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신앙고백서
들어가는 말
이 논문에서 필자는 한국의 장로교회들에서 현재 사용하고 있는 교회의 표준문서들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요리문답, 소요리문답과 관련하여, 교회와 신앙고백서의 상관관계를 역사적 개혁신학의 관점에서 논구하고자 시도하려고 한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신조 또는 신경(Creed)의 사전적 의미는 “신앙의 조목”을 의미하며, 신앙고백 또는 신앙고백서(Confession)의 사전적 의미는 “성경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공적으로 나타내는 일”을 의미한다. 그러나 위의 사전적 의미를 통해서 신경이나 신조, 또는 신앙고백서의 개괄적 의미를 알 수 있지만, 역사적으로 실제 사용된 용례들을 살펴보는 것이 우리의 이해를 돕는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된다.
기독교회의 초기에 이레니우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터툴리안, 히폴리투스 등의 저술에서 발견되는 “신앙의 규범”(the rule of faith) 또는 “전승 (또는 유전)”(the tradition)이 사용되었고, 이어서 사도신경, AD 325년의 니케아신경, AD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신경(이 신경은 곧 니케아 신경과 함께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으로 불렸다), 또한 아타나시우스 신경, AD 451년의 칼케돈 신경 등은 범교회적 공의회(Ecumenical Councils)에서 결의된 것으로 서방교회와 동방정교회를 비롯하여, 개신교회(the Protestant Church)에서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후에 종교개혁(the Reformation)과 더불어 많은 신앙고백서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1527년에 스위스 형제단에 의해 채택된 슐라이트하임 신앙고백서(Schleitheim Confession)는 제세례파의 입장을 대변했으며, 개신교회의 맨 첫 번 주요 신앙고백서인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 (1530)는 멜랑히톤에 의해 작성된 온건한 루터교회의 교리를 담고 있다. 그리고 개혁신학의 고전적 표현은 요리문답이나 신앙고백 등에서 찾아볼 수 있는 바, 불란스 신앙고백서(1559),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1560), 네덜란드(벨직) 신앙고백서(1561),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1563), 영국교회의 39개조(1563, 1571), 도르트 신조(1619),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신앙고백서)(1647) 등을 들 수 있겠다.
지금까지 드러난 결과에 따라 간단히 살펴보면, 기독교회의 초기에는 신조 또는 신경(Credo, ‘나는 … 믿습니다.’)의 형식으로 나타났고, 범교회적 공의회에 의해 채택되어 만국 교회의 표준이 되었으며, 종교개혁 이후에는 주로 신앙고백서(Confessio)의 형식으로 나타나게 되었으며, 서로 다른 교회 또는 교단의 신앙고백서가 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교회와 신앙고백서의 상관관계를 살펴볼 차례가 되었다.
I. 미합중국장로교회의 신앙고백서 채택
이 땅에 전래된 신앙고백서의 채택은 복음전래의 초기에 이 땅에 온 선교사들이 주로 영미계통의 선교사들인 까닭에 복음전파 초기부터 자연스럽게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Westminster Standards)을 채택하게 되었다. 영미계통의 교회들에서는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을 교회의 공적인 신앙고백서로 채택하여 사용해오고 있으며, 화란 본국의 화란개혁교회와 미국에서 화란의 이민자들로 출발한 기독교개혁교회(CRC) 등은 네덜란드 신앙고백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도르트 신조를 교회의 삼대 일치 신조(Three Forms of Unity)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 때문에 한국에서 복음전래 초기부터 많은 영향을 미쳐온 미국의 북장로교회와 미국의 남장로교회의 신앙고백서 채택과 관련하여 간단히 살펴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미합중국장로교회(PCUSA; 미합중국장로교회가 북장로교회와 남장로교회로 나뉘어진 것은 1861년 이후이다.)의 거의 초창기로부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의 위치는 논란의 초점이 되어 왔다. 1620년 순례자 조상들이 미국을 처음 찾았을 때 이들 대부분은 보스턴 근처에 교회와 학교를 세웠는데, 이들이 세운 교회의 대부분이 회중파 또는 독립교회들이었다. 그리고 미국에서 프란시스 마케미(Francis Makemie)의 지도 아래 첫 장로회 노회가 조직된 것이 1706년이었다. 그 노회는 흔히 독노회(the General Presbytery)라 불려지며, 펜실바니아주 필라델피아시에서 열린 것을 기념하여 필라델피아노회(the Presbytery of Philadelphia)라 불려진다. 대회가 조직된 것은 이로부터 10년 후인 1716년의 일이었다. 신대륙에서 개최된 장로회 첫 대회는 흔히 독대회(the General Synod)라 일컬어지며, 필라델피아시에서 열린 것을 기념하여 필라델피아 대회(the Synod of Philadelphia)라 불려진다.
1716년에 대회는 조직되었으나 교회의 표준문서는 1729년에 이르기까지 공적으로 채택하지 못하고 대회 이후 10여 년에 걸쳐 교회의 교리적 표준문서를 둘러싸고 논쟁이 그치지 않았다. 스코틀랜드와 스코틀랜드계 아일랜드 출신 목사들은 본국에서 하던대로 교회의 교리적 순결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장로교 표준문서에 서약하는 일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했고, 반면에 뉴잉글랜드 지역의 교회들은 교회의 질서와 유지를 위해 오직 성경만이 충족한 표준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1729년 대회(the General Synod)에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이 새 교회의 표준문서로 채택되었다. 주로 존 톰슨(John Tompson)에 의해 작성된 채택안은 대회 내에 두 입장, 곧 엄격한 서약을 요구하는 견해와 교회가 공적으로 고백적 입장을 채택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견해를 둘 다 수용할 수 있는 일종의 타협안이었다. 1729년 “채택안”에 따르면, “본 대회의 모든 목사 또는 이후로 본 대회에 가입하는 모든 목사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및 대소요리문답이 본질적이고 필수적인 그 모든 조항에 있어서, 건전한 말의 바른 형태와 기독교 교리의 체계인 것으로 동의하고 수용하는 것을 선포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만약 어떤 목사나 후보생이 신앙고백서의 어떤 조항에 대하여 어떤 “거리낌”이 있는 경우는, 그는 자기가 속한 교회에 자신의 교리적 취지를 선포할 것이요, 그의 불일치가 교회의 목회사역에서 그를 제거할만한 “본질적이고 필수적인 신앙의 조항”에 해당되는지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노회 또는 대회의 책임이었다.
1729년의 “채택안”은 신대륙에서 새로 출발하는 장로교회에 결정적인 교리적 기초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오랫동안 관례가 되어온 목사에 대한 시험대 역할을 했다. 그러나 동시에 신앙고백서의 “본질적이고 필수적인 조항”의 정확한 의미에 대하여 훗날 논쟁의 여지를 남겨두게 되었는데, 사실 신앙고백서 제20장, 제23장과 관련하여 교회문제에 대한 국가적 위정자의 권세를 만장일치로 거절한 것 외에는 교리나 예배나 정치에 있어서 이들 “본질적이고 필수적인 조항” 이 무엇인가를 구체적으로 언급한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에 건너온 이민자들이 과거 본국의 왕정 아래에서 박해와 고난을 받아온 것을 이해한다면 이날의 결정은 쉽게 수긍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동일한 날짜에 채택된 두 가지 안에 대하여 후대의 학자들은 서로 상반된 평가를 내리고 있다고 하는 점이다. 어떤 학자들은, 이날 통과한 채택안(the Adopting Act)이 신앙고백서 서약을 반대하는 파에 유리한 타협안이었다고 간주했다. 그 이유는 그 채택안이 목사들에게 신앙고백서에 일치하지 않아도 좋다는 것을 허용했기 때문이었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학자들은 1730년과 1736년의 대회결의에 비추어서 1729년의 채택안이 교회 내에서 신앙고백서에 대한 엄격한 서약을 바라는 파에 대한 승리였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위의 두 가지 견해가 1729년의 채택안(the Adopting Act)의 의의를 결정하는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위의 두 견해 중에 전자는 같은 날 오전에 채택한 “예비안”에 강조를 두고 있으며, 반면에 후자는 같은 날 오후에 채택한 “동의안”에 강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1729년 9월 19일 오전과 오후에 대회에 의해 채택된 두 가지 안(two acts)이 그 대회의 “채택안”(the Adopting Act) 이라고 하는 사실에 우리는 주의 할 필요가 있다. 윌리엄 바아커(William S. Barker)교수에 따르면, 1729년 9월 19일 오후에 결의된 실제적 “동의안”은 “완결안”(the concluding act)으로, 그리고 그날 오전에 이미 채택된 “예비안”은 “즉각적인 역사적 맥락의 부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바아커 교수의 이러한 입장은 훗날 1929년 9월 19일 하루동안에 결의된 두 가지 안(two acts)은 일견 모순되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서로 상반된 견해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전 안은 “예비안”으로, 오후 안은 “완결안”으로 이해하고, 이 두 안이 전체의 두 부분을 이루어 그 날 대회의 “채택안”(the Adopting Act)이라고 하는 점이다.
미합중국장로교회(PCUSA)는 이미 1729년 채택안(the Adopting Act)에서 받은 대로, 대회의 회원 각 사람이 “본질적이고 필수적인 모든 조항”에 서약할 것을 동의하는 내용과 그날 오후 대회에서 몇몇 회원들과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한 “거리낌 또는 예외조항”(scruples)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20장과 23장에 있는 국가적 위정자들이 대회에 권위를 행사하는 일과 교회의 권징을 행사하는 권위를 가진다고 하는 구절들에 대하여 유일한 “예외조항”(scruples)으로 선포했다. 이후 미합중국장로교회 제1차 총회(1789년)로 모이기 전 해인 1788년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20장 4항, 제23장 3항, 제31장 2항 및 대요리문답 답109, 답142를 수정하고 동교회의 신앙고백서로 채택하였다. 그리고 1887년 개정에는 제24장 4항과 관련하여 남자나 여자의 죽은 배우자의 골육지친 중의 아무와도 결혼하는 것을 금지하는 구절을 삭제하였다.
그리고 1903년에 광범위하고 결정적인 개정이 있었다. 1903년 개정에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34장 “성령에 관하여”, 제35장 “하나님의 사랑과 선교에 관하여”라는 새로운 장을, 원래 33장으로 끝나는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뒤에 추가하였다. 또한 제3장과 제10장 3항을 설명하는 선언문(Declaratory Statement)을 제35장 뒤에 추가하였으며, 제16장 7항에 중생치 못한 사람들의 선행과 관련하여 이러한 선행을 게을리 하는 것은 더욱 더 죄스러우며 하나님을 노하시게 한다는 구절을 삭제하고, 제22장 3항에 합법적 권위에 의해 부과된 정당한 맹세를 거절하는 것을 금지하는 구절을 삭제하고, 제25장 6항에 교회의 머리를 재진술했으며 로마교황을 적그리스도라 명한 것을 삭제하는 등의 수정을 가하였다.
이 선언문(Declaratory Statement)에서 제3장(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 대한 교리)과 관련하여 그리스도 안에 구원받은 사람들에 대한 작정이 모든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교리와 조화롭게 주장되어야하며 또한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이 보편구원론적인 의미로 해석되어야한다고 기술하고, 한편 멸망 받는 사람들에 대한 작정은 하나님께서 그 어떤 죄인의 죽음도 원하지 않으신다고 하는 가르침과 조화롭게 해석되어야 한다고 기술한다. 그리고 제10장 3항(택함 받은 유아들에 관한 교리)과 관련하여 유아시 죽은 모든 아이들이 구원의 선택에 포함되어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1903년 개정은 이미 분리된 컴벌랜드장로교회를 염두에 두고 한 개정이었으며, 이 1903년 개정판을 기준으로 미합중국장로교회는 컴벌랜드장로교회와 다시 연합하게 되었다.
이후 미합중국장로교회 또는 미합중국장로교회 또는 북장로교회(PCUSA, UPCUSA)는 정통장로교회(OPC)와 분리되었고(1936년), 1861년 이후 미합중국장로교회 또는 북장로교회에서 분리된 합중국장로교회 또는 남장로교회(PCUS)는 1973년 미국장로교회(PCA)와 다시 분리되었다. 그리고 미합중국장로교회 또는 북장로교회는 1958년 북미연합장로교회와 연합하고 명칭을 미합중국연합장로교회(UPCUSA)로 이름 했으며, 1967년에는 새 신앙고백서인 “1967년 신앙고백서”를 채택하였고, 1983년에 UPCUSA와 PCUS는 다시 연합하였으며 그 명칭은 원 명칭인 PCUSA로 하기로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북장로교회에서 분리된 정통장로교회(OPC)와 남장로교회에서 분리된 미국장로교회(PCA)는 각각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을 교회의 공적인 신앙고백서로 받되, 1903년 이전 개정된 것을 채택하고 있다.
II.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의 신앙고백서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은 1905년 장로교 합동공의회에서와 1907년 독노회시 12신조와 성경 소요리문답(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을 교회의 표준문서로 정식으로 채택하게 되었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요리문답은 “성경은 밝히 해석한 책인즉, 우리 교회와 신학교에서 마땅히 가르칠 것으로” 독노회시 결의하였다. 그 후 1963년 제48회 총회에서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이 정식으로 채택되어, 이때부터 12신조 및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 전체가 교회와 교회에 속한 개인의 공적인 신앙고백이 되었다.
1866년 대동강 변에서 순교한 토마스 목사와 1884년 알렌 의사의 활동, 그리고 알렌 의사의 편지로 말미암아 이듬해 미국에서 파송한 언더우드 선교사와 아펜젤러 선교사의 내한은 한국 땅에서 본격적인 선교활동의 시작을 알리게 되었다. 한국의 장로교회는 선교사들의 선교사역 초기부터 장로교회의 신앙고백서 채택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879년 만주에서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회 선교사 존 매킨타이어(John McIntire)로부터 세례를 받은 백홍준, 이응찬 등과 중국에서 존 로스 선교사를 도와 쪽복음 번역인 “예수셩교누가복음전셔”와 “예수셩교요한복음전셔”를 1882년에 완성하고, 조선에 돌아와 소래교회를 세운 서상륜, 서경조 형제와 일본에서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사 녹스(G. W. Knox)로부터 세례를 받고, 성경의 한국어 번역을 도와 쪽복음 “신약성서 마가전”을 1884년 완성한 이수정 등은 1884년 알렌 의사, 1885년 언더우드 선교사와 아펜젤러 선교사로 시작하여 이 땅에 선교사들이 주도하여 복음 전파에 앞장 서기 전에 이미 이 땅에 자생한 복음전파자들이었음을 역사가 증거 한다.
그러나 한국에서 장로교회의 시작과 신앙고백서의 채택은 이 땅에 복음을 전한 초기 선교사들로부터 시작된다. 이 땅에 왔던 초기 장로교회 선교사들이 1893년부터 장로교회 선교부 공의회를 조직하고 서로 협력하고, 또한 1901년에 이들 4개의 장로교 선교부(북장로교회, 남장로교회, 캐나다 장로교회, 호주 빅토리아장로교회 선교부)와 한국인 장로들이 함께 장로교 합동공의회를 조직하고, 같은 해에 평양야소교장로회신학교(평양신학교)를 설립하여 이 땅에 장로교회 목회자들을 길러내고 이들을 통해 이 땅에 장로교회를 정착시킨 것이다.
특히, 한국 장로교회에서 신앙고백서 채택은 복음전래 초기로부터 시작된다. 조선예수교장로회 공의회 시대(1901-1906년) 동안, 1904년에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5,000부가 출판되었고, 이듬해 1905년에는 교회의 신경을 공의회가 채용하게 되었고, 다시 1907년 9월 17일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소집된 제1회 노회(독노회)에서 신경과 규칙을 정식 채택하게 되었다. 곽안련 박사가 1919년에 발행된 「신학지남」에 기고한 “조선예수교장로회신경론”이란 제목의 글에는 1905년 조선예수교장로회 공의회에 보고 한대로 12신조와 성경 소요리문답(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의 채택과 관련된 내용이 다음과 같이 비교적 소상하게 실려 있다:
“조선장로회 신앙의 표준 중에 두 가지가 있으니 일[첫째]은 신경이요 이[둘째]는 성경소요리문답이니 제2[그 둘째]는 이백육십 년 전에 영국에서 저술한 것인데 지금 수십 국 방언으로 번역이 되고 만국장로회에서 거진[거의] 다 채납[채택]하여 사용하느니라”고 기록하여, 12신조와 성경 소요리문답(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처음부터 교회의 공적인 신앙고백으로 선포된 것을 밝힐 뿐만 아니라, 12신조와 성경 소요리문답의 연계성을 지적하고 있다. 한편, 우리의 12신조는 그 영어원문이 본래 인도의 영국선교사들이 준비한 것을 인도장로교회가 교회의 신조로 채택한 것을 12개 신조와 승인식은 그대로 두고, 앞에 나오는 “서언”은 일부 수정하여 조선예수교장로회 공의회와 독노회에 보고하고, 교회의 공적 신조로 채택하게 된 것이다. 그 후 1963년 제 48회 총회에서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 전체가 정식으로 채택되어 이미 채택한 12신조 및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 전체가 교회의 공적인 신앙고백이 된 것이다.
헌법에 따르면, 장로와 집사의 임직(정치 제13장 제3조)에 5개항의 서약과, 강도사의 인허서약(정치 제14장 제5조)에 4개항의 서약과, 그리고 목사의 임직예식(정치 제15장 제10조)에 7개항의 서약을 요한다. 그 중에서 위의 서약 중에서 각각 첫 2개항은 서로 동일한 것으로 다음과 같다: ①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신앙과 본분에 대하여 정확 무오한 유일의 법칙으로 믿느뇨?
② 본 장로회 신조와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 및 대·소요리 문답은 신구약 성경의 교훈한 도리를 총괄한 것으로 알고 성실한 마음으로 받아 신종하느뇨? 라고 합동 교단에서 임직 받을 모든 “목사와 강도사와 장로와 집사”에게 그들의 임직 시에 물어서 확인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12신조는 교단의 공적인 신조임과 동시에 교단에 속한 모든 신자의 “개인의 신조”인 것으로 표명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 헌법에 기록된 내용을 종합해 보면,
1. 12신조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및 대소요리문답(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은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의 공식적인 신조인 것이 분명하고,
2. 12신조와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은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에서 사역할 목사와 강도사와 장로와 집사들이 승인할 자신의 신조인 것이 분명하고,
3. 12신조와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은 서로 연계되어 있는 것이 분명하고,
4. 12신조에 대하여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은 보완관계에 있다고 보겠다.
III. 기타 장로교회들(고신, 기장, 통합)의 신앙고백서
1. 고신의 신앙고백서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의 신앙고백서는 12신조 및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교회의 공적인 신앙고백서로 채택하고 있다. 특히, 고신은 합동과 달리 미합중국장로교회에서 1903년에 개정한 이래로 첨부된 신앙고백서 제34장 「성령」이라는 장과 제35장 「복음」이라는 장이 첨가되어 총 35장이된 신앙고백서를 채택하고 있다.
해방(1945년)이 되었을 때, 한국 장로교에는 두 개의 신학교가 있었다. 이북에 있었던 평양장로회신학교와 서울에서 김재준 목사가 주도하는 조선신학교가 그것이다. 그러나 원래 한국의 장로교를 대표하는 평양장로회신학교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와 때를 맞추어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 위하여 자진해서 무기 휴교에 들어갔다. 반면에 서울의 조선신학교는 신사참배 문제와 상관없이 그 기간 동안에 세워졌으며(1940) 친일파적인 인사들에 의해 주도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유주의 신학을 고수하는 인사들이 운영권을 쥐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러한 조선신학교는 해방 전후로 독무대적인 활동을 하고 있었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신사참배로 인하여 옥고를 치르던 성도들이 출옥 후에 당시의 신학교 상황을 볼 때 조선신학교에서 목사후보생을 양성한다는 것을 용인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러자 일제 말엽에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옥에 갇혔던 목사들과 망명 중이던 교회 지도자들은 뜻을 같이하여 보수신학의 보루였던 평양신학교의 전통을 이어서 보수신학교를 새로 세워야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의하여 한상동 목사를 중심으로 1946년에 ‘고려신학교’를 설립하게 되었고, 1952년 10월에 이르러 결국 고려신학교를 중심 한 고신 총회가 출범하게 된 것이다.
고신교단은 고려신학교를 중심으로 배태되었다. 고려신학교는 해방 이후 교회쇄신 운동의 일환으로 시작되었고 해방된 조국에서 자유주의자들에게 한국교회의 장래를 맡길 수 없다는 신학적 동기에서 설립되었다. 고려신학교의 설립자인 한상동 목사와 주남선 목사는 자유주의 신학을 3가지 점에서 문제로 인식하고 있었다. 첫째로 현실 타협적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그 시대의 조류나 대중 이데올로기에 영합한다고 보았다. 둘째로는 신앙고백적 투쟁력을 약화시킨다고 보았다. 즉 일제하에서 신사참배가 강요되었을 때 자유주의신학은 이에 대한 저항을 약화시키거나 투쟁력을 제거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셋째로는 불신앙의 신학이라고 보았다. 이 점은 고려신학교를 설립할 때한 학생이 신학교 개교일에 낭독한 입학식사(入學式辭)에서 분명히 밝혀져 있다.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이러한 인식 때문에 한국교회를 자유주의자들의 손에 맡길 수 없다는 것은 그들의 확고한 신념이었다. 이러한 신념으로 1946년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는 가운데서 고려신학교를 설립하기에 이른 것이다.
또 이와 같은 역사인식으로 고려신학교는 이념적으로 옛 평양신학교를 계승한다고 스스로 드러내고 있다. 고신은 1969년 제 19회 총회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을 교단의 신앙고백으로 채택하였다. 그러나 처음에 채택한(1969년) 것은 17세기 당시에 작성한 신앙고백을 비교적 그대로 받아들였으나, 그 뒤 1975년 9월 제25차 총회에서 합동과 달리 34장, 35장을 원래의 신앙고백서에 첨가시켰다. 오병세 교수는 이것을 이렇게 설명하였다. “이 신앙 고백이 개혁주의 신학의 성숙한 표현이지만, 18, 19세기의 선교운동과 아울러 새로운 강조점이 신앙고백에 삽입되어야 할 필요성을 느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미국판에 있는 제34장 「성령에 관하여」라는 장과 제 35장 「하나님의 사랑의 복음과 선교에 관하여」라는 장이 첨가되어 총 35장이 되었다.”라고 그 필요성을 밝히고 있다. 이후 2011년 고신총회는 제34장 “성령”으로, 제35장 “복음”으로 제목을 수정하였다.
고신과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은 위에서 말한바와 같이 12신조와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를 교리적 표준으로 삼고 있다. 다만 고신은 합동과 달리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34장 「성령」이라는 장과 제 35장 「복음」이라는 장이 첨가되어 총 35장이 되었다. 두 장이 첨가된 것을 제외하면 두 교단의 신앙고백서는 각 교단의 해석자에 따라 단어의 배열의 차이가 나며 그 뜻은 거의 동일하다.
문제는 제34장과 35장의 내용이다. 1975년 총회와 2011년 총회에서 수정하여 채택한 제34장과 제35장의 제목만 바뀌고 그 내용은 바뀌지 않았다. 제34장은 전부 4항으로 되어 있고, 신앙고백서 제1장부터 제33장까지의 성령에 대한 언급을 모운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제35장도 전부 4항으로 되어 있고, 제35장 1항에 “버림받은 온 인류에게 충분하고 다 적용되는 생명과 구원의 길을 준비”하셨다고 기술한다. 제35장 2항에서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향한 자기의 사랑과 만인이 구원받기를 열망하신다는 사실을 선포”한다고 기술한다.
제35장 3절에서는 “회개하지 않고 불신앙 가운데 머무는 자는 허물을 더 악화시키고 스스로의 과오 때문에 멸망한다.”고 진술한다. 이 경우, 고신의 신앙고백서는 제35장의 내용에서 미합중국장로교회의 1903년 신앙고백서의 선언문(Declaratory Statement)에서 살펴보듯이 보편구원론적인 입장과 이중예정에 대한 부정의 입장이 깔려 있다고 생각된다. 이외에도 고신과 합동교단의 헌법책의 배열상 위치가 다르게 실려져 있다. 고신은 신앙고백서가 제일 앞에 12신조가 제일 뒤에 편재되어 있는 반면에, 합동교단은 12신조가 제일 앞에 있고, 신앙고백서가 제일 뒷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2. 기장의 신앙고백서
기장은 한국의 장로교회에서 지금까지 채택해온 신앙고백서인 12신조와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을 버리고, 1972년 김재준씨를 신조연구위원회 위원장으로 한 신조연구위원회가 제의한 한국기독교장로회 신앙고백선언서를 채택하여 사용해오고 있다. 이외에도, 대국민적인 또는 대사회적인 신학선언서(Theological Statement)의 형식을 띄고 있는 1983년에 채택된 신앙고백서 선언서, 1987년에 채택된 신앙선언, 1991년 발표된 창조 질서 보전에 관한 우리의 결의, 2013년에 발표된 한국기독교장로회 새역사 60주년 선언서등이 있다.
1948년 제 34차 총회에서 당시의 총회 직영신학교였던 조선신학교의 자유주의 신학 흐름에 대하여 제동을 걸었다. 즉 보수주의 학자들을 증원하여 자유주의 교수들의 영향력을 감소시키고 그들을 감독하기 위한 조선신학교 개혁안을 통과시킨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안은 조선신학교 측의 맹렬한 반대로 말미암아 물거품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결국 정통 보수신학을 지지하던 교단지도자들은 1948년에 조선신학교의 자유주의 교육에 대한 포괄적인 대응책으로 창동 장로교회에 모여 서울에 새로운 신학교를 설립하기로 결정하였던 것이다. 이 때 설립된 신학교가 바로 장로회신학교이다. 박형룡 박사를 교장으로 세운 장로회 신학교는 제35차 총회에서 별 어려움 없이 인준을 받았다. 이로 인하여 1946년에 설립된 고려신학교와 더불어 세 개의 신학교가 장로교 안에 존재하게 되었고 그 이후 총회는 세 개의 신학교 문제로 많은 고민을 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급기야 세 개의 신학교를 중심으로 장로교가 세 개로 분열하게 되는 아픔을 겪게 되었다.
이때로부터 한국 장로교회의 분열의 씨앗은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고신과의 분열(1952년)이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장로교회는 또 하나의 분열의 진통을 겪게 되었다. 기장 측의 분열(1953년)이 그것이었다. 고신과의 분열이 신학적인 문제와 행정적 및 정치적인 이유가 뒤얽힌 복잡한 것에 기인한 것이었다면, 기독교장로회와의 분열은 단순하고도 명백한 신학적인 문제로 인한 것이었다.
기독교장로회의 신조는 역사적 산물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기독교장로회의 신조를 만들었던 역사를 살펴보면 신조를 만들고자 했던 이유와 원인을 찾아볼 수 있게 된다. 먼저 기독교장로회의 헌법 개정 약사를 개괄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헌법 개정 약사 중에서 신조에 관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1967년 9월 신조연구위원회 조직 (위원장 김재준, 연구위원 김정준, 서남동, 전경연, 조향록, 이장식, 박봉랑). 신조, 요리문답, 정치 권징조례, 예배모범을 한데 묶어 한국기독교장로회 헌법을 출간함.
1972년(제57회총회) 신조연구위원회(위원장 김재준)가 제의한 신앙고백서(안)을 받아, 한국기독교장로회 신앙고백선언서로 채택 공포키로 기립 박수 가결함.
1977년(제62회 총회) 제57회 총회에서 가결된 신앙고백선언서를 교회 헌법 “신앙고백서”로 채택하고, 제38회 호헌총회 선언서를 헌법에 삽입키로 가결하여 노회에 수의한바 전노회 찬성으로 다음 제63회 총회에서 가결 선포함(표결 : 전 노회 가결, 투표수: 가 616, 부 66, 기권1).
1980년(제65회 총회) 신앙요리문답, 권징조례, 예배모범 개정안이 노회 수의결과, 전 노회 찬성 가결 선포됨. 이 개정안의 내용 개요는 다음과 같다.
1. 내용개요
1) 예배모범
(1) 웨스트민스터 체제의 기본정신은 그대로 계승하되 그 구조와 사상은 현대 상황에 맞게 재편함.
(2) 세계개혁교회의 여러 예배모범과 최근의 학문적 성과를 참조, 포함시킴.
(3) 헌금에 대한 모범을 추가시킴.
2) 신앙요리문답
(1) 사도신경, 십계명, 주기도문 등을 해설한다.
(2) 칼빈의 장로교적 전통을 살린다.
(3) 현대적 감각에 호소력 있는 질문으로 바꾸어 해설한다.
(4) 주기도문, 십계명은 거의 그대로 하고 사도신경은 현대적으로 표현을 바꾼다.
(5) 우리 총회 신앙고백서에 모순되지 않도록 한다.
위에서 제시한 것처럼 기장의 ‘1972년 신앙고백서’ 작성의 주도자는 김재준씨였다. 따라서 기독교장로회의 신앙고백서에는 각주 2에서 제시된 김재준씨의 성경관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1953년 기독교장로회가 분리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성경관의 문제였다. 이와 같이 성경관의 문제는 기장 분리와 ‘신앙고백서’ 작성의 분명한 이유였다. 이제부터는 한국기독교장로회 역사 편찬위원회가 밝히고 있는 ‘신앙고백서’ 제정과정을 소개하고자 한다.
1972년에는 ‘신앙고백선언서’를 채택하였다. 기장이 하나의 본토민교회로서 자주적으로 신앙고백을 해야 한다는 요망에 응한 것이다. 개혁교회의 역사적 신앙고백, 이를테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배제한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의 고백을 이 시점에서 시도하기 위하여 1967년에 위원회가 조직되어 다년간 연구하였던 것이다. 이 신앙고백은 개혁교회의 신학적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므로 캘빈신학의 한 해석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 성서, 창조, 인간의 본질과 죄, 예수 그리스도, 성령, 교회, 종말 등이 고백의 내용으로 되어 있다.
위의 내용은 ‘신앙고백서’가 작성된 이유가 자주성을 밝히기 위함이라고 선언한다. 이에 관해서 김재준과 박봉랑은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우리 장로교회는 최초의 미국 선교사들이 전해 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신조로 삼아 왔다. 그것은 주는 대로 받는 것뿐이요 우리로서의 연구도 비판도 있은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특히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개혁교회의 절대적인 신앙고백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설수가 없다…역사적으로 피선교지역인 우리 장로교회가 미국의 장로교회의 선교사들을 통해서 복음을 받아서 교회를 세울 때에 그들을 통해서 그들의 모교회인 미국 장로교회의 표준신앙고백(약간 수정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그대로 우리의 표준 신앙고백으로 받기로 동의하고 그렇게 결정했기 때문이다.”
위의 입장은 기독교장로회가 가지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조에 관한 기본적인 입장이다. 부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접근하면서도 마치 그렇지 않은 것처럼 가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배제한 것이 아니고’란 말은 기독교장로회가 웨스트민스터 신조를 떠났음을 은밀하게 표현한 것이다. 이는 아래의 글에 중첩되어 밝혀지고 있다.
1953년 한국기독교장로회가 새로운 교단으로 출발한 이후 1972년 새로운 신앙고백서가 공포되기까지 20년 가까이, 기장은 한국장로교회의 옛 신조를 사용해왔다. 그러나 기장은 항상 성서에 비추어 새롭게 신앙고백을 형성해 나가야 하는 개혁교회의 정신에 비추어 새 신앙고백선언서를 채택한 것이다. 기독교장로회는 본토민교회로서 자주적으로 신앙고백을 해야 한다는 요망에 부응하였다. 기장의 역사적 신앙고백은 개혁교회의, 이를테면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를 배제한 것이 아니고 새롭게 출범한 기독교장로회의 고백을 역사적 시점에서 새롭게 시도하기 위한 것이었다.
기독교장로회는 신조를 만들기 위해서 먼저 장로교의 기본신조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대한 연구작업과 비판작업을 시작했다. 이전 것에 문제가 있음이 밝혀져야 새 것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아래의 글은 ‘신앙고백서’를 만들기 위해서 선임된 사람들과 그들이 사전 연구했던 내용들을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미합중국연합장로교회가 새 신앙고백서를 채택한 1967년에 기독교장로회 총회는 교단의 신앙고백을 검토하기 위해서 ‘신조연구위원회’를 조직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위원장 김재준, 연구위원 김정준, 서남동, 전경연, 조향록, 이장식, 박봉랑. 그 후 5년 만인 1972년 총회에서 신앙고백서가 받아들여짐으로써 한국교회의 선교의 역사에서 최초로 한국교인의 손으로 신앙고백서가 작성되었다.
신앙고백서 작성경위는 1967년 총회의 결의에 의하여 ‘신조개정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위원회는 1968년 〈신조에 관한 연구논문〉이라는 책자를 총회에 제출했다. 그 주요내용은 〈신앙고백의 절박〉(박봉랑), <웨스터민스터신조〉의 역사적(이장식), 신학적(박봉랑) 연구비판 그리고 〈한국선교의 정황과 신앙고백의 요구〉(전경연)였다. 이런 연구에 더해 기독교장로회는 20세기에 작성된 신조들에 대한 연구를 하였다. 그리고 얻은 결론은 다음과 같다.
1969년 총회에는 〈현대저명 신조해설〉이라는 소책자가 출간되어 최근 제정된 세계 여러 교회의 신조들 중에서 우리에게 가장 모범적인 것들을 연구하였다. 그 연구대상이 된 신조들은 〈베델신앙고백서〉번역(전경연), 〈바르멘선언〉연구(박봉랑), 〈1967년의 미국 연합장로교회의 신앙고백 해설〉(박봉랑), 〈오토 베버의 신앙고백〉요약(전경연) 등이다. 1969년 동 연구위원회가 연구한 결과 얻은 결론은, 신앙고백은 시대성, 지역성, 시간성 등의 여러 제한성을 피할 수 없다. 그러므로 300년 동안 장로교, 개혁교회들의 표준신조로 사용해 온 웨스트민스터 신조를 오늘 한국에서 계속 사용하는 것은 부적당하다.
그러나 웨스트민스터의 대역사적 문서를 함부로 변경하거나 그 구조나 사상을 수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장로회는 오늘 우리시대의 신앙고백을 새롭게 작성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1970년 ‘한국기독교장로회의 제1신앙고백서의 방향설정’이라는 신앙고백서 개요가 제출되었다. 그 내용 목차는 1)취지 2) 서론 3) 하나님 신앙 4) 창조와 세계 5) 인간의 죄 6) 그리스도와 속량 7) 성령과 삶 8) 교회와 선교 9) 역사와 종말 등이다.
1971년 총회에 이상의 목차에 따라 〈신앙고백서안〉이 제출되었고, 이것을 기독교장로교회의 공동고백으로서의 성격을 구현시키기 위해서 일 년간의 검토와 성안된 것을 중심으로 각 지방노회에 출장하여 지역적인 독회를 열고 교회지도자들의 의견을 넓게 수렴하였다. 그 후 그 의견들을 반영 최종안을 작성, 1972년 제 57회 총회에 제출하였고, 그 안은 만장일치로 채택되어 동 교단의 신앙선언으로 공포하게 되었다.
기독교장로회가 연구한 20세기의 신앙고백들은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작성된 것으로 고백이라기보다는 선언서라고 부르기에 적합한 것이다. 기독교장로회가 이런 신앙고백들을 연구하고 이런 고백들을 모범적이라고 한 이유는 ‘그러므로 300년 동안 장로교, 개혁교회들의 표준신조로 사용해 온 웨스트민스터 신조를 오늘 한국에서 계속 사용하는 것은 부적당하다’라는 논리를 확립하기 위함이다. 전경연은 웨스트민스터 신조 뿐 아니라 12신조에 관해서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다시 웨스트민스터 신조나 예수교 장로회 신조를 빌어다 읽어선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상으로, 기독교장로회가 ‘신앙고백서’를 작성하게 된 경위를 살펴보았다. 경위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기독교장로회가 신앙고백서를 작성하고자 한 이유이다. 그 이유는 한국교회의 바른 신앙을 고백하기 위함이 아니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옛 것으로 치부해버리고, 자신들의 신학에 맞는 새로운 고백을 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기장의 신앙고백서는 위에서 살펴본 1972년에 채택된 한국기독교장로회 신앙고백선언서 외에도, 1983년에 채택된 신앙고백서 선언서, 1987년에 채택된 신앙선언, 1991년 발표된 창조 질서 보전에 관한 우리의 결의, 2013년에 발표된 한국기독교장로회 새역사 60주년 선언서 등이 있으나, 앞서 지적한대로 이들 선언서들은 교회의 공적인 신앙고백서라기보다는 대국민적인, 또는 대사회적인 신학선언서(Theological Statement)의 형식을 띄고 있다고 하는 것이 옳은 지적일 것이다. 이에 대한 연구는 본 논문에서는 지면 관계상 생략하고 후일의 연구로 남겨두려고 한다.
3. 통합의 신앙고백서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의 신앙고백서는 전체 6부로 되어 있고, 사도신경, 12신조, 소요리문답,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986년 신앙고백서, 21세기 신앙고백서 등, 6개를 채택하고 있다. 위의 6개 중에서 통합이 채택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미합중국장로교회의 1903년 개정판을 따라 선언문과 34장(성령에 관하여)과 35장(하나님의 사랑의 복음과 선교에 관하여)을 추가하여 채택하고 있으며, 미합중국장로교회의 1903년 개정판의 제35장 바로 뒤에 위치한 선언문(Declaratory Statement)이 통합의 신앙고백서에도 제35장 뒤에 그대로 위치하고 있다. 또한 1986년에 채택한 “대한예수교장로회 신앙고백서”는 서문 외에 전체 10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칼 바르트의 신학을 추종하고, 미합중국장로교회의 1967년 새 신앙고백서의 내용을 염두에 두고 한국적 상황을 고려하여 작성한 것으로, 통합은 한국의 장로교회가 지금까지 사용해오고 있는 12신조 및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을 버리지는 않았으나, 1903년 개정판에 기초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1986년 신앙고백서의 관점에서 과거의 신앙고백서들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특히, 통합의 신앙고백서에는 대요리문답이 빠져 있다. 이밖에 21세기 신앙고백서는 신학선언서의 형식을 띄고 있다고 할 것이다.
통합의 분리는 오래 전부터 교회 안에서 W.C.C.에 대한 신학적, 교리적 입장의 차이였다. 한국교회와 W.C.C.(the World Council of Churches, 세계교회협의회)와의 관계는 1948년 8월 22일부터 9월 4일까지 화란의 암스텔담에서 열린 제1차 창립총회로부터 시작한다. 창립총회에 당시 한국기독교회협의회(N.C.C.K.)가 당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정치부장 김관식 목사와 청년대표 엄요섭 목사, 감리교 대표로 변홍규 목사를 옵서버로 참석케 하였고, 김관식목사의 귀국보고를 받고 장로교는 W.C.C.에 가입하였다. 그리고 1954년 미국일리노이 주 에반스톤에서 열린 제2차 총회에는 한국의 장로교 대표로 명신홍 박사와 김현정 목사를 참석케 하였다.
1959년 통합총회가 분리된 후, 1961년 인도의 뉴델리에서 열린 제3차 총회에는 기장측은 강원용 목사가 대표로 참석하고, 기장측이 정회원으로 가입하였고,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측)은 제3차(1961년), 제4차 총회(1968년)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1975년 케냐의 나이로비에서 열린 제5차 총회에는 한국대표로 김활란(이대 총장), 강원용(경동교회 목사), 길진경(N.C.C. 총무), 김길창(N.C.C. 회장), 박상증, 오재식(청년 대표) 등이 참석하였다.
한국에서는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대한 기독교대한감리회(기감),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한국성공회 등 4개 교단이 W.C.C.에 정회원으로 가입되어 있다. 그리고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는 W.C.C.의 산하단체로,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기독교대한감리회(기감), 기독교대한하나님의 성회, 기독교대한복음교회, 구세군대한본영, 성공회, 정교회한국대교구 등 8개 교단이 가입되어 있다.
한편, 1957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제42회 총회록에 따르면, 에큐메니칼 연구위원회(위원장 한경직 목사, 서기 정규오 목사)의 보고서에 위원회의 입장을 말하되, “친선과 협조를 위한 에큐메니칼 운동은 과거에나 현재에도 참가하고 있으니 계속 참가하기로 하며, 단일 교회를 지향하는 운동에 대하여서는 반대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듬 해인 1958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제43회 총회는 “국제적인 교제와 사업에 관하여 우리 교회와 신앙 처지에 손상이 없도록 한다”고 결의하였다. 그리고 1959년 제44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는 W.C.C. 문제로 인하여 총회장이 정회를 선언한 후(9월 28일), 연동측이 총회정회 후 속회(11월 23일)를 기다리지 못하고 이탈(9월29일 속회)하는 아픔이 있었고, 합동측은 정해진 날자에 총회를 속회(11월 23일)하여 “W.C.C.를 영구히 탈퇴하고, 소위 W.C.C.적인 에큐메니칼 운동을 반대하기로” 결의하였다.
박형룡 박사의 W.C.C.에 대한 입장은 통합측이 분리되기 1년 전 1958년 「신학지남」에 발표된다. 박 박사의 견해 표명과 더불어 장로교회는 W.C.C.에 찬성하는 측과 반대하는 측의 그룹이 극명하게 나뉘게 되었고, 견해를 달리하는 두 그룹은 이후 서로 총회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문제를 두고 대치하게 되었다. 결국 1959년 9월 28일 대전에서 열린 제44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는 W.C.C. 문제로 양분된 두 파의 세력 간의 치열한 다툼으로 이어졌고, 마침 경기노회의 총대를 받아들이는 문제를 두고 격돌하게 되었다. 이에 당시 총회장이었던 노진현 목사는 증경총회장들에게 이 문제에 대한 대책을 숙의해 줄 것을 제의하고, 증경총회장들의 제의에 따라 11월 23일에 서울 승동교회에서 속회하기로 하고 정회하였다.
이후 총회의 결정에 불만을 품은 회원들이 총회가 정회된 이튿날인 9월 29일 아침 대전에서 특별열차를 타고 서울로 와서 서울의 연동교회에서 전필순목사의 사회로 단독 속회를 열었다. 이 모임이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은, 제44회총회 결의대로 11월 23일에 서울 승동교회에서 총회속회를 기다리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예정대로 정회된 총회가 11월 23일 승동교회에서 속회되었을 때 연동측 총대들은 참석하지 않고 소위 합동측 총대들만 참석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난 9월 29일 단독으로 속회했던 연동측 총대들은 이날 새문안교회에서 한경직 목사의 사회로 총회를 열었다. 이리하여 고신(1952년)과 기장(1953년)의 분열 후에, 다시 통합(1959년)이 분열하는 역사적인 아픔을 갖게 되었다. 1959년 총회 분열의 중심에 W.C.C. 문제가 있다는 것은 역사가들이 증언하고 있다.
통합의 신앙고백서는 전체 6부로 나뉘어 있으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1부 사도신경”이다. 1부에는 사도신경이 실려 있으나 새 번역을 사용하여 지금까지 한국교회가 고백해온 사도신경과는 다르게 번역되어 있다.
“2부 신조”로 되어 있다. 2부에는 12 신조가 수록되어 있다.
“3부 요리문답”이다. 3부에는 소요리문답 107문이 실려 있다.
“4부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이다. 4부에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33장외에 제34장과 제35장과 선언문을 추가로 수록하고 있다.
“5부 대한예수교장로회 신앙고백서”이다. 통합에서 1986년에 제정한 신앙고백서를 담고 있으며, 서문 외에 전체 10장을 수록하고 있다.
“6부 21세기 대한예수교장로회 신앙고백서”이다. 2002년에 제정하여 공포되었으며, 두 가지 형태로 되어 있다.
“I. 21세기 대한예수교장로회 신앙고백서(예배용)”은 6개항의 짧은 고백서를 담고 있고, “II. 21세기 대한예수교장로회 신앙고백서”는 전체 6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바로 뒤에 “우리의 사명” 4개를 수록하고 있다. “III.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 (381)”는 381년 범교회적 공의회 제2차 회의에서 제정한 신조를 수록하고 있다.
본 논문에서는 통합의 1986년 신앙고백서를 중심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1) 1986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신앙고백서”
1986년에 발표된 통합의 신앙고백서는 서문 외에 전체 10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고백서의 공식 명칭은 “대한예수교장로회 신앙고백서”이다. 서문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우리 한국에 전해진 지 백년이 되었다”라고 언급하면서, 지난 100년의 시간 동안 한국 교회가 경험하였던 국권침해, 일제의 군국정치, 광복과 분단, 그리고 한국전쟁 등을 짤막하게 언급한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 속에서 한국 교회는 “초대 교회 때부터 모든 교회가 공통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사도 신조와 종교개혁의 근본 신앙을 담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요리문답서와 12신조 등을 채택하여 신앙의 표준으로 삼아왔다”라고 지난 시간들을 회고한다.
1986년 신앙고백서의 서문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지금의 한국 사회가 ‘여러 가지 문제들’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는, 그러기에 “우리가 믿는 신앙의 내용을 보다 명백하게 정리하고 이를 정착시키는” 일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서문에서 새로운 신앙고백서의 취지를 드러내는 중심 문장은 다음과 같다.
[서문]
… 이와 같은 사정에서 우리 교회가 100주년을 맞는 이 역사적인 시점에 그간 우리 교회가 지켜온 신조들과 총회가 채택한 신앙지침서 등을 골격으로 한 우리의 신앙내용을 우리 교회의 말로 정리하여, 보다 조직적으로 제시함으로써 우리의 신앙과 신학을 통일하고, 보다 조화된 신앙 공동체로서 계속적인 전진을 촉진하고자 한다.
그리고 1986년 신앙고백서는 서문과 10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장의 제목은 “제1장 성경, 제2장 하나님, 제3장 예수 그리스도, 제4장 성령, 제5장 인간, 제6장 구원, 제7장 교회, 제8장 국가, 제9장 선교, 제10장 종말”이다.
1986년 통합의 신앙고백서가 가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 외적 특징은 그 내용의 전개 순서이다. 이 고백서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같이 “성경, 하나님, 인간의 타락, 그리스도”의 순서대로 언급되지 않고, “성경, 하나님, 그리스도, 성령, 인간”의 순서로 그 내용을 전개시키고 있다. “성령”이라는 하나의 항목이 따로 있는 것도 이러한 전개와 그 맥을 같이 한다. 이 부분은 나중에 더 자세하게 다룰 내용인데, 통합의 신앙고백서는 그 논리 전개가 성경이 말하는 “창조-타락-구속”의 순서를 따르고 있지 않다.
물론, 신앙고백서라는 것은 언제나 한정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 않다면, 새로운 신앙고백서는 그 이전의 모든 신앙고백서의 내용을 포함해야 할 것이고, 최종적으로는 성경의 분량만큼이나 많아지거나, 그 이상이 될 것이 분명하다. 그러기에 분량이 그리 많지 않은 통합의 1986년 신앙고백서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비롯한 그 이전의 신앙고백서보다 더 자세하거나, 모든 분야의 내용을 담고 있지 않다는 것에 대해서는 그 한계성을 수긍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6년 신앙고백서를 자세히 살펴보면 이전의 개혁주의 신앙고백서들과 다른 부분들이 발견되게 된다. 이 차이점은 단순히 단어의 차이나, 표현의 다름으로서의 차이가 아니다. 이 차이는 그 배경에 깔려 있는 신학적 입장의 차이로 인해서 드러나는 ‘다름’이다. 이제, 특별히 “성경관”과 “구원론”에 그 초점을 맞추어서 내용을 전개해 나가도록 하겠다.
A. 성경관의 차이
1986년 통합의 신앙고백서는 제1장에서 “성경”에 대하여 다루고 있는데, 모두 7개 절로 그 내용을 정리하고 있다. 그 첫 번째 것은, 성경을 무엇이라고 고백하고 있는가에 관한 것이다. 이 신앙고백서는 1장 1절에서 “우리는 신구약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대한 정확 무오한 유일의 법칙임을 믿는다.”라고 언급하고 있고, 3절에서는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 바로 다음에 다음과 같이 그 내용을 전개해 나가고 있다.
[제1장 성경]
3.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다. 성경은 인간의 말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요, 따라서 거기에는 인간적 요소와 신적인 요소가 함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저자가 지니고 있던 시대적이며, 문화적인 배경 등 인간적인 요소들을 그의 섭리를 성취하기 위하여 사용하셨으므로 성경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신앙고백서는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 안에는 “인간적 요소”와 “신적인 요소”가 함께 있음을 분명하게 밝혀 말하고 있다. 이것은 신적인 계시가 인간을 통하여 기록되었다는 것과 다른 의미이다. 더 나아가서 이 신앙고백서는 성경 “안에” 신적인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 있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
이 신앙고백서가 표현하고 있는 “성경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과 “성경이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분명 다른 표현이다. 이 고백서는 이와 같이 성경 안에 “신적인 요소”와는 구별되는 “인간적 요소”가 있음을 밝히고 있기 때문에, 고등비평(Higher Criticism)을 전적으로 받아들인다. 오히려 비평을 해야 성경의 원래 진리를 밝혀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에 대한 이러한 시각은 개혁주의 전통 안에서 매우 낯선 것들이다.
우리는 이 고백서에서 성경에 대해 말하는 것들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의 “성경관”에 대해서 먼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말씀을 ‘계시된 말씀’과 ‘기록된 말씀’으로 나누어 이해하였다. 그는 계시는 ‘행동’인 반면, 성경은 ‘기록’이라고 생각하였고, 그러기에 계시는 직접적인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성경은 “인간의 말”이라고 여겼다. 즉 계시는 신적인 요소로 보고 있는 것이고, 이 계시가 기록된 것이 성경이기 때문에, 성경에는 ‘신적인 요소’와 ‘인간적 요소’가 함께 있는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조금 전에 우리가 함께 본 “제2장 3절”의 내용과 일치한다. 그리고 이러한 논리에서 본다면, 계시는 성경을 낳게 되고, 그러기에 계시는 성경보다 궁극적 우월성을 갖는 것이 된다. 바르트는 이러한 내용에 대해서 자신의 『교회교의학』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성경은 따라서 그 자체 그 자체 안에서 하나님의 일어난 계시가 아니니, 실로 교회 선포 그 자체가 그 자체 안에서 대망된 미래의 계시가 아닌 것과 같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우리에게 말씀하는 또 우리가 듣게 되는 성서는 이미 일어난 계시를 증언한다. … 다시 말하거니와 성경 그 자체는 그 자체 안에서는 하나님의 일어난 계시가 아니며,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됨으로써 성경은 하나님의 일어난 계시를 증언하고 또 성경은 증언의 형태 안에서의 하나님의 일어난 계시이다.
“제2장 성경”은 이러한 바르트의 성경관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 또한 이 신앙고백서는 ‘성경의 필요와 그 의미’에 대해서도 그 접근 방법이 다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성경의 필요에 대해서 언급하기를 “본성의 빛과 또 창조의 섭리의 일들이 하나님의 선과 지혜와 권능을 나타내어 사람이 핑계 할 수 없게 하나, 그것들이 구원에 필요한 하나님과 그의 뜻에 관한 지식을 충분히 주지 못”하기 때문에, 성경이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언급한다.
그러나 1986년 통합의 신앙고백서는 인간의 본성과 피조 세계를 통해서 어느 정도 하나님의 계시가 나타나지만, 성경이 “그리스도”에 대해 증언하기 때문에 “확실한 계시서”라고 표현한다. 즉 이 고백서는 기독론적 관점으로 그 내용을 전개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강조하는 모습은 신앙고백서 제1장 5절의 구약과 신약에 대한 설명에서도 매우 분명하게 드러난다. 여기에서도 통합의 신앙고백서는 신약과 구약을 기독론적 관점으로 설명해 나가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장 성경]
5. 구약성경은 천지창조에서 시작하여 이스라엘 민족의 성공과 실패의 자취를 따르면서 오실 메시야에게 초점을 두고 있다. 즉 구약성경의 모든 사건은 직접 또는 간접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준비와 예언이다. 신약성경은 이미 오신 그리스도의 생애와 가르침과 사도들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과 가르침을 수록한 것으로서,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이다. 그러므로 신약은 구약의 배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구약을 떠나 신약을 바로 이해할 수가 없고, 신약을 떠나서는 구약의 참 뜻을 이해할 수가 없게 된다.
성경의 필요성에 대해서, 신약과 구약의 내용에 대해서 설명해 나가면서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별반 특별하지 않게 보일지 모르지만, 이와같이 일관된 기독론적 사고는 칼 바르트의 가장 큰 특징이다. 그의 자신의 『교회교의학』 1권 하나님의 말씀론, 『교회교의학』 2권 신론, 『교회교의학』 3권 창조론, 『교회교의학』 4권 화해론,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정되었던 구속론(종말론)을 기독론적 사고를 가지고 일관되게 전개해 나가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전개를 하게 되면 “창조-타락-구속”의 내용 전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화해론”으로서의 그리스도 사건이 전체의 중심이며, 이것에 모든 다른 것들이 모이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바르트 신학은 “기독론적인 보편주의”(Christologischer Universalismus)라고 불리게 된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그리고 화해론적으로 이해하는 바르트의 신학은 우리가 살피고 있는 신앙고백서에 매우 잘 드러나고 있다.
[제3장 예수 그리스도]
2.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가 되신 그리스도는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이다. 이 계시는 자연에 나타난 계시나(시 19:1-4, 롬 1:20), 구약성경의 예언적 계시(히 1:2)이상이요, 모든 계시의 완성이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이므로 사람은 그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완전히 알 수 없고(요1:18, 14:9), 그가 보여 주신 이상의 하나님을 알 수도 없다. … 그리스도교는 그와 같은 요소를 가지면서도 그 신앙의 근거를 오직 그리스도의 계시에 두는 계시종교이다.
3. … 그리스도의 이와 같은 대속의 죽음은 하나님의 공의에 따라 드린 화목제물이었으며, 범죄로 인해 멀어졌던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화목케 하셨다.
바르트의 신학을 파악한 이후에, 1986년 통합측 신앙고백서를 보게 되면, 그 전개 순서와 내용이 “기독론적인 보편주의”와 “화해론”에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은 이제 언급할 구원론에 이르러 더욱 분명히 나타난다.
B. 구원론의 차이
통합의 1986년 신앙고백서에 있어서 구원론의 부분은 “제6장 구원”에서 다루고 있고, 총 7개 절로 그 내용을 구성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집중하려고 하는 것은 5절인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6장 구원]
5. 구원은 우주지배를 포함한 하나님의 영원하신 섭리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인간의 자발적인 노력이나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경륜에 의한 선행적(先行的)인 은총에 의한다. 선행은총 안에는 하나님의 영원 전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예정섭리(롬 8:29-30, 엡 1:4-6)가 있다. 예정섭리는 인간의 자유나 선행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더 강화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예정신앙과 자유의지는 모순되거나 배타적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 보완한다.
이 내용은 성경이 말하는 진리를 말하는 것 같지만, 진리의 한 면 만을 강조함으로써, 진리를 왜곡하고 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중 예정을 말하고 있으며, 그러기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이 부분을 “3장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부분에서 매우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는 구원을 “하나님의 택하심”에서 시작하여 고백해 나간다. 그러나 1986년 통합의 신앙고백서에서는 구원을 “그리스도의 화목케 하심”에서 시작한다. 또한 이 고백서는 “하나님의 선택에 의한 구원”이나 “하나님의 유기하심”의 개념을 언급하지 않는다. 이것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다음 내용과 완전히 다른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3장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3.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 그의 작정으로 어떤 사람들과 천사들은 영생을 얻도록 예정하시고, 다른 사람들과 천사들은 영원한 죽음에 이르게 선정하셨다.
6. 하나님은 택하신 자들을 영광에 이르도록 정하신 것처럼 그의 뜻의 영원하여 지극히 자유로운 경영에 의해 그들로 영광에 이르도록 하는데, 있어야 할 모든 방편들을 먼저 정하셨다. … 그러나 택함을 받은 자 외에는 다른 아무도 그리스도에 의해 구속을 받지 못하고, 유효적 부름을 받지 못하고, 칭의, 양자, 성화, 구원 되지 못한다.
통합의 신앙고백서는 이와 같이 유기와 관련된 내용을 버리고 있으며, 하나님의 택하심에 대한 내용을 약화시키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은 칼 바르트에게서 전형적으로 발견되는 점이다. 바르트는 기독론의 두 본성을 예정론에 적용시킨다. 그는 여기에서 ‘선택’과 ‘유기’의 대칭 구조로 구원을 설명하지 않고, 일원론적으로 설명하였다. 즉 그리스도만 선택과 유기를 당하시며, 그러기에 모든 사람은 유기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예정론은 비록 스스로 보편예정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고 하여도, 보편예정을 암시하고 있다. 바르트는 예정 교리를 다음과 같은 몇 가지의 명제로 표현하였다.
예정교리는 그러므로 단순하고도 포괄적으로 다음과 같은 명제로 표현된다. : 하나님의 예정은 예수 그리스도의 선택이다. 선택 개념은 그러나 이중적인 것에 대해 말한다. : 선택하는 자와 선택받는 자.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이중적인 것을 내포한다. : 그렇게 불리는 자가 참 하나님이며 동시에 참 인간이다. 이에 따라서 예정 교리의 저 단순한 양식은 우선 두 명제로 구분된다. : 즉 예수 그리스도는 ‘선택하는 하나님’이며, ‘선택받은 인간’이다.
바르트의 『교회교의학』을 영역한 브로밀리(Geoffery W. Bromiley)의 설명과 같이, 바르트는 이중 예정에 대해서 어떤 이들은 선택 받았고, 다른 이들은 버림 받았다고 이해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버림을 위해’ 자신을 택하시고, ‘선택을 위해’ 인간을 택하셨기 때문이다. 이처럼 바르트는 하나님의 예정을 시간 이전의 영원한 영역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본다.
즉 영원 전에 타락한 인간을 의로운 존재로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 스스로 저주와 죽음, 그리고 지옥을 맛보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바르트의 예정론은 “타락전 예정론”(supralapsalismus)에 속하며, 철저히 기독론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통적인 이중 예정론을 수용하기는 하지만, 이것을 다시 일원론적인 것으로 수정하고 있다.
구원과 관련된 바르트의 인식이 이러하였기 때문에, 그는 “창조-타락-구속”의 질서를 “타락-은총-창조”의 순서로 바꾸어 놓고 있다. 또한 더 나아가서 그는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해되었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만인이 구원을 얻은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만인 화해론(Allversoehnungslehre)과 만인 구원론(Allerloesungslehre)를 구분한다. 그러나 바르트가 명시적으로 보편구원론을 주장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와 같은 은총의 선택론은 낙관주의적이며, 그러기에 필연적으로 보편 구원론으로 추론되는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통합의 경우, 주로 1986년 신앙고백서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그러나 앞서 지적했듯이, 통합이 신앙고백서의 일부로 채택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미합중국장로교회의 1903년 개정판을 채택하여 제34장과 제35장을 첨가하여 받았고, 또한 1903년 개정판이 제정한 선언문(Declaratory Statement)을 제35장 뒤에 위치하게 했다.
통합이 채택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첫째, 신앙고백서의 칼빈주의적 개혁주의 내용을 수정하거나 삭제했다는 것이며, 둘째, 제34장과 제35장을 추가하여 성령과 화해에 기초한 Missio Dei 선교를 강조한 것이며, 셋째, 미합중국장로교회의 1903년 개정판과 유사한 선언문(Declaratory Statement) 첨가와 기타 개정으로, 이후에 새로 작성된 신앙고백서 이해와 해석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또한 통합의 1986년 신앙고백서는 미합중국연합장로교회의 1967년 새 신앙고백서의 기본 사상인 칼 바르트의 신학과 1952년 빌링겐에서 모인 I.M.C. 대회에서 채용되어 1961년 W.C.C.와 병합된 후 W.C.C.의 선교방향의 중심 개념이 된 Missio Dei 개념을 포함하는 신학적 경향을 나타내고 있으며, 이 새 신앙고백서는 과거의 신앙고백서들뿐만 아니라 이후의 신학선언문들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기본적인 틀을 제공하고 있다는 것이다.
IV. 한국교회의 장래를 위한 제언
1. 강단의 설교가 바뀌어야 한다.
교회의 에큐메니칼 운동은 동일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상호 신뢰하고 인정할 수 있는 교회의 신앙고백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현실이 그러하지 못하다는 것을 우리는 직시할 필요가 있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같은 장로교회 안에서도 신앙고백의 차이는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합동과 고신은 12신조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을 그대로 교단의 신앙고백으로 수납하고 있다. 합동의 경우는 12신조와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을 미국의 보수장로교회들(PCA, OPC 등)이 그러하듯이 1903년 이전에 수정된 일부 수정 외에 1647년에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대회에서 채택되고 같은 해에 스코틀랜드 교회에서 채택된 그대로, 교회의 신앙고백으로 받고 있으며 특히 고신의 경우 신앙고백서 전체 33장외에 제34장과 제35장을 덧붙이고 있는 것이 다른 점이지만 전체적으로 12신조와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을 교회의 신앙고백으로 받고 있다는 점이 합동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기장은 이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버리고, 새 신앙고백서를 작성한 것이 확인되었고, 신학적으로도 바르트적이며 현대 자유주의 신학을 수용하고 있다는 점이 제시되었다. 그리고 통합의 경우에는 12신조와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을 외관상으로 부인하지 않고 교회의 신앙고백서 안에 두었으나 (대요리문답은 제외됨), 1903년 개정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채택하여 본래의 칼빈주의 개혁신학의 입장이 심각하게 훼손되고 변질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채택하고 있으며 또한 미합중국연합장로교회의 1967년 새 신앙고백서에 기초하여 1986년 새 신앙고백서를 작성하고 채택함으로 말미암아 결과적으로 그 새 신앙고백서의 내용에 따라 과거의 문서들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표준이 되고 말았다는 점에서 바르트 신학과 성경비평학을 수용하는 교단의 정체성을 살펴볼 수 있다.
이상과 같은 이유 때문에 장로교회 또는 개혁주의 신학을 표방하는 교단들 사이에서도 엄청난 신학적 차이가 있음을 각 교단의 신앙고백을 통해서 우리는 인식하게 되었다. 동시에 이 땅에 전래된 장로교회의 신앙고백인 12신조와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에 대한 입장의 차이로 말미암아 장차 장로교회 안에서도 성경적인 에큐메니칼 운동에 심각한 장애요소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중요한 교회의 신앙고백서에 대해서 우리는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 우리는 우리가 속한 교회에서 1년에 몇 번쯤 장로교회 교리와 관계된 설교를 듣게 되는가? 신학교에서 과연 장로교회 목사를 길러내고 있는가? 적어도 임직 시에 서약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을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읽어보았는가? 아니면 소요리문답은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더라도 그래도 목회자를 위해 준비한 대요리문답은 적어도 한번은 신학생이나 목사후보생 또는 목사들이 읽어보아야 할 것이다.
2. 내가 장로교회 교인임을 또는 장로교회 목사임을 자랑스러워하는가?
한편, 신앙고백서는 매우 큰 가치와 필요가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언제나 성경에 종속되어야 한다. 그것은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는데 유익이 되어야만 하고 또한 옳지 않은 교리와 그것에 대한 실행에 반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에 신앙 고백서는 지금까지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는 그들의 시대 속에서 매우 귀중한 역할을 해 왔으며 지금도 하고 있다. 그러나 신앙고백서에 대한 것을 언급함에 있어서 지난 1967년 미합중국연합장로교회(UPCUSA, 또는 북장로교회)가 새 신앙고백서를 발표하였을 때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 때에 우리는 미합중국장로교회가 발표한 신앙고백서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비록 그들이 한국 장로교회를 세웠고, 여전히 많은 영향력을 미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결정을 한 것이다.
그 이유는 그 신앙고백서의 내용이 성경의 진리와 반대되는 것들이 발견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신앙고백서라고 하는 것은 많은 교단이 모여서 하나의 문서를 만들어 낸다고 하여 그것으로 이상적인 신앙고백서가 되는 것이 아니며 그 시대의 다양한 문제를 모두 다루었다고 해서 더 훌륭한 신앙고백서가 되는 것도 아니다. 신앙고백서는 새로운 세대의 사람들을 고려해야 하지만 언제나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고 또한 이것을 기반으로 하여 성경의 내용이 더욱 건강하게 이해되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가장 근본적인 전제를 상실하게 된다면 신앙고백서는 그 근본적 존재 이유를 상실하게 된다.
한국의 장로교회들은 대체로 12신조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그리고 성경 대소요리문답을 교회의 신앙고백으로 받고 있다. 헌법에는 목사, 강도사, 장로 집사 임직을 할 때 행하는 서약 중에서 두 번째 서약은 다음과 같이 질문하도록 정해두고 있다:
본 장로회 신조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및 대·소요리 문답은 신구약 성경의 교훈한 도리를 총괄한 것으로 알고 성실한 마음으로 받아 순종하느뇨?
이 질문이 신학생들과 목회자들에게 나를 위한 질문이 되기를 바란다. 신앙고백서가 목사인 나의 삶과 나의 목회를 지배해야 강단의 설교가 바뀌고 가르치는 것이 바뀌고 성도들이 변화된다. 우리는 교회의 신앙고백서가 성경에 근거한 것이기에 그 권위를 인정하고 있다.
이러한 입장에 서있는 우리가 새로운 신앙고백서를 작성해 내는 이들의 신앙고백서 내용을 비판하는 것은 자칫 우리를 수구적인 태도로 고착화시킬 우려가 있다. 그러나 교회의 공적인 신앙고백서를 작성하는 것과 시대적인 요구에 따라서 대사회적이고 대국민적인 신학선언서를 그때그때 발표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라고 생각된다. 시대적이고 사회적인 요구에 따라서 교회의 입장을 발표하는 신학선언서의 경우는 신자들뿐만 아니라 비신자들을 위해서도 기독교회의 성경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일이기에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이를 위해 교회지도자들과 신학자들의 기도와 지혜가 필요하다.
나가는 말
한국의 장로교회는 초창기부터 보수주의 신학을 바탕으로 해서 자라온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한국의 장로교회가 주로 영미계통의 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졌기 때문인데, 초창기에 와서 복음을 전한 선교사들은 일부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거의 다 보수주의적 신앙을 가진 분들이었다.
특히 유일한 장로교신학교였던 평양신학교의 보수주의적인 성격은 설립자인 마포삼열(Samuel Austin Maffet, 1864-1939) 박사의 희년 기념 연설 가운데 “나는 사도 바울이 결심하였던 바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 이외는 다른 것은 전하지 않기로 결심하였다”는 말 속에 잘 드러나고 있다. 이러한 보수주의 신학의 근저에는 성경의 영감과 무오를 철저하게 강조하는 성경관이 놓여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초대 평양신학교 조직신학 교수였던 이눌서(Willaim David Reynolds, 1867-1951)) 박사는 “기독교가 성경을 버리거나 성경을 믿지 아니하면 그 때부터 기독교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성경의 문자나 절구를 고친다든지 그 정신을 덮어놓는다든지 그 의미를 굽힌다든지 해서는 안 된다. 그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그 정신을 그대로 발휘하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고 하면서 성경의 무오와 권위에 대하여 강조했던 것이다.
이러한 정통 보수주의 신학 위에 세워진 장로교회는 점차로 시간이 흐르면서 자유주의 신학에 도전을 받기 시작했다. 이것은 초기 선교사들이 전수해 온 보수적인 성경관과는 상당히 다른 서구의 현대적 성경해석이나 관점이 한국장로 교회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이다. 김의환 박사는 한국의 장로교회에 자유주의 신학이 침투하게 된 경위를 (1) 잠복기, (2) 발아기, (3) 성장기 등 3단계로 설명 한다: 첫째로 잠복기는 1934년에 있었던 「신학지남」 권두언 사건이 일어날 때까지를 말하며, 둘째로 발아기는 1934년에서 1940년까지 즉 조선신학원이 설립될 때까지를 의미하고, 셋째로 성장기는 조선신학원이 생긴 뒤에 조선신학교 출신들이 한국 신학계에 진출한 이후를 의미한다고 말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우리는 1910년 일제의 국권침탈로 나라 잃은 슬픔을 맛보았고, 다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와 이를 거부하여 폐교한 1938년까지 평양신학교는 칼빈주의 보수정통신학을 가르쳤고, 평양신학교가 폐교한 후 일제의 허락을 받아 설립된 조선신학교(1940년)의 신학적 노선에 반대하여 고려신학교(1946년)가 독자노선을 취하고 교단에서 분리(1952년)된 것은 역사적인 아픔으로 남게 되었으나 장로회신학교의 설립(1948년)으로 폐교 전 평양신학교의 신학전통을 이어가게 되었고, 다시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가 해체되고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교(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가 정식으로 총회직영신학교로 출범하게 되었으며, 조선신학교는 끝내 자유주의 노선을 고집하여 기장을 세우기에 이르렀다(1953년).
기장과의 분열이 신학적인 문제에 기인된 것이라면 그것은 단연 자유주의신학이 문제의 핵심에 놓여 있다. 결국 선교사로부터 자립을 강조하던 기장이 1955년에 이미 장로회의 성격을 떠나버린 캐나다 선교회와 협력관계를 수립한 사실이 기장 측의 문제가 신학적인 문제였음을 단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그 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세계 교회 협의회(W.C.C.)에 대한 범 교단적인 입장의 차이로 말미암아 W.C.C.에 찬동하는 통합측이 분열(1959년)하는 아픔을 맛보았고, 이 분열로 합동 교단은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 교세도 통합에 비해 매우 열악했고, 교회도 매우 미약하게 출발했다.
이후의 분열에서는 신학적, 교리적 문제보다는 오히려 행정적, 교권적 문제가 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것은 후학들에게 남겨진 커다란 짐으로 남아있게 되었다. 이런 중에도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은 2005년에 그동안 26년 동안 헤어져 있었던 구 개혁 측 가족들을 다시 맞아들여 하나가 되었다.
박형룡 박사는 「신학지남」 1976년 가을호에 실린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적 전통”이라는 논문에서 한국장로교회의 출발에 대하여 “대한 예수교 장로회는 청교도적인 영미 장로교회 선교사들의 선교를 받아 출발하고 웨스트민스터표준문서들을 교의와 규례의 표준으로 채용하여 수행함으로 한국에서의 청교도 개혁주의 신학의 교회가 된 것이다.”라고 말하고, 신학교와 교단 신학의 특징에 대하여, “대한 예수교 장로회의 신학적 전통은 청교도적 개혁주의 장로교회의 그것이다. 그것은 구주 대륙의 칼빈 개혁주의 신학에 영미의 청교도적 특징을 가미한 장로교회의 신학적 전통이다.”라고 제시한다. 박형룡 박사는 역사적 개혁주의, 정통 칼빈주의 신학이 교대 적으로 사용될 수 있음을 말하고, 여기에 청교도 장로교 신학을 덧붙여서 한국장로교회의 특징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제 한국의 장로교회 교인들은 조국 근대화와 경제성장의 터널을 지나면서 통일된 조국을 염원하며 세계 속에 자리한 민주국가로 정착하는 대한민국의 역사적 현실 속에서 우리의 선배들이 역사적 개혁주의 전통을 따라서 오직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의 목회를 지향해온 그 신학과 신앙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되돌아보며, 우리가 속한 교회가 고백하고 있는 신앙고백서와 또한 우리 교회 또는 우리가 속한 교단의 신학적 정체성과 방향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면 좋을 것이다.
김길성(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조직신학)/http://m.reformednews.co.kr/a.html?uid=68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