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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 오씨

영주에 정착한 고창 오씨의 역사 저자 오 승 연 30.ㅡ40.pg

작성자吳恭姙(현정)|작성시간26.06.08|조회수63 목록 댓글 0

1151)1에 의해 탁라도 구당사(句當使)2로 임명되어 제주도에서 근
무했다.
그의 묘지명의 첫 문장이 ‘해동 고려국 익양부 녹사 오인정의
묘지(海東髙麗國翼陽府録事呉墓誌)’인 것으로 보아 그의 마지막 관직은 익양부 녹사(翼陽府 錄事)인 듯하다. 익양부(翼陽府)는 익양후
(翼陽侯)의 관저를 말하는데 익양후는 고려 인종의 셋째 아들로
1148년(의종2)에 책봉되었다. 그러므로 오인정이 익양부 녹사3로
근무한 시점은 1148년 이후이다.
묘지명에 따르면 오인정은 1155년 병을 얻어 개경으로 돌아와 그해 7월에 죽었다. 그가 익양부 녹사로 근무한 시점부터 1155년
까지 무엇을 했는지는 묘지(墓誌)의 글자가 훼손되어 알 수가 없다.
참고로, 익양후는 1170년에 일어난 무신의 난으로 형인 의종이 폐위된 후 왕으로 옹립되었는데 그가 바로 고려 명종이다(재위:
1170~1197).
오인정의 아들로는 장남 오세공(吳世功), 차남 오세문(吳世文), 삼남 오세재(吳世才, 1133~1195, 字는 德全)가 있었다. 삼형제 모두 문장으로 이름이 났고, 무신정권이 들어서기 전에 과거에 합격했다.
4
1 김부식: 고려 때 문신, 문인, 유학자.‘삼국사기’의 저자.
2 구당사(勾當使): 구당은 본래 ‘임무(任務)를 맡다(句, 當)’는 뜻으로, 994년
(성종13)에 압록도(鴨綠渡) 구당사를 두었던 것에서 기원을 찾을 수있다. 후에 탐라(耽羅)를 포함한 모든 나루터에 구당사를 두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3 녹사: 고려·조선시대 중앙 여러 관청에 설치되어 있는 하위관직. 익양부 녹사는 익양부에서 기록을 담당하는 하위 관직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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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남 오세공(吳世功)의 생몰년도는 알 수 없다. 오세공은 1153년 과거에 합격하였고,
1 고려 의종 때 청주목장서기(淸州牧掌書記,청주목에서 기록을 담당하는 관리를 지냄)2와 명종(재위: 1170~1197)
때 경상도 안찰사(按察使)를 역임하였다.
오세공은 권정평(權正平, 1085~1160)의 묘지명을 썼다.
3 묘지명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오세공은자신이 권정평과 같은재(齋)의 후배이고 권정평의 아들, 권안국과는 친한 친구 사이라고하였다.
4(世功本君之同齋後生也又與其子安國友善). 여기서 언급한 재(齋)는 남산도(南山徒, 고려 때 김상빈이 개경에 세운 사학기관으로
12공도의 하나)의 강신재(講信齋)를 말한다. 위 기록으로 보건대 오인정의 장남 오세공은 과거에 합격했던 1153년 이전에 개경 강신
재에서 공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오인정의 차남 오세문(吳世文)의 경우 1152년(고려 의종6) 생원시5에서 장원 급제했다.
6 고려 최고의 문장가 이규보(李奎報, 1168
4 오세문(吳世文) - 1 한국학중앙연구원.
2 장서기(掌書記): 고려시대의 외관직(外官職)의 하나. 품계는 7품 이상
6품 이하이다. 기록을 작성하고 관리하는 업무를 담당. - 네이버 사전.
3 고려시대 史料 Database. 將仕郞寶文閣校勘吳世功撰(장사랑 보문각 교감
오세공 지음) 장사랑(將仕郞)은 고려 때 문관 품계의 하나로 종9품을 의미한다.
보문각(寶文閣)은 고려시대 경서를 강론하고 장서(藏書)를 맡아보던 관청이다.
4 참조 김용선, 《고려시대의 私學과 그 입학생》.
5 생원시: 『고려사』에 따르면, 1147년(의종1)부터 실시되어온 고려시대의
승보시(陞補試)를 생원시(生員試)라고도 불렀다. 고려의 국자감시(國子監試)
와 승보시(陞補試)가 조선에서는 각각 진사시(進士試), 생원시(生員試)로
계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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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1)는 동국이상국집에 그가 낭중(郎中)1 오세문의 집에 있다가
광명사의 지인을 찾아가 시를 지었다는 기록을 남겼다.
2 이규보가 오세문의 집을 방문한 것을 보면 이규보와 오세문은 상당한 친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오세문은 평생 지은 시가 많으나 전해져 내려오는 것은 거의 없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실려 있는 오세문의 시를 보면 그가 녹양역(綠楊驛, 경기도 양주에 있던 역참)에 들렀을때 버드나무가 없어진 듯하여 세월의 무상함을 새삼 느꼈다고 기록하였다.
3 아래에 소개한다.
4
有花村價重 꽃이 피어 마을은 더욱 아름답건만
無柳驛名孤 (綠楊驛에) 버드나무 없으니 역 이름만 외롭구나5
喬木日先照 교목(喬木, 키 큰 나무)6에 해가 먼저 비치니
葉枯風自乎 시든 잎사귀에 바람이 절로 불겠지7
6 한국학중앙연구원 오세문(吳世文).
1 낭중(郎中): 고려시대의 상서성(尙書省)과 상서 6부· 고공사(考功司) ·도관(都官)의
정5품 관직.
2 한국고전종합DB, 역자 이식.
3 의정부시사 제6권. 41쪽.
4 의정부시사 제6권 41쪽(역자 미상)을 참고하여 수정하였다.
5 녹양역(綠楊驛)에 녹양(綠楊, 푸른 버드나무)이 없음을 말한다.
6 교목(喬木): 줄기가 곧고 굵으며, 높이 자라는 나무. 소나무ㆍ향나무 따위.
- 네이버 사전.
7 높이 자란 나무의 잎사귀는 햇빛을 받기가 쉬워서 금방 시들 수 있음
을 뜻한다. 뛰어난 신하는 임금의 은총을 받기도 쉽지만, 동시에 금방
꺾이는 고난(바람)을 겪을 수도 있음을 은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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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인정의 삼남 오세재는 1151년(의종5)에 진사시에 합격했다.
1
오세재(吳世才)에 대해 고려사(高麗史)2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오세재의 자는 덕전(德全)으로 고창현(高敞縣) 사람이며, 조부는 한
림학사(翰林學士) 오학린(吳學麟)이다. 오세재는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써 육경(六經)을 손수 필사하여 읽었으며 날마다 『주역(周易)』을
암송하였다. 명종(明宗) 때 등제(登第)하여 성품은 영특함이 트였으나 몸과 마음을 검속함이 적어 세상에 용납되지 않았다. 이인로(李仁老)가 세 번이나 상서(上書)하여 그를 천거하였으나 끝내 관직을
얻지 못하였는데 동경(東京)에 우거(寓居)하다가 곤궁해져 죽었다.
이규보(李奎報)와 함께 망년교(忘年交)가 되었는데 이규보가 사사로 이 시호를 말하길,
‘현정선생(玄靜先生)’이라 하였다.”3
오세재가 고려 의종(1127~1173)의 미행(微行)4을 풍자한 시5를 아래에 소개한다.
胡乃日淸明 어찌하여 청명한 날에
1 한국학중앙연구원 오세재(吳世才).
2 고려사: 조선전기 문신 김종서, 정인지 등이 왕명으로 고려시대 전반
에 관한 내용을 1449~1451에 걸쳐 정리하여 편찬한 역사서 - 다음 백과.
3 고려시대 史料 Database. 역자 미상.
‘世才, 字德全, 高敞縣人, 祖翰林
學士學麟. 世才少力學, 手寫六經以讀, 日誦周易. 明宗時登第, 性疎雋少檢,
不容於世. 仁老三上書薦之, 竟未得官, 僑寓東京, 窮困而卒. 與奎報爲
忘年交, 奎報私謚曰玄靜先生’
4 미행: 지위가 높은 사람이 무엇을 몰래 살피기 위하여 남루한 옷차림
을 하고 남 모르게 다님. 남을 감시하기 위해 몰래 쫓는 尾行(미행)과 다름.
5 역옹패설 후집2(櫟翁稗說 後集二), 한국고전종합DB, 역자 장순범, 정기
태, 김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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黑雲低地橫 검은 구름이 땅에 덮였는가
都人且莫近 도성 사람들아 가까이 오지 말라
龍向此中行 용이 이 속으로 지나간다오
오세재의 시호(諡號)1는 ‘玄靜’이다. 고창 오씨 경주 입향조(入鄕祖)로서 현정공파의 시조이다.
◈ 복양(濮陽)에 대하여
1891년 발간된 고창 오씨 족보(辛卯譜)는 오세문의 호(號)를 ‘濮陽’(복양)이라고 기록한다. 그런데 2001년 발간된 족보는 오세문이
아닌 오세재의 호가 ‘濮陽’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두 족보 모두 ‘濮陽’이 호라는 점에서 일치하되, 그 호의 주인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만 달리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오민필님은 《복양문학고》라는 논문에서 오세재의 호가 복양이라고 주장하며 동국이상국집, 파한집(破閑集, 이인로의 문집), 보한집
(補閑集, 최자의 문집) 등 여러 곳에서 ‘濮陽世才’ 등으로 언급하고있음을 근거로 제시한다.
이에 대해 오홍재님은 ‘濮陽’은 특정인의 호가 아니라 관향(貫鄕,오씨의 시조의 고향)이라는 의견을 제시하면서 그 근거로 다음과
같은 점을 제시하고 있다.
1 시호: 제왕이나 재상, 유현(儒賢)들이 죽은 뒤에 그들의 공덕을 칭송하여 붙인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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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규보의 글을 모은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을 보면, 이규보는 오세문, 오세재 형제의 이름 앞에 모두 ‘복양’이라는 단어를쓴 바 있다{오세문과 관련한 ‘次韻吳東閣世文呈誥院諸學士三百韻詩’
에서 ‘濮陽吳公世文’1라고 언급하고, 오세재와 관련한 ‘吳先生德全哀詞’에서 ‘濮陽先生吳世才’2라고 언급하였다}.
­ 김함(金諴, 1076~1147)3의 묘지명에 ‘濮陽吳頲之外孫也(복
양 오정의 외손자)’라는 기록이 있다.
4
­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오○실(吳○實, 1130~1184)의 묘
지명에도 ‘濮陽吳公墓誌銘’라는 문구가 있다.
5
­ 금라전신록(金羅傳信錄)6에 오세문의 후손인 오언의(吳彦毅,1494 ~1566)에 대해서도 ‘縣監濮陽吳公’이라 언급되고 있다.
­ 이규보가 오세문에게 화답하여 지은 시가 있다. 바로 ‘次韻吳東閣世文呈誥院諸學士三百韻詩’{이는 ‘동각(東閣) 오세문이 한림원(誥院)의 여러 학사들에게 드린 300운(韻)의 시에 차운하다’라는 의미
이다. 이하 ‘삼백차운시’라 한다}7이다. 삼백차운시에는 오세문이
1 한국고전종합DB.
2 한국고전종합DB.
3 김함: 고려 전기의 문신.
4 고려시대 史料 Database.
5 국립문화재연구원, 김용선은 묘지명의 ‘濮陽吳公墓誌銘’ 문구 중 ‘濮’을 판독하지 못했으나,
‘濮陽’을 아는 입장에서 탁본을 보면 ‘濮’임을 알 수 있다.
6 금라전신록: 금라(金羅)는 경남 함안의 옛 이름이다. 조임도가 1639년에 편찬한 책으로 경상남도 함안지방에서 배출된 인물의 전기(傳記) 및
특이한 문장을 가려서 저술한, 일종의 향토인물 문학사전이다. – 다음 백과.
7 삼백차운시: 한 행(行)이 다섯 글자(五言)로 이루어진 오언시(五言詩)로, 오세문의 일생에 대한 묘사도 상당부분 나온다(동국이상국집 제5권).
어느 연회에서 오세문이 302운의 시를 지어 보이면서 자신보다 38세 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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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양을 다녀왔음을 언급하고 있다.
“복수(濮水)1에서 한가히 낚시질한 것을 자랑하였고, 누수(㶟水)의 기이한 유람을 설명하였네. 공이 북지(北地)에서 동도로 돌아왔을 때 내가 방문하였다(幽居誇釣濮 奇迹說遊㶟 公旣自北入洛 予訪
之).”2 이에 의하면 복양(濮陽)은 중국의 지명인 ‘복양’임을 알 수 있다.
나는 아래와 같은 이유에서 오홍재님의 의견처럼 ‘濮陽’은 오씨가 한반도로 건너오기 전에 중국에서 살던 곳인 河北城 濮陽縣(하북성 복양현)3을 의미하고, 오세문이나 오세재 누구의 호도 아닌
관향을 뜻한다고 생각한다.
濮陽’이 ‘호’라면, 이규보가 실수로 오세문, 오세재의 호를 똑같이 ‘濮陽’이라 쓴 것인가? ‘호’는 일종의 별칭으로 대상을 구별하는의미를 가진다. 그런데 오세문, 오세재와 친밀한 관계였던 이규보
가 지인들의 호를 헷갈려서 사용했다고 보기 어렵다.
오홍재님이 제시한 자료를 보면, ‘오세문, 오세재’뿐만 아니라 다른 오씨들 경우에도 ‘濮陽’이 성(姓) 앞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오씨 성을 가진 이들이 모두 ‘濮陽’을 ‘호’로 사용했다고 보기에는왠지 어색하다.
지만 문장이 뛰어난 이규보에게 이에 화답할 수 있는지 물었다. 이에 이규보는 차운{次韻, 남이 지은 시에서 운자(韻字)를 따서 시를 지음}하여
300차운시를 지어 오세문에게 보냈다. 이규보는 그날 자신의 아들이 태어나자, 아들 이름을 ‘三百’으로 지었다고 한다.
1 복수(濮水)는 중국 하북성(河北省) 복양현(濮陽縣)에 있는 강이다.
2 한국고전종합DB.
3 현 하남성 복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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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고창 오씨’ 일족이 고려 때는 ‘고창 오씨’가 아닌 ‘복양 오씨’라 불렸을 가능성이 있다(당시 오씨들 사이에서는 자신들의본관이 고창이라는 점에 대한 인식이 오늘날처럼 뚜렷하게 형성되지 않았을 것이다).
고려 때 오학린의 후손들은 조상이 중국 복양현1에서 왔음을알고 있었다. 이들이 ‘濮陽’을 출신지로 내세운 것은 당시 고려 사람들에게 중국이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선진 문명을 이룩한 곳으로 세상의 중심이 되는 지역으로 인식되었던 사정과 관련이 있으리
라 추측된다. 즉, 고려의 오씨들은 ‘濮陽’을표시함으로써 자신들이 선진국 출신임을 내세우고 이를 통해 사회적 위상을 드높이고자 한듯하다.
아마도 중국 복양현에 오씨들이 많이 살았던 듯하다. 당나라 때(812년) 임보(林寶)가 쓴 성씨에 관한 책인 ‘원화성찬(元和姓纂)’에서 이러한 추측을 뒷받침하는 다음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2 시대에서 수, 당나라(618~907)에 이르는700여 년 동안 북방 이민족이 대거 남쪽으로 내려왔다. 이 시기
오씨 대족의 주요 분포지역은 吳郡(오군), 武昌(무창), 濮陽(복양),
1 복양현: 춘추전국시대의 옛 지명은 ‘제구(帝丘)’로 불렸고, 위나라의 수도였다. 복양은 중국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의 출신지였는데, 제자백가중 병가에 속하는 오기, 공자의 수제자인 자로, 진의 개혁을 이끈
법가의 상앙, 진의 실권자 여불위, 진시황 암살을 시도한 형가 등이 이곳에서 태어났다. – 나무위키.
2 위진남북조 시대: 중국의 역사에서 삼국시대(220년~280년)부터 581년
수(隋)나라가 중국전체를 통일할 때까지 약 400년간 지속된 극심한 혼란
기를 말한다. 이 시기에는 많은 북방 이민족이 만리장성의 이남 지역까지 내려와 국가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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渤海(발해), 陳留(진류) 등으로, 남쪽은 흥하고 북쪽은 쇠퇴하는 기세를 보인다고 하였다.
1
참고로, 고문진보(古文眞寶)2에 실린 시 ‘貪泉(탐천)’의 작가 오은지(吳隱之, ~413)3는 濮陽 사람이다. 이상으로 복양에 대한 논의를 마친다.
♧ ♧ ♧ ♧ ♧
나는 이번 기회에 자(字)나 호(號)를 이름 앞에 붙이는 이유를찾아보았다.
4 옛날 중국에선 이름과 생명을 동일시하는 관념이 있
어 이름을 굉장히 중시했다. 그 연장선상에서 이름으로만 상대를부르는 것은 상대를 모독하는 행위로 생각되었다. 그래서 이름 앞에 字, 號, 관직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관행이 생겼다. 예기(禮記)에도 “남자는 20세 관례를 행하고 字를 짓는다. 여자는 혼인을 약속
1 魏晋至隋唐的七百余年间, 北方士民大量南迁, 吴氏宗族也在南迁之列。
据唐林宝撰写的《元和姓纂》 记载, 这期间的吴氏大族主要分布在吴郡, 武昌,
濮阳, 渤海, 陈留等地, 并呈南兴北衰之势 - 吴姓 中华姓氏 百度百科.
2 고문진보(古文眞寶)는 주나라에서 송나라에 이르는 동안의 한시(漢詩)
와 문장들을 수집하여 분류한 책이다. 참고로, 퇴계 이황은 “고문진보를
600번 읽으라. 그러면 문리를 터득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3 오은지: 동진 때 복양 사람으로 젊었을 때부터 청렴과 절개로 이름이 알려졌고 문학과 역사에 두루 통달하였다. 고문진보 전집 73쪽.
4 자, 호에 대한 내용은 강헌규, 신용호, 《한국인의 字·號 연구》에서
일부 발췌, 정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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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계례를 행하고 字를 짓는다.
1 관례를 행하고 字를 짓는 것은
그 이름을 공경해서이다.”라고 쓰여 있다.
이렇듯 이름 앞에 字를 붙이는 것은 중국 周나라 때부터 시작하였다. 우리나라에선 삼국시대 말(600년대 말)부터 일부 지배층에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예를 들면, 설총의 字는 聰智(총지), 최치원의
字는 孤雲(고운)이다. 고려시대에는 字를 사용하는 것이 이전에 비해 좀 더 보편적이었다.
2.
1170년 무신의 난(武臣亂)이 일어난다. 무신들이 문신에 비해낮은 대우를 받았던 데 불만을 품고 문신들을 대량 학살한 사건이다. 이후 100년 동안 무신들이 고려를 지배하게 된다. 이 시절 일부 문신들은 산림에 은거하며 중앙 정치로부터 벗어나 있었는데 소
외감과 좌절감을 승화시켜 많은 문학 작품들을 탄생시키기도 하였다.
오세재는 이인로(李仁老, 1152~1220), 임춘(林椿)3
, 조통(趙通),
황보 항(皇甫抗), 함순(咸淳), 이담지(李湛之)와 함께 ‘망년회(忘年會또는 竹林高會)’4라는 모임을 만들어 시와 술을 주고받으며 그 시절 자신들의 마음을 달랬다. 문신으로 비슷한 처지이던 오세문도
1 우리나라에서는 여자의 字를 짓는 경우가 드물었다.
2 강헌규, 신용호, 《한국인의 字·號 연구》.
3 임춘: 예천 임씨(醴泉林氏)의 시조.저술한 문인.
「국순전」,
「공방전」,
「서하선생집」 등을
4 『고려사』 권102 「열전」15. 망년회는 나이를 따지지 않고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뜻이었다. 이들은 중국의 위(魏)· 진(晉) 시대
죽림칠현을 본받았다고 하여 ‘죽림고회(竹林高會)’라 불렸다. 또 강남
쪽에 산다고 하여 ‘강좌칠현(江左七賢)’이라고도 하였다. - 유교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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