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와 부안임씨들과의 관계
6.25의 76돌이 다가온다. 6.25와 우리 고향 부안임씨들과는 많은
이야기를 남기었다. 6.25가 발발하고 며칠만에 국군과 연합군이
북한 인민군과 금강 전투가 벌어졌다. 미군이 금남교를 폭파시켰고,
금강 남쪽 제방에 주로 미군이 포진하였고, 금강 북쪽에 인민군들이
포진하였는데, 인민군 주력부대가 부강과 공주로 돌아서 미군 후방을
교란시켜서 미군들이 허겁지겁 후퇴를 하다가 대전 부근에서 미8군
사령관 딘 소장이 포로로 붙잡히는 사태가 벌어졌다.
금강 제방에 포진하였다가 인민군에 의해 죽은 미군들의 시체들은
반곡리 괴화산 서북능선에 대부분 파묻었는데, 제가 1959년 금호중학교
다닐 때에 세거리 사람들이 파묻은 미군 시체의 옷에서 달러를 찾는다고
시체를 뒤지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었다.
폭탄이 떨어진 곳마다 웅덩이가 여기저기 많았었고, 불발탄을 갖고
놀다가 장애인이 된 사람들도 여러 명이었으며 인민군에 의해 의용군
으로 끌려간 젊은이들이 부지기수이어서 동네마다 울음바다이었다.
방축리 임헌교 면장 아저씨가 인민군들에게 붙잡혀서 냇둑에서 총살을
당하셨다. 임헌천과 임헌대(후에 복직됨) 아저씨가 북한에 있는 임기수
형님 문제로 교장에서 떨어지고, 임헌성 아저씨가 교감에서 떨어지고
후에 면서기를 다니셨다.
인민군들이 파괴된 금남교 자리에 임시 교량을 설치하느라 송담리
유원식씨의 안채를 지으려던 재목들을 우리 부안임씨들을 강제동원
하여서 금남교까지 날라 가게 하였었다.
6. 25 당시 우리 집안은 여름 피난은 서면 월하리로 갔었고, 겨울
피난은 계룡산 북쪽 반포면 원봉리로 갔었었다.
6. 25 당시 의용군으로 끌려간 일부는 북한에 살고 있어 몇년전에
금강산 이산가족 상봉 때에 면회로 만나게 된 기적도 있었고, 임용호
형님을 통해서 다른 여러 명의 소식도 알게 되었었다.
6. 25만 없었다면 의용군으로 끌려간 젊은이들 중에 장관, 국회의원
등의 인물들이 많이 나와서 우리 고향이 강제수용도 당하지 않고,
부안임씨들의 명망도 높았었을 텐데, 안타깝고 아쉬운 점이다.
아! 어찌 잊으랴! 6.25 남침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