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시(弓矢)의 기원
궁시의 발명은 시기적으로 어느때인지 의명확히 밝히기는 어려우나 원시인들과 직립원인들은 활과 화살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은 고고학자들의 견해는 같이 하고 있다. G.Child의 《文明의 起源》에 의하면 인류가 투창이나 활을 사용한 것은 구석기시대 말엽인 1∼3만여년전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일부학자들은 약 10만여년전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분명한 것은 선사시대에 인간은 이미 활(弓)과 화살(矢)을 만들어서 생계유지 및 전투적인 생활을 하여 왔다. 이러한 사실은 조개무지(貝塚)에서 발견된 석촉(石鏃)이나 기타 유물로 실증된다. 원시시대에 우리 민족의 여러종족가운데 뒤떨어진 문화를 영위한 읍루족( 婁族)은 혈거생활(穴居生活)을 하면서 석기(石器)를 사용하였는데 그들은 활을 잘쏘았으며 그 활은 길이 4尺짜리로 대단히 강한 것이었고, 화살은 1尺8寸길이의 고시( 矢)를 쓰되 촉(鏃)에는 독을 발라서 사람을 살생하는 데 사용했다.
읍류족과 동시대에 있었던 동예(東濊)에서는 중국에까지 알려져 그 우수성이 널리 알려진 단궁(亶弓)과 아울러 유명한 맥국(貊國)의 맥궁(貊弓)도 널리 알려진 활이다.
중국의 《三國志》<예(濊)전>에 나오는 활은 낙랑단궁(樂浪檀弓)이다. 무슨 활이라고는 명시되어 있지 않았지만, 부여, 옥저, 마한, 변한 등에도 궁시가 있었다고 한다. 낙랑단궁은 박달나무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그 이유는 단궁(檀弓)이라는 이름에서 '단(檀)'은 '박달나무'를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다른 해석을 해볼 수 있다. '檀'이 박달나무이지만 '박달'이라고 쓰면 다른 해석이 된다. 박달이란 '동이족'을 나타내는 말로 후에 '배달(培達)'이라는 해석이 된다. 배달이란 우리 겨레가 사는 땅을 가리키는 말로 달(達)은 아사달, 음달과 같이 사람들이 살만한 땅을 지칭한다. 그리고 '박'이라는 말은 '밝다', '해가 비친다'라는 의미로 우리 겨레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근거로 단궁은 '단군(檀君)나라 활'이라 해석할 수 있다.
맥궁(貊弓)역시 '맥(貊)'이라는 말이 고구려를 가리키는 부족이름으로 중국의 자료에 의하면 맥족(貊族)이라고 적고 있다. 이에 대한 기록은 고구려는 일명 맥이라 부른다. 고구려의 다른종족이 小水곁에 나라를 세웠다. 小水貊이 이것이다. 이 나라에서 소위 맥궁이라 부르는 좋은 활이 나온다. 라고하여 맥궁(貊弓)이란 맥족(貊族)의 활, 맥족이 만든 활이란 뜻으로 활의 성능이 좋았으므로 중국인들도 이것을 호궁(好弓)이라고 불린 것으로 보인다. 즉 여기서 고구려의 활을 맥궁(貊弓)으로 설명하고 있다.
한편 중국의 최초의 기록은《시경(詩經)》<소아(小雅)>에 나오는 각궁(角弓)이다. 그러나 시경(詩經)이라는 책은 漢나라때 다시 보완한 책으로 시경(詩經)을 쓸 당시 기록한 것인지 후대에 기록한 것인지 불분명하다. 여하튼 각궁(角弓)이라 하면 '뿔로 장식한 활'이라고 설명할 수 있지만 '좋은 활'이라고 해석되어지거나 '夷들이 쓰는 활' 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고구려의 건국신화에 나오는 동명성왕의 이름은 주몽이다. 주몽(朱蒙)이란 이름은 부여 말로 명궁수를 뜻하는데서 연유하였다. 그는 나이 일곱 살에 손수 활과 화살을 만들었고, 활을 쏠 때마다 명중했다고 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주몽이 부여에서 탈출하여 졸본천 부근에서 인근의 송양국 왕과 활쏘기 겨루기를 하게 되었는데 주몽은 백 보 밖에서 옥지환을 꿰뚫는 솜씨를 발휘하여 자신이 천재의 손자라는 사실을 밝히고, 그 곳을 고구려의 터전으로 삼았다는 사실이 나온다. 뛰어난 활솜씨는 하늘에서 인정해 주지 않으면 이룰 수 없는 신기한 기술이기에 이러한 능력을 가진 주몽은 이것이 곧 <천제의 손자라는 증표>라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뛰어난 활솜씨는 한 나라를 이루는 기반이 되고 있다.
> 역사(고대)
우리나라는 선사시대에서 조선왕조 말에 이르기까지 궁시를 사용해 왔고, 그 궁시가 전쟁의 한 몫을 차지하고 있기에 궁시에 관한 이야기도 많다. 고구려의 고분벽화에는 어느시대의 벽화보다도 수렵도가 많이 그려져 있다.고구려의 고분벽화에도 수렵 장면과 같이 달리는 말 위에서 무사가 활을 겨냥하며 도망가는 노루를 잡으려는 광경에서도 우리 민족이 활을 사용하였다는 근거를 제시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이는 고구려에서 수렵의 의미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았음을 말해주고 있고 특히 약수리 고분, 덕흥리 고분, 안약3호 고분 등에는 수렵도와 기마도가 잘 나타나 있다. 특히 이들 고분에서는 승마자세와 활, 복장, 기마행렬 등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신라의 활은 사정거리가 멀고 명중률이 뛰어났다. 일찍이 당나라에서도 질이 좋은 신라궁(新羅弓)을 높이 평가한 일이 있었다. 근래에 발견된 신라의 벽화 중에 활로 수렵하는 장면이 보이는데 여기서도 신라 기사(騎射)들의 늠름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삼국시대에서는 신라화랑의 무술로 궁술(弓術)이 있고, 고구려는 경당( 堂)에서 독서와 활쏘기를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한국에서 궁시가 교육과정으로 채택된 것이 삼국시대부터라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데 5세기경의 한반도의 상황을 알려주는 사료에 《구당서(舊唐書)》의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다. 풍속에 글과 책을 사랑한다. '경당' 이라는 집을 지어 미혼의 남자들을 모아 책을 읽고 활쏘기를 배우게 한다. 그리고 백제는 화랑이나 경당과 같은 제도는 구체적으로 나타나지는 않지만 비류왕(比流王, 304∼344)의 경우 320년에 궁 서쪽에 사대(射臺)를 만들고,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활쏘기 연습을 하였다는 기록이 나와 있는 것을 보면 백제에도 무사들의 수련장소로써 활터가 있었고 교육장소로도 사용하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의 여러 왕 중에서 특히 예종은 문무신하와 시중관들에게 활쏘기를 시키고, 잘쏘는 자에게 물건을 상주어 궁술을 장려하였다. 선종은 8년(1091년)에 호부의 남랑 한갖진 곳에 사장(射場)을 설치하여 군졸에게 궁사를 배우고자하는 자는 모두 익히게 했으며 과녁을 맞히는 자에게는 상을 주도록 하였다.
고려사 병지(兵志)에는 활쏘기를 장려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각주진(各州鎭)은 농사짓는 틈틈이 매월 육위일(六衛日)에 궁노(弓弩)를 연습하게 하였다. 계관의 행수원은 색원과 더불어 친히 감독하여 명령하였다. "궁(弓)은 40보에, 노(弩)는 50보에 표적을 두고, 10발에 5번 맞춘자 및 연속해서 맞춘자로서 서경의 직사원은 녹을 올리고 산직으로 진급시키고, 동남반은 내외에서 서용(敍用)하고, 관리는 자원하는 바에 따라 그 직무를 맡긴다" 라고 하여 관직의 녹봉과 임용에까지 활쏘는 능력을 결부시켜 장려하였다.
> 역사(중세)
고려 때의 궁시는 간혹 중국으로 보내는 조공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한국은 고대로부터 무술시합의 행사가 많았는데 고구려의 온달(溫達) 전에 보면 해마다 3월 3일 낙랑의 언덕에서 사냥하는 행사가 있었다. 또 동맹이라는 행사는 일종의 무술 시합의 행사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차츰 활을 잘 쏘는 사람은 이성계(李成桂)로서 그를 신궁(神弓)은 신라의 궁장(弓匠)인데, 그가 당(唐)나라에 초청되어 가서 활을 만들게 되었으나 결코 그 비법을 알려 주지 않았다는 고사가 있다. 한국 민족은 옛부터 활을 잘 만드는 민족이었는데 <설문해자說問解字> 이(夷)자조에 보면 대인(大人)이 활을 쏘려는 형으로서, 즉 동이민족(東夷民族)이란 이름이 여기에서 기인되었다고 한다.
현종 20년(1029)부터 문관 4품이상, 나이가 60세미만인 자에게는 근무가 없는 날 동서교외에서 활쏘기를 하도록 명령하였으며, 선종 3년(1086)에는 양경의 무관을 서울에 불러 동정(東庭)에서 궁사(弓射)를 사열하고, 12월에는 문관의 경우도 그와 같이 하였다.
한편 궁술은 군사훈련의 강화라는 의미뿐만이 아니라 좀더 경기적이고 유희적인 요소가 가미되기도 하였다. 《조선궁술》을 지은 이중화(李重華)에 의하면 선종 8년(1091년)에 호부 남랑에 사장을 설치하여 군대의 병졸과 일반의 학습자를 모아 습사하게하여 과녁에 맞추는 자가 있으면 상을 주었으니 이를 국도, 즉 중앙의 사풍(射風)을 격려한 시초라고 하였다. 이것은 궁술연습을 위한 공식활터를 최초로 열어 일반에게도 공개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고려시대는 문반귀족의 등장으로 지배계층이 형성되면서 고려의 무예는 제반문화와 더불어 커다란 변화를 보였다. 이들은 각종 무예와 경기에 유희적인 요소를 가미하여 무예와 볼거리의 즐거움으로 전락시켰다. 무예는 유희, 오락의 대상으로 경기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기마술은 구기경기로, 궁사(弓射)는 내기경기로, 수박은 관람용으로 변질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기술적인 면에서 일단의 진보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며, 체육학측면에서도 발전적인 측면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궁술은 문치귀족사회의 영향을 받아 육예(六藝)의 덕목중 하나로 포함되어 그 사람의 덕(德)의 유무를 판단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서는 무사양성을 위한 교육기관내지 제도적 장치로써 그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것은 세종 17년에 세종이 병조에 전지한 다음과 같은 기사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말타기와 활쏘기(사어:射御)의 시급한 급무를 의당 강습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군사들이 모두 훈련관에 모여 활쏘기를 연습하기 때문에, 하루동안 연습하는 것이 수십명에 불과하여 한낱 활쏘기 연습의 이름만이 있을뿐 그 실효가 없으니, 이제부터 궁성 안과 민가가 희소한 곳에 사장(射場)을 설치하고, 군사들을 나누어 집합하게하여 활쏘기 훈련을 권장 시험하게 하되, 그 절차는 삼군도진무와 이를 의논하라 하니, 모두 의논하고 아뢰기를, 서울안에 射場 8개 소를 설치하고, 번(番)을 나가는 군사들로 하여금 각기 그 부근의 사장에 모여서 감독 관정하게 하고, 또 궁성 안에 사장 2개소를 설치하고, 번진무로 하여금 이를 감독관정하게 하되, 그의 근만과 능부(能否)를 상고하여 이를 기록하고, 맞힌자는 도(到) 하나를 주고, 이르지 못하는 자와 마음을 쓰지 않는 자는 벌을 주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르라. 라는 기사가 있는데, 이러한 사장이 교육기관의 역할을 하였음은 어느정도 분명한 사실이라 보여진다. 그러나 학교의 범주에 포함되는냐라는 혼란도 가져 올 수 있으나 분명한 것은 무사를 양성하는 장소였음은 분명하다.
한편, 《경국대전》병전 시취조의 대표적인 시취과목중 활쏘기에 관련된 것은 목전(木箭), 철전(鐵箭), 기사(騎射)가 있는데, 이러한 조선시대의 무과의 시취과목에 활쏘기가 있는 것은 다른 여러 무예와 함께 공개경쟁에서 실시하는 시험을 보았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활쏘기는 화살과 거리의 종류에 따라 차이가 있다. 기사(騎射)는 5개의 표적을 각각 35보의 거리로 세워 놓고 말을 달리면서 활을 쏘아 맞추는 방법으로 실시하였다.
서유구(徐有求)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誌)》의 <유예지(遊藝志)> 상권의 사설조(射設條)는 활쏘기에 대한 과학적 방법이 망라되어 있다. 이 사설조는 초학연습(初學練習), 자병(疵病), 풍기(風氣), 기구(器具)의 5개 항목이 있는데, 이것을 다시 34개의 소항목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특히 과학적인 활쏘기의 방법을 대변해 주고 있다.
조선시대의 활쏘기는 무인뿐만이 아니라 문인 그리고 일반 백성들도 익히고 즐겨한 무예였는데, 일반에게 활쏘기는 사정(射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여기서 실시된 경기적인 궁술대회를 편사(便射)라 한다. 편사는 5인이상으로 조직된 여러 개의 단체나 각지의 궁수가 자기 사정을 대표하여 서로 승부를 겨루는 경기로 양편이 각기 일정한 수의 선수를 선정하고, 각 선수가 쏘아 맞힌 화살의 총 수로 승부를 겨루는 경기이다. 이것은 이 당시 이미 클럽대항 경기를 개최하는 등 무예를 무예로서 뿐만 아니라 우열을 가리는 스포츠의 단계로까지 발전시켰다데 그 의미가 있다.
> 역사(근대이후)
근대에 접어들어 1909년 7월 15일에 이상필(李相弼), 이용문(李容紋) 등 동호인이 모여 사궁회(射弓會)라는 활쏘기 단체를 조직하였다. 이 단체의 조직으로 민중스포츠로서의 보급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 후 스포츠로서의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한 것은 조선궁술연구회(朝鮮弓術硏究會)가 발족한 때 부터이다.
이중화의 《조선의 궁시》는 일제시대에 체육의 소재로 활쏘기를 보급하고 하는 의도에서 편집된 것으로, 조선조의 궁술에 대해 포괄적으로 다루는 소개서로 편집되어 있으나, 훈련을 위한 세부적인 내용은 다루지 않고 있다.
대한 궁도협회는 8·15해방을 맞은 이듬해 1946년 2월 10일에 조선궁도회(朝鮮弓道會)의 부활로 정식 발적되었다. 그후 1947년 조선궁도협회로 개칭되었다. 그후 1960년대 접어들어 국제궁도인 <양궁(洋弓)>이 유입되어 한국 궁도계는 획기적인 변화를 갖어 왔다.
양궁에 있어서도 각종세계대회 및 올림픽에서 세계강국으로 발돋움하여 왔다. 그러나 1983년 대한궁도협회에서 담당하던 양궁이 따로 분리되면서 새로운 단체인 대한양궁협회가 생겨났다. 이때부터 대한궁도협회는 국궁만을 담당하면서 국·양궁의 분리와 함께 국궁의 발전은 추춤한 면을 보이고 있다. 이는 각종 세계대회나 올림픽에서 양궁이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어 있는 반면 전통적인 우리 국궁은 소외받고 있는 실정이다.
> 요약
궁술을 닦는 일.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은 활과 화살을 만들어서 사냥감을 잡는 도구나 적을 방어하는 무기로 사용하였다. 그 후 화약의 발명과 총의 출현으로 그 위력을 빼앗겼으나 스포츠적인 성격으로 바뀌었다. 오늘날의 궁도는 국궁과 양궁으로 나누어진다.
☆ [발췌] 전라남도 함평 '관덕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