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로 추정된다. 다만, 그가 무슨 관직을 하였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한림학사는 본품항두직(本品行頭職)1으로서 같은 급의 다른 관직
에 비해 우월한 지위를 가졌다.
‘본품항두’란 본품 항렬의 우두머리
(항두)라는 의미이다. 마치 학생 중에서 학생 간부로 지명되어 활동
하는 경우에 비유할 수 있다. 본품항두직을 부여받은 자들은 본품
이 같더라도 일반 관직에 있는 자에 비해 의례를 행할 때 맨 앞에 서거나 중심 위치에 서는 등 우대를 받았다. 참고로, 고려 때 본품항두직을 운영한 제도를 본품항두제라 한다.
한편, 한림학사 자체는 녹봉을 받지 않는 청요직(깨끗한 요직)이었고,
2 녹봉을 겸직하는 관직에 따라 받았다. 이러한 사정은 오학린도 한림학사 이외 다른 관직을 겸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뒷받침한다.
오학린이 최충의 문헌공도(文憲公徒)3였다는 자료가 있다.
4 문헌공도는 최충이 1055년(문종9) 벼슬에서 물러나 후진 양성을 위해 세운 9재(九齋) 학당 자체 또는 9재 학당에서 공부하는 문도(門徒)들을 지칭한다.
1035년 과거에 합격한 오학린이 1055년 이후에 설립된 9재 학 1 참고 논문. 이진한, 《고려시대 본품항두》, 《고려시대 본품항두제의 운영과 변화》.
2 이진한, 《고려시대 본품항두》 265쪽.
3 문헌공도: 고려 시대, 개경에 설치된 사학(私學)인 십이공도(十二公徒)
의 하나. 최충이 세운 교육 기관으로, 그의 시호(諡號)가 문헌공(文憲公)이어서 문헌공도라 불렸다. – 다음 사전.
4 한국학중앙연구원(aks.ac.kr), 집필자 김동섭.
21당에서 공부한 문도라고 보긴 어렵다. 그럼에도 오학린이 문헌공도로 불린 것은, 최충이 지공거(시험 주관자)로서 치룬 과거에서 오학린이 합격하였고, 당시에는 과거합격자와 시관(試官, 시험주관자)이 특별한 관계로 이해되었다는 점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고려에서는 십이공도가 공식적으로 설립되기 이전에도
문신 학자들은 가숙(家塾, 한 개인이나 집안에서 경영하는 서당)에서 제자들을 양성함으로써 자신의 학통을 계승시키고 정계에서 학벌을 형성하고자 하였다.
1 오학린이 과거에 합격하기 전 최충에게
개인적으로 가르침을 받았는지 여부는 확인할 수 없었다.
지금부터는 오학린의 업적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당시 동아시아의 강국이었던 거란(契丹, 계단)2은 1054년 압록강 부근 국경
지역에 궁구문(弓口門, 전투용 방벽)을 설치하고3 이후에도 성과 다리를 설치하는 등 고려의 국경선을 점차 넘어왔다.
압록강 일대 국경 지역(강동 6주)은 서희(徐熙, 942~998)가
993년 거란(소손녕)과의 담판으로 획득한 땅으로 군사상 요충지였다. 그렇기에 고려는 거란의 이 같은 행태를 묵과할 수 없었다.
1055년(문종9) 7월, 고려는 옛 경계선을 잘 지키고, 설치된 전투용
시설들을 철거해달라고 요구하는 국서를 요(遼)에 보냈다.
4
1 참조 김민지, 《고려시대 私學十二徒의 설립과 운영 양상》.
2 거란: 몽고계의 한 종족으로 奚丹(해단)으로 표기되기도 한다. 야율아
보기가 916년 거란족과 기타 이민족을 통합하여 중국 화북지방을 장악하고 요나라(遼)를 세웠다. 화북이남 지방의 송(宋, 960~1279)을 위협
하던 요는 1125년 여진족의 금나라(金)에게 멸망했다.
3 고려시대 史料 Database. 高麗史 卷七, 文宗 8年, 7월.
22
이에 요나라 황제는 1056년(문종10)에 ‘고려의 경계선을 침해하
려는 의도는 아니었고 철거케 하였다’라는 취지의 조서를 고려에
보내왔다. 요나라 황제의 약속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는지, 1057
년(문종11) 4월 고려 문종은 국경 지역의 설치물들을 철거해 줄 것을 거란에 다시 요구하도록 지시하였다.
1
그런데, 1060년(庚子年) 오학린이 작성한 외교문서 ‘再乞抽毁鴨江城橋弓(재걸추훼압강성교궁구장)’2에 의하면, 고려는 거란이 설치한 전투용 시설물의 철거를 다시 요청하고 있다. 이는 고려의요청에도 불구하고 수년 동안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고, 거란과 고려 사이의 외교적 긴장관계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1060년(문종14) 12월 거란에서 사신을 보내 고려 왕의 생일을 축하하였고,
3 이듬해 4월 거란에서 동경회례사(東京回禮使)4가 왔
다는 기록(고려사)에 비추어 볼 때 이즈음 고려와 거란은 수년간
지속된 문제를 해결하고 원만한 외교 관계를 형성하기로 합의하였던 것 같다. 이런 추측이 맞다면 거란이 국경지역에 설치한 전투용시설물을 철거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4 고려시대 史料 Database.
1 고려시대 史料 Database.
2 재걸추훼압강성교궁구장: 압록강에 설치된 성과 다리, 궁구를 추훼(철거하여 없애다)하기를 재걸(다시 청하다)하는 공식 문서(편지). 한국고전
종합DB, 역자 신호열.
3 고려시대 史料 Database.
4 고려시대 史料 Database. 동경은 요의 수도를 말한다. 회례사는 외국
에서 사신(使臣)을 보내왔을 때 그 답례로 보내던 사신을 말한다. –
네이버 사전.
23
당시 고려가 요나라 황제에게 보낸 외교 문서를 보면 고려 왕은 자신을 신하(臣下)의 입장에서 말하고 있다. 오학린이 쓴 외교 문서‘재걸추훼압강성교강구장’에도 “진실로 청원을 들어주신다면, 더욱충성을 다하겠습니다(苟諧得請益礪盡忠).”라는 표현이 나온다.
1
박인량(朴寅亮, ~1096)2이 쓴 외교 문서도 동일하다.
“신(臣)이
엎드려 생각하건대 세 번 귀찮게 말씀을 드렸으나 따라 주시지 않
으셨는데… 온 나라가 바라는 바이니 어찌 잠자코 말씀드리지 않을수 있겠습니까(右臣伏以, 三黷靡從… 一方所願, 豈當含默以不言).”라
는 표현이 나온다.
3 또 “당국(當國, 고려)은 대대로 충성하고 근실
하여 해마다 조공을 바쳐왔으며(當國代代忠勤 年年貢覲).”라는 표현도 나온다.
결국, 고려 왕은 거란과의 외교 문제를 원만히 해결하고자 요나라 황제를 상대로 자신을 신하의 지위로 격하시켰던 것이다{고려성종(981~997) 때 거란으로부터 책봉(冊封)을 받았다}. 고려는 강한 국력을 자랑하던 요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치르기가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그래서 신하의 예로 요나라를 대우함으로써 이득을 얻어내는 실리외교를 취한 듯하다. 이러한 고려의 태도는 ‘공경심’과
1 고려시대 史料 Database.
2 박인량: 거란이 압록강 동쪽지역에 야심을 가지고 강을 건너와서 보
주(保州, 현 의주)를 설치하였다. 고려에서 여러 차례 반환을 요청해도
듣지 않다가 1075년(문종29) 박인량이 지은 진정표(陳情表)에 감동한
요나라 황제는 보주를 철거시켰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고로, 표(表)는 제왕에게 소회(所懷, 마음속에 품고 있는 생각)를 적어 올리는 글을 말한다.
3 고려시대 史料 Database, 역자 미상.
24 ‘공손함’을 드러냄으로써 상대와의 ‘감성적 교류’를 이루려는 고려의 설득 전략이었다.
1
한편, 오학린이 쓴 재걸추훼압강성교강구장 내용 중 “신이 엎드려 아룁니다… 사목의 처지는 또한 뭇 사람의 소원을 무시할 수 없기로, 감히 평소의 생각을 피력하여 삼가 천총(天聰)을 번거롭게 하나이다(右臣伏以…司牧之權, 亦群情之莫拒, 敢披素蘊).”2에서의 ‘사목
(司牧)’은 그동안, 압록강 유역을 관장하는 지방 관리로서 오학린 자신을 가리킨다고 해석되었다.
3
이에 대해 오홍재4님은 ‘사목(司牧)’은 임금이나 지역의 장(長)을뜻하는 용어라는 점, 오학린이 작성한 문서는 고주사(告奏使, 임금에게 아뢰러 가는 사신) 김인부5를 통해 요나라 황제에게 전해진
외교 문서이므로 화자(話者)는 고려의 왕이어야 한다는 점을 들어‘사목(司牧)’은 오학린이 아닌 고려 왕을 뜻한다고 주장하였다. 나는오홍재 님의 의견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오학린의 공이 높이 평가된 이유를 생각해 본다. 당시 동아시아의 혼란한 국제 정세에서 각 국가(요, 송, 여진, 고려 등) 사이에갈등이 발생한 경우 외교를 통한 평화적 해결이 실패하면 언제든지
1 송병우, 《고려사 소재 외교문서에 나타난 국가 간접 呼稱語와 自稱語
유형과 형성 전략》 고전과 해석 18집, 120쪽.
2 한국고전종합DB.
3 한국학중앙연구원, 집필자 김동섭.
4 고창 오씨 죽유공 15대손 吳洪在.
5 ‘告奏使金仁付齎去(고주사 김인부가 가지고 갔다)’ - 고려시대 史料
Database. 고주사 金仁存이라는 견해도 있다(朴漢男, 1999).
25
전쟁 상황에 돌입하게 된다. 그 경우 고려와 같은 소국이 입게 되는 피해는 막대할 수밖에 없었다. 즉, 외교 활동의 성공 여부는 국가의 존망과 직결되는 중요한 문제였다.
1 이러한 상황에서 오학린이 작성한 외교문서의 전달을 계기로 고려와 요 사이의 갈등이 평화적으로 해결2되었으니 고려 왕으로서는 오학린의 공을 높이 평
가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고려와 거란과의 민감한 외교 문제가 종결된 후 오학린은 외교문제를 해결한 공으로 전라북도 고창(高敞)을 식읍(食邑)3으로 하사받았다. 이것이 오학린의 후손들의 본관이 고창이 된 계기가 되었다.
고창의 옛 지명은 모양(牟陽)4인데,‘보리가 잘 자라는 양지바른 땅’이란 의미이다. 오학린의 후손인 오계유(吳季孺, 1277~)가 모양군(牟陽君)에 봉해지기도 했다.
1 이에 대해 “고려는 거란과의 조공ㆍ책봉 관계를 기본적으로 인정한
바탕에서 거란과 협상에 임했는데, 이러한 점이 고려가 당시 동북아시아국제 사회에서 살아남아 왕조를 유지할 수 있었던 가장 주요한 요인
이라 하겠다.” - 李美智, 《고려시기 對거란 외교의 전개와 특징》.
2 그러나 이후에도 압록강 지역에서의 국경 문제가 또 다시 발생하여 고려와 거란의 외교적 긴장관계는 계속되었다.
3 식읍: 국가가 왕족(王族)이나 봉작자(封爵者), 공신(功臣) 등에게 수여
한 일정한 지역을 말한다.
『고려사』에 의하면, 문종 때 봉작에 따라
식읍의 호수를 규정하였다. 그런데 실제 식읍이 지급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대체로 회의적이다. 종실 봉작자(宗室封爵者)나 이성 봉작자(異姓封爵者)의식읍은 명예상의 지급일 뿐이고, 단지 봉작에 해당하는 녹봉만 받았을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 역사용어사전.
4 마한시대 모로비리국, 백제시대엔 모양부리현, 모양성.
26
오학린(吳學麟)은 문교부흥에 전력하였으며 문장이 전아(典雅)한 많은 시(詩)와 저술이 있었으나 모두 소실되고, 전해오는 유일한 시
로 「重遊九龍山興福寺 구룡산 흥복사에서 다시 놀다」1가 있다.
2
日改物亦改 날이 바뀌니 물색(物色, 자연의 경치)도 변하고
事移人又移 일(업무)이 바뀌니 사람도 달라지는구나
鶴添新歲子 학은 새해 들어 새끼를 쳤는데
松老去年枝 소나무는 늙어도 지난해 가지(枝) 그대로네3
院院古非古 절집들은 오래된 듯 오래되지 않은 듯하고4
僧僧知不知 스님들은 알듯 모를 듯하구나5
悠然登水閣 유유히(悠然, 한가로이) 물가 정자(水閣)에 올라
重驗舊題詩 예전에 지은 시를 다시 살펴보네6
‘구룡산 흥복사’는 평양 대성산(구룡산)과 개성 두 군데 있었다.
위 시의 배경이 된 흥복사가 두 곳 중 어느 곳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흥복(興福)이라는 것이 복을 발흥한다는 뜻이고 고려사에 왕
1 한국고전종합DB, 양주동 국역을 참고하여 수정하였다.
2 한국학중앙연구원, 집필자 김동섭.
3 소나무에 깃든 학은 새로운 생명체를 탄생시켰지만, 늙은 소나무에는
새로운 가지가 나지 않았음을 말한다.
4 오래된 절집들은 보통 고색창연한데, 흥복사에 와 보니 새롭게 지은 건축물이 있어 예스럽지 않은 분위기도 있음을 표현하고 있다.
5 오랜만에 흥복사에 와서 스님들을 만나니 아는 얼굴인지 모르는 얼굴인지 헷갈린다는 의미이다.
6 화자(話者)는 과거에도 흥복사를 방문하여 시를 지었다. 화자는 흥
복사의 옛 모습이 담긴 예전 시를 다시 살펴보면서 세월의 변화를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27
이 자주 평양 흥복사1에 행차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흥복사는 모두 고려 왕실과 관련이 있었을 것 같다.
참고로, 고려 후기 김관의가 쓴 편년통록(編年通錄)에는 왕건의
조상인 호경(虎景)이 산신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2 왕건은 943년 훈요십조(訓要十條)에서 ‘연등은 부처님을 섬기기 위한 것이고, 팔관은 천령(天靈) 및 오악(五嶽), 명산, 대천(大川), 용신(龍神)을 섬기기
위한 것’이라 하면서 연등회, 팔관회를 잘 거행하라고 당부한다. 왕실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태조 왕건의 조상이 산신임을 알리고, 왕조의 번창을 위해 연등회, 팔관회라는 국가행사(축제)를 거행하여복을 빌고 백성들의 단합을 도모하려 하였다.
한편, 2001년 발간된 고창 오씨 족보(辛巳譜)에는 ‘吳學麟(오학린)-子 吳質(오질)-子 吳世文(오세문)’이라 표기함으로써, 다시 말해
오세문 앞에 ‘子’를 넣음으로써 오질과 오세문을 부자관계로 표기했으나 이는 오류이다. 먼저, 1746년 발간된 고창 오씨 족보(丙寅譜)에는 ‘始祖 吳學麟-子 吳質-吳世文’이라고 표기함으로써, 다시 말해 오세문 앞에 ‘子’를 넣지 않음으로써 오질과 오세문이 부자관계
인지 여부를 표시하지 않았다. 더욱이, 오인정 묘지명(墓誌銘, 묘지에 기록한 글)3이 발견되어 오인정이 오세문의 父임이 밝혀진 바 있다.
1 흥복사(興福寺)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집필자 정병삼.
2 호경은 다른 이들 9명과 함께 평나산에서 호랑이와 싸웠는데, 그
9명은 모두 죽고 본인만 살아남았다. 그 후 그는 평나산신(平那山神)과부부의 연을 맺고 산신이 되어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후 평나군 백성
들은 호경을 모시기 위해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내고, 죽은 9명을 기리기위해서 산 이름을 구룡산으로 불렀다 한다. - 한국고전종합DB, 역자장순범, 이정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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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인정(吳仁正, 1100~1155)의 묘지명 중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우리는 오대(五代)에 걸쳐 아들도 문장[文]을 하고 손자도 문장을 하였다. 선을 쌓은 집에는 반드시 여경(餘慶)1이 있다고 하는데,
너희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문장을 업으로 삼은 것이 오래되었으니, 후사(後嗣)들은 반드시 그 복을 받을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문장에 힘쓰고 또 힘쓰거라.”2
오인정 묘지명 중 ‘오대(五代)’의 의미가 무엇인지와 관련하여,
많은 분들이 오학린부터 오세문(오인정의 子)까지 5대를 말한다고
주장한다.
3 이에 대해 오홍재님은 위 의견과 달리 5대는 오인정을
기준으로 오인정과 그 윗대 4대 조를 말한다는 견해를 제시하였다.
그 주장과 근거는 다음과 같다.
“묘지명에 나오는 ‘與三子曰我五代文子文孫(세 아들에게 말하길,
우리는 5대에 걸쳐 문을 하고…)’라는 문구의 화자(話者)는 묘지명
의 주인인 오인정을 뜻한다.
‘與三子’라는 문구에 비추어 오인정은
위 말을 세 명의 자식들에게 ‘너희들도 열심히 공부하라’는 취지에서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학문을 권하면서 마치 자식들 또한 이미 학문을 성취하여 너희들까지 포함하여
5대가 文을 했다는 자화자찬 식으로 말하진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3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고려시대 史料 Database.
1 여경(餘慶): 남에게 좋은 일을 많이 한 보답으로 뒷날 그의 자손이 받
는 경사(慶事). 積善之家 必有餘慶(적선지가 필유여경).
2 고려시대 史料 Database, 역자 미상.
3 조규익, 이성훈, 박동욱, 《고창 오씨 인물들과 정신세계》 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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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구에 나오는 ‘孫’에는 오인정의 자식들은 포함되지 않는다고 보3아야 한다. 결국 5대는 오인정부터 그 윗대를 의미한다고 보아야 한다.”
오인정(吳仁正, 1100~1155)은 1124년 과거에 합격하고1 관직
에 나아갔다. 오인정 묘지명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처음 원흥진 판관(元興鎭2 判官)이 되었는데 유능하다는 명성이
있었으며, 임기가 차자 개경으로 돌아왔다. 세상의 그릇됨을 분하
게 여겨 뜻을 굽히지 않고 세속의 흥함과 망함에 개의하지 않으니,
10년 동안이나 관직에 임용되지 못하였다. 이에 성의 동쪽 작동(鵲洞) 북녘에 살면서 혹은 손수 농사를 지어 처자를 먹여 살리기도하였다. 그러나 문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수레를 타고 몰려오니,
공부하는 선비들이 모두 스승으로 존경하였다.”3
오인정이 살았다는 작동(鵲洞)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다
만, 개성 동쪽에 경기도 연천군 왕징면 작동리(鵲洞里)가 있는데 이곳이 아닐까 한다.
4 이곳은 휴전선 인근으로 현재 사람이 거주하
지 않는다.
오인정은 10년간 관직을 얻지 못하다가 김부식(金富軾, 1075~
1 한국학중앙연구원 [오인정(吳仁正) 인물 정보].
2 원흥진: 함경남도 남부에 있는 정평군(定平郡)에 여진족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설치한 7진의 하나. - (history.go.kr).
3 海東髙麗國翼陽府録事呉墓誌(해동 고려국 익양부녹사 오의 묘지), 고려
시대 史料 Database, 역자 미상.
4 왕징면 - 나무위키. 고려 궁궐터 ‘만월대’에서 작동리까지는 차로 약
1시간 거리이다. 작동리 - Google Ma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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