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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韓國史

인조와 병자호란과 남한산성에 고립된 인조

작성자정암|작성시간16.06.29|조회수1,102 목록 댓글 0

인조와 병자호란과 남한산성에 고립된 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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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화정에서 인조반정으로 어좌를 차지한 능양군(김재원)은 붙들려온 광해군(차승원)에게 기세등등한 표정으로 "내 앞에 무릎을 꿇으라. 네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던 내가 이 자리를 차지했다"며 으스댑니다.

인조와 병자호란..남한산성에 고립된 인조

하지만 광해군은 딱하다는 표정으로 "너는 이것을 승리라고 하는구나. 그래, 나는 너한테 패했다. 나의 가장 큰 잘못은 바로 너같이 무도한 자에게 어좌를 내준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 러자 능양군은 "입을 다물라! 네가 아직 임금인 줄 아느냐! 이 나라의 주인은 네가 아니라 나란 말이다! 네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던 바로 이 능양이 너를 이긴 거라구!"라고 소리칩니다. 그 동안 품어왔던 광해군에 대한 적개심도 컸던데다 별볼일없는 인간 취급 당했던 데 대한 분노가 함께 터져나옵니다.

그러나 광해군은 슬픔 어린 표정으로 "너는 결코 아직 승리하지 못했다. 너는 언젠가 이 땅에 가장 뼈아픈 패배를 가져올 것이며, 이 나라를 가장 깊은 어둠으로 몰아넣을 것이다. 그날 너는 또한 네놈들은 오늘 이 순간보다 더한 고통과 모멸을 얻게 될 것이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다만 오직 이 하나만을 기억해라. 오늘 내가 네 앞에 기꺼이 무릎을 꿇고 어좌를 내어줄 것이지만, 너는 결코 같은 일을 겪는 군주가 되지 마라. 오늘의 나를 기억하고 장차 네가 누구의 앞에서도 무릎을 꿇지 않도록, 이 나라 백성 모두가 그리 될 수 있도록 깨어 있어라"고 말하고 능양군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후금이 세력을 키워가고 있는 것을 알고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펼쳐왔던 광해군은 인조와 서인들이 택한 친명배금 정책으로 장차 조선에 어떤 일이 벌어지리라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던 듯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아무런 대책도 없이 그저 오랑캐라며 후금을 업신여겼던 인조와 조선 조정의 경거망동은 후금의 심기를 건드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일으키게 함으로써 백성들의 삶까지 말할 수 없이 힘겹게 만듭니다. 이로써 인조는 청태종 홍타이지 앞에서 삼배구고두례(三拜九敲頭禮)를 하는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임금이 됩니다. 삼배구고두례란 세 번 절하고, 한 번 절할 때마다 세 번 머리를 조아리는 것을 아홉 번 하는 것을 말합니다.

정묘호란 후 10년이 채 안 돼 발발한 병자호란과 무려 47일간 남한산성에 고립돼 있다가 청태종 앞에 끌려나와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려야 했던 인조의 무능함이 나라와 백성을 어떤 지경에 이르게 했는지 EBS [역사저널 그날]을 바탕으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인조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신 분은 다음 포스팅을 참조하시면 됩니다.

병자년에 일어나 정축년에 끝났기 때문에 병정노란((丙丁虜亂)이라 부르기도 하는 병자호란은 1636년(인조 14년) 12월 청군이 두번째로 조선을 정벌하면서 시작되었다. 1627년의 정묘호란으로 후금과 형제의 맹약을 맺은 조선은 중강과 회령의 무역을 통해 많은 물자를 공급해 주었다. 하지만 후금은 지속적으로 식량과 병선을 요구하는 등 조선에 대한 압박을 강화했다. 또 모문룡 일당의 준동을 막는다는 이유로 압록강을 건너와 약탈을 자행해 백성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후금이 행패에 분개한 조선에서는 화의를 꺾고 군사를 일으켜 공격하자는 여론이 들끓었다. 하지만 당시 후금은 만주를 석권하고 만리장성 너머 북경에까지 공격하는 등 막강한 무력을 자랑하고 있었으므로 조선의 힘으로는 당해낼 수 없었다.

1636년 12월 9일 청나라 군대가 다시 압록강을 건너왔다. 무려 12만 8천여 대군이었다. 조선을 향해 질풍처럼 달려온 그들은 불과 닷새 만에 도성을 점령했다.

인조는 가까스로 수구문을 통해 한양을 탈출해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지만 순식간에 쫓아온 청군에 의해 완전히 포위돼 버렸다. 한 나라의 왕이 험준한 산성에 고립된 것이다.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들어간 날은 음력 12월 15일로 양력 1월 중순경, 가장 추운 때였다.

여기엔 도원수 김자점의 결정적 실책이 있었다. 평안도 지역의 방어를 위해 나가 있던 김자점은 적이 나타난 것을 알리는 비상봉화가 올랐지만 사흘 후에야 보고를 했고, 이때는 청군이 압록강을 건너 무인지경의 평안도 지역을 통과하고 있을 때였던 것이다. 초기 대응에 굉장히 미흡했던 셈이다. 도원수라면 당대 지휘관 중 최고 직책의 장수인데 그런 어이없는 대처를 한 것은 엄청난 오판을 한 탓이었다. 12월이라면 한겨울이니, 이 추운 겨울에 군대를 이동할 리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이미 10년 전 청은 1627년 1월에 쳐들어와 정묘호란을 일으킨 바 있었다. 한 지휘관의 근거없는 안이한 판단이 한 나라를 전쟁 속으로 몰아넣은 셈이다.

후금이 병자호란을 일으킨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1636년 2월 16일, 중국 대륙의 패권을 노리며 힘을 키워가던 후금은 인조의 정비인 인열왕후를 조문하기 위해 사절단을 보냈다.

그들의 또 다른 목적은 홍타이지의 황제 추대를 알리고 조선의 동의를 얻는 것이었다. 하지만 조선은 명나라와의 대의를 내세우며 그들이 가져온 국서를 받지 않았다.

게다가 빈전(왕 또는 왕비의 관을 두는 전각)와 좁다는 이유로 금천교 위에 친 장막에서 재를 행하게 했다. 그런데 이마저도 바람이 불어 날아가버렸고, 마침 장막 뒤에는 조선 군사들이 있었다. 이는 조선 조정에서 잠복시킨 것으로 오해하기에 충분한 상황이었다. 임시빈소 뒤에 군사를 배치한 것은 궁 안인데다 청나라 사신단의 규모가 상당히 컸던 탓에 경호 차원에서 행한 일이었는데, 푸대접을 받은 후금의 조문사절단은 혹시 자신들을 죽이려 했던 게 아닌가 생각한 것이다. 결국 그들은 화를 내며 궁을 박차고 나가 자기 나라로 돌아갔는데, 이때 아이들이 그들의 뒤를 따라가며 욕설을 퍼붓고 돌을 던졌다. 당시 후금은 무시할 나라가 아니었는데 조선은 푸대접을 한 것이다.

청나라는 시조 누르하치가 17세기 초에 설립한 군사/행정조직인 팔기군(八旗軍)을 만들어 확장시키고 있었다. 강력한 유목민족인 몽골, 중원을 장악했던 한족까지도 자신들의 팔기군과 똑같은 조직으로 묶고 있었다. 이처럼 동북아시아의 패권국가로 폭발적인 성장을 해나가고 있던 청의 실체를 조선 조정은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몽골족에게 칭기스칸의 후예이자 중국대륙의 지배자를 상징하는 옥새를 받은 홍타이지를 몰라본 것이다.

아무튼 청의 침입에 기겁을 한 인조는 보통 왕이 드나드는 큰 문도 아닌 수구문, 즉 사소문 중 하나인 광희문을 통해 도망쳤다. 수구문이란 물이 나가는 문이지만 보통은 시체들이 나가는 시구문(屍口門)이었다. 이괄의 난 때도 평안병사이자 부원수인 이괄이 주동이 되어 일으킨 반란이 실패하자 이괄은 이 광희문을 통해 탈출한 바 있었다.

이 문을 통해 왕이 탈출한 것은 상당한 치욕이었다. 원래 목적지는 전쟁 준비가 되어 있는 강화도로 피신하려 했던 거였지만 청군이 너무 빨리 쳐들어오는 바람에 갈 길이 막혀 차선책으로 남한산성으로 피신하게 된 것이었다. 곧 강화도로 가려고 했지만, 인조실록에 따르면 "산길이 얼어 왕이 말에서 내려 걸었으나 끝내 강화도로 갈 수 없음을 깨닫고 산성으로 되돌아왔다. 임금이 발에 동상이 걸려 걸을 수가 없어서 털방석으로 받들고 남문에 도착하니 비로소 가마가 왔다”고 한다. 게다가 청군은 이미 강화도로 가는 길을 봉쇄해 놓은 상태였다.

홍타이지가 병자호란을 일으킨 이유는 도망쳐 온 한인을 명에 넘긴 것, 정묘년에 맹약을 체결한 이후에도 누차 그것을 어긴 것, 인조가 평안감사 홍명구에게 유시문을 보내 자신들과의 관계를 단절하겠다고 한 것 등이었다.

여기에다 홍타이지 즉위식에서도 또 하나의 사건이 벌어진다. 즉위식에 간 조선 사신은 나덕헌과 이확이었다. 그런데 홍타이지 황제 즉위를 축하하기 위해 모인 외국 사절들이 단 아래에서 엎드려 절을 해야 할 때 이 두 사람은 고개를 들고 꼿꼿이 서 있었다고 한다. 요즘으로 치면 다른 나라 대통령 취임식에 간 외국 사절이 대놓고 딴 짓을 한 셈이다.

이에 분노한 홍타이지는 죽지 않을 만큼만 때려서 돌려보내라고 명령한다. 그리고 앞으로 이런 식으로 자꾸 외교적인 결례를 하면 하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국서를 두 사람 편에 들려 보낸다. 하지만 두 사람은 돌아오면서 홍타이지가 보낸 국서를 몰래 버린다.

한편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가 연이은 전쟁으로 피폐해진 나라를 돌보는 것보다 더욱 관심을 쏟았던 일은 바로 아버지 정원군을 원종으로 추숭하는 일이었다. 추숭이란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이에게 임금의 칭호를 주는 것을 말하는데, 인조는 즉위 직후부터 이 일을 밀어붙였다. 혼란스러운 정국이었던 만큼 강한 왕군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왕의 아들이라는 정통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정원군 추숭 논란으로 조정 신하들은 팽팽하게 대립했지만, 1635년 마침내 인조는 10여 년의 논쟁 끝에 명나라의 승인을 얻고 원종의 신주를 종묘에 모신다.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불과 1년 전의 일이었다.

10여 년에 걸친 추숭 논쟁으로 인조 5년 정묘호란이 일어나던 해에는 백성들은 굶어죽어서 시신이 널려 있을 정도였고 인조 6년에는 돌림병이 돌아 많은 백성들이 죽어나갔으며 인조 7년에는 용골대가 쳐들어와 약탈을 해가는 바람에 백성들의 원성이 심했고 심지어 공신들이 백성의 재산을 빼앗아가기도 했다.

인조 9년에는 지진이 일어났는데도 추숭 논쟁을 하고 있었다. 인재에 천재까지 겹쳐 백성들이 그야말로 어육이 되고 있는데도 인조는 정말 민생에 그렇게 관심이 없었던 왕이었을까? 인조실록에는 "인조도 요순의 마음은 갖고 있는데 그것을 실천으로 옮기는 행동은 하지 않는다"고 기록돼 있다고 한다.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은 있으나 돌보기 위한 구체적인 대안이나 정책이 없는 것이 문제였다.

실제로 인조는 12월 17일 하루 동안 네 번을 통곡한 적이 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인조가 보여주는 행동은 달랐다. 정묘호란 후 늘어난 명/금의 조공 또한 백성들을 괴롭히는 일이었다. 특히 당시 기울어가던 명나라는 조선에 와서 한재산 챙겨가려고 혈안이 돼 있었다. 그로 인해 파산한 한 상인이 명나라 사신이 가는 길을 막고 길가에서 답답한 심정을 호소한 일이 있는데, 인조는 그 백성을 가엾이 여기기보다는 명나라 사신에 대한 결례라며 주동한 자를 옥에 가두고 평시성의 관원을 잡아다 추고하라고 명했던 것이다.

이런 일들이 계속되자 참다못한 가평군수 유백증은 인조에게 직설적인 상소를 올린다. 인조실록에 따르면, "국가의 흥망은 전적으로 군덕의 잘잘못에 있다. 인심이 흉흉하고, 뇌물 꾸러니가 조정에 횡행하고 있다. 국가의 위험이 마치 끊어지려는 실끈과 같은데, 광해가 죽기 전에 종사가 먼저 망해 천고의 웃음거리가 될까 두렵다"는 내용으로, 왕을 바꾼 것이 잘한 짓인지 모르겠다는 토로였다. 아직 광해군이 살아 있을 때였다.

남한산성 고립 2일째, 왕의 아우와 대신을 인질로 보내라는 청의 요구에 조선은 가짜 아우와 가짜 대신을 보낸다. 인조의 종친인 능봉수를 능봉군으로 품계를 올려 가짜 아우를 만들고 형조판서 심집을 정승급 대신으로 해서 보낸 것이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심집은 청나라 진영에 가서 자신은 진짜 대신이 아니며 능봉군도 가짜 아우라고 밝힌다. 이에 분노한 청은 조건을 강화시켜 이제 왕의 아우나 대신이 아니라 세자를 보내라고 요구한다.

인조는 나름대로 남한산성을 지키려는 의사를 보였고, 두어 번의 소규모전에서는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또 삼남지방의 근왕병(임금이나 왕실을 위해 싸우는 군인)들이 모여서 청군이 남한산성의 공략에 매진하고 있을 때 후방을 교란시킨다면 큰 타격을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김자점 같은 경우 청나라의 매복기습을 받아 5천여 병력을 잃고 도주하고 만다.

12월 28일 남한산성 고립 14일일째, 점괘를 본 결과 29일은 화친을 해도 좋고 공격을 해도 좋은 길일이라는 말에 조선은 희망을 갖는다. 그리고 한강변으로 이어지는 가파른 북문에서 청군에게 포로로 잡혀가는 백성들을 본 김류는 강제로 병사들을 내려보낸다. 하지만 이 포로들은 조선군을 유인하기 위해 청군이 쳐놓은 덫이었다. 결국 이날 중견 지휘관이 8명, 군사 300여 명이 전멸당하고 만다.

임시로 남한산성으로 몸을 피신했던 터였기에 항전이 길어지자 모든 것이 부족했다. 성안의 사람과 짐승은 모두 굶주려 말과 소들이 서로의 꼬리를 뜯어먹었다는 소문이 있돌 정도였다. 군사들은 방한복 대신 빈 가마니를 쓰고 버티다가 제대로 한 번 싸워보지도 못한 채 얼어죽었다. 인조조차 침구가 없어 옷을 입은 채로 잠자리에 드는 처참한 나날들이었다. 차츰 조정에서는 강화를 원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남한산성 고립 16일째인 12월 30일, 행궁 근처에 까치가 집을 짓는 것을 보고 청군이 물러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가져보지만, 이와는 반대로 더 치명적인 일이 일어난다. 다음날인 1월 1일 청의 황제 홍타이지가 직접 출병을 해서 남한산성에 도착한 것이다. 청나라 군이 30만명이라는 소문이었다.

남한산성 고립 19일째에는 근왕병의 패전 소식이 들려온 터였다. 경기도 이천지역에서 벌어진 쌍령전투였다. 여기에 투입된 조선군은 4만명이고, 이에 맞서는 청군은 3백 기였다. 이 정도면 조선이 승리할 수 있음에도 조선군은 대패를 한다. 전력이 우세함에도 대패한 이유는 기마병과의 전투가 처음이었던 터라 당황한 나머지 조직력이 무너진 것이 원인이었다. 도망가다가 압사당하기도 하고 화승을 화약상자에 떨어뜨려 폭발하기도 하는 등 자중지란이었다. 모든 장수들이 항상 진군한다고 하면서도 머뭇거리고 도원수 김자점도 쌍령전투 대패 소식을 듣고는 군사를 이끌고 미원에 있으면서도 들어와 구원하려 하지 않았다. 그 외에도 충청도 병력, 경기도 병력, 경상도 병력 등 출정을 하지만 모두 청군에 패해 남한산성은 더욱 고립되고 만다.

1월 1일 고립 24일째, 식량 담당관 나만갑이 인조를 찾아와 들어올 때 군량이 6천 석이었으나 이제 남은 식량이 2천 800석이라고 보고한다. 그 동안 3200석을 소비했으니 하루 13석씩 소비가 된 셈이니 앞으로 20일 정도밖에 버틸 수 없는 군량미였다. 하지만 인조는 지구전을 준비하면서 군량미가 부족하다는 말만 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지구전을 계속 펼칠 수 있을지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 오라고 한다. 한편 청군은 조선 백성들의 민가를 마음대로 약탈해서 식량을 조달하고 있었다.

남한산성 고립 33일째에 마침내 홍타이지는 조선에 최후통첩을 보낸다. 살고 싶으면 인조가 직접 나와서 항복하라는 것이었다. 인조는 조정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어렵게 청나라에 국서를 보내지만 청은 조선 국왕을 신(臣) 이종으로, 특히 명나라의 마지막 임금 의종의 연호인 숭정(崇禎)을 청태종의 연호인 숭덕(崇德)으로 바꾸라고 종용하는 등 트집만 잡았다.

항복 국서에 신하의 나라로서 예를 다 갖추었음에도 청은 끝까지 인조에게 남한산성에서 나올 것을 요구한다. 조선 왕이 진실된 복종의 태도로 항복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를 원했던 것이다. 청태종 홍타이지 즉위식 때 조선의 신하에게 받지 못한 절을 기어이 조선의 왕에게 받겠다는 심산이었다. 후금을 오랑캐라며 무시한 대가를 톡톡히 치른 셈이었다.

능양군 인조와 정묘호란

드라마 화정에서 능양군(김재원)은 강주선(조성하)에게 “왕이 되게 해주신다면 무엇이든 하겠다”고 말합니다. 심지어는 “왕이 될 수만 있다면 어떤 일이라도 하겠다. 강주선의 발이라도 핥을 수도 있다”며 비굴한 모습까지 보입니다. 그리고 자리를 뜨면서 “언젠가 모두를 내 앞에 무릎 꿇리면 그만인 것을”이라며 겉으로 드러나려는 자신의 왕위에 대한 야심을 다독입니다. 강주선과 야합하는 이 장면은 가상의 스토리이지만, 실제로 광해군에게 적개심을 품고 있던 능양군은 김류, 이귀, 이괄 등 서인 일파를 등에 업고 인조반정을 일으킵니다.

요즘 광해군에 대한 재해석이 이루어지면서 상대적으로 선조의 찌질함이 더 두드러지고 있는데, 이렇게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제16대 왕위에 오른 인조 또한 선조만큼이나 무능하고 백성보다는 자신의 안위에 더 급급한 왕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선조 때에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일어나고 인조 때에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일어납니다. 이 중 인조가 보위에 오른 지 채 5년도 안 돼 일어난 정묘호란을 이상각의 [조선왕조실록]과 KBS [역사저널 그날]을 바탕으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능양군의 인조반정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신 분은 다음 포스팅을 참조하시면 됩니다.

화정 능양군과 인조반정

능양군 인조와 정묘호란

반정에 성공한 능양군은 서궁에 유폐돼 있던 인목대비의 언문교지를 받아 보위에 올랐다. 당시 인조는 폐주 광해군의 죄목을 36조로 열거하면서 반정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민심을 안정시킬 수 없었다. 백성들은 각박스러운 국왕의 폐위 소식을 듣고 몹시 동요했으며, 조직적인 반발 움직임까지 나타났다. 그 때문에 인조는 백성들에게 명망이 높은 이원익 등 남인 다수를 등용하여 민심을 달랬다. 하지만 조정의 요직은 김류, 이귀, 이서 등 반정공신들이 차지했다.

이렇듯 서인과 남인의 연립내각으로 구성된 새 조정은 12개의 도감을 혁파하고 죄인들을 사면했으며 각종 토목공사들을 중지했다. 또 왕실의 척족이나 권신들의 토지, 세금, 주택 등을 일일이 조사해서 회수했고, 내수사(內需司)와 대방군(大房君)에 빼앗긴 농민들의 땅을 되돌려주었으며 광해군 때 희생된 영창대군과 임해군, 김제남 등의 관작을 회복시켜 주었다.

인조는 반정공신들에 대한 논공행상에서 도감대장 이수일을 내응의 공이 있다 하여 공조판서로 임명했지만, 결정적인 무력을 제공한 이괄을 2등에 녹공해 한성 판윤에 임명하고 얼마 뒤 도원수 장만 휘하의 부원수 겸 평안병사도 임명하여 분란의 소지를 만들었다. 당시 반정공신들은 거사 성공 후 이전 권력자들의 토지나 노비를 빼앗아 배를 불렸고, 반정에 참가했던 군관들을 사병으로 삼아 안전을 도모했다. 그런 분위기에서 두 차례의 호란을 겪은 조선에서는 크고 작은 역모가 끊이질 않았다. 역모자 중에는 조선 조정이 포악한 정치를 꾀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새로운 시대창조를 부르짖다가 죽임을 당한 사람도 있었다. 실제로 인조와 반정공신들은 급변하고 있는 동북아시아 정세 파악에 실패했고, 권력 보전에만 급급하여 조선사회를 멍들게 했다.

이괄은 임지에 부임해 군사들을 조련하는 등 북방의 안정에 힘썼지만, 당시 기찰을 강화하던 반정공신들이 그를 의심하고 그의 아들을 역모 혐의로 체포하려 하자 1624년(인조 2년) 난을 일으켜 한때 도성을 점령했다. 이른바 이괄의 난이다. 연려실기술에는 "나에게는 오직 아들 한 명밖에 없는데 그애가 잡혀가서 장차 죽음을 당할 것이니 어찌 아비가 온전할 수가 있겠는다.. 잡혀 죽으나 반역하다 죽으나 죽기는 일반이니"라며 이괄이 난을 일으키게 된 이유가 실려 있다. 이괄의 난 때 인조는 공주까지 쫓겨갔다가 도원수 장만이 지휘하는 관군이 반란군을 격파하자 한양으로 돌아왔다.

16세 후반 명나라의 환제 만력제의 태평과 조선에서 벌어진 임진왜란 때문에 여진족에 대한 통제가 느슨해지자 여진에 누르하치라는 영웅이 등장해 여진족을 재차 통합했다. 누르하치는 명나라가 조선에 원병을 보내는 등 한눈을 파는 사이에 주변세력에 대한 정복사업에 진력했다. 마침내 1616년(광해군 8년) 후금을 건국한 누르하치는 본격적으로 명나라에 도전하는 한편 조선에 대해서도 공동 출병을 요구했다.

광해군은 동북아의 정세 변화를 예의주시하며 신중한 중립외교를 펼쳤다. 그런데 인조반정 이후 서인들이 집권하면서 상황이 일변했다. 서인들이 광해군 때의 대외정책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후금과의 관계를 끊는 한편 가도의 모문룡을 지원하는 등 친명배금 정책을 추진한 것이다. 후금은 배후가 불안해지고 명나라, 조선과의 경제교류의 길이 막혀 극심한 물자 부족에 허덕이게 되었다. 이를 타개할 수 있는 방법은 역시 무력밖에 없었다. 그때 조선에서 이괄의 난으로 한명련의 아들 한윤 등이 후금으로 도망쳐 와 조선의 불안한 내정을 알리자 즉위 이전부터 조선에 강격책을 주장했던 청태종 홍타이지는 아민에게 3만 6천여 병력으로 조선을 침공하게 했다.

정묘호란의 발발

1627년(인조 5년) 1월, 후금의 병사들은 얼어붙은 압록강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후금의 장수 아민을 필두로 병사들은 조선을 향해 내달렸다. 거침없이 진격하는 후금의 말발굽 아래 의주성이 하루만에 무너졌다. 예상치 못한 적의 기습에 조선은 속절없이 패할 수밖에 없었다. 임진왜란을 겪은 지 30년도 안 돼 조선은 또다시 전쟁에 휘말리게 된 것이다. 인조는 대외적으로 친명배금 정책을 표방하긴 했지만 배금을 위한 군사적 행동은 한 적이 없었기에 후금의 느닷없는 공격이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정묘호란의 전개

전투과정은 상당히 속도있게 진행되어서 1월 8일 심양을 출발한 후금군은 12일 압록강에 도착해서 14일 의주성, 15일 정주를 함락하고 21일 조선군이 최선을 다해 막지만 안주성마저 함락한 데 이어 23일 평양에 도착했다. 전쟁이 발발한 지 열흘 만에 평안도와 황해도를 점령한 것이다. 이때 후금의 의주성 함락에 공을 세운 인물은 이괄의 난 이후 후금에 투항한 한윤이었다. 한윤은 변복을 하고 의주성에 잠입해서 무기고에 불을 질러 조선군의 방어체계를 무력화시켰다. 이괄의 난 때 처형된 한명련의 아들인 한윤은 아버지를 죽인 것에 앙심을 품고 후금군이 앞잡이가 된 것이었다. 개인의 원한 때문에 조국과 민족을 저버린 비극적인 일이었다.

후금이 침입해 온 당시 조선의 전력은 형편없었다. 이괄의 난 이후 반정공신들이 사찰을 강화하자 지방 무관들은 역모로 오해받을까봐 병사들에 대한 훈련을 기피했기 때문이었다. 평안도병마절도사 남이홍은 안주성에서 후금군과 싸우다가 성이 함락되자 화약에 불을 붙이고 장렬히 전사했는데, 그는 죽기 전에 조정에서 군사들을 조련하게 못하게 했다며 절규했다. 한편 당시 의주부윤은 이순신 장군의 조카 이완이었다. 이완은 의주성 전투에서 후금군의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 노량해전 때 이순신 장군이 탄환을 맞고 쓰러졌을 때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마라”는 이순신의 말에 따라 북을 울리며 전투를 독려했던 바로 그 이완이다.

또 정묘호란 당시 4천여 명의 의병을 모집한 정봉수는 후금의 기병부대를 섬멸하고 포로를 구출했다. 하지만 당시 민심이 극도로 나빴던 인조정권이었기에 의병들의 활약은 그리 두드러지지 않았다. 정묘호란 발발 후 나흘 만에 조정에 보고가 되었을 만큼 보고체계도 엉망이었다. 임진왜란을 겪고도 국방에 대한 대책이 이토록 엉성하고 미흡했던 것이다.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조선군은 곳곳에서 후금군을 저지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가도의 모문룡도 신미도로 패주했다. 후금군의 내습이 알려지자 인조는 장만을 도체찰사로 삼아 적을 막게 하고 여러 신하들을 각지에 파견해 근왕병을 모집했다. 하지만 막강한 후금군의 기세에 전세가 불리해지자 인조는 김상용을 유도대장으로 삼아 한양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강화도로 대피하고 소현세자는 전주로 내려갔다.

이괄의 난에 이어 이번에도 인조는 전란 수습은 뒤로 한 채 몽진을 떠났던 것이다. 그래도 미안한 마음이 있었던 듯 피난을 떠나면서 백성들에게 사과하는 교서를 내리기도 했는데, 이 교서 이름을 죄기교서(罪己敎書), 즉 나에게 죄를 주는 교서라고 한다. 하지만 이는 형식적인 교서일 뿐 인조의 행동은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이후에도 인조는 후금군의 공격이 거세지자 자신의 보위를 위해 삼남지방에서 만여 명의 병력을 차출하라고 지시를 내린다. 그리고는 정작 임진강 방어를 맡은 장만 장군이 북방이 중요하니 포수 백 명만 차출해 달라는 요구도 거절한다.

한편 평안도의 작은 섬 가도엔 명나라의 장수 모문룡이 있었다. 요동 수복을 표방하며 명나라 패잔병들과 요동 난민들을 규합해 주둔하고 있었던 모문룡은 조선과 국경을 오가는 배를 막고 통행세를 걷고 명나라로 가는 사신의 길을 막고 서신까지 가로챘다. 조선으로부터 군량을 지원받으면서도 수시로 약탈을 일삼고 갖은 패악을 부렸을 뿐 아니라 툭하면 요동으로 진격할 듯한 분위기를 연출해 후금의 신경을 건드렸다. 이러한 모문룡의 존재 또한 후금을 도발하게 만든 불씨였다.

후금의 기습공격에 바람 앞의 등불이 된 조선은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는데, 그때 후금은 뜻밖의 제안을 해온다. 진격을 멈추고 사신을 보내 화친을 제의한 것이었다. 전쟁이 일어난 지 이틀 만의 일이었다. 화친의 첫번째 조건은 명나라와 국교를 단절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명과의 사대의리를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는 인조정권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조건이었다. 인조의 신하들은 나라가 망하더라도 안 되는 일이라며 반대하고 나섰다.

후금이 화의를 제의한 까닭은 정묘호란을 일으킨 목적이 조선을 점령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목표는 명나라였으며, 조선은 명나라를 치기 위한 후방일 뿐이었다. 따라서 조선과의 전쟁이 길어지면 명나라가 배후를 공격할 가능성이 있었고 군수품 공급도 곤란해지는데다 조선이 반격도 염려스러웠다. 따라서 후금으로서는 가능한 한 빠른 시간 내에 조선과의 화의를 마치고 명과의 전쟁에 전력을 기울이고자 했던 것이다.

결국 후금과의 화친만이 살 길이었던 인조는 후금 측에서 한 발 물러나 명나라와는 국교 단절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전갈을 보내오자 명과의 관계를 유지해 명분을 찾고 후금과 형제의 관계를 맺어 실리도 찾는 수순을 밟았다. 하지만 후금을 오랑캐라며 얕잡아본 조선에서는 답서를 보내면서 명나라의 연호인 천계(天啓)를 찍어서 보냈다. 국가가 존망의 위기에 처해 있는데 인조는 그런 식으로 후금을 자극하는 답서를 보낸 것이다. 화가 난 후금은 자신들의 연호인 천총(天聰)으로 바꾸지 않으면 철군하지 않겠다고 버텼고, 인조는 하는 수 없이 명나라, 후금 두 나라 다 연호를 사용하지 않겠다는 타협안을 내놓는다.

정묘화약 합의안

그리하여 정묘화약 타협안이 탄생했다. 그러나 이 정묘화약은 후금이나 조선 양국 다 불만이었다.특히 조선 왕의 동생을 인질로 보낸다는 협약은 종실인 원창령을 원창군으로 만들고 원창군을 인조의 동생이라고 속여 후금으로 보내 자칫 외교문제가 비화할 소지도 남겼다. 조선은 미개한 종족 여진족의 나라 후금과 형제지약을 굴욕으로 여겼다. 또 막대한 조공으로 폐해가 심해지자 더욱 후금에 대한 증오심을 키워갔다. 후금 역시 세폐와 개시로 경제적 이득을 취할 수 없게 되었지만 배후의 암적인 존재인 모문룡 세력을 말살시키지 못했고 조선의 배금 경향이 고조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 후금은 국력이 강회되자 조선에 다시금 강압적인 태도를 취했다. 이에 조선이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함으로써 비극적인 병자호란이 발생하게 되는 빌미를 제공했다.

아무튼 두 나라는 서로 배신하지 않겠다는 맹세문을 낭독하는 희생된 제물의 피를 마시는 의식과 함께 전쟁도 종결되었다. 오랑캐라고 업신여기던 후금과 형제의 나라가 된 것이다. 그런데 그 후에도 후금군의 일부는 철수를 하지 않았다. 정묘호란을 일으킨 목적 중 하나가 모문룡을 제거하기 위해서인데 그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을 이유로 내세워 의주에 4천여 군사를 주둔시켜 모문룡을 제거하겠다고 한 것이다.

한편 나머지 후금군은 철수를 하면서도 길목에 있었던 황해도 지역의 백성들에게 큰 피해를 주었다. 인조실록에는 "'적병이 자녀와 재산을 모조리 빼앗았다. 화친이 백성을 위한 것인데 백성이 어육이 되게 하는 결과가 됐다"고 씌어 있다. 그 후의 병자호란 때도 마찬가지이지만 후금군에 끌려간 백성들이 많았고, 후금은 나중에 속량이라고 해서 조선인을 팔아먹기도 했는데 바로 피로인((被擄人)들이다. 당시 후금군에게 끌려가다가 압록강에서 투신한 사람들도 많았다. 끌려가 죽느니 고향에서 죽겠다는 거였는데, 압록강이 시신으로 뒤덮였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고 한다. 무능한 정권의 리더십 부재가 백성들의 고통을 한층 키웠던 것이다.

역사가들의 말에 따르면, 정묘호란은 국가가 백성들을 저버릴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전쟁 중 하나였다고 한다. 하지만 뼈아픈 반성이 없었던 인조는 결국 머리를 땅에 찧으며 청(후금)에 항복하는 굴욕까지 맛보게 된다.

화정 능양군과 인조반정

선조의 딸 정명공주(이연희)의 기구한 삶을 그린 드라마 화정은 이제 조선 15대 왕 광해군(차승원)의 시대를 지나 능양군(김재원), 즉 16대 왕인 인조의 시대로 접어들어가고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반정(反正)으로 왕위에 오른 왕이 둘 있는데, 하나는 중종이고 또 하나가 바로 인조반정으로 왕위를 차지한 능양군 인조입니다.

화정 능양군과 인조반정

화정 22회에서 능양군은 사람들을 선동해 광해군이 있는 궁궐 앞으로 몰려가 결연한 얼굴로 "이 자리에서 목을 내어놓을 각오로 왔다. 이대로 전하께서 독단을 거두지 않는다면 도끼로 목을 베는 지부상소를 올리겠다"고 외칩니다. 또 파병을 하지 않으면 명나라가 조선을 침략해 올 것이라고 불안감을 조성하며 광해군을 향해 강력한 도전장을 던집니다.

그 이전에 이미 능양군은 예기치 못한 모습으로 도성에 나타나 여기저기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키기 시작한 바 있습니다. 김재원이 인조 역을 맡으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도 그가 처음 출연했을 때 금방 알아보질 못했습니다. 그만큼 상복차림에 머리를 길게 풀어헤친데다 강팍해 보이는 김재원의 모습이 낯설기 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늘 달콤하고 부드러운 웃음을 보여 미소천사라는 애칭까지 얻은 김재원의 파격적이고 성공적인 변신이었습니다.

능양군은 그때도 궁궐 앞으로 가서 많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명나라에 파병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석고대죄를 합니다. 재조지은, 조선은 그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그것이 군자의 길이며 공맹의 가르침인데 왜 그 길을 버리고 폭정을 이어가려 하는 거냐며 힐난합니다. 그리고 호위군들에게 끌려나가면서도 “언젠가는 밀물이 지나가고 썰물이 올 것"이라며 권좌를 향한 욕심마저 드러냅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인목대비(신은정)의 처소인 경운궁에도 찾아갑니다. 그리고 정명공주와 함께한 자리에서 "인두겁을 썼으면 사람 노릇을 해야 한다. 주상과 같아서는 안 된다"고 광해군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면서 "날도 더운데 지내시기가 어떠냐. 이런 날에는 영창대군이 많이 생각나시겠다"며 죽은 영창대군까지 들먹입니다.

그러자 정명공주는 차가운 표정으로 능양군을 향해 "그 아이의 일은 상처이니 더 이상 말하지 말하지 말아달라. 또 경운궁을 찾는 것도 조심해 달라"고 경고합니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그게 왜 안 되는 일이냐. 대군은 주상 손에 죽었다. 나도 주상한테 아우를 잃었다"며 "주상은 오래 가지 못한다. 마음을 바꿔라. 지금 잡고 있는 것은 썩은 동아줄이다"라고 잘라말합니다.

느물느물 능청스럽게 치고 빠지면서 다음에는 어디로 튈지 도무지 가늠이 안 되는 모습으로 종횡무진하는 능양군이 앞으로 어떻게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좌를 두고 대립하게 될 정명공주에게는 어떤 승부수를 띄울지 기대가 됩니다. 드라마 화정에는 정명공주에 관한 가상의 스토리가 가미되어 있지만, 오늘 포스팅은 인조반정에 관한 실제 역사를 [역사저널 그날]과 청운대 김경수 교수의 [조선왕조사]를 바탕으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드라마를 보시는 데도 도움이 되고 또 인조반정에 대해서도 좀더 상세히 알게 되어 도움이 될 것입니다. 드라마 화정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신 분은 다음 포스팅을 참조하시면 됩니다.

○ 화정 허균 지배계급에 반기를 든 조선의 이단아

○ 화정 광해군의 화기도감과 조선 비밀병기 비격진천뢰

○ 화정 김개시 광해군을 위해 악역을 자처한 여인 김개똥

○ 화정 영창대군 비운의 왕자의 예정된 죽음

○ 화정 인목왕후..정명공주와 영창대군의 어머니 인목대비의 기구한 삶

○ 화정 선조의 딸 정명공주..공주로 죽고 싶소

○ 인조, 반정의 칼을 들던 날

선조는 본디 광해군이 아닌 인빈 김씨의 아들 신성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어했다. 하지만 이런 선조의 바람은 대신들의 반발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결국 세자 책봉이 미루어지다가 임진왜란으로 어쩔 수 없이 광해군에게 세자의 자리가 돌아가게 되었다. 그런데 이에 불만을 품은 김씨의 아들들은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후에도 왕권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않았는데, 광해군으로서는 이것이 위협적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당시 인빈 김씨에게는 이미 죽은 신성군 외에도 아들이 셋 더 있었는데, 이 중 다섯째아들인 정원군은 능양대군, 능원대군, 능창대군을 두었고 능창군은 신성군의 양자로 입적했다.

1615년(광해군 7) 신립 장군의 조카인 신경희는 정원군의 셋째아들 능창군을 왕위에 옹립하려 했다는 혐의로 국을 받던 중 장살(杖殺)되었다. 장살이란 사형방법 중 하나로 때려죽이는 것을 말하는데, 사형 중에서 능지처참 다음으로 잔인한 사형방법이었다. 대북파는 신경희의 옥사 후 능창군도 이 사건과 연루시켜 유배보냈다가 죽여버렸다.

○ 반정을 주도한 능양군(인조)

한편 능양군은 태어나면서 모습이 범상치 않고 오른쪽 넓적다리에 사마귀가 많았는데, 이듬해 봄에 할아버지 선조가 이를 보고 기이하게 여기며 "이것은 한고조(漢高祖)와 같은 상(相)이니 누설하지 말라"고 했다 한다. 그러나 선조의 이 말은 곧 누설되었고, 정원군의 집에 왕기가 성하다, 인빈의 묘자리가 좋다는 등의 소문과 함께 퍼지면서 동생 능창군이 사형당하는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또한 광해군은 왕기가 흐른다는 정원군의 집터에 궁궐(경덕궁 지금의 경희궁)을 지었다. 졸지에 아들을 잃고 집까지 빼앗긴 정원군은 술로 시름을 달래다가 숨을 거두었다. 순식간에 풍비박산이 된 능양군은 이때부터 광해군에 대한 복수를 다짐한다.

능양군은 대북파 반대 진영의 사람들을 만나며 거사를 준비해 나간다. 그리고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유폐시키자 능양군 일파는 이를 광해군을 비난할 수 있는 호기로 삼고 불효와 패륜적인 국왕으로 몰아세웠다. 결국 대북파와 서인의 충돌이 불가피해지자 광해군은 서인세력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드디어 1623년 3월 12일 중종반정에 이은 두번째 반정인 인조반정이 발발했다. 반정군은 북을 울리며 궁중으로 밀어닥쳤고, 미리 포섭된 훈련도감은 약속대로 아무런 반격도 하지 않았다. 김류, 이귀 등이 침입했고, 훈련대장 이흥립은 안에서 호응했다. 호위무사들은 흩어지고 피비린내나는 숙청작업이 이어졌다. 반정군은 기세를 몰아 곧장 왕의 침소로 들이닥쳤고, 놀란 광해군은 내시의 등에 업혀 후원으로 도망쳤다. 인조반정의 세력은 하룻밤 만에 조정을 장악했고, 날이 밝자 비어 있는 옥좌에는 서둘러 새로운 왕이 들어섰다. 바로 조선의 16대 왕 인조가 즉위한 것이다.

○ 당시 반정군들은 어떻게 궁을 장악했을까?

능양군을 중심으로 무장한 서인의 대표적인 무인은 이귀, 김류, 이괄이었다. 이귀는 평산부사였고 이괄은 함경도 병마사, 김류는 강계부사였다. 이귀와 김류는 오래 전부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 사이로 능양군은 이들과 먼저 손을 잡고 이괄은 뒤에 합류했다. 그런데 이들의 반정모의는 누설되어 이미 파다하게 소문이 난 상태였다. 하지만 광해군과 대북파 중신들은 이러한 소문을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렸다. 당시 조선은 몇 년째 큰 풍년이 들어 물자가 풍족하고 평화로운 분위기가 계속되고 있었던 탓에 광해군과 대북파 실세들은 앞으로 닥칠 위험을 전혀 감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거사가 일어난 그 날도 광해군은 연회를 즐기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소문이 파다하게 퍼진 이상 반정군의 입장에서는 거사를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능양군 일파는 1623년 3월 13일 거사를 실행하기로 하고 전날부터 홍제원에 모여 군사들에게 세부적인 행동지침을 지시했다.

그리고 3월 12일 밤 10시, 반정군은 약속된 장소 홍제원에 집결했다. 반정군 총대장 김류의 뒤늦은 합류로 예정된 시간보다 좀 늦은 밤 12시경에 반정군은 광해군이 있는 창덕궁을 향해 쳐들어간다.

창의문을 거쳐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으로 들어간 반정군은 별다른 충돌 없이 창덕군으로 진입했고, 곧이어 능양군과 이괄, 김류는 승전을 알리는 횃불을 올렸다. 그때서야 광해군 주변에 있던 내시와 신하들이 예사로운 사태가 아님을 알고 달아나기에 바빴다. 그리고 광해군도 그제서야 정신없이 곤룡포를 입은 채 편전을 나와 대궐의 담을 뛰어넘었다. 무혈입성이었다.

○ 당시 궁궐을 지키던 군사체계

오합지졸에다 1300여 명밖에 안 되는 군사 규모였다. 더욱이 이 중 600명 정도는 노복이나 길거리에서 고용한 사람들이었다. 당시 도성과 궁궐을 지키는 병력들이 수천 명 있었던 상황이었음에도 어떻게 이처럼 쉽게 성공할 수 있었을까? 박금수 박사에 따르면 당시 궁궐을 지키던 군대체계는 여러 가지 안전장치가 있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이전에는 5위 체계 도성을 지키는 전군을 위흥위, 용양위, 충무위, 충좌위, 호분위 등 5개의 부대로 나누었다, 궁궐을 지키는 금군도 내금위, 우림위, 겸사복 등 세 개의 부대가 독립적으로 존재해서 한 부대가 역모에 가담하더라도 군 체계가 무너지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런 군사체계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무너져 훈련도감 하나의 부대만이 도성을 전반적으로 책임지고 있었다. 그리고 임금의 최측근을 지키는, 오늘날로 말하면 청와대의 경호실 같은 무예청이라는 병력이 있었는데, 이 무예청의 병사들 역시 훈련도감에서 차출한 것이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궁궐에 왕의 호위체계는 훈련도감 하나뿐이었다.

또한 반정세력의 이귀 등은 호랑이를 핑계로 전시가 아닌데도 지방 병력이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이었다. 당시 호환이 두려웠던 탓에 호랑이를 전문적으로 잡는 군대인 착호군(捉虎軍)을 움직인 것이다. 이귀는 인조반정이 일어나기 한 해 전 조정에 상소를 올려 "평산에서 개성에 이르는 길에 호랑이가 자주 출몰해서 사람들을 해치고 민가의 피해가 극심하니 호랑이 사냥을 하는 군사들이 도의 경계를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도록 윤허해 달라"고 했다. 이귀가 상소와 함께 큰 호랑이를 잡아 보내니 광해군은 크게 기뻐하며 기꺼이 그렇게 조치하라고 했는데, 이것이 결과적으로 광해군이 반정군에게 스스로 군사를 내어준 셈이 된 것이다.

한편 능양군은 재빨리 서궁으로 달려가 인목대비를 찾았다. 왕의 결정권은 이번에도 인목대비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능양군이 인목대비를 모시고 궁궐로 들어와 어보(御寶)를 바치자 그녀는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눈물을 글썽였다. 인목대비는 능양군과 여러 신하들을 불러들인 후 능양군에게 어보를 넘겼다. 이에 능양군은 세 번이나 사양했으나 대비의 뜻은 변치 않았다. 결국 이를 받아들였고 능양군을 따르던 신하와 부하들은 일제히 환호했다. 이 사건이 인조반정이다.

반정세력은 광해군을 즉시 강화도로 유배시키고 왕비와 그의 아들, 며느리까지 유배보냈다. 이로써 능양군이 조선 제16대 왕위에 오르는데, 그가 인조다. 인조는 즉위 후 인목대비의 존호를 복원했고, 광해군 시절 권력을 독점해 오던 정인홍, 이이첨 등 대북세력 2백여 명을 제거했으며 반정에 가담한 서인들에게 대거 정사공신의 훈호를 내렸다. 이로써 조선의 조정은 서인들의 세상으로 탈바꿈했으며, 대외적으로는 친명배금(親明拜金)을 선언했다.

화정 이괄의 난과 인조의 기찰정치

조선의 16대 왕 인조는 시기심이 많고 잔인하기 짝이 없는, 선조만큼이나 찌질한 소인배였습니다.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 있다가 명나라가 망한 후 돌아온 장자 소현세자가 청과 조선의 통로 역할을 하면서 양국을 조정하는 데 탁월한 솜씨를 보여 청의 신뢰를 받자 그것을 시기해서 소현세자를 독살하고 며느리인 세자빈에게도 사약을 내려 죽입니다. 그리고 손자인 소현세자의 세 아들도 제주도로 유배를 보내 풍토병으로 죽도록 방치해 버립니다. 조선 왕들 중에 형제를 죽인 태종(3대)이나 아들을 죽인 영조(21대)가 있긴 했지만 아들, 며느리, 손자까지 죽인 왕은 인조뿐입니다. 덕분에 이 찌질하고 멍청한 인조가 왕으로 있었던 27년 동안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 두 차례의 전쟁을 겪으면서 백성들만 죽을 고생을 합니다.

게다가 인조가 왕위에 오른 지 1년도 안 돼 발발했던 이괄의 난 역시 반정공신 이괄(李适)을 홀대하고 뒤에서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게 하는 기찰정치를 펼친 탓에 앙심을 품게 만든 것이 큰 원인이었습니다. 역사저널 그날 [이괄, 반란의 칼을 들다]와 재미사학자 백지원의 [왕을 참하라]를 바탕으로 비록 3일 천하로 끝났지만 어이없을 만큼 쉽사리 한양을 점령하고 찌질한 인조는 도망가느라 바빴던 이괄의 난과 이괄이 반란의 칼을 들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던 인조의 기찰정치에 대해 정리해 보았습니다. 인조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신 분은 다음 포스팅을 참조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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