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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저우]중국 [광저우여행] 유적지 월수공원 옆 손문 <중산기념당> 신해혁명 기념 월수공원 중산기념탑 중산장

작성자연경|작성시간20.01.13|조회수498 목록 댓글 0

<중산기념당>

손문, 중산은 정치 영역을 넘어 중국에서 단일성을 지향하는 하나의 문화 키워드가 된 거 같다. 모택동이 시대에 따라 평가가 달라진다면 중산은 중국사에 흔들리지 않는 위상을 확보하고 있다. 이것은 대만도 마찬가지다. 장개석의 평가가 가변적인 반면 손중산은 역시 대만에서도 역사적 위상이 굳건하다.

여기에 문화적 의미가 더해져 어디서나 손중산이 함께하고 무엇이든 그가 평가했으면 그 평가는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는 보증수표가 된다. 광저우화교발물관에서도 그의 존재는 굳건하였다.

손중산은 역사적 상수이지만 모택동과 장개석은 변수다. 장개석과 모택동의 정치적 선택 이전에 손중산이 활동했고, 청조를 붕괴시킨 신해혁명의 주역임에 그러할 것이다. 청조에 대한 반발은 공산당이나 공화정 대만이나 다 같기 때문이다.

손중산은 중국과 대만에서 그런 존재다. 대만 타이빼이에는 중산기념관이 있다. 이점은 싱가폴도 비슷하다. 싱가폴에도 손중산남양기념관이 있고, 중산공원이 있으며, 싱가폴 지도자 리콴유의 지지를 받고 있다. 미국에서도 흥중회를 만들어 활동하는 등 영국과 일본까지를 넘나들며 망명의 어려움 속에서 활동을 한 그의 행적으로 보아 화교가 있는 곳에서는 다 그러할 것이다.

마치 심하게는 손문을 평가하는 것이 중국과 관련된 역사적 정통성 경쟁을 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그 점에서는 단연 중국이 압도적 승자다. 손중산의 부인 송경령이 중국에 남아 공산당 수뇌부로 활동하다 사망하였고, 손중산의 주요 행적은 당연히 대부분 중국 국내에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정통성 경쟁은 지금도 계속되는 것 같다. 1911년 10월 이곳 광주에 신해혁명기념관을 또 건설한 것을 봐도 그렇다. 무한에 이미 같은 기념관이 있는데도 말이다. 아직 경쟁이 끝나지 않았는지, 아니면 다른 필요성이 있는지 의구심이 든다.

그 손중산이 남방 출신출신으로 이곳에서 많이 활동을 해서 남경을 비롯하여 남방 곳곳에 특히 그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그를 위한 기념물도 남방에 훨씬 많이 건립되었다. 남경에는 중산릉이 있고, 중산시에는 중산기념당이 있다.

남경의 중산릉은 어마어마한 규모여서 여행을 가면 그곳 방문을 위해 하루 일정을 비워야 할 것이다. 묘소보다 그 넓은 곳을 헤매다가 지쳤던 기억이 더 강하다. 근처에서 유난히 부채를 많이 팔았던 것은 지친 여행객을 위한 배려가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다. 황제의 릉 못지 않은 규모와 숭배라고 여겨졌다.

손문은 광동성 향산현 출인인데 이곳은 현재 중산시에 속한다. 손문은 그 中山을 호로 삼았는데, 중산시를 모르는 사람은 많아도 손문, 손중산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다. 중산은 도시명보다 손문의 호로 더 유명할 정도다. 도시 중산이 손중산 호 덕을 보는 셈이다.

거주지나 활동지를 호로 삼는 것은 상당히 보편적 관습이다. 우리의 경우도 이이, 율곡이 그렇고, 이황, 퇴계가 그렇다.

손문은 남방을 중심으로 혁명을 이루기 위한 많은 활동을 했는데 광주는 그중 중심 지역의 하나다. 신해혁명을 위한 많은 봉기가 광주에서 일어났다. 1895년 10월 26일 광주 봉기는 그 첫번째이다. 광주를 신해혁명의 도시라고 하는 것도 그런 이유다. 광주는 남월, 달마, 신해혁명의 도시라 한다.

따라서 광주에는 손문 관련 기념물이 많이 있다. 중산기념당이 도심에 있고 인근 월수공원에 기념탑이 있다. 외곽 장주도에 신해혁명기념관이 있다. 신해혁명 100주년을 맞아 설립한 것이다.


기념당 방문일 : 2019.12.19.
기념탑 방문일 : 2019.12.19.
입장료 : 10원, 60세 이상 5원

하지만 중산 기념 경쟁에서 특히 중국이 더 몰입하는 것은 현 정치적 상황과의 상관관계가 아닐까. 나아가 관 주도의 기념 정책으로 문화와 의식의 단일화마저 의도하는 것이 아닐까. 아무리 뛰어난 인물이고 역사적 공적이 크다 해도 전국적으로 거대규모로 숭상을 요구하는 것은 너무 인위적이어서 우리 정서와는 일정한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기념당 입구.

기념당 정면. 손중산이 직접 쓴 '천하위공' 현판이 걸려 있다.

기념당 측면

기념당은 팔각형 대형 건축물이다. 민국 초년에는 광동 도독, 광동도군서가 있던 자리다. 1921년에는 손중산이 광주에서 비상대총통으로 취임했을 당시에 총통부가 설치된 곳이다.

손중산 서거 후에 광주 인민들이 그의 혁명 공적을 기념하여 이곳에 기념당을 지었다. 광주가 혁명영웅의 도시임을 나타내기 위한 것도 건축 의도 중 하나다.

기념당은 모두 중국적 건축 특색을 십분 활용하여 지었다.

기념당 내부. 강당식으로 공연과 행사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밖에서 보는 것과 달리 내부는 원형, 천장은 돔형으로 이루어진 화려하고 아름다운 공간이다.

3238개의 좌석이 있는데 어느 자리에서도 시야가 가리워지지 않으며 소리가 메아리없이 선명하게 들려오도록 설계되었다. 설계는 유명 건축가 여언직 선생이 맡았다. 각종 음악과 무용, 서커스 등 대형 공연이 이루어진다.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어 있다.

손문의 유훈이다. 월수공원 내 기념탑에도 이 유훈이 새겨져 있다. 그가 혁명에 40년을 노력한 것은 중국의 자유와 평등을 위한 것이었다는 내용이다.

공연장 외부 복도가 중산 관련 전시장으로 되어 있다. 그가 입었던 옷과 모자, 지팡이 등이 전시되어 있다. 중산장은 손중산이 구미복색과 일본학생복 등을 조압적으로 참고하여 중국식 의상의 특색을 살려 설계해낸 옷이어서 중산장으로 불린다. 1929년 4월에는 국민정부 시기에 법정제복으로 공포하였고, 50년대 이후에는 국가 지도자부터 일반 국민들까지 모두 입는 정장이 되었다.

'중산장'은 전통의상을 대체한 근대 의상으로 서양식 양복에 대응하는 중국의 옷으로 지금도 공산당들이 즐겨 입는다. 손문은 물론이고 장개석도 모택동도 모두 즐겨 입었다.

요즘 중국에서 청나라 만주족의 치파오가 아니라 한족의 전통의상을 살려내야 한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TV 음악방송을 트니 한 가수가 치파오와 한족의상을 입은 것이 교체되는 뮤직비디오가 나오고 있었다.

혁명을 앞세운 손중산으로서는 청나라 복색을 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중국 한족이 청나라에서 벼슬을 하려면 반드시 청나라 복색을 해야 했다. 여자들은 전족을 하고 한족의상을 착용하는 것에 제한을 받지 않았지만 관료들은 엄격하게 만주족의 복색을 해야 했다. 한족은 그것을 치욕으로 여겼다. 그럼에도 과거 등용을 위해 얼마나 많은 한족이 인생을 낭비하는가가 <유림외사>에 잘 나와 있다.

손문의 중산장 착용은 이해가 된다. 생활에서부터의 혁명도 필요하지 않았겠는가.

손문 동상. 중산장을 입고 있다.

중산기념비 설명문과 기념비에 오르는 계단이다. 이 높은 계단을 올라야 기념비에 이른다. 높고 강한 것이 좋은 것인가, 하는 의문이 인다.

대만의 중정기념관, 장개석 기념관을 오르는 계단도 이만큼 된다. 올라가며 존경심이 커져갈지, 피로감이 커져갈지는 장담할 수 없다. 높은 곳에 우뚝한 것에 대한 존경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월수공원 안의 <중산기념비>. 1929년에 건립한 것이다.

기념비 아래로 조금 내려오면 손중산이 독서를 하고 업무를 봤다는 곳에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이곳은 손중산과 부인 송경령이 거주했던 곳이기도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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