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학파
요약 이용후생학파라고도 한다. 전통적인 주자성리학의 화이관·명분론에서 벗어나 청조의 선진문명과 우수한 기술을 적극 수용하여 조선 후기 사회체제의 모순을 개혁하고자 했다. 대표적인 학자로 홍대용·박지원·이덕무·박제가 등이 있다. 북학이라는 말은 박제가의 〈북학의〉에서 비롯되었다.
홍대용은 북학의 토대가 되는 북경행을 제일 먼저 주장하여 북학파의 선구자로 간주된다. 북학파가 주장하는 학중국의 실체는 청의 문명을 받아들이고 서구문명에 대한 새로운 인식 속에서 상공업의 유통과 생산기구, 일반 기술 방면의 발전을 바탕으로 사회모순을 개혁하고 국가발전을 도모하려는 데 있었다. 박지원은〈호질〉·〈양반전〉 등을 써 국부를 낭비하는 양반층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다.
목차
펼치기이용후생학파라고도 한다.
전통적인 주자성리학의 화이관(華夷觀)·명분론에서 벗어나 청조의 선진문명과 우수한 기술을 적극 수용하여 조선 후기 사회체제의 모순을 개혁하고자 했다. 대표적인 학자들은 홍대용(洪大容)·박지원(朴趾源)·이덕무(李德懋)·박제가(朴齊家) 등이었다. 이들은 인맥적인 연결을 바탕으로 연행사(燕行使)를 수행하여, 청나라 건륭(乾隆) 연간의 선진문명을 직접 보고 배웠다. 홍대용은 북학의 토대가 되는 북경행(北京行)을 제일 먼저 주장하여 북학파의 선구자로 간주되며, 그의 북경기행기인 〈연기 燕記〉에 실린 청나라 문명에 대한 입장은 이후 북학파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북학이라는 말은 박제가의 〈북학의 北學議〉 자서(自序)에서 비롯되었는데, 박제가는 청조문명의 선진성을 인정하고 배우자는 뜻으로 북학을 주장했던 것이다. 북학파가 주장하는 '학중국'(學中國)의 실체는 청의 문명을 받아들이고 서구문명에 대한 새로운 인식 속에서 상공업의 유통과 생산기구, 일반 기술 방면의 발전을 바탕으로 사회모순을 개혁하고 국가발전을 도모하려는 데 있었다.
북학에 의한 이용후생의 논리는 생산과 생활에 있어 선진 과학기술의 도입을 통한 경제의 활성화, 국부(國富)의 증진과 이를 위한 사회제도의 개혁에 있었다.
이러한 입장은 당시 반청숭명(反淸崇明)이라는 전통적 화이관, 주자학적 의리관, 명분론에 입각한 북벌론과는 대립되는 것이었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 왕조 지배계층의 북벌론적인 사고방식이 지속됨에 따라 현실적으로 중국을 지배하고 있는 청나라의 문화를 선진문화로 인정하지 않으려 했고, 중국 문화의 수입을 거의 봉쇄하다시피 했다. 조선의 지배층은 선진문화 수입의 유일한 통로를 막아놓은 채 주자도통주의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문화적·사상적 폐쇄주의를 지켜나갔다.
북학파의 학중국이라는 대외인식은 이러한 폐쇄적 소중화의식 및 화이관에 대한 정면도전이었다. 북학론에 의한 숭청(崇淸)은 북벌론의 숭명(崇明)과 동일한 사대사상이 아니라, 중국 중심의 전통적인 세계관과 불평등한 화이관적 세계의식을 극복한 자립사상이었다. 이들에게 있어 종래의 화이관에 의한 수직적 세계관은 '화이일야'(華夷一也)라는 수평적 관계로 전화되었다. 이들은 중국의 선진 문물제도뿐 아니라 중국에서 들어온 서학(서유럽의 자연과학·서양사상·천주교 등을 의미)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갖고, 우수한 서유럽 자연과학을 도입하자고 주장함과 동시에 이를 배우고 연구하여 실용적인 단계에까지 이르도록 노력했다.
북학파는 서울의 도시적 분위기 속에서 상인·수공업자와의 접촉을 통해서 상공업 발전의 필요성을 통감하고, 유통경제의 확대와 생산의 기술적 혁신으로 국부증진을 도모하고자 했다.
즉 상업의 진흥이 국부의 요체라고 인식했다. 사회빈곤의 원인을 낮은 생산력에 따른 절대적 빈곤과 물자의 지역적 편재에 따른 상대적 빈곤의 2가지 측면으로 파악하면서, 유통경제의 지역적 편중성과 고립화를 극복하기 위해 전국적인 시장망 형성, 국내시장의 단일화를 강력히 주장했다. 이는 고립분산적인 자연경제의 낮은 생산력을 극복하는 한 방안이었으며, 전국적 시장권 형성을 위해 수레의 사용과 도로정비를 통해 육상유통망을 강화하고, 강상(江上)과 해상 유통망의 개선을 주장했다.
당시 상품화폐경제의 발달이 지주경제와 결합되면서 농민층의 분해를 촉진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들의 상공업진흥론은 특권층과 결탁된 서울의 육의전과 같은 어용상인들이나 개성상인을 위시한 도고상인, 대상인층의 독점적 이익을 반대하고 대중의 소비생활에 직결된 일반 소경영·소생산자들의 자유로운 활동과 성장을 옹호·대변했으며, 반도고론(反都賈論) 및 통공발매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또한 국내 시장권의 통일과 더불어 중국 및 연안 제국과의 해로교역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박제가는 '수로통상'(水路通商)을 통하여 중국과 교역함으로써 조선의 면(綿)·저(苧)·마포(麻布)·해산물 등과 중국의 면단(綿緞)·모직물·약재·무기 등을 교환할 수 있는 경제적 이득뿐 아니라, 중국의 여러 기용제도(器用制度)를 배울 수 있으며 천하의 도서를 수입하여 지견(知見)을 넓혀 속된 선비의 굳어 있는 식견을 타파할 수 있다고 했다.
이러한 북학파의 상공업 진흥론은 직업의 귀천관계를 긍정하고 상업활동을 천시하는 사회적 인식과 신분제도에 대한 비판으로 연결되었다.
이들은 이용후생을 위한 상공업진흥론의 관점에서 중본억말(重本抑末)의 본말사상을 비판하여 본(本)=농(農)과 말(末)=상(商)과의 수평적 상호 보완관계를 강조하고, 사민개로(四民皆勞)의 원칙에 입각하여 양반제도의 허구성 및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는 지배와 피지배의 수직적 신분관계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결과 국부를 낭비하는 양반층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문학작품(박지원의 〈호질 虎叱〉·〈양반전 兩班傳〉)에 반영되었다.
그들은 말리(末利)로서의 상업을 사농공과 동일한 수준에 올려놓으면서, 사족이 상업에 종사할 것을 주장했다. 또한 사민개로의 원칙에 따라 신분을 막론하고 모든 장정은 노동해야 하며, 양반이라도 노동하지 않고 놀고 먹는 것은 용납하지 않았다.
그들은 상공업뿐만 아니라 농업에도 깊은 관심을 표명했다. 이들의 농업개혁론은 상공업 진흥과 더불어 대토지소유제를 개혁하는 동시에, 농업경영을 개선하고 농업생산을 유통경제에 긴밀히 연결시켜 상업적 농업으로 전환함으로써 농업경제의 안정과 농업생산력 발전을 도모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박제가는 농기구·비료·파종·채종기술·영농기술·구전·농우·농지개량·구황·잠사·목축 등 농업 전분야에 걸친 개선을 목적으로 하고 중국의 예를 들어 우리나라의 낙후를 비교하면서 농업기술의 도입을 주장했다. 박지원은 〈과농소초 課農少抄〉에서 한전론(限田論)을 전개하여 대토지소유제를 비판하고, 농구개량, 수법개량, 수차의 사용 등을 통해 농업생산력 확대를 도모하고자 했다.
이러한 상공업 발전과 상품유통의 원활화, 기술혁신과 생산의 촉진, 해외통상의 장려 등을 통해 국부(國富)를 증대하고자 한 해외통상론·기술도입론은 19세기 중·후반 개화파의 개항통상론의 사상적 토대가 되었다.
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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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학(北學)은 조선 후기 실학의 한 유파이다. 중상학파라고도 한다. 당시 실학자들 가운데 한양의 도시 분위기 속에서 자란 일파가 있었다. 이들은 한양의 상공업 발전과 직간접적 관계를 가지고 있어 주로 상품의 유통이나 생산수단의 발전을 주장했다. 이들의 사상은 이용후생(利用厚生)으로 요약된다.
배경
호란을 경험한 한양 분위기는 원래 반청숭명(反淸崇明)의 북벌운동이 주류였고, 조선이야말로 중화문화의 유일한 계승자라는 소중화주의 및 주자성리학이 사상적으로 뒷받침하고 있었다. 물론 그들도 명나라를 높이는 데만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오랑캐인 청나라를 끝까지 정통으로 인정치 않고 삼전도의 굴욕에 대한 열등감을 떨치는 한편, 조선의 문화적 우위성을 확인하려는 자존심의 발로였다.
그 예로 1703년(숙종 29년) 우암 송시열의 유지(遺志)에 따라 만동묘(萬東廟)[1]를 세워 명나라 신종(神宗)[2]과 의종(毅宗)[3]을 제사지냈고, 2년 후인 1705년에는 청나라와의 외교적 마찰을 무릅쓰고 창덕궁 내에 대보단(大報壇)을 세워 망한 명황제들에 대한 제사를 아예 공식화했다. 그리고 정조~순조 때 《존주휘편(尊周彙編)》을 편찬해 왜란·호란 이후의 숭명반청운동을 총정리한 것도 그런 목적이었다. 아예 1728년인 영조 때는 이인좌의 난을 진압한 공신들에게 내린 녹권에 의종의 휘호(徽號)와 같은 분[4]자가 들어갔다고 같은 뜻의 양[5]자로 바꿔넣고 당시 모든 교서들까지 글자를 고치도록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18세기 중엽 이후 여당인 노론의 일각에서 시대의 변화를 능동적으로 수용하려는 새로운 학풍이 일어났다. 이 학풍은 청나라에서 배우자는 내용을 담고 있어 흔히 ‘북학(北學)’이라고 한다. 물론 이들 역시 어디까지나 노론으로 주자성리학의 프레임 위에서의 새 문화 수용을 말하는 거였다. 이때의 중국은 강희제(康熙, 1662~1772)~건륭제(乾隆, 1736~1795)의 최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던 시기로, 중국 역대 문화의 정수가 총정리되고 산업 성장과 서양 과학 기술 문명 도입이 이뤄지던 시기였다.
따라서 중국의 주인인 여진족은 여전히 멸시하되 그 안에 담긴 중국문화와 산업, 기술은 수용한다는 유연한 자세가 바로 북학(北學)이다. 정경 분리라 할 수 있는 이런 사상적 기반은 후일, 서양의 기술을 받아들이되 정신과 사상은 동양으로 것으로 해 야만적인 서양인을 감화시키자는 동도서기론의 논리에까지 영향을 주게 된다. 이러한 북학의 대표자는 홍대용(洪大容)·박지원(朴趾源)·박제가(朴齊家)·이덕무(李德懋) 등이다.
학문의 대상
북학파는 청나라의 전성기 모습에만 감화된 것은 아니었다. 이미 상업 도시로 변모한 18세기 후반의 서울과 탕평책으로 대표되는 영조와 정조의 인재 등용도 그들에게 새로운 자극을 줬다. 그들은 17세기 초 침류대학사(초기 실학자를 일컬음)들이 추구한 절충적 학풍과 17세기 후반 서울 남인들(야당)이 제기한 고학(古學) 및 농촌경제에 대한 관심도 적극 수용하였다.
이제 한양의 일부 노론은 상공업발전의 모토 위에서 농촌문제 해결도 아울러 고려하면서, 청나라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해 부국강병과 이용후생(利用厚生)을 높이자는‘북학’으로 선회한 것이다. 북학의 철학적 기초는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에 있었다. 사람과 만물의 본성이 같다고 보는 이 주장은 만물에 대한 관심을 높여 적극적으로 이용후생을 달성하도록 했다.
북학이 체계화된 것은 박제가의 《북학의(北學議)》라는 저술이었지만 박제가·박지원·홍대용·이덕무 등이 남긴 방대한 저작들은 서로 그 뜻이 동조화돼 새 경향을 이루고 있었다. 북학파의 공통점은 청나라 사신단에 섞여 북경에 다녀온 인물들로 그들의 중국 기행문이 발단이 된다. 그들은 스스로 보고 들은 청문화의 우수성을 통해 조선의 현실을 개혁하기 위한 우리 내부의 인식 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들의 문제인식 속에는 당시의 양반사회의 모순에 대한 것도 깔려있어 그에 대한 통렬한 풍자와 비판 역시 엿보이며, 농업이나 상공업 등 육체적 노동에 대한 천시라는 전통적 사농공상의 틀을 벗어나 생산이란 행위 자체를 높이 평가하였다. 북학파들은 과거 경세치용학파들과 이용후생이란 점에서 공통점을 갖지만, 경세치용학파들이 송대의 문화 경제적 융성을 이상향으로 삼는 복고적이었던 것과 달리, 당시 청나라의 상업과 수공업 발전상을 도입하고자 하는 전진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