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 롯데캐슬 아이비 노인회관의 액자 속 한 장의 사진
노곡 홍순도
여의도 롯데캐슬 아이비 노인회관 벽면에는 한 장의 사진이 액자에
걸려 있습니다. 그 사진에는 대한민국 현대사를 몸소 살아내신 어르신들의 숨결과 빛나는 삶의 자취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뒷줄에서 플루트를 연주하는 정주현 님(향년 91세) 은 21세에 일본군에 징집되셨던 분입니다. 1978년, 모교인 창원시 대산초등학교에 이순신 장군 동상을 건립하셨고, 농촌의 어려운 후배들을 위해 장학용품으로 값비싼 플루트 9대를 아낌없이 지원하셨습니다.
7년 전 장암 수술 후 투병하시며 호흡이 힘들어지자, 플루트 대신 전자 오르간과 아코디언을 연주하셨습니다. 병마와 싸우면서도 아이비 노인회 회장으로서 악단을 조직하시고, 음악으로 공동체를 하나로 이끄셨습니다. 삼성 이병철 회장과 함께 제일모직 창립 요원으로도 활동하셨던, 그야말로 시대의 산 증인이셨습니다.
앞줄 중앙에서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이원복 님(향년 88세) 은 대한민국 최초의 비행기를 설계·제작하신 예비역 공군 대령이십니다.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친필 휘호 ‘부활호’ 를 비행기에 새기셨고, 그 시승식에는 함태영 부통령, 손원일 국방부 장관, 최용덕 공군참모총장이 함께하였습니다. 무엇보다 백범 김구 선생의 아들, 김신 장군이 직접 시승한 그 순간은 대한민국 항공사의 빛나는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외삼촌이신 동요 〈반달〉 의 작곡가 윤극영 선생의 영향으로 음악적 재능을 키우셨고, 현역 시절에는 '공군가곡집'을 창작 • 제작하여 장병들의 사기를 북돋우셨습니다. 전역 후에는 대한항공 전무로서 민간 항공 산업을 개척하셨으며, 황혼기에 아코디언을 잡으시어 여전히 청춘의 열정을 이어가셨습니다.
왼쪽에서 아코디언을 연주하시는 신의식 님(향년 89세) 은 대한민국 산업 발전의 숨은 주역이십니다. 1955년 여름, 최무성 삼 형제가 청계천 천막 공장에서 지프차 엔진으로 국산 자동차 1호 ‘시발택시’ 를 제작했을 때, 이를 경무대 이승만 대통령과 프란체스카 여사께 보고하기 위한 영문 번역을 맡으셨습니다.
이후 삼성전자가 반월 공단에 터를 잡고 공장을 세울 때에도 수많은 해외 장비와 자재의 안내서를 밤낮없이 번역하여 설치를 가능케 하였습니다.
꼬박 3년을 바친 그 수고가 오늘날 삼성전자의 기틀을 놓은 초석이 되었습니다.
이렇듯 사진 속 어르신들은 모두 대한민국 현대사의 굵직한 장면들을 직접 빚어내신 분들이었습니다.
노인회관에서는 매주 월요일 오후, 연주 연습이 이어졌습니다. 두어 시간의 합주가 끝나면 함께 저녁을 나누며 술잔을 기울였고, 이야기가 반주처럼 흘렀습니다. 음악은 단순한 취미가 아니었습니다. 고난을 이기는 힘이었고, 세대를 잇는 다리였으며, 삶을 빛내는 마지막 꽃이었습니다.
광복 80주년을 맞은 2025년 8월, 오늘의 대한민국은 그분들의 헌신과 눈물 위에 세워졌습니다.
저는 3년여 동안 아코디언 2급 지도사 자격증을 살려 이분들과 함께할 수 있었고, 숱한 현대사의 증언을 직접 들을 수 있었습니다. 특히 이원복 님께서 남기신 공군가곡집 은 지금도 제 서재의 한켠에 소중히 꽂혀 있습니다.
또한 2017년, 이분들을 기려 가곡 〈바람아 구름아〉 를 작사·발표하여 헌정하였고, 테너 정의근(침례교회 지휘자)의 목소리로 세상에 울려 퍼졌습니다. 그날의 선율은 저에게 크나큰 영광이자 감사의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어르신들께서는 지금은 모두 하늘의 별자리로 옮기셨습니다.
저는 아직 그분들의 연세에도 이르지 못했지만, 아코디언을 오래 메고 앉아 있기에도 어깨가 무겁습니다. 그러나 이 한 장의 사진 앞에 설 때마다 마음 깊이 새깁니다.
나는 참으로 큰 복을 받은 사람이로구나. 그리고 그 감격을, 남은 생애 동안 평생의 노래로 간직하리라, 마음에 새깁니다. 끝.
* 사진 속 앞줄 오른쪽 끝 아코디언맨이 필자 입니다.
가곡 <바람아 구름아> 감상
https://youtu.be/EHau2i4Rmf8?si=lZDVuPQV-0s-bq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