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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동포 리문호 시인의 "불국의 성산 - 구화산 여행기"(上) 신라의 왕자 등신불 김교각 스님의 발자취를 찾아서

작성자동포세계|작성시간15.05.29|조회수394 목록 댓글 0

중국동포 리문호 시인의 "불국의 성산 - 구화산 여행기"(上)

 

본문은 중국 심양 리문호 시인이 '신라의 왕자 출신 승려' '등신불'로 유명한 김교각 스님의 발자취를 찾아서 쓴 글입니다

 

 

구화산을 찾은 리문호 시인 

 

 

 오래 전부터 구화산을 유람하고 싶었다, 황산과 백두산을 가 본 나로서는 무슨 산이 더 보고 싶겠냐만은 구화산에 가려는 목적은 다르다. 구화산은 중국 4대 불교 성지의 하나일 뿐만 아니라 특히는 신라국의 왕자 김교각이 성도(成道)한 곳으로 그의 생평 사적에 대하여 깊은 흥미를 가졌기 때문이다.
  드디어 2008년 10월 3일 국경절 황금주 기간을 타서 나는 상해에서 T776 급행 열차를 타고 안휘성 지주시(池州市)로 향하였다. 새벽 6시 20분에 탄 열차는 일곱 시간을 거쳐 오후 1시 30분에 지주시에 도착하기 까지 혼자 좌석에 앉아 오는 마음은 지루했지만 열차를 타는것도 유람이라 생각하니 즐거웠다.
  여행사 안내원의 인도하에 버스를 타고 40분, 구천 여행사 호텔에 숙소를 잡아 놓고 구화산 입구에 도착하였다. 입구 앞 주차장에는 수백대의 버스와 승용차들이 주차해 있었다 정말로 장관이다. 입구로 들어가 구화산 전용 버스를 타고 산길을 오른다. 깎아 지른 듯한 절벽과 골짜기, 그리고 울울창창한 죽림과 솔나무들이 구화산의 기경을 이루었다. 차창밖을 내다 보면 버스아래 아아한 벼랑이 현운증을 일으키게 한다.
 문뜩 당나라의 시선(詩仙) 이백이 구화산에 와서 지은 시가 련상된다. < 높기로 수천장, 위의 아홉 봉우리 연꽃 같네(高數千丈, 上有九峰如蓮花)>.
  지질 학자들의 고증에 의하면 2억년전 여기는 망망대해였다고 한다. 인도지나 지각 운동으로 인해 여기는 육지로 되였으며 그 후 몇차례의 조산 운동으로 인해 화강암들이 첩첩산봉을 이루었다 한다.
  약 20분 거쳐 버스는 구화산 중턱의 분지에 도착했다. 여기는 1.5킬러 길이의 평지로 구화가(九花街)라 한다. 마침 어슴프레한 구름이 내려 덥혀 있는지라 미망하고 몽롱한 기분이다.그 속에 수 없이 늘어선 상가, 호텔, 인가들이 보이고 여행객들이 밀물처럼 밀려 다닌다. 둘레의 산 기슭에는 단청색 웅장한 사원들이 자리하여 있고 향연과 홍촉의 검은 연기가 구름속으로 피여 오르고 있다. 기실 이 많은 사람들은 나처럼 력사에 대한 고찰 목적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니라 대부분은 안휘성, 하남성, 하북성, 강소성, 절강성, 상해 등지에서 천리를 길을 마다하고 대비대원(大悲大願)의 김지장 보살에게 소망을 빌러 온 사람들이다.

 

 


  내가 먼저 들어 간 곳은 분지의 남쪽 부용산(芙蓉山) 산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화성사(化城寺)이다. 화성사는 구화산 불교 력사 박물관이며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중점 문물보호 사찰로 지정되여 있다. 화성사는 영관전(靈官殿), 천주전(天主殿), 대웅보전(大雄寶殿), 장경루(藏經樓)등 네개의 건물이 하나의 통로로 연결되여 있다. 화성사에는 신라국의 왕자 김교각의 생평사적이 전시되여 있는데 바로 내가 가장 커다란 흥미를 가지고 구화산에 오른 목적이다.
 전시관 서문(序文)의 아래와 같은 내용을 나는 특별히 주목했다.
 <중국의 불교 역사에서 외국의 승인이 보살로 된 사람은 김교각 한 사람뿐 이다. 중국 4대 불교 도장(道場)에서 진인(眞人)이 응화(應化)하여 천년의 향불을 향유한 사람도 다만 김교각 한 사람뿐 이다. 김교각은 중국 불교 역사의 위대한 인물이며, 일대 고승이며, 중국인 마음속의 지장(地藏)보살이며, 중국 불교 역사상 특수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김교각의 업적에 대한 평가이다.
 김교각을 중국인이 경앙하여 김지장(金地藏)으로 공봉하는 원인은 무었인가?
 이제 부터 나의 시간 여행은 시작 된다. 미망한 구름이 서린 구화산에서 천년을 더듬어 그 많은 비밀과 사연이 깃든, 아직 김교각의 행적이 묘연한 머나 먼 과거로 력사 여행을 떠난다.

 

 

그럼 먼저 지장 보살은 누구인가 부터 알아야 김교각을 알수 있다.
 <지장>이란 산스크리어로 <크시티가르바>의 의미를 중어로 의역한 것이다. 그 뜻인 즉 <대지의 모태>란 말로 만물이 의지하고 성장하는 덕이 있다. 석가 여래가 멸도(滅度)하신 뒤 미륵 보살이 출현할 때까지 56억 7천만년 동안은 이른바 부처님이 계시지 않는 <무불(無佛)>의 시대라 한다. 부처님은 멸도하면서 지장 보살에게 <6도(六道)>의 중생들을 맏기며 고해에서 해탈하게 하여 달라고 당부하였다 한다. 6도란 지옥, 굶어 죽은 귀신 아귀, 죄로인해 짐승으로 태여난 축생(畜生)을 일러 <삼악도(三惡道)>라 하며 수라(修羅), 인간, 천상을 3계라 한다.그러므로 지장 보살은 육도의 중생, 특히 지옥의 극심한 고통에서 중생을 구원하는 대비대원(大悲大願)을 지닌 보살이다.
 신라의 왕자 김교각은 기원 696년 신라의 계림주 왕족의 가정에서 태여 났다. 그의 부친 이름은 김흥광으로 후날 성덕왕이며 모친은 성정황후이다.김교각은 어렷을 때 총명하고 공부하기를 좋아 했으며 청년시절은 장골 사나이고 키가 7척이며 팔힘이 백부를 당해냈다 한다. 여기서 팔힘에 대한 과장은 지옥의 대문을 열어 중생을 구원하는 힘이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그는 청년시절에 세속을 염오하여 삭발하고 출가하였다. 
 그리고 기록에 의하면 <심자이모악, 영오천연(心慈而貌惡, 穎悟天然)>이라는 묘사가 있다. 김교각은 24세 되는 해에 백견 <선청(善聽)>을 데리고 배를 타고 바다물을 가르며 중국의 절강성 녕파 부근의 어주에 도착하였다. 어떤 학자는 중국의 남방에서 20년 있다가  안휘성의 지주시를 통해 구화산으로 왔다고 하지만 또 어떤 학자들은 그때 당시 정치 경제의 중심지인 당나라의 수도 장안에 왔을 것이라 주장한다. 당나라의 한 시인의 시에는 이런구절이 있다.
 <도도해수무변반,신라왕자범주래,불사백골리향원, 만리지심예오대(滔滔海水無邊畔, 新羅王子泛舟來, 不辭白骨離鄕遠, 萬里持心禮五臺>.
 이 시에서 신라왕자를  김교각으로 지목하고 있다. 김교각은 장안에서도 시인들을 사귀였으며 불교의 성지 산서성 오대산에서도 얼마간 머무른것으로 추측된다. 

 

 

 이렇게 20년을 다니다가 장안 부근에 성행한 각종 불교 파별의 모순을 벗어나 경제가 낙후한 강남으로 내려와 세상과 동떨어진 구화산에서 지장신앙의 기치를 꼽고 지장의 대원을 실현하기 위하여 평생을 고군분투했으리라 생각된다.
 739년, 김교각은 구화산 북쪽 산기슭 노전오촌에 도착하였다. 낯설고 물선 중국의 남방을 극도의 굶주림을 이겨내며 간난신고를 거쳐 찾아 온 지라 피골이 상접한 모습은 말이아니였으리라. 구화산의 산주  민양(閔讓)은 초면에 김교각의 용모를 보고 범상치 않은 승려임을 발견하고 밥을 주고 자택에 유숙하게 하였다.후에는 가사를 지어주고 수련을 하게끔 공양하였다.후날 민공은 김교각에게 깊이 감동된지라 아들 도명을 제자로 받게하였으며 아들이 스님으로 된 후에는 법도에 따라 아들에게 절을 올렸다 한다.
 이는 불교적 예절이다. 민공의 묘지는 아직 구화산에 있다. 김지장의 성상 옆에는 언제나 두 사람이 김지장을 시위하여 있는데 오른 쪽에는 향신(鄕神)의 옷 차림을 한 민공이고 왼쪽에는 선장(禪杖)을 들고 있는 도명법사이다. 김교각은 그 후 백리 떨어진 남령이란 고을에가 지장경서 네권을 베껴 온 후 산으로 올라가 구화산 동쪽 절벽의 석굴에서 수련을 하였다. 이 동굴에는 그가 수련하면서 남긴 발자국과 앉은 자리가 선명하게 아직 남아 있다. 이렇게  장장 세월을 그는 솔향을 호흡하며 죽림의 음운을 들으며 구름과 노을을 벗으로 삼아 고행을 했으리라.
 이렇게 18년을 홀로 고행한 757년, 산하의 장로 제갈절이라는 사람이 수명의 장로들을 거느리고 구화산에 등산하였다. 심심 협곡엔 수풀이 우거지고 아무리 둘러 보아도 적막무인이였다. 그러다 동아 절벽의 석굴에 오니 김교각이 홀홀 단신으로 단정히 앉아 눈을 감고 수련을 하고 있었다. 무릅 옆에는 쇠가마가 놓여 있었는데 안에는 몇알의 쌀과 관음토(觀音土)를 섞어 지은 먹고 남은 밥이 있을뿐 이였다.관음토는 구화산의 일종 백색의 토양으로 구화산에서는 관음토라 한다. 벌레와 모기에 물어 뜯기며 야수의 위협을 받으며 굶주림에 고생하며 그의 고행은 험난했으리라. <지장십륜경>에는. <안인불동, 유여대지, 정려심밀, 유여밀장(安忍不動,猶如大地,靜慮心密, 猶如密藏)> 이런 구절이 있다. 김교각은 바로 그런 형상을 타고난 지장보살의 화신이다
 여러 장로들은 이렇틋 고행하는 스님도 있느냐고 감동하였으며 이로 부터 경앙하게 되였다.그렇다.지금의 말로 말하면 인간 생명의 극한을 넘어 그는 수련을 하였다.
 뭇 장로들은 산으로 내려가 토론을 거쳐 돈을 모아 땅을 사주며 인력을 동원하고 재물을 마련해 지금의 화성사 자리에 사묘를 지어 주었다. 구화산 지구의 불교는 기원 401년 부터 있었다.
 김교각이 구화산에 온 후로 점차 기존의 승려들은 김교각의 슬하에 들어와 지장보살의 불도를 수련하였던 것이다. 사당을 짓고 농전을 개척함에 김교각은 친히 중도들을 거느리고 노동하였다. 개척한 농전이 수십무나 되였다. 화성사 정문 앞에는 반월형의 못이 있는데 바로 그때에 판 저수지다. 후에 방생지(放生池)라 이름을 달았으니 원인은 물고기를 먹으라고 가져다 주면 이 못에 놓아 주었기 때문이다. 농작물은 황도(黃稻)를 심었다 하였으니 신라국에서 들여 온 좁쌀이나 기장이 아닌지 모르겠다.
 그리고 오채송(五釵松)란 솔나무도 신라의 품종인지 모른다.그때 신라국의 승려들도 구화산으로 들어와 김교각의 슬하에서 수련을 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차나무도 심었는데  학술적으로 견해가 분분하다.

 

@동포세계신문(友好网報) 제337호 2015년 5월 19일 발행 동포세계신문 제337호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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