들은 거의 유기적영감과 축자영감설을 믿지요. 물론 원본에 한해서입니다.
축자영감설은 기계적영감이 아닙니다. 기계적 영감설을 믿는 고신과 합동의 목회자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노목사님의 글을 보니 축자영감설을 믿으면 생각이 좁고 신학이나 성경을 제대로 공부하지도 않은 사람인 것처럼 이야기 하시는데 그것도 함부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아쉽군요..

분명히 위의 글에서 노목사님의 생각을 확인하게 된 것 같습니다. 

목사님의 표현에 인격적 영감이라고 하셨는데 저는 그 인격적 영감이 일점일획도 오류가 없는 완전무오한 영감이라고 믿고 있는 목회자입니다. 물론 원본에 한해서입니다. 저와 같은 생각을 축자영감이라고 합니다. 위의 목사님의 글을 보니까 사복음서의 차이나 같은 사건을 두고 관점의 차이가 있는 것을 오류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위의 글에서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성령께서 한 글자 한 글자 축자적으로 영감을 불어 넣어 주관하셨다면 4 개의 복음서가 한 글자도 틀리지 않게 기록되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참 놀랍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생각하실수 있는지 말입니다.

축자영감을 믿는 목회자는 다 게으르고 무식하고 생각이 좁고 신학이나 성경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하신 말씀 기억하겠습니다. 필요하시다면 위의 글에서 목사님이 제기하신 문제에 대해 일일이 답변해드릴 의향도 있습니다.
에스라 09-04-28 23:36
 121.156.16.114 답변 수정 삭제  
주님의 은혜와 진리가 섬기시는 교회와 가정에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답변이 그리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래를 읽어 보시고 답변을 부탁드립니다.
 
지금까지 성경 영감설을 말할 때 일부 맹목적이고 극단적인 보수를 주장하는 분들은
맨 처음 기록된 원본에는 사소한 고장도 없이 완전했을 것이라 주장을 했습니다.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는 하나님께서 성경을 기록하는 기자들에게 유기적 영감을 주셔서
축자적으로 오류 없이 기록하게 영감을 주셨을 것으로 믿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저도 그렇게 배워서 믿고 심지어 가르치기까지 해 왔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원본을 가지고 있지도 않으면서 하는 말이기 때문에
확인할 수가 없고 확증 할 길은 전혀 없다는 것은 인정을 하실 것입니다.
 
따라서 실재 하지도 않는 원본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교리를 만들 수가 없어서
그냥 ~~영감설 ~~ 영감설 하고 학설 정도로 주장하다가 그치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속성상 오류가 원본에 기록되게 하시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을 합니다.
 
이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성경기자들에게 실제로 어떤 영감을 주셨을까 하는 것을 고민합니다.
 
기계적 영감설이란 말은 아무런 근거도 없고 책임질 수도 없는 학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인격을 기계처럼 취급하신 일이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실 바에야 차라리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능력으로 성경책을 창조하셨을 것입니다.
 
우리가  4 복음서을 대조 해 보면 하나님께서는 개인의 인격을 무시하지도 않으셨고
그렇다고 한자 한자 불러 주신 것이 아님을 누구든지 다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한자 한자 불러 주셨다면 이는 사실 기계적 영감설과 별로 차이가 나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복음서 기자들의 기록을 좀 더 성실하게 읽어 보시게 되면
개인의 경험과 취향과 성품까지 그 기록된 문서에 배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는 사람들이 이러한 영감을 유기적 영감설이라고들 합니다.
유기적이란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생물학적이란 말과 거의 같은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더 정직하게 읽어 보시게 되면 유기적 혹은 생물학적 영감이 아니라
인격적인 영감을 부어 주셔서 성령으로 거듭난 인격이 각성된 정신을 가지고
성령의 감동을 입어 신앙 양심으로  기억을 되살려서기록하였고 어떤 때는
기자가 스스로 자세히 살피고 조사하여 기록한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눅1:1-4)
 
(누가 복음 1: 1-4)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군 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라

누가는 결코 한자 한자 불러주시는 대로 기록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먼저 기록된 복음서들과 여러 기록물들을 우선적으로 읽어 본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 보다 먼저 기록된 문서들에서 만족을 얻지 못하고 이에 스스로
조사를 하기 시작해서 자료를 수집했습니다. 자료를 수집할 때 누가는
 
첫째, 모든(파신) 일을 살피려고 했습니다.
        이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누락 된 것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둘째, 근원(아노덴)부터 살피려고 노력했습니다.
        이 말은 위에서부터 살폈다는 뜻입니다.
 
셋째, 자세히(아크리보스) 살피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세심하게(carefully & perfect) 살폈다는 것입니다.
 
넷째, 미루어(파라콜루데코티) 살피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이 말은 완전히 이해 되도록 살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이제는 사본들을 대조 해 가면서 살펴 보는 수 밖에 없습니다.
신약은 사본들이 많아서 대조를 해 보면 그 안에서 문제가 발견되었을 때
사본들끼리의 사소한 차이 정도의 이상인지 아예 원본에서부터 문제가 발생한 것인지를
그리 어렵지 않게 분별할 수 있다는 것이 사본 대조학의 상식입니다.
 
1. 대문자 사본이 원전에 가까운 것이고 소문자 사본이 후대의 것입니다.
2. 뛰어 쓰기가 잘 된 것이 후대의 것이고 그렇지 않은 것이 연대가 앞선 것입니다.
3. 한 두 글자의 첨가와 누락의 차이는 사본들끼리의 차이로 보게 됩니다.
4. 이해를 돕기 위하여 한 절을 첨가한 한 흔적들은 거의 쉽게 드러나게 됩니다.
5. 한절 정도가 빠진 경우는 오히려 원본에 더 가까운 사본에서 보여지고 있습니다.
6. 아예 몇 절이 더한 경우도 후대 사본에서 발견되어 첨가로 보게 됩니다.
7. 이러한 고장들은 상당수가 있고 이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연구로써 규명되었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에서 보이는 문제는 결코 사본에서 발생한 문제의 수준을 넘어서
원본에서부터 발생한 문제로 볼 수 밖에 없는 부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목사님께서도 한 번 이에 대하여 살펴 주셨으면 해서 제시하는 바입니다.

지금부터 마태복음 안에 무리하게 인용된 구절을 제시해 보겠습니다.

1. 마태가 이사야 7장 14절을 인용하면서 심각한 오해를 했습니다.

마태는 이사야서 7장 14절을 그리스도께서 동정녀 마리아를 통하여
탄생하시게 될 예언으로 오해하여 인용한 사실을 대부분은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전혀 그렇게 예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사야서 7장 14절 앞뒤를 잘 읽어 보시면 이사야 선지자는 수백년 후에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통하여 탄생하시게 될 것을 예언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누구든지 조금만 더 성실하게 읽으시면 분별할 수 있는 내용의 기록입니다.

이사야서 7장을 잘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읽어 보셨으면 이러한 성경을 해석하기 위하여 다음의 원칙을 한 번 적용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해석하거나 인용하는 사람들은 이런 기본원칙을 유념하시고 조심하셔야 할 것입니다.

①언제, ②어디서, ③누가, ④누구에게, ⑤무엇을, ⑥어떻게, ⑦왜
그러한 말씀이 주어졌는지를 면밀하게 검토해 보아야 합니다.

①언  제 : 이 때는 아하스 왕 때의 일입니다.
②어디서 : 유다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③누  가 : 이사야 선지자가
④뉘에게 : 아하스 왕에게
⑤무엇을 : 아람왕 르신과 북왕국 왕 베가를
⑥어떻게 : 두려워 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⑦왜썼나 : 두려워 할 필요도 없는 것을 두려워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하스 왕 때에 북왕국 왕 베가와 아람왕 르신이 예루살렘으로 올라와
공격을 시도했지만 예루살렘을 함락 시키지도 못하고 물러갔습니다.

그 때 어떤 사람들이 아하스 왕에게 말하기를 아람왕 르신과
북왕국 이스라엘 왕 베가가 동맹(同盟)하였다는 정보(情報)를 흘렸습니다.

그러자 왕의 마음과 백성들의 마음이 삼림이 바람에 떨림같이,
또는 사시나무 떨듯이 두려움이 사로잡혀 떨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보내어 아람왕 르신이나 북 왕국 베가가
아무리 큰소리 쳐도 연기 나는 두 부지갱이 수준 밖에 안되니까
전혀 두려워 하지 말고 염려 할 것이 없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도 아하스는 두려워서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하스 왕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지켜 주실 증거가 되는
징조라도 기도해 보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하스는 또 나는 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 같은 짓은 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이 때 이사야 선지자가 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하나님께 징조(徵兆)를 구하지 않아도 주께서 친히 한 징조(徵兆)를 주실 것인데
자 보아라 ! 지금 한 젊은 여자(알마 ; 처녀가 아니었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인데
그 아이를 낳거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인데 이 아이가 미쳐 선악(善惡)도
분별(分別) 못하고 겨우 젖 떨어져 버터와 꿀을 먹을 수 있을 때쯤에는
지금 아하스 왕이 두려워하고 미워하는 두 왕 즉 아람왕 르신과
북왕국 이스라엘 왕 베가의 땅이 폐한 바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은 앗수르 왕이 와서 아람과 북왕국 이스라엘을
쳐서 망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17절에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마리아가 잉태하여 예수님을 낳을 것을
예언한 것이라고 마태처럼 그대로 오해(誤解)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위에서 말씀하시는 14절의 처녀라는 번역은 오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단어는 처녀(뻬툴라)가 아니라 그냥 젊은 여자(알마)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알마(젊은 여자)는 마리아를 예언한 것은 전혀 아니고
이사야 선지자와 아하스 당시에 살았던 임마누엘이란 아들을 낳았던 여인이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말씀하시던 그 여인은 동정녀를 말하는 것도 아니었고 예수님을 낳은 마리아를
예언한 것이 아니라 그 시대에 살았던  한 여인에 불과 했습니다.

그 때 이사야 선지자는 전혀 동정녀 탄생을 예언할 생각도 계획도 없었습니다.
또 하나님꼐서도 그러한 예언을 하라고 지시하신 아무런 근거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다만 지나치게 소심하여 벌벌 떨고만 있는 아하스 왕을 안심시킬 마음 밖에는
다른 어떤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본문의 배경을 다시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따라서 이 말씀에 대한 면밀한 검토를 해 보시게 되면 누구든지 꼭 같은 결론을 얻을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는 마태가 무리한 인용을 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한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이사야 선지자가 무슨 말을 했던지
"마태가 그렇게 인용했으면 마태가 인용한 것이 맞는 것이지 뭐그리 말이 많으냐!?"
하는 식으로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인데 이러한 자세는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잘 모르고 그냥 그 말씀을
동정녀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할 예언으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면밀하게 보지 않으면 일반인들이 잘 발견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또 이러한 문제를 제기 했다가는 괜한 구절수에 휘말리게 될 것을
두려워하여 어떤 사람들은 알면서도 그냥 어물쩡 말 없이 넘어가고 있는 현실입니다.

신약 성경에 신약기자들이 구약을 인용한 구절에는 때로는 무리한 인용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 중에 마태복음에 주로 그러한 인용이 있습니다.

2. 마태가 기록한 족보에 몇 사람을 고의로 누락시킨 문제입니다.
    마태는 족보를 기록하면서 세 사람의 왕을 의도적으로 누락시키고 있습니다.
    1장 8절에 요람 다음에 ①아하시야(1년 통치)  ②요아스(40년 통치)  ③아마샤(29년 통치)
    세 왕을 빼먹어서 결국은 14 대라는 이상한 틀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결국 마태는 14 대 이론에 맞추기 위하여 유대역사 중 세 사람이 다스린 중요한
 ①아하시야(1년 통치)  ②요아스(40년 통치)  ③아마샤(29년 통치) 70년을 무시해 버렸습니다.
 
그렇게 한 것까지도 성령께서 그렇게 하라고 지시하셨다고 끝까지 주장해도 괜찮을까요?.
성령께서 마태에게 3 명의 왕을 빼고 14씩 맞추라고 영감을 주셨을 것으로 믿어야 할까요 ?
아니면 거기에 대하여 아무 말도 하지 말아야 정통이고 보수이며 개혁주의가 되는 것일까요 ?

그렇지 않으면 또 사본을 만드신 필사자들에게 책임을 돌려야 하는데 아시겠지만
모든 사본들이 꼭 같을 때는 사본을 기록한 사람의 실수 문제로 보지 않습니다.

원본에 바르게 기록 되어 있는 것을 필사자들이 고의로 이렇게 엄청난 변조를 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한 두개의 사본에만 이렇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본이 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의 원본이 없지만 억지로라도 주장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가령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이 말해 보는 것입니다.

"마태는 그렇게 쓴 것이 아니고 성령의 감동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아무 하자나 오류가 없는
완전한 기록을 남겼는데 제 1차 사본의 기자가 이렇게 변조했을 것이다."하고 우기는 것입니다.

제 1차 사본의 기자가 변조하였고 그 후 필사본을 기록한 모든 분들이 변조된 사본에서
또 사본을 만들어 오늘날 마태복음에 그렇게 이상한 부분이 있다고 주장하게 되면
문제가 없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이는 너무나도 단순한 생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마태 한 사람을 감동하여 마태에게는 한 글자도 오류가 없는 완전한 복음서를 기록하게 하셨지만
제 1차 사본를 필사하는 사람은 감동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에 이는 말이 되지 않습니다.

제 1차 사본이 변조 되었을 때 원본이 없어지고 나면 이는 회복 불능의 사태가 벌어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본 하나를 기록하는 것을 돌아 볼 수 있었지만 사본 기록자들까지는 돌아 볼 수 없었다고 하면
도대체 원본을 오류 없이 기록하게 하신 것이 무슨 의미가 있으며
원본에 오류가 없었다고 어떻게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것을 보면서도 오류가 있다고 말하면 안되고 무조건적으로 성경원본에서는
일점 일획도 오류가 없었다고 교리를 만들고 또 그렇게 주장만 한다고 해서
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3. 마태는 다시 바벨론 이거 후의의 역사에서 다시 한 대를 빼서 14대를 맞추었습니다.
  마태의 족보 이야기에서 또 다른 문제는 3 번째 14 대 째라고 하는 데서도 브다야를 누락시켜서
  마지막 14 대를 맞추었다는 것입니다.
 
역대상 3:17-20을 정밀하게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사로잡혀 간 여고냐(여호야긴 혹은 고니야)의 아들들은 그 아들
스알디엘과 말기람과 브다야와 세낫살과 여가먀와 호사마와 느다뱌요
브다야 (마태가 누락시킨 사람) 아들들은 스룹바벨과 시므이요
스룹바벨의 아들은 므술람과 하나냐와 그 매제 슬로밋과
또 하수바와 오헬과 베레갸와 하사댜와 유삽헤셋 다섯 사람이요
스알디엘과 스룹바벨 사이에 분명히 브다야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태가 14 대를 맞추기 위하여 브다야의 이름을 누락시키고 있습니다.
 
무슨 변명을 할 수도 없고 언제 어디서 누가 몇 번을 보아도 이러한 것은 잘 못된 것은 분명합니다.
 
첫째,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성령님의 실수라고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성령님께서 세 사람을 빼고 14대씩 맞추라고 감동하셨다는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14 대씩 맞춘다고 좋아질 것은 아무 것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둘째, 이러한 문제는 사본을 만드는 사람들의 단순한 실수에서 비롯된 문제도 아닌 것입니다.
        사본을 만드는 사람들이 실수일 수 없는 이유는 이 부분을 모든 사본이 꼭 같이 기록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만약 마태가 이런 것 없이 완전한 영감으로 아무 하자가 없는 복음서를 기록했었는데 제 1 필사본 기록자가
        임의로 이렇게 고장을 낸 것이라고 하면 말은 되지만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원본을 기록하는 마태는 성령께서 오류가 없도록 감동과 감독을 하실 수 있었다면 왜
        최초의 사본의 필사자가 이렇게 큰 변조를 하도록  하나님께서 방치하셨는지를 설명을 할 수가 없습니다.
 
셋째, 원본을 기록한 그 마태 한 사람의 무리한 기록으로 보는 것입니다.
        마태는 다윗의 이름을 가지고 지나치게 상상력을 발휘하다가 히브리어로 [다비드]라는
        다윗의 이름의 철자 즉 달렛(4) + 와우(6) + 달렛(4)으로 글자를 숫자로 고쳐서 더하면
        14 가 된다고 하는 이상한 틀을 만들고 그 틀에 맞추기 위해서 억지로 세 왕을 빼버리고
        14 대를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가 무슨 목적으로 3 왕의 이름을 빼먹고
        14 대 + 14 대 + 14 대라는 틀에 맞추려고 했을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성령님의 실수는 아니어야 하고 사본을 기록하는 분들 수 천명이
같은 실수를 저지른다는 것은 더욱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결국은 마태의 실수라고 볼 수 있는데도 이를 실수로 말하면 안된고 그냥 무조건
원본에는 사람의 실수도 오류도 없었다고 해야하는 것인지 제가 오히려 반문해 보고싶습니다.
 
4. 마태가 인용한 구약의 구절들은 적절하지 않았던 구절이 그 외에도 상당히 있습니다.
 
(마 1:22)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예수님의 탄생은 마태가 이사야 7장 14절을 이루려 하심이라" 고
              한 것은 누가 보아도 무리한 인용이었고 부적절한 적용이었습니다.
 
(마 2:15)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호세아 선지자는 예수님을 애굽에서 불러내게 된다는 예언을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호세아 11장 1절)
 
(마 2:18)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렘 31:15)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도다. 이는 전혀 맞지 않는 무리한 인용이었습니다.
              마태가 인용하는 예레미야 31장 15절은 전혀 베들레헴에서 아이들이 죽게 되고
              그를 슬퍼할 베들레헴의 여인들을 예언한 것이라고 주장 근거가 없습니다.
 
(마 2:23) 나사렛이란 동네에 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이 부분도 무리한 인용이었습니다. 우리가 정경으로 인정하는 구약 39권 중에서는
              메시야를 나사렛사람으로 예언한 구절이 단 한 구절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마 27:9)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하신 말씀이 이루었나니
              일렀으되 저희가 그 정가 된 자 곧 이스라엘자손 중에서 정가한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이 부분은 예레미야서에 예언 된 것이 아니라 스가랴서 11장 13절에 예언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마태가 무리한 인용을 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이런 정도의 문제는 사본에서만 문제가 아니라
원본에서도 그렇게 되어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 본문이나 원어성경을 충분히 공부해 보시고 다시 연락을 주시기 바랍니다.
 
자 이제는 한 번쯤 질문을 하고 넘어 갈 수 있습니다.
마태가 이렇게 한 것이 어떻게 되어서 문제가 발생한 것인지 살펴 보아야 합니다.
 
첫째 , 마태에게 성령께서 위의 구절들을 인용하여 기록하도록 마태를 감동하셨는지 ?!
 
둘째 , 마태가 메시야 예언이 성취된 점을 강조하려고 무리한 인용을 것인지 ?!
 
셋째 , 마태는 그렇게까지 한 것이 아닌데 사본을 만드는  수 많은 필사자들이
        마태가 써 놓은 것을 보고 마음에 들지 않아서 마치 약속이나 한듯이
        꼭 같이 수 천 명의 필사자들이 무리한 인용을 했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지 ?!
 
어떤 이론이 사실이고 어떤 견해가 개연성이 있는 정직한 견해인지
스스로 정직하게 성경의 본문을 정확하게 읽어서 분별해 보기 바랍니다.
 
이렇게까지 보여 드려도 여전히 분별이 되지 않으시면
해당 본문에 대하여 보다 정밀한 조사를 더 해 보셔야 합니다.
 
성경을 정밀하게 읽어 보지도 않고 너무 어설프게
무슨 학설이나 무슨 교리니 하는 것을 들고
함부로 떠드는 사람들이야말로 교회를 어렵게 만드는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자신들 딴에는 하나님의 교회를 위한답시고 분별없이 나서서 함부로 말하고 있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교회와 분별력이 모자라는 어린 영혼들을 이상한 미신에 빠지게 하고 있습니다.
 
성경 본문에 이러한 고장이 나 있다는 사실은 기독교에 대하여 반감을 갖고 떠드는
안티 크리스챤들까지도 다 알아 내 가지고 공격을 하고들 있는데
일부 보수 신학교에서 안일하게 무조건적으로 축자 영감설을 믿으라고 하면서
원본에는 일점 일획도 오류가 없었다고 하는 학설을 믿으라고
윽박지르기만 해서는 건전한 믿음이 생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이러한 공격이 끝없이 몰려 오게 될 때 감당하지 못하고 크게 흔들리게 될 것입니다.
 
5. 마태가 기록한 복음서에는 너무 많은 부분이 누락되었습니다.

성경에 이상하게 첨가 된 부분과 상당한 너무나도 많은 내용이 누락되었을 때
이를 단순히 사본하는 사람들만의 실수라고 볼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기계적 영감설로 주장하다가 이제는 한 걸음 물러서서
유기적 영감설과 축자적인 영감설을 주장하지만 성경 본문을 더 살펴 보시면
그러한 주장을 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바 성경을 기록함에 있어서 성령의 영감을 굳이 표현해야 한다면
인격적 영감(人格的 靈感)설 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성경기자의 인격을 무시하고 기계적으로 감동하신 것이 아니라

인격적 영감(人格的 靈感 =인격적인 감동을 주셔셔)을 주셔서 하나님의 뜻을 기록하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영감을 주셨다고 해서
그 사람이 완전한 사람이 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볼 수 있고 이해할 수 있고 기억할 수 있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태가 기록한 복음서에는 위에 언급한 것 처럼 무리한 틀을 짜면서 세 왕들의 이름을
누락시킨 것과 스알디엘의 아들 브다야의 이름을 건너 뛰게 하여 14 대씩 맞추려고 한 것과
예수님을 구약성경에서 예언했던 그 예언이 성취된 것을 강조하려는 마음이 앞섰던지
무리하게 인용한 구절이 많이 있다는 것을 보시면 쉽게 아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는 그 보다 더 심각한 것은 문제를 발견한 것입니다.
마태가 쓴 기록에 무리한 기록이 있을 뿐만 아니라 너무 많은 것들은 놓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부득불 누가는 자신이 조사하고 인터뷰한 결과물을 가지고 약 30 가지 이상이
더 보완된 복음서를 기록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이러하 일을 하게 된 것은 성령의 깊은 감동에 의한 것임을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이 때 성령님의 감동을 어떤 감동으로 볼 것인가 하는 것은 스스로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약 30년이 지나 80년대 90년대에 들어서자 12 사도들 중에서 대부분은
순교하여 세상을 떠나셨고 요한 사도만 남아 있었습니다.
요한은 자기보다 앞서서 기록한 모든 것을 성실하게 살펴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자기만 알고 있는 소중한 자료들을 보완하는 요한 복음을 기록하게 되었습니다.
요한 복음서에는 다른 복음서에 없고 오직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기사가 18가지 이상 됩니다.
 
이렇게 요한이 뒤늦게 보완한 것과 누가가 일찍이 보완한 것을 다 합치면 마태복음에서
누락된 사건들이 약 50 가지나 된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저는 시간을 내어서 그 모든 것을 다 조사 해 보았습니다.
 
제가 평소에 강의하던 PPT 파일들 중에 신약 파일에는  누가가 보완한 내용과
요한이 보완한 제목을 다 수록해 놓았습니다.
 
읽어 보시고 견해가 다르시다든지 제가 드린 말씀 속에
실수나 무리한 주장이 있으면 지적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도 하나님과 교회 앞에서 그리고 에스라하우스를 찾은 분들에게
정직하게 바르게 알고 바르게 전하고 싶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유명한 사람의 이론이나 학설이라도 검증없이 무조건 믿을 수는 없습니다.
이성과 양심에 맞지 않고 다른 성경과 모순되는 것이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성경의 권위가 흔들리게 되는 것이 두려워서 그냥 쉬쉬 하는 것도 바른 자세라 할 수 없습니다.
박홍섭 09-04-29 10:50
 59.22.102.141 답변 수정 삭제  
답글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렇게 댓글을 다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답변을 요구하셨기에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최대한 간략하게 하려고 해도 목사님의 문제제기가 많아서 길어질 것 같습니다.

우선 복음서 안에 있는 차이와 누락과 의도적인 편집의사를 마치 축자영감에 문제가 있는 식으로 이해하시는 것은 전형적인 자유주의적인 발상이라고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목사님은 유기적인 영감을 인격적인 영감으로 해석하시면서 성경기자의 생각과 의도와 목적을 성경을 읽는 자들이 믿고 따르기에 오류가 없도록 간섭하셨다고 정의하십니다. 그러나 저는 유기적인 영감이 성경기자의 생각과 의도와 목적만이 아니라 그 생각을 가지고 기록한 문자와 문법과 문장에도 오류가 없다는 유기적, 축자영감을 따르고 있습니다. 축자영감은 결코 목사님의 생각처럼 기계적 영감이 아닙니다. 인격적, 유기적 영감이지만 단어에도 오류가 없다는 것이 축자영감입니다. 물론 원본에 한해서입니다. 

유기적 축자영감을 따른다면 당연히 성경기자의 생각에 따라서 같은 사건이라도 기록 의도에 따라 다르게 표현될 수 있고 어떤 사건이 누락이 될 수도 있고 인물을 누락시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성경의 진리에 비추어 오류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계시의 점진성과 맞물려 있기도 합니다. 신약의 기자들이 구약을 인용할 때 구약기자들이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들도 신약에서는 더 분명하게 깨달아 구약을 인용한다는 의미입니다. 당연히 구약보다 확대 발전되는 의미가 포함되겠죠. 복음서에서는 그와 같은 구절들이 많이 있습니다.

목사님이 문제로 제기하신 마태복음의 구약인용 문제도 전부 그와 같은 맥락으로 충분히 설명가능합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그와 같은 마태의 의도적인 누락과 확대와 삭제와 차이를 마태의 실수와 오류로 단정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목사님이 분명히 위의 글에도 밝히셨듯이 원본에 고장이나 실수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마태가 구약 인용을 무리하게 하고 잘못되게 한 것이 사본번역상의 문제만이 아니라 원본부터 그렇다는 말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목사님은 성경무오설을 믿는 다고 말하시면 안됩니다. 성경에는 원본에도 오류가 있을 수 있다고 주장하셔야 정직한 주장이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서 구체적으로 몇 가지 문제를 제기하셨으니까 문제에 간략하게 답해보겠습니다.

간략하게 답하는 이유는 이 논쟁이 목사님이 처음 제기한 것이 아니라 이미 학계에서는 충분하게 검토되고 진행이 되었던 문제이기 때문에 목사님도 아실 것이라 짐작하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이 아신다면 제가 간단하게 답한다고 그 내용조차 간략한 것이 아님도 잘 아실 것이고 목사님의 주장이 이 문제의 다양한 견해 중에 성경무오를 믿지 못하는 사람들의 주장에 가까운 것임도 아시리라고 사료됩니다. 

1. 사7:15절의 인용문제입니다.
목사님은 이사야가 예수님의 동정녀탄생을 의식하지 않고 단지 젊은 여인의 잉태를 의식하고 한 말이라고 주장하면서 마태가 그것을 동정녀탄생의 성취라고 인용한 것은 무리라고 했습니다. 물론 목사님의 말처럼 이사야의 예언은 일차적으로 그 시대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분명히 이사야가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모르고 전한 말씀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마태가 성령의 감동 가운데 이사야의 예언이 예수님의 탄생을 예표했던 예언이라고 깨달아서 그것을 구약의 성취라고 기록한 가능성을 전혀 열어두지 않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성경계시의 점진성을 염두에 두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목사님은 히브리어 ‘알마’(젊은 여자)논쟁을 마치 처녀로 번역하면 안되는 것처럼 단정적으로 이야기 하면서 사람들의 이해를 왜곡시키고 있습니다. 히브리어 ‘알마’라는 단어는 구약에서 성경험이 있는 젊은 여자를 뜻하며 처녀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할 만한 근거가 전혀 없습니다. 알마는 구약에서 7회 사용되는데 2번은 명백히 결혼하지 않은 처녀를 지칭하는데 사용되고 5번은 결혼여부와 상관없이 사용됩니다. 알마가 성경험이 있을 가능성이 있는 젊은여자라고 주장하는 것은 전형적인 자유주의자들의 주장으로 신학적으로도 이미 별로 의미가 없는 논쟁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백번 양보해서 알마를 처녀가 아니라 젊은여자로 번역한다고 해도 젊은 여자의 범주에는 처녀도 분명히 포함됩니다.

그렇다면 이사야 본문의 문맥도 처녀라고 보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습니다. 이사야 본문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믿지 못하고 두려움 가운데 빠져 있는 아하스왕의 두려움을 없애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징조를 주시는 장면으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다는 것입니다.

징조란 일반적인 현상을 징조라고 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안에 대해서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기적과 같은 사건을 통해 확신을 주는 사건이나 현상을 징조라 그럽니다. 목사님의 해석처럼 단지 젊은 여자가 성관계를 통해 아들을 낳는 것이라면 그것은 결코 징조가 될 수 없습니다. 매일 매일 일어나는 사건이 어떻게 징조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처녀가 잉태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하겠다는 약속이라야 하나님이 아하스왕에게 주신 징조가 되는 것입니다. 아하스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마치 불가능한 것처럼 믿고 두려움에 빠져 있습니다. 그런 아하스에게 하나님은 내가 돕고 지키는 것은 불가능이 아니다. 처녀가 아이를 낳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내가 하면 가능하다. 그처럼 내가 너를 지키겠다고 한 약속도 반드시 지키겠다는 의미의 징조가 처녀탄생의 징조입니다. 징조는 징조가 되게 해석해야 합니다. 그것이 목사님이 제시하신 기본적인 성경해석원리에 충실한 해석아니겠습니까?

더군다나 뒤이어 나오는 임마누엘의 약속은 그 사실을 더욱 강화시켜줍니다. 비록 목사님의 주장처럼 표면적으로 이사야의 예언이 예수의 동정녀 탄생과 무관하게 보이지만 사7:14절에서 언급된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이 사8:8,10절에서 다시 언급되고 있으며 임마누엘이라고 불리우는 구출자에 대한 기술이 9:6-7, 11:1-2에서 계속 진행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사실들로 미루어볼 때 사7:14절은 이사야 시대의 역사적인 한 사건에 대한 단편적인 예언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한 사상의 출발점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7장의 젊은 여자(처녀)에서 태어나는 그 아이가 단순한 어린아이 정도가 아니라 그 이상의 인물로 이사야6-12장에 걸쳐 발전되어 가는 구속사적 중대임무를 띤 메시아적 인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7:14절은 주전 8세기경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 탄생된 예언인 동시에 메사아의 탄생에 대한 종말론적 예언으로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마태가 성령의 감동 가운데 그러한 구약의 그와 같은 의미를 깨달아서 인용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인정하지 못하시고 마태의 인용이 잘못된 인용이라고 주장한다면 목사님은 성경원본의 오류를 인정하는 주장을 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이 마태복음에서 마태가 인용한 구약의 처음구절입니다. 첫 구절부터 계시의 점진적인 성격은 간과하시고 마태의 실수와 잘못을 주장하시니 나머지 구약인용도 다 그러하게 보이는 것이 당연하리라 생각됩니다.


2. 제기하신 2.3번의 문제는 마태복음의 족보 문제입니다.
목사님은 마태가 의도적으로 세 사람의 왕을 누락시키고 14대의 틀을 만들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마태가 이렇게 한 것이 오류이고 실수이다는 식으로 말씀하십니다. 맞습니다. 마태는 의도적으로 예수님의 족보를 14대라는 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가 정말 묻고 싶은 부분이 바로 이런 점입니다. 목사님은 정말 목사님이 인격적영감, 유기적영감이라고 부르는 그 영감을 믿고 계십니까? 마태가 의도를 가지고 고의적으로 3왕을 누락시키고 14대의 틀을 가진 족보를 예수님의 족보로 소개하고 있는 것은 너무 선명하게 보이지 않습니까? 유기적 영감, 인격적 영감이 무엇입니까? 성경저자가 자기의 관점과 주장을 위해 자료들을 종합하고 편집하고 사용할 수 있다고 인정하는 것 아닙니까? 그 과정 중에 얼마든지 삭제하고 필요한 것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오류는 아닙니다. 실수도 아닙니다. 그것을 인정하신다면 문제는 마태가 왜 의도적으로 예수님의 족보를 14대 라는 틀을 가지고 설명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 의도를 밝히고 푸는 것이 성경학자와 목회자의 몫이 아니겠는지요? 그리고 그렇게 밝히려고 애쓰는 많은 해석들을 아마도 아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주석 책만 몇 권보아도 그런 연구들은 금방 드러납니다. 제가 굳이 여기 그 설명들을 소개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마태가 의도를 가지고 14대의 족보로 기록한 것을 마치 변명할 수 없는 원본의 오류의 증거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세 사람을 빼고 14대씩 맟추라고 감동하셧다는 것을 생각할 수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유기적영감을 믿는 다는 것은 무슨 의미이신지요? 도무지 논리적으로 납득이 안갑니다. 차라리 목사님이 마태의 족보는 분명히 마태가 실수 한 것이다. 그러므로 원본에도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신다면 이해가 되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알기로 목사님은 나는 성경무오를 믿는다. 원본에 문제가 없다고 말씀을 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위의 글을 보면 여기에서는 원본에 고장이 있다. 사본상의 오류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사본들이 다 똑같다. 사본을 만드는 사람들의 단순한 실수라고 볼 수 없다. 원본을 기록한 마태의 실수라고 하고 있습니다. 목사님의 주장중 어느 것이 자신의 주장인지요? 나는 원본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입니까? 아니면 원본에 문제가 없다는 주장입니까?

3. 목사님은 마1:22, 2:15, 2:18, 2:23, 27:9을 들어서 이 구절에서 마태가 인용한 구약의 구절들이 무리한 인용이므로 축자영감이 유기적영감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마태가 무리하게 인용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음으로 원본에서 그렇게 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결국 원본의 고장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제기하신 구절들을 성경본문이나 원어성경을 통해 충분히 공부하고 다시 답해달라고 하셨습니다. 목사님도 아시다 시피 이 구절들은 목사님이 발견해낸 구절들이 아니고 이미 오래전부터 학자들이 팽팽하게 논쟁해왔던 구절들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따른 다양한 해석들도 아시리라 믿습니다.

그런데도 이 구절들을 오류가 없는 것으로 믿는 사람들은 마치 본문을 잘 모르는 양, 아니면 원어를 잘 모르는 양, 그리고 성경을 정밀하게 읽어보지 않고 어설프게 학설이나 교리만 믿고 떠드는 사람으로, 교회를 어렵게 만드는 사람으로 어린 영혼들을 미신에 빠지게 하는 사람들로 매도하고 있습니다.(축자영감을 믿으면 미신을 믿는 것같은 늬앙스입니다.) 그리고 보수주의자들이 처음에는 기계적 영감설을 주장하다가 이제는 한걸음 물러서서 유기적 영감설과 축자영감설을 주장한다고 하는데 무슨 근거로 그런 주장을 하시는지요? 이런 부분들은 참 아쉽습니다. 그렇게 함부로 말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지 않습니까? 목사님의 세미나에 6일 동안 참석하면 신학교 6년 동안 배우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고 장담하신 것과 방불한 표현들입니다. 조심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5. 목사님이 제기하신 마태복음의 구절들을 답변해드립니다.

1)마2:15절의 호11:1절의 인용이 무리하다는 주장입니다. 목사님은 여기서도 내 아들을 불러낸다는 마태의 인용을 문제 삼으십니다. 호세아11:1의 ‘내 아들’을 이스라엘 백성을 의미하는데 마태가 그것을 예수님으로 인용한 것은 마태의 무리한 적용이라는 것이죠. 그러나 이것도 계시의 점진성과 이스라엘-예수님의 모형론을 인지하신다면 전혀 무리가 아닙니다. 곧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애굽에서 나온 출애굽의 사건이 장차 진정한 아들인 예수님에게 성취될 것을 내다본 모형적 사건으로 보는 것입니다. 마태는 이런 모형론적 이해를 통해 호11:1절을 예수님께 적용하는데 아무런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저도 그렇게 이해하는데 아무런 어려움을 느끼지 않습니다. 성령님의 감동하심 때문이겠죠.

2)마2:17-18절의 렘31:15절 인용이 무리하다는 지적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전체를 보시면 어렵지 않게 해결됩니다. 렘31:15절에서 라헬의 통곡은 라마에서입니다. 라마는 라헬이 베냐민을 낳다가 죽어 묻혔던 무덤이 있던 곳입니다. 또한 라마는 주전 586젼 이스라엘이 바벨론으로 끌려가기 위해 모였던 장소입니다.(렘40:1) 그렇다면 라헬의 통곡소리는 그녀의 자손이 포로로 끌려가서 다시는 그녀 곁에 없기 때문에 슬퍼하는 소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렘31:15절은 예레미아가 남방유다가 망하고 포로로 끌려가는 모습을 예견하며 그 슬픔을 라헬의 이름을 빌려 노래한 내용입니다. 마태는 이 노래 중 한 구절이 헤롯이 살해한 아이들로 인해 당시 사람들이 통곡으로 성취되었다고 해석한 것입니다. 역시 이런 마태의 해석도 성령의 감동하심이었습니다.

3)마2:23절의 나사렛 예수란 칭호문제입니다.
목사님은 메시야를 나사렛사람으로 예언한 구절이 단 한 구절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마태의 인용도 잘못이라고 주장하십니다.

이 문제는 인용구의 도입구가 다른 도입구들과 다르다는데서 해결의 열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인용구를 이끄는 단어가 다른 인용구와 다르게 ‘레곤토스’가 아니라 ‘호티’입니다. 그리고 ‘호티’를 받는 선지자의 수가 단수가 아니라 복수입니다. (디아 톤 프로페톤. 선지자들을 통하여) 이것을 볼 때 마태는 다른 인용구절처럼 구약의 한 구절을 직접 인용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선지자의 예언들을 종합한 한 주제를 소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 성경 안에 나사렛이란 마을 자체가 언급이 되고 있지 않지만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을 것은 곳곳에서 예언하셨습니다. 마태는 당시 나사렛의 사회적 지위를 사용해서 이러한 구약 전체의 예언들을 유대인들이 공감할 수 있는 표현방식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구약의 예언들이 공통적으로 예견하고 있는 메시아의 모습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것도 유기적 영감의 대표적인 예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마태의 오류나 실수가 아닙니다.

4)마27:9절의 유다의 배반문제입니다.
목사님은 이 부분이 예레미야서가 아니라 스가랴11:13절의 내용인데 마태가 예레미야라고 한 것이 무리한 적용내지 잘못된 적용이라고 주장하십니다. 그러면서도 단순히 사본의 문제가 아니라 원본의 문제임을 강하게 시사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도 유기적 영감을 믿으신다면 어렵지 않습니다. 비록 스가랴11:12-13절이 가장 직접적인 연관구절이지만 유다는 은전삼십개를 돌려주면서 그것을 무죄한 피값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무죄한 피는 스가랴에는 없는 표현으로 예레미야 19:4절을 반영한 것입니다. 결국 마27:6절에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그 돈을 ‘피값’으로 규정한 것과 7절에서  그 돈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고 8절에서 그 밭을 ‘피밭’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배경이 전부 예레미야 19:1-13절의 죽음의 골짜기로 불리우는 힌놈 골짜기에 대한 예언에 기초합니다. 마태 당시는 ‘피밭’이라고 불리우는 아겔다마가 힌놈골짜기에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마태는 이러한 당시의 상황에서 렘19:1-13절의 예언이 유다의 죽음과 대제사장의 피밭 매입으로 성취되었다고 깨달았던 것입니다. 비록 그 표현들이 스가랴11:13절과 더 가깝지만 마태는 그 내용이 슥11:13절만이 아니라 렘19:1-13절의 예언을 종합적으로 성취한 것으로 본 것입니다. 그리고 대표적인 선지자로 스가랴가 아닌 예레미야를 언급한 것이고요. 유기적 영감을 정말로 받아들이신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드릴 말씀이 많지만 이 정도로 하겠습니다. 위에서 목사님이 소개하신 목사님의 파일을 다 읽어볼 시간이 없습니다. 시간이 되면 찿아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에스라 09-04-29 12:38
 121.156.16.114 답변 수정 삭제  
이 싸이트는 본래 논쟁을 하기 위신 공간이 아니기 때문에
더 말씀을 드리는 것이 의미가 없어 보입니다.

목사님께서 저를 전형적인 자유주의적 사고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모양인 데 글쎄요
저의 신학은 결코 자유주의 신학이나 신정통주의 신학이 아니며 그렇다고 경직된 개혁주의나
어설픈 복음주의라는 말도 저는 별로 그렇게 달가와 하지 않는 편입니다.

다른 데서도 비슷한 말을 한적이 있지만 세상에 있는 무슨 주의라는 사상들을 자세하게 보면
어딘가 인간들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 사상의 결과라는 것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저는 어느 주의 편에 예속되어서 무슨 이론을 주장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이 무엇이며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일반인들이 보편적인 상식으로 납득하게 하려고 노력하는 정도입니다.

일전에 어떤 분들이 저의 강의 중에 어떤 부분만 발췌하여다가 이 부분을 놓고 인터넷 공간에서
마구잡이식의 토론을 벌였던 모양입니다. 거기 토론을 이끌어가기도 하고 그 께페 운영의 일익을
담당하셨던 어떤 분들을 보니 아직은 나이 40도 안된 사람들과 정체도 분명하지 않는 사람들이
실명을 밝히지도 않고 익병이나 닉네임으로 난상토론 하듯이 토론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저에게는 한 번도 질의도 하지 않고 자기들 멋대로 판단하고 규정하고 비토하고 난리가 나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저를 신정통주의자라로 몰아 세우고 부분영감설을 주장하는 사람이라느니 혹은 사상영감설을
주장하는 사람으로, 어떤 사람은 영감설을 부정하는 목사, 자유주의 보다 더 위험한 사상을
가진 사람 등의 말들을 너무 헤프게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면 저는 유럽이나 미국에서 진행되었던 신학 사조들을 별로 좋게 보지 않습니다.
칼빈은 학문적으로 존경하지만 칼빈주의자들은 별로 좋게 보지 않는 편입니다.
자유주의 신학의 태두라고 할 수 있는 슐라이에르마흐도 그 시대적으로만 본다면 
어쩌면 효교론자였지만 저는 결코 좋아 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성경관은 물론 신관이나 역사관 전체가 잘 못 되어 있었기 때문에 결코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칼 바르트 역시 학문적으로 대단한 실력자였지만 기독교의 진리를 그렇게 어렵게 만들어서는
결코 교회를 살려 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교회 교의학을 써서 유명해졌지만 지금까지 그 책을
온전히 읽고 이해하고 공감한 사람은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습니다.

제가 쓴 글들을 좀 더 성의 있게 읽어 보시면 유기적 영감설
혹은 축자적 영감설 이라는 용어도 그리 적절한 용어가 아님을 느끼시게 될 것입니다.

인격적 영감이란 말도 성경에는 없은 용어이지만 제가 그런 용어를 만들어 가면서까지
말씀 드리는 이유는 기계적인 영감이나 축자적인 영감을 주셨다는 말들을
함부로 하는 분들이 많아서 그러한 표현을 한 것입니다.

성경을 읽어 보시면 성경을 기록하신 분들이라고 해서 온전한 사람이 된 것도 아니고
실수가 없지도 않았으며 도덕적으로도 흠이 없는 사람들이 아니라
어쩌면 우리와 꼭 같은 사람들이었으며 그들에게 역사하신 성령님께서도 그분들을
완전한 사람으로 만들어서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아무리 성령의 감동을 받아도 불완전한 것과 같이
그분들도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실수할 수 있는 분들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지만 구스 여인을 취하는 실수를 범하기도 했으며
다윗은 시편 중에 70 편 이상을 기록한 거룩한 사람이고 그의 입을 의탁하여
장래 일을 말씀하셨지만 우리아의 아내를 범하여 실수하였고
솔로몬은 성경 중에 3권씩이나 기록한 사람이었지만 범죄하고 타락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무엘과 같이 거룩한 사람도 자녀를 바르게 가르친다는 것은 어려웠습니다.
엘리야와 같이 신령해 보이는 사람도 자신의 사명을 다 인식하지 못하고 죽기를 구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분들은 분명히 성령의 감동을 받는 사람들이었지만
완전하지 않았으며 때로는 범죄도 있었고 실수가 있었습니다.

제가 믿기로는 성경 원본을 기록한 사람들의 기록물에 실수나
무리한 인용이 있었다고 해도 하나님을 증거하는 데는 큰 무리가 없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가령 예를 들면 노아와 에녹 같은 사람은 성경과 상관 없이
하나님과 동행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성경이 단 한 줄도 기록된 것이 없을 때에도 하나님을 믿어 순종하였습니다
이삭도 야곱도 요셉같이 거룩한 사람들도 다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분들은 성경의 유오 무오를 따질 필요도 없는 시대에 살았지만
성경 66권을 가지고 믿는 우리보다 더 거룩하게 살았습니다.

우리처럼 신약성경을 갖고 있지 않았던 시절, 즉 구약시대에 살았던 사람들 중에도
경건하고 거룩하고 의로운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사도들이나 속사도 교부들의 경우도 신약 성경이 확정되기 전에 살았지만
주님을 위하여 순교할 수 있을 정도로 구별된 삶을 살아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단과 사이비 혹은 다른 종교에서 하도 극성들을 부리고 있고
교회가 어설프게 지도하여 빗나간 사람들이 하나님의 교회와 성경과 교리를
심히 훼방하고 있는 시대이기 때문에 진리를 가늠하는 척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지금 기독교를 개독교로 욕하는 싸이트에 들어가 보시면
평생을 성경연구에 바친 사람들이라도 대답하기 어려울 정도로
성경 안에 있는 많은 문제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가뜩이나 죄성으로 기울어지는 젊은 세대들에게
미리 성경을 정직하게 가르치지 않고 가볍게 성경무오설 같은 교리를 심어 주었다가
청년들이 안티 크리스챤들의 메일을 받게 되거나 낚시 글에 미혹되어 휘둘리게 되면
그 때는 아무리 바로잡으려 해도 소용이 없게 될 것입니다.

마태의 무리한 인용을 두고 많은 말씀을 하셨는데
그러한 이론들이 별로 설득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세 왕을 이름을 누락시키지 않고 그냥 역사대로 기록해도 전혀 문제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14 대씩 맞춘다고 무슨 뾰족한 수가 나는 것도 전혀 아니었습니다.

마태는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을 구약성경에 예언된 메시야이심을 증거하려는
목적의식이 너무 강해서 그렇게 무리한 인용과 적용을 했다고 보는 것이 무난한 견해입니다.
거기 무슨 악의가 있었던 것도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일입니다.

목적의식이 너무 지나치게 강하다 보면 더러는 무리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 점에 있어서는 오늘날 신학자들의 자세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요즘에도 그러한 일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교회를 성장시키려는 목적의식이 너무 강하여
솔로몬의 일천번제 운운하면서 성도들에게 1,000번이나
연속으로 헌금을 드리게 하는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많이 드리는 것은 좋은 일일 수 있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을 증거하려 할 때 일단 구약성경에서 예언된 말씀들이
성취되었다는 관점에서 이를 지나치게 강조하려다가 무리한 인용을 했다는 것은
지금와서 의심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습니다.

축자적 영감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극히 소수의 사람들입니다.
저는 원본에도 이렇게 무리한 인용이 그대로 있었을 것으로 믿고 있지만
마태 복음이나 기타 복음서를 무시하거나 하지 않습니다.

제가 섬기는 교회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그대로 말씀드리지만 그런 것 때문에
성도들의 신앙이 흔들리거나 하는 일은 아직까지 보지 못했습니다.

성경은 본래 우리의 신앙(信仰)과 행위(行爲)에 대하여
정확 무오한 유일의 법칙으로 받았기 때문에 다른 문제는 그리 큰 문제로 보지 않습니다.

01. 전능하신 하나님의 천지 창조 인간창조를 믿습니다.
02. 인간이 타락한 것과 노아의 홍수사건은 역사적 사실임을 믿습니다.
03. 인류가 한 혈통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믿습니다.
04. 하나님께서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예언자들을 파송하셨음을 믿습니다.
05.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하사 구약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것을 믿습니다.
06. 구약 성경에서 메시야 즉 그리스도께서 임하실 것을 예언한 것을 믿습니다.
07. 구약의 예언대로 오신 메시야가 예수님이신 것을 믿습니다.
08. 동정녀 탄생을 문자대로 믿습니다.
09. 십자가에서 대속의 피를 흘리시고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심을 믿습니다.
10. 장사한지 3일만에 부활하신 것을 문자대로 믿습니다.
11. 성령께서 오셔서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게 하사 중생케 하심을 믿습니다.
12. 성령님께서 신약성경을 기록할 수 있도록 역사하신 것을 믿습니다.
13. 유일하신 하나님이시지만 삼위가 일체로 존재하심을 믿을 수 있습니다.
14. 그리스도께서 종국사적 종말에 요한 계시록의 예언대로 재림하실 것을 믿습니다.
15.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것을 확실히 믿고 있습니다.
16. 성도의 몸이 부활하거나 홀연히 순식간에 변화되어 주님을 만나게 될 것을 믿습니다.
17. 둘째 사망 즉 유황불 붙는 지옥에서 영벌이 있다는 것도 믿습니다.
18. 성경 66권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신앙과 행위에 대하여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임을 믿습니다.
19. 성경 원본은 물론 사본이나 번역본을 만드는 사람들까지도 성령님께서 도우셨다고 믿습니다.
20.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들과 배우는 사람들에게도 성령님의 도우심이 계신다고 믿습니다.
21.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것과 성경을 바르게 가르치는 일이 성령님의 일이라고 믿습니다.

마태가 무리하게 인용한 그러한 구절이 없어도 위에 있는 믿음을 갖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는 것은 누구나 다 인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원본이 없어졌지만 원본이나 사본이나 많은 분들이 오랜 시간 검토하였다면
비록 번역본이라 할지라도 지금 우리가 가진 성경정도면 우리의 신앙과 행위를 지도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저는 확실히 믿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목사님께서 좀 더 열린 마음으로 검토해 보시면 성령이 충만했던 성경의 기자들이나
오늘날 경건한 신학자들의 주장들 중에도 무리한 주장을 많이 하고 있다는 것을 보실 것입니다.
저의 생각은 그렇게 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하나님을 바르게 증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의 생각은 진리는 단순한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렇게 굉장한 신학을 해야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제가 가장 관심을 갖는 것은 성경을 기록된 그 본래 목적대로 읽어 내는 것입니다.
제가 이 말을 했더니 어떤 사람들이 저를 향하여
"자 보라 저게 바로 신정통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목적영감설이다!" 라고 말해 버립니다.
제가 보기에는 너무 값싼 평가라고 생각합니다.

세례요한이 다소 금욕적인 생활을 하니까 이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구신이 들렸다고 하더니 예수님께서 먹고 마시는 일에 거리낌이 없는 모습을 보더니
금방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을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고 평가한 것처럼
사람들이 어떤 사람을 평가할 때 너무 쉽게 또는 값싸게 평가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 토론 까페에 참석하는 사람들의 면면을 자세하게 살펴 볼 수는 없었지만 몇 몇 사람들
즉 치우친 주장을 하는 사람들 중에는 율럽폐기론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저를 율법주의자로 매도하고 있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신정통주의자 등으로 몰아가고 있었습니다.
이름도 밝히지 않는 사람들이 숨어서 돌을 던지듯이 떠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까페는 혼란에 빠지게 되었고 그러한 토론을 중지해 달라고 정식으로 요청을 했습니다.
그 후에 그 토론장에서 저에 대한 토론은 내려졌고 그 까페 토론에 참석했던 분들 중에
더러는 우리 에스라하우스 홈페이지에 가입을 하는 현상이 감지되었습니다.
그래서 저의 성경에 관한 입장을 소신대로 간략하게 올려 놓은 것입니다.

저는 지난 32년 동안 성경과 역사와 과학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면서 살아 왔습니다.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한절도 뻬지 않고 설교도 해 보았습니다.
지금도 이제 마지막 설교인줄 알고 창세기부터 시작하여 마태복음을 설교하고 있습니다.

창세기부터 계시로까지 강의하는 집회는 지난 32년동안에 204회가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 강좌를 수료하였습니다.
정확한 집계는 없지만 짐작으로는 7만명 이상이 수료했을 것 같습니다.
지금도 매년 700명 ~ 800 명의 목회자들이 수료하고 있습니다.

저와 함께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풀코스를 공부해 보신 분들이 한결같은 고백은
성경을 너무 몰랐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너무 부분적으로 알고 있었다는 고백을 합니다.
성경을 너무 이기적으로 보았다고 고백합니다.
성경을 너무 인간중심적으로 보았다고 고백합니다.
성경을 너무 어렵게만 보아 왔다고 고백합니다.
성경을 너무 치우치게 배웠다고 고백을 합니다.

아무리 원본에 오류가 없었다고 주장해 보아도 유럽의 교회는 다 무너졌습니다.
아무리 KJV.가 좋은 번역이라고 떠들었지만 사실은 그렇지도 못했고 그 교회들은 다 팔리고 문을 닫고 있습니다.
아무리 오직 성경이라고 말해도 성경을 바르게 빠르게 가르치지 않기 때문에 성도들은 성경을 모르고 있습니다.
아무리 개혁주의 보수주를 외치지만 신학교에서 성경을 바르게 배우고 가르치는 학교는 거의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들을 보시면 마치 D12 와 알파코스만 남아 있고 이제는 교회의 직제도 흔들리고 있습니다.
경건은 모양도 없어지고 이제 교회에 남아 있는 것은 오나가나 보수니 진보나 CCM. 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교회가 품위를 잃어버리고 나니 세상 사람들이 바라보는 기독교는 세상보다 더 세속화 되어서
세상 모든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다 맛을 잃은 소금처럼 길에 밟히는 종교로 전학하고 말았습니다.

제가 공부한 장신대학에는 목사님과 같은 주장을 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또 어떤분은 한신대학이나 감신대학처럼 꽤 진보적인 주장을 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저는 그러한 입장들을 다 들어 보았지만 결코 만족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끊임없이 성경과 역사에 대하여 살펴가면서 할 수 있는데까지
더 쉽게, 더 간명하게, 더 분명하게 가르치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보다 유익한 말씀들을 기대하겠습니다.  샬  롬
박홍섭 09-04-29 14:07
 59.22.102.141 답변 수정 삭제  
알겠습니다. 저도 목사님처럼 이상태로 더 이상 토론을 진행하는 것이 별 의미가 없다고 여겨집니다.

목사님의 주장은 성경원본에도 오류가 있지만 신앙과 행위를 지도하는데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정도로 정리하겠습니다. 결국 목사님은 성경무오설을 믿지 않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목사님은 위의 답글에서도 성경무오설을 정직하지 못한 가르침이라고 하셨습니다.

목사님의 표현대로라면 축자영감을 믿고 성경무오설을 믿는 목회자는 모두 정직하지 못한 사람들이 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목사님이 믿어지지 않는 원본의 무오가 우리들에게는 믿어집니다. 그러니 정직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믿음의 차이겠죠. 앞으로는 그런 표현에 주의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사역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