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가 작아지게 된 역사적 사건 21가지
14. 조선의 금서목록
(전통사상에 관한 서적들로만 꽉찬 금서목록)
금서목록
금서란 국가기관에 의해 출판이나 판매(거래) 및 소유와 탐독 등이 전체적 혹은
부분적으로 금지된 서적을 말한다. 금서는 일반적으로 정치, 안보, 규범, 사상, 신앙,
풍속 등을 저해한다는 이유로 법률이나 법률을 집행하는 국가기관에서 지정하게
마련이다. 금서를 규정하는 방법에도 여러 가지 형태가 있었다. 지난날의 역사를
살펴보면 책을 태우는 '분서'를 비롯하여 반포금지나 소유금지 및 판매금지와
열람금지 등이 있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금서는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동양의 경우 서기전 213
년 진시황이 제정한 '협서율'에 따라 이루어진 분서갱유가 문헌상 최초의
금서조치였다. 서양의 경우에는 서기전 411 년에 프로타고라스가 지은 "여러 신에
대하여"가 신을 모독했다는 죄로 불태워진 바 있다.
그러나 우리 역사에서 금서가 지정된 것은 근조선에 들어와서였다. 물론 그
이전에도 금서가 있었을 가능성은 있지만, 아직 자료를 통해 확인된 바는 없다.
인간의 역사에서 말과 글을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말과 글이
발전하면 할수록 그것을 통제할 필요성도 생겨날 수밖에 없다. 물론 그렇다고
언어생활이 발전된 모든 사회가 금서의 역사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이
개방된 사회에서는 금서가 자리잡을 공간이 없는 탓이다.
우리는 금서라는 비극의 역사 속에서 공통적으로 사상탄압의 흔적을 발견하게
된다. 금서로 지정한 까닭이 정치적이든 종교적이든 그것은 모두 사상탄압의
도구였다. 금서가 지정된 시기는 대체적으로 시대적 전환기였으며, 전환기의 사회가
대개 그렇듯이 당시의 사회 역시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성리학이라는 외래사상을 통치이념으로 설정한 근조선이 금서를 지정한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오랜 전통을 가진 기마종족의 하늘사상을 하루아침에
배척하고, 천년의 세월 동안 이 땅에서 발전해온 불교까지 무모하게 배척했으니
근조선은 금서를 지정하지 않을 수 없었을 터이다.
근조선에서 금서를 규정한 법률은 '요소율'로서 이른바 요사스런 서적을 금지하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근조선이 세워진 것은 1392 년의 일이지만, 태조나 정종 때만
하더라도 정부는 쉽게 금서조치를 내릴 형편이 아니었다. 나라를 세운 첫해에는
나라 이름조차 바꾸지 못하고 그대로 고려라고 불렀으며, 성리학도 독단적으로
내세울 수 없는 처지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힘으로 임금자리에 오른 태종 이방원 때에 이르면 성리학파의 독단적인
정치가 이루어지게 되는데, 이때부터 사상탄압을 위한 어두운 중국제 장막이
펼쳐지게 되었다. 정종 11 년(1411)과 세조 3 년(1457)에 금서조치가 내려졌으며,
성종과 연산군 때에도 같은 조치가 내려진 바 있다. 근조선 초기에 금서가 없었던
시기는 오직 세종 때 뿐이었으며, 그런 점에서 우리는 세종 임금의 개방적 성격과
뛰어난 역사적 감각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그런데 그때 탄압을 받은 사상은 어떤 것이었을까? 우리는 당시의 금서목록을
통해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각 시기마다 내려진 금서목록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시대별로 탄압대상이 조금씩 바뀌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전반적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다.
그 가운데 세조 때의 금서목록을 살펴보면, 탄압대상이 주로 기마종족의 전통적
하늘사상과 그 역사였음을 알 수 있다. "고조선비사", "대변설", "조대기",
"지공기", "표훈천사", "삼성밀기", "도징기", "통천록"('천통서'라고도 부름) 등
19종의 금서가 대부분 하늘사상과 고조선의 역사를 기록한 서적들이다.
"대변설"은 고조선의 건국과 관련된 역사서이고, "조대기"는 고조선 역대
단군들의 역사이며, "지공기"는 고조선의 정신문화원장 격인 신지들이 남긴
기록이었다. 또 "표훈천사"는 고조선의 사상,이념적인 역사를 기록한 책이고,
"삼성밀기"는 고조선 이전의 역사를 담은 문헌이며, "도징기"와 "통천록"은 전통적
심신수련법과 그 역사를 서술한 서적이었다.
고려 르네상스의 타율적 종언
19종의 금서 가운데는 "안함로원동중삼기"가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이 책을 쓴
안함로와 원동중은 고려 르네상스 시기의 전통사상가로서, 이 책은 그들의 역사연구
성과물이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서적들도 고려 르네상스 시기에 편찬된 것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 금서목록들을 통해 우리는 근조선의 성리학파가 저지른 사상적 범죄행위를
확인하게 된다. 그들은 자신의 사상과 함께 중국적 세계질서라는 관념을 지키기
위해 그것에 위배되거나 그 권위를 무너뜨릴 만한 사상을 탄압한 것이다.
그들은 근조선이 멸망시킨 고려시대의 역사연구서들을 '요사스럽다'는 명분을 달아
탄압했으며, 나아가 고려 르네상스 그 자체를 부정하면서 고려 내부에는 계승할
만한 사상이 없었음을 강변하려고 했다. 즉 그들은 고려시대에 이루어진 모든
사상체계, 특히 전통적 사상은 그다지 계승할 가치가 없으며, 중국에서 받아들인
성리학만이 위대한 사상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들은 고려 르네상스를 부정함과 아울러 고려시대의 전통적 사상가들이 발굴한
고조선의 역사적 실체마저 부인했다. 자신은 비록 단군의 피를 물려받은
기마종족이지만, 정신적으로는 주희의 아들임을 주장한 셈이다. 한족이 서술한
역사서에 철저하게 세뇌되어버린 그들로서는 고조선으로부터 이어지는 기마종족의
거대한 역사를 믿고 싶어도 믿을 수 없었는지 모를 일이다.
구전에 따르면 "도징기"와 "통천록"도 고려 말기의 저작들이다. 그리고 구전으로
전해오는 부분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이 서적에는 하늘과 정신적으로 교통하며 글이
아닌 몸으로서 인간의 근본을 닦아가는 내용이 담겨 있다. 그러므로 구전으로
전해오는 내용이 사실일 경우, 글과 사회적 규범을 통해 인간됨을 닦아가는
성리학자들로서는 그런 서적을 이단적인 '요서'라고 할 수밖에 없었을 터이다.
이처럼 근조선의 성리학파는 우리 기마종족의 오랜 역사와 뿌리깊은 사상을
부정했고, 그것을 연구한 고려 르네상스 시기의 업적들을 은폐하려 했으며, 전통적
인간수련법마저 사악한 것으로 매도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그런 입장을 절대적
진실로 조작하기 위해 끊임없이 사상탄압을 했다.
특히 그들이 고려 르네상스를 부정한 것은 미완성의 르네상스가 부활해서
성리학적 가치관에 도전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인위적인 사상조작이
진실을 완전하게 가릴 수는 없다. 사상탄압에 의해 많은 정보를 잃어버림과 아울러
많은 정보가 왜곡되었지만, 결국 미완성의 르네상스는 부활하고야 말았다. 뒤에서
살펴볼 실학은 바로 그 미완성의 역사를 완성시키려 한 작업의 하나이다.
그런데 그들의 금서목록은 왜 전통사상에 관한 서적들로 꽉차 있는 것일까?
불교나 도교의 경우는 어떠했을까? 성리학 이외의 다른 사상은 배척한 성리학파가
왜 불교나 도교의 서적은 금서목록에 담지 않은 것일까? 왜 그런 사상에 대해서는
혹독한 탄압을 하지 않았던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불교사상의 경우 가람과 승려를 중심으로
사상이 유지,발전되는 특성이 있기 때문에 성리학파는 가람과 승려를
직접적으로 탄압할 수 있었다. 즉 그들은 사찰을 수색하여 불경과 경판을 불태우는
연례행사를 즐길 수 있었던 것이다. 지어 불교 가람으로서 경치가 좋고 마을과
가까운 데 있는 것은 완전히 불태우고 그 자리에 자신들의 학교인 서원을 세우거나
심지어 놀이터인 정자를 세우기도 했다.
그리고 도교의 경우 철학자인 노장사상은 어느 정도 수용할 수 있다고
판단했으며, 신앙적 노장사상은 불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 신앙의 대상을 탄압할
수 있었다.
유학이라는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으며 성리학과 마찬가지로 외래사상인 양명학도
탄압의 대상이었지만, 양명학은 아직 수입단계에 있었으므로 수입의 길목만
차단하면 쉽게 탄압할 수 있었다. 즉 국경지대의 관문에서 짐을 검사할 때, 양명학
관련 서적이 발견되면 그것을 불태우고 그 소지자를 처벌했던 것이다.
사화와 당쟁의 본질
오늘날 일제 식민사관에서 벗어나자는 명분 아래 많은 역사적 사실이 재조명되고
있다. 근조선 때 일어난 네 차례의 사화나 당쟁도 그런 관점에서 재평가되곤 했다.
그래서 사화와 당쟁은 일제 식민사학자의 주장과 달리 우리 민족의 고질적 분열성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 많은 설득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 평가는 물론 옳다. 근조선의 당쟁에 분열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것이
우리 민족의 특징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이 우리 민족사의 특징이라면, 그것은
세계사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되는 특징이다. 어쩌면 세계사 그 자체가 민족과 민족,
종족과 종족, 국가와 국가, 신분과 신분, 가족과 가족, 개인과 개인의 분열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의 모든 역사는 그런 단위의 통합과 융합의 역사인 것이다.
서로 편을 짜고 험악하게 싸우다가도 공통의 문제가 생기면 서로 어깨를
두드려주면서 힘을 모으는 것은 어느 한 민족사나 종족사의 특징이 아니라 인류역사
전체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분열이니 단결이니 하는 무의미한 주장과 그 주장에 대한 발빠른
반박이 아니라 그 분열과 단결의 밑바닥에 흐르는 역사적 성격이다. 근조선의
사화와 당쟁도 그런 점에서 이제 좀더 본질적으로 관찰해야만 한다.
잘 알려진 대로 사화와 당쟁의 밑바닥에는 늘 성리학이 깔려 있었다. 성리학은
한족 중심의 세계질서를 배경으로 한 근조선의 통치이념이었다. 근조선의
정치사상사에서 성리학은 자기 이외의 모든 사상을 지나치게 배척했으며, 그로
말미암아 마침내 자기 자신까지 정해버린 독단적 이념이었다.
그렇지만 이론적으로 성리학은 매우 체계적이고 폭 넓은 사상이었다. 성리학파가
배척한 전통사상과 불교 및 도교 등의 요소가 성리학의 구석구석에서 발견될 정도로
폭 넓은 사상이었다. 그런데 성리학은 그 내용적 폭과 체계성에 반비례할 정도로
폐쇄적이었다. 속담에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했듯이, 성리학의
폐쇄성은 여러 요소를 일원론적으로 꿰고 있는 줄의 성격 때문이었다.
그 줄의 첫째 특징은 한족과 한족화된 사람만이 진정한 인간이라는 관점이다.
한족의 관점에서 '오랑캐'는 사람이 아니라 짐승과 같은 존재이다. 오랑캐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오로지 한족을 닮아가면서 '작은 중화'가 되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삼는 나라는 자신의 고유한 사상과 문화를 버리고 중국의
사상과 문화만을 따라야 했다.
둘째 특징은 성리학이 다루고 있는 다양한 요소의 사상적 뿌리는 모두 한족의
역사에서 비롯되었다는 관점이다. 그러므로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삼을 경우, 자기
겨레의 뿌리깊은 역사는 거짓이 되게 마련이다.
셋째 특징은 기초원리가 매우 주관적이어서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그래서 어떤 현실적 문제를 해석할 경우 서로의 입장에 따라 상당히 다른 견해를
내놓을 수 있다. 더구나 주희의 심법(주희가 사물을 보았던 마음으로써 다른 사물을
이해하는 방식)과 문법(주희 등이 남긴 문헌을 그대로 따르는 방법)이 복잡하게
얽히면, 같은 문헌을 놓고도 서로 다른 주장을 펴게 된다.
또 다른 특징은 정통은 하나뿐이라는 관점이다. 그러므로 정통을 지키기 위해서
늘 독단적,배타적 성격을 띠게 된다. 그 결과 그들은 다른 사상을 배척하고
탄압했을 뿐 아니라, 성리학파 내부에서도 정통론을 둘러싸고 치열한 투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근조선의 사회는 바로 정통을 세우기 위해 내부투쟁을 벌인
사건들이었다. 물론 네 차례의 사화가 모두 정치적 입장을 둘러싼 음모에서
비롯되었지만, 그 본질은 성리학파가 자신의 유일 정통을 세워나가는 과정이었다.
김종직 일파가 희생된 무오사화와 조광조 일파가 희생된 기묘사화는 그런 특징을 잘
보여준다. 그 결과 길재, 김숙자, 김종직, 김굉필, 조광조라는 성리학의 정통 학맥이
세워졌다.
이에 비해 당쟁은 이미 세워진 학맥의 계승권을 놓고 벌인 치열한
내부투쟁이었다. 이 투쟁도 물론 정치적 입장이나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벌어졌으며,
현실에서 제기된 중요한 안건이 대부분 그런 투쟁의 소재가 되었다. 때때로 없는
사실을 날조하여 상대방을 모함하기도 했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누가 성리학의
정통 교의를 따랐느냐에 따라 그 승패가 갈라졌다.
물론 이런 당쟁은 실학으로 불리는 르네상스의 부활을 맞으면서 그 명분을 잃고
정치투쟁으로 바뀌게 되었다. 근세 르네상스의 부활이 사회적 설득력을 얻으면서,
성리학적 정통론은 이미 정당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사상탄압과 작은 겨레
사상에 대한 탄압은 늘 자기 부정으로 이어진다. 다른 사상을 탄압하는
독단적이고 폐쇄적인 사상은 내부숙청을 동반하게 마련이며, 그 결과 자신의 논리로
자신의 한계를 드러내게 된다. 근조선의 성리학파는 이런 점에서 지극히
전형적이다. 자기 고유의 역사와 사상을 탄압했고, 앞시대의 사상사적 업적까지
감추는 한편, 이미 토착화된 불교까지 모질게 탄압한 성리학파는 결국 내부분열
과정에서 자기 사상의 한계를 드러낸 것이다.
사화를 통해 자신의 정통을 세우는 동안 성리학파는 성리학 속에 시대적 대안이
없음을 스스로 드러냈으며, 정통이 세워진 뒤 당쟁을 통해 정통을 가리는 동안
성리학이 역사를 거슬렀음을 알게 만들었다. 즉 성리학은 사상탄압과 비례하는
내부투쟁에 시달렸으며, 이로 말미암아 근조선의 진정한 시대적 과제는 미완성의
고려 르네상스를 계승하는 것임이 드러나버린 것이다. 실학파는 그들의 의도와
관계없이 바로 고려 르네상스의 계승자였던 셈이다.
혹독한 사상탄압과 엄청난 내부투쟁으로 말미암아 성리학은 학문적으로 뛰어난
이론가를 배출하기도 했다. 사화와 당쟁을 통해 정통을 세우고 지키는 동안 이황,
조식, 이이, 송시열과 같은 이론가들이 학문적 완성도를 자랑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역사에서 성리학파는 역사적 걸림돌이었다. 마치
성리학이 유교적 예법을 대중화시킨 것처럼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것은
성리학이 '살부살조'해서 우리 겨레를 중국화시킨 것을 아직까지 깨닫지 못한
어리석은 생각이다. 또 그것은 치열하게 이루어지던 고려 르네상스를 파괴함으로써
겨레 문화가 주체적으로 높은 꼭대기에 오르는 데 걸림돌이 되었음을 모르는
생각이다.
예법과 도덕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우리들의 미풍양속이 과연 성리학적인 것인지
충분히 의심해볼 일이다. 예컨대 농촌사회에서 두레가 먼저였는지 그렇지 않으면
성리학자들의 환난상휼이 먼저였는지 말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 어느 것이 진정한
공동체의 덕목인지도 살펴볼 일이다.
성리학이 한족의 사상이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외래사상의 수입은 어느 시대에나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문제는 외래사상을
수입하는 태도가 과연 주체적인가 하는 점이다. 불교도 외래사상이었으며, 초기에
수입된 유학도 외래사상이었다. 그러나 삼국시대의 겨레 조상들은 그것을
주체적으로 받아들여 겨레 문화의 자양분으로 활용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고려
르네상스는 바로 그런 자양분을 융합시켜 스스로의 것으로 발전시키는 작업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성리학은 그런 작업을 파괴하면서 들어왔을 뿐 아니라, 겨레의 뿌리까지
도려내려 했다. 그 결과 성리학파는 몇몇 빼어난 성리학자를 배출하는 대신 겨레
문화를 왜소하게 만들고 말았다. 우리는 오늘날에도 외래문화에 대한 태도에서 그런
잘못이 반복되는 것을 보면서, 과거와 같은 '작은 겨레 만들기'나 '작은 인간
만들기'가 없어야 하겠기에 성리학의 전통문화 탄압과 잘못된 내부투쟁을 작은
겨레의 주요한 요인으로 꼽아본다.
사상에 대한 탄압이야말로 작은 역사의 근본적인 출발점이고, 그것으로 말미암은
자기 부정은 작은 역사의 종착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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