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이란 무엇인가.
에덴동산에도 뱀이 나타났지만 인류 초기의 역사를 보면 뱀은 많은 민족의 풍요의 신으로 등장하고 있다. 이 뱀들은 우리가 아는 대로 들짐승이다. 21세기인 오늘날에도 세계 곳곳에서는 아직도 뱀이나 용이 풍요를 가져온다고 믿고 숭배하는 이들이 많다. 결국 무엇인가. 인간이 아무리 자신들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말하고는 있지만 그 마음은 욕심에 미혹되어 뱀을 숭상하는 뱀보다 못한 짐승이 되어 있다는 자증인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흙으로 지으시고 그로 하여금 산혼의 정체성을 가지게 하시고 하나님 안에 들어와서 영의 아들로 다시 중생케 하려 하시지만 사람은 자신의 영혼이 사망에 처하여 있음도 모르고 다만 육체로 살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땅위에서 누구보다 지혜롭다 하는 지혜자들은, 사람은 육체뿐이라 주장하며 또 그렇게 믿고 살고 있으니 짐승보다 못하게 되고 마는 것이다.
풍요란 무엇인가. 지금의 기복신앙인들이 갈망하는 그 세상축복이며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기 직전 그 실과를 보았던 그 눈의 욕심이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러운 것 말이다. 뱀은 그 배로써 움직인다. 이것은 인생이 배부름을 그 신으로 섬길 때와 같다. 그래서 배를 신으로 섬기면 그의 영적 상태를 뱀의 형상이라 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뱀과 사탄은 고유명사인 동시에 일반 명사다. 고유명사로서의 뱀은 에덴 동산에 들어와 하와를 유혹하여 범죄케 하였던 그 뱀을 말하며 일반 명사로서의 뱀은 들짐승인 뱀을 말하는데 인간의 마음의 형상과 관련하여 말할 때에는 욕심으로 사는 인간 곧 육신을 지향하는 인간을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더욱 주목하고 경계하여야 하는 것은 고유명사로서의 뱀이 아니라 마음의 형상으로서의 뱀인 것이다. 성경은 인생들의 형상에 관한 말씀임을 깨닫자. 그러므로 이 뱀은 나일 수 있고, 너 일 수 있으며, 우리 일 수 있고 너희 일 수 있다.
고유명사로서의 사탄은 범죄한 천사들의 우두머리로서 하나님의 ‘적대자’이다. 일반 명사로서의 사탄은 범죄한 천사이건 사람이건 간에 하나님께 대하여 ‘적대하는 자’를 가리킨다. 나도, 너도, 그 누구도 욕심을 좇는 그 순간 하나님의 적대자의 위치에 서게 된다. 우리가 주목하고 경계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적대자의 위치이다. 계시록 20장에서 그 옛뱀은 사탄이며 마귀며 용이라 하였다. 공중의 권세를 잡고 날아다니는 뱀(용)은 하나님의 적대자이다. 오늘날의 과학문명은 이 용의 형상을 닮으려고 하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유다서에 범죄한 천사들에 대하여 기록되기를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다”하였다. 천사는 왜 무엇 때문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것일까. 그의 범죄의 이유는 과연 무엇인가. 그것을 분명히 이해한다면 우리도 예수처럼 사탄의 시험이 올 때에 단호히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 히브리서에 기록되기를 “또 천사들에 관하여는 그의 천사들을 바람으로 그의 사역자들을 불꽃으로 삼으시느니라”(히 1:7) 하였고,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히 1:14) 하였다.
이로보건대 히브리서의 기자가 증거하는 바는 모든 천사는 부리는 영(성경은 한 번도 천사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르지 않았다)이며 구원 얻을 후사들(하나님의 아들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셨다 함이다. 그러함에도 섬기라고 보낸 영들이 하나님의 행세를 하며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났으므로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다’ 하였다. 흑암에 가두셨다의 ‘가두다’란 ‘테레오’로서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의 ‘지키다’와 같은 단어이다. 이 단어는 감옥에 가두다의 ‘휠라키조’의 의미가 아니다.
자기 지위를 지킨다란 본분(아르케) 안에 거함이다. 그러므로 흑암에 가두셨다란 흑암이 저희의 본분이 되었다 함이다. 저희가 하나님의 부리는 영으로서 보냄을 받았으되 빛가운데 거하기를 싫어하고 흑암을 취했으니 심판 때까지 그대로 죄악의 흑암을 본분으로 삼아 거기서 권세를 가지라 하심이다. 천사건 사람이건 자신의 자유의지의 선택에 따라 빛에 거할 수도 있고 흑암에 거할 수 있는데 그 선택이 자기 심판이다. 심판은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하는 것이다. 이 심판은 ‘심은 대로 거두는’ 의의 원리에서 오는 것이다.
본문에서 지위란 ‘아르케’로서 근본, 근원, 권세, 통치, 처음, 맏물 등을 뜻하는 말이다. 천사들의 자기 지위란 하나님의 부리는 영으로서 하나님의 사람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의 부림을 받는 것이다. 그럼에도 범죄한 천사들은 그 섬김의 자리를 불만하고 욕심을 내어 하나님의 후사들을 섬기기는 커녕 자신들의 종으로 삼고자 한 것이다. 이로써 저희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대적자가 된 것이다. 그러면 범죄한 천사들은 영벌에 처하게 될 하나님의 심판을 알지 못했던 것일까.
그들은 자승자박의 거짓 논리에 빠진 것이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사랑이신 하나님이 잠시 자신들이 범죄하였다고 영벌에 처하게 하실까.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이렇게 저희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한 확신범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알지 못한 것은 그들이 가진 사랑의 개념은 그들의 우상이었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사랑은 거짓과는 함께 하실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바다. 실상 하나님의 사랑은 거짓을 소멸하시는 불이다. 거짓 사랑은 범죄한 천사들만이 가진 논리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품고 있는 사랑의 논리에 자승자박되어 있다. 이것은 일종의 사랑 우상이다. 누구든지 자신의 논리 속에 빠져들면 거기에서 빠져 나오기란 지극히 어렵다. 이는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 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인생이 거짓 사랑 논리에 빠져드는 것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않고 있다는 반증에 다름 아니다.
천사들이 자기 처소(오이케테리온)를 떠났다는 것은 또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천사들이 자기의 신령한 몸을 떠났다는 의미이다. 기록된바 “과연 우리가 여기서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오이케테리온)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고후 5:2)함과 같이 저희는 도리어 하늘의 처소를 벗어버린 것이다. 범죄한 천사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베푸신 그 신령한 몸을 벗어버리고 동물이나 사람의 육체에 거하면서 그들을 몸종으로 삼아 지배하면서 ‘톨도트’의 시대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중생의 법과 때를 무너뜨리고자 한 것이다.
이 귀신들이 어느 누구에든지 원치 않는 자에게로 들어가면 그는 미친 자가 되며, 그 귀신을 원하는 자에게 들어가면 저는 귀신의 사자가 되어 하나님을 적대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을 뱀이라 부르시며 너희는 마귀에게서 났다고 하는 것은 이런 일인 것이다. 저희는 전혀 미치지 않았으면서 마귀의 이론으로 무장된 마귀의 자식인 것이다. 종교의 무서움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마귀를 하나님으로 알고 자기 안에 불러들이는 자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사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사람이 하나님의 모양으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것을 투기하고 또 자기의 영광에 교만하여져서 하나님의 경륜에 반기를 들고 스스로 부패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경시하고 ‘악한 자’가 된 것이다. 저는 인생을 종으로 삼아 세상의 임금이 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혼란시키는 거짓의 아비가 되었으며 성령의 역사를 훼방하는 훼방꾼이 되었다. 저는 광명한 천사로 가장하기 때문에 저의 역사가 성령의 역사인 것처럼 보이게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생각하기를 저희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zovfo" 조포스)에 갇혔든데 어떻게 활동하는가 하지만 이는 저희가 갇힌 그 흑암에 대하여 모르기 때문이다. 저희의 갇힘은 사람을 미혹하지 못하도록 잠그고 인봉한 것이 아니라 흑암의 영역에서 악한일을 행하며 영원히 빛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심인 것이다.
흑암에는 두 가지가 있다.
1)하나는 태초부터 있는 은혜의 흑암(스코티아)이다.
예수께서 유대인들에 “내가 선하므로 네 눈이 악하냐”하심과 같이 멸망의 흑암에 속한 눈은, 선을 악으로 악을 선으로 보는 단순한 관점인 것이다. 은혜의 흑암에 빛이 비취어 와서 거듭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데,
2)멸망의 흑암(조포스)은 빛도 흑암도 삼켜 버리는 말씀의 영원한 흑암이다. 이 흑암은 빛을 흑암으로 삼고 흑암을 빛으로 삼는 뒤틀림이요, 왜곡이요, 거짓이요, 불의요, 불법이요, 반역이요, 악이요, 저주인 것이다. 스코티아(은혜)와 조포스(멸망)
유다서는 이 멸망의 흑암(은혜의 흑암에서 일어나는 조작된 흑암;저주된 흑암)을 ‘캄캄한 흑암’(oJ zovfo" tou' skovtou" -호 조포스 투 스코투스, the blackness of darkness, 흑암중의 흑암, 유 13)이라 하였다. 이렇게 되니 빛은 더욱 밝게 빛나고 흑암은 더욱 어둡게 된 것이다. 사도 바울은 저희에 대하여 공중(아네르)의 권세를 잡은 자라 하였다. 공중이란 공허한 곳인데 저희는 허무로 돌아갈 욕심을 움켜쥐고 사람의 숨통을 조이고 있는 것이다. 공중이란 하늘도 아니요 땅도 아니다.
저희는 허공에 처해 있으므로 뭇별 위에 올라 보좌를 베풀려 하지만 하나님이 이를 허락지 않으시므로 큰 날 심판 때까지 밑바닥 없는 허무의 수렁에 갇혀서 불법을 저지르다가 결국은 불못에 던지울 것이다. 그리스도의 은혜 아래에 있으면서도 실상은 멸망의 흑암에 처한 자들이 많으니 저희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색욕거리로, 돈벌이로, 교권으로, 세상에서 출세의 수단으로, 밥벌이로, 가업의 수단으로 하여간 세상이 원하는 그 무엇을 얻는 수단으로 삼고 있는 자들인 것이다. 욕심을 파먹고 사는 구더기의 형상이 저희 것이다.
사탄은 하나님의 적대자로, 세상 임금으로, 공중의 권세 잡은 자로, 마귀로, 귀신의 왕으로, 옛뱀으로, 용으로, 거짓의 아비로, 악한 자로, 참소자로, 시험자로, 살인자로, 거짓을 행하는 자로, 온 천하를 꾀는 자로 역사하고 있다. 만약 당신의 이들중 어느 하나를 닮았거나 닮고자 했거나 닮고자 한다면 당신의 형상이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 알 수 있으리라. “너희가 나를 누구라 하느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내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주여 그리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나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당신도 이렇게 베드로처럼 주는 그리스도라 고백하면서 실상은 사람의 일로 그리스도를 책망하고 있다면 당신이 사탄인 것이다. 베드로를 책망하시던 예수께서 당신에게는 옳다 하실 것 같은가. 그러므로 우리는 이 욕심의 미망에서 깨어나지 않으면 그리스도를 좇으면서 그리스도를 넘어지게 하는 적대자가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아담은 누구인가.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께 생명의 숨을 받아 산 영혼의 정체성을 가지고 에덴 동산에 들어온 그 사람이다. 그 옛날 뱀이나 소나 양이나 곰이나 돌이나 해나 달이나 바위나 그 무엇이든 피조물을 신으로 알고 섬기며 경배하던 시대에 산 영혼의 정체성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으니 참으로 복된 자였다. 그런 그가 그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나고 계명을 일부러 잊고 미혹되어 뱀이란 욕심의 우상을 좇았으니 이 얼마나 슬픈일이 아니랴. 형제들이여 우리도 이와 전혀 다르지 않으니 아담만 바라보며 원망하거나 한탄할 일이 아니다.
나와 너와 우리가 경계심을 늦추고 있을 때 그 욕심의 뱀은 너와 나와 우리의 허를 찔러 넘어트린다. 기록된바 “뱀(욕심)이 그 간계로 이와를 미혹케 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한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도 용납하는구나”(고후 11:3-4) 하였다. 뱀이 하와에게 움켜쥠의 복(?)을 전하여 주었을 때 저는 그것을 잘도 받아들였던 것이다. 여자는 뱀의 간계를 진리로 받았다.
이는 하와의 영성결여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영의 눈이 밝아져야 함에도 하와는 그 육의 눈조차 온전하지 못했다. 성경에는 두가지 눈이 제시되어 있다.
1)하나는 시편 기자가 말한 것처럼 “내 눈을 열어(갈라)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나바트) 하소서”(시 119:18)하는 ‘영의 눈’(계시의 눈)과 또
2)하나는 뱀이 말한 것처럼 ‘육의 눈’이 열려(파카) 세상 일을 잘 알아보는 야망의 눈이다. 하나님은 아담으로 하여금 신령한 눈이 열리기를 바랐더니 뱀의 개입으로 말미암아 욕심을 성취하기 위하여는 무엇이든지 하는 간계(파노르기아)의 눈이 열리게 되었다.
사탄은 아무도 동일한 방법으로 유혹하지 않지만 그 내용은 언제나 동일한 탐심이다. 그러나 당신이 신령한 자가 되었으면 사탄은 또한 그에 걸맞는 시험으로 다가오게 될 것이다. ‘나바트’(보다)란 마음이 청결한 자에게 오는 하나님 바라봄의 은혜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이라 하셨다. 이는 저희가 들에 기어다니는 뱀이며 독사의 새끼들이라는 의미가 아니요 그들의 마음의 형상이 뱀이요 독사라는 의미인 것이다. 사람들은 대개 바리새인들만 뱀이요 독사의 새끼들인 줄 알지만 욕심을 좇는 자는 나도, 너도, 우리도, 너희도, 그들도 모두 뱀이요 독사의 새끼임을 알지 못한다.
우리가 정말 애통하고 슬퍼해야 하는 것은 우리 내면에 있는 이 뱀의 형상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교회밖에만 뱀이 있는 줄 알고 있으나 우리 안의 뱀들은 귀머거리 독사가 되어 우리 자신을 물어 뜯는 것이다. 그 물어 뜯음이 무엇인가 하면 탐심으로 행하는 설교요, 기도요, 예배요, 봉사요, 선교요, 헌금이요 하여간 우리가 욕심으로 행하는 그 모든 움켜쥠(하르파조)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라’(요 3:14) 하셨다. 우리가 다 아는 바대로 이 말씀은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그가 십자가에 못박히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면 예수께서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과 자신의 들림이 무엇이 같다고 말씀하시는 것인가.
예수의 몸이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은, 불뱀을 장대에 단 것과 같이 죄의 근원인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는 실상이라 함인 것이다. 이는 ‘영안에서 가난한 자’가 되어 그가 가지신 모든 것을 비우신(케노오) 예수의 형상을 우리로 본받게 하려 하심인 것이다.
이스라엘이 출애굽시 광야에서 여호와와 모세를 원망한 것은 그들의 욕심의 형상이 밖으로 드러난 모양이다. 그들은 실상 불뱀이 되어 여호와와 모세를 욕심의 이빨로 물어뜯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형상이 불뱀이 되었음을 일깨워 주시려고 하나님이 불뱀을 그들에게 보내신 것이다. 그들 마음속의 불뱀이 죽임을 당하지 않으면 그들 모두가 멸망하게 될 것이었다. 아담도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고는 불뱀이 되어 여호와 하나님을 물어 뜯었다.
기록된바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실과의 나무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 3:12)하였다. 하나님이 여자만 데려다 주시지 않았으면 그 실과를 먹지 않았을 것이며, 데려다 주셨을지라도 그 실과만 아내가 주지 않았으면 먹지 않았을 것이니 모든 원인은 여호와 당신이 지셔야 하는 것인데 무엇을 물으십니까 하는 뜻이다.
이렇게 아담에게 하나님이 물어 뜯기니 하나님인들 어찌 아프지 않으셨겠는가. 사실 이 물어 뜯음은 아담의 자기 심판이요 자기 저주인 것이다. 기록된바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나무의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아루라)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창 3:17) 하였다. 여기서 다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이 땅을 저주하신 것이 아니다. 아담이 땅에 저주를 가져온 것이다. ‘이루라’는 아라르(저주하다)의 수동 분사이다. 이미 아담이 땅에 저주를 불러들인 것이다.
옛날에는 인간이 불러들인 이 저주가 확실하게 무엇인지 나타나지 않더니 사람이 많아지고 욕심을 마음껏 좇을 수 있는 과학 기술이 발달하자 땅과 바다와 하늘과 인간과 만물이 저주받아 신음하는 소리가 온 천지에 가득하게 되었다. 당신은 당신의 욕심이 불러온 사망과 저주(공해)의 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는가. 아담(인생)의 가슴에 돋아난 가시와 엉겅퀴가 그 자신은 물론이요 온 세상을 마구 찌르고 죽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욕심이 가져오는 자기 심판인 것이다.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하나님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3-4) 하였다. 육신에 죄를 정함이란 인간의 정과 욕심과 하나님을 떠난 자의적 논리를 죄로 정함인 것이다. 이것들이 사람으로 하나님의 모양을 닮지 못하게 하는 죄의 본질인 것이다. 베드로가 예수께 사탄(적대자)이라고 불리움을 받은 것은 베드로가 아무리 예수를 사랑하노라 하였어도 너는 네 욕심의 형상을 따라 움직이고 있으니 그 사탄은 나와 상관이 없는 자라 하심인 것이다.
변화되기 전의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바라보던 그 욕심의 눈이 오늘날 우리가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그 눈이며 에덴 동산에 들어와 있던 아담이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를 바라보던 그 눈이다. 아담이나 야곱이나 베드로나 우리나 그 욕심의 형상이 십자가에 못박히지 않는한 우리는 어느 때건 그릇행하여 제 길로 가면서 하나님의 적대자가 되고 마는 것이다.
오늘날 슬프게도 세상과 천국을 함께 가지려는 형제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이들은 “좋은 것이 좋지”하며 편리하게도 양다리 걸치기를 일삼는다. 성경은 이런 이들에게 이르시되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찌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를 높이시리라”(약 4:8-9) 하였다. 우리는 성령의 책망을 바로 들어야 한다.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딤후 4:3-4) 하였다.
참으로 오늘의 기복신앙은 이 예언의 말씀에 부합된다. 오늘날 사람들은 바른 교훈을 싫어하고 자기의 욕망을 채워주는 스승을 두고자 힘쓰고 있다. 또 사람들이 온통 세상 욕망을 좇아 사니까 너도 나도 그것을 채워줄 스승임을 자처하고 있다.
마치 세상일에 수요가 있으면 공급이 생기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러서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될 것인가. 예수 말씀하신 것처럼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전해져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들도 육신을 가졌으므로 미혹되지 않으려면 세상 사람이 무엇을 유익(선)으로 여기는지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래야 자기 지혜를 욕심을 좇는데 쓰지 않고 도리어 욕심을 죽이는데 쓰면서 청결한 마음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것이 곧 ‘영안에서 가난한(비우는) 자’가 되는 일이다. 이 비움의 도에 대하여 기록되었으되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될 것을 취할 것(움켜쥘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8) 하였다.
또 기록되었으되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빌 3:7-9) 하였다.
뱀은 곧 내안의 욕심이다. 저 멀리 있는 뱀(사탄)같은 것은 벌써 예수께 심판 받아 그 머리가 깨어져 힘을 쓰지 못하고 있는 지 오래다. 우리의 욕심을 애통하자. 그러면 천국으로 위로 받게 될 것이다. 사탄이 얼마든지 광명한 천사로 가장하는 것처럼 욕심의 전파자도 얼마든지 자기의 식양을 아름답게 꾸밀 수 있다. 기록된바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마 7:15) 하였다.
겉이 양이면 속도 양이어야 형상과 모양이 일체이지만 이리는 자기의 움켜쥠을 감추고 양의 모양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이리는 욕심의 본체 곧 뱀인데 그 이리가 딴데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구든지 자기의 욕심(이익)을 속에 감추고 겉으로 생명을 말하며, 사랑을 말하며, 거룩을 말하며, 영을 말하면 그가 곧 양의 옷을 입은 이리이다. 인생들은 너나 할 것없이 이런 이중성을 가지고 산다.
그럼에도 자기 자신만은 그것에서 제외되었다는 논리(가시)를 편다. 그러면 그는 계속 이리로 머물게 된다. 당신 스스로가 이리임을 자각하지 못하면 애통하지도, 이리의 형상에서 벗어나고자 하지도 못한다. 괜스레 양의 옷을 입고 양인척해 보아야 위선자요, 저주된 자 일뿐이다. 자, 우리 이리들아, 양의 옷을 벗고 우리가 이리임을 주께 자복하고 주께 고침을 받자! 우리가 솔직해지지 않으면 주께서 우리를 고쳐 주시고자 문밖에서 기다리고 계실지라도 고침을 받을 수 없다.
민수기 25장에는 뱀의 입(비느하스)이란 이름을 가진 아론의 손자가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한 일이 기록되어 있다. 광야에서 많은 사람이 바알 부올의 제물을 먹고 모압 여인들과 음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진노하셨다. 이스라엘 진중에 염병이 일어났다.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명하여 백성의 두령을 잡아 목베어 태양을 향해 여호와 앞에 매달으라 하시니 이스라엘 온 회중이 회막문에서 울었다. 그 때 마침 음행에 가담한 이스라엘 자손 한 사람이 모세와 온 회중 가운데로 미디안의 한 여인을 데리고 왔다.
이 때 비느하스가 창을 들고 쫓아가서 그 남자와 여자의 배를 꿰뚫어 죽이니 염병이 그쳤다 하였다. 그 염병으로 죽은 자가 이만사천명이나 되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나의 질투심(열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종에서 나의 노를 돌이켜서 나의 질투심으로 그들을 진멸하지 않게 하였도다. 그러므로 말하라. 내가 그에게 나의 평화의 언약을 주리니 그와 그 후손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이라. 그가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하였음(카파르)이니라”(신 25:10-13) 하였다.
이 사건은 뱀이 뱀을 삼키던 일(출 7:12)과 놋뱀이 장대에 달린 일(신 21:9)과 예수의 십자가와 함께 우리 안의 뱀이 죽어야 하나님의 자녀가 사는 하나님의 뜻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열심을 품은 자가 하나님 앞에서 그 백성을 속죄하는 일을 하게 되는 형상변화의 예표인 것이다. 뱀의 입을 가졌던 자가 하나님의 백성을 무는 그 뱀을 창으로 꿰뚫어 죽이는 일을 하게 되는 것이 형상 변화의 요체이다. 뱀의 입이 하나님의 진리의 창(검)으로 변화되어 배를 신으로 섬기는 그 뱀의 본체를 죽여 없앤 것이다.
우리 모두 뱀의 입을 가지고 서로 물고 물리며 살고 있지 않은가. 그리스도의 구원은 이 뱀의 입을 가진 자로 하여금 성령의 검을 가진 자로 변화시키려 함이다. 그러함에도 우리중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의미를 작은 뱀이 더 큰 뱀으로, 작은 임금이 더 큰 임금으로 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것을 일컬어 심판되었다 함이며 저주 되었다 함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바로 알자.
기록된바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찌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찌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사 1:18) 하였다.
하나님께서 오라 하셨으니 우리가 즐겨 들으면 그의 언약대로 우리의 죄를 눈과 같이 양털과 같이 희게 하여 주시며 평화의 언약으로 위로하여 주실 것이다. ‘서로 변론하자’란 대화를 나누어 진실을 확증하자는 의미다.
그러면 하나님과의 변론을 통하여 당신이 확증한 진실은 무엇인가. 아직도 하나님이 변론하자 하시는 그것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고 당신의 욕심은 그대로 살아있어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로다(다마:같으리로다)”(사 14:13-14)하고 있지 않은가.
이것이 움켜쥠의 야망 곧 뱀의 꾐이요, 아담이 택했던 저주의 길이다. 인생은 모두 이 길을 가고 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우리로 그 길에서 돌이켜 여호와의 길(들)로 들어오라 부르신다. 회개란 우리가 가던 그 길이 무엇이든지 자기의 길을 돌이켜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 길로 들어섬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물어 뜯고 있는 그 뱀을 장대에 매어 달자.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사 5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