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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익환은 1637년 함경도 유배지에서 사환(赦還, 죄를 사면 받고
돌아오다)1된 후, 고령에서 지냈다. 그러던 중 내암 정인홍의 집안
사람들(오익환의 누님의 시댁)과 왕래하였다가 역모를 꾀한다는 의
심을 받았다. 이 일로 오익환은 전남 여수로 다시 유배를 가게 되
었다.
2 결국, 오익환은 유배를 2번 간 것이다.
인조반정으로 실각한 대북인들은 부, 형제, 친지들이 죽거나 유
배 가는 상황 속에서 자신들의 생존과 가문의 보존을 위해 숨죽이
며 살았다. 그러니 역모를 꾀하는 것은 엄두를 낼 수 없는 상황이
었다. 그럼에도 작은 친목 모임조차 역모를 꾀한다는 의심을 받기
도 했다. 오익환의 2번째 유배는 위와 같은 상황에서 이루어진 일
이었다. 정치가 어지러워지면 잘못이 없는 개인조차 오익환처럼 세
파에 시달리게 된다. 그 이후 우리 집안은 여느 대북인들처럼 서인
과 남인의 견제로 중앙관직으로의 진출을 거의 하지 못했다.
오여은이 1633년 사망한 후 1638년, 오익환이 함경도 유배지에
서 돌아오자 오여은의 처(고령 박씨)는 고령 도진(桃津) 소재 전답
을 5남매에게 분재(分財)3하였다.
4
오익환이 1645년 사망하자 1647년에 분재가 또 이루어졌다(이
때는 얼자도 의령의 전답을 조금 상속받았다).5 이 분재를 기록한
1 김용만, 《오운 종가의 고문서 연구》 69쪽.
2 정보 제공: 오홍재.
3 분재: 가족이나 친척에게 재산을 나누어 줌.
4 김용만, 《오운 종가의 고문서 연구》 91쪽, 퇴계학과 한국문화 제40호.
5 김용만, 《오운 종가의 고문서 연구》 93쪽.
121
화회문기(和會文記)1 발문(跋文, 책의 끝에 간행과 관련된 사항을
간략하게 적은 글)에 자녀별로 맡아야 할 제사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가족 구성원들의 단합을 도모하여 가문의 위기
를 헤쳐 나가려는 조상들의 의지를 엿볼 수 있겠다.
2
한편, 반정의 후폭풍 속에서도 오여은의 동생 오여벌은 무사한
데3
, 오여벌이 중죄인(오여은)의 동생임에도 관직을 유지할 수 있
었음은 연좌제가 시행되었던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의외의 일이다.
1623년 인조반정은 서인이 주도하고 일부 남인(南人)4세력이 가
담한 사건이었다. 반정으로 북인은 몰락했고 남인세력의 중앙 진출
은 활발해졌다. 남인은 1600년대 중․후반에 서인과 예송논쟁으로
권력싸움을 하고, 숙종(재위: 1674∼1720년) 때에도 권력의 중심
에 있다가 갑술환국(庚申換局, 숙종20, 1694년)5으로 권력에서 완
전히 멀어져 버렸다.
오여벌이 반정의 후폭풍을 피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먼
1 화회(和會): 조선시대, 호주가 재산을 분배하지 아니하고 죽었을 때 온
가족이 입회하여 재산 분배에 관하여 합의하던 일. 화회문기(和會文記):
화회를 기록한 글.
2 자료 및 정보 제공: 오홍재.
3 오여벌은 반정 2년 후인 1625년에 창원 부사였음.
4 남인: 조선시대 붕당(朋黨)의 한 정파. 동인(東人)에서 분파하였으며,
학문적으로는 이황(李滉)의 학통을 잇고, 안동을 중심으로 한 영남 남인
(嶺南南人)과 서울·경기권을 주요 근거지로 삼아 활동했던 근기 남인
(近畿南人)을 지칭한다. - 다음 백과.
5 환국은 시국, 판국이 바뀐다는 뜻으로 여기서는 정치권력의 교체를
말한다. 폐비되었던 인현왕후(숙종의 왕비)가 갑술환국 때 복위된다.
122
저, 인목대비의 폐모(폐비)를 주장했던 이들은 반정 후에 서인들에
게 복수를 당했다. 그런데 오여벌은 폐비를 주장하는 여러 백관들
의 정청(庭請)1이 있었던 1618년 1월경 외직에 있어서 이 정청에
참석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게다가 오여벌은 서애 류성룡의
문인(門人)이고, 처의 조부는 학봉 김성일(류성룡, 김성일 모두 퇴계
의 제자로 남인의 중심인물들)이었다. 이러한 여러 사정 덕에 무사
하지 않았을까?
오여벌은 1635년(인조13) 57세의 나이로 창원 임소(任所, 지방
관원이 근무하던 곳)에서 사망했다. 묘소는 영주 山伊洞2에 있다.
오여벌은 남계서원(南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오여벌의 친구, 김광계
(金光繼, 1580 ~1646)가 지은 매원일기(梅園日記)에는 1635년 7월
오여벌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가슴 아파하는 내용이 나온다.
3
1 정청: 세자나 의정(議政)이 백관을 거느리고 궁정에 이르러 큰일을
보고하고 명령을 기다리던 일. – 네이버 사전.
2 일제 때(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산이면’을 ‘이산면(伊山面)’
으로 개칭하였다.
‘이산(伊山)’이라는 명칭은 1572년 건립된 ‘이산서원
(伊山書院)’에서 유래되었다. - 배용호,
‘퇴계의 서원, 이산서원(伊山書
院)’, 영주시민신문.
참고로, 오운은 1600년 6월 이산서원에서 소고 박승임(朴承任, 1517~
1586, 대사간을 역임한 문신, 학자)의 시문집인 ’소고집(嘯皐集)’의 교정
을 봤다. 박승임의 子 박록(朴漉)은 허사렴의 사위로 오운과 동서지간
이다. 퇴계는 박승임을 뛰어난 제자로 평가했다. 퇴계의 편지에 나오는
‘榮有嘯皐 豊有錦溪(영주에는 소고가 있고, 풍기에는 금계가 있다)’의 嘯皐가
박승임이고, 錦溪는 황준량이다.
3 ‘今日又聞, 吳昌原景虛, 又不起疾. 二日之內, 聞二友之訃, 二友皆自少,
情切有同同…’ 오늘 또 들으니 창원 오경허가 또 병으로 죽었다고 한다. 이틀
사이에 두 벗의 부고를 들었는데, 두 벗은 다 어릴 때부터 정이 절친하여 동기와
같았으니… - 유교넷, 역자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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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여벌의 아들 오익엽{吳益熀, 1599~1687, 號 誠齋(성재)}1은
1617년 진사시에 합격했다. 그는 대사간 권태일(權泰一, 1569~
1631)2의 둘째 사위이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생부(오여은)와 친
형(족보상으로는 사촌형) 오익환이 위리안치당하였다. 비록 양부 오
여벌이 살아남았으나 가문이 바람 앞에 등잔불이 된 상황에서 그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내 생각에, 1617년 소과에서 진사가 된 그가
1623년 이후에는 대과에 응시하지 않았을 것이라 추측된다.
1631년 2월 정한(鄭澣, ~1631) 모반 사건3이 일어난다. 이는,
정인홍(1536~1623, 대북의 거두로 1623년 인조반종 때 처형당함)
의 후손인 정한(鄭澣)이 모반을 하려 한다고 고발되어 연루자들이
처벌된 사건이다. 오익엽은 이에 연루되어 4월 4일 잡혀갔다가 4
일 뒤 훈방 조치되었다.
4
계암일록의 저자 김영(金坽)은 이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
하였다.
“성람, 박종형, 오익엽 등 다섯 사람을 금오랑이 잡아갔다.
앞의 사람들은 여러 차례 역적의 공초가 나왔으나 주상이 죄를 묻지
1 학자들 중 간혹 ‘熀’자를 ‘황’자로 하여 오익황이라 국역하기도 한다.
2 권태일은 1630년(인조8) 대사간(大司諫)으로 승진하였다. 명나라 도독
(都督) 황룡(黃龍)의 접반사(接伴使, 외국 사신을 접대하는 임시 관직)로서
모문룡(毛文龍)의 가도(椵島)에 다녀오던 도중에 1631년(인조9) 7월 정주
(定州)에서 객사하였다. – 위키실록사전.
3 정한 모반 사건으로 인해 광해군 시기 득세했던 북인 세력은 권력의
중심에서 완전히 멀어져 버렸다. 인조는 1631년 2월 30일 어전회의에서,
정한이 합천 사람이므로 합천의 수령을 파하고 다른 고을에 합병해야
하나, 합천이 땅이 크고 관리가 필요해서 수령만 파면하고 고을은
그대로 둔다고 했다.
4 승정원일기. 인조9년(1631년) 4월 8일. 한국고전종합DB, 역자 김혜경.
124
말라 하였는데도 대간의 논계가 그치지 않아 이 지경에 미친 것이다.”1
모반이라는 엄중한 사건임에도 사형, 유배가 아닌 가벼운 조치
를 받을 것을 보면 오익엽이 실질적 주도자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역모의 의심만 받아도 바람에 우수수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목숨을 잃거나 유배를 가는 세상에서 오익엽은 무사하였다. 이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일단, 그가 모반 사건의 실질적 가담자가 아니라고 판단되었을
것이고, 그에 더하여 조부가 임란 때 공신이었으며 오익엽의 장인
은 모반사건(1631년) 당시 대사간이었던 권태일(학봉 김성일의 사
위)이라는 점이 감안된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이 사건으로 인해
오익엽 본인은 물론 그 후손들이 관직에 나아감에 있어 어려움을
겪었을 듯하다.
모반 사건 이후 오익엽의 행적에 대해 다음의 기록을 찾을 수
있었다. 1636년 음력 8월 6일 영주에 사는 선비들 중 사마시(司馬
試, 소과)에 합격한 진사와 생원 총 55명이 부용대에 모여, 친목을
다지기 위하여 ‘부용계(芙蓉契)’의 중수(重修) 회합을 가졌다.
2 이
회합의 참석자 명단에 오익엽이 있다.
참고로, 부용계(芙蓉契)는 사마소(司馬所 지방의 생원, 진사들이
1 계암일록: 조선시대 문신 김영(金坽)이 1603년부터 1641년까지 관직
생활과 은거생활을 기록한 일기이다. 辛未年 인조9(1631) 4월 3일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成攬朴宗衡吳益熀等五人, 金吾郞拿去, 前者屢出
賊招, 而自上勿問, 臺諫論啓不已, 以及焉.” - 유교넷, 역자 미상.
2 김태환(영주향토사연구소장), 《부용계(芙蓉契)에 대한 소고(小考)》.
125
조직한 사설기관)에서 만든 일종의 계모임이다. 1555년 퇴계 선생
이 고을의 선비들과 시회(詩會)를 개최하는 등 모임을 가진 것이
부용계의 시작이다. 부용계는 1573년 조정의 금지로 폐지되었다가
1601년 다시 부활되었다.
1
이렇듯 오익엽은 영주에서 별 탈 없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오익엽은 1687년 사망했다. 묘소는 죽유공 묘소 아래이다(墓竹牖公
階下艮坐).2 매원일기(梅園日記)3의 저자 김광계는 1637년 정월에
오익엽과 오여영(오익엽의 숙부)를 만났다고 기록했다. 김광계는
1635년 세상을 떠난 친구(오여벌)의 아들을 만나 무슨 대화를 나
눴을까?
이후 우리 직계 조상들 대부분은 출사(出仕)없이 영주에서 평범
하게 삶을 살아나갔다.
1 김태환,
‘부용계(芙蓉契) 추로지향(鄒魯之鄕)을 꿈꾸다’, 영주시민신문.
2 간좌(艮坐): 간방향(艮方)으로 자리잡고 있다. – 족보.
3 매원일기: 안동 예안에 살았던 광산 김씨 김광계(金光繼, 1580~1646)
가 20대~60대에 걸쳐 쓴 일기.
126
제6장
1600년대 이후 후손들의 삶(1800년대 후반까지)
- 시간의 흐름 속에 남겨진 평범한 자취들
오익엽의 장남 오덕기(吳德基, 1617~)는 족보에 통덕랑(通德郞)1이
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의 사망년도는 알 수 없고, 묘소는 영주
獨照洞에 있다.
오익엽의 차남 오경기(吳慶基, 1623~)는 1654년 생원이 되었
다.
2 홍익한(洪翼漢, 1586~1637)3의 유고집,
‘화포유고(花浦遺稿
)’4에서는 1691년(辛未) 4월에 있었던 장암서원(壯巖書院)5 제향
의식에 생원 오경기가 참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6
1 통덕랑: 조선시대 정5품 이상(上階)의 품계를 지칭하는 말. 직책이 없
이 품계만 있는 경우를 말한다.
2 한국학중앙연구원 [오경기(吳慶基) 인물 정보].
3 홍익한: 문신. 병자호란(1636년) 때 윤집, 오달제와 함께 청나라에 끝
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였고(主戰派, 3학사), 청나라에 끌려가서 죽었다.
4 제5권 부록 ‘壯巖書院奉安祭文’ 집필자 장신(張璶, 1629~1711).
5 장암서원: 1683년(숙종9)에 홍익한 등 3학사를 배향하고자 지은 서원.
영주시 상망동에 있었다고 함. - history.go.kr.
6 한국고전종합DB.
127
김희주(金熙周, 1760~1830)가 쓴 갈천집(葛川集)1에는 ‘초곡세
덕사 봉안문(草谷世德祠奉安文)’이 실려 있다. 이는 영주 초곡(草谷)
의 세덕사(世德祠)2에 고창 오씨 조상들 중 몇 분의 위패를 모시면
서 김희주가 본손(本孫)을 대신해 지은 글이다.
3
위패로 모셔진 사람은 다음과 같다. 三友堂 吳碩福, 竹塢 吳彦毅,
春塘 吳守盈, 竹牖 吳澐, 敬菴 吳汝撥, 寒溪 吳善基(오선기,
1630~1703, 오운의 삼남 吳汝楧의 손자)4이다.
오선기(吳善基, 1630~1703, 오덕기와 항렬이 같다)는 오운의 삼
남 오여영(吳汝楧, 1586~1666)의 손자이다. 오여영의 子 오익전
(吳益烇, 1608~1670)이 영주에서 경북 고령으로 이주하였기에5
오선기는 고령에서 자랐고, 고령 매림서원(梅林書院)에 배향(配享)6
되었다.
1 갈천집: 사(辭)와 서(書), 잡저 따위가 실려 있으며 도학과 예학에 관한
서술도 있다. 서문과 발문이 없어 언제 간행되었는지 확실하지 않다. –
다음 사전.
2 세덕사: 조상 대대로 쌓아온 덕(世德)을 기리기 위해 후손이 세운
사당. 전국에 많이 남아 있다.
3 유교넷, 집필자 미상.
4 한국학중앙연구원
5 오익전(吳益烇)이 영주에서 고령으로 이거하였다. –
派世居碑’(소재지: 고령 죽유종택).
‘高敞吳氏竹牖公
6 배향: 공로나 학덕이 있는 사람의 위패를 문묘, 서원 등에 모심.
128
◈ 오운의 후손들 이주 과정의 개요
1600년대~1700년대에 오운의 후손 중 일부는 의령, 고령, 합천,
산청으로 이주하였다. 이주 과정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오운의 장남 오여은(1561~1633)은 의령에 있던 1591년 31세
로 진사과에 합격했다. 다음 해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의병활동을
하였고, 1613년 대과 급제했는데 거주지는 고령으로 기록되어 있
다. 1615년 오여은의 장남 오익환이 대과에, 1617년 차남 오익엽
이 진사과에 각각 합격하는데 거주지는 역시 고령이었다.
1 이러한
점을 보면 오운의 장남 오여은은 임진왜란(1592년) 즈음에 의령에
서 처가가 있던 고령으로 거주지를 옮긴 것으로 보인다.
2
덧붙여, 고령 출신의 의병장 김면(金沔, 1541~1593, 號 松庵)의
시에 따르면,
3 어느 날 김면과 오여은은 고령 우곡면 문연(文淵)4
에서 만나 시를 주고받으며 놀았음을 알 수 있는데, 당시 오여은의
거처는 처가가 있던 고령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5
1 한국학중앙연구원 [오익엽(吳益熀) 인물 정보].
2 병진보(丙辰譜, 1796년)는 오여은이 성주 노강(星州 蘆江)과 고령 용담
(高靈 龍潭)으로 이거(移居)하였다고 기록한다. 성주의 남쪽에 고령이
있고, 용담은 현 쌍림면 지역을 말한다. 자료 및 정보 제공: 오홍재.
3 松菴先生遺稿卷之一.
汎月文淵。吳隆甫 汝穩 不勝杯酌。枕盤石仰明月而卧。戱吟以贈
矯首何爲仰明月。高人雖醉未忘情。人間着處皆塵土。仰看靑天無限淸。
4 문연(文淵)은 고령군 우곡면의 어느 장소를 말한다. 참고로, 1636년에
건립되어 1707년 서원으로 인정된 문연서원(文淵書院)은 고령 우곡면
월오리(月塢)에 있다.
129
전쟁 중에 한가롭게 시를 읊을 여유는 없었을 것이고, 김면 장
군이 전쟁 중인 1593년에 세상을 떠났으므로 두 사람은 임진왜란
(1592년)이 일어나기 전에 한가로이 교유(交遊, 서로 사귀어 놀거
나 왕래함)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도 오여은이 1592년
즈음 고령으로 이주했으리라 짐작해 볼 수 있다.
한편, 인조반정 직후인 1623년 3월에 대북파 인사들을 처단하
기 위해 열렸던 영주 향회의 기록을 보면, 오여은은 영주에도 집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 오운의 장남 오여은(吳汝檼)이 고령에 처음
살았고, 오여은의 후손 중 일부가 의령, 고령으로 이주하는데 그
이주 과정은 다음과 같다.영중ㆍ
오여은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