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창 2:19-25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그 이름이라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 찌로다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
1.에덴 지역에 보석이 많았던 것처럼 사람의 심지(心地)에도 많은 보석이 있다. 아담의 재능과 지식과 기억들이 보석이 아니면 무엇이랴. 하나님이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새를 아담이 어떻게 이름 짓나 보시려고 그에게로 이끌어 오셨다 하였으니 이는 그의 심지에 저장되어 있는 보석과 같은 그의 재능과 지식과 기억들의 용도를 어떻게 정하여 생명의 삶을 사는가 보려 하심이었다. 신령한 부름 속으로 불려온 사람이 그 심지의 보화들을 영적으로 사용함은 너무나 당연하다.
살아 움직이는 생물이란 자신의 심지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는 재능과 지식과 기억들이며 이것들을 어떻게 이름 짓느냐는 곧 자기 정체성의 표현, 즉 존재태가 되는 것 아니겠는가. 아담은 생물의 이름 짓기를 통해 생물들은 무엇이며 자신은 누구이며 나아가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묻고 답하는 자기 정체성의 확인 과정을 거치고 있었다. 만약 아담이 소를 향하여 소라 하지 아니하고 너는 나의 신(神)이라 하였다면 그는 동물 이하의 형상임을 스스로 증거하는 것일 것이요, 뱀을 향하여 너는 천하에 뛰어난 지혜자라고 하였다면 그는 언젠가 뱀의 지혜에 속아 뱀에게 종노릇할 것이었다.
이와 같이 ‘이름 짓기’는 아담에게 뿐만 아니라 우리 인생 모두에게 그 정체성의 발현인 것이다. 즉, 그 속사람의 모정체가 스스로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의 삶 곧 그 자신의 말이나 글이나 행동으로 자기 속사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일컬어 모양이라 하는 것이다.
2.아담은 참으로 ‘그의 마주하여 있음과 같은 돕는 자’를 찾고 있었다. 그러나 각종 생물들 중에는 마땅한 배필을 발견할 수 없었다. 이 때의 아담은 참으로 산 혼이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배필이 될 수 없는 그 무엇으로 배필을 삼고 있는가. 때맞추어 하나님은 아담의 내면의 소원대로 아담을 도울 아내를 데려다 주시기로 하셨다. 기록된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느니라”(요 6:44)함과 같이 하나님이 그의 기쁘신 뜻대로 아담을 에덴동산에 두셨고 또한 그의 기쁘신 뜻대로 아내를 데려다 주시기로 하셨다. 이는 아담 스스로는 아내를 맞이할 수 없었음이다.
그런데 아내를 데려오심의 과정이 그리스도께서 그 신부를 맞이하시는 그것과 같으니 놀랍지 아니한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었다” 하였다. 이와 유사한 잠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도 왔었다. 그러나 진정한 죽음의 잠(육신의 할례)을 거쳐 신부를 얻으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아담이 깊이 잠들매 하나님이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셨다’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과연 창세기 2장 21절을 이렇게 읽을 수밖에 없는가. 오랜 세월 성경이 이렇게 읽혀 왔기에 우리는 도리어 깊은 영적 잠에 빠져든 것은 아닌가.
3.“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셨다”의 원문은 ‘바이벤 예바 엘로힘 에트 하쩰라 아쉐르 라카 민 하아담 레이샤’이다. 정역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갈빗대를 여자를 위하여 세우셨다”이다. 이 얼마나 의미가 다른가. 그러면 갈빗대로 여자를 만들었다는 해석은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인가. 이는 아담이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임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정작 ‘여자를 위하여 갈빗대를 세웠다’라고 하면 도리어 그 의미가 통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결국 원문과는 다른 방식으로 읽을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이런 오해는 구약에서만 일어난 일이 아니다. 신약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말미암아’(디아 피스테오스 예수 그리스도)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롬 3:22)로 읽고 있지 아니한가. 그리하여 온 세상은 그리스도의 믿음이 아닌 자기 믿음으로 사는 자들로 가득하게 된 것이다. 하여간 위 문장에서 ‘에트’는 목적어를 취하는 대격부호다. 즉 ‘에트 하체라([l�Xeh' Ata쾳)’는 ‘그 갈빗대로’가 아니라 ‘그 갈빗대를’인 것이다. 또한 ‘레이샤(hV�ail])’는 ‘여자를’이 아니고 ‘레‘의 용법상 ‘여자에게’ 또는 ‘여자를 향하여(위하여)’이다. 하체라(그 갈빗대)가 구문상 목적어임이 분명하고 ‘레이샤’가 ‘여자를 위하여’이므로 결국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셨다’가 아니라 ‘그 갈빗대를 여자를 위하여 세우셨다’가 되는 것이다.
창세기 2장을 창세기 1장의 보조기사라는 전통적 선입관으로 읽는 한 창세기 2장에 드러난 거듭남의 진리는 숨겨지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를 통하여 그 말씀을 읽으면 그 의미는 너무도 분명한 것이다. 그럼에도 아담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들었다는 신화는 깊이 뿌리 내렸다. 그러므로 이를 일컬어 지혜로운 자들이 스스로 빠져든 깊은 잠이라 아니할 수 없다.
하나님이 아담의 옆구리에서 갈빗대를 취하였다 하였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창에 찔려 물과 피를 흘리실 표상이며, 그 갈빗대를 여자를 위해 세웠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구속하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 세워지신 것처럼 아담의 갈비뼈가(예수 그리스도, 말씀) 아내를 얻기 위한 희생 제물로 세움을 입었다는 의미다. 또한 아담이 깊은 잠에서 깨어났으니 이는 부활의 그림자다. 하나님은 어찌하여 아담으로 아내를 얻게 하심에 있어 이런 피 흘림의 희생이 일어나게 하셨는가. 사랑은 곧 피 흘림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아담의 갈빗대는 아담의 피 흘림 곧 사랑의 징표다. 사랑의 고난을 담당하는 자가 남편이다. 아내를 맞이하는 자는, 모름지기 그 속사람이 제사장이 되고 그 겉 사람을 제물로 삼아 피 흘림의 사랑을 할 수 있는 자이어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계시다.
누구든지 자신의 겉사람, 즉 욕심으로 사는 육신을 베어내지 아니하고는 사랑의 속살로서 그 아내와 하나 될 수 없다. 이와 같이 아내는 남편 안에 있는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남편과 하나 될 수 있는 것이다. 아담은 이 때 이 일로써 부분적으로나마 그리스도의 표상이 되었다. 그러므로 아담의 갈빗대란 여자를 만든 ‘원재료’가 아니라 아내를 맞는 아담의 사랑의 징표요 언약물이다. 사랑만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한다. 이제 그만 아담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들었다는 그 깊은 신화의 잠에서 깨어나서 그리스도와 하나 된 사랑의 삶을 통하여 부활에 동참하자.
4.구약은 ‘바나’(세우다)와 ‘에트’와 ‘레’를 사용하여 ‘무엇을 위하여 무엇을 세우다’의 용법으로 쓰고 있다. 가령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다”(창 8:20)는 ‘hw:�yl'�j"B�z�i j"nO��,YI뢺" 바이벤 노아 미즈베하 라이호와’이다. 이 문장엔 ’에트‘란 대격부호가 없어도 히브리어를 아는 사람이면 ‘미즈베하’(제단)가 목적어임을 누구나 알 수 있다. ‘라이호와’는 ‘여호와를 위하여’ 즉, ‘레’의 용법이다. 만약 이 문장을 창세기 2장 22절처럼 해석하여 ‘노아가 단으로 여호와를 만들었다’로 한다면 이처럼 기괴하고 어리석은 문장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더욱이 창세기 22장 22절의 말씀에는 ‘하체라’(그 갈빗대)가 목적어임을 가리키는 선행사 ‘에트’까지 쓰이고 있지 아니한가.
5.아담이 그 아내를 맞이하면서 “이제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하였다. 그는 피 흘림 후 아내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다. 아내가 나타나자 ‘이제’(자 보아라)는 기쁨의 탄성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신부를 맞이하는 탄성이 아니고 무엇이랴. 사도바울은 이 일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라 하였다.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엡 5:32) 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영 안에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교회가 그의 지체가 됨이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이라는 비유로 계시되었다.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는 직역하면 “이것이 남편에게서 취함을 입었은즉 아내라 칭하리라”인 것이다.
지금 여기서 성경이 말하는 바는 남녀의 성 관계가 아니라 남편과 아내, 곧 사랑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머리(남편)와 지체(아내)의 영적 일체성을 말함인 것이다. 이쉬(남편)에서 이샤(아내)가 나왔듯이 그리스도(남편)에게서 그리스도인(교회)이 나온 것이다. 그리스도는 근원이시요 교회는 톨도트이다. 그리고 그 둘은 영 안에서 하나다. 육신의 생명은 피 안에 있음과 같이 그리스도와 교회의 생명은 영안에 있음을 드러내는 말씀인 것이다.
6.“이러므로 남편이 그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 하였다. 남편이건 아내이건 그 부모를 떠나지 아니하고는 결혼이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럼에도 남편이 부모를 떠난다 하였으니 이는 남편이 씨를 가진 경작자로서 아내에게서 인자(人子)를 낳기 때문이다. 남편이 부모를 떠나 아내와 마주대하며 서로 돕는 자가 되어 가정을 이룸이 성경이 말씀하는 결혼이다. ‘한 몸을 이룰 찌로다’는 ‘dj�a, rc�b;l] Wy챛;w�베하이우 르바사르 에하드’(한 육체를 위하여 있을 지로다)이다.
두 사람은 몸은 둘이지만 육체로는 하나가 되도록 하라 함인 것이다. 남편의 사랑은 아내를 위하여 있고 아내의 사랑은 남편을 위하여 있을 때 둘이 하나로 존재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교회가 사랑 안에서 서로를 위하여 있음과 같다. 이는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으로서 그 마음의 지성소에 성령이 계시면서 성령은 그 성전을 거룩케 하시고 성전은 그 성령을 좇아 살게 하심과 같다. 이렇게 하여 우리 안에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져 가는 것이다.
7.성경은 벗음과 입음에 대하여 무엇이라 말씀하시는가. 벗을 것은 벗고 입을 것은 입으라 하신다. 에덴동산에서 벗을 것과 입을 것을 구분하신 것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생명나무이다. 사망(욕심)을 벗고(먹지말라) 생명(사랑)을 입으라(먹으라) 하신 것이다. 아담과 그 아내는 이 벗음과 입음의 영적 의미를 알지 못했다. 기록된바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하였다.
두 사람은 벗음과 입음의 계명을 가지고는 있었으나 욕심을 벗지도 사랑을 입지도 못하고 있었다. 계명은 삶이 되어야 진리이다. 그러나 이 말씀을 다만 육체적 벗음만을 말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은 벗고 지냄이 무슨 낙원 상태인 줄 알고 입어야 할 것조차 억지로 벗으려 한다. 아담과 그 아내의 벗음은 원시적 육신의 벗음도 어린 아이 같은 순진함도 아니다. 저희의 벗음은 하나님의 구원의 예정에서 벗어난 영과 육이 함께 벗은 동물적 형상을 드러내고 있다. 동물의 형상으로 살면 입을 것도 벗을 것도 없으며 무엇을 벗었다고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저희가 벗었다함은 말씀이 왔는데 그 말씀을 입지 못하였으니 벗은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짐이 입음이다.
기록된바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 찐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1-24) 하였다. 저희는 ‘산 혼으로’는 있었으나 ‘살려주는 영으로’ 거듭나지 못하고 있었다. 즉, 옛 사람을 벗고 말씀으로 지어진 새 사람을 입지 못하고 있었다. 저희는 동산에서 남의 시야에서 벗어나 있었으므로 육체로도 벗고 있었지만 더우기 진리를 입지 못하고 있었다. 이는 그 때 만의 일이 아니요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식양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인들은 벗어야 할 그 욕심을 벗지 않고 그것을 더욱 두텁게 입고 부끄러운 줄 모르고 아멘 할렐루야를 노래하고 있다. 그것은 입은 것이로되 하나님께 대하여는 벌거벗음이다. 아담과 아내 두 사람의 벗음은 하나님께도 뱀에게도 숨김없이 드러나 있었다. 이와 같이 우리의 벗음도 온 천하에 백일하에 드러나 있어도 우리 또한 벗은 줄 모르고 있으니 또한 부끄러워 하지도 아니한다.
8.동산 안에서 아담과 그 아내의 습관적 벗음은 오늘의 우리에겐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입지 않고(벗고) 엉뚱하게 교회 건물이나 신부나 목사 등을 옷으로 여기고 있다. 욕심의 옷을 벗지도 않고 그 건물 안에 숨어 들어가기만 하면 의를 입는 줄 알고 있다. 교회는 입음이 무엇인지 벗음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동물의 형상을 드러내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소경된 인도자들은 벗어야할 그 누더기 옷(사람의 의 곧 종교, 윤리, 도덕, 권세, 돈, 기복, 사업, 교권, 사회정의 등등)이 우리가 입어야 할 옷이라고 진리 아닌 거짓을 목청껏 외쳐대고 청중은 아멘으로 화답한다.
사람들은 아담의 기사에서, 바리새인의 기사에서 또는 예수의 기사에서 자신의 벌거벗음을 보지 못하고 자기와 상관없는 하나의 이야기꺼리와 지식을 얻는다. 그러나 그 지식은 사탄이 되어 나와 너와 우리를 죽이고 있다. 에덴동산이 곧 당신의 마음의 동산이요 생명나무가 곧 당신이 사랑으로 생명을 입는 부활의 옷이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당신의 욕심을 할례 하는 믿음의 옷임을 알지 못하면 결국 당신은 아담의 식양을 좇아 멸망으로 치닫고 있음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아담은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다. 시공을 초월하여 나도 너도 우리도 너희도 그들도 모두 첫 아담이다.
하나님의 뜻은 육신에 속한 우리 첫 아담이 죽고 영에 속한 둘째 아담 곧 인자(人子)로 살게 하려 하심에 있는 것이다{히10:9). 기록된바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고전 15:49) 하였다. 우리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하나님은 우리로 그리스도의 믿음을 좇아 그리스도의 형상(하나님의 모양)을 본받게 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셨다. 이것이 아담을 에덴동산으로 이끄시고 그의 아내를 데려다 주신데서 드러나고 있는 하나님의 인간 구원의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