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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韓國史

[스크랩] 이이 [율곡, 문성공 이이, 구도장원, 구도장원공]

작성자정암|작성시간12.07.14|조회수184 목록 댓글 0

 

이이 [율곡, 문성공 이이, 구도장원, 구도장원공]

 
이이(李珥, 1536년 음력 12월 26일 ~ 1584년 음력 1월 16일)는 조선시대의 문신, 성리학자이며 정치가, 사상가, 작가이다. 관직은 병조판서에 이르렀다. 성혼과 함께 기호 지역이 기반인 서인(西人)의 종주로 추앙된다.

아홉 차례의 과거에 급제해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16세 때 어머니 신사임당이 죽자 3년간 여묘살이를 한 후, 아버지가 계모 권씨를 들인 뒤 금강산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는데, 이 때문에 훗날 그가 죽은 후에까지도 머리 깎고 중이 되려다가 환속한 자 라고 동인과 남인이 공격하는 빌미가 되었다.

이준경이 죽기 직전 붕당의 폐에 관한 유차를 올리자 '죽음에 이르러 말이 악하다'고 공격하였으며 이후 이준경의 처벌까지 가기도 했다. 그러나 후일 당쟁이 현실화하자 스스로 크게 뉘우치고 동인, 서인 사이의 당쟁 조정을 평생 정치 이념으로 삼았다.

공납(貢納)의 폐단 시정책인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 실시를 주장하고, 병조판서로서 여진족 이탕개의 침입을 격퇴한 후, 10만 양병설을 주장해 임진왜란을 예언했다는 명성을 얻었다. 분당을 조정하지 못한 한을 남긴 채 죽었으며,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숙종 때 경신환국으로 서인들이 집권한 후 문묘에 종사된다.

본관은 덕수,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석담(石潭)·우재(愚齋), 아명은 현룡(見龍),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강평공(康平公) 이명신(李明晨)의 5대손이며, 통덕랑으로 사후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된 이원수(李元秀)와 정경부인 신사임당의 셋째 아들이었다.

생애
생애 초기
출생과 가계
율곡 이이는 1536년 강원도 강릉 죽헌동에 있는 외가인 오죽헌에서, 덕수 이씨 통덕랑 이원수와 신사임당의 아들로 태어났다. 오죽헌 별채에서 태어났는데, 이이가 태어나기 전 신사임당의 꿈에 흑룡이 하늘로 오르는 꿈을 꾸고 임신하고 출생하였기 때문에 그가 태어난 방은 몽룡실이라 일렀고, 아이 때의 이름은‘현룡(見龍)’이라 지었다가 뒤에 이(珥)로 바꾸었다. 이후 경기도 파주 본가로 와서 생활하였다 이이의 아버지 이원수는 사헌부 감찰이었으며, 어머니 신사임당은 덕이 매우 높은 인격자였을 뿐만 아니라, 절개가 굳고 시부모를 잘 섬긴다고 칭송을 받던 인물이었다.
더욱이 학문이 깊고 시와 글에도 능할 뿐만 아니라 그림에도 일가견이 있는 여인으로 이이는 어려서 어머니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그의 외할아버지 진사 신명화(申命和)는 기묘사화 때의 의리를 지켜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이런 교육환경 덕에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였다.

아버지 이원수는 사헌부 감찰, 수운 판관과 통덕랑을 지냈으며, 중종 때의 정승 이기, 이행의 5촌 조카였는데, 이기는 의정부영의정을, 이행은 의정부좌의정을 각각 지냈다.
벼슬이 낮았던 아버지 이원수는 승진하고자 일부러 당숙인 이기의 문하에 출입했으나 부인인 신사임당의 권고로 그만두었다. 이기의 집에 출입하다가 화를 당할 것이라고 경고했는데, 이기는 벼슬이 영의정까지 이르렀지만 권력을 남용한 탓에 명종 말엽 관작을 삭탈당했다.

어머니 신사임당 외에 이원수는 권씨라는 첩을 한명 더 두었다.

유소년기
이이는 3세 때에 이미 글을 깨우쳤을 뿐만 아니라, 어머니의 글과 그림을 흉내낼 정도로 놀라운 천재였다. 이이는 4세 때 중국의 역사책인 《사략》의 첫 권을 배웠는데 가르치는 스승보다도 더 토를 잘 달았다고 한다.

이이는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5세 때에 어머니 신사임당이 병으로 자리에 눕자, 사당에 홀로 들어가 매일 1시간 동안 기도를 올릴 정도로 어머니를 아끼는 마음이 컸다. 또 11세 때에는 아버지가 병으로 자리에 눕자, 이이는 칼 끝으로 자기의 팔을 찔러 흘러내리는 피를 아버지의 입에 넣어 드렸다고 한다. 그리고 사당에 들어가 아버지의 병을 낫게 해 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다.

청소년기
모친상과 방황
1548년, 이이는 13세 때 진사 초시에 장원 급제하여 시험관은 물론 부모와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이이의 학문은 날로 깊어가서 15세 때에는 이미 다른 사람에게서 더는 배울 것이 없을 정도였으며, 유교 서적뿐만 아니라, 그밖에 다른 여러 책까지도 통달하고 성리학까지 깊이 연구하였다.

1551년(명종 6) 16살이 되던 해 이이는 수운판관인 아버지가 평양으로 출장을 갈 때 따라가게 되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효성이 남달리 지극하였던 이이는 3년 동안 어머니의 무덤 옆에 묘막을 짓고 어머니의 명복을 빌었다. 또 아버지가 병으로 누웠을 때는, 사당에 들어가 아버지의 병을 낫게 해 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다.

승려 생활과 환속
묘막에서 독서에 열중하던 이이는 불교 서적을 읽고 유교와 색다른 학문에 흥미를 느껴 3년상이 끝난 1554년(명종 9) 금강산에 들어가 승려가 되어 불교를 연구하였다. 하지만 불교가 유교에 미치지 못함을 깨닫고 1년 만에 금강산에서 내려와 환속한다.

[1] 20세에 금강산에서 내려와 다시 성리학에 탐독하며 유교의 진리를 통해 현실 문제를 타개하겠다는 다짐을 설파하며 《자경문》(自警文)을 집필하였다.

학자와 관료 생활
이이는 이황을 선학으로 모시고 존경하기도 하였다. 1558년(명종 13) 23살의 이이는 당시 대학자인 58세의 퇴계 이황을 찾아가서 만났다. 이이는 그곳에서 이틀간 머물며 이황과 학문의 여러 가지 문제와 사상을 논하고 시를 짓고 토론하였고?, 이황은 그의 재능에 크게 감탄하였다.
비록 견해를 일치시키지 못했지만 그 후 이들은 가끔 편지를 서로 주고 받으며 학문에 관한 질의 응답을 나누곤 하였다. 이이가 질문을 하면 이황은 친절한 답변을 보냈고, 불교에서 과감히 벗어나 유교로 되돌아온 용기를 높이 평가하며 칭찬하는 글을 보내기도 했었다. 그해 겨울 별시(別試)에 장원하였는데, 이이는 13세 이후로 29세까지 생원시와 식년문과에 모두 장원으로 급제하였는데, 이로써 그는 과거에 총 9번 장원 급제하였다. 그리하여 그가 거리를 지나갈 때면 아이들까지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 지나간다고 우러러 보았다.

1564년(명종 19) 이이는 식년문과에 급제한 후 곧 호조좌랑이 되었다가 예조좌랑으로 전임하여 국가를 위해 일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이이는 왕실의 외척 윤원형이 승려 보우를 궁중에 끌어들여 비행을 서슴지 않자 상소를 올려 보우를 제주도로 귀양을 보내고 윤원형을 관직에서 몰아냈다.

1567년 명종이 승하하고 선조가 즉위하자, 외척 심통원이 등용되어 횡포를 일삼았다. 이때 이이는 다시 상소를 올려 심통원을 탄핵하였다.

1568년(선조 1) 천추사가 명나라로 갈 때 서장관으로 동행한 뒤, 1569년 홍문관교리를 지냈으며, 그해 음력 9월에는 송강 정철과 함께 《동호문답》(東湖問答)이라고 하는 책을 써서 선조에게 올렸다. 그 무렵에 가장 관심갖고 추진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시무’(時務)와 ‘무실’(務實)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급선무로 해결해야 하는 정치가 어떤 것인가를 명확히 밝혔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이는 계속 ‘시무’가 어떤 것인가를 계속하여 상소로도 올리기도 하였다.

1570년(선조 3) 해주 야두촌(海州野頭村)에 돌아가 학문의 터를 닦았다. 이듬해인 1571년 조정의 부름을 받고 청주목사로 임명되어 내려간 그는 서후향약을 정하고 백성들의 자치 생활을 권장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다음해 그는 학문 연구를 위하여 신변을 핑계로 사직하고 파주의 율곡촌으로 돌아와 학문에 힘썼다.

정치 활동
그러나 1573년(선조 6) 다시 선조의 부름을 받아 승정원의 동부승지가 되었다가 우부승지로 옮겨 《만언봉사》(萬言封事)라는 길고 긴 상소문을 올렸다. 이 상소문에서 이이는 조선의 정치와 사회 풍습 중에서 잘못된 것 7가지를 국가적 근심거리라고 지적하였고 세세하게 설명하여 개선책을 강구하라는 요구 사항을 열거하였다. 선조는 이이가 올린 상소문을 보고 감동하여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해 음력 3월 이이는 사간원 대사간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다시 고향인 파주 율곡촌으로 내려가 학문 연구에 전심하였다.

1574년(선조 7)에는 또 조정의 요구로 황해도 감사로 약 반년간 재직하였다. 그 후에도 자주 조정과 고향을 왕복하면서 대사간·대사헌·호조판서·대제학·이조판서·우찬성·병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42세 때인 1577년 황해도 해주의 석담으로 낙향하여, 은거하면서 글을 배우는 사람을 위해서 기초 서적인 격몽요결을 저술했다.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만 힘을 쓰다가 1580년 다시 선조의 부름을 받아 하는 수 없이 정계에 진출하였다. 이듬해 음력 9월 홍문관 부제학으로 있으면서 《성학집요》를 저술하였다. 5편으로 구성된 이이의 책을 받아본 선조는 “이 책은 참으로 필요한 책이다. 이건 부제학(율곡)의 말이 아니라 바로 성현의 말씀이다. 바른 정치에 절실하게 도움이 되겠지만, 나같이 불민한 임금으로 행하지 못할까 두려울 뿐이다.”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이는 평생 동안 대사간에 1만 9번이나 임명되었는데, 이것만 봐도 선조의 신임이 얼마나 두터웠는가를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선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은 이이는 1582년 이조판서와 형조판서를 거쳐 병조판서에 임명되어 여진족의 반란을 진압하였고, 대제학을 역임하고 우찬성에 올랐다. 이듬해 당쟁의 조정을 시도하였으나 오히려 탄핵을 받아 일시 퇴직되었다가 다시 이조판서가 되는 등 반대파의 탄핵에 시달리느라 제대로 경륜와 소신을 펼칠 만한 기회는 부족하였다.

개혁 방안
또 1583년(선조 16) 병조판서에 임명되고, 병조판서로 시작된 그해 음력 2월에는 국방 강화를 위해 《시무육조》를 계진하였는데 내용은 첫째 어진이를 등용하시오, 둘째 군대와 백성을 제대로 키우시오. 셋째 재용(財用)을 넉넉하게 마련하시오, 넷째 국경을 견고하게 지키시오, 다섯째 전쟁에 나갈 군마(軍馬)를 충분하게 길러야 합니다, 마지막 여섯 번째는 교화(敎化)를 밝히라는 것이었다.
같은 해 음력 4월 다시 ‘봉사’(封事)를 선조에게 올려 그동안 주장했던 폐정에 대한 개혁을 실시할 것을 다시 반복해서 요구하였다. 봉사에는 공안(貢案)의 개혁, 군적을 고치고 지방의 군현을 합병하여 불필요한 공직자 수를 줄이고, 관찰사(도지사)의 임기를 보장하여, 관찰사로 하여금 지방을 제대로 다스릴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하는 요구였고, 서얼 제도를 폐지하며 신분에 관계 없이 천민이나 노비 중에서도 능력 있는 사람은 평등하게 공직에 발탁하여 나랏일을 맡겨야 한다 등이었다.
그리고 ‘찬집청’(纂輯廳)이라는 관청을 신설하여 국가에서 각종 서적들의 편찬 사업을 주관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경제사(經濟司)’를 신설하여 국가의 경제 문제의 해결을 담당하는 전담 부서로 활용해야 한다고 방안을 내놓았다. 또한 선조에게 10만 양병설을 주장하여 동인의 반감을 사기도 하였다.[2] 이이가 10만 양병설을 주장하던 당시, 조선의 총 병력수는 장부상으로는 30만 명이 넘었으나, 실제 전투 가능한 병력 숫자는 1,000명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3] 1581년 대제학 재직 중 오랫동안 저술하던 《경연일기》의 완성을 보았다.

십만양병설에 관한 의혹
이이의 십만양병설에 관해 의혹을 제기하고 있는 학자도 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십만양병설은 당시 조선의 사회적, 경제적 능력으로 보았을 때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사안이었으며, 그러한 한계를 분명히 파악하고 있던 실무적 유학자인 이이로서는 오히려 십만양병설을 주장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고 한다.

실제로 이이가 올렸던 상소문과 각종 글을 모은 문집을 살펴보면 당대 다른 중신들도 즐겨 쓰던 '양병'이란 글자는 나올지언정 '십만양병'에 관련된 내용은 일절 나오지 않는다고 하며, 오히려 군축을 해야 한다는 상소문이 십만양병설 대신 자리잡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어 덧붙이기를, 십만양병설에 관련된 내용은 후대에 세워진, 율곡 이이를 기리는 비문에 처음으로 등장한다고 하며 이는 율곡 이이를 숭배하던 후대 조선 유학자들이 일종의 신성화를 노려 임의로 추가하였다고 한다.

말년
당색으로는 서인에 속했는데, 이 때문에 동인의 집중 탄핵을 받아 이이는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 경장(更張)하고 싶어하던 구국의 뜻을 풀지 못한 채 병을 얻어 사퇴하고 와병하였다.

병석에 누운 동안에도 동인의 공격은 계속되었고 49세를 일기로 새벽에 사망하였다. 사후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춘추관 관상감사에 추증(追贈)되었다. 이이가 1년간의 입산 경력이 있음을 놓고, 불교와 관계했다 하여 뒷날의 동인 당쟁파들은 온갖 트집을 잡아 비방을 하였다.

사후
장지는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에 장사되었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시호는 문성공(文成公)이다. 우계 성혼과 구봉 송익필과는 이웃에 사는 절친한 친구였는데, 1682년(숙종 8)에는 우계 성혼과 함께 문묘에 배향되었다. 다시 기사환국으로 출향되었다가 갑술환국으로 서인들이 집권한 후 다시 문묘에 종사되었다. 그가 죽은 후 황해도 백천(白川)에 문회서원(文會書院)이 건립되어 그를 제사하였으며, 강원도 강릉의 송담서원(松潭書院) 등 전국 20여 개 서원에 제향되었다.

이이의 사상
그는 보기 드문 천재로서 성격과 태도가 이황과는 달리 기상이 호탕하고 도량이 넓어 학문에서도 분석적인 해석보다는 근본 원리를 자유롭게 종합적으로 통찰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그의 사상은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로 대표되며, 그가 23세 때 지은 《천도책(天道策)》에 이미 그 바탕이 드러나 있다. 즉 율곡은 이황이 기(氣)와 이(理)는 서로 독립되어 있다는 데 이설(異說)을 제기하여 우주의 본체는 이기이원(理氣二元)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은 인정하나 이와 기는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분리되거나 선후(先後)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따라서 이와 기는 최초부터 동시에 존재하며 영원무궁하게 떨어질 수 없는 것이어서 이는 조리(條理), 즉 당연의 법칙으로 우주의 체(體)요 기는 그 조리를 구체화하는 활동이니 우주의 용(用)이라 주장하였다.

그리고 도덕적 가치에서도 인간심리의 근본이 이와 기의 두 가지 근원이 있지 않고 일원적이라 하여 퇴계의 사단칠정(四端七情)설을 배격하였다. 이러한 학설은 서경덕과 이황의 설을 절충하여 집대성한 것으로 그는 자기의 주장을 발전시키면서 이 주장이 주자의 뜻과 어긋나면 주자가 잘못 된 것이라고까지 하는 자신을 얻게 된 것이다. 이같이 그는 학문으로 유명할 뿐 아니라 경세가(經世家)로서도 혁혁한 업적을 남겼다.

그의 저작인 《동호문답(東湖問答)》, 《성학집요(聖學輯要)》,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 《시무육조소(時務六條疏)》 등은 모두 임금의 도리와 시무를 논한 명저로 그의 정치에 대한 태도는 유학자의 이상인 요순시대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이 밖에 정치적 부패의 타개와 백성의 구제에 대한 방책에 관해서는 한층 구체적인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만언봉사(萬言封事)》에서 율곡은 부패의 시정책 7개항을 제시하였는데 특히 그 중 십만양병설을 주장하여 임진왜란을 예언한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이 밖에도 대동법의 실시와 사창의 설치 등을 제의한 일은 조선 사회 정책에 획기적인 혁신을 가져오게 하였으며, 일반 민중의 계몽을 위하여 《서원향약(西原鄕約)》, 《해주향약(海州鄕藥)》, 《사창계약속(社倉契約束)》, 《동거계사(同居戒辭)》, 《학교모범(學敎模範)》, 《해주은병정사학규(海州隱屛精舍學規)》, 《약속(約束)》, 《문헌서원학규(文獻書院學規)》 등의 규례를 많이 만들었다.

평가
긍정적 평가
이항복은 이이의 신도비를 썼다.
이이의 제자인 김장생은 이이의 가장 큰 제자로 이이의 일대기인 ‘행장’을 지어 이이의 업적을 찬양하였다.
김장생은 이이를 추모한 율곡행장에서 “고려 말엽에 문충공 정몽주 선생이 처음으로 도학(道學)을 열어 명유들이 이어져 조선에 와서 번창한다.
그러나 학문이 높고 밝은 데에 이르고 재주가 경국제세의 역량을 감당할 만하고 의리로써 벼슬에 나아가고 물러났던 사람에는 조광조와 율곡 두 분이었다.
”라고 평가하고 율곡이야말로 만세토록 태평성대의 나라를 세우려 했으니 그 공로가 원대하다 말하겠다며 극찬하였다.
그는 제자들에게 동방지성인(東方之聖人)이라는 칭호를 받고 기호학파를 형성하여, 후세의 학계에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
그의 제자로는 사계 김장생, 중봉 조헌, 수몽 정엽, 묵재 이귀 등의 학자들이 율곡의 문하였다.
율곡이 대학자이면서 뛰어난 정치가로 평가 받을 수 있었던 점에는 몇가지 요인이 있다.

첫째, 신사임당을 어머니로 두었다는 점이다. 율곡은 어렸을 때 문학, 예술에 조예가 깊은 신사임당으로부터 수학했다. 조선 시대에는 여성은 한문 서적을 읽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어머니에게서 글을 배우고 학문을 익히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글을 읽고 쓰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고, 또 그것이 남들과는 독자적인 길을 갈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을 것이라 짐작된다.

둘째, 퇴계 이황이라는 선배가 있었다는 점이다. 율곡은 23세 때 도산서원으로 직접 퇴계를 방문했고, 그 뒤로도 편지를 주고받으며 학문과 개인적 신상에 관해 의견을 나눴다.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퇴계를 극구 만류했고, 퇴계가 죽고 나서는 만시(輓詩)를 지어 애도했다. 퇴계와 함께 조선 성리학의 두 줄기를 형성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후대 학자들이 학파와 붕당의 형성에 따라 퇴계와 율곡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강이 흐르는 것처럼 만들고, 그에 따라 학문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적대적인 관계처럼 되어버렸지만, 당대에는 서로를 인정한 좋은 선후배였다. 율곡은 그런 선배와의 편지 교류 등을 통해 학문적 연마를 할 수 있었고, 선배가 이루어놓은 성과를 디딤돌로 해서 자신의 학문적 세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

셋째, 선조 시대에 활동했다는 점이다. 율곡이 관직에 진출하자마자 문정왕후가 사망하고 외척인 윤원형이 탄핵을 받았다. 사화로 얼룩졌던 시대는 지나가고 사림이 중앙의 무대에 오르는 때가 된 것이다.
개혁 의지가 강하고 학문적 역량이 있었던 율곡이 사림파가 정계의 중심이 된 때에 관직에 들어갔다는 것은 행운이었다. 율곡보다 서른다섯 살 위였던 퇴계의 경우 사림이 위축되었던 때에 관계에 있었으므로 조정에 염증을 느끼고 고향으로 물러나는 쪽으로 생각을 굳혔던 것과는 대비된다. 물론 선조의 한계, 사림의 분열 등 이후 전개되는 상황이 율곡을 괴롭혔다는 점을 간과할 순 없다. '십만 양병설' 등의 건의에 대해 선조가 미온적으로 받아들였고, 또 붕당에 대해 중립적인 입장을 견지하여 조율하려고 했으나 동인과 서인 양쪽으로부터 공격을 받는 결과를 낳아 정치적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그렇더라도 율곡은 항상 중앙 정계의 한 중심에 서 있었다.

넷째, 학문적 지식이 있었던 친구들과 교류했다는 점이다. 평생의 친구인 성혼, 송익필, 정철 등 당대의 인사들이 주위에 있어 학문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개인적으로 부족한 것을 채워주고 격려해 주어 자신의 역량을 펼칠 수 있었다.
율곡은 몸이 좋지 않거나 뜻이 좌절될 때면 선대의 고향인 파주로 물러나 학문과 교육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 결과 학문과 교육 분야에서도 많은 성과를 거둘 수 있었고 제자도 많이 양성했다.

부정적 평가
이 부분은 토막글입니다.
서로 지식을 모아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당쟁의 조정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당쟁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시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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