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임씨의 내력(來歷) 이야기
저의 19대조 부안임씨 문희공(전서공) 임난수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부안임씨(扶安林氏) 중시조 문희공((文僖公, 벼슬이 공조전서(工曺典書)이었기 때문에
전서공(典書公)이라고도 함)) 임난수(林蘭秀) 할아버지는 보안백 임숙(保安伯 林淑)의
넷째 아드님으로 1342년 3월 17일 태어나시고, 1407년 6월 21일 별세하셨다.(향년 66세)
어머니는 정헌공 유복화(正憲公 劉福和)의 따님이시고, 부인은 용성부원군 최유(龍城府阮君
崔濡)의 따님으로 군부인 해주최씨(君夫人 海州崔氏)이시다. 젊어서(32세)는 장군(將軍)으로
탐라(耽羅, 제주도)에서 목호의 난(牧胡之亂)이 일어나서 그 정벌(1374년 8-9월, 고려 공민왕
23년)에 최영 장군의 부대장으로 참가하여 혁혁한 공을 세우셨다. 전투 중에 오른쪽 팔이
잘라졌는데, 잘린 팔을 화살통에 넣고 계속 전투를 하셨다고 전한다. 흥복도감록사(興福
都監錄事)를 시작으로 11가지 벼슬을 지내시고, 가선대부 공조전서(嘉善大夫 工曹典書:
현 지식산업부 장관)를 역임하셨다.
1392년 태조 이성계가 역성혁명을 하매 공주 삼기촌(구 세거리, 현 세종시 세종동,
문희공의 연세가 50세이었음)에 내려오셔서 은거(隱居)하셨다. 태조 이성계가 여러 번
벼슬길에 나오라고 불렀으나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정신으로 벼슬길에 나가지 않으셨다.
전월산 상려암(想麗巖)에 올라가 개성 쪽을 바라보시며 고려의 망함을 원통히 여기셨다.
이 점이 아주 훌륭하신 정신이었다. 서울 부근 청계산 이수봉 부근에도 '조견'이란 분이
고려의 망함을 원통히 여기고 개성 쪽을 늘 바라보았다는 ‘망경봉(望京峰)’이 있다.
전월산 중간에서 서쪽으로 뻗어 내려오는 산줄기에 봉우리가 2개 있는데, 첫 번째는
부왕봉(俯王峰), 두 번째는 성왕봉(成王峰)이라 부르셨다. 세종시 세종동 세거리 문희공께서
사시던 집터 앞에 은행나무 암수 2그루를 심으셔서 현재 천연 기념수 ‘임난수 은행나무’로
지정을 받았다. 15년간 은거(隱居)하신 후에 별세하시니 예장법(禮葬法)에 의해 1407년
12월 3일에 세종시 연동면 다솜동 불파미 간래목산 임좌(壬座)에 모시었다.
1418년(태종 18년) 길재, 정몽주, 임난수 등 18인을 제사를 지내었다. 1419년(세종 1년)에
세종대왕의 명에 의하여 ‘임씨가묘(林氏家廟)’를 세워 영구히 제사를 모시도록 하시었다.
1679년(숙종 8년) 10월에 후손들이 문희공 임난수의 묘소를 사초(莎草)하다가 지석(誌石)을
발견하고 족보(族譜)와 지석문을 가지고 속리산 화양계곡에 계시던 우암 송시열을 찾아가서
신도비문(神道碑文)을 받아 1682년에 신도비(神道碑)를 건립하였다.
1710년(숙종 36년) 충청도 선비들이 문희공 임난수 할아버지의 훌륭하심을 알고 ‘기호서사
(岐湖書社)' 건립하여 추앙(推仰)하였다. 2024년도에 ’기호서사(岐湖書社)'를 세종시 나성동
서쪽 기슭에 새로 건축하였다. 1945년 3월에 나성동 임씨가묘 아래에 새로 신도비를 건립하였고,
1992년 4월 3일 새로 더 크게 신도비를 건립하였다.
문희공 임난수 할아버지는 음력 6월 21일 10시에 나성동 임씨가묘에서 제사도 모시고,
음력 9월 9일 11시에 세종시 연동면 다솜동 불파미 간래목산 중턱 묘소에서 시제도 모시는데,
이를 ‘중양제(重陽祭)’라 한다.
문희공 임난수 할아버지는 첫째 수사공 임모(水使公 林慕-자손이 없음), 둘째 부사공
임목(府使公 林穆), 셋째 사직공 임서(司直公 林敍), 넷째 위의공 임흥(威毅公 林興)을 낳으셨으며,
서자 임원만(庶子 林元萬)도 있었다. 그 후손들이 하늘의 별과 같이 세종시의 집성촌을 중심으로
전국에 흩어져서 무수히 번창(繁昌)하고 있다. 부안임씨 만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