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5.06.11 단종 폐위, 세조 즉위
단종 복위 운동 : http://blog.daum.net/gjkyemovie/11326272
사뉵신 처형 : http://blog.daum.net/gjkyemovie/11326438
조선 왕조 500년을 통틀어 27대의 왕이 만들어낸 역사 중에 슬픔으로 기억되는 이야기 중의 하나가 바로 삼촌에게 폐위된 단종에 관한 이야기다.
1455년 윤 6월 11일이 바로 단종이 즉위 3년 만에 왕위를 삼촌인 수양대군(세조)에게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난 날이다. 형식적인 자리에 불과했지만 생존 자체가 큰 의미를 띄는 것이었고, 이에 왕조의 전통을 중요시한 성삼문·박팽년을 비롯한 사육신 등이 상왕을 복위시키려는 움직임이 사전발각됐다.
이로 인해 단종은 1457년 6월 노산군으로 강봉당한 뒤 강원도 영월 땅 청령포로 유배됐다. 동, 남, 북 삼면이 강줄기로 막히고 뒤로는 벼랑이 솟은 천혜의 감옥에서 유배살이를 하다가 2개월 후 큰 홍수로 영월읍 내 객사 관풍헌으로 보내지기도 했다. 그리고 그 해 12월에는 사약을 받고 열여섯 해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단종의 기구한 운명은 그를 지극히 총애하던 할아버지 세종이 승하한 뒤 아버지 문종마저 즉위 2년 만인 1452년 2월 세상을 떠나면서 시작됐다. 불과 열두 살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그를 야심에 찬 숙부 수양대군이 측근들을 제거하며 목을 조여왔던 것이다.
/매일신문
단종[ 端宗 ]
1441(세종 23)∼1457(세조 3). 조선 제6대 왕. 재위 1452∼1455.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홍위(弘暐). 아버지는 문종이며, 어머니는 현덕왕후 권씨(顯德王后權氏)이다.


비는 여산부원군(礪山府元君) 송현수(宋玹壽)의 딸 정순왕후 송씨(定順王后宋氏)이다. 1448년(세종 30) 8세 때 의정부의 청으로 왕세손에 책봉되고, 1450년 문종이 즉위하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왕세자 책봉이 있던 해, 문종은 왕세자를 위해 처음으로 서연을 열고 사(師)·빈(賓)들과 상견례를 하였다. 이 때 문종은 좌빈객 이개(李塏)와 우사경 유성원(柳誠源)에게 왕세자의 지도를 간곡히 부탁하였다. 1452년 5월 문종이 재위 2년 만에 경복궁 천추전(千秋殿)에서 죽자 그 뒤를 이어 근정전(勤政殿)에서 즉위하였다.
즉위에 즈음해 나이가 어려 정치하는 일에 어두우니 모든 조처는 의정부와 육조가 서로 의논하여 시행할 것과, 승정원은 왕명 출납을 맡고 있으므로 신하들의 사사로운 일은 보고하지 말도록 교서를 내렸다.
문종의 고명을 받은 영의정 황보 인(皇甫仁), 좌의정 남지(南智), 우의정 김종서(金宗瑞) 등이 측근에서 보좌하였다. 또한 집현전 학사 출신인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하위지(河緯地)·신숙주(申叔舟)·이개·유성원 등은 지난날 집현전에서 세종으로부터 보호를 부탁받았으므로 측근에서 협찬하였다.
이 해 윤9월 ≪논어≫를 강론할 때, 왕이 ‘사무사(思無邪)’라는 문구의 뜻을 물었다. 이에 박팽년은 “생각에 간사함이 없고 마음이 바름을 이른 것이며, 마음이 바르게 되면 일마다 바르게 되는 것”이라 대답하였다. 10월 박팽년을 집현전부제학으로 삼았는데, 그의 학문이 정밀, 심오해 경연에서 강의할 때마다 깨달은 바가 많았으므로, 특별히 통정대부에 가자시켜 임명했던 것이다.
이 해 고려의 개국공신 배현경(裵玄慶)·홍유(洪儒)·복지겸(卜智謙)·신숭겸(申崇謙)과 유금필(庾黔弼)·서희(徐熙)·강감찬(姜邯贊)·윤관(尹瓘)·김부식(金富軾)·조충(趙沖)·김취려(金就礪)·김방경(金方慶)·안우(安祐)·김득배(金得培)·이방실(李芳實)·정몽주(鄭夢周) 등을 왕씨(王氏) 묘정(廟庭)에 종사(從祀)하도록 하였다.
한편, 양성지(梁誠之)에게 ≪조선도도 朝鮮都圖≫·≪팔도각도 八道各圖≫를 편찬하게 하였다. 1454년 정월에 송현수(宋玹壽)의 딸을 맞이 해 왕비로 삼았다. 이 달에 집현전직제학 양성지가 ≪황극치평도 皇極治平圖≫를 찬진하고, 3월 춘추관에서 ≪세종실록≫을 찬진하였다.
그 해 5월 좌승지 박팽년이 경연에서 왕에게 안일과 태만을 경계하도록 진언하였다. 왕이 대궐 안에서 자주 활쏘기를 구경하면서 경연을 여러 차례 정지시켰기 때문이었다.
8월에는 각 도의 관찰사에게 유시해 효자(孝子)·순손(順孫)·의부(義夫)·절부(節婦)와 공평, 청렴하고 현저히 공적이 있는 수령을 상세히 기록해 알리도록 했는데, 이는 그들을 발탁, 등용하여 권장하기 위해서였다.
보루각(報漏閣)을 수리하고 ≪고려사≫를 인쇄, 반포하였다. 12월 각 도 관찰사에게 유시해, 둔전(屯田) 설치 계획을 수립해 알리도록 하였다.
1453년 10월 숙부인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정권을 빼앗고자 권람(權擥)·한명회(韓明澮) 등 측근들의 계책에 따라 좌의정 김종서를 그의 집에서 죽이1고, 영의정 황보 인, 병조판서 조극관(趙克寬), 이조판서 민신(閔伸), 우찬성 이양(李穰) 등을 대궐로 불러와서 죽였다. 그들의 죄명은 숙부인 안평대군(安平大君)을 추대해 종사를 위태롭게 했다는 것이다.
일의 시비를 가리기도 전에 정권은 수양대군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요구에 따라 수양대군을 영의정으로 삼아 군국의 중대한 일을 모두 위임시켜 처리하게 하였다. 또, 당시 거사에 참가한 사람들을 정난공신(靖難功臣)으로 인정하여 모두 공신 칭호를 주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지칭한 난리의 장본인인 안평대군과 그 아들 우직(友直)을 조신들의 주청에 따라 강화 교동현(喬桐縣)에 이치(移置)했다가 안평대군은 사사되고 우직은 진도로 옮겨 안치되었다. 이 일련의 조처는 집권자인 수양대군의 주변 인물들에 의해 결정된 것으로서 왕의 의사는 무시되었다.
이 해 하위지를 좌사간, 성삼문을 우사간, 이개를 집의, 유응부를 평안도도절제사로 각각 임명하였다. 실권을 잡게 된 수양대군은 지방에도 자기 세력을 심기 위해 지방관을 교체시키던 중, 이징옥(李澄玉)의 난을 겪기도 하였다.
1455년 윤6월 수양대군이 조정의 여러 신하들과 의논하여 왕의 측근인 금성대군(錦城大君) 이하 여러 종친·궁인 및 신하들을 모두 죄인으로 몰아 각 지방에 유배시키기를 요구하자, 하는 수 없이 그대로 따랐다.
이러한 주변 정세에 더 이상 견디지 못한 단종은 마침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上王)이 되어 수강궁(壽康宮)으로 옮겨 살았다.
1456년(세조 2) 6월 상왕을 복위시키려는 사건이 일어났다. 복위 사건의 주동 인물은 지난날 집현전학사 출신인 몇몇 문신과 성승(成勝)과 유응부(兪應孚) 등 무신들이었다.
이들은 세종과 문종에게 특별한 은혜를 입었으며, 또 원손(元孫 : 端宗)을 보호해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받은 인물들이었다. 때문에 어린 상왕을 복위시키는 것이야말로, 곧 국가에 대한 충성이며 선비의 의무라 생각하였다.
단종은 이 사건이 있은 뒤 더욱 불안을 느끼고 있었는데, 조신 가운데 상왕도 이 사건에 관련되었으므로 서울에서 내쫓자는 주청이 있었다.
이에 1457년 6월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강원도 영월에 유배되었다. 영월에서 유폐 생활을 하는 동안, 매일같이 관풍매죽루(觀風梅竹樓)에 올라 시를 지어 울적한 회포를 달래기도 하였다.
이 해 9월 경상도 순흥에 유배되었던 노산군의 숙부 금성대군(錦城大君)이 다시 복위를 계획하다가 발각되었다. 이에 다시 노산군에서 서인으로 강봉되었다가 10월 마침내 죽음을 당하였다.
1681년(숙종 7)에 노산대군으로 추봉되고, 1698년 전 현감 신규(申奎)의 상소에 의해 복위가 결정되었다. 시호를 공의온문순정안장경순돈효대왕(恭懿溫文純定安莊景順敦孝大王)으로, 묘호를 단종으로 추증하고, 능호(陵號)를 장릉(莊陵)이라 하였다.
≪참고문헌≫ 世宗實錄
≪참고문헌≫ 文宗實錄
≪참고문헌≫ 端宗實錄
≪참고문헌≫ 成宗實錄
≪참고문헌≫ 仁宗實錄
≪참고문헌≫ 宣祖實錄
≪참고문헌≫ 肅宗實錄
≪참고문헌≫ 英祖實錄
≪참고문헌≫ 正祖實錄
≪참고문헌≫ 純祖實錄
≪참고문헌≫ 莊陵誌
≪참고문헌≫ 璿源系譜
세조[ 世祖 ]
1417(태종 17)∼1468(세조14). 조선 제7대 왕. 재위 1455∼1468.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유(0xC43D). 자는 수지(粹之). 세종의 둘째 아들이고 문종의 아우이며, 어머니는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沈氏)이다. 왕비는 정희왕후 윤씨(貞熹王后尹氏)이다.

타고난 자질이 영특하고, 명민(明敏)하여 학문도 잘했으며, 무예도 남보다 뛰어났다. 처음에 진평대군(晉平大君)에 봉해졌다가 1445년(세종 27)에 수양대군(首陽大君)으로 고쳐 봉해졌다.
대군으로 있을 때, 세종의 명령을 받들어 궁정 안에 불당을 설치하는 일에 적극 협력하였다. 또한 승려 신미(信眉)의 아우인 김수온 (金守溫)과 함께 불서(佛書)의 번역을 감장(監掌)하고 향악(鄕樂)의 악보(樂譜)도 감장, 정리하였다. 1452년(문종 2)에는 관습도감도제조 (慣習都監都提調)에 임명되어 국가의 실무를 맡아보았다.
1452년 5월에 문종이 죽고 어린 단종이 즉위하였다. 이에 7월부터 그는 심복인 권람(權擥)·한명회(韓明澮) 등과 함께 정국 전복의 음모를 진행시켜 이듬해 1453년(단종 1) 10월, 이른바 계유정난을 단행하였다.
하룻밤 사이에 폭력으로 정국을 전복시키고 군국(軍國)의 대권을 한 손에 쥔 그는 자기 심복을 요직에 배치, 국정을 마음대로 처리하였다.
조정 안에 있는 반대 세력을 제거하고 밖에 있던 함길도도절제사(咸吉道都節制使) 이징옥 (李澄玉)마저 주살, 내외의 반대 세력을 모두 제거하였다. 1455년 윤 6월 단종에게 강요하여 왕위를 수선(受禪)하였다.
즉위한 해 8월에 집현전직제학(集賢殿直提學) 양성지(梁誠之)에게 명해 우리 나라의 지리지(地理誌)와 지도를 찬수(撰修)하게 하였다. 11월에는 춘추관(春秋館)에서 ≪문종실록≫을 찬진하였다.
1456년(세조 2) 6월에 좌부승지 성삼문(成三問) 등 이른바 사육신(死六臣)이 주동이 되어 단종 복위를 계획했으나 일이 발각되자 이 사건에 관련된 여러 신하들을 모두 사형에 처하였다. 뒤따라 집현전을 폐지시키고 경연(經筵)을 정지시켰으며, 집현전에 장치(藏置)된 서적은 모두 예문관(藝文館)에 옮겨 관장하게 하였다.
이 해 6월에 상왕(上王 : 端宗)이 사육신의 모복사건(謀復事件)에 관련되었다는 이유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 강원도 영월에 유배시켰다. 뒤따라 경상도의 순흥에 유배된 노산군의 다섯째 숙부인 금성대군 유(錦城大君瑜)가 노산군 복위를 계획하다가 일이 발각되었다.
이에 신숙주(申叔舟)·정인지(鄭麟趾) 등 대신의 주청(奏請)에 따라 이 해 10월에 사사(賜死)하고 노산군도 관원을 시켜 죽이게 하였다.
1458년에 호패법(號牌法)을 다시 시행하여 국민의 직임(職任)과 호구(戶口)의 실태를 파악하고 도둑의 근절에 주력하였다. 이 해에 ≪국조보감 國朝寶鑑≫을 편수하였다. 즉 태조·태종·세종·문종 4대의 치법(治法)·정모(政謨)를 편집, 후왕의 법칙으로 삼으려는 의도에서였다. 그 뒤 ≪동국통감≫을 편찬하게 했는데 이는 전대(前代)의 역사를 조선왕조의 의지에 따라 재조명한 것이다.
세조는 정정이 안정됨에 따라 왕조정치의 기준이 될 법전의 편찬에 착수하였다. 최항(崔恒) 등에 명해 앞서 있었던 ≪경제육전 經濟六典≫을 정비, 왕조 일대(一代)의 전장(典章)인 ≪경국대전≫의 찬술을 시작하였다. 1460년에 호전(戶典)을 반행(頒行)하고 이듬해 1461년에는 형전(刑典)을 반행하였다.
세조는 무비(武備)에 더욱 유의, 1462년에 각 고을에 명해 병기(兵器)를 제조하게 하고, 1463년에는 제읍(諸邑)·제영(諸營)의 둔전(屯田)을 성적(成籍)시켰다. 1464년에는 제도(諸道)에 군적사(軍籍使)를 파견해 장정(壯丁)의 군적 누락을 조사하게 하였다.
1466년에 관제를 고쳐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는 영의정으로, 사간대부(司諫大夫)는 대사간으로,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는 관찰사로, 오위진무소(五衛鎭撫所)는 오위도총관으로 병마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는 병마절도사로 명칭을 간편하게 정하였다.
그리고 종래의 시직(時職 : 현직)·산직(散職) 관원에게 일률적으로 나누어주던 과전(科田)을 현직의 관원에게만 주는 직전제 (職田制)로 바꾸어 시행하였다.
세조는 왕권을 확립한 뒤, 지방의 수신(帥臣 : 병마절도사)에 그 지방 출신을 등용하는 것을 억제하고 중앙의 문신으로 이를 대체시켰다. 이에 반감을 품은 함길도 회령 출신 이시애(李施愛)가 1467년에 지방민을 선동, 길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세조는 이 반란을 무난히 평정하고 중앙집권 체제를 더욱 공고히 수립하였다.
세조는 민정에 힘을 기울여 공물 대납(貢物代納)의 금령(禁令)을 거듭 밝히고, 잠서(蠶書)를 우리말로 해석하고, 국민의 윤리교과서인 ≪오륜록 五倫錄≫을 찬수하게 하였다.
또 문화 사업으로서 ≪역학계몽도해 易學啓蒙圖解≫·≪주역구결 周易口訣≫·≪대명률강해 大明律講解≫·≪금강경언해 金剛經諺解≫·대장경(大藏經)의 인쇄와 태조·태종·세종·문종의 어제시문(御製詩文)을 편집, 발간하였다.
외국과의 관계로는 왜인(倭人)에게 물자를 주어 그들을 무마, 회유시키고, 야인(野人 : 女眞族)에게는 장수를 보내어 토벌, 응징하였다. 또 명나라의 요청에 따라 건주위(建州衛)의 이만주(李滿住)를 목베어 국위를 선양하기도 하였다.
세조는 신하들을 통솔함에 있어 자기에게 불손하는 신하는 가차없이 처단하고 자기에게 순종하는 신하는 너그럽게 대하였다. 즉, 양산군(楊山君) 양정(楊汀)이 정난(靖難)의 원훈(元勳)으로서 북변(北邊)의 진무(鎭撫)에 공로가 많았는데도 세조에게 퇴위를 희망하는 불손한 말을 한 이유로 참형에 처하였다.
하지만, 인산군(仁山君) 홍윤성(洪允成)은 세력을 믿고 방자하게 굴며 제 가신(家臣)을 놓아 사람을 살해하기까지 했는데도, 항상 순종한다는 이유로 주의만 시켰을 뿐 처벌하지 않았다.
정치 운영에 있어서 신하들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이른바 ‘하의상통(下意上通)’보다는, 자기의 소신만을 강행하는 ‘상명하달(上命下達)’식의 방법을 택하였다. 세조는 즉위 직후에 왕권 강화를 목적으로 의정부의 서사제(署事制)를 폐지하고 육조 직계제(直啓制)를 시행하였다.
이것은 어린 단종 때 정치의 권한이 의정부의 대신들에게 위임된 것을 육조 직계제로 대체, 왕 자신이 육조를 직접 지배하고자 한 것이다. 즉, 중신(重臣)의 권한을 줄이는 반면, 왕권의 강화를 기도하고자 한 목적에서였다.
1456년 6월 성삼문·박팽년 등 사육신의 단종복위 사건을 계기로 학문 연구의 전당인 집현전을 폐지하고, 정치 문제의 대화 토론장인 경연을 정폐시켰다.
때문에 국정의 건의 규제 기관인 대간의 기능이 약화된 반면, 왕명의 출납기관(出納機關)인 승정원의 기능이 강화되었다. 이 시기의 승정원은 육조 소관의 사무 외에도 국가의 모든 중대 사무의 출납도 관장하고 있었다.
승정원 직무의 중요성 때문에 직무를 맡은 관원은 반드시 국왕의 심복으로 임명하였다. 즉, 신숙주·한명회·박원형(朴元亨)·구치관(具致寬) 등 정난공신(靖難功臣)이 승정원에 봉직하면서 모든 국정에 참여하였다.
또, 세조는 국가의 모든 정무를 이들 중신 중심으로 운영했으므로 정부의 중요 관직은 자기의 심복인 대신급의 중신으로 겸무하게 하였다.
외교통인 신숙주는 겸예판(兼禮判)으로, 군사통(軍事通)인 한명회는 겸병판(兼兵判)으로, 재무통(財務通)인 조석문(曺錫文)은 겸호판(兼戶判)으로, 장기간 재직, 복무하게 하였다.
또, 중신들은 현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부원군(府院君)의 자격으로서 종전대로 조정의 정무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이, 국가의 모든 정무는 세조 자신이 직접 중신과 서로 의논, 처결하여 국왕의 좌우에서 왕명을 출납하는 승지의 임무는 한층 더 중요해졌다. 따라서 승정원 기구는 점차 강화되고 이러한 추세 하에서 1468년에 원상제(院相制)가 설치되었다.
원상은 왕명의 출납 기관인 승정원에 세조 자신이 지명한 삼중신(三重臣 : 신숙주·한명회·구치관)을 상시 출근시켜 왕세자와 함께 모든 국정을 상의, 결정하도록 한 것이었다. 이는 세조가 말년에 와서 다단한 정무의 처결에 체력의 한계를 느끼게 되고, 또 후사의 장래 문제도 부탁하려는 의도에서 설치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 까닭으로 세조는 1468년 9월에 병이 위급해지자, 여러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왕세자에게 전위(傳位)하고 그 이튿날에 죽었으니, 세조가 왕권의 안정에 얼마나 주의를 집중시켰는가를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세조 대의 정치는 실행 면에서 하의상통보다는 상명하달에 치중했기 때문에 정국 전체의 경색을 초래, 사회 도처에 특권 횡행의 비리적 현상이 많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결국, 이러한 세조의 무단강권 정치는 왕권 강화 면에서는 일단 긍정할 수도 있지만, 정치 발전 면에서는 세종·성종의 문치대화 정치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시호는 승천체도열문영무지덕융공성신명예흠숙인효대왕(承天體道烈文英武至德隆功聖神明睿欽肅仁孝大王)이고, 묘호는 세조(世祖)이다. 능호는 광릉(光陵)으로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면 부평리에 있다.
≪참고문헌≫ 世宗實錄
≪참고문헌≫ 文宗實錄
≪참고문헌≫ 端宗實錄
≪참고문헌≫ 世祖實錄
/네이트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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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군주와 치적군주라는 양면성을 가진 수양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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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유정난을 일으키고,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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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발로 끝난 단종 복위 운동, 그리고 사육신과 생육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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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대군의 단종 복위 운동은 자신과 단종을 죽음으로 몰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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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묘호를 받은 세조, 그 묘호에 담긴 뜻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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