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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 오씨

영주에 정착한 고창 오씨의 역사 저자 오 승 연 1

작성자吳恭姙(현정)|작성시간26.06.05|조회수105 목록 댓글 0

영주에 정착한
고창 오씨의 역사
오 승 연
지은이 오승연
고창 오씨 한림공 오학린(吳學麟)의 25대손. 字 貞和, 號 眞耳堂.
* 표지 사진: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1861년.
출처: 국토정보플랫폼(ngii.go.kr).

차 례
들어가며 ․ 5
고창 오씨가 해주 오씨로부터 갈라져 나왔다는 속설의 진위 ․ 11
제1장 뿌리를 찾는 여정의 시작 ․ 15
제2장 시조(1009년)부터 1400년대 중반까지 ․ 20
복양(濮陽)에 대하여 ․ 35 / 실전된 조상들에 대하여 ․ 41
제3장 의령공부터 1500년대 중반까지 ․ 59
제4장 영주 입향조(入鄕祖) 죽유 오운 - 우리는 왜 영주에 살게 되
었을까? ․ 63
1583년 조방장이 된 오운은 죽유 오운과 동일인인가 ․ 71 / 고창 오
씨 의령공파 세계도(世系圖) 일부 ․ 96
제5장 오운의 자손들의 삶(1600년대) - 역사의 파도 속에서 ․ 98
제6장 1600년대 이후 후손들의 삶(1800년대 후반까지) - 시간의 흐
름 속에 남겨진 평범한 자취들 ․ 127
오운의 후손들 이주 과정의 개요 ․ 129
제7장 독립 운동에 참여한 선조들 - 민족에 대한 충(忠)의 참된 실
천자들 ․ 143
여정을 마치며 ․ 145
후기 ․ 151
부록 ․ 157
죽유정사 ․ 159 / 삼우대 ․ 160 / 구성관 ․ 164 / 고산정 ․ 165 /
귀학정 ․ 166 / 만대정 ․ 172 / 영강정 ․ 173 / 하한정 ․ 174 / 죽
유유적 ․ 177 / 진성 이씨 족보 서문 ․ 180 / 퇴계 선생 부인 허씨
묘갈명 ․ 181 / 성오당 ․ 183 / 애일당 ․ 184 / 유연당 ․ 185 / 육
우당 ․ 187 / 산천서당, 한천서원 ․ 188 / 이산서원 이건 고유문 ․
190 / 이산서원 유생들에게 낸 책문제 ․ 192 / 이산서원 유생제문 ․
192 / 산천서당 유생제문 ․ 193 / 양정재 ․ 195 / 남계사, 세덕사 ․
196 / 부석사 ․ 197 / 기타 ․ 198

나는 영주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으로 본관(本貫)이 고창인 오씨이다.
이 글은 내가 영주에서 태어나 자란 이유이기도 할,
‘어떻게 해
서 고창 오씨가 영주에서 살게 되었는가’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
는 과정과 그 결과를 기록한 것이다.
나는 어릴 때 본관이 고창인 이유에 대해 “시조{諱 學麟(학린),
1009~}께서 고려 때 거란족 토벌에 기여한 공으로 고창을 식읍으
로 하사받으셨기 때문이다.”라고 들었다. 도대체 본관은 무엇일까?
본관은 언제부터 성씨와 함께 사용된 것일까?
후삼국시대에는 지방의 유력 호족이라 하더라도 성씨와 본관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한반도에서 성씨와 본관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고려 태조 때이다. 고려 태조 왕건(王建, 877~943)1
이 후삼국을 통일한 후, 개국공신들과 지방 호족(豪族)2들을 관리
1 고려 태조 왕건은 송악(개성) 지역의 호족으로 918년 궁예를 몰아
내고 왕위에 오르며 국호를 ‘고려’라 칭하였다. 936년 견훤의 아들 신검
과의 일전을 벌였던 일리천(一利川, 경북 구미시 선산읍) 전투에서 승리
하여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2 호족: 동족 집단으로 구성된 지방 세력을 의미하는 말이다. 호족은
5
하기 위해 사성(賜姓, 성을 하사함)을 하면서 지배층이 성씨를 가지
게 된 경우가 많았다.
 
1 태조는 공신들이나 외국에서 귀화한 사람에게 포상으로 사관(賜
貫, 본관을 하사)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개국공신인 신숭겸은
본래 전라도 곡성현 출신인데 태조가 ‘황해도 평산’을 본관으로 하
사함으로써 평산 신씨의 시조가 되었다.
2 또 태조는 940년(태조23) 호족들에게 출신지, 거주지 별로 그곳
을 본관으로 하는 토성(土姓)3을 분정(分定, 나누어 정함)하였다.
4 여기서 토성 분정이란 각 지역에서 유력한 성씨 집단의 수장에게
그 지방에 대한 실질적 지배력을 인정해주는 정책을 말한다.
5 이대토지를 소유하는 등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권력과 군사력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신라 말 고려 초의 사회변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 다음 백과.
1 참조 이찬욱, 《韓國의 歸化姓氏와 多文化》. 예를 들면 안동 권씨의
시조 권행(權幸, 원래 김씨였음)은 고창병산(古昌郡, 현 안동시 와룡면)
전투에서 견훤을 물리치고 승리하는데, 그 공으로 고려 태조로부터
안동을 식읍으로 받고 권씨 성을 하사받았다.
2 김창겸, 《高麗 太祖代 姓貫 賜與와 그 의미》 57쪽.
3 토성(土姓): 토착 성씨의 약어. 외국계 성씨와 구분하기 위한 용어임.
4 김창겸, 《高麗 太祖代 姓貫 賜與와 그 의미》.
5 예를 들면 고창(현 안동)의 성주(城主)였던 김선평은 태조를 도와 고창
병산 전투에서 승리하여 개국공신이 되는데, 그가 바로 안동 김씨의
시조이다. 토성을 분정 받은 호족들은 중앙의 권력이 지방 구석구석
미칠 때까지{983년(성종2) 지방관을 처음 파견하기 시작함} 지역에서
주민들을 실질적으로 지배하였다. 이 토성 분정에 의해 본관 제도가
생겼다는 견해가 사학계의 주류이다. 이와 달리, 명망 높은 씨족들
사이에서 서로를 구분하기 위하여 성씨와 함께 모여 살던 지명을
 
6 후 태조는 호적사업을 실시하여 전쟁으로 양산된 유랑민들의 이동
을 막음으로써 지방의 안정을 꾀하였다.
1고려 문종 때(1055년)는 ‘성(姓)이 없는 사람은 과거에 응시할
수 없다’라는 법령이 반포되는데, 이즈음에 성을 자칭하는 사람들
이 본격적으로 많이 생겨났을 것이라 짐작해 볼 수 있다. 참고로,
고려 초에는 성씨와 본관을 왕으로부터 하사받는 경우도 있지만 스
스로 일컫는(自稱)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2본관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본관은 본관을 가질 수 있
는 사람이 적(籍, 문서, 등록부)에 등록하면서 쓴, 자신과 연고가
있는 행정구역을 뜻한다.
3고려 초에는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하여 지방을 통제, 장악하기
전까지 지방 호족들이 지역의 실질적 지배권을 가지고 있었다. 이
시절 대부분의 지방 호족들은 자신들의 지위와 권세를 과시하는 수
단으로 성(姓) 앞에 거주지, 출신지를 붙이는 경우가 많았을 것이고
그 거주지와 출신지는 나중에 본관이 되었을 것이다. 이를 통해 본
관은 자연스럽게 같은 본관의 씨족과 다른 씨족을 구별하는 준거
(準據)이자, 가문의 출신지와 지위를 드러내는 표지(標識)가 되었을
붙여서 말하는 관습이 본관 제도로 발전하였다는 견해(안광호, 전북사학
제45호)도 있다. 나는 후자의 견해를 지지한다.
1 김창겸, 《高麗 太祖代 姓貫 賜與와 그 의미》.
2 성(姓)의 수용과정에서 자칭성과 국가로부터 사성(賜姓, 성을 받음)의
경우가 있듯이 본관도 사용자들이 스스로 칭한 경우와 국가로부터 받는
경우가 고려 초기에는 모두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 다음 백과.
3 참조 김창겸, 《高麗 太祖代 姓貫 賜與와 그 의미》 57쪽.
7것이다.
고창을 본관으로 하여 오랫동안 세계(世系)를 이어온 성씨는 내
가 찾아본 바로는 고창 오씨 외에는 없다.
1 고창 오씨(高敞吳氏)는
고창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로, 오학린(吳學麟, 1009~)을 시조로 한
다. 시조(始祖)는, 족보 편찬이 활발했던 15~17세기에 중앙 관료로
활동했던 양반들이 조상의 계보를 추적하여 찾아낸 최고(最古, 가장
오랜)의 인물로서 기록된 것이다.
2 즉, 시조로 기록된 인물들은 후손들이 족보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시조로 인식된 분들이다.
따라서 시조 본인들이 살아생전 자신이 특정 성씨의 시조가 될 것으로 생
각할 수는 없었다.
오학린은 1057년 거란족을 토벌하는 데 기여하고 그 공으로 고
창을 식읍(食邑)으로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식읍을 받았다’는 기록이 ‘왕으로부터 본관을 하사받았다(賜貫)’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
다고 볼 수 있을까?
고려 이전부터 실시되어 왔던 식읍제는 애초 왕이 공신 등에게
일정한 지역을 하사하여 그곳 주민들로부터 조세를 수취하고 일(방역, 方役)을 시킬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제도였다.
3 하지만, 고려 때에는 식읍을 받더라도 땅을 실제로 하사받았다기보다는, 그
1 뿌리를 찾아서(rootsinfo.co.kr). 고창이 본관인 성씨로는 고창 오씨 외
에 신씨, 윤씨, 함씨, 이씨, 고씨가 있다. 그러나 오씨를 제외한 다른
성씨들은 각각 숫자가 얼마 안 되고(윤씨의 경우 1985년 1가구 22명이다가 2015년 5명,
함씨의 경우 1985년 0명이다가 2015년 35명), 이들
조상에 대한 자료가 없는 점에 비추어 조선 말기 또는 그 이후에
새롭게 생긴 성씨라 추정된다.
2 權奇奭(권기석), 《姓貫 始祖의 지방 토착적 기원과 기념활동의 양상》.
 
8 식읍에서 나오는 조세{산정기준은 호수(戶數, 집의 수)}에 상응하는
녹봉을 받는 식으로 식읍제의 내용이 바뀌었을 것이라고 학계는 보
고 있다.
오학린이 고창을 식읍으로 받은 시점은 고려 건국 후 100여 년이 지난 1057년인 점을 생각하면,
고창을 식읍으로 받았다는 것은 그가 고창 땅에서 나오는 조세에 상응하는 녹봉을 받은 것을 의미
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오학린을 시조로 하는 오씨들의 본관이 고창인 것은 오학
린이 받은 식읍이 고창이기 때문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고려 때
본관은 왕으로부터 하사받거나 후손들이 자칭함으로써 정해졌는데,
고창 오씨는 그중 어떤 경우에 해당하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한
기록을 발견하지 못했다.
다만, 왕이 식읍을 주는 행위와 본관을 하사하는 행위(賜貫)가
항상 함께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고, 오씨 일족 중 한 명인 오학린
에게 다른 오씨들과의 구별을 위해 굳이 본관을 하사할 이유는 없
어 보이는 점에서 오학린에게 식읍을 하사할 당시 본관까지 하사하
였을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오학린의 후손들이 자신들을 다른
오씨들과 구별하기 위해 본관을 고창이라고 자칭했을 가능성이 높다.
결국, 여러 자료에 등장하는 ‘오학린이 고창을 식읍을 받아 본관
이 고창이 되었다’는 말은 왕으로부터 식읍과 더불어 본관까지 받
았다는 의미로 보기는 어렵다. 그러면 ‘왕이 오학린에게 왜 고창을
3 참조 박춘식, 《羅末麗初의 食邑에 對한 一考察》 89쪽.
 
9 식읍으로 주었을까?’하는 의문이 남는다. 그 이유는 기록이 남아있
지 않아 모르겠다. 다만, 오학린이 고창과 어떤 연관성이 있었기
때문일 수 있다고 추측해볼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오인정(오학린의 후손)의 묘지명’에는
‘其先高敞縣人也(그의 선조는 고창현 사람이다)’라는 문구가 있다.
1 또 고창 율계리 부근에서 오학린이 낙향하여 살았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오학린이 낙향한 후 살았던 ‘경방(京坊, 서울 경, 동네
방)’2과 후손들 교육을 위해 지은 서당이 있는 곳이라 하여 붙여진
‘서당골’ 등이 그 예이다. 3
참고로, 오학린의 조상인 다련군 오희(吳禧, 태조의 둘째 왕후인
장화왕후 오씨4의 父)는 전라도 나주 사람이고 나주와 고창은 지
리적으로 멀지 않다.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고창 오씨의 숫자는 얼마나 될까? 통계
청에 따르면, 1985년에 27,772명이었고 2015년에는 18,856명이
었다. 덧붙여,
‘북한에 있는 봉사공파(奉事公派) 전체가 고창 오씨의
3분의 2이상이다’라는 주장5이 있다.
1 고려시대 史料 Database.
2 서울(개경)에서 내려온 양반이 산다고 해서 ‘경방’이라고 이름 불렀다한다.
– 조규익, 이성훈, 박동욱, 《고창 오씨 문중의 인물들과 정신세계》
62쪽.
3 경방과 서당골은 현 고창 신월리에 속한다.
4 고려 혜종(재위: 943~945)의 어머니.
5 吳東樹, 《고창 오씨(高敞吳氏)와 인유공(仁裕公: 海州吳氏)에 關한 小考》.
 
10 ◈ 고창 오씨가 해주 오씨로부터 갈라져 나왔다는 속설의 진위
나만해도 어릴 때, 고창 오씨는 해주 오씨에서 갈라져 나왔다고 알
고 있었다. 요즈음도 인터넷을 검색하면 동일한 내용의 자료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속설은 사실이 아니다.
해주 오씨(海州吳氏)는 오현보를 시조로 모시는 향파와 오인유를
시조로 모시는 경파 두 계통이 있다.
1
해주 오씨 향파의 시조 오현보(吳賢輔)는 1216년 거란을 토벌한
공으로 해주군에 봉해졌다. 오씨대동종보(吳氏大同宗報)2 제9호 오씨
상계도(吳氏上系圖)3에 따르면, 오학린은 17世이고 오현보는 24世인
데 오희(11世)에서 갈라진다.
4 따라서 오학린을 시조로 하는 고창
오씨는 오현보의 자손들이 아니다. 그러므로 고창 오씨는 해주 오씨
에서 갈려져 나온 분파일 수가 없다.
한편, 해주 오씨 경파의 시조 오인유(吳仁裕)에 대해서는 그가
984년에 송나라에서 동도(東渡, 동쪽으로 건너왔다)했다는 설이 인
터넷상에 널리 유포되어 있다. 이 설에 따르면 오인유는 1009년에
출생한 오학린보다 선대 사람이기에 이론상 해주 오씨로부터 고창
오씨가 분적되었다고 주장할 여지는 있다.
1 해주 오씨 - 나무위키.
2 오씨대동종보(報): 오씨대동종친회에서 발간한 회지(會誌)로서 족보는
아니다.
3 상계도: 조상들의 계보를 표시한 도표.
4 오씨대동종보 제9호. 우리나라 오씨 상계도 43쪽 참조.
 
ps; 영주에 정착한 고창 오씨의 역사 저자 오 승 연 
     오성 모두는 공부하고 참고해야할 오씨의 역사서 오승연 작가
     한번에 10번까지 편집해 올립니다.
     책으로 보면 더욱 좋을텐데요 저에게 보내온 자료 정리해서 
     온라인 카페에 소개합니다.이어 단톡방에 올려드리오니 다함께 살펴보시고 
     오씨 가문을 빛낸 인물을 공부하고 연구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래봅니다.
    오승연 작가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참고 오공임 메일 .lim88873@naver.com
    오씨대동종친회 홍보이사 
                       오공임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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