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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 오씨

영주에 정착한 고창오씨의 역사 저자 오승연 80-100p

작성자吳恭姙(현정)|작성시간26.06.11|조회수86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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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긍할 수 있었겠는가’라고 하였다.”1
오운과 곽재우는 혼맥으로 이루어진 특별한 관계이다. 곽재우는 3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 김해 허씨(허찬의 조카) 밑에서 자랐
는데, 계모는 전처 소생들을 잘 키웠고 곽재우도 계모에 대한 효심이 지극했다. 오운의 장인(허찬의 아들 허사렴)은 곽재우의 계모와
사촌지간이다. 즉 오운의 처는 곽재우 계모의 종질녀(5촌)이다.
오운은 임진왜란 때 경상우도 순찰사 학봉 김성일 휘하에서 소모관(召募官, 의병을 모집하기 위한 임시 관직)으로도 활약했다. 난
중잡록(亂中雜錄)2에는 이에 대한 기록이 있다.
“초유사는 또 전 목사 오운(吳澐)을 소모관(召募官)으로 하여 그 수(모집한 군사들의 수효)를 파악하는 일까지 겸임시키고 그 성세(聲
勢, 명성과 기세)로 곽재우를 돕게 하였다. 시골의 넉넉한 집에서는 쌀을 내고 소를 잡아 매일 돌려가며 군사들을 먹이니 군의 성세가
크게 떨쳤다. 강의 아래위에 있는 10여 개 소의 얕은 여울목마다
모두 척후를 잠복시켜, 왕래하는 사람들을 바라보아 서로 응원하니 왜적이 감히 물을 건너오지 못하였고, 여러 고을 백성들은 평화 시
와 다름없이 농사를 지었다.” (난중잡록 1592년 4월 22일 기록)3
1 鶴峯先生文集附錄卷之一. 한국고전종합DB, 정선용 국역을 참조하였다.
2 난중잡록: 남원 의병장 조경남이 임진·정유 양란(兩亂) 당시의 상황과
국내외 정세 등을 기록한 야사집.
3 亂中雜錄一. 한국고전종합DB, 역자 차주환, 신호열.
招諭使又令前牧使吳澐。爲召募官。兼摠其數。助以聲勢。鄕之饒戶。出米
擊牛。輪日餉軍。軍聲大振。沿江上下。十餘淺灘。皆設伏諜望。往來相援
。賊不敢渡數邑人民。作農如平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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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령에서는 전 목사인 소모관 오운이 한 개의 현(마을)을 개유(설
득)하여 군사 2천여 명을 얻었다.” (宜寧前牧使召募官吳澐開諭一縣得
軍二千餘人, 난중잡록 1592년 7월 6일 기록)1
당시 학봉 김성일이 왜군과의 1차 진주성(晋州城, 晋陽城) 대첩
을 지휘, 지원했던 곳이 경남 산청에 있는 환아정(換鵝亭)이었다.
왜군과의 전투를 앞두고 순찰사, 소모관들이 환아정에 모여 진주성
을 지키기 위해 결의를 다지며 계책을 논의했다.
2 학봉 김성일의
사망 후 오운이 올린 제문(祭文)3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4
崎嶇天嶺之夜 험한 천령(天嶺)5에서 지낸 밤과
風雪換鵝之夕 눈보라가 몰아치던 환아정(換鵝亭)의 밤에
撫劍相對 칼을 쓰다듬으면서 서로 마주 보고
秉燭論兵 촛불을 밝힌 채 병략(군사전략)을 논의하며
規畫遙定 먼 곳에 앉아서6 계책을 찾아내
晉城以守 진주성을 지켜냈다
위에서 오운이 언급한 진주성 싸움은 1차 진주대첩을 말한다.
1 한국고전종합DB. 참고로, 망우집(곽재우의 시문집)에도 기록이 있다.
吳牧使澐收 兵于 白嶺前後所得二千餘人.
2 왜군은 1592년 10월부터 진주성을 공격했다. 참조: 최창민, 원경복,
‘산청 환아정, 임진왜란 진주성 수호 결의 다진 곳’, 경남일보. 연구자:고창 오씨 죽유공 15대손 吳洪在.
3 제문: 죽은 사람을 조상(弔喪)하는 글. 제물을 올리고 축문처럼 읽음.

 


4 한국고전종합DB, 정선용의 국역을 참고하여 수정하였다.
5 천령(天嶺): 경남 함양의 옛 지명. 함양, 산청은 모두 지리산에 인접한 지역이다.
6 환아정은 진주에서 차로 30분 거리에 있는데, 당시로서는 상당히 먼 거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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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성은 왜군이 전라도로 진출하기 위해 장악해야만 하는 중요한곳이었다. 1592년 10월, 2만의 왜군은 진주성을 공격했다. 이때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 1554~1592)의 지휘 아래 관군과 양민 총3800여 명이 힘을 합쳐 진주성을 지켜냈다. 또 곽재우, 최경회, 김
준민, 조응도 등의 의병장들도 진주성 외곽에서 소규모 전투를 일으켜 왜군의 전세를 교란시켰다.
결국 왜군은 1차 진주성대첩에서 패하고 만다. 1593년 7월 왜군은 10만-12만 병력으로 진주성을 다시 공격하였다(2차 진주성전투). 이 전투로 진주성 안의 사람들은 몰살당하였다. 왜군의 진주성 전투 승리 후 벌어진 축하연에서 논개(論介)1가 왜장을 끌어안
고 진주 남강으로 투신하였다.
임진왜란 때 목숨을 걸고 싸웠던 사람들의 충절(忠節)을 기리기위한 기념 시설이 전국 곳곳에 있다. 의령에도 1978년 충익사(忠翼祠)2가 건립되었는데, 그곳 사당에 오운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오운은 18세 때 허사렴(許士廉)의 딸과 결혼하였는데, 허사렴은 의령에 세거하던 사족(士族)으로 퇴계 이황의 처남이었다. 오운이
퇴계의 처질서(姪壻, 처의 조카사위)가 되는 셈이다.
3 아들이 없는 허사렴은 의령과 영주 초곡에 많은 재산이 있었는데, 재산의 상당한 부분을 맏사위 오운에게 물려주었다.
1 논개가 기생이 아니라 전라도 의병장 최경회의 부실(副室, 첩, 소실)이라는 의견이 있다.
2 충익사: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지킨 곽재우와 그 휘하
17명의 위패가 봉안된 곳으로 경남 의령에 있다. 곽재우의 시호가 ‘忠翼’이다.
3 허권수, 《죽유 오운(吳澐), 강좌(江左)와 강우(江右) 문화의 융합자》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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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운은 1592년, 전란을 피해 가족들을 경북 영주(초곡)로 이주시키는데, 영주는 오운에게 이미 친숙한 곳이었다. 처의 조부(허찬,許瓚, 1481~1535)1가 영주에 살았고, 오운이 어린 시절, 처의 고모부인 퇴계에게 수학하며 살았던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또 가까
이 안동 예안에는 숙부(오수영)가 살고 있었다.
앞에서 오운에게 영주가 익숙한 것은 일가친지(一家親知)가 살고있거나 살았기 때문이라 했다. 이와 관련하여 ‘경남 의령 출신인
허찬이 왜 멀리 영주로 이주해 살았을까?’ 또 ‘경남 함안 출신인 오수영이 왜 멀리 안동 예안에 살고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 수 있
다. 이 의문을 풀려면, 허찬의 父 허원보와 창계 문경동, 송재 이
우, 오석복, 이분들의 관계에 대해 알아야 한다.
2
허찬은 허원보(許元輔,1455~)의 子이다. 허원보는 경남 고성(固
城)에서 의령 가례마을로 이사를 온 후 의령 현감이었던 오석복(吳碩福, 1455~1533, 오운의 증조부)과 친분을 맺게 된다.
허원보는 청도 출신 김일손(金馹孫, 1464~1498), 영주 출신 문경동(文敬仝, 1457~1521, 號 滄溪)3과도 교류하며 학문을 하였다.
4 허
1 허찬(許瓚): 허사렴의 父. 1501년 진사가 되었다. 허찬이 죽은 다음해(1536년 8월) 퇴계가 의령의 처가에 가서 장인(허찬)의 영정에 곡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 김태환(영주 향토사연구소장).
허찬은 영주에서 살다가 말년에 고향인 의령으로 주거지를 옮긴 것으로 판단된다. 아들 허사렴은 아버지를 모셔야 했기에 같이 이주했을 것이다.
2 이하 혼인관계에 대한 정보 및 자료 제공: 오홍재.
3 문경동: 조선의 문신. 본관 감천(현 예천군). 춘추관편수관으로 ‘연산군일기’ 편찬에 참여함. 그는 문장이 뛰어나 그가 쓴 글들은 유생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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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보와 문경동의 친분으로, 허원보의 아들 허찬은 문경동의 사위가된다. 이후 허찬은 의령을 떠나 처가가 있는 영주에서 살게 되었다.
아들이 없던 문경동은 많은 재산을 사위 허찬에게 물려주었다.
문경동은 송재 이우(松齋 李堣, 1469~1517, 퇴계의 숙부)와 친분이 있었다. 이 인연으로 퇴계 이황이 허찬의 사위가 된다. 한편,
1507년 진주목사로 부임한 이우는 의령 현감이었던 오석복과 친분을 맺었다. 이 인연으로 오석복의 子 오언의가 이우의 사위가 된
다. 또 오언의의 손자 오운이 허찬의 손녀와 혼인하게 된다.
허찬이 의령을 떠나 처가가 있는 영주에 살았던 이유나(조선 시대에 처가살이는 보편적이었음), 오수영이 고향 함안을 떠나 퇴계
의 제자로서 안동 예안에 살았던 이유가 명확하진 않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허찬이 영주에 살게 되고, 퇴계를 사위로 맞고, 오운을 손녀사위로 맞게 된 모든 인연들의 시발점
에 ‘문경동’이라는 사람이 있다는 점이다.
‘창계선생외예록(滄溪先生外裔錄, 창계 선생의 딸의 후손에 대한 기록)’에 허찬과 그의 자손
들, 퇴계 이황과 그의 자손들, 죽유 오운과 그의 자손들, 오운의 동
서인 취수 박록(醉睡 朴漉, 1542~1632, 字 子澄)1과 그의 자손들이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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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하는 문장의 모범이 되었다고 함.
4 참조 ‘의령에서 퇴계를 만나다’, 경남열린신문. 집필자 미상.
1 박록: 소고 박승임 선생의 子, 죽유 할아버지의 동서.
2 자료 제공: 오홍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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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운은 1593년 상주목사가 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고 영주 초
곡에 잠시 살았다.
1 오운의 상주목사 시절에 대한 기록은 조익(趙翊,1156~1663, 號 可畦)이 쓴 진사일기(辰巳日記)2에서 찾아볼 수 있다.
“1593년 7월 21일 임시 목사 오운이 또한 콩(太)과 보리(牟)를 소량 정도 나누어 주었다(癸巳七月 二十一日 假牧使3 吳澐 亦以太牟小
許帖給).”4“1593년 8월 7일, 목사(牧伯)5를 뵈러 들어가니, (목사가) ‘명절이니 다시 기탁하겠노라’는 뜻을 말하면서 곡물을 약간 증정하였다,
(癸巳八月 七日。入見牧伯。辭以俗節還寓之意。略有贈物).”
참고로, 교남지(嶠南誌) 상주군 관안(尙州郡 官案: 상주 지역에서 벼슬을 한 사람의 이름과 직책을 적은 책)에는 “목사 오운, 정
기룡은 가판관에서 1595년에 목사로 승진하였다(牧使吳澐鄭起龍假判官乙未陞牧).”라고 기재되어 있다.
6 오운이 상주목사를 사직한 후
정기룡(鄭起龍, 1562~1622)이 1595년에 상주목사가 되었던 듯하다.
오운은 1594년에 합천군수로 다시 임명되어 부임하였다. 합천군
1 죽유집 한국고전종합DB, 역자 김진옥.
2 可畦先生文集에 수록. 한국고전종합DB.
3 가목사(假牧使): 임시 목사. 오운은 임시 목사로 있다가 정식 목사로 발령받았다.
4 한국고전종합DB. 帖給(체급)이란 조선시대 관청에서 그 소지자에게 곡물의 지급을 약속하고 발행하는 문서인 듯하다.
5 목백(牧伯): 조선시대 행정구역 중 하나인 목(牧)을 맡아 다스리던 정3품(正三品) 외직 문관(文官).
6 嶠南誌卷之八. 자료 제공: 오홍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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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전쟁 통에 온통 다 잔폐(쇠잔하여 다 없어짐)하고 남은 것이 없었다. 오운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황폐해진 상황을 잘 다독여 안정
을 찾도록 노력하니, 모두들 그 형편(사정)이 나아지게 되어 마침내 온전한 마을이 되었다. 당시 합천 고을의 아전(구슬아치)들은 흩어
져 달아나고 대부분 없어졌는데, 오운이 가동(家僮, 한 집안의 노복)들을 관아의 하인들로 충당하였다. 1595년, 순찰사 서성(徐渻,1558-1631)은 오운의 공을 칭찬하는 계(啓)를 누차 올렸다.
1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난다. 왜구가 다시 움직여 적의 우두머리인 가등청정(加藤清正, 가토 기요마사, 1562~1611)이 호남을 공
격하니, 장수들이나 고을의 우두머리는 대부분 도망가거나 도피했는데, 오운은 군의 경계를 떠나지 않았다. 군졸을 타일러 모아 정
장(定將)이 (적을) 잡아 죽이니(勦捕), 참획한(찔러 죽이거나 포로로잡은) 수가 매우 많았다. 도원수 권율{權慄, 1537~1599, 諡號 忠莊
(충장)}2 장군이 칭찬하는 계를 올렸다(褒奬). 오운은 1597년 8월에 (임금의) 특별 명으로 승자(陞資, 당상관의 벼슬로 승진)3되었다.
4
1 한국고전종합DB.
是歲巡察使徐公渻累次褒啓。再授陞叙之命。本郡承大亂之後。蕩殘無餘。
先生勞來撫摩。咸得其宜。遂成完邑。時邑吏散亡殆盡。先生以家僮充官隷
。至今吏胥。多其後孫云。
2 권율: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목사로서 한양을 회복하기 위해 북진했지만, 용인에서 일본군의 매복에 걸려 패전했다. 1593년 관군 2,300명과 승병 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행주산성에 주둔해 관민과 함께적을 격퇴하고 승리하였다(행주대첩). – 다음 백과.
3 승자(陞資): 조선 시대 당하관(堂下官)이 당상관(堂上官, 堂上의 벼슬)의등급에 오름. 당상(堂上): 정3품 이상의 벼슬 체계.
4 한국고전종합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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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군수 시절의 오운의 행적은 이순신{李舜臣, 1545~1598, 字汝諧(여해), 諡號 忠武公}의 난중일기(亂中日記)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1597년 6월 24일, 합천군수 오운이 조언형(曺彦亨)을 보내서 안부를 물어 왔다(丁酉六月二十四日 癸未陜川郡守送曺彦亨候).”
“1597년 7월 3일 맑음, 합천군수 오운이 보러 와서 산성(백화산성)의 일을 많이 이야기했다(丁酉七月 初三日壬辰陜川郡守吳澐來見多
言山城之事).”
“7월 12일 아침에 합천군수가 햅쌀과 수박을 보내왔다.”
오운은 1598년 봄에 병으로 합천군수를 사직하고 귀향했으나 그해 겨울 명나라 제독(提督)1인 진린(陳璘, 1543~1607)의 접반사(接伴
使)2로 임명되어 호남으로 갔다.(冬拜陳提督接伴使赴湖南陳公名璘)

3 1599년 정월 오운은 진 제독과 함께 한양으로 귀경한 후, 4월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4, 5월엔 장예원 판결사(掌隷院 判決
八月特陞通政。時倭寇再動。賊酋淸正直搗湖南。閫帥邑宰擧皆奔避。先生
不離郡境。諭集軍卒。定將勦捕。前後斬馘甚多。都元帥權公慄馳啓褒奬。
特命陞資。
1 제독: 해군의 장성.
2 접반사: 사신(使臣)이 유숙(留宿)하는 곳에 임시로 파견(派遣)되어 사신을 맞아 접대하던 관원(官員). 정삼품 이상에서 임명함. – 네이버 사전.
3 한국고전종합DB (itkc.or.kr).
4 첨지중추부사: 조선 시대 중추원에 속하는 정3품 무관이다.‘첨지’로줄여 부르기도 하였다. – 위키 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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事)로 부임하였다.
1 1599년 6월에 별시 고관(考官, 시험감독관)2으로 임명되어 과거를 주관한 오운은 7월에 선영 개장(先塋 改葬)
을 위하여 임금께 글을 재차 올려(上疏: 請歸改葬疏 己亥○判決事時)3 사직하고 함안으로 돌아왔다.(七月以先塋改葬事呈疏南還)
오운의 증조부(의령공 오석복) 이하 삼세(三世)의 묘소가 함안 땅에 있었는데, 정유년(1597년) 왜군이 일으킨 변고(賊變)에 모두 훼
손되었다. 오운은 (훼손된 묘소를) 수습하여 엄토(掩土, 겨우 흙이나덮음)만 하고, 나랏일이 급해 바삐 일하느라 겨를이 없어 하관을
완전하게 하지 못하였다. 1599년 오운은 두 차례 사직 상소를 올린 끝에 함안으로 돌아와 조상의 묘소를 개장(改葬)하였다. 형님 오
진의 묘소에도 제를 드렸다.
4
이후 오운은 영주 초곡으로 돌아와 지냈다. 1600년 5월, 오운은
1 장예원: 공사노비 문서의 관리 및 노비소송을 관장한 관서. 판결사:장례원의 장관이며 노비 송사에 대한 판결책임관이다. 판결사는 노비
쟁송을 판결하는 직책이라 법과 업무의 전문성을 위해 久任(일을 오래맡김)해야 했다. 판결사직은 문과 출신자가 나아가는 관직이었으나
원망을 들을 수 있는 직임으로 생각하여 꺼리는 경향이 있었다. - 위키실록사전.
2 고관(考官): 조선 시대에 강경과(講經科, 사서삼경의 암송을 시험하는과거)와 무과(武科)를 관장(管掌)한 시험관(試驗官). – 네이버 사전.
3 竹牖先生文集卷之三. 한국고전종합DB.
4 竹牖先生文集秊譜. 한국고전종합DB.
曾祖以下三世墳塋在咸安地丁酉賊變皆被掘發先生收拾掩土以王事驅馳未暇
完窆 至是再呈疏南還改葬. 祭伯氏副正公墓.
죽유선생 연보는 7대손 吳命顯(1731∼1768)이 栗溪亂藁를 바탕으로
흩어져 있던 선생의 원고를 모으고 연보와 부록을 덧붙여 문집 초본을
만들었다. – 오홍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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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암 김륵, 안촌 배응경(裵應褧, 1544~1602, 號 安村)1과 함께 퇴
계 선생 연보를 교정하고, 5월 보름(15일)에 여러 분들과 도산서원
사당에서 (퇴계 선생께) 문집이 완성되었음을 고하는 제사를 드렸다. 이어서 여러 벗들과 함께 천연대(天淵臺)2에 나아가서 종일 (도
학에 대해) 강론을 하였다.
3
오운은 1600년 6월에는 영주 이산서원에서 소고 박승임(嘯皐 朴承任, 1517-1586, 대사간을 역임한 문신, 학자) 선생의 문집을 교
정하기도 하였다(六月校正嘯皐朴公文集于伊山書院).4 오운은 영주에 살면서 서애 류성룡 선생, 한강 정구 선생 등과 만나 교류하면서
당면한 문제 등을 논의하기도 하며 지냈다. 1601년 오운이 대구도호부사(大丘都護府使)로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오운은 1606년에는 동사찬요(東史簒要)를 완성하였다. 우리의 역
사를 탐구하여 하나의 책으로 써서 완성하고 이름하기를 ‘東史簒要’라 하였다. 서애 류성룡이 크게 찬탄하며 가히 군상(君上, 임금)께
1 배응경: 조선시대 순천부사, 나주목사, 대구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그는 1600년 5월 13일에 죽유 오운, 백암 김륵 등과 청량산을 구경하고
‘청량산유상록’을 썼다.
2 천연대: 도산서원 양쪽 기슭에는 절벽이 있다. 퇴계는 왼쪽에 있는 절벽(도산서원을 등지고 섰을 때)을 ‘천연대(天淵臺)’라 불렀다. 시경의
‘연비려천 어약우연(鳶飛戾天 漁躍于淵 솔개는 날아올라 하늘에 도달하고 물고기는 뛰어올라 깊은 못에 이른다)’ 구절에서 하늘 '천'과 연못
'연'을 따서 지었다.
3 五月退溪先生文集刊訖。與諸公祭告陶山院祠, 先生與金栢巖玏, 裴安村
應褧。校正退溪先生秊譜。朢日參文集告成祭。因與諸友出天淵臺。講
論終日.
4 한국고전종합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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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릴 만하다 하면서 한 본을 (임금께) 봉진(封進, 밀봉하여 올림)하니, 선조(宣祖, 재위: 1567~1608)는 유림이 본받을 만한 표준이
된다는 교지를 내렸다.
1
1616년 8월 오운은 청송(靑松)부사를 제수 받았다. 그는 그동안
여러 번 (관직을 맡으라는) 조정의 명을 어겼기에 이번에도 그럴 수는 없어 10월에 부임하였다. 오운은 김시보(金施甫)에게 보낸 서
신에서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았다.
“조정의 명을 거듭 사양하고 관직에 나아가지 않는 것은 분수와 도리상 (마음이) 편치 않아 병을 무릅쓰고 부임하는 것이다. (이처럼
부임하는 것은) 애당초 내 속마음(本意)이 아니다. 80세(八秩)의 지방관(銅章)이 어찌 오래 (벼슬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감당하겠는가.”2
오운은 노년에 후학 양성을 위해 또한 노력하였다. 76세(1615년)에 산천서당(山泉書堂)을 지어 제자를 양성하였는데, 산천서당은 그의 사후 영주의 유림이 산천서원(山泉書院)으로 확대하고 오운을배향(配享)하였다.
3 이후 1786년 산천서당이 있던 자리에 한천서원(寒泉書院)이 건립되고, 오운이 배향되었다. 오운은 고창 오씨 죽
유공파(竹牖公派)의 시조이다.
1 先生探究東史。撰成一書。名以東史簒要。西厓柳公大加贊歎。以爲可達於君
上。封進一本。上有標準儒林之敎.
2 한국고전종합DB.
八月除靑松府使。十月赴任。先生以累違朝命。强起莅任。與金施甫書。略
曰再蒙恩命。一不趨謝。分義未安。扶病一行。終未免赴任。非本意也。

秩銅章。豈堪久居云。
3 허권수, 《죽유 오운(吳澐), 강좌(江左)와 강우(江右) 문화의 융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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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운은 1617년 7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오운이 사망하자
광해군이 예관(禮官)을 보내어 사제(賜祭, 임금이 죽은 신하에게 제사1를 내려주다)하였다.
2 광해군이 내린 사제문(賜祭文)3의 ‘道慕退陶 學宗山海(성리학은 퇴계를 우러러 받들고, 학문은 남명을 가장
뛰어난 분으로 모셨다)’4라는 문구에서 알 수 있듯, 죽유 오운은 남명과 퇴계 두 분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성리학자이자 문신이었다.
참고로, 광해문의 사제문과 오운과 자손들에게 내려진 교지류(敎旨類)5 58점 등 오운 종가 문적(文籍, 서적, 서류)은 1994년 보물
로 지정되었다.
경북 고령군 쌍림면 송림리 죽유종택에 오운을 모신 불천위 사당이 있다. 불천위(不遷之位의 줄임말)는 ‘옮기지 않는 위패’라는 뜻
이다. 양반가에서는 4대 조상(제사를 지내는 사람의 고조부)까지 제사를 모신다(4代 奉祀). 제사를 지내는 사람이 사망하여 기존의 4
대가 5대가 되면, 5대가 된 분의 신주(神主)6를 사당에서 옮겨 땅
1 제사(祭祀): 신령(神靈) 또는 죽은 사람의 넋에게 음식을 차려 놓고 정성을 표하는 예절. – 네이버 사전.
2 竹牖先生文集附錄上.
3 사제문(賜祭文): 충절이나 덕망이 높은 신하가 사망했을 때 또는 신하의 사후에 왕이 제사를 내리면서 하사하는 글을 말한다. 조선시대
賜祭는 때때로 있었다. 예, 선조가 이순신에게 賜祭, 광해군이 남명 조식에게 賜祭, 인조가 김양진에게 賜祭 등등이 있다. 賜祭를 받은 경우
해당 가문은 명문 세족으로서 기반을 다지게 되고, 賜祭의 대상은 불천위 조상으로서 받들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4 退陶(퇴도)는 퇴계 이황을, 山海(산해)는 남명 조식을 뜻한다.
5 교지: 조선 시대 왕의 말씀을 지칭하는 용어. 또는 문서 가운데 첫행에 ‘교지’라고 적는 문서군을 통칭하는 용어- 다음 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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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묻는다(위패를 옮기는 행위를 천위遷位라 한다). 이러한 관례와달리 불천위 신주는 대(代)가 올라가도 사당에서 옮기지 않고 대대
손손 제사를 모시게 된다.
1
국가에 큰 공훈이 있거나 도덕성과 학문이 높은 인물을 선정하여 불천위로 삼는데, 불천위는 선정 방식을 기준으로 국불천위, 향
불천위, 사불천위로 구별된다.
2
국불천위(國不遷位)는 임금이 교지로 정한다. 원칙적으로 문묘에 배향된 18명의 유학자를 지칭한다. 향불천위(鄕不遷位) 또는 유림불
천위(儒林不遷位)는, 학문이 깊거나 충절이 높은 인물들로서 서원에 배향된 지역 인물들 중 지역의 유림이 선정하여 옹립한다. 사불천
위(私不遷位)는 시호를 받은 경우도 아니고 학자로서 명성을 크게 떨친 경우도 아니지만 문중에서 높이 숭상하는 인물이 지역 유림의
추인을 받는 형식으로 불천위로 옹립된다.
국불천위와 향불천위는 개념상 구분이 되지만 실제에서는 어떤 불천위가 국불천위와 향불천위 중 어디에 속하는지를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또한 不祧位(부조위: 불천위와 같은 의미) 교지에 의해 불천위가 입증되는 경우도 극히 드물다. 예컨대, 안동지역의 경우
50명의 불천위 인물 중에서 부조위 문서가 확인된 경우는 2건에 불과하다.
3
6 신주: 제사의 대상인 망자를 상징하는, 나무에 죽은 사람의 이름과 죽은 날짜 등을 기록한 위패이다.

종이로 만든 임시 위패가 지방(紙榜)이다.
1 참고 김미영, 《불천위 추대 기준에 대한 제도적, 담론적 고찰》.
2 불천위의 선정 방식에 대해 불천위 - 위키(wikipedia.org)를 참고하여 정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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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천위 인물들은 모두 국가에 큰 공훈이 있거나 도덕성과 학문이 높은 분들이다. 불천위 제사는 후손들이 불천위 조상의 정신과
업적을 대대로 기념함으로써 가문의 위상을 높이고 혈족들의 단합을 도모한다는 측면에서 그 의의를 가진다.
따라서 불천위를 국불천위, 향불천위, 사불천위로 위계적으로 구분한 다음 어떤 불천위 인물이 국불천위, 향불천위, 사불천위 중
어디에 속하는지를 가리는 일은 중요한 일이라 생각되지 않는다.
다만,
‘국불천위가 가장 권위가 있고, 그 아래에 향불천위, 또 그 아래에 사불천위’라는 식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다.
1
참고로, 사당(祠堂)은 조상의 신주를 모셔 놓은 곳을 말한다. 옛
우스개소리로 “문중에 일이 생기면 사당에서 조상들의 장탄식 소리가 들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사당은 후손과 조상의 교감이 이
루어지는, 산 자와 죽은 자를 매개하는 공간이자 그 집안을 상징하는 중요한 장소였다. 예전에는 일반 사가(私家)는 4대 조상의 신주
를 모신 사당이 있었으나 오늘날에는 거의 없다. 오늘날 불천위 신주를 모신 사당이 있는 종손의 집을 ‘종가(宗家)’라 한다.
한편, 오운에 대한 가장(家狀, 조상의 행적에 관한 기록)에서 오여벌은 父의 인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府君(돌아가신 아버지)은 성질이 관후하며, 도량이 넓고 기상은 의연하였다.  자신은 엄하게 다스리면서도 남을 대할 때에는 온
3 김미영, 《불천위 추대 기준에 대한 제도적 담론적 고찰》.
1 김미영, 《불천위 추대 기준에 대한 제도적 담론적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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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 자세로 일관하였다.
…중략… 날마다 반드시 일찍 일어나서는 방안에 정좌한 가운데 책읽기를 좋아하여 손에서 책이 떠나지 않았다.”1
동암 권성오(權省吾, 1587~1671 號 東巖)가 쓴 도촌견문록(陶村聞見錄)2에는 오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죽유 오운공은 사람을 만들고 선비를 만드는 데 정성을 다하였다.
반드시 그 재주에 따라 돈독하게 하였다. 나는 일찍이 (공이) 권장해 주신 은혜를 입었고, 만년에는 돌보아 주신 은혜를 입었다. 이것이
어찌 대인의 문하에서는 인재를 버림이 없다는 것이 아니겠는가!”3
1 죽유집 ‘府君性質寬厚 氣度弘毅 律己以嚴, 待人以和… 日必夙興靜坐 一室劬書自娛 手不釋卷’ - 참조 사재명, 《죽유 오운의 강학과 교육》 243쪽 ,
남명학총서 11.
2 도촌견문록: 영주 지역 일대의 인물 및 혼반(婚班)관계, 지명의 유래,누정의 명칭 유래 등을 알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권성오는 1587년에
영주 도지촌에서 태어났다. - 유교넷.
3 큰 사람은 자신의 제자가 된 이가 누구이든 그의 소질과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돕는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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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창 오씨 의령공파 세계도(世系圖) 일부
의령공
오석복(碩福)
오언의(彦毅)
오수정(守貞) 오수영(守盈)
오진(溍) 오운(澐)
양자 오여벌(汝橃)
오여은(汝檼) 오여벌(汝橃)
출계 오여영(汝楧)
양자 오익엽(益熀)
오익환(益煥) 오익엽(益熀)
출계
오덕기(德基)
오수백(壽百)
오태창(泰昌) 오재창(再昌)1
오석정(錫禎) 오석록(錫祿) 오석수(錫秀)
양자 오사만(司萬)
오사만(司萬)
출계
오재호(在鎬)
오응중(應重)
오범근(範根) 나의
증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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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를 보면, 오석복(의령공)­오언의­ 오수정­ 오진­ 오여벌­ 오익엽 순으로 세계(世系)를 이어간다. 족보상 나의 직계 조상인 오진
은 아들이 없었기에 55세에 동생 오운의 차남 오여벌(9세)을 입양하였다. 그로부터 6년 뒤(1593년) 오진은 세상을 떠났다.
이후 오여벌도 아들이 없어서 형님인 오여은의 차남 오익엽(吳益熀)을 입양하였다. 이처럼 오운의 후손들이 그의 형님인 오진의 대
를 이어 나간 것이다.
오진은 증조부 때부터 살았던 함안, 의령 지역을 떠나 영주로 이주하지는 않았다. 임진왜란은 1592년 4월에 발발했고 그해 오운
의 가족은 전란을 피해 영주로 이주하였으나, 오진은 의령 땅에 몸을 숨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게다가 오진의 사망일은 1593년 4월
이고 묘소는 경남 의령에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오진이 영주에 살았다고 볼 수 없다.
이에 반해 오운은 고향을 떠나 경북 영주로 이사를 하고 그곳에서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오운의 묘소는 영주 疊石里(첩석리)에 있
다. 현 영주시 조암동(槽巖洞) 산78(영남자동차운전학원 뒤쪽 산)이다.
이러한 점들을 종합해 보면, 영주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오운의 후손들이라 할 수 있다. 오운이 영주 초곡에 들어와 살게 된 이래 그의
후손들은 영주와 그 인근 지역에서 흩어져 살게 되었다. 고창 오씨 영주 입향조(入鄕祖)는 오운이고, 그분이 내 오랜 의문에 대한 답이다.
1 1929년 간행된 족보(己巳譜)는 오사만의 생부 오석수(吳錫秀)의 父를 오재창(吳再昌)으로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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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오운의 자손들의 삶(1600년대)
- 역사의 파도 속에서
지금부터는 오운의 후손들 중 나의 직계 조상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오운에게는 아들 셋이 있었는데 장남 오여은(吳汝檼), 차남 오여벌(吳汝橃), 삼남 오여영(吳汝楧, 1586~)이다. 오여은과 오여벌은
의령 가례마을에서 태어났다.
1 가례마을은 오운의 처가(김해 허씨)가 있던 곳으로 퇴계 이황의 처가이기도 하다. 퇴계는 처가를 방문
하여 지내면서 바위에 ‘가례동천(嘉禮洞天)’이라는 글자를 새겼다.
2
동천(洞天)은 ‘동천복지(洞天福地)’에서 온 말로, 동천복지란 도교에서 말하는 신선들이 사는 명산 승경(勝景, 뛰어난 경치)을 뜻한
다. 즉, 신선들이 사는 별천지(別天地)3를 이르는 말이다. 결국, 가례동천은 ‘가례마을에 있는, 별천지와 같은 아름다운 곳’을 의미한
다. 처가를 방문하여 주변 산천을 구경하였던 퇴계가 ‘가례동천’ 네
1 오여영의 출생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2 현 의령 가례리의 한 바위에 퇴계의 친필이 남아 있다.
3 별천지: 속된 세상과 아주 다른 딴 세상(네이버 한자 사전). 이백의시,

‘山中答俗人’에 나오는 ‘別有天地非人間’구절에서 나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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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를 바위에 남겨둔 것을 보면, 퇴계는 이곳이 무척 마음에 들었
던 것 같다.
장남 오여은{吳汝檼, 1561~1633, 號 洛厓(낙애)}은 1613년 대과 급제하고 홍문관 전한(典翰)1으로 재직하였다. 오여은은 주세붕
(周世鵬, 1495~1554)2의 손녀와 결혼하였다. 주씨 부인과 사별 후 고령의 재지사족(在地士族)3인 박정완(朴廷玩)4의 딸과 재혼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난다. 1591년 소과에 합격하여 진사가된 오여은은 다음 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버지와 함께 의병활동에만 전념하였다. 그의 나이 32세였다. 오여은은 임진창의녹훈(壬辰倡義5錄勳, 임진년 의병활동을 한 공신으로 기록)되었다.
용사응모록(龍蛇應募錄, 龍蛇之亂 즉 임진왜란 때 의병들의 명단)6에서도 오운과 오여은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7
1 전한(典翰): 조선 종3품 관직. 유학의 경전을 관리하고 글을 다루며 임금의 물음에 응하는 일을 담당한다.
2 주세붕: 문신. 성리학 이념의 보급을 통한 교화와 향촌사림의 배양을위해 최초로 서원(백운동 서원)을 건립했다. - 다음 백과. 후에 백운동
서원은 풍기 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의 건의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이름을 받았다(賜額). 사액: 임금이 사당, 서원, 樓門 따위에 이름을지어서 새긴 편액을 내리는 것을 말한다.
3 재지사족: 조선 시대에 향촌 사회에서 유교적 소양을 갖춘 지식계층을 이르던 말. – 네이버 사전.
4 박정완: 고령의 부호(富豪)로 내암 정인홍의 문인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활동을 한 공으로 ‘宣武原從二等功臣’에 녹훈(錄勳, 공을 장부나 문서에 기록)되었다.
5 창의: 국난을 당하였을 때 나라를 위하여 의병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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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활동을 하는 각 지역의 사람들은 일정한 장소에 모여 결사 항전을 결의하고 적군과의 싸움을 대비하였는데 이러한 모임을 ‘회
맹(會盟, 모여서 맹세함)’이라 한다. 전쟁이 끝난 후 의병활동을 한 사람들 중 일부가 기록을 남겼는데 경주 문천회맹록, 대구 팔공산
회맹록, 상주 당교회맹록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회맹에 대한 기록은 칠송당실기(七松堂實記), 망조당실기(望潮堂實紀)1 등에 수록되어
있다. 저자에 따라 의병의 이름, 숫자 등에서 다소 차이가 있다.
의병활동을 했던 이응벽(李應璧, 1543~1599)은 저서 칠송당실기(七松堂實記)에서 팔공산에서 회맹(會盟)을 했던 자들에 대해 기록
하였다. 여기에 오운, 오여은 부자가 있다. 특이하게도 오운의 거주지는 영주이고, 아들 오여은의 거주지는 의령으로 되어 있다.
2
1593년 2월(음력)에 상주 당교3와 문경 지역에 주둔해 있던 왜군들을 토벌한 당교 전투가 일어났다. 이 전투로 왜군 4000여 명
이 문경 대승산 쪽으로 물러났다. 이 전투에 참여했던 의병장 회암
6 용사응모록(龍蛇應募錄)은 임진년부터 병신년까지 5년 동안 곽재우의 창의에 응하여 의병에 합류한 사람들의 명단이고, 화왕입성동고록(火旺入城同苦錄)은 1597년 곽재우와 함께 경남 창녕의 화왕산성에 들어가 함께 고생한 사람들의 명단이다. 후에 곽재우의 후손 곽원갑(郭元甲)이 위 둘을합쳐서 창의록(倡義錄)이란 이름으로 간행하였다. - 유교넷.
7 倡義錄(창의록) 龍蛇應募錄.
1 임란 당시, 울산 지역의 의병장 서인충(徐仁忠)의 기록.
2 오운: 팔공산회맹록4(八公山會盟錄), 칠송당실기2. 오여은: 팔공산 회맹록4(八公山會盟錄), 칠송당실기1.
참고로, 팔공산회맹은 1596년 3월에 있었다. 망조당실기(저자 徐仁忠)에기록된 팔공산회맹은 정유3월(1597년)이다.
3 당교: 경북 상주와 문경의 경계 다리. 현 상주시 함창읍 윤직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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