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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남(朴震男)이 이에 대한 기록을 남겼는데 회암박공실기(悔嚴朴公實記)이다. 이 책 안에 당교 전투에 참여한 의병들 명단인 당교회
맹록(唐橋會盟錄)1이 들어 있다.
오여벌도 아버지(오운)의 친구 박제인{朴齊仁, 1536~1618, 號篁巖(황암), 함안 사람으로 오운과 함께 함주지를 편찬함}과 함께
당교 전투에 참여하였다.
2 당교회맹록은 오여벌의 字를 족보상 字인 ‘景虛(경허)’가 아닌 ‘濟甫’라고 기록하고 있다(화왕입성동고록에도 ‘濟甫’라고 기록). 당교 전투 당시(1593년) 15세인 오여벌은 전쟁 통에 관례(冠禮)를 치루지 못하여 정식 字를 받지 못한 상태에서
본인 스스로 ‘濟甫(건너는 또는 도우는 사내)’를 字로 임시 사용한듯하다.
‘景虛’는 전쟁이 끝난 후 치룬 관례에서 받은 字로 생각된다.
참고로, 관례(冠禮)는 15~20세 남자들의 성인식에 해당하는 전통의례로서, 남자는 상투를 틀고 갓을 쓰며 어른으로부터 字3를 받는다.
여1 당교회맹록: 1593년 2월에 있었던 당교 전투 참여자 147명의 의병들
명단으로, 한국역사인물학회 대표 허철회씨가 2015년 발굴, 발표하였다. - 임진왜란과 당교회맹록. 자료 및 정보 제공: 오홍재.
여기 명단에 적힌 ‘吳汝發’은 저자 박진남이 ‘橃’을 잘못 표기한 것으로보인다.
그러나 출생이 己卯(1579년)이고, 거주지가 함안인 점으로 보아오운의 子 吳汝橃로 판단된다.
2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오운은 차남인 오여벌(14세)에게 ‘어머니, 동생과 함께 영주로 피신해 있으라’고 했을 것이다. 오여벌은 모친을영주로 모셔다 드리고, 부와 형이 있는 의령으로 돌아와 자신도 의병
활동에 힘을 보태려고 했던 것 같다. 영주에서 의령으로 가던 중, 상주에서 아버지의 절친 박제인을 만났고, 당교 전투에 참여하게 된 것 같다.”
– 오홍재.
3 조선시대에는 부모님이 지어주신 본명을 중히 여겨서, 부모, 스승, 임금
을 제외한 다른 사람이 자신의 본명을 부르는 것은 결례라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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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는 쪽을 찌고 비녀를 꼽는 계례(筓禮) 의식을 치른다.
1 관례일은
정월(1월) 중 하루를 정하나 꼭 1월로 한정하지는 않았다. 관례일
3일 전에 사당에 고하고, 빈(賓, 관례를 주관하는 자로서, 主人의친구 중 어질고 예를 아는 자를 모셨다)을 모셔서 절차를 진행한다.
2
관례는 3단계로 진행된다. 첫 번째 단계에서, 머리에 관을 세번 바꾸어 씌워준다. 이 의식에서 성인 남성으로서 지녀야 할 덕목
과 국가에 대한 의무를 일깨워준다(관을 씌울 때마다 빈이 축사를한다). 두 번째 단계에서, 술을 부어주고 당부를 한다. 세 번째 단
계에서, 이름 대신 사용할 字를 지어준다. 관례가 끝난 후 성인이된 관자(冠者)는 사당에 가서 조상께 인사드린 후 주변 어른들을 찾아
뵙는다. 이는 관자가 성인이 된 후 처음으로 하는 사회활동이다.
3
1597년 정유재난(丁酉再亂)이 일어난다. 일본은 임진년(1592년)에 조선을 침략하고 강화(講和)협상이 결렬되자, 정유년에 다시 대
규모 침략을 감행하였다. 1597년 8월 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 곽재우가 전략상 요충지였던 경남 창녕 화왕산성(火旺山城)을 지켜내면
서 적군의 현풍, 대구 쪽으로의 북상을 막았다. 결국, 왜군은 화왕 산성을 포기하고 우회하여 합천 쪽으로 이동하였다.
4 화왕산성에
들어가 함께 한 사람들의 신상을 적은 기록이 火旺入城同苦錄(화왕그렇기에 관례식 이후에는 字를 불러주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1 이하 관례에 대해서는 송미화, 《관례(冠禮)의 전통과 인성교육적 함의》
를 발췌, 인용하여 정리하였다.
2 송미화, 《관례(冠禮)의 전통과 인성교육적 함의》.
3 송미화, 《관례(冠禮)의 전통과 인성교육적 함의》.
4 김강식, 《임진왜란 시기 창녕 지역의 대응과 후대의 기억》 144쪽,
한국사상사학 제46집,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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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성동고록)1이다.
당시 19세였던 오운의 차남 오여벌(족보상 오진의 子)은 자형 조형도(趙亨道, 1567~1637)2와 함께 화왕산성에 들어가 왜적과
싸웠다.
3 오여벌이 화왕산성에서 싸울 때 그의 生父 오운은 합천군수로서 전쟁에 임하였고(1594년 합천군수로 임명), 형 오여은 역시
합천에서 의병활동을 하였다.
오운의 자식들 중 막내아들 오여영(吳汝楧, 1586~)을 제외하고 장남과 차남은 모두 의병활동에 참여하였다. 오여영은 임진왜란 당
시 7세의 어린 나이로 의병활동을 할 수 없었다. 당시 의병활동을한 많은 집안에서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해 아들 한 명은 피난처에
남겼을 가능성이 높다. 오여벌의 경우 상주 당교 전투에 참가했을때의 나이가 15세, 1597년 화왕산성에서 의병활동을 할 때의 나이
가 19세였다. 오늘날로 치면 미성년자인 셈인데 목숨을 잃을 위험을 감수하고 전쟁에 참여한 것이다. 그 충심과 용기가 참으로 대단하다.
1 화왕입성동고록: 1597년 곽재우와 함께 화왕산에 들어가 활동했던 사람들의 명단(699명의 이름, 자, 거주지 등이 기록)으로 1734년에 간행된 ‘창의록’에 수록되어 있다. – 김강식, 《임진왜란 시기 창녕 지역의대응과 후대의 기억》.
2 조형도: 오운의 사위. 임진왜란 때 의병활동을 하다가 1594년 무과에합격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때 공신으로 보성군수가 되고, 1624년
이괄의 난으로 인조가 피신할 때 왕을 호위하였다. - 다음 백과.
3 화왕입성동고록 오여벌 부분에 ‘鼎津咸安斗谷時榮川’라 기록되어 있다.
鼎津은 의령 정암진을, 咸安斗谷은 함안 모곡리 두곡마을(父 오운의 출생지)를 의미한다. – 자료 제공: 오홍재. 화왕성동고록(火旺城同苦錄)에서 오여벌의 호(號)를 잘못 기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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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출처: 국토지리정보원 지도박물관
위 사진은 김정호(金正浩, ~1866)가 만든 대동여지도(大東輿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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圖)에서 남쪽 지역을 확대한 것이다. 두 줄의 곡선은 물길을 뜻하
고, 한 줄 직선은 사람이 다니는 길로 마을과 마을 사이를 잇는다.
창녕(昌寧) 오른쪽에 화왕산(火王山)1이 표시되어 있다.
1592년 4월 13일 조선을 침략한 왜군은 김해 쪽으로도 들어왔
다. 김해에 살던 오운의 매제(妹弟) 이대형(李大亨, 1543~1592, 號觀川)은 의병을 모아 김해성으로 들어가 송빈, 김득기, 류식과 함께
왜군에 맞서 싸우다 전사했다. 이것이 임진왜란 때 최초의 의병 활동이었다. 이때 순국한 사충신을 기리기 위해 1871년 고종의 명으
로 사충단(四忠壇)이 김해에 건립되었다.
오운이 조카의 부탁으로 쓴 이대형 행장(贈通政大夫掌隷院判决事李公行狀)2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그는 스스로를 관천 거사로 불렀다… 두 아들에게 이르러 말하길,
“우리 집안은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받았다. 나는 비록 관직은 없으나 나라의 위급함에 당하여 의(義)를 버리고 삶을 꾀하는 것은
백성의 도리가 아니다. 함께 싸워 나라를 위해 순국하는 것이 마땅
하니, 너희들은 빨리 먼 곳으로 피난을 가되 조상의 제사는 끊지마라.”라고 하였다. 이에 두 아들은 (아버지의) 소매를 붙잡고 통곡
하며 울었다.」
1 고문헌에는 화왕산의 한자가 ‘火旺山’ 또는 ‘火王山’으로 혼용되고 있다.
2 한국고전종합DB.
自號觀川居士… 謂其二子曰吾家世受國恩 我雖無官 當此危急之日
舍義圖生 非臣民道理 往與主將背城一戰 當爲殉國之魂 汝等急避遠地
毋絶先祀 二子攀袖慟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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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성 전투가 끝난 후 이대형의 맏아들은 아버지의 시신을 찾으러 성 안으로 들어갔다가 왜군에 의해 죽음을 당하였고, 이대형
의 형 이대윤(李大胤)의 딸은 왜군의 겁탈을 피하려 자결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선조는, 한 집안에서 충신, 효자, 열녀라는1 세
가지 꽃다운 일이 있었다면서 ‘삼방(三芳)’이란 이름을 하사했다. 여기서 김해 ‘삼방동’이라는 지명이 유래되었다.
오운의 사돈인 박정완(朴廷琬, 1543~1613, 號 養竹堂)은 고령의재지사족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령 출신 의병장 김면(金沔,
1541~1593, 號 松庵)2 장군의 휘하에서 돌격장으로 활동했다.
박정완은 군수 물자와 전리품 운반의 목적으로 낙동강을 타고
이동하는 적의 배들을 쳐부수기 위해 개산포(開山浦, 현 고령 개경포) 인근에서 낙동강 곳곳에 말뚝을 박아 유인한 후 왜적을 격파하
였다(개산포 전투). 박정완은 사재를 털어 군량과 활과 화살을 마련하고, 장사 400여 명을 모집해서 강기슭에 복병으로 배치하여 무
계(茂溪, 성주 무계) 등지에서 적들을 격파하였다.
난중잡록{亂中雜錄, 조경남(趙慶男, 1570~1641)의 야사집}3에는 박정완의 공적에 대한 기록이 있다.
4 여기에 박정완이 창녕(昌寧)ㆍ현풍(玄風)ㆍ성주 지역에서 상당한 공적(功績)을 세웠는데 (당시
1 살신충(殺身忠), 살신효(殺身孝), 살신열(殺身烈).
2 김면: 남명 조식과 퇴계 이황의 문인, 문신, 의병장. 고령(高靈) 도암서원(道巖書院)에 제향됨.
3 난중잡록: 남원 의병장 조경남이 임진·정유 양란 당시의 상황과 국내외정세 등을 기록한 야사집.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4 亂中雜錄一 한국고전종합DB, 역자 차주환, 신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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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포상을 받지 못하여 사람들이 안타까워했다는 기록이 있다.
“김면(金沔)이 무계(茂溪)에서 승첩한 것은 실로 박정완의 힘이 컸는데 공을 나누는 데는 참여하지 못했으니 사람들이 모두 애석히 여
긴다(金沔茂溪之捷廷琬宣力居多而功不與焉人皆惜之).”1 그러나 박정완은 1605년 ‘宣武原從二等功臣’에 녹훈되었다.
이렇듯 오운과 그의 아들들, 사위 조형도, 오운의 매제 이대형,오운의 사돈 박정완 등등 수많은 이들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의병활동을 하였던 까닭은 무엇일까? 특히 15세의 오여벌처럼 관례도 치루지 않은 소년이 의병활동에 참여한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
조선은 충효가 중요한 가치인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하는 나라였다. 그래서 조선의 선비들은 배움과 실천에 있어서 충과 효를 매우
중시하였다. 유교가 제시하는 선비의 이상적 삶은 자신을 수양하여 높은 경지에 이른 다음, 다른 사람(백성)을 다스려(修己治人) 이상사
회인 ‘대동(大同)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유교의 가르침을 따르는 선비(儒, 유)에게 ‘修己治人’은 삶의 핵심 지침이다. 조선에서
‘수기(修己)’는 충과 효의 정신을 내면화하고 실천하는 데 강조점이두어졌다.
재야에 은거하면서 학문수양을 하던 선비들 중에서도 남명(南冥)조식(曺植, 1501~1572)2은 특히, 義(의)를 바탕으로 한 실천을 중
요시하였다. 이러한 실천 정신은 임진왜란 시 곽재우를 비롯한 조
1 亂中雜錄一 한국고전종합DB, 역자 차주환, 신호열.
2 조식: 두 차례의 사화를 경험하면서 훈척 정치의 폐해를 직접 목격하고 평생을 산림처사로 자처하며 오로지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 매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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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의 수많은 제자들의 의병활동으로 발현되었다.
1 조식의 제자인
오운과 그의 아들들은 배운 바대로 나라가 어려움을 당하자 조금도
주저 없이 의병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또 오운은 평소 자식들에게 ‘廉謹忠信(염근충신)’를 강조하였다.
오여은이 낙애유집(洛厓遺集)에서 “아버지께서는 매우 좋아하셔서
손수 쓰신 것이 ‘廉謹忠信’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竹牖父君甚愛之手書廉謹忠信)2
오여벌도 아버지 사후에 지은 가장(家狀)에 “무릇 아버지께서는벼슬에 올라 행동함에 있어서는,
‘염근충신(廉謹忠信)’으로써 스스로 알맞게 처신하여 근본 가르침을 저버리지 않으셨다.”라고 썼다.(凡
行己立朝 以廉謹忠信自期 不負素學可也)3
여기서 말하는 ‘廉謹忠信’이란 맑고 깨끗하며 바르게 살고(廉),했다.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성리학적 토대 위에서 실천궁행을 중요시하여
‘敬’과 ‘義’를 강조했고, 경상우도 학문의 특징을 이루었다. - 다음 백과.조식은 방울(惺惺子)과 칼(敬義劍)을 차고 다녔는데, 방울소리가 울릴때마다 스스로를 경계했고, 경의검에 새겨진 글귀를 보며 敬과 義를 되새겼
다. 경의검에는 ‘內明者敬 外斷者義(안으로 자신을 밝히는 것은 경이요,밖으로 과감히 결단하는 것은 의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조식은 죽기 전 정인홍에게 이 칼을 물려주었다.
內明者敬 外斷者義: ‘마음속으로는 항상 예의 바르게 행동하고 절제하며
마음을 다스려야 하고 밖으로는 옳다고 알고 있는 것을 결단력 있게실천해야 한다’는 의미다. – 정현무,
‘남명 조식 선비정신 계승’, 경남데일리.
1 참조 장승희, 《남명 조식의 선비정신과 도덕교육- 의(義)를 중심으로》.
2 자료 및 정보 제공: 오홍재.
3 竹牖先生文集附錄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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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하게 처신하고(謹),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끝까지 실천하고(忠), 믿음을 줄 수 있도록 속임이나 거짓 없이 온 정성을 기울이라
(信)는 가르침이다. 오운의 자식들은 목숨이 위태로운 전쟁 상황에
서 자신의 안위를 꾀하지 않고 이웃과 나라를 위해 싸우러 나갔다.
이는 배운 바를 흔들림 없이 실천하라는 남명의 가르침과 ‘염근충신(廉謹忠信)’하라는 아버지의 가르침에 의한 것이었다.
오운의 차남 오여벌{1579~1635, 字 景虛(경허), 號 敬菴(경암),南岳(남악)}은 서애 류성룡(西厓 柳成龍)과 한강 정구(寒岡 鄭逑) 선
생의 문하에서 공부하고 1603년 대과에 급제했다. 홍문관 교리(校理)1를 지냈고 이후 외직으로 나갔다.
김응조(金應祖, 1587~1667)가 저술한 학사집(鶴沙集)에는 오여벌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기술이 있다.
“여러 대간직을 두루 거치면서 올곧다는 명성이 조야에 진동했으나 이 때문에 꺼림을 받아 요직(要職)에 진출하지 못하고 외직을 전전
하다 1625년(인조3) 창원 부사(昌原府使)로 졸하였다(마쳤다).”2
또 학사집에는 오여벌의 성품을 엿볼 수 있는 구절이 기록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다.
3
“공은 부모를 섬김에 있어 효를 다하고, 겨우 成童(성동, 15세 소
1 홍문관 교리: 홍문관에서 일하는 정5품의 관직.
2 鶴沙集 卷7, 通訓大夫行弘文館校理南嶽吳公墓碣銘. 역자 황만기.
3 鶴沙先生文集卷之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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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을 말함)이었을 때 양부모의 상복을 입고 마음을 제어하여 (예)를지켜 나감이 성인과 같았다. 임란을 당하여 피난 중에 친히 (조상
의) 신주를 (챙겨서) 받들며 가는 곳마다 슬피 울었다. 일찍이 어버이를 기쁘게 하기 위해 계집종에게 음악을 가르쳤는데, 어버이가
돌아가시자 그만두어 버렸다. 형님이 멀리 추운 외지에 떨어져 있음(형님 오여은이 유배를 간 상황을 말함)을 한탄하면서 (형님) 이
야기가 나오면 이내 눈물을 흘렸다. 가난한 형제를 불쌍히 여겨 재물을 쏟아 부어 두루 돌봐 주었다.”1
“공이 서애 류성룡 선생을 찾아뵈었는데 선생이 예로 대우해주었다. 이별할 즈음, 선생이 (공에게) 옛사람2이 지은 매화 시 「莫把疏
英輕鬪雪 好藏淸艶月明中 성긴 매화 꽃봉오리를 가지고 가벼이 눈과 다투지 마라. 맑고 품위가 있는 고움을 달빛 가운데 잘 감추어라」
는 구절을 들어서 말을 해주었다. 이는 공의 바른 지조(志操)3가 세상과 조화되기 어렵다는 점을 걱정한 것이었다. 아아, 마침내 선
생의 말씀이 입증되었으니, 이는 하늘의 뜻이었다.”4
1 公事親盡其孝 纔成童 持所後父母服如成人 當大亂流離中 親奉神主 隨
處號哭 嘗爲悅親 敎婢子樂 親沒廢不御 恨伯氏遠隔塞外 語及必流涕
憐一弟窮乏 傾儲周恤焉.
2 이 글에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이 매화시 ‘渚宮觀梅寄康侯’의 저자는
양시(楊時, 1053~1135)이다. 양시는 북송 때 유학자이자 문신으로 호는
구산선생(龜山先生)이다. 양시가 저궁에서 매화를 감상하다가 그의 제자
강후(호안국의 字)에게 시를 지어 보냈다. 호안국이 감사가 되어 나아가려
하자 양시는 그를 한매(寒梅)에 비유하여 성근 가지로 섣불리 눈과 다투지
말고 그 맑고 고운 모습을 밝은 달 속에 고이 간직하라고 했다. 즉 나라가 어렵고 정세가 어수선하므로 여린 기세를 드러내지 말라는 충고였다.
이에 호안국은 감사를 그만두었다고 한다. – 대전시립박물관, 집필자 미상.
3 지조: 신념, 신의 따위를 굽히지 아니하고 굳게 지키는 꿋꿋한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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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시(楊時, 1053~1135)의 시 구절인 ‘好藏淸艶月明中(고아한 지조를 달빛 가운데 잘 감추어라)’이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태양 빛
은 강하게 빛나지만 그것을 보는 사람은 눈이 부셔 금방 고개를 돌리게 된다. 그러나 달빛은 밝으면서도 눈부시지 않아 계속 볼 수
있다. 위 표현은 굳은 지조를 태양처럼 너무 강하게 드러내지 말
고, 달빛 같은 은은함으로 감싼 듯이1 부드럽게 표현하여 주위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받지 말라는 의미이다.
‘진광불휘(眞光不煇, 진정한 빛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나 ‘도광양회{韜光養晦, 밝음(재능)을 감추고 어둠(晦) 속에 숨긴다}’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류성룡은, 제자 오여벌이 강직한 성격과 신념을 굽히지 않는 태도로 인해 관료 사회에서 화를 입을 수 있음을 염려한 듯하다. 류
성룡은 시 구절을 통해서 ‘너에겐 견지아조(堅持雅操)2는 충분하니,
자신의 뜻을 부드럽게 전하는 태도를 갖추라’는 뜻을 오여벌에게 말한 것이다. 제자의 부족한 점을 일깨우면서 안위를 걱정하는 스
승의 사랑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한편, 오여은은 1613년에 대과에 급제하였다. 이때 오여은의 거주지는 경북 고령으로 기록되어 있다.
3 응천일록(凝川日錄)4에 따르면,
4 鶴沙先生文集卷之七. 公嘗拜西厓柳先生 先生禮貌之 臨別 擧古人詠梅
詩 莫把疏英輕鬪雪 好藏淸艶月明中之句 以當贈言 蓋慮其雅操難諧於世
嗚呼 卒使先生之言有驗 則天也.
1 한번 상상해보라. 지조라는 핵심이 달빛과 같은 표면을 가진 구체 안에
들어있다고. 이것이 바로 ‘月明中’이다.
2 견지아조: 바른(고아한) 지조를 굳게 지킨다는 의미.
3 한국학중앙연구원 [오여은(吳汝檼) 인물 정보].
4 응천일록: 조선 후기 문신 박정현이 조선 광해군 1년(1609)에서 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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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여은·오여벌 형제가 1614년(광해6) 8월 15일 홍문록(弘文錄) 투표에서 각각 5권(圈點), 4권(圈點)1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2
이에 의하면, 둘 형제가 중앙정부에서 같이 근무하고 있었음을 알수 있다. 참고로, 홍문관은 정승, 판서 등 고위관리들이 거쳐 갔던
주요 기관이어서 홍문관 관원이 되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홍문관 관원이 되려면 일단 홍문록3에 올라야 하는데 이를 위해 투
표를 한다.오여은은 1620년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4의 보덕(輔德, 왕세자교육을 담당하는 종3품의 관직)으로 임명되어 광해군의 장남인 세자 이지(李祬, 1598~1623)를 가르치기도 하였다.
5
13년(1635)까지의 사건을 조보(朝報)와 소초(疏草)를 바탕으로 쓴 것으로,당시의 정치적 분위기와 당쟁 상황을 이해하는 데 참고가 된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 권점(圈點): 조선 시대 홍문관(弘文館)의 관원을 뽑을 때, 후보자들의 성명을 죽 적어 놓고 전선관(銓選官)이 각기 뽑고자 하는 사람의 성명 아래에 찍는 둥근 점. 점수(點數)가 많은 사람이 뽑히게 되는 것으로 지금의투표(投票)와 비슷함. – 네이버 한자 사전.
2 한국고전종합DB, 역자 정봉화.
3 홍문록은 홍문관원에 결원이 생길 때를 대비해서 만든 제도이다. 홍문관에 결원이 생기면 비로소 이조가 홍문록 중에서 3인을 추천하고, 왕이이 중 한 명을 낙점하여 임용했다. 선발에서는 지제교(知製敎, 왕의 교지나 조서를 작성하는 일을 하는 관직. 고려 때 요직이던 知制誥가 개칭된것임)가 될 수 있는 수준의 문장력이 있고, 왕과 경사를 논할 만한 학문을
가져야 하고, 좋은 가문 출신이어야 한다는 조건을 갖추어야 했다. – 다음
백과.
4 세자시강원: 왕세자를 모시고 경서(經書)와 사적(史籍)을 강의하며 도의(道義)를 가르치는 임무를 담당하였다. - 다음 백과.
5 조선왕조실록.
‘庚申三月初六日甲申有政…吳汝穩兼輔德…
’
112
한편, 오여은의 장남 오익환(吳益煥, 1594~1645, 號 晩峯)도1615년 대과 급제1(거주지 고령)하고 홍문관 수찬(修撰)으로 근무
하였다.
2 참고로, 오여은, 오여벌 형제와 오여은의 장남 오익환은선조실록 편찬(1609년~1616년)에 참여한 편수관(編修官) 명단에
이름이 있다.
3 오여은, 오익환 부자가 예문관 소속의 전임 사관으로서 실록편찬에 참여한 데 비해, 오여벌은 용양위 부사과(龍驤衛副司果)4와 지제교(知製敎)5로서 편찬에 참여하였다.
1615년(광해7) 역모 사건이 일어난다. 신경희 등 서인세력의일부가 능창군(당시 능양군이었던 인조의 친동생)을 왕으로 추대하려 한다고 고발된 사건이었다.
6 이에 연루된 오여벌은 공초를 받다가 다행히 누명을 풀고 풀려났다.
그의 형 오여은은 당시 사간원 헌납(獻納)7의 지위에 있었는데,
동생의 일로 인해 사직을 청하였지만 광해군은 윤허하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광해 7년 윤8월 14일)은, 오여은이 왕께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고 기록한다.
1 한국학중앙연구원 [오익환(吳益煥) 인물 정보].
2 수찬(修撰): 정6품의 관직.
3 조선왕조실록.
4 용양위는 조선의 군사 조직인 5위(衛) 중 하나. 부사과: 종6품 관직.
5 지제교: 왕의 교지나 조서를 작성하는 일을 하는 관직. 고려 때 요직이던 지제고(知制誥)가 개칭된 것임.
6 “신경희는 인조반정에 가담한 신경진과 친형제이고, 능창군은 인조의친동생이었다. 이런 점 때문에 인조반정이 개인적 원한에 의한 준비된
사건이라 보기도 한다.” - 유교넷, 집필자 미상.
7 헌납: 사간원의 정5품의 관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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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변치 못한 소신은 외람되이 은가(恩暇)를 받아 고향에 돌아가 병든 어미를 보살피던 차에 문득 신의 동복 아우인 오여벌(吳汝橃)의
이름이 흉적의 공초에서 나왔다는 말을 듣고서 놀라 어찌할 바를모르고 달려와서 보니 아우는 수금 중이었습니다. (신은) 결코 잠시라도
그대로 언관의 지위에 있을 수 없습니다. 신의 직을 파척하소서."1장흥효(張興孝, 1564~1633)2가 지은 경당일기(敬堂日記)에는 다
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1615년 을묘년(광해군7) 윤8월 9일, 배역(裵繹) 군이 찾아왔다.
오여벌(吳汝橃) 군이 붙잡혀 갔다고 하니 또한 원통하지 않은가?
성명(聖明, 임금의 밝은 덕)하신 임금께서 위에 계시니 아마도 풀려날 것이다. 9월 3일 병자丙子, 들으니 오경허(吳景虛) 군이 석방되
어 집에 돌아왔다 하므로 무슨 기쁨과 다행이 이와 같겠는가?”3
오운의 차남 오여벌은 학봉 김성일의 아들 김집의 장녀와 혼인했고, 삼남 오여영은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의 현손(玄孫)4김성율(金聲律)의 사위가 되었다.
5
1623년 3월 인조반정(계해정사, 癸亥靖社)6이 일어난다. 서인
1 조선왕조실록. 역자 미상.
2 장흥효: 조선의 학자. 학봉 김성일의 제자. 안동에 은거(산림처사)하며 경당 일기를 씀.
‘음식디미방’을 쓰고 ‘조선의 여성군자’라 지칭되는 장계향의 父.
3 유교넷, 역자 미상.
4 현손(玄孫): 손자의 손자.
5 허권수, 《죽유 오운(吳澐), 강좌(江左)와 강우(江右) 문화의 융합자》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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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의 주도로 광해군을 폐위하고 인조를 왕위에 올린 사건이었다.
문신 김영(金坽, 1577~1641)이 쓴 계암일록(溪巖日錄)에 의거해서 보면, 인조반정은 1623년 3월 12일 인조반정이 일어났고 그 소식
이 범 안동권에 전파된 것은 그로부터 8일이 지난 3월 19일이었다.
1
3월 28일 영주(榮川, 영천)2에서 가장 먼저 향회(鄕會)3가 개최되어 대북파 선비들을 고을에서 축출하는 등의 유벌(儒罰)4을 감행
했다.
5 계암일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이날 영천(榮川) 인사들이 적당(賊黨, 도둑의 무리)의 집을 헐고 쫓아냈는데, 李茳, 李藏, 李榮久, 琴大雅, 李埁, 李光啓, 李光烈 등은
다 그중 심한 자들이었다. 노소를 막론하고 모인 자들이 수백 명이
었는데, 인정(人丁, 인부들)을 거느려 그 집을 부수고 그 죄를 성토하였다고는 하나 실제로 다 부순 것은 아니었다. 오여은의 집도 부
수려고 하였으나 경허(오여벌)가 애걸하여 단지 문만 부수었다.”6
6 정사(靖社): 어지럽던 사직(社稷)을 편안하게 가라앉힘.
1 김성우, 《광해군 치세 3기(1618-1623) 국가재정 수요의 급증과 농민경제의 붕괴》 103쪽. 대구사학 118, 2015.
2 조선시대에는 영주(榮州)를 영천(榮川)이라 지칭하였다. 대구 근처의
영천(永川)과 혼동하면 안 된다.
3 향회: 조선시대 양반의 지방지배 기구. 조선시대 고을 단위로 운영된
회의체로 ‘향중대회(鄕中大會)’라고도 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역사용어사전 참조.
4 유벌: 유생들이 정한 벌칙.
5 김성우, 《광해군 치세 3기(1618-1623) 국가재정 수요의 급증과 농민경제의 붕괴》 104쪽. 대구사학 118, 2015.
6 계암일록 제3권 380쪽. 역자 신상목, 김용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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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향회는 3월 29일 이후부터 여러 차례 안동 예안에서도열렸다. 계암일록의 저자는 인조반정 후 범 안동권에서 남인 세력
에 의해 대북파가 제거되는 과정을 기록했던 것이다.
오여은은 동생 오여벌의 구제 간청에 의해 엄중한 유벌(儒罰)을면했지만, 결국 1623년 4월에 위리안치(圍籬安置)1당하게 된다. 조
선왕조실록 인조1(계해) 4월 29일 기록은, 오여은에 대해 “양사(사헌부, 사간원)2에서 합계(合啓)3하기를, 오여은은 이이첨(李爾瞻,
1560~1623, 號 觀松)4의 심복인 동시에 정인홍(鄭仁弘, 1536~ 1623,號 來庵)5의 수족으로서 두 역적의 음모와 흉계에 왕래하며 서로
통하지 않은 경우가 없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오여은의 스승이자 사장어른(査丈)6인 영의정 정인홍은 오여은의 처벌에 앞서 4월 3일, 이미 처형을 당했다. 정인홍은 1611년
1 위리안치는 중죄인에 대한 유배형 중의 하나이다. 죄인이 유배지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머무는 집 둘레에 가시가 많은 탱자나무를 돌리고 그 안에 사람을 가둔다. 탱자나무는 전라남도에 많았기 때문에 대개 죄인들은 전라도 지역의 섬에 유배되었다. – 다음 백과.
2 사헌부, 사간원: 사헌부(司憲府)는 법을 담당하는 기관으로 관리의 비행을 조사하는 일종의 사정기관이다. 사간원(司諫院)은 임금에게 간(諫:임금이나 윗사람에게 옳지 못하거나 잘못된 점을 지적하여 고치도록
말하는 행위)을 하는 기관이다.
3 합계: 조선시대 사간원ㆍ사헌부ㆍ홍문관(삼사)가 연명하여 계사를 올리던 일.
4 이이첨은 천하의 간신으로만 그동안 묘사되었다. 그러나 최근 역사학계 일각에서 이이첨에 대해 달리 평가하는 견해가 나오고 있다.
5 정인홍: 남명 조식의 수제자, 문신, 의병장. 과거엔 역적이자 악인으로 묘사되었으나 오늘날 새롭게 평가되고 있다. - 다음 백과.
6 사장(査丈): 사돈댁의 웃어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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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퇴변척소(晦退辨斥疏) 즉,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 1491~1553)과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을 배척하는 상소를 쓴 후,
영남에 포진한 퇴계의 제자들뿐만 아니라 전국의 선비들로부터 거센 반발을 샀다. 급기야 그는 청금록(靑衿錄)1에서 이름이 삭제되
어버렸다. 이렇듯 정인홍에 대한 선비들의 분노는 당시 조선의 지식층을 뒤흔들었을 정도로 컸다. 대북파와 정치적 대립관계에 있던
서인들은 이러한 유생들의 정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반정의 밑거름으로 삼았을 가능성이 있다.
이후 수백 년 동안 조선사회에서 정인홍은 성현(聖賢, 이언적,이황)을 비방한 천하의 나쁜 놈으로 치부되고,
‘정인홍’이라는 이름은 피하고 금기시해야 하는 단어가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자신과 ‘정인홍’과의 관련성을 숨기거나 부인하기도 하였다.참고로, 조선왕조실록 영조5(1729년) 4월 9일자 기록을 보면,
“정인홍의 증손자 가운데 겹눈동자인 사람이 있는데 사람들을 끌어들여 현혹시킨다.”고 신하가 아뢰니, 영조가 정인홍의 증손자를 장
살(杖殺)시키라 명한다.
2 멀쩡한 사람이 정인홍의 증손자라는 이유만으로 죽게 되었으니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정인홍이 죽은지 100년이나 지나도 정인홍과 관련된 사람들에 대한 근거 없는 의심과 경계심이 여전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정인홍 사후에도 ‘정인홍’이라는 이름은 조선왕조실록에 참으로 많이 등장한다. 정인홍의 작위와 시호는 1908년(순종1)에
1 청금록: 조선 시대, 성균관, 향교, 서원 등에 있던 유생의 명부.
2 조선왕조실록. 정보 제공: 오홍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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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르러서야 회복되는데1 그 경위에 대해 조선왕조실록은 다음과같이 기록한다.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과 법부대신 조중응이, 융희 원년(1907년)11월 18일에 받은 조칙에 따라 이름이 죄적(罪籍)에 올라 있는 자
들의 죄명을 벗겨주고 다시 작위와 시호를 회복시킬 것에 대한 안
건을 내각 관제 제7조 제7항에 의하여 논의를 거쳐 상주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재가한다’ 하였다.”
한편,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2에는 오여은은 인조반정으로 위리안치당하였고 그의 아들 홍문관 수찬 오익환에 대해 “폐모론이 흉
악하고 참혹하기 그지없었다.”라고 기술하면서, 오익환이 함경북도
길주(吉州)로 유배 갔다고 기록한다.
3 계해정사록(癸亥靖社錄)은 오익환이 방답진(防踏鎭, 현 전남 여수)으로 정배 갔다고 기록한다.
4
오여벌은 함경도 갑산으로 유배를 간 형님(오여은)을 찾아뵙고 이종사촌 박종무(朴樅茂, 字 季直)5에게 편지를 보냈다. 갑산은 개
마고원에 위치하는데 겨울철이면 영하 몇십 도의 혹한(酷寒)이 엄습하는 곳으로 조선시대 중죄인들의 유배지였다. 이곳이, 사람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험한 오지(奧地)의 대명사로 일컫는 ‘삼수갑산(三
1 조선왕조실록.
2 연려실기술은 실학자 이긍익(1736~1806)이 쓴 역사서다. 연려실기술에는 위리안치된 68명의 명단이 나오는데 그중에 오여은, 오익환 부자가 있다.
3 한국고전종합DB, 역자 임영창.
4 한국고전종합DB, 역자 권태익.
5 박종무: 소고 박승임(嘯皐 朴承任, 1517~1586, 문신, 퇴계의 제자)의 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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水甲山)’의 갑산이다. 오여벌이 형님을 면회하러 가는 여정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오여벌보다 19살 많은 오여은은 아버지와 같은 형님이었을 것이다. 그런 형이 오지에서 고생을 하고 있으니 얼마나 애달팠을까.
오래전 헤어져 오매불망 그리워하던 형님을 직접 만나 뵈었을 때,
오여벌은 기쁨과 슬픔으로 북받쳤을 것이다. 편지 글에는 ‘형님이 쇠하지 않는 모습으로 지내고 있어 다행이다’는 심경도 드러난다.
오여벌은 갑산에서 7일간 형님과 같이 있다가 헤어지는데 훗날 다시 상봉하기를 간절히 바랬다.
1
오여은은 1633년 특사되었다.
2 인조는 1625년(인조3)에 반정으
로 축출된 사람들 중 오여은을 포함한 일부를 사면하고자 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쳤다. 이후 1633년(인조11) 오여은 등 몇 명
에 대해 위리를 철거케 하였다. 이에 대해 사헌부가 반대의 啓(계:임금에게 보고하는 문서)를 계속 올렸음에도 인조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오여은은 1633년 73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3
반정(反正)은 왕조의 정통성은 유지하지만 정도(正道)를 잃은 왕은 교체한다는 의미를 가지는데, 만약 실패할 경우 삼족이 멸해질
1 家五月鄕信頓絕窹寐丰儀戀懷何說遥想履兹新正侍奉萬福深賀深賀生自鐘
城入甲山拜兄於久別之餘悲喜兩至而連床七日又分鴈序此間情事君可默想所
幸伯氏以理自遣容顔不衰暮春意乞由南歸此計若遂相逢不遠矣. 자료 제공:
오홍재.
2 승정원일기, 역자 박승주.
3 오여은이 지은 시서(詩書) 등을 모은 ‘낙애유집(洛厓遺集)’이 있었으나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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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큼 엄중하고 심각한 사건이다. 당시 서인들은 광해군이 배다른
동생 영창대군을 죽였고 계모 인목대비를 폐비하는 폐륜을 저질렀
다는 것을 이유로 반정을 일으켰다. 충효가 조선의 중요한 지배 이
념이었기에 나는 그들의 행위에 일응 수긍이 간다. 하지만 당쟁이
극심하던 그 시절에 광해군이 적통인 영창대군을 죽이지 않았다면
오히려 자신이 죽을 수도 있었다.
개인적으로 인조반정은 패륜의 왕을 몰아내고 정도(正道)를 회복
시킨 사건이 아니라 서인들이 ‘효’라는 명분을 내세워 정권을 쟁취
한 사건이라고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그렇기에 일부 사극에서 묘
사하는 것처럼 광해군이 나쁜 왕이고 정인홍, 이이첨이 천하에 둘
도 없는 간신이라는 생각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역사는 승자의 기
록이라고 하지 않던가.
반정에 성공한 서인들은 조정에서 대북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는
데, 이러한 과정에서 사형당하거나 위리안치된 사람들, 정배(유배)
당한 사람들, 파직당한 사람들, 도망간 사람들은 수없이 많았다. 역
사의 거친 풍랑에 누군가는 권력과 부귀를 잡으며 환호했고 누군가
는 속절없이 휩쓸려 쓰러지며 절망했을 것이다.
당시 우리 집안에는 피바람이 불었으리라. 오운의 장남 오여은
은 정인홍(대북파의 거두)의 문인(門人)이었고, 오여은의 딸이 정인
홍의 손자 정릉(鄭稜, 1590~1625)에게 시집갔다는 점을 보면, 당
시 오여은은 대북의 당파색을 띄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인
조반정으로 오여은, 오익환 부자가 파직당하고 유배를 간 것은 어
찌 보면 자연스러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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