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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 오씨

영주에 정착한 고창 오씨의 역사 저자 오 승 연 50-60p

작성자吳恭姙(현정)|작성시간26.06.10|조회수69 목록 댓글 0

고창 오씨 족보에 최단(崔郸)은 오엄의 장인으로 기록되지 않았는가’이다.
나는 대령 최씨 집안이 단종과 관련이 깊다는 사실에서 위 의문의 해답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대령 최씨 집안과 단종의 관
계는 이렇다. 씨족원류 대령 최씨 족도에 의하면 최단(崔郸)의 남동
생은 최용(崔鄘)이다. 최용의 딸이 권전(權專, 1371~1441)1에게시집갔다.
2 권전의 딸이 바로 조선 문종(1414~1452)의 정비인 현덕왕후 권씨(1418~1441)이고 단종(노산군)의 모후이다. 정리하면,
단종의 모후(母后, 임금의 어머니)는 오엄의 처의 종질녀(5촌)이고,단종은 오엄의 처와 6촌지간이다.
그런데 1453년(단종1) 계유정난(癸酉靖難), 즉 수양대군이 단종을 보좌하던 원로대신 김종서 등을 처형하고 권력을 잡은 사건이
일어난다. 1455년 윤6월 단종이 왕위에서 물러나자 성삼문, 박팽년, 류성원 등 집현전 관리들은 단종 복위를 도모하였다. 이들은
1456년 6월 단종 복위 계획이 발각된 후 모두 처형당하거나 귀양을 갔다. 이 사건으로 인해 17세의 단종도 폐서인(廢庶人, 서민으
로 강등)되고 영월에서 죽음을 당하였다. 이런 정치적 상황 속에서고창 오씨는 가문을 보호하기 위해 단종과 특별한 관계에 있던 최
단을 족보에서 삭제한 것일지도 모른다.
1 참고로, 씨족원류의 안동 권씨 족도에는 권전의 자식들 중 ‘女 0000 –子 魯山(노산)’이라 기록된 부분이 있다.
‘女’글자 바로 아래에 사위의
이름을 쓴 다른 기록들과 달리, 권전의 ‘女’자 아래에는 이름대신 빈
동그라미 4개를 그려두었다. 이는 사위가 임금인 문종대왕이었고, 왕의이름은 함부로 쓸 수 없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2 권전(權專)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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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오엄의 장남 오천(吳泉)은 건공장군 행사정(建功將軍 行司正)1을 역임했다. 오천은 충북 옥천으로 이거해 살았는데, 오천의
父 오엄의 묘소가 옥천(沃川郡 菊原里)에 있는 것을 보면 오엄도 말년에 옥천에서 살았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나는 오엄과 오엄의 子 오천이 한양을 떠나 옥천으로 이주한 데에 어떤 특별한 사정이 있었는지 궁금했다. 그 특별한 사정이란 1453년(계유정난)부터 1455년(세조 등극)까지 벌어졌던 세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하고, 나중에는 단종 복위 운동에 참여한사람들과 오엄, 오천이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오엄, 오천은 위에서 본 것처럼 단종의 외가와 혼맥으로 연결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단종을 지키고자 한 사육신과도 혼인으로인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관계는 다음과 같다.
2
오엄의 사돈의 사돈인 延安金氏 집안은 사육신(死六臣)인 성삼문(成三問, 1418~1456), 류성원(柳誠源, ~1456)과 관련이 있다. 홍연(오엄의 맏사위)의 외할아버지는 김자지이다. 김자지의 손녀사위는 성삼문3이다(홍연과 성삼문의 처는 외사촌지간이다). 또한 김자지의
1 행사정(行司正): 정7품의 무관직. 송일기, 진나영, 《佐翼原從功臣錄券의書誌的 硏究》.
2 이에 대해서는 오홍재님이 제공하신, 오엄과 오천의 인척관계에 대한연구 자료와 정보를 바탕으로 족보와 인터넷자료를 찾아서 정리한 것이다.
3 성삼문: 집현전학사. 세조 때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죽은 사육신 중한 명이다. 1455년 단종이 세조에게 양위(讓位, 임금의 자리를 넘겨줌)할때, 성삼문이 국새(玉璽, 국가 문서에 사용하는 임금의 도장)를 끌어안고통곡을 하자 세조가 노려보았다는 일화가 있다. 1691년(숙종17)에 관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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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김학지의 맏사위의 매제(妹弟, 누이동생의 남편)는 류성원1이다.
오천의 사돈인 中和楊氏 집안도 사육신 박팽년(朴彭年, 1417~1456)2과 관련이 있다. 오천의 넷째 사위는 양유지이다. 양유지의 동생
양유정은 박팽년의 종매제(從妹弟, 사촌 누이동생의 남편)이다.
단종 복위 운동이 실패하자 집현전 관원이었던 사육신들은 고문을 당하거나 스스로 자결을 하였다. 성삼문 일가는 씨를 말린다는
멸문지화를 당했고 여인들은 관노로 끌려갔다. 이들과 관련 있는친인척 간, 친구지간, 사제지간의

많은 사람들에게도 크고 작은 화가 닥쳤을 것이다. 다행히 화를 피한 사람들은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난 무참한 광경을 목도하며 가슴 아픈 울음을 울었을 테다. 어쩌면 이들은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곱씹으며
살았을지도 모르겠다. 성삼문의 처가(연안 김씨 집안) 사람들도 화를 피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사육신과 간접적이나마 혼맥으로 연결되어 있었던 오엄과 오천
은, 세조와 그의 추종자들이 권력을 쟁취해 나가는 과정에서 벌이
는 행태를 보며 경악하고 한탄하였을 것이다. 오엄과 오천은 생육이 회복되고(사육신 모두 관작이 회복되었음), 1758년(영조34) 충문(忠文)
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1 류성원: 사육신 중 한 명. 세조가 계유정난을 일으켜 스스로 훈공을
기록하려 할 때, 집현전에 있다가 붙잡혀 협박을 당한 류성원은 어쩔 수
없이 정난공신의 교서를 쓰고 통곡을 했다는 일화가 있다. 단종 복위
계획이 실패하자 자결했다.
2 박팽년: 사육신 중 한 명. 계유정난이 일어나자, 세조에게 올리는 문서에
'신'(臣)이라는 글자 대신 '거'(巨)라는 글자를 쓰고 녹봉에도 일체 손을대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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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生六臣)1과 같은 심정으로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옥천 지방으로이주해 은거(隱居, 세상을 피해 숨어서 살다)했던 것으로 보인다.
오엄은 고창 오씨 옥천 입향조이고, 오천은 고창 오씨 사정공파(司正公派)의 시조가 된다.
오육화(六和)
오엄(淹)
오천
(泉)
長子
오연
(淵)
次子
오영
(永)
三子
오형
(滎)
四子
딸 1

홍연
딸 2

조숙생2
딸 3

고태보
의령공
오석복
(碩福)
오경복
(景福)
오언의
(彦毅)
오충학
(冲鶴)
1 생육신: 세조 즉위 후 벼슬을 하지 않음으로써 단종에 대한 절개를 지킨 김시습· 원호· 이맹전· 조려· 성담수· 남효온을 가리키는 말이다. – 다음 백과.
2 오엄과 사돈지간인 조관(趙貫, 1382~, 조숙생의 父)은 양주 사람으로,
계유정난 때 처형당했던 조카 조순생의 일에 연루되어 세조가 즉위한
1455년에 남해로 유배를 갔다. 조관이 죄인의 몸으로 귀양을 갔음에도
그의 아들 조숙생은 공신으로 녹훈(등록)되었다. 조관은 1456년 조숙생
의 청원으로 유배에서 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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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엄은 아들 넷, 딸 셋을 둔다. 오엄의 맏사위는 세종 26년
(1444년) 42살에 대과 급제하고 사헌부집의를 역임한 홍연(洪演)1이다.

둘째 사위는 세조를 왕위에 올리는 데 기여한 원종공신(原從功臣) 조숙생(趙肅生, 본관 한양)2이고, 셋째 사위는 제주도 출신의
고태보(髙台輔)3이다.
오엄의 딸들 중 한 명이 세조실록(세조3, 1457년 6월 10일)에한 번 등장하는데, 바로 조숙생의 처인 오씨이다.

예조정랑 우계번(禹繼藩)이 술에 취해 귀가하다가, 말을 타고 지나가는 여인(迎接都監使 조숙생의 처)이 기생인 줄 알고 끌어내리려 했다. 실랑이 끝에 오씨가 매를 맞고 기절하였다. 조숙생은 이 사건을 세조에게 고
했고 세조는 의금부로 하여금 우계번을 국문(鞠問)4하게 한 후, 2년간 유배생활을 하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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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는 오엄의 자식들 중 나의 직계조상인 오형(吳滎)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간다.
1 한국학중앙연구원 [홍연(洪演) 인물 정보].
2 조숙생은 1455년(세조1) 12월 27일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녹훈되었다.
한국고전종합DB.
3 고태보의 父는 고득종(髙得宗, 1388~1452)이다. 고득종은 제주 출신
(탐라국 성주의 후예)으로 특혜를 받고(음직) 첫 관직에 나갔으나 후에
(1414년) 문과에 급제했다. 한성부 판윤 등을 역임하였다. 고득종의 네
아들 중 세 아들 모두 문과에 급제했고 네 아들 모두 관직에 나갔다.
참고로, 髙는 제주 고씨, 高는 횡성 고씨를 지칭한다.
4 국문: 임금이 중죄인을 심문하던 일.
5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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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오엄의 넷째 아들 오형(吳滎)은 나주 판관을 지냈다. 조선왕조실
록에 따르면 세조 11년(1465년) 몇 명의 관리들에게 미나리(세자궁에 심어져 있던 미나리) 관리를 태만히 하였단 이유로 벌을 가하
였다1고 나오는데, 벌받은 이들 중 침장고 별좌(沈藏庫別坐)2로 근무하던 오형(吳滎)이 등장한다. 오형은 미나리를 잘못 관리하였다고
장(杖) 70대를 맞았다. 오늘날 시각에서는 이런 일을 쉽게 이해하기어렵다. 하지만 당시 조선에서 미나리는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미나리(芹)는 ‘임금에 대한 충성(忠誠)’을 상징한다.
‘헌근지성(獻芹之誠)’이란 말이 있을 정도이다. 헌근지성은 미나리(芹)를 바치는
(獻) 정성(精誠)이라는 뜻이다. 옛날 햇미나리가 나면 제일 먼저 임
금에게 바치는 관행에서 비롯된 표현으로, 주군께 정성을 다하는
마음을 이르는 말이다. 그래서 교육기관인 성균관에서도 미나리를심은 것이다.
3 이런 미나리를 제대로 돌보지 않았으니 세조는 신
하들의 충성심이 낮다고 보아 벌을 내린 것이다.
오형의 묘소는 楊州 松界(양주 송계)에 있었으나 지금은 실전(失傳)되었다. 오형의 장남은 오석복(吳碩福, 1455~1533), 차남은
오경복(吳景福)이다. 의령공 오석복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이야기하겠다.
1 한국고전종합DB, 역자 이해철.
2 침장고: 조선 시대, 궁중에서 필요한 채소의 재배와 공급을 담당하는기관. 1466년에 사포서(司圃署)로 개칭. 별좌: 정, 종5품 관직.
3 황광해(음식 칼럼니스트), ‘미나리, 한낱 풀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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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형의 차남 오경복은 1483년 생원시에 합격한 기록이 있다.
1
이후 광흥창 봉사(廣興倉 奉事)2를 역임했다. 오경복의 묘소는 양주
(현 고양시 덕양구 仙遊洞)에 있다. 오경복은 고창 오씨 봉사공파(奉事公派)의 시조이다.
오경복은 모두 네 아들을 두었다. 오경복의 장남 오충학(吳冲鶴,
1491~1541)은 충무위 부사직(忠武衛 副司直)3을 역임하였다.

오충학은 한성 인왕동(漢城 仁王洞)4에 살았는데 1519년 기묘사화(士禍)5의 참화(慘禍 참혹한 재화)를 피해 벼슬을 버리고 동생들과 함
께 해서지방(海西, 황해도)으로 이주해갔다.
6
오엄의 子 오형과 孫子 오경복의 묘소가 한양 근방(당시 양주)에있고, 오엄의 曾孫子 오충학이 한성 인왕동에 살았다는 기록을 보
면,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가 교체되는 시기에 집안사람들 중 일부는 주 본거지였던 개경(현재 북한 개성시)에서 한양으로 거주지
를 옮겼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오충학 대에 이르러 고창 오씨
1 한국학중앙연구원 [오경복(吳景福) 인물 정보].
2 광흥창: 고려 및 조선시대에 관료들의 녹봉을 담당하던 관청. 봉사(奉事):종8품의 관직.
3 충무위: 조선시대 군사조직으로 5위의 하나. 부사직: 종5품 무관직.
4 한성은 한양을 지칭. 인왕동은 1970년 ‘옥인동’으로 명칭이 변경됨. -
다음 백과.
5 사화: 조선 시대에 조정의 관리와 선비들이 정치적 반대파에게 몰려 참혹한 화를 입던 일. 무오사화(1498년), 갑자사화(1504년), 기묘사화(1519년),을사사화(1545년)가 있다.
6 조규익, 이성훈, 박동욱, 《고창 오씨 문중의 인물들과 정신세계》 358쪽과
족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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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 중 일부가 한양에서 해서지방(황해도)으로 다시 이주해갔다.
한편, 오엄의 孫子 오석복은 의령 현감을 지냈다가 경남 함안모곡촌(茅谷村)에 정착하였다.
1 이제 고창 오씨 의령공파의 시조,
의령공 오석복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1 조규익, 이성훈, 박동욱, 《고창 오씨 문중의 인물들과 정신세계》 3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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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의령공부터 1500년대 중반까지
오형의 아들, 宜寧公 오석복(吳碩福, 1455~1533)은 의령 현감을지낸 뒤에 함안(咸安) 모곡(茅谷)으로 내려와 살면서 삼우대(三友
臺)1를 지었다. 호는 三友臺2
, 竹齋(죽재)이다. 오석복은 퇴계 이황의 숙부인 송재 이우(李堣, 1469~1517, 號 松齋)3와 사돈을 맺었
는데, 퇴계가 함안 삼우대를 방문하여 지었던 시4가 남아있다.
1506년 9월 2일 중종반정이 일어나 연산군을 축출하고, 9월 8일에는 공신책정이 있었다.
5 오석복이 중종반정에 참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공신이 되었다는 자료6가 있는데, 중종실록 9월 8일자
기록(공신을 논의함)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7
1 그의 증손자 오운(吳澐)은 삼우대를 영주 사일마을(초곡)로 이건하였다.
2 조선 말 오근호가 삼우대를 중건하며 ‘三友堂’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일부 학자들은 오석복의 호를 ‘三友堂’이라고도 한다. – 오홍재.
3 퇴계 이황 선생은 생후 7개월 만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린 시절 숙부인 송재 선생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4 ‘오의령공삼우대(吳宜寧公三友臺)’- 퇴계집 별집 1권. 한국고전종합DB.
5 한국고전종합DB, 역자 박천규.
6 유교넷 유교역사관 - 인물정보 (유교넷) 집필자 미상.
7 오석복이 왕조실록에 기록될 정도의 공을 세운 것은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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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일등공신으로 녹훈된 조수천(趙壽
千, 1482~1553)1이 쓴 북계실기(北溪實紀)에는 오석복이 공신이라
고 언급하고 있다(‘直長2 吳碩福’으로 기록).
참고로, 1519년 공신 위훈(僞勳, 가짜 공훈) 삭제사건이 일어난다. 조광조(趙光祖, 1482~1519) 등 사림세력이 중종반정의 공신으
로 등록된 자들 중 거짓 공신은 삭제해야 된다고 주장하고 실제로 일부 관철시켰다. 이는 기묘사화의 발단이 된다.
3
오석복으로부터 ‘고창 오씨 의령공파’라는 분파가 생겨난 것인
데, 그들은 경상남도 함안, 의령을 기점으로 살았다. 현 의령군수
오태완은 의령 현감이었던 오석복의 후손이다. 후손이 500여 년의시간을 건너뛰어 조상과 같은 일을 담당하게 된 셈이니 의령과 고
창 오씨와의 인연이 참으로 크다.
오석복의 아들 오언의{吳彦毅, 1494~1566, 字 仁遠, 號 竹塢(죽오)}는 장인 이우(李堣)에게 수학하면서 퇴계와 가깝게 지냈다(오언
의는 퇴계의 종자형 즉, 퇴계의 사촌 누나의 남편이다).4
1 [함안조씨] 조수천(趙壽千) (sungssi.co.kr)
2 직장: 조선시대 중앙의 각 관아에 두었던 종7품 관직.
3 1519년 훈구파들은, 사림파들이 붕당을 지어 왕권을 위협하고 국정을
어지럽힌다고 고했고, 중종은 이를 수용해 사림파들을 숙청했다(기묘사화).
이후 훈구파가 다시 정계의 중심이 되었으나 사림이 정치 주도세력이 되는 대세는 막을 수 없었다. - 다음 백과.
4 ‘孝行俱盡丕變時俗 與退溪先生嘗友普義分如膠漆’ 효행이 모두 다하고 시속이 크게 변한 상황에서 (오언의는) 퇴계선생과 벗으로 사귀면서널리 의를 나누었고 혼맥으로 가까웠다(교칠지교, 膠漆之交) - 족보.
참고로,
‘교칠지교’는 혼인으로 맺어진 친밀한 관계에 쓰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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