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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扶安) 임씨

사직공 임서(林叙) 사적/ 위의공 임흥(林興) 사적

작성자임지수|작성시간26.06.10|조회수8 목록 댓글 0

   사직공 임서(林叙) 사적 

 

  공의 휘는 서( 叙)니 고려때 정당문학 서하공 춘(椿)의 현손이며 공조전서 난수(蘭秀)의 제삼자이다.

공이 효우 염결한 자질을 타고난 고려 공민왕의 공주에게 장가드셨으나 왕실 종친을 끼고 현영하는

것을 혐의하고 산반에 머무르다가 사직이 다함을 당하여 선인의 구장에 자취를 감추어 스스로 정양하였다.
 조선 태조께서 예조판서로 수차 불렀으나 마침내 어명에 다다르지 않고 맑은 절조를 고상히 지키며

여년을 마치었다. 주상께서 가상히 여겨 특히 예장을 명하였다.

 

 위의공 임흥(林興) 사적

 

  나려정절록에 이르기를「임흥(興)은 전서공의 계자요 서하공의 현손인데 前 진용부위 금오위좌령

별장으로 관직이 위의장군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공은 타고난 성품이 순수하고 세운 뜻이 굳고 곧더니 일찍이 백운사에서 글을 읽고, 이 목은과 권 양촌의

문하에 종유하며 예설을 논하였다.
 이십세에 학행으로 산원동정 및 금주지사에 제수되었으나 다 부임하지 않고 마침내 위의의 관직으로

수월을 시종하다가 여흥에서 이 목은 선생이 돌아가셨다는 訃音을 듣고 어육을 끊고 먹지 않았다.
  이십오세에 선산으로 길 야은 선생을 찾아 수학하기 오-육년만에 어버이를 봉양코자 돌아오니 길 야은이

이르기를「나의 문하에 와서 글을 배우는 者가 많으나 임흥과 같이 충효가 독실한 자는 없었다.고 하였다.
 삼십오세에 공주 북쪽 동혈산을 지내다가 봄 고사리가 방금 나오는 것을 보고 백이 숙제의 채미가를

화답하여 이르기를「고사리와 고사리가 뾰족뾰족 나옴이여! 수양산이 어느 곳이런가? 바람이 참으로

맑도다. 천고에 꿈이 아련하도다. 만약 당년에 백이 숙제가 이곳에 있었다면 응당 탄식하며 돌아가지

못했으리라.」하였다.  전서공께서 일찍이 병환이 계심에 탕약을 반드시 친히 맛보고, 상을 당하여 질대를

삼년을 벗지 않았다.
  사십칠세에 조정에서 전서공의 절의를 아름다히 여기고 그 자손으로 관직을 감당할만한 자를 불렀는데

公이 이르기를「내가 여조의 끝 반열이라도 지내었다.」하고 마침내 나가지 않았다.
 사십오세 되던 기해에 길 야은 선생의 상을 듣고 심상을 삼년토록 행하였다. 정통 사년, 칙 세종 이십일년

기미 이월 구일에 돌아가셨다. 이에 앞서 조정에서 또 관직으로 부르는 어명이 있었으나 공께서 이미 돌아

가셨다. 특히 예장을 命하였다.
 김한림광열이 뇌문에 이르기를「아름답다! 돌같이 굳은 심성으로 선업을 능히 이어 주간하였도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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