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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관은 낮은 직급이나 고결한 직책으로 인식되었기에 임명 조건
이 매우 까다로웠다. 사관이 되려면 문과 급제자이어야 하고, 문벌있는 가문 출신으로 사조(四祖, 4대 조상)에 흠이 없어야 하며, 초
서(草書)1를 빨리 쓰고, 문필이 뛰어나야 했다.
2
오운이 맨 처음 춘추관과 인연을 맺은 것은 30대이던 1577년
호조좌랑(戶曹佐郎)3과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4으로 임명받으면서부터이다.
이후 1583년 충주목사와 춘추관편수관을, 1589년
전라도 광주목사와 춘추관편수관을, 1594년에 합천군수로 임명되어 재직하던 1595년 춘추관편수관을 제수 받았다.
오운이 춘추관에서 재직했던 경험은 훗날 그가 우리나라의 역사서인 ‘동사찬요(東史簒要)’를 저술하는 데 바탕이 되었다.
◈ 1583년 조방장이 된 오운은 죽유 오운과 동일인인가5
1583년 북도(北道) 조방장(助防將)6으로 임명된 오운(吳澐, 논의의
1 초서: 필획을 가장 흘려 쓴 서체로 획의 생략과 연결이 심하다. - 네이버 사전.
2 이도국,한 신하’, 영남일보.‘기록의 나라 조선(상)…조선의 사관, 만인지상 국왕이 두려워
3 호조좌랑: 호조에 속한 정6품 벼슬로 호조의 핵심실무자에 해당하는 자리이다.
호조는 조선시대 호구·공부(貢賦, 세금)·전량(錢糧)·식화(食貨)에 관한 일을 관장하던 관서로 오늘날의 재정경제부에 해당한다. - 다음 백과.
4 춘수관기사관: 춘추관의 정6품에서 정9품의 관리로, 정사(政事)의 기록을 맡음.
5 이에 대한 연구 및 자료 제공: 오홍재.
6 조방장: 주장(主將)을 도와서 적의 침입을 방어하는 장수. - 다음 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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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를 위해 이하 ‘조방장 오운’이라 한다)과 관련된 조선왕조실록
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선조 16년(1583년) 2월 7일자는 조방장 오운이 어떤 연유로 북도 임지로 가게 되었는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북도 병사(兵使) 이제신이, 오랑캐가 경원부(慶源府, 함경도)에서
도적행위를 한다고 보고하였다. 이에 조정은 파직 중인 무신(武臣)오운(吳澐)과 박선(朴宣)을 서용(敍用)1하여 조방장(助防將)으로 삼아
용사 80명과 함께 먼저 경원부에 파견하였다.”2
선조 16년(1583년) 6월 21일자에는 조방장 오운이 유배를 가게 된 이유와 유배지를 정하는 경위가 나온다.
“의금부(義禁府) 계목(啓目, 왕에게 보고하는 문서)에 ‘오운(吳澐)이 북도 조방장(北道助防將)으로 내려갈 때 하인(下人)들을 제대로 단속
하지 않아 지나는 길에 많은 폐해를 끼쳤고 임지에 도착한 후에는 팔이 아프다고 핑계하여 활 한번 잡아보지 않아 나라의 은혜를 저
버렸으니, 장 구십(杖九十)·도 이년반(徒二年半)을 과하여 경원부(慶源府)의 아산보(阿山堡, 세종 때 세운 북방의 방어지역)로 정배하였
다’ 하니, 상(上, 임금)이 그가 일찍이 그곳에서 장수로 있었는데졸오(卒伍)로 강등을 시켜 보내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하여 남방으
로 배소를 옮기도록 명하였다.”3
1 주로 벼슬을 잃은 사람에게 다시 관직(官職)을 주어 씀. - 네이버 사전.
2 조선왕조실록. 北道兵使李濟臣書狀, 慶源府藩胡尼湯介等作賊, 圍慶源
及阿山堡’ 上引見三公、備邊司堂上, 以罷職武臣吳澐·朴宣敍用爲 助防將,
領勇士八十名先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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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우 교수님은 아래 글상자의 내용과 같이 조방장 오운(吳澐)이
죽유 오운(吳澐)과 동일한 사람임을 전제로 죽유 오운이 백성을 수탈하여 탄핵 받은 적이 있고, 작폐를 일삼아 유배를 간 사실이 있
다는 취지의 주장을 하셨다.
1
… 다음해(선조11. 1578) 봄에 그는 호조좌랑 때의 일로 파직되어 처향(妻鄕)인 의령의 별서(別墅)에 우거하게 되었다{원문의 각주: 年譜에
는 그가 호조시(戶曹時)의 일로 견체(見遞)되었다고 간략하게 적혀 있으나, 선조실록에는 오운이 전수사(前水使)로서 박민선사(剝民善事) 즉 백
성의 수탈을 많이 하여 파직되었다고 하여 권12 선조11년 4월 계미조(癸未條) 年譜記事와는 다르다. 年譜에서는 불미스러운 일을 감추기 위하여 뺀 것 같다}.
그는 2년 뒤에 다시 성균관전적으로 재배(再拜)되어, 그 후 정선군수
(선조14). 풍저창수·충주목사 겸 춘추관편수관(이상 선조16) 등을 역임
하다가 선조 17년(45세)에 다시 파직되어 4년간 의령·함안으로 퇴거하였다.
그가 파직된 이유에 대하여, 문집에서는 어려운 송사를 결단하여 감사
의 미움을 받았다고 하기도 하고, 시호에 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고 있으나, 선조실록에서는 그가 작폐를 일삼았고 도방(到防) 후에는
병을 빙자하여 활을 한 번도 잡지 않아 국은(國恩)을 배부(背負)하였기
때문에 선조 16년 6월에 남방으로 유배된 것으로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3 조선왕조실록. 역자 미상. 義禁府啓目, 吳澐, 以北道助防將下去時,
不爲禁戢下人, 沿路汎濫作弊, 到防之後, 托稱臂病, 一不操弓, 背負國恩,
罪杖九十, 徒二年半, 配慶源府 阿出堡, 上以爲,
"曾將於其處, 而降爲
卒伍未穩, 命移配于南方."
1 한영우, 《오운의 동사찬요와 조정(趙挺)의 동사보유》, 모양보록 5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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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아래의 사정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조방장 오운과
죽유 오운은 이름만 같을 뿐 다른 사람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한
영우 교수님의 주장은 사실 오인에 터 잡은 것이라 할 것이다.
먼저 조방장 오운의 경력에 대해 살펴본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조방장 오운의 나이, 출신 가문, 출신지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없으나, 조선왕조실록 선조 16년(1583년) 기록에 의하면 조방장
오운이 조방장으로 임명되기 전 장수급 무신으로 일하다 파직된 바
있고, 또 무신으로서 경원부 아산보(阿山堡)에서 근무한 적이 있으
며, 남쪽에서 유배생활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마침 조선왕조실록에서 장수급 무관으로 일하다가 파직된 오운이라는 사람에 대한 기록을 발견했다(선조 11년 1578년 4
월 2일). 여기에는 전 수사(水使)인 오운에 대해 사헌부가 탄핵을
하고, 왕이 응한 사실이 나온다.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전 수사(水使) 오운(吳澐)은 백성을 침탈하여 윗사람을 잘 섬겼기 때문에 갑자기 정옥(頂玉, 당상관)에 이르렀고,
훈련습독 이난수는…중략… 모두 노죄하고 용렬한 자들이니 아울러 도태(파면)해 버리소서….”1
府啓, 前水使吳澐 剝民善事 驟至頂玉 訓鍊習讀李鸞壽…중략… 皆衰耗
庸劣, 請竝汰去…
.
위와 같이 탄핵당한 전 수사 오운과 조방장 오운이 동일인인지 여부에 대해 조선왕조실록은 명시하지 않는다. 그런데 탄핵당한 전
1 조선왕조실록, 역자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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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 오운과 조방장 오운은 장수급 무관으로 일하다 파직된 점에서
일치하고, 비슷한 시기에 장수급 무관으로 일한 같은 이름의 사람
이 2명일 가능성은 희박해 보이는 점 등에 비추어, 1578년 4월 탄
핵된 전 수사(前水使) 오운과 1583년 2월 조방장으로 임명된 오운
은 동일한 사람이라고 판단된다. 이하 이 두 사람이 동일인임이 사
실이라는 것을 전제로 서술하고자 한다.
조방장 오운의 경력을 정리하면 이렇다. 조방장 오운은 1578년
4월경 사헌부로부터 탄핵을 당하기 전 수사였다(前水使). 수사(水使)
는 조선시대 각 도의 해군을 통할하던 사령관, 즉 정3품 당상관의 지방관직을 말한다. 이후 1583년 2월 조방장으로 임명되었다가
1583년 6월경 남방으로 유배를 간다.
한편, 기록에 의해 명확히 확인되는 죽유 오운의 공직 경력은
이러하다. 죽유 오운은 1566년 대과 합격한 후 하급관리로 지내던
중 조모상과 부친상을 당해 관직에서 한동안 물러나 있다가 1576
년 37세에 성균관 박사로 복직하였다. 1577년 여름 호조좌랑과 춘추관기사관으로 임명을 받았고(夏移拜戶曹佐郎兼春秋館記事官),1 그
해 겨울 외직인 함경도 명천(明川) 현감으로 임명되어 나갔다(冬出補明川縣監).
호조좌랑은 정6품 관직으로 당하관(堂下官)2이고, 현감 역시 종
6품 당하관이다. 1581년 강원도 정선 군수로 있다가 임기가 만료되자 1583년 풍저창 수(豊儲窓守, 풍저창의 책임자, 정4품)로 임명
1 竹牖先生文集秊譜. 한국고전종합DB.
2 당하관(堂下官): 당하관은 조선의 정3품 하계(下階) 이하의 품계를 보유한 관원을 가리킨다. – 위키 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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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었다(是歲入爲豐儲倉守).1 풍저창(豊儲窓)은 호조에 소속된 관청으로 궁중에서 쓰는 곡식, 종이 등을 관장한다. 또 1583년 가을에는
충주목사와 춘추관 편수관을 제수 받았다(秋除忠州牧使兼春秋館編修官).2 죽유 오운은 선조 30년(1597년) 8월 당상관으로 승진한다.
위에서 본 조방장 오운과 죽유 오운의 경력을 보면 도저히 두사람이 동일인이라고 할 수 없다. 이는 두 사람이 동일인이라고 가
정해 보면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이 바로 확인된다.
즉, 조방장 오운이 죽유 오운이라고 가정할 경우, 1577년 정·종6품 당하관인 문관이던 사람이 그로부터 길어야 불과 1년 4개월
후인 1578년 4월 탄핵당할 때까지 사이에 정3품의 무관인 수사(水
使)로 일하였다는 것인데, 이는 상식에 반한다.
이렇게 고위직 무관으로 일하다 파직된 사람이 1583년 전형적인 문신이 담당하는 직책인 풍저창 수(豊儲窓守, 풍저창의 책임자,
정4품)로 임명된다는 것은 이해되기 어렵다.
1581년 정선군수로 임명된 죽유 오운은 임기가 만료되자(瓜滿)1583년 풍저창 수로 부임한다(癸未瓜滿入爲豐儲倉守).3 그렇다면,
조방장 오운이 조방장으로 임명될 당시인 1583년 2월경에 죽유 오운은 파직 중인 상태가 아니었다. 따라서 죽유 오운에 대해 ‘파직
1 竹牖先生秊譜. 한국고전종합DB.
2 이 내용은 오여벌이 父에 대해 지은 가장(家狀)에도 나온다. 生考通政
大夫守慶州府尹府君家狀,‘癸未瓜滿入爲豐儲倉守秋拜忠州牧使兼春秋舘編修官’ 남명학고문헌시스템.
3 生考通政大夫守慶州府尹府君家狀. 남명학고문헌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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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인 무신’이라고 표현할 수는 없다(조선왕조실록 선조 11년 1578년 2월 7일,…以罷職武臣吳澐…).
죽유 오운은 1583년 가을에는 충주목사이자 춘추관 편수관으로
임명된다. 죽유 오운이 조방장 오운과 동일인일 경우 1583년 풍저
창 수로 일하다가1 1583년 2월 조방장으로 임명되어 북도에 있다
가 1583년 6월 남방으로 유배를 가고, 그해 가을 충주목사이자 사
관인 춘추관 편수관으로 임명되었다는 것이 된다. 이는 글자 그대
로 어불성설이다.
2
죽유 오운이 고위직 무관으로서 일했다면 죽유 오운 본인이나
그 주변인이 남긴 기록에 죽유 오운이 수사를 역임했거나 함경도에
서 무관이었다는 행적이 조금이라도 나와야 하는데, 이러한 기록은없다.
1 生考通政大夫守慶州府尹府君家狀. 죽유 오운이 풍저창 수로 임명된 날짜는 명확하지 않다. 단지 1583년 풍저창 수에 임명되었고, 그해 가을 충주목사 겸춘추관 편수관으로 부임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癸未瓜滿
入爲豐儲倉守秋拜忠州牧使兼春秋 舘編修官.”
2 참고로, 황여일(黃汝一, 1556~1662, 號 海月軒, 梅月軒)이 쓴 해월헌
계미일기(海月軒癸未日記)에는 1583년 6월 15일 황여일의 장인어른이 돌아
가시자 풍저창 수인 오운이 조문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十五日 晴 。
豊儲守吳澐弔.” 따라서 1583년 6월에도 오운은 풍저창 수로 근무하고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1583년 7월 16일자 일기에는 오운이 신임 충주목사로서 충주판관 이대화(李大禾)로 하여금 장례비용을 돕게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晴。原州軍十餘名隨到曳船。忠州軍十七名交代。◯ 到廣興倉。
忠州判官李大禾依其道主李增行下及其新牧使吳澐措置。白米二斗·田米二斗
·泡太二斗及雜物菜果十四種來助喪資.” - 국립문화재연구원. 자료 및 정보
제공: 오홍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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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수정실록에는 선조 16년(1583년) 2월 경원부 오랑캐가 침입한 사건으로 파견되었던 조방장 오운(吳澐)을 오운(吳沄)으로 수
정하여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동명(同名)의 죽유 오운을 염두에 두
고 수정했을 가능성도 있다.
덧붙여, 한영우 교수님은 위에서 본 것처럼 죽유 오운의 파직 이유에 관한 두 견해, 즉 ①문집에 나온 ‘어려운 송사를 결단하여 감사의 미움을 받았다, 시호에 영합하지 않았다’는 것과 ②실록의 조방장 오운의 탄핵 및 유배 이유를 함께 열거하여 조방장 오운과 죽유 오운을 동일인으로 보셨다.
그런데 죽유 오운이 충주목사로 임명된 시점은 1583년 가을이고, 충주목사로 일하다 파직된 시점은 1584년(선조 17년)으로서 조방장 오운이 남방으로 유배된 1583년 6월 이후이다. 즉, 죽유 오운은 조방장 오운이 유배된 이후에 충주목사로 임명된 것이다.
따라서 죽유 오운이 충주목사로서 파직된 사유와 조방방 오운이 파직된 사유는 같을 수 없다. 한영우 교수님의 이 부분 서술은 합리적이지 않다.
참고로, 위 글을 작성한 이후 조방장 오운과 죽유 오운이 다른
사람임을 입증하는 결정적인 자료를 찾았다.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을 통해 조방장 오운(吳沄)이 1564년(명종19) 무과에 합
격한 오운(吳沄)임을 확인하였다.
1 조방장 오운(吳沄)은 1532년 출
생하였고, 字는 沄之(운지), 본관은 해주, 아버지는 오응규(吳應奎)였다.
결국, 1583년 조방장이 된 오운은 죽유 오운과 다른 사람이다.
1 한국학중앙연구원 [오운(吳沄) 인물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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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난다.
1 당시 의령에 있던 오운은 망우
당 곽재우(忘憂堂 郭再祐, 1552~1617)를 도와 의병활동을 하였다
(오운은 1594년에 합천군수로 부임하였다). 죽유문집(竹牖文集)에곽재우와 오운의 의병활동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2
“4월 여름, 왜적이 쳐들어왔다. 여러 고을이 와해(瓦解, 깨져서 산산이 흩어짐)되었다. 당시 곽재우가 마을 사람들을 규합하여 낙강
(洛江, 낙동강)을 건너는 적을 소탕하였다. 얼마 안 있어 경상 병사(兵使, 종2품 무관직)3 조대곤(曺大坤)이 (곽재우의 행동에 대해) 의
심하였다.
4 (이에 곽재우는) 두류산(頭流山, 지리산)으로 피해 들어
가면서 오운을 비롯하여 여러 지인들을 두루 찾아왔다(歷訪).
오운은 (곽재우가) 의병을 일으킨 것을 칭찬하고 장려하면서 (본인도) 뜻을 함께 하기로 약속하였다. 이후 군수 물자와 전투에 쓸 말
1 일본은 1592년 4월 조선을 침략했다(임진왜란). 1593년 7월(2차 진주성 싸움 직후)부터 왜군은 남해안을 점거하며 조선군과 대치하다가,
1597년 7월 다시 대규모 공격을 해왔다(정유재란). 1598년 8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왜군이 철수하기 시작하였고, 그해 12월 전쟁이종결되었다.
2 竹牖先生秊譜. 한국고전종합DB.
夏四月。倭賊入寇。列邑瓦解。乃與忘憂堂郭公。倡義討賊。時郭公糾合里
兵。侯勦洛江之賊。未幾爲曺大坤所沮。將避入頭流山。歷訪先生。先生奬
以擧義。約與同事。因給軍需戰馬。與家奴驍健者七八人。且激勸同里士友
。各出精銳。推郭公爲將。委以討賊。而募兵給餉。先生專主之。
3 병사(兵使): 각 지방의 군대를 통솔하고 경비를 담당. - 다음 사전.
4 곽재우가 의병을 일으키자 조대곤은 부하의 잘못된 보고에 의해 곽재우 무리를 토적(土賊, 도적 떼)으로 오인하고 체포하라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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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제공하고, 용맹한 노비 7, 8명을 주었다. 또 마을의 선비인 벗들에게 격려하고 권하여 (선비들은) 각자 날래고 용맹스러운 사람
을 내주었다. (오운은) 곽재우를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적의 토벌을맡겼다. 군사 모집과 군량 조달은 오운이 전담했다.”
학봉집(鶴峯集, 학봉 김성일의 시와 산문 등을 모아 1649년에 간행
된 책)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
“곽재우가 영을 어긴 죄를 추문(推問)하여 다스렸다. 처음에 정진
(鼎津, 의령)에서 우리 군사들의 위엄을 드러내 보일 때 곽재우에게
의령과 함안의 경내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있다가 기병(奇兵)을 내어
패주하는 왜적을 치게 하였는데, 곽재우가 지휘에 따르지 않아 왜
적들(1차 진주성 전투에서 패전하고 도망가는 왜적들)이 편하게 돌아가게 하였다. 이에 곽재우를 죄인으로 삼아 관아의 뜰로 잡아들여(拿入庭) 군율로 다스리려고 하였는데, 박성(朴惺, 1549~1606,號 大菴)과 오운(吳澐)이 힘껏 말리므로 그만두었다.
(위 일이 종결된 후) 곽재우의 벗이 곽재우에게 말하기를,
‘자네는
어찌해서 전과 같은 뻣뻣한 태도를 (이번에는) 고집하지 않았는가?’2라고 하자, 곽재우가 말하기를 ‘이 사람들(박성과 오운)이 아니라면
어찌 나를 제지할 수 있겠으며 어찌 나 또한 그러한 제지를 기꺼이
1 한국고전종합DB.
推治郭再祐違令之罪。始耀兵鼎津也。令再祐留陣宜寧,咸安之境。出奇擊
敗歸者。再祐不聽指揮。使賊安歸。故拿入庭。將治以軍律。朴惺,吳澐力
請乃止。其友謂再祐曰。爾何不若昔日之倔强也。再祐曰。非此人。何能制
我之命。我亦安肯受制也。
2 죄를 묻는 상황에서 곽재우가 평소의 기질대로 강경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수긍하는 모습을 보인 이유에 대해 친구가 물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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