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언의는 1544년 4월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 1495~1554)과
경북 봉화 청량산을 유람하였다. 주세붕의 ‘유청량산록(遊淸涼山錄)’1 기록 중 일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오언의는 당시 안동 온계(온혜리)에 살고 있었다. 주세붕은 온계에서 오언의를 만나 청량산으로 향하는 길에
농암 이현보 선생을 찾아 뵈었다. 농암 선생이 문 밖으로 나와 반갑게 맞아 주셨다.
집안으로 들어가 바둑을 두었고, 이후에 음식과 술이 나오고, 계집종들은 거문고와 아쟁을 켰다. 농암의 아들 문량이 노래를 부르고 문
량과 주세붕이 덩실 춤을 추니 78세 농암도 자리에서 일어나 같이춤을 추었다.”2
주세붕과 오언의는 청량산에 올라 경치를 구경하고, 술을 마시고 시를 읊으며 청량산 명소 곳곳을 주유(周遊, 두루 돌아다니며
구경하며 놀다)하였다. 청량산 유람기를 최초로 남긴 이가 주세붕인데,이후 조선의 많은 선비들이 청량산을 구경하고 그 기록을 남겼다.
청량산은 퇴계의 고조부가 나라로부터 받은 봉산(封山)이었다.
퇴계는 어린 시절, 청량산에 올라 독서를 하고 공부를 했었다.
3 이1 청량산박물관은 주세붕의 ‘遊淸涼山錄’을 국역하여 《옛 선비들의
청량산 유람기1》 제목의 책을 출간하였다. 이 책 11쪽에 나오는 인원(仁遠)은 오언의의 字이다. 한편, 배응경(裵應褧, 1544~1602)은 1600년 5월 13일 오대원, 김륵 등과 청량산을 구경하고 "청량산유상록"을 썼다(옛 선비들의
청량산 유람기1, 138쪽). 오대원은 오운을 말한다(大源은 오운의 字). –정보 제공: 오홍재.
2 참조 청량산박물관, 《옛 선비들의 청량산 유람기1》 10쪽.
3 최원석, 《선현과 명산의 사회문화사: 퇴계의 청량산, 남명의 지리산》 1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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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에도 집에서 가까운 청량산을 바라보며 자주 ‘吾山(나의 산)’이라
칭할 정도로 청량산을 사랑했다. 청량산은 조선 성리학의 최고봉으로 숭앙받는 퇴계와 동일시되어 수많은 제자들과 선비들이 찾는 산
이 되었다.또 오언의는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1, 1517~1563)과도 서로
존중하며 친밀히 사귀었다.
2 황준량은 퇴계가 아끼던 제자로, 오언의 와의 나이 차는 무려 24살이었다. 오언의가 자식뻘인 황준량과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는 것은 오늘날에는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
다. 오언의가 황준량의 재능과 사람됨을 아끼고 존중해 주었기 때문에 이런 사귐이 가능했을 것이다. 즉, 황준량은 오언의의 망년지
우(忘年之友)3가 아니었을까 싶다.
오언의는 전의현감(全義縣監)을 지냈는데 전의현은 지금의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으로 보면 되겠다.
1 황준량: 단양군수, 성주목사 등을 역임한 문신. 퇴계의 수제자로, 머리가매우 명석하여 보는 글은 다 외울 정도였다. 그가 죽었을 때 퇴계는
애통히 여기며 그의 행장(行狀, 죽은 이의 평생 살아온 일을 적은 글)을썼다. 풍기의 금양정사(錦陽精舍)는 금계 황준량을 기리며 후학들이 공부했던 배움터이다.
2 “又與黃錦溪俊良交契甚密互相推重(또 금계 황준량과 사귐이 아주 친밀
하고, 서로 추앙하여 존중히 여겼다).” – 족보.
3 망년지우: 나이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교제(交際)하는 벗. 특히 나이
많은 이가 재덕(才德)이 높은, 나이 어린 이를 친구로 대우하며 부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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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영주 입향조(入鄕祖) 죽유 오운
– 우리는 왜 영주에 살게 되었을까?
이제 우리 조상이 경북 영주1로 이주해 살게 된 이야기가 시작된다.
오언의의 아들로 장남 오수정(吳守貞, 1510~1574), 차남 오수영
(吳守盈, 1521∼1606)2이 있었다. 오수정은 함안에 은거하며 출사
(出仕)하지 않았고, 오수영은 안동에 살며 이황의 문인3으로 활동하였다. 오수정의 묘소가 함안에, 오수영의 묘소는 안동 예안에 있
다. 오수영은 고창 오씨 춘당공파(春塘公派)의 시조이다.
1 삼국시대 영주의 지명은 날이군(捺已郡)이었다. 동국여지승람에 “군의 옛 이름은 구성이다(郡舊號龜城).”라는 기록이 있고, 구성공원에 있는 제민루(濟民樓) 기문에는 “영주가 군이 된 것은 옛날 신라 때 대도호였고, 인물이 많이 났기 때문이다(榮之爲郡 昔在新羅 大都護人物 富庶).”라
고 기록되어 있다. – 이원식, 집에 막히고 잡목에 덮인 서구대(西龜臺)‘무신탑터(無信塔址)’, 영주시민신문.
2 “춘당공 오수영. 어릴 때 외가에 지내면서 이황의 형제들과 함께
외할아버지인 이우에게 글을 배웠고, 뒤에 외종숙(外從叔, 어머니의
사촌형제)인 이황을 스승으로 섬겼다.”라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오나 이는 오류이다. 이우는 1517년 졸했고 오수영은 1521년 출생이다.
3 도산급문록(陶山及門錄, 퇴계 이황의 제자 310인의 명단을 수록한 책)에
오수영, 오운이 있다. - 유교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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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서원의 유원록(遊院錄)1에 의하면 진사 오수영이 56세이던
1576년에 도산서원에서 공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서원을 단순히
과거 시험을 준비하던 곳으로만 알았던 나로서는 ‘오수영이 56세까
지 과거 준비를 하였나?’하는 의문을 한때 가졌었다.
그런데, 이러한 의문은 조선의 서원의 기능과 역할을 이해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풀렸다. 조선의 서원은 주로 관리 양성 학교로
서 역할을 했던 중국의 서원과 달리, 후배나 제자를 양성하는 곳이
자 성리학을 연구하는 곳이었을 뿐만 아니라, 선비들이 정치, 사회
적 문제에 대한 토론을 통해 의견을 수렴하여 이를 중앙정부에 제
시하는 일종의 여론 형성의 장이기도 하였다.
한편, 도산서원2의 모체가 되는 도산서당(1561년 설립)은 아동
들이 천자문 등을 배우는 초급 교육기관인 ‘서당’이 아니라, 일정한
학문적 수준에 이른 선비들이 평소에는 집에서 공부하다가 1년에
한두 차례 방문하여 2, 3일 유숙하면서 퇴계 선생께 가르침을 청하
고 선생께서 가르침을 베푸는 장이었다.
오언의의 장남 오수정 이야기로 돌아와, 오수정에게는 장남 오진{
吳溍, 1533~1593, 號 雲巖(운암)}, 차남 오운{吳澐, 1540~1617, 號 竹牖(죽유)}이 있었다.
장남 오진은 조봉대부 제용감부정(朝奉大夫 濟用監副正)을 역임했
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봉대부는 종4품의 품계를 지칭하고, 제용감
1 유원록(遊院錄): 도산서원 건립 2년(1576년)부터 1772년까지 200년간
도산서원에서 공부한 사람들 명단, 일종의 학생 명부.
2 1574년 창건, 다음 해에 사액(賜額)을 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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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濟用監 副正)은 제용감(濟用監)1에서의 관직을 의미한다. 그러
나 오진의 과거급제 기록은 찾을 수 없었다.
2 그런데 오진의 양자 오여벌이 父에 대해 지은 행장3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4
“(아버지께서는) 임진왜란 때 장정들에게 군량을 제공함으로써 그의아우(오운)를 도왔다. 학봉 김선생(김성일)이 이 사실에 의거하여
조정에 급히 보고하였는데, 임금께서 그 의로움을 기려 ‘조봉대부
제용감부정(朝奉大夫濟用監副正)’을 특별히 내리셨다.”
함주지(咸州誌)5에 오진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한강 정구(寒岡 鄭逑,1543~1620)6가 함안의 군수로 부임하여 사직단(社稷壇)7 수리를 할
1 제용감: 조선시대 명나라에 진헌(進獻)하는 물품과 왕이 하사하는
물품 관련 일을 담당하는 호조(戶曹) 소속 관청.
2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의 정보를 찾아볼 수 있다.
물론 누락도 있을 수 있음을 염두에 둔다.
3 남명학고문헌시스템.
4 先考朝奉大夫濟用監副正府君家狀(敬菴先生文集卷之二): ‘壬辰之亂出家丁給軍
糧以助仲弟府尹公義族之力鶴峯金先生據實馳啓於朝廷上嘉其義特授朝
奉大夫濟用監副正.’ – 남명학고문헌시스템.
5 함주지: 함안군의 연혁· 인문지리· 행정 등을 수록하여 1587년 편찬한,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지방지이다. 당시 함안 군수였던 한강 정구가 편찬
했는데, 편찬의 실무를 실질적으로 담당한 사람은 당시 함안의 재지사족
(在地士族) 오운임을 밝힌 연구 논문이 있다. 김순희, 《吳澐과 咸州志》 서지
학연구 제29집, 2004.
6 정구: 조선시대 문신, 학자, 의병장. 영남학파의 양대 거두인, 남명 조식
과 퇴계 이황으로부터 모두 수학하고 학맥을 이어 나감.
7 사직단(社稷壇): 임금이 토신(土神)인 社와 곡신(穀神)인 稷에게 제사
지내던 제단. 풍년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지방 여러 곳에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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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이희성, 오진을 책임자로 임명했다.
1
오진은 고향(함안, 의령 지역)에서 살다가 임진왜란이 발발한 지1년 후 6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묘소는 경남 의령(의령군 칠곡면 운암리)에 있다. 오운이 지은 형님에 대한 묘표2(朝奉大夫濟用監副正吳公墓表)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3
“공의 품성은 인정이 있고 순박하였다. 공은 선조에게 가르침을 받
았다. 학업에는 뛰어나지 않으나 성실했는데 남이 열 번 할 때 자
신은 천 번 하는 식이었다. 기름을 태워서 밤에 글을 읽고 상투를 매달아 잠을 막으려 했다. 옛 사람이 가진 강인한 인내력을 그 또
한 가져서{웅담지의(熊膽之意): 여기서 곰은 단군신화의 곰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과거 공부에 능통하게 되었다.
屢選鄕試 竟北春官.
1 咸州誌 社稷壇條,
“郡人李喜成 吳溍董其役”, 김순희, 《吳澐과 咸州志》.
2 묘표(墓表): 죽은 이의 행적과 덕행을 기리는 글로, 보통 돌에 새겨 무덤 앞에 세웠다.
-네이버 사전.
3 한국고전종합DB, 公生於嘉靖癸巳 稟性敦樸 少同鄕隣羣子弟 受業
於先祖 魯於學而志益篤 人十己千 焚膏夜讀 懸髻以禦睡魔 得古人含
熊膽之意 卒能通擧子業 屢選鄕試 竟北春官 秊十九先妣見背 哀極孝至
朝夕之奠 必手滌器鼎 居廬墓下 山坂峻隔 每夕拜省 魂及已 期啜粥
糲飯咀鹽而終 弱冠而善居喪 古之人或未過也 處鄕淳愨而勤察任 居家湛
樂而和琴瑟 謹祭祀 信交際 稱以良善 人無異論 配尙州周氏 察訪世鸞其考
司諫安覯其外祖也 婉娩淵靜 有閨儀能治家 公受氣虛而嗜酒 心火挾痰
有時眩暈 及其內子 抱疾沉綿 救藥辛勤 病未效而己先傷 壬辰變起
蒼黃避亂 竄身于宜寧地 山店過秋冬 夙患乘之 日羸悴 乃於癸巳四月
十一日遂不起 公歿之後 嫂氏病加 纔踰月而繼卒 六月十二日也 俱享壽六
十一 雙殯一廬 得保完兵火 故山爲賊窟 不克返葬合窆于知南驛洞闍
崛山之南鐵店麓向之原 公以繼高祖之宗 不幸無子養弟 澐子汝橃爲后
奉先護壠 庶無遺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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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이 19세 때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다. 공은 슬퍼하면서 효를 다했
다. 아침저녁으로 제사를 드리면서 필히 손수 그릇과 솥을 씻고 묘
아래 농막에 기거했다. 山坂峻隔. 저녁마다 절을 하고 살폈는데 어
머니의 영혼에 (그 정성이) 미쳤다. 기일에는 죽을 먹고 현미밥에
소금을 씹었다. 弱冠而善居喪 古之人或未過也 處鄕淳愨而勤察任. 집
에서는 즐겁고 화평하게 지내니 부부 사이의 금슬이 좋았다. 공경
히 제사를 받들어 모시고 신의로 교제함으로써 사람들이 (그를) 어
질고 착한 사람이라고 말하니 아무도 이론이 없었다.
배우자는 상주 주씨로, 父는 찰방(察訪)1 주세란(世鸞)이다. 외할아
버지는 사간(司諫)2 안구(安覯, 1458~1522)이다. (그녀는) 온순하
고 부드러우며 매우 조용한 성격이었다. 규방의 법도가 있어 집안
을 잘 다스렸다.
공은 기를 허하게 받았는데도 술을 즐겼는데, 마음이 답답하고 열
이 높고 때때로 정신이 아찔할 정도로 어지러웠다. 及其內子. 병을
얻어 낫지 않고 오래 되어, 약을 구해 힘쓰니 병이 드러나지는 않
으나 이미 (몸이) 상했다. (공은) 임진의 변고가 일어나서 급히 피
난을 가서 의령 땅에 몸을 숨겼다. 산 주막에 기거하며 가을, 겨울
을 지냈는데, 평소의 병이 심해져 나날이 파리해졌다. (그러다가)
마침내 계사년(1593년) (음력) 4월 11일에 일어나지 못했다.
공이 죽은 후 형수도 병이 더해져서 달을 겨우 넘기다가 뒤이어 죽
었으니, 6월 12일이었다. 두 분 모두 향년 61세였다. 두 분을 함
께 농막에 안치하고(빈소를 차리고) 得保完兵火 故山爲賊窟 不克返葬
{임시로 산에 구멍을 파고 묻었는데 전쟁 통이라 반장(返葬, 객지에
서 죽은 이를 고향으로 옮겨 장사 지내는 것)을 할 수 없었음을 설
1 찰방: 조선시대 각 도의 역참(驛站)을 관리하던 종6품의 외관직.
2 사간: 조선시대 사간원의 종3품 벼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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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하고 있다}. 合窆于知南驛洞闍崛山之南鐵店麓向之原(묘 위치 설
명). 공은 조상의 제사(高祖之宗: 4대 봉사 제사를 지내므로 고조지종이라 함)를 계승하는데, 불행히도 자식이 없어 동생 운(澐)의 아
들, 여벌(汝橃)을 양자로 삼아 후계를 이어 조상의 묘와 덕업을 받들도록 했다.”
오운의 차남(오여벌)이 형님의 양자로 입양되는데, 학사 김응조(金應祖, 1587~1667)가 저술한 학사집(鶴沙集)에는 “오여벌이 9세
에 제용(감)부정을 지낸 백부 오진의 후사로 출계하였다(九歲出繼伯父濟用副正諱溍後).”라고 기록되어 있다.
1
오수정의 차남 오운은 함안 모곡리(咸安 茅谷里)에서 태어났다.
19세 때 남명 조식의 제자가 되었고, 25세에 퇴계의 문하로 들어갔다. 27세에(1566년) 대과에 급제했는데 동방급제자(同榜及第者)로
서애 류성룡(西厓 柳成龍,1542~1607)2과 개암 김우굉(開巖 金宇宏,1524~1590)이 있다. 류성룡과 김우굉은 각각 경북 안동과 성주
출신으로 같은 해 급제한 인연으로 오운과 도의지교(道義之交, 도덕과 의로움을 함께 추구하는 사람들의 사귐)를 맺었다.
3
이후 오운은 관직에 나아가 활동하면서 여러 번의 파면과 복직을 경험한다.
4 관직생활 중에 자주 파면을 당한 것은 불의와 타협
1 학사집 7권. 한국고전종합DB.
2 류성룡: 퇴계 이황의 제자. 선조 때 영의정. 임진왜란의 발발배경,
진행상황, 조정의 대처과정을 상세히 기록하여 임진왜란과 같은 국가적재난의
재발을 막는 방도를 모색한 책인 ‘징비록(懲毖錄, 국보 제132호)의 저자.
3 開巖集. 한국고전종합DB.
4 허권수, 《죽유 오운(吳澐), 강좌(江左)와 강우(江右) 문화의 융합자》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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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이러한 태도는 스승 남명 조식으로부터 받
은 영향에 기인한 듯하다.
오운은 1583년 충주목사(牧使, 정3품의 관직)와 춘추관 편수관(春秋館編修官)을 제수(除授)1받았다.
충주목사로 부임해서 팔봉서원{八峰書院, 당시 계탄서원(溪灘書院)}2을 완공하였다.
팔봉서원은1582년 개암 김우굉의 지원으로 건립하기 시작했다.
사호(祠號, 사당의 이름)를 짓고, 당실편액(堂室扁額, 건물의 이름을 적은 현판)을쓴 사람은 모두 오운이다.
3 지방 관리로서 서원을 세워 선현을 향사하고 후진을 교육하는 운동을 크게 일으킨 인물이 퇴계였는데,
오운도 퇴계를 본받아 서원 건립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4
충주목사 시절 오운에 대한 기록은 해월헌계미일기(海月軒癸未日記)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해월헌계미일기는 황여일(黃汝一, 1556~1662, 號 梅月軒)의 기록으로 장인에 대한 병상일지와 임종 후 운구과정이 적혀있다.
1583년 7월 16일 오운이 신임 충주목사로서 충주판관 이대화(李大禾)로 하여금 장례비용을 돕게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5
1 제수(除授): 추천에 의하지 않고 임금이 직접 관리를 임명함. – 네이버 사전.
2 팔봉서원: 충주시 이류면 팔봉리에 있던 서원.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 되었다가 1998년에 복원되었다.
3 사재명, 《죽유 오운의 강학과 교육》 255쪽.
4 김강식, 《임진왜란 시기 죽유 오운의 활동과 의미》 남명학연구총서 11, 311쪽.
5 晴。原州軍十餘名隨到曳船。忠州軍十七名交代。 到廣興倉。忠州判
官李大禾依其道主李增行下及其新牧使吳澐措置。白米二斗·田米二斗·泡
太二斗及雜物菜果十四種 來助喪資.. - 국립문화재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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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오운은 충주목사로 몇 년 재임하지 못하고 파면되는데,
이는 전임자들이 미루어 두었던 민감한 사건을 상급자(監司 감사,관찰사)의 뜻에 반해 원칙대로 처리했기 때문이었다.
1
충주목사 시절, 오운은 역사의 기록과 편찬을 담당하는 춘추관 편수관2도 겸직하면서 실록편찬에도 참여하였다.
오운처럼 다른 관직을 지내면서 사관(史官)을 겸하는 경우의 사관을 ‘겸임 사관(兼任
史官)’이라 한다. 겸임 사관은 각기 보고들은 것으로 사초(史草, 역사 서술의 기초가 되는 자료)를 만들고 지방 관아의 중요한 일을
철마다 보고받아 기록으로 남겼다.
3
이에 비해 ‘전임 사관(專任 史官)’은 예문관(藝文館, 왕의 말이나명령이 담긴 문서를 작성하는 관서)의 봉교 2인, 대교 2인, 검열 4
인(총 8인)으로 이루어지는데, 이들은 왕 곁에 있으면서 날마다 일어나는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다. 참고로, 오운의 子 오여은과 孫子
오익환은 각각 예문관 봉교(藝文館奉敎)4와 예문관 검열(藝文館檢
閱)5로서 선조실록편찬에 참여한 바 있다.
1 김강식, 《임진왜란 시기 죽유 오운의 활동과 의미》 남명학연구총서 11, 311쪽.
2 춘추관: 시정(時政, 당대의 정치 활동)의 기록을 관장하는 관서. 편수관은 정3품에서 종4품 중에서 겸직 임명함. 이러한 춘추관직을 겸한
관원을 넓은 의미의 사관(史官)이라 한다. - 다음 백과.
3 이도국,
신하’, 영남일보.
‘기록의 나라 조선(상)…조선의 사관, 만인지상 국왕이 두려워한
4 봉교(奉敎): 예문관의 정7품 관직.‘봉교’는 왕의 교지를 받든다는 뜻으로, 예문관 봉교는 춘추관기사관을 겸임한다. – 위키실록사전.
5 예문관 검열: 예문관에 소속된 정9품 관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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