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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5·16 군사정변 /위키백과

작성자정암|작성시간11.09.12|조회수209 목록 댓글 0
5·16 군사정변


오일륙, 5. 16 쿠데타, 516 군사 혁명, 516군사정변이란 명칭을 사용하기도 한다


5·16 군사정변(쿠데타)은 1961년 5월 16일 새벽 3시,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이던 소장 박정희를 비롯한 육군사관학교(이하 육사) 출신 일부 장교들이 사회의 혼란을 명분으로 제6군단 포병대, 해병대, 제1공수특전단 등을 동원해 제2공화국을 무너뜨리고 정권을 장악한 군사정변이다. 일부 보수진영에서는 '5·16 군사혁명'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도 한다.

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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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공화국의 정치력 부재와 사회적 문제, 그리고 군 내부 인사들의 불만이 촉발된 성격이 강하다. 정치권은 집권당인 민주당이 신·구파간의 갈등으로 분열되어 있었고 다양한 사회세력들은 각각의 정치적 요구를 주장하여 정국이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특히 혁신계 정치세력의 부상과 학생세력의 진출은 민족자주화운동, 통일촉진운동으로 전개되어 사회 분위기가 혼란해졌고, 군이 정권을 장악하기 쉬운 상태가 형성되었다.

한편 1958년부터 미국의 요청으로 추진된 감군(減軍)으로 인한 군내부의 불만으로 촉발되어 한국 전쟁 이후 한국사회에서의 사회적 지위 신장과 더불어 권력에 대한 욕구가 충만되어 있던 군부 내 군벌세력 중 육사 8기생을 중심으로 고급 장성의 부정 부패와 승진의 적체현상을 공격하는 현상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소장 박정희, 중령 김종필 등 육사 8기생들은 1960년 9월 군사정변을 계획하였다.

박정희가 군사정변을 결심했던 데에는 그가 부산 군수기지 사령관을 역임하던 시절 4·19 혁명이 계기가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박정희는 부산 군수기지 사령관을 역임하면서 군사정변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1950년대에 이미 이승만을 축출하려는 쿠테타 시도가 있었다고 한다.(그 때의 일로 군에서 배제되었고 전황이 급한 틈에 예비역의 신분으로 군에 복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1960년 5월 8일을 거사일로 정했지만, 4·19 혁명으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1960년 부산 군수기지 사령관 역임 후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을 역임하면서 김종필 중령을 비롯한 지지 세력을 규합하였다.

전개
1961년 5월 16일 새벽 3시,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인 소장 박정희와 육사 8기생 주도세력은 장교 250여 명 및 사병 3,500여 명과 함께 한강을 건너 서울의 주요기관을 점령하였다. 문재준 대령 제6군단 포병단 지휘관과 박치옥 대령 등은 곧이어 군사혁명위원회를 구성해 전권을 장악하고, 정변의 성공과 6개항의 ‘혁명공약’을 발표하였다. 군사정변은 초기에 미8군 사령관 C. B. 매그루더, 야전사령관 이한림 등의 반대로 잠시 난관에 부딪히지만 미국 정부의 신속한 지지 의사 표명, 장면 내각의 책임 자각형 총사퇴, 대통령 윤보선의 체념 등에 의하여 성공했다.

이즈음 장도영은 비밀통로를 이용해 제8군 미군사령부를 오가며 매그루더 장군과 이야기를 했다. 정변 다음날인 5월 17일, 매그루더는 박정희 소장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나 박정희 소장은 절대적으로 군을 물릴 수 없다는 의지를 보였다. 당시 중령이던 김형욱이 장경순 준장을 폭력하는 일이 있었다. 중령 등 고급 장교들 중 5명의 위원만 뽑으라 하는 이유 때문이었다.

5월 18일, 박정희는 유원식(兪原植)을 데리고 청와대로 찾아갔다. 그러나 윤보선대통령은 반란군을 진압하기보다, 올 것이 왔다며 군사정변에 체념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박정희 축출’을 다짐했던 미국은 베트남 파병 대가로 정권을 보장) 유엔군 사령관 매그루더는 군부를 인정하지 않고 진압명령서를 들고 대통령 윤보선을 찾아가 '사인만 하시면 쿠데타군을 진압하겠다'고 하였으나, 윤보선은 제 2의 미군정에 해당하는 내정간섭을 막기위해 체념적으로 군사정변을 받아들였다.

정변이 발생하자 당시 국무총리였던 장면은 카르멜 수도원에 피신하여 숨어 있다가 5월 18일에 나와 하야를 선언하였다. 5월 16일에 군사혁명위원회가 설치되면서 박정희가 부의장으로 취임하고 육군참모총장이던 장도영을 의장으로 추대하였다. 5월 20일에는 군사혁명위원회가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편되고 장도영을 헌법에는 없는 “내각수반”으로 임명한다.

결과
5·16 군사정변으로 인해 민주적으로 선출된 장면 내각은 붕괴되었고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의한 약 3년간의 군정통치가 이루어졌다. 군정기간 중 정변세력은 특수범죄(반혁명(정변), 반국가행위)처벌법, 정치활동정화법 등의 법적 조치를 통하여 정치적 반대세력과 군부 내의 반대파까지 제거하였다. 또한 핵심권력기구로서 중앙정보부를 설치하고 민주공화당을 창당해 대통령제 복귀 등을 골자로 하는 헌법개정을 하였다.

5·16 군사정변으로 집권한 의장 박정희는 조만간 원대복귀 하겠다던 애초의 혁명공약 제6조를 추후 번복하고 1963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현직 대통령이었던 윤보선을 물리치고 제5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이후, 박정희는 6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윤보선을 물리치고 승리했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이 부분의 본문은 국가재건최고회의입니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5·16 군사정변 이후 정변 주도세력이 5월 18일에 군사혁명위원회를 개편해 만든 통치기구이다. 입법·사법·행정 3권을 장악한 최고통치기구였으며 1963년 12월 17일 제3공화국이 수립되면서 해체되었다.

5월 20일에 첫 번째 군사내각을 발표하였으며 6월 6일에는 통치의 기반이 되는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을 제정, 공포하였다. 초대의장은 장도영이었으나 이른바 ‘텍사스 토벌작전’을 통해 7월 3일에 장도영이 축출되고 박정희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으로 추대되었다.

평가
긍정적 평가
일각에서는 5·16은 민주당 정권의 부정과 무능에 의해 일어난 점, 남북간 대치 상태에서의 북한의 위협 등을 들어 5·16군사혁명 이라고 평가하기도 하며 이에 대한 논쟁은 아직도 진행중이다.[1][2]

부정적 평가
대한민국은 일제식민지로부터 독립운동을 이끈 상해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았다. 이후 이승만대통령과 자유당정권은 자신의 세력을 위해 친일파를 처단못하고 등용하였던 반면 북한은 친일파를 철저히 처단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대한민국의 정통성이 심하게 훼손된것은 자명한 일이다. 여기 더해서 민주주의공화국의 기본인 국민주권이 이승만대통령과 자유당의 독재로 위기에 처해졌으나 4월 19일 전국의 시민이 독재에 항거하여 이승만의 자유당독재정권을 무너뜨렸다. 이러한 불의에 국민들이 저항하는 4.19정신은 대한민국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음을 상기시키고 민주주의 공화국이라는 정통성을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명확히 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중략"

이러한 4.19 민중의 혁명으로 수립된 국민의 정부가 국민의 꿈을 제대로 펼치지도 못하고 총을 든 일부군인들의 무력에 의해 강제로 물러나야한 것이 5.16군사정변으로 이는 명백한 군사쿠데타이다. 이는 헌법전문에도 나와있는 4.19정신을 심히 훼손한 사건으로 결코 이후 박정희의 공로가 있을지언정 그것으로 5.16쿠데타가 상쇄되는 기준도 모호하다. 결국 5.16군사쿠데타가 합리화 될 수 없는 이유이다. 실제로 당시 군사정권은 4.19혁명을 부정하는 딜레마에 빠졌고 결국 4.19를 의거로 한단계 낮춤과 동시에 5.16을 혁명으로 격상하여 4.19를 폄하하였고 이는 독재에 목숨을 버리거나 총상을 입은 국민들이 이룩한 민주주의를 폄하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5.16 군사정변이 1인 장기독재의 길을 열었으며, 권력 유지를 위해 연속적으로 군부대를 동원하면서 대한민국 사회 전체를 사실상의 병영국가 체제로 만든 시발점이라는 비판이 있다.[3]

기타
대통령 권한대행이자 내각 수반, 국무총리였던 허정(許政)은 'UN군 측의 저지 노력에도 불구하고 혁명은 성공했고, 장면 내각의 총사퇴와 함께 혁명정부가 정권을 정식으로 인수했다.[4]'고 주장했다.

허정에 의하면 UN군이 작전권을 장악하고 있는 한국에서 군사혁명이 성공할수 있을까 하는 안도감도 있었으나 군사혁명은 성공해 가고 있었다. 매그루더 UN군 사령관의 원대 복귀 호소도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4]

그 무렵 매그루더 사령관과 주한미국 대리대사가 허정을 찾아갔다. 그들의 말로는 군사혁명의 저지를 위해 UN군 병력을 동원할 허가를 받으려고 혁명이 일어난 직후 대통령 윤보선을 찾아갔다고 한다. 그때 장면 총리는 은신 중이어서 윤 대통령을 찾아갔던 것이다. 그러나 3시간 여에 걸쳐 병력 동원을 허가해주기를 간청했으나 윤 대통령은 끝내 허락해주지 않았다고 한다.[4] 그린 주한미국 대리대사는 '국헌 준수를 서약하고 대통령에 취임한 만큼, 지금 병력 동원을 허락하지 않는 것은 의무의 포기가 하닌가'하고 힐난까지 했다는 것이다.[4]

북한의 예측
북한은 5·16 군사정변 발생 이전부터 남한에서 군사정변이 발생할 것을 예측하고 상황을 예의 주시해 왔던 것으로 밝혀졌다. 북한주재 중국 대사관이 정변 당일 작성한 <남조선 군사정변 정황> 보고서에 따르면 북한의 김일 부수상이 대사관 측과 만나 김일은 김일성의 위임에 의해 5월 16일 오후 중국 측에 정변에 관한 정세를 설명하면서 "정변을 지지하는 성명 발표를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보고서는 또 정변이 박정희와 진보적인 군인들에 의해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며 "미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기도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90%"라고 추정했다.

북한은 특히 정변 발생 직후, 정변 주도세력을 진보세력으로 보고 당일 지지성명까지 준비했지만 이틀 뒤인 5월 18일 조선로동당 중앙상임위원회 회의에“극심한 반동에 의한 정변이며, 정변 세력은 반동적인 친미 군인들”이라고 평가했다.[5][6]

이로 인해 북한은 당초 추진했던 경제개발계획인 <인민경제 향상을 위한 1차 7개년 계획>의 시작을 미루는 결정을 내린다. 당시 북한 당국이 중국 외교관에게 전한 회의내용에는 “우리는 경계를 강화하고 국방 강화에 힘을 집중해야 한다. 올해부터 1963년까지 인민경제계획의 발전을 늦추고 국방과 방어요새 강화에 집중해야 한다”고 되어 있다. .[7]

 주석

  1. 정인봉 '5·16 재평가' 논란
  2. JP 5·16쿠데타 정당성 강력 주장
  3. 박정희 5.16 쿠데타 우리에게 무엇인가
  4. 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사, 1979) 289페이지
  5. 북한, 5·16군사정변 예측…당일 지지성명 준비했었다 동아일보 2009년 10월 16일
  6. 북한, 5·16 정변 '지지성명' 준비했었다...중국 외교문서 YTN 2009년 10월 16일
  7. ‘5·16 둘러싼 北의 잇단 오판’ 이 불량국가 불씨됐다 헤럴드경제 2009년 10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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