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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扶安) 임씨

전서공((典書公)과 문희공(文僖公)

작성자임지수|작성시간26.06.18|조회수4 목록 댓글 0

     전서공((典書公)과 문희공(文僖公)

  고려 말의 충신이신 林蘭秀할아버지를 칭할 때 우리는 흔히 典書公이라고 한다. 
본관은

부안(扶安)이며, 1342년(충혜왕 복위3) 전라북도 보안현(현재 부안)에서 태어나셨다.

  32세의 나이로 1374년(공민왕 23) 최영 장군과 함께 탐라를 정벌하여 큰 공을 세우셨다.

당시 오른쪽 팔이 적에게 잘리자 잘린 팔을 화살통에 넣고 싸워 전승하셨으며, 흥복도감(興福都監),

녹사(錄事), 낭장(郎將), 호군(護軍) 등을 거쳐서 공조전서 (工曺典書)에 올랐으나 태조 이성계가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세우자 한 하늘 아래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면서 두문동을 거쳐 충청도

공주목 삼기촌(현 충청남도 연기군 남면 양화리1리 세거리)으로 낙향하여 은둔하시며 태조

이성계의 부름에도 출사하지 않고 매일 전월산 정상의 상려암에 올라 북쪽하늘을 보며 고려의

망함을 한탄하시다가 1407년 향년 6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셨다.  
  1419년 세종대왕께서 고려의 충신이며 조선왕조에 벼슬하지 않은 그의 절의를 
기려 신숙주의

부친이자 당시 최고의 명필이었던 중군총제(中軍總制) 신장(申墻)에게 명하여 林蘭秀의 사당에

‘임씨가묘(林氏家廟)’의 편액을 쓰게 하여 내리고 불천지위(不遷之位)로 모시도록 하였다.

  또한 나성일구강산(羅城一丘江山)이라 하여 사패지(賜牌地)를 지급하였다.

1682년(숙종 8) 송시열이 ‘고려임장군신도비(高麗林將軍神道碑)’를 세우고 “전서공의 몸을 지킴이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와 같다”라며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실행한 충신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상과 같이 전서공의 사적을 살펴보았는데, 우리는 林蘭秀 할아버지에 대해서 전서공이라는

호칭을 쓰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율곡, 퇴계 등과 같이 호를 쓰는 것이 일반적이고, 이순신

장군처럼 忠武公이라고 시호(諡號)를 쓰고 있다.
 典書公께서는 세종대왕께서 임씨가묘 편액을 하사하시고, 불천지위로 모시도록하고, 
제사를 지내게

하실 때 문희(文僖)라는 시호를 내리신 것이 아닌가 추측할 수 있다. (1965년 발행 을사보 참고)

 앞으로 전서공이라는 흔한 관직명을 쓰는 것보다는 문희공(文僖公)이라는 시호를 쓰는 것이 더

자랑스럽지 않겠는가 생각한다 

                (임재혁, 본인의 장조카로 서울 노원구 구의원 역임)

* 고려삼중대광 문하부 도첨의 좌시중 금령부원군 김충간공 신도비(高麗三重大匡 
門下府 都僉議

左侍中 金寧府院君 金忠簡公 神道碑)에 “有賀林文僖公蘭秀 登第詩一絶而己”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는 “하림의 문희공 임난수가 남긴 시가 한 구절 전해오고 있다”라는 뜻이다.  

               부안임씨 홈페이지 자유게시판 코너에서 옮겨온 글(임재혁 게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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