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암이란 무엇인가?
A. 창조의 토대와 어두움
성경은 선언하기를 태초부터 흑암이 있었다 하였다(창1/2). 그러면 그 흑암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왜 태초부터 있었으며, 그것은 선인가 악인가. 만일 악이라면 선하신 하나님이 악도 창조하셨는가.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말씀을 깨닫고자 했다면 누구든지 이런 의문을 가져보았을 것이다. 하나님은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흑암과 빛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 흑암과 빛이 성경의 주제다. 이 흑암과 빛은 사람 곧 아담에게 무슨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으며 오늘의 우리에게는 무슨 의미를 지니는 것인가.
창세기에 기록되었으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창 1:1-5) 하였다.
이 말씀은 사랑의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최초의 선언이며 또 모든 말씀의 뿌리다. 천하에 이보다 귀중하고 위대한 선언도 없다. 그럼에도 필자는 이 말씀의 의미를 몰라(아직도 모르기는 마찬가지이지만)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영광의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는데 혼돈과 공허와 흑암은 어디서 어떻게 생겨 나왔을까 하였다.
이것은 필자만의 의문이 아닐 것이다. 이것들은 도대체 무엇인가 하였지만 풀길이 없었다. 혹시 이것들이 하나님의 창조의 일을 사탄이 방해해서 생긴 것이라면 사탄은 무엇이며 언제부터 있었는가라는 또 다른 의문이 일어났다. 사실 그런 의문도 없이 창세기를 읽는다면 쇠귀에 경읽기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성경의 문자만을 읽는 것은 나를 죽이는 일이다.
기록된 바, “문자는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라”(고후 3:6) 하였음이다. 창세기 본문은 그런 의문을 전혀 풀어주지는 않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였고,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였다. 이 기사는 하나님의 창조 역사라는 것은 분명한데 그 진정한 영적 의미를 알 수 없어 필자는 고뇌에 고뇌를 거듭하였다.
그런데 은혜롭게도 이 흑암에 대하여 이사야서에 기록되었으되, “나는 여호와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노라(사 45:6-7)” 하셨다. 참으로 놀라운 말씀이었다. 여호와 외에 다른 신은 없으며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노라」 하셨으니 하나님의 이 말씀은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다. 어두움을 악으로 알면서 선하신 하나님이 창조하신 하늘과 땅에 흑암이 어떻게 왔을까 생각하고 있는 필자의 미망이 그 말씀으로 단숨에 부수어졌다.
그때까지 나는 마음속으로 하나님은 빛이실 뿐이지 어두움과 관련이 없으시며 어두움을 창조하실 분이 아니라고 굳게 믿었기에 이사야서를 한두 번 읽은 것도 아닌데 그 말씀이 진정한 영적 의미로 와 닿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까지 내가 알고 믿던 하나님은, 다만 나의 상상과 선입관과 교리 등이 만들어낸 허상 곧 우상이었던 것이다. 그 우상이 깨어진 이후로는 나에게 달라붙어 있는 다른 우상을 제거하며 말씀이 계시하는 하나님을 뵙고 내 안에 모시고자 여념 없이 지내게 되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시는 하나님은 참으로 사랑의 하나님이셨다. 어두움이 사랑과 어떤 관련을 가졌을까 의문을 가지실 분이 많을 것이다. 의문을 갖는 것이 이 글을 읽는데 더욱 도움이 될 것이므로 의문을 가지시기 바라는 바이다. 또 어두움이 없이는 창조도 불가능하다는 것도 미리 말씀드리고자 한다.
창세기 1장 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였다. 그리고 2절에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였다. 그러니까 2절에서 이미 흑암을 비롯하여 혼돈, 공허, 깊음이 있었다 하였으니 그것들은 1절에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그 창조에 다 포함되었던 것이다.
선하신 하나님이 그것들을 창조하셨으니까 흑암도 악이 아님은 분명한데 그렇다면 그것들은 무엇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남았다. 3절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하였다. 아하! 그렇다면 어두움은 빛이 들어올 바탕으로서 먼저 창조되었구나 하였다. 마찬가지로 공허는 생명이 들어올 바탕이며 혼돈은 지혜가 들어올 바탕이며 깊음은 땅이 제도될 바탕이었다. 그런즉 흑암과 혼돈과 공허는 만물을 받아들일 강보요, 그릇이요, 바탕이었다.
이사야는 말하기를 하나님은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신다 하였으므로 창세기 1장의 어두움은 창조된 것이요 빛은 지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창조와 지음(새롭게 하심)은 짝을 이루면서 하나님의 태초부터의 경륜을 완성하신다고 믿게 된 것이다. 이것은 있음(being)과 되어짐(becoming)의 관계인 것이다. 그래서 만물을 창조하시고 새롭게 완성하시는(지으시는) 경륜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읽으니 거듭남(신생)도 그것이며,
처음 것이 나중 되고 나중 것이 처음 되는 것도 그것이며, 할례도 그것이며, 임마누엘도 그것이며, 하나님이 아담을 에덴동산으로 이끄신 것도 그것이며, 또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으로 이끄신 것도 그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천국으로 이끄시는 것도 그것임을 알게 되었다. 또 이것은 성경 말씀이 다른 모든 종교의 경전과 무엇이 다른지를 명확히 계시하시는 성별의 말씀이기도 했다.
다른 모든 종교와 세상의 가르침은 수양과 깨달음을 명하며 회복(원시반본)을 목적으로 하지만 성경은 회복이 아니라 새로이 거듭남(신생)과 온전해짐을 말씀하신다. 창조하시고 또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구원은 없다. 이 하나님의 경륜으로 기독교의 유전을 살펴보니 그 유전이 다른 모든 종교와 세상의 가르침과 같다는 것을 알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기록된 바,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였다. 어두움은 빛이 들어올 바탕이니 그 하나만으로는 좋을 리가 없고 빛이 들어오니 어두움에 비취는 그 빛을 하나님이 보시니 좋았던 것이다. 어두움뿐 아니라 악의 문제도 여기서 해결을 보게 되었다. 태초부터의 하나님의 경륜은 어두움에 빛이 비취어 오게 하는 것인데 어두움만 있고 빛이 비추어 오지 않거나, 공허만 있고 생명이 생기지 않거나, 혼돈만 있고 지혜가 들어오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이 아니다.
더욱이 어두움에 어두움을 일으키고, 공허에 공허를 일으키고, 혼돈에 혼돈을 일으킨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경륜에 정면으로 반하는 것이다. 어두움에 어두움을 일으키는 것은 자유의지를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다. 그것은 이중의 어두움이며 영원한 흑암이다. 성경이 악이라고 말씀하시는 흑암은 이와 같이 흑암이 겹쳐 빛이 비추어 오지 않는 그 흑암이다. 이것은 다만 인간이 의식적으로 선택한 조작된 흑암이며 욕심의 흑암이며 영적 흑암이다.
성경이 흑암과 빛이라는 같은 단어를 쓰고 있지만 밤과 낮, 흑암과 빛은 있음 그대로이나 인간의 마음으로부터 일어나서 생긴 영적 흑암 그것은 악인 것이다. 사탄이나 사람이 하나님께 대하여 반역하는 것은 이 흑암 속에 일어나는 하나님의 빛을 거절함에서 비롯되는 것이기에 거듭된 흑암인 것이다.
창조와 완성(새롭게 하심)의 관계성은 무엇인가. 창조란 무(無)에서 유(有, being)를 일으킴이며 완성(becoming)이란 유(有)에서 유(有)를 일으킴이다. 하나님의 천지창조에 있어서 하나님께 정말 없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다. 빛과 생명과 지혜는 하나님께 있었다. 그러므로 없었던 것은 창조되었고 있었던 것은 지어졌다(넣어 주셨다). 그렇다면 어째서 하나님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없이는 지혜와 생명과 빛을 넣어 주실 수 없으셨는가. 이는 그의 유일성, 완전성, 무한성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하나님은 온전한 빛이시다. 그 온전한 빛 안에 아무리 다른 빛을 창조하시고자 하셔도 하나님의 온전 성은 소멸하는 불이 되어 있기에 그 다른 빛은 소멸되고 말 것이다. 하나님은 유일한 무한본체시다. 그 무한 본체 안에 아무리 다른 존재를 창조하시고자 하셔도 그 안에 다른 존재가 들어설 공허가 없다. 하나님은 온전한 지혜시다. 그 안에 아무리 다른 지혜를 창조하려 하셔도 그 온전한 지혜에 용납되지 못하고 소멸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유일성, 완전성, 무한성은 모든 것을 소멸하는 불이 되어 있으므로 그것들을 그대로 가지고서는 그의 사랑과 전능성조차 행사할 수 없으셨다.
가까운 예를 하나 들어보자. 태양은 지금 지구 위의 생물에게 빛과 열을 주어 그것들로 생명을 유지하게 하고 있다. 그런데 만약 무슨 이유가 있어 지구가 갑자기 태양에 이끌려 그것에 접근해간다면 어떻게 될까. 지구 위의 생물은 타서 없어질 것이다. 지금까지 지구 위의 생물을 살리던 태양이 도리어 소멸하는 불이 되는 것이다. 태양의 빛과 열기는 태양과 지구가 알맞는 관계성으로 유지될 때만 지구 위의 생명을 유지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온전한 것 앞에서 온전하지 못한 것의 존재의 바탕이 제거되면 온전하지 못한 것은 폐해진다(고전 13:10).
그러므로 하나님의 유일하고, 완전하고, 무한하신 절대성 안에는 아무 것도 용납되거나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또한 사랑이시다. 그 사랑은 무엇이라도 용납하고 존재케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의 사랑을 선행시키시고 그의 영광을 비우시는 십자가의 도를 그의 창조의 도로 삼으신 것이다. 이는 만물을 용납하시고 존재케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요술방망이를 두드려 무엇을 만들듯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그의 영광을 비우시어(찢으시어) 그것으로 전능자의 그늘이 오게 하신 것이다. 그가 유일자, 온전 자, 무한자가 아니었다면 도리어 십자가의 도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을 비우지 아니하시고는 용납과 존재의 터가 창조될 수 없기에 그리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약하심과 미련하심을 자취하셨다. 이 하나님의 약하심과 미련하심을 보지 못하고 그의 영광만을 보려는 자 모두 아담과 같이 하나님을 배반할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의 도는 멸망하는 사람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이라 하였다.
영광의 하나님이 그 영광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미련하심과 약하심을 자취하시니까 생명싸개와 지혜싸개와 빛 싸개가 창조되고 그 안에 만물이 담겨지게 된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홀로 그의 영광을 누리시는 것보다 그가 낳으실 아들들과 사랑을 나누며 사랑 안에서 저희가 온전케 되어 하나님의 영광에 동참케 하심을 더욱 기뻐하셨음이다.
하나님의 창조는 그의 높아짐에서가 아니라 낮아짐에서 비롯되었기에 하나님은 그의 영광을 주실 그의 아들들이 먼저 낮아지시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만물을 용납하고 존재케 하기 위하여 그의 창조의 도로 말미암아 영원부터 창조자가 되시고 구원자가 되셨다. 놀랍게도 악인지 선인지 알 수 없던 그 혼돈과 공허와 흑암은 하나님이 만물을 용납하시기 위하여 스스로 택하신 산고임을 알게 되자 마자 그간 필자의 하나님 이해는 곧 무지였음이 드러났다.
예수 말씀하시되,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요 16:21) 하셨다. 또 이사야서에 기록되었으되, “내가 해산하는 여인같이 부르짖으리니 숨이 차서 심히 헐떡거릴 것이라”(사 42:14) 하였다. 하나님은 그의 창조의 도로써, 예수는 그의 십자가의 도로써 산고 중이시다. 이는 그의 아들들을 얻는 기쁨을 누리시기 위함이다.
흑암의 영적 의미는 무엇인가. 히브리서에 기록되었으되,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3) 하였다. 실상 하나님 앞에는 흑암이 흑암이 아니며 공허가 공허가 아니며 혼돈이 혼돈이 아니다. 그가 모든 것을 아시며 그 마음의 원대로 행하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다”는 말씀의 영적 의미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에게 그의 뜻을 계시하기 위하여 주신 것이니 사람이 알도록 쓰여질 수밖에 없다. 알도록 쓰여졌음에도 깨닫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모든 말씀은 사람의 눈이 보는 방식으로, 사람의 귀가 듣는 방식으로, 사람의 마음도 깨닫는 방식으로 주어진다. 그렇지 않고서 하나님의 계시가 어느 누구에게도 이해될 수 없을 것이며 그렇다면 그 계시는 없었던 것과 다름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다”란 그때 땅의 상황이 사람의 눈, 귀, 마음에 그렇게 보이고, 들리고, 느끼게 되어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나타난 흑암과 공허와 혼돈은 사람의 눈에 비췬 흑암이요, 사람의 귀에 들리는 공허요, 사람의 마음에 일어나는 혼돈에 다름 아니며 사람 말고는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알려야 할 대상도 또 알 만한 자도 없는 것이다. 어느 피조물이라도 이런 지적, 심적, 영적 흑암과 공허와 혼돈을 당하지 아니한다. 이로 보건대 그 땅은 외면적으로는 지구를 지칭하고 있는 것이지만 영적으로는 사람의 마음을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성경을 읽는 독자들께 한 가지 권고하고자 하는 것은 문자 뒤에 감취어 있는 영의 뜻을 붙잡으라 하는 것이다. 많은 성경학자들이 성경은 문자대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성경이 성령의 뜻을 전하고 있음을 일부러 잊으려 함이며 또 그것은 그들의 보이는 대로의 학문을 위한 것일 뿐 우리의 영적 성장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아니한다.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고전 2:9) 하였다. 보지 못하니 눈의 흑암이요, 듣지 못하니 귀의 공허요, 깨닫지 못하니 마음의 혼돈이다. 이 흑암과 공허와 혼돈이 태초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의 터요, 우리의 삶의 실존이기에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시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으로는 아는 것 같으면서도 참 것을 알지 못하고, 인간의 감성으로는 느끼는 것 같으면서도 참 것을 느끼지 못하며 인간의 육과 혼과 영은 한데 어우러져 있으면서도 각각의 소욕이 서로 다르고 또 서로 거스르고 있으니 혼돈을 이루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은 아담의 원죄로 생긴 일이 아니다. 사람이 흙으로 지어졌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사람이 흙으로 지어졌기에 영으로 다시 나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존재(being)가 하나님의 모양을 닮는(becoming)것이 거듭남이다. 흑암에 빛이 비취어 와야 하는 것이다.
아담의 “영생 론”과 “원죄 론”은 이 사람의 실제의 존재(실존)을 오해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람의 실존이 밝혀지면 아담의 영생 론과 원죄 론은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이 드러날 것이다. 왜 인간만이 흑암과 혼돈과 공허를 당하는가. 그것은 인간을 위대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은혜의 바탕인 것이다. 사람이 말씀으로 거듭나서 그 흑암과 혼돈과 공허를 벗어버리게 하려 하심의 장치인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낳음을 입는 자만이 이 흑암과 혼돈과 공허를 벗어버린다. 그것이 태초부터 하나님이 계획하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성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고 또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니까 하나님은 혼돈이나 공허나 흑암을 지배하신다. 또 만물 자체는 인식의 능력이 없으므로 흑암 자체는 스스로 흑암인지 모르므로 흑암을 당하는 것이 아니다. 공허도 혼돈도 마찬가지다. 또한 빛도 스스로 빛인지 모르니 흑암과 다를 바 없다. 이와 같이 충만이 공허와 다를 바 없고, 질서가 혼돈과 다를 바 없다. 흑암이 빛과 다르고, 공허가 충만과 다르고, 혼돈이 질서(지혜)와 다른 것은 인식 자에게만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만이 흑암에서 벗어나고자 하며 공허에서 벗어나고자 하며 혼돈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그러면 빛은 무엇인가.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후 4:6) 하였다. 태초의 창조도 이 빛으로 말미암았고, 인간의 거듭남도 이 빛으로 말미암는다. 그러므로 태초에 “빛이 있으라” 한 그 빛은 하늘과 땅에 떠오른 능력과 권세의 빛인 동시에 사람의 마음속에 떠오른 하나님의 영광을 알게 하는 그리스도의 빛 곧 생명의 빛이기도 한 것이다.
태초에 만물을 만든 그 빛은 또한 사람의 마음을 비추는 진리의 빛이요 생명의 빛인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사도 바울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빛은 햇빛도 달빛도 그 무슨 광적도 아님이 분명한 것이다. 다메섹으로 가던 사울이 만났던 빛이 이 빛이다. 사도 바울이 또 말하기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롬 1:20) 하였다. 그러므로 말씀도 하나님을 계시하거니와 하나님이 창조하신 만물도 그 하나님을 계시하고 있는 것이다. 만물이 우리에게 영적으로 다가오면 그것은 곧 우리에게 하나님의 계시가 되는 것이다.
기록된 바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 1:25) 하였다. 하나님의 창조와 완성의 도는 스스로 미련해지시고 약해지심이다. 이 도를 우리로 보고, 듣고, 깨닫고, 손으로 만지게까지 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시다. 에덴동산에 있던 아담은 미련해지고 약해짐의 도가 아니라 지혜로워지고 강해지라는 뱀의 도를 좇았다. 세상 모두 이 도를 좇는다. 하나님의 도는 태초부터 우리에게 와 있었으나 모두가 그 도를 외면하였기에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사람들의 오해가 여기에 있다. 하나님의 절대한 힘과 그의 절대한 영광이면 무엇이든지 가능할 것 같은데 하나님은 그의 힘과 영광을 나타내시지 않으니까 아담을 비롯한 모든 사람이 그 사람의 힘과 영광이라도 나타내야 되는 줄 아는 것이다. 그것이 세상의 진리다. 그러므로 세상은 사람의 힘과 영광으로 구축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랑으로 구축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사랑을 닮은 자에게만 그의 능력과 영광을 부여하신다.
그 사랑이야말로 그의 힘과 영광을 자유롭게 행사하면서도 하나님과 하나 되고 또 형제자매와 하나 되고 이웃과 하나 되게 하기 때문이다.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시는”(고후 4:7) 하나님의 경륜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낮아지신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영광의 절대성의 하나님을 보려고 하는 자마다 소경이 되어 버리고 만다. 이는 태양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자가 눈이 멀어버려 소경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성경을 많이 읽었다고, 또는 무슨 지위에 있다고, 또는 무슨 학위가 있다고, 또는 무슨 큰 예배당을 지었다고 하나님을 만난 것이 아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것들을 가치 있게 보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문제는 그가 정말 낮아지신 하나님을 만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조차 세상 풍조에 밀려 너나할 것 없이 낮아지려 않고 높아지려고만 하고 있다. 그런 것은 하나님 앞에는 다 헛되고 헛된 것이다. 먼저 낮아지지 아니하고는 하나님을 뵈올 수 없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가 가신 낮아지신 길을 보고, 보고 또 보아야 한다. 우리는 너무 쉽게 자주 그 길을 잃어버린다.
하나님은 태초에 그가 창조하신 흑암으로 말미암아서 스스로 숨어 계신 하나님이 되셨다(사 45:15). 또 은밀한 중에 계신 아버지가 되셨다(마 6:8). 하나님이 숨어 계심은 나타내려 하심인데 우리가 새로워지고 온전해져서 하나님의 소멸하시는 불이신 그 영광 앞에 담대히 나설 수 있을 때이다. 의와 공의가 그의 보좌의 기초이지만 하나님이 먼저 은혜와 진리를 선행시키심은 그의 사랑으로 말미암음이다. 이 은혜와 진리가 만물과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존재의 바탕이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으면서도 그 진리를 받지 아니하면 아담처럼 에덴동산 안에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계명을 저버리는 것과 같은 행위를 하게 되는 것이다. 사탄도 이 은혜를 저버린 자이다.
태초부터 있는 흑암은 은혜의 흑암이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만민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다가 삼일 만에 부활하셨다. 예수의 죽음은 곧 은혜의 흑암이며 예수의 부활은 생명의 빛이다. 그런데 그 옆에서 같이 십자가에 못 박힌 죄수의 죽음은 그의 죄로 인한 죽음이다. 그의 죄도 흑암이요, 그의 죽음도 흑암이니 흑암에 흑암이 일어난 영원한 흑암(심판)이다. 그러나 그 은혜의 흑암은 진리를 심기 위함이다. 이 은혜의 흑암 속에서 진리를 심지 아니하고 거짓을 심으면 흑암에 빛이 비취어온 것이 아니니 영원한 흑암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구원하려 하심이지만 그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빛이 왔으되 빛을 받지 아니한 것이므로 영원한 흑암, 곧 멸망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흑암을 모르는 자 하나님의 영광도 모른다. 흑암을 모르는 자가 어떻게 빛인들 알 수 있겠는가.
창세기 1:1-5의 말씀은 참으로 경이롭고 신비로우며 그 안에 하나님의 진리가 다 숨겨져 있다. 누가 그것을 다 알 수 있으리요마는 이 말씀 안에 하나님의 삼위가 계시되었고 사랑이 계시되었으며, 하나님의 도의 근원이 계시되었고, 상대성이 계시되었고, 인간의 실존이 계시되었고, 선악도 계시되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경륜의 씨앗과도 같아서 거기에서 싹이 나고, 줄기가 자라며, 가지가 갈라지고, 잎이 생기고, 꽃이 피며 열매가 맺는다. 이 말씀을 깊이 이해하면 할수록 성경의 모든 말씀이 그 의미를 더해간다. 이 글은 「아담과 나」이므로 이 모든 것을 한 자리에서 다 밝힐 수는 없지만 오직 그 가능성만을 열어두고자 한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에게 응답이 있으리라.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마 10L26)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하고, 찾고, 두드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지금 세상에서는 얼마나 많은 것이 급속도로 밝혀지고 있는가. 그런데 교회는 예수 오신지 이천 년이 지났음에도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이 밝혀 놓은 구원의 섭리마저 장로들의 수건으로 감추어 버린 흑암을 자초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 하신 것이나, 사도 베드로가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 1:23)한 것이나, 사도 야고보가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약 1:18) 한 것이나,
사도 바울이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고전 15:49)한 이 모든 것은 태초부터의 하나님의 경륜이지 아담의 범죄로부터 생긴 것이 아니다. 흙으로(육르로 난) 창조된 사람은 근원적으로 거듭남이 필요했다. 흑암에 빛을 비추어 주셨듯이 육체로 난 자를 영으로 다시 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태초부터의 경륜이었다.
우리가 알거니와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은 우리의 죄를 가려주며 사해주시는 은혜의 흑암(그늘)이다. 그리스도는 이 흑암에 그의 부활로 생명의 빛 곧 새생명이 일어나게 하셨다. 그러함에도 지금 많은 교회는 이 은혜의 흑암을 기회로 스스로의 흑암을 빛으로 위장한 자들이 차지해 버렸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하신 그 빛으로 세상을 비추지 못할 뿐 아니라 도리어 어두움의 세상이 저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우리보다 더욱 어두우니 좀 밝아질 수 없겠느냐고 책망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저희는 보지 못하니 소경이요, 듣지 못하니 귀머거리요, 깨닫지 못하니 강퍅한 자다. 그래도 택함을 받은 소수는 남아 있어서 이런 일을 슬퍼하며 애통하고 있다. 크게 애통하는 자에게 큰 위로가 있으리라.
흑암에 빛을 비추시는 하나님의 우주 창조의 경륜은 참으로 경이롭다. 밝은 대낮에는 우리가 큰 우주 안에 들어와 있어도 우주를 거의 볼 수 없다가도 캄캄한 밤이 되면 별들을 바라보며 넓고 광활한 우주를 살필 수 있다. 광명한 낮에는 우주가 보이지 않더니 캄캄한 밤에 도리어 우주가 보인다. 이것은 영광의 하나님이 스스로 숨어 계심으로써 도리어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되는 것과 같다. 이로써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신다”(고후 4:7).
이사야는 하늘과 땅의 창조에 대하여 말하기를 “여호와는 하늘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며 땅도 조성하시고 견고케 하시되 헛되이 창조치 아니하셨다”(사 45:18) 하였다. 창세기 1장 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한 그 말씀을 이해할 길을 열어 놓은 것이다. 우리가 창조기사를 읽을 때 무엇인지 모르게 불안감을 느끼는 것은 땅 곧 지구는 하늘 안의 조그만 별인데 창세기의 기사는 하늘과 땅을 대칭적 존재인 것처럼 기술한 데 있다 할 것이다.
이사야는 이 하늘 안에 들어온 땅에 대하여 명확한 언어로 ‘조성되었다’하였다. 우리 성경에는 이사야 글 중에 번역되지 않고 생략된 부분이 있다. ‘땅도 조성하시고, 만드시고(완성하시고), 견고케 하시되’라고 해야 옳다. 땅의 창조는 조성(야짜르), 만듬(아사), 확립(쿤)의 세 단계를 거친 것이다.
하나님이 태초에 하늘을 창조하시고 땅을 조성하셨는데 성령이 그 땅을 새롭게 하시려고 강림하여 수면을 운행하셨다. 창세기 1장 3절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다” 하였다. 흑암 속에 있는 하늘과 땅에 대하여 빛이 있으라 말씀하시자 빛이 비취어 왔고 이때부터 하늘과 땅에 빛이 교차되었다. 이 빛은 햇빛도 달빛도 별빛도 그 무슨 광적도 아니며 이 빛은 빛들을 낳는 원천의 빛이었다. 곧 피조물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알게 하는 그 아들의 빛이었으니 도의 빛, 진리의 빛, 생명의 빛이었으며 권능과 권세의 빛이었다.
이 빛 이외의 다른 어느 빛으로도 태초의 빛을 설명할 수 없다. 기록된바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후 4:6)한 빛이었다. 이 빛은 그 권능과 권세로 흑암을 비추는 빛이요, 공허에 생명과 존재를 주는 빛이요, 혼돈에 지혜와 진리를 주는 빛이요, 깊음에서 땅을 건져내는 빛이었다. 이 빛은 만물의 생성의 빛이요, 운행의 빛이요, 완성의 빛이요, 또 거듭남의 영의 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