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그러나 위 주장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우선 984년 오인유의 송
나라 동도설이 사실로 인정되어야 하고, 또 오학린이 오인유의 자
손임이 증명되어야 한다.
그런데 동도설부터 그 신빙성에 의문이 제기된다.
1 일단, 지석
문에는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부분들이 나온다. 지석문에는 오인유
가 988년에 시중 이총섬(李寵暹), 이윤관(李允寬) 등과 함께 국자감
(國子監)2 설치를 왕께 주청하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에 따르면
오인유와 이윤관이 중앙관료로 활동했던 시기는 988년경부터
1000년대 초반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전의 이씨(全義李氏)에 관한 공식 기록에 따르면 이윤관의
손자가 이천(李仟) 장군이다.
3 이천 장군은 1256년(고종43) 몽골의
6차 침입 때 남도(南道)에서 몽골군을 격퇴시켰다.
4 이천의 활동시
1 오인유가 984년 송나라에서 왔다고 주장하는 근거는 문양공 오연총
(文襄公 吳延寵, 1055~1116)의 지석문이다(해당 부분은 ‘甲申宋朝學士
吳仁裕東渡’라고 기재되어 있다. 이 지석문의 사본은 海州吳氏大同譜
卷之一에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지석의 현존 여부가 불명확하고
지석문의 내용도 사실과 다른 점들이 다수 발견되는 점에 비추어 위
주장(984년 송나라 동도설)의 진실성에 의문이 있다. 출처: 오현석,
‘고창
오씨가 해주 오씨보다 먼저 득관하였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자료’.
2 국자감: 국립대학은 태조 때부터 있었으며 그 명칭은 신라의 것을
계승한 국학(國學)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므로 992년(성종11) 국자
감의 창설은 종래의 국학을 당·송(唐宋)의 제도를 참작하여 정식 종합
대학으로 개편한 것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 – 다음 백과.
3 한국학중앙연구원 [이혼(李混) 인물 정보]. 이혼(李混)의 과거합격 기록
에서 그의 부는 이천(李仟), 조부는 이순(李順), 증조부는 이윤관(李允寬)
임을 알 수 있다.
4 이천(고려 무신) - 위키 백과.
12 기가 1200년대임을 알 수 있다.
이천 장군이 몽골군을 격퇴시켰을 당시 나이는 기록에 없으나
일응 80세였다고 할 경우 1177년에 태어났다고 할 수 있다. 생물
학적으로 조부와 손자 사이의 나이 차이가 100년을 넘을 수 없다
는 점을 고려할 때, 이윤관이 손자인 이천보다 100년 전에 태어났
다고 하더라도 이윤관이 태어난 시점은 1077년경이 된다.
따라서 이윤관은 위 지석문의 내용처럼 988년에 오인유와 함께
국자감 설치를 주청할 수 없다. 이처럼 지석문 내용 중 중요한 부
분을 믿을 수 없는 이상 전체 내용에 대해 그 신빙성을 의심할 수
밖에 없다.
또 지석문에는 오인유가 ‘해동(고려)의 오씨의 시조가 되었다(海
東之吳氏於是而始焉)’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고려 창건 초인 918년
경 이미 오희(吳禧, 태조의 둘째 왕후의 父)가 나주에 살고 있었
다.1 따라서 이 내용도 사실과 다르다.
백보 양보해서 지석문의 내용이 사실이라 할 경우에도 오인유를
시조로 하는 해주 오씨 경파는 고창 오씨와는 성(吳)만 같을 뿐 핏
줄이 다르므로 고창 오씨가 해주 오씨에서 갈라져 나온 것은 아니
다. 그런 점에서 오씨대동종보(吳氏大同宗報)에 실린 ‘우리나라 오씨
상계도’에 오학린의 선조(先祖)로 오인유를 넣지 않은 것은 합당하 다.1
1 고려사 列傳 卷第一, 莊和王后吳氏, 羅州人, 祖富伅, 父多憐君, 世家州
之木浦. 多憐君娶沙干連位女德交. 고려시대 史料 Database.
13 참고로, 2014년 발간된 오씨대동종보 제8호에 실린 ‘우리나라
오씨 상계도(吳氏上系圖)’에는 오현보 해주군(賢輔 海州君)의 아랫대
에 인유초휘종인(仁裕初諱宗寅)을 기재하고 오인유가 해주오씨의 시
조인 것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그러나 2020년 발간된 오씨대동종
보 제9호,
‘우리나라 오씨 상계도’에서는 인유초휘종인(仁裕初諱宗寅)이 아예 삭제되어 있다.
최근의 상계도에서 오인유를 삭제한 경위는 나는 모른다. 다만, 오인유에 대한 기록이 위에서 살펴본 것
처럼 여러 객관적 사실과 다른 점이 많은 것을 고려한 것으로 추측한다.
결국, 해주 오씨의 파가 무엇이건 간에 고창 오씨가 해주 오씨
에서 갈라져 나왔다고 보는 것은 오류이다.
참고로, 통계청에 따르면 해주 오씨는 2015년에 462,704명으로
남한에 거주하는 전체 오씨들 가운데 압도적으로 많다. 남한에서는
해주 오씨에 대한 인지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이제부터는 고창 오씨, 나의 조상들이 남긴 흔적을 찾는 여정을
시작하려고 한다.
1 출처: 오씨대동종보 제9호 43쪽 - 우리나라 오씨 상계도.
14 제1장
뿌리를 찾는 여정의 시작
나는 2020년 여름, 안동으로 이사가 약 1년간 살게 되었다. 결혼
이후 전국을 돌아다니며 살았지만 처음으로 고향 가까이 가게 된
것이다. 안동은 영주와 가까웠지만 내게는 별로 호감 가는 곳이 아
니었다.
안동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는 대학 이후에 형성된 것인데 그 시
작은 어느 안동 출신 남학생의 몇 마디 말로 인해서다. 그 친구는
자기 집안을 자랑하면서 어르신들의 소개로 선을 보게 되었다며 큰
소리로 떠들고 있었다. 앞에 앉아 수업 시작을 기다리고 있던 나는
뒤에서 떠드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가만히 생각했다.
‘이제 갓 입학한 녀석이 벌써 선을 본다고? 이상한 곳이네’라고. 이
후 나는 여러 경험을 통해 안동(영주, 안동, 봉화 등 경상북도 북부
지방)에 대해 ‘양반, 상놈 따지는 고리타분하고 보수적인, 시대에
뒤쳐진 곳’이라 생각하게 되었고 이러한 생각은 오랫동안 바뀌지
않았다.
그러다가 2020년부터 안동에 거주하면서 안동의 속살을 들여다
볼 기회가 있었다. 예를 들면,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1 종택, 간
1 학봉 김성일(金誠一, 1538~1593): 서애 류성룡과 함께 퇴계의 학문을
15 재(簡齋)1종택, 진성 이씨 주촌(周村)종택(두루종택)2, 농암(聾巖)3
종택 등을 방문하여 종손들로부터 조상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여기
사는 후손들은 가옥구조가 불편해도 보수는 하되 개조하지 않고 조
상이 물려준 그대로 이어가고자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 성장과 삶의 편리함을 위해 조상의 유산
을 포기하고 빠르게 변화를 선택할 때, 이들은 전통을 지키고 조상
의 정신을 이어가기 위해 불편함을 감수하고 경제적 이익을 포기하
면서 조상의 유산을 그대로 보존하는 길을 택했다. 이러한 선택을
이어받은 제자이다. 1590년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와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 보고한 것 때문에 임진왜란 발발 직후 파직되었다. 이후
경상우도 관찰사 겸 순찰사로 일하다가 1593년 진주성에서 사망하였다.
1 간재 변중일(邊中一, 1575~1660). 임진왜란 때 곽재우 휘하에서 의병
활동을 했다. 변중일은 임진왜란 때 집으로 쳐들어온 왜적들에게 ‘부디
나를 죽이고, 팔순의 병든 조모만은 살려 달라’고 간청했는데, 그의 효심에
감복한 왜적 장수는 그가 조모를 보살피도록 해주면서 신표로 자신의 칼을
주어 또 다른 왜군들로부터 화를 당하는 것을 막아 주었다. 위 일본도는
지금도 전해진다.
2 주촌종택 앞에는 오래된 은행나무가 있다. 흉년이 들면 집 앞 길가
에서 곡식을 베풀었는데, 누군가 위 나무를 심어 고마운 마음을 표현
하였다. 그 나무는 현재 후손들이 열매를 따서 팔 수 있을 정도로 크게 자랐다.
또 이곳엔 600년 된 뚝향나무가 있다. 조선 세종 때 이정(李禎, 퇴계이황 선생의 증조부)이 심었다고 한다.
3 농암 이현보(聾巖 李賢輔, 1467~1555)는 1512년 부모를 위해 정자를짓고 ‘애일당(愛日堂)’이라 이름 붙였다.
‘愛日’은 ‘부모님이 살아 계신
하루 하루를 소중히 한다, 하루하루 가는 것이 안타깝다’란 의미를 담고
있다. 70세 노인이 된 농암은 부모를 포함하여 아홉 분의 노인들을 모시
고, 그분들을 즐겁게 해드리기 위해 어린 애처럼 색동옷을 입고 춤을추었다.
이는 효자로 이름난 중국 노래자(老萊子)가 부모 앞에서 춤추어
즐겁게 해드렸다는 고사를 재연한 것이다.
16 로 인해 오늘날 이곳은 현대화된 다른 지역과 달리 ‘옛 것’이 주는
문화적 향기를 느낄 수 있는 특별한 곳이 되었다.
이외에도 의성 사촌(沙村)마을1
, 영양 두들마을, 영덕 해월헌(海
月軒) 평해 황씨 종택 등을 둘러보았다. 또 24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풍산 김씨 집성촌인 오미동(五美洞)2마을에 가서는 독립운
동을 하신 분들이 살았던 곳의 자취를 느껴 보기도 하였다. 이후에
이육사 기념관이나 경상북도 독립운동기념관 3을 방문하여 독립 운
동가들의 불굴의 의지와 정신을 느끼며 그분들께 감사한 마음을 가
지기도 하였다.
이렇듯 안동의 사람들과 역사를 알아가면서 안동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는 조금씩 바뀌어 갔다. 아울러 경북북부지역에 대한 부정적
생각(정치적으로는 보수적이며, 경제적으로는 낙후되어 있고, 사회
문화적으로는 지나친 전통 중시 때문에 시대 흐름에 기민하게 대응
해 변화하지 못하고 새로운 문물에 개방적이지 못한 고리타분한 곳
이다)도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이곳은 전통을 중시하는 태도 덕분에 조상의 유산이 오늘날까지도 남게 되었고,
경제 발전이 더딘 덕분에 아름다운 자연이 덜 손상되었으며,
지난 세월 급속한 발전에서 비껴 나 있는 덕분에 전통
1 서애 류성룡 선생의 외가.
2 김대현(金大賢, 1553~1602)의 아들 8명이 진사가 되고, 그중 5명이
대과급제를 하니, 인조가 ‘八蓮五桂之美’라는 의미에서 ‘오미동(五美 洞)’이란
이름을 하사했다.
3 안동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산실이다. 전국에서 독립운동가가 가장
많이 배출된 고장이 안동이다.
17 문화의 원형적 모습을 찾아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는 이제 내 고
향지역에 대해 달리 생각한다.
‘이곳은 전통문화와 자연이 공존해있는, 참으로 보배로운 곳이다’라고.
예전에 전북 고창에 가 본 적이 있다. 그때 농사지으시던 분에
게 무턱대고 “이 지역에 고창 오씨 집성촌1이 있나요?”라고 여쭈었다.
이는 ‘나는 본관이 전라북도 고창인데 우리들은 왜 경상북도
영주에 살게 된 것일까?’라는 평소 가지고 있던 의문에서 비롯된질문이었다.
그분은 모른다고 대답을 했다. 이 의문은 어린 시절부터 생긴 것이었으나
그동안 한 번도 아버지나 어르신들께 질문을드린 적은 없다.
안동을 좋아하게 된 나는 자연스레 나의 뿌리와
흐름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 오래된 의문에 대한 해답
을 탐구하기 시작하였다.
본격적으로 족보를 찾아보고, 아버지께 질문도 드리고, 막내 동
생이 가지고 있던 자료들을 얻어서 읽기도 하였다. 족보를 보면서
조상의 분파와 이동을 추측해보기도 하고, 아우의 자식이 형님의
1 세종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1424년 시작해서 1454년 완성) 姓氏條에 고창(高敞縣)의 토성(土姓)으로
吳 尹 宋 金 朴이 기록되어 있다. – 참조
李樹健, 《조선 초기 ‘土姓’ 연구》, 민족문화논총 제17집 117쪽.
“이들 토성 씨족 중 일부는 구한 말, 일제강점기의 혼란 속에서 멀리
경상, 강원 지역으로 이주했다. 실제로 일제 강점기 전까지 지역에 모두
32가구였던 고창 오(吳)씨의 경우 경상도 월성, 포항 등으로 모두 옮겨
갔다.” - 최영수,
‘전북 고창군 189개 姓씨 존재’, 연합뉴스, 연구자: 이기화.
「이기화 역사편찬위원은 “동학혁명 총참모장 오시영, 두령 오하영은
고창 오씨일 것이다. 아마도 역적으로 몰리니 그의 후손들이 타 본으로
바꾸고 관향인 고창을 떠났을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 조규익,
이성훈, 박동욱, 《고창 오씨 문중의 인물들과 정신세계》 74쪽 참조.
18 양자로 입적되는 것을 보고 가족관계를 상상하기도 하면서 조상의
삶을 이해하는 시간을 보냈다. 이런 방식으로 1009년 고창 오씨의
시작과 2022년 현재 사이의 오랜 생멸의 시간이 남긴 의미 있는
단서들을 찾아서 이것들을 구슬삼아 하나의 이야기로 꿰어 나갔다.
나는 고창 오씨 의령공파 중 일부가 영주에 정착하여 살게 된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보았다. 이하 존칭과 경어는 생략한
다.1
1 조상의 함자를 함부로 부를 수는 없지만 여기서는 기록이란 점을
고려하여 이름을 적는다. 이와 별개로, 조상을 언급할 때는 호를 사용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예를 들면 오운의 경우 ‘죽유 어르신 또는
죽유 할아버지’ 정도가 되겠다. 호를 알 수 없으면 ‘운 할아버지’라 해도
괜찮을 것 같다.
19 제2장
시조(1009년)부터 1400년대 중반까지
고려 초 오학린(吳學麟, 1009~)은 1035년(정종1) 과거에 합격하고1{
이때 知貢擧, 즉 시험주관자는 최충(崔沖, 984~1068)2이었다},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냈다.
한림(翰林)이란 최고의 문장가들이 모여 일하는 관청으로, 학문
분야나 외교문서, 과거시험 등을 주관했다. 김부식(삼국사기 저자),
이규보 등도 한림에서 활동하였다. 고려 때에는 타 기관의 관직을
하면서 한림학사를 겸하는 사례가 많았다.
3 참고로, 고려 초 관리
들의 겸직이 가능하도록 제도가 시행되다가, 고려 성종(재위:981~997) 대에 본격적으로
당․송의 관직제도가 수입되면서 고려의
겸직제도는 더욱 정교해졌다.
4 오학린도 타 기관의 관직을 역임하면서 한림학사를 겸하였을 것
1 한국학중앙연구원 [오학린(吳學麟) 인물 정보].
2 최충: 고려 문종 때(1047년) 문하시중(재상)이 됨. 9재 학당을 세워
유학을 보급하고 인재를 양성함으로써 문교의 진흥과 사학 발전에 크게
공헌하여 해동공자로 칭송되었다. – 다음 백과.
3 구체적 예시는 장동익, 《고려 전기의 겸직제에 대하여》 5~7쪽 참조.
4 참조 장동익, 《고려 전기의 겸직제에 대하여》.
20 으로 추정된다. 다만, 그가 무슨 관직을 하였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한림학사는 본품항두직(本品行頭職)1으로서 같은 급의 다른 관직에 비해 우월한 지위를 가졌다.
‘본품항두’란 본품 항렬의 우두머리
(항두)라는 의미이다. 마치 학생 중에서 학생 간부로 지명되어 활동
하는 경우에 비유할 수 있다. 본품항두직을 부여받은 자들은 본품
이 같더라도 일반 관직에 있는 자에 비해 의례를 행할 때 맨 앞에
서거나 중심 위치에 서는 등 우대를 받았다. 참고로, 고려 때 본품
항두직을 운영한 제도를 본품항두제라 한다.
한편, 한림학사 자체는 녹봉을 받지 않는 청요직(깨끗한 요직)이었고,
2 녹봉은 겸직하는 관직에 따라 받았다. 이러한 사정은 오학
린도 한림학사 이외 다른 관직을 겸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뒷받침한다.
오학린이 최충의 문헌공도(文憲公徒)3였다는 자료가 있다.4 문
헌공도는 최충이 1055년(문종9) 벼슬에서 물러나 후진 양성을 위
해 세운 9재(九齋) 학당 자체 또는 9재 학당에서 공부하는 문도(門徒)들을 지칭한다.
1035년 과거에 합격한 오학린이 1055년 이후에 설립된 9재 학
1 참고 논문. 이진한, 《고려시대 본품항두》, 《고려시대 본품항두제의 운영
과 변화》.
2 이진한, 《고려시대 본품항두》 265쪽.
3 문헌공도: 고려 시대, 개경에 설치된 사학(私學)인 십이공도(十二公徒)
의 하나. 최충이 세운 교육 기관으로, 그의 시호(諡號)가 문헌공(文憲公)
이어서 문헌공도라 불렸다. – 다음 사전.
4 한국학중앙연구원(aks.ac.kr), 집필자 김동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