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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

성경박사 오종덕 목사

작성자장기용(원장)|작성시간21.08.11|조회수81 목록 댓글 0

 

 

성경 박사 오종덕 목사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세워진 교단이란 긍지를 헛되이 울어 먹는 후배들에게 오 목사와 같은 경건과 생활로 고신교단의 긍지를 회복해야 할 것이다.

 

 내가 신앙생활을 시작한 곳은 장로교 고신교단이었다. 내가 출석하던 경향교회는 고신교단을 떠나 고려 교단에 속했다. 그리하여 나는 고려신학교를 졸업했고 고려 교단에서 1990년에 목사안수를 받았다. 2001년에 고신교단으로 통합하여 서경 노회를 거쳐 고신교단의 경인 노회에 속해 노회원으로서 사명을 감당했다.

 

이제 고신교단의 목사로 20년을 보내고 있다. 고려 교단이 고신교단과 통합했으니 고신 목사로 32년째가 된다. 이런 세월 속에 고신교단의 역사를 많이 들여다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인물과 사건을 상당히 접하게 되었다.

 

그중 대표적인 한 목사가 오종덕 목사이다. 그 이름은 많이 들었지만, 일면식도 없었으니 그 얼굴도 알지 못한다. 오 목사는 1891년에 태어나서 1976년에 주님의 부름을 받았다. 우리 나이로 86세에 천국으로 이사한 것이다. 

 

고신교단의 역사를 연구한 학자 중 단연 이상규 교수는 으뜸이다. 이 교수 전에 허순길 박사 등 더러 역사를 연구한 학자가 있었지만, 이 교수에 미치지 못함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후배이거나 제자라도 선배나 스승을 능가하는 제자들이 많다. 이상규 교수는 누가 보아도 고신교단을 대표하는 역사신학자다.

 

이런 이 교수가 오종덕 목사에 대해 기술할 때 한 마디로 성경 연구가로 표현했다. 이 교수가 한 기독교 방송에 출연해서 오종덕 목사를 소개했다. 이 교수가 오 목사를 찍어 소개할 만큼 오 목사는 고신교단에서 기억할만한 목사이다.

 

이 교수는 ”오종덕 목사님은 기인에 가까운 근검절약을 실천했던 인물이었고, 일생에 걸쳐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암송하고 연구했던 성경학자이기도 했습니다. 공식적으로 그는 학위를 취득한 일이 없고, 박사학위를 받은 일이 없지만, 사람들은 그를 ‘성경 박사’라고 불렀고, 박윤선 박사는 그를 ‘살아 있는 성구 사전’이라고 불렀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신구약 성경 주석을 완간했던 인물로서 성경에 의문점이 생기면 오 목사님께 문의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어디를 가든지 시간만 나면 성경을 읽고 연구한 일로 유명합니다.“라고 소개를 시작했다.

 

7월 29일 수요일에 박병식 목사를 만나 박윤선과 오종덕에 관해 문의했다. 박 목사는 박윤선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아는 국내 최고 권위자다. 질문의 요지는 성경에 관한 한 박사인 박윤선 목사가 진짜 오종덕 목사에게 성경을 물었는가를 확인한 것이다.

 

박윤선이야말로 평생 성경을 연구한 목사였다. 나의 질문에 박병식 목사는 박윤선이 오종덕을 찾아가서 성경을 물은 적이 있단다. 예컨대 그 당시에는 성구 사전이 없었단다. 박윤선이 성경을 읽다가 자신이 생각한 성경 구절이 어디에 있는지 생각이 나지 않으면 오 목사를 찾아 물었단다. 그러면 오 목사가 그 구절을 답했다는 것이다.

 

이를 보면 오종덕은 성경을 다독했고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로 성경을 익히 알고 있는 성경 연구가라고 칭할 수가 있다. 박윤선은 다독과 더불어 정독을 병행하여 그야말로 성경 연구에 매진했고 이를 통해 주석 등 많은 신학 서적들을 출판해 후학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남겼다.

 

성경 연구에 관한 한 오종덕과 박윤선의 접근법은 차이가 있었지만 두 분이 모두 성경에 능통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오종덕 목사는 근검절약의 대명사였다. 그를 아는 사람들이 보면 생활 자체가 ‘수전노'로 보이기에 충분했다. 오 목사의 돈 아끼기는 상상을 초월했다. 이렇게 해서 돈을 모은 오 목사는 자녀들에게도 은행 이자를 받고 빌려주었다. 그만큼 모으기에 철저했다.

 

이런 오 목사는 1976년 1월 6일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고 한상동 목사는 다음날인 7일에 부름을 받아 합동 장례를 함으로 장례 경비까지도 절약했다. 오 목사가 모으기에만 급급하고 사용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면 참으로 불행한 목사로 남았을 것이다.

 

오 목사는 평소 모은 재원을 태풍을 만난 교회에 거금을 보내 다시 세우도록 도움을 주었다. 1973년 부산 송도에 신학대학 교사를 신축할 때 그는 개인으로는 가장 많은 돈인 수천만 원의 헌금을 드렸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상규 교수는 오 목사의 단순한 생활과 삶은 주의 이름으로 남을 돕기 위한 자기희생이었다고 했다. 이 교수는 우리의 소유, 우리의 물질, 우리의 어떤 것도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더욱이 그것은 낭비나 사치를 위해 주신 것이 아니라고도 했다. 그래서 우리는 오종덕 목사를 기억한다고도 평가했다.

 

오 목사를 추억하면서 성경 연구와 근검절약만큼은 모델로 삼아 교훈으로 받고 있다. 오 목사는 성경을 가까이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고 그 결과 생활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고 갔던 것이다. 이런 오 목사야말로 고신 정신에 부합한 인물이다.

 

고신교단에는 오종덕 목사가 있었다.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세워진 교단이란 긍지를 헛되이 울어 먹는 후배들에게 오 목사와 같은 경건과 생활로 고신교단의 긍지를 회복해야 할 것이다.

 

 

인천 초원교회(신재철 목사 시무) 목회 칼럼에서 가져 옴(2021년 8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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