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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 오씨

답박계직서

작성자吳恭姙(현정)|작성시간26.06.17|조회수48 목록 댓글 0

答朴季直書답박계직서

 

奴還得惠書노환득혜서憑審冬春以來侍履靜況萬吉빙심동춘이래시이정황만길宛對雅儀완대아의蘇感十分소감십분生尚保軀命생상보구명惟念及雉藿유념급치곽深感眷厚심감권후每於人來遠貺信物매어인래원황신물非至情能至是耶비지정능지시야銘謝不已명사불이府伯給比田若干부백급비전약간日耕而農奴過時而來일경이농노과시이래皆為并作개위병작然若不早霜연약불조상庶得禦冬矣서득어동의幽居中吟成拙句유거중음성졸구以呈覽이정람後辱和以破戀戀之懷如何후욕화이파연연지회여하

 

박계직에게 답하는 편지

 

저는 돌아오는 편에 혜택의 편지를 받아 지난 겨울과 봄 이후로 어른을 모시는생활이 평안하고 모든 일이 길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마치 단정한 모습을 직접 대하는 듯 하여 기쁜 마음이 매우 큽니다.

저는 아직 목숨을 보전하고 있으나 늘 거친 나물과 소박한 음식으로 살아가니 그대의 두터운 정을 깊이 느낍니다.

사람이 올 때마다 멀리서 보내 주는 물건이 있으니 지극한 정이 아니면 어찌 이럴 수 있겠습니까.

마음 깊이 새겨 감사를 그치지 않습니다.

이곳 부사가 약간의 밭을 주어 날마다 갈고 있으나 농사일 하는 종이 늦게 와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만약 서리가 일찍 내리지 않는다면 겨울을 견딜 양식은 얻을 수 있을 듯합니다.

한편 외로운 거처에서 졸렬한 시 몇 구를 지어 보냈으니 보시고 뒤에 화답해 주어 이 그리운 마음을 조금 풀어 주시면 어떻겠습니까.

 

이 편지는 유배지에 있던 낙애가 이종사촌 박계직(박종무)에게 보낸 답서로, 친족 간의 정과 유배 생활의 현실을 동시에 보여준다. 그는 상대의 안부를 듣고 기뻐하면서도, 자신은 거친 음식으로 연명하며 밭을 일구어 겨울을 대비하는 궁핍한 처지를 담담하게 전한다. 특히 먼 곳에서 보내오는 작은 선물에도 깊이 감사하는 모습에서 친족 간의 두터운 정이 드러난다. 글의 말미에서는 유배지에서 지은 시를 보내며 화답을 청하는데, 이는 외로운 삶 속에서도 시문을 통해 정을 나누려는 선비적 교유의 모습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辭司諫院司諫疏사사간원사간소

 

伏以臣歛迹遐土복이신감적하토粗守自靖之義조수자정지의頓絶黨也之念돈절당야지념而累逋恩命이루포은명罪當萬死罪當萬死千萬不意천만불의院除旨又下간원제지우하此際臣誠驚惶感激차제신성경황감격不敢坐違불감좌위詣闕帶職未幾예궐대직미기特蒙恩暇특몽은가歸省病父귀성병부則症勢奄奄칙증세엄엄似不保朝夕사불보조석人子情理인자정리暫不忍側잠불인측而身冒言地이신모언지不可滯外불가체외故玆敢仰瀆於孝理之下고자감앙독어효리지하伏乞聖慈矜察臣之情狀복걸성자긍찰신지정장遞臣職名체신직명以安私分이안사분俾遂終養비수종양千萬祈懇之至천만기간지지

 

사간원사간을 사직하는 상소

 

삼가 아룁니다. 신은 변방에 몸을 숨기고 지내며 겨우 스스로 몸을 지키는 의리를 따르려 했고 당파에 관련되는 생각을 끊었습니다.

그럼에도 여러 차례 내린 은명에 응하지 못했으니 그 죄는 만 번 죽어도 마땅합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사간원에 제수하는 명이 다시 내려 신은 진실로 놀라고 황송하여 감히 앉아서 어기지 못하고 대궐에 나아가 직책을 맡았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특별히 은혜로운 휴가를 받아 병든 아버지를 살피러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병세가 매우 위독하여 아침저녁을 보장하기 어려운 지경입니다.

사람의 자식 된 마음으로 잠시도 곁을 떠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신은 언관의 자리에 있으니 밖에 오래 머무를 수도 없습니다.

이에 감히 를 숭상하는 성상의 정치 아래에서 이 사정을 아룁니다.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신의 사정을 가엾게 살피시어 신의 직명을 체직하여 사사로운 분수를 편안하게 하시고 마침내 부모를 봉양하게 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이 상소는 화자가 사간원 사간으로 재직할 때 부친의 병환을 이유로 사직을 청한 글이다. 그는 언관의 직책을 맡은 책임과 자식으로서 부모를 봉양해야 하는 도리 사이에서 갈등하는 심정을 토로한다. 특히 인자정리人子情理 / 잠불인측暫不忍側이라는 구절은 효를 중시하던 조선 선비의 윤리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동시에 신모언지身冒言地 / 불가체외不可滯外라는 표현은 언관으로서 직책을 가볍게 여길 수 없다는 책임 의식을 드러낸다. 전체적으로 이 글은 충과 효 사이에서 고민하는 사대부의 도덕적 자의식을 잘 보여주는 상소문이라 할 수 있다.

 

大明皇子誕生賀箋대명황자탄생하전 代作대작명나라 황자 탄생의 상서로운 징조와 온 나라의 기쁨, (대신 지은 글)

 

大電繞斗 대전요두

큰 번개가 북두칠성을 휘감으니

旣致四海之休祥 기치사해지휴상

이미 온 사해에 아름다운 길조를 가져왔고

鳯頒綸 봉반륜

봉황 같은 조서가 반포되니

更稱一邦火慶 갱칭일방화경

온 나라가 다시금 큰 화경을 칭송합니다.

歡均朝野 환균조야

기쁨은 조정과 민간에 고루 퍼지고

𠶮溢臣民 희일신민

즐거움은 모든 신하와 백성에게 넘쳐납니다.

恭惟星拱北斗 공유성공북두

공경히 생각건대, 뭇 별이 북극성을 받들듯

恪守東𡈽 각수동토

삼가 동쪽 땅을 지키며

畏天威而𥁞禮 외천위이진례

하늘의 위엄을 두려워하여 예절을 다하며

善述善承 선술선승

조상의 업적을 잘 계승하고 발전시키시니

慕華祝而致誠 모화축이치성

중화를 사모하여 축원을 올림에 정성을 다함이

無怠無斁 무태무역

게으름도 없고 싫증 남도 없습니다.

屬兹夏后之迪景 촉자하후지적경

마침 하나라 우왕과 같은 좋은 경사를 만나니

便周王之篤 편주왕지독

곧 주나라 왕실의 두터운 복과 같습니다.

㐲念弓馬微才 복념궁마미재

엎드려 생각건대, 는 활 쏘고 말 타는 미천한 재주로

屛𦒋重寄 병한중기

나라의 변방을 지키는 중한 임무를 맡아

迹滯遐𡈽 적체하토

자취가 먼 변방 땅에 머물러 있습니다.

班𨿽阻扵駿奔 반수조어준분

비록 대열에 끼어 달려가 뵙지는 못하나

心懸蓂階 심현명계

마음은 대궐 명계에 걸려 있으며

拜即勤扵燕賀 배즉근어연하

절하며 잔치의 축하를 올림에 정성을 다할 뿐입니다.

 

대명 황자 탄생 하전과 같은 문서는 일개 신하가 명나라 황제에게 보낼 수 있는 격식이 아니다. 이 글들의 성격과대작이라 불리는 이유를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

 

1. 대작代作인가? (주체의 차이)

 

국왕을 대신함: 조선 시대에는 문장력이 뛰어난 문신들이 국왕의 명을 받아 중국 황제에게 보내는 표전表箋이나 국내용 교서敎書를 대신 집필하였다.

공식 외교 문서: 황자 탄생 축하글은 조선 국왕(광해군)의 명의로 명나라 황제에게 전달되는 공식 외교 문서이다. 화자는 이 문서의 실제 문장을 구성한작필자역할을 한 것이다.

신하의 본분: 문신에게 임금의 글을 대리 집필하는 것은 가문의 영광이자 그 사람의 학문적 깊이와 문장력을 국가가 인정했다는 증거이다.

 

2. 황자 탄생 하전이 '광해군 대작'인 이유

 

시대적 정황: 화자가 활동한 핵심 시기는 광해군 재임기이다. 당시 명나라에서 황자(훗날의 천계제 등)가 탄생했을 때, 조선 조정은 외교적 우호 관계를 위해 격식 높은 축하문을 보내야 했다.

문구의 증거: 글 속의각수동토(恪守東土, 삼가 동쪽 땅을 지키다)’라는 표현은 조선의 임금이 황제에게 자신을 낮추어 부를 때 쓰는 전형적인 외교적 수사이다. 이는 화자 개인의 고백이 아니라 광해군의 입장을 대변한 것이다.

 

이 글은 화자의 문장력을 빌려 광해군이나 조선 정부가 대외적으로 발표한 공식 성명서라고 이해가 된다.

正朝賀箋정조하전 代作대작 새해 아침의 상서로운 풍경 (대신 지어준 글)

 

閶闔開黄道 창합개황도

하늘 문이 열리고 황도 열리니,

聿新鳯暦之元 율신봉력지원

봉력의 으뜸인 정월 초하루가 드디어 새롭고.

合殿凝清香 합전응청향

대궐 안 전각에는 맑은 향기가 서려 있는데,

誕應龍飛之慶 탄응용비지경

성군께서 즉위하신 경사에 크게 응답하도다.

乾坤交𣳾 건곤교태

하늘과 땅의 기운이 조화롭고,

朝野均歓 조야균환

조정과 재야가 고루 기뻐합니다.

恭惟苞従祥風 공유포종상풍

공경히 생각건대, 상서로운 바람을 머금으시고,

徳與和氣合 덕여화기합

덕은 온화한 기운과 합치되시니.

代天理 대천리

하늘을 대신해 다스리시어,

囿萬民扵金甌 유만민어금구

온전한 금구안에 모든 백성을 품어 기르시고.

革𦾔鼎新 혁구정신

낡은 것을 고쳐 새롭게 하시어,

調一元扵玉燭 조일원어옥촉

사계절의 기운을 옥촉처럼 조절하셨습니다.

兹當建春之일 자당건춘지일

이제 봄이 세워지는(입춘 무렵 새해) 날을 당하여,

肇見行夏之時 조견행하지시

비로소 하 나라의 역법을 따르는(올바른) 때를 보게 되었습니다.

㐲念濫佩銅魚 복념남패동어

엎드려 생각건대, 제가 외람되게 동어를 차고,

叨守玉星 도수옥성

과분하게도 옥성을 지키고 있어.

跡阻鵷列 적조원열

자취가 신하들의 원열과 떨어져 있는지라,

未忝仙仗之陪 미첨선장지배

임금을 호위하는 행차(선장)에 배알하지 못하였으나.

戀㘦龍樓 연절용루

간절한 마음은 용루을 향해 있으니,

敢献華封之祝 감헌화봉지축

감히 화 땅의 봉인이 올렸던 장수의 축원을 올립니다.

 

이 글은 화자가 중앙 관직이 아닌 지방의 수령으로 나가 있을 때 쓴 것으로 보인다.‘남패동어(수령의 증표)’‘도수옥성(지방의 고을을 맡아) 구절이 이를 증명한다.새해를 맞아 직접 대궐에 나아가 인사드리지 못하는 미안함과, 멀리서나마 임금의 통치가 온 나라를 평화롭게(금구, 옥촉) 만들었음을 찬양하는 정중한 문장력을 보여준다.

 

追崇賀箋추숭하전 代作대작추숭 하례 전문 (대신 지은 글)

事亡如存 사망여존

돌아가신 분섬기기를 살아 계신 분처럼 하니,

既𥁞追孝之道 기진추효지도

이미 소급하여 다하는 효도의 도리를 다하셨고.

尊親為大 존친위대

어버이를 높이는 것을 크게 여기시어,

特舉進號之儀 특거진호지의

특별히 존호를 올리는 의례를 거행하시니.

日月増光 일월증광

해와 달이 더욱 빛나고,

神人咸𠶮 신인함희

신명과 사람이 모두 기뻐합니다.

恭惟太任生聖 공유태임생성

공경히 생각건대, (대비께서는) 태임처럼 성군을 낳으셨고,

寕考傅家 영고부가

돌아가신 아버님(선왕)께서는 가업을 전하시어,

德無間然 덕무간연

그 덕에 비난할 틈(결점)이 없으셨습니다.

天與子而與子 천여자이여자

하늘이 자식을 점지하고 또 자식을 주었으니,

尊之至也 존지지야

높임이 지극함이며.

舜事親以事親 사친이사친

순 임금이 어버이를 섬긴 도리로 어버이를 섬겨,

爰崇號扵两宫 원숭호어양궁 

이에 양궁에 호를 높여 올림으로써,

俾観徳扵七廟 비관덕어칠묘

칠묘에서 그 덕을 살피게 하셨습니다.

㐲念跡阻遐逺 복념적조하원

엎드려 생각건대, 제 자취는 멀리 떨어져 있고,

運值休明 운치휴명

운수는 태평성대를 만났으나.

聖孝風行 성효풍행

성상의 효성이 바람처럼 유행함에,

空懐小人之草 공회소인지초

소인(백성)의 마음으로 바람에 쏠리는 풀처럼 축하를 품을 뿐.

微誠燕賀 미성연하

미천한 정성으로 잔치를 축하드리며,

未列大夫之筍 미열대부지순

대부들의 행렬에는 끼지 못하였습니다.

이 글은 선왕이나 왕실 선조에게 존호를 올리는 추숭 의식을 축하하는 하례 전문이다. 글에서는사망여존事亡如存의 유교적 효 사상을 바탕으로 성왕의 효도를 강조하고, 태임과 순임의 고사를 들어 왕실 덕통의 정당성을 찬양하였다. 또한 지방에 있어 조정의 하례 의식에 참여하지 못하는 신하의 처지를 겸손하게 밝히면서도 성상의 효치孝治를 기리는 충정 어린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정조하전이나추숭하전등도대명 황자 탄생 하전대작과 같이대작이다. 그러면 어떻게 화자는 지방 수령으로 있을 때 왜대작했을까? 의문을 가지게 된다. 즉 화자의 지방 수령직은 김천 찰방이 유일하다. 1590년 사마시에 입격 이후 1613년 대과 급제하여 조정에서 청요직인 홍문관에 근무했다. 대과 이전 화자의 문장력을 조정 대관들도 익히 알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지방관으로서의 대작: 화자가 지방 수령으로 있을 때, 그 지역의 관아를 대표하여 조정에 올리는 글을 직접 썼거나, 혹은 조정의 다른 고위 관료가 임금에게 올릴 글을 문장력이 좋은 화자에게 부탁했을 수 있다.

집단적 의례: 조선의 정치는 문장文章으로 이루어졌기에, 격식이 필요한 모든 국가 행사에는 이처럼대신 지어주는전문 문장가가 반드시 필요했다.

 

4. 화자의 위상

화자의 문집에 이러한대작代作들이 많이 실려 있다는 것은, 그가 당시 북인 정권 내에서 국가의 공식적인 목소리를 담당했던 핵심 문장가였음을 보여준다. , 그의 붓 끝에서 광해군의 외교적 수사와 정치적 명분이 완성되었던 것이다.

요컨대, 이 글들은 화자의 문장력을 빌려 광해군이나 조선 정부가 대외적으로 발표한 공식 성명서라고 이해하면 정확하다.

 

 

祝祭文축제문

 

西川祈雨文서천기우문金泉時김천시. 서천에서 비를 기원하며. 김천 재임시

 

今兹旱魃 금자한발

올해 가뭄의 신(한발)

胡為厲矣 호위려의

어찌 이토록 사나운가.

火月炊天 화월취천

불같은 달이 하늘을 달구고

赫炎鑠地 혁염삭지

붉은 불꽃같은 더위가 땅을 녹일 듯하니

苗而不秀 묘이불수

싹은 돋았으나이삭을 패지 못하고

黍稷其萎 서직기위

기장과 피는 시들어가는구나.

大命近止 대명근지

백성의 목숨이 다하게 되었으니

哀我民斯 애아민사

슬프다, 우리 백성들이여!

承命不職 승명부직

명을 받들었으나 직분을 다하지 못했으니

咎在余躬 구재여궁

그 허물은 내 몸에게 있도다.

不給𨿽助 불급수조

비록 돕고자 하나 미치지 못하고

省耕無㓛 성경무공

농사를 살피려 해도 공력이 없구나.

登場已决 등장이결

추수(登場)를 포기함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黎庻決誰因 여서결수인

백성들은 이제 누구를 의지하겠는가?

惟我川靈 유아천

오직 우리 서천의 신령이시여,

淵潛而神 연잠이신

깊은 못에 잠겨 계신 신령스러운 분이시여!

霈然下澤 패연하택

비를 쏟아붓듯 은택을 내리시어

冀蘓民物 기소민물

백성과 만물을 다시 살려주시기를 바라나이다.

 

화자가 선조宣祖 시절 김천찰방金泉察訪을 역임할 때 기록이다.

이 기우제문은 그가 현장에서 직접 백성들의 굶주림을 목격하며 쓴 글이다. 앞서 보신황자 탄생등의 화려한 국가적 행사용 글과는 달리,“애아민사哀我民斯, 내 백성이 슬프다와 같은 구절에서 수령으로서의 진심 어린 고뇌가 느껴진다.

 

北山祈雨文북산기우문 金泉時 김천시북산 산신에게 비를 기원하며. 김천 재임시

 

時丁長飬 시정장양

때는 바야흐로 (곡식이) 자라나야 할 계절인데

魃何肆虐 발하사학

가뭄의 귀신은 어찌 이리도 포학한가.

赫日泉果 혁일천과

붉은 태양은 샘물을 말려버리고

山川滌滌 산천척척

산과 들은 씻어낸 듯 바싹 말랐으며

田疇龜坼 전주구탁

논밭은 거북등처럼 갈라졌으니

勢將無麥 세장무맥

형세가 장차 보리 수확조차 없게 되었도다.

食乃民天 식내민천 

먹는 것이 곧 백성에게는 하늘이거늘

失天何托 실천하탁

하늘(먹을 것)을 잃었으니 어디에 의탁하겠는가?

由余不職 유여부직

이는 내가 직분을 다하지 못한 탓이니

致災于民 치재우민

백성에게 재앙을 입혔도다.

責實任余 책실임여

실로 그 책임은 나에게 있으니

何辜今人 하고금인

지금 이 백성들이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恭惟岳靈 공유악령

공경히 생각건대, 산신령이시여,

鎮兹邊𡈽 진자변토

이 변방의 땅을 진수(鎭守)하시며

澤民利物 택민이물

백성에게 은택을 입히고 만물을 이롭게 함에

施恵溥溥 시혜부부

베푸시는 은혜가 넓고도 깊으셨거늘

今胡不然 금호불연

어찌 지금은 그렇지 아니하신가?

𠈷民塡𡎙 구민전구

백성들이 굶어 죽어 구렁텅이에 메워지게 되었으니

願澍甘霖 원주감림

바라건대 단비를 쏟아부어

蘓枯潤涸 소고윤학

시든 것을 살리고 마른 곳을 적셔주소서.

 

문학적 특징과 감상

 

화자는 이 글에서나의 부덕함(유여부직由余不職)’백성의 무고함(하고금인何辜今人)’을 강하게 대비시켰다. 지방관으로서 재앙의 원인을 자신에게 돌리는 전통적인 유교적 책임 의식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산천척척山川滌滌이나 ‘소고윤학蘓枯潤涸'’같은 대구對句를 통해 가뭄의 시각적 이미지와 비를 바라는 간절한 소망을 리듬감 있게 표현했다.

특히 식내민천食乃民天(먹는 것이 백성의 하늘) 같은 표현은 목민관 문서에서 아주 중요한 문장이다.

 

화자의 김천 시절 기록들은 이처럼 민생의 고통을 함께하는 관리로서의 면모를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서천과 북산, 강과 산의 신들에게 기우제를 지내면서, 백성을 이롭게 해 온 덕을 상기시키며 단비를 내려 백성과 만물을 소생시켜 줄 것을 간절히 기원하고 있다.

 

祭外舅鶴巖朴公廷璠文제외구학암박공정번문

 

惟我尊靈유아존령, 綺紈中韋布기환중위포, 窮養理達궁양리달夙抱大志숙포대지, 不求諸聞불구제문蘊經濟而莫施온경제이막시, 鄕稱善士향칭선사, 人為憚友인위탄우胸中古今흉중고금, 左右畫史좌우화사一室白芳일실백방, 無塵萬物무진만물, 孰干其志숙간기嗟小子芳贅門차소자방췌문, 辱知獎者三十載욕지장자삼십華十之下화십지하,

共避兵공피병服夷險而不貳복이험이불이哀哀難諶者天애애난심자芳一疾三月방일질삼월芳為崇客방위숭객, 萘京奔哭後人내경분곡후顧情義고정의, 芳增忸怩방증뉴니我輩無祿아배무록, 芳羽毛零落방우모령낙剖腸割腎者부장할신자, 非獨為私비독위사遠大哭芳軒昂氣休원대곡방헌앙기휴휴, 芳坦儀九原杳방탄의구원묘芳不可復覩방불가, 警余慵경여용芳伊誰几席依然방이수궤석의연, 人事已非인사이鶴山生哀학산생애, 芳江月含悲방강월함비奠菲薄전비박, 芳靈庶幾歆格恩방령서기흠격은

 

장인학암 박공 정번에게 올리는 제문

 

삼가 높으신 영령이시여. 비단과 화려함 속에서도 베옷의 뜻을 지니고 가난 속에서도 도리를 기르시어 이치에 통달하셨습니다.

일찍이 큰 뜻을 품으셨으나 세상에 이름을 구하지 않으셨고 경세의 재주를 품고도 끝내 펼치지 못하셨습니다.

고을에서는 선한 선비라 칭송하였고 사람들은 벗으로 삼기를 공경하였습니다.

가슴속에는 고금의 학문이 가득하여 곁에는 그림과 역사책이 놓여 있었고 한 방에는 맑은 향기만 가득하여 티끌 하나 없었으니 세상의 만물이 어찌 그 뜻을 흔들 수 있었겠습니까.

, 어린 저는 공의 집안에 사위로 들어와 삼십 년동안 과분한 사랑과 인정을 입었습니다.

난리의 세월 마흔도 되기 전의 나이에 함께 병란을 피해 떠돌며 험난함과 평탄함을 겪어도 마음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슬프도다. 하늘의 뜻은 믿기 어려워 공께서 한 번 병을 얻으신 지 세 달 만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저는 마침 서울에 머물다 급히 달려와 곡하였으나 뒤늦은 슬픔에 정과 의리를 돌아보니 부끄러움만 더할 뿐입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복이 없어 이제 공의 깃털 같은 덕망도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가슴을 가르고 창자를 끊는 듯한 슬픔은 비단 사사로운 정 때문만이 아닙니다.

멀리서 크게 통곡하니 공의 기상은 예전처럼 당당하건만 이제 구천아래로 가시어 그 모습 아득합니다.

다시는 뵐 수 없으니 게으른 저 자신을 경계하게 됩니다.

평상과 자리는 여전히 남아 있으나 세상 인사는 이미 달라졌습니다.

학산에는 슬픔이 일어나고 강 위의 달빛도 비통함을 머금었습니다.

삼가 변변치 못한 제물을 올리오니 영령께서 흠향하시기를 바라옵니.

 

은 제문에서 사용하는 자칭 겸양어(자기 지칭)로 보인다.

문장 사이에 의도적으로 단절된 제문 리듬이 있음.

 

이 글은 화자가 장인인 학암 박공의 죽음을 애도하며 지은 제문이다. 글에서는 장인의 청빈한 삶과 학문적 수양, 그리고 세상에 드러나지 못한 경세의 재능을 높이 평가한다. 특히 삼십 년 동안 장인과 맺어 온 정과 전란 속에서 함께 고난을 겪은 기억을 회고하며 깊은 애통함을 드러낸다. 마지막에는 스스로를 경계해 주던 어른을 잃은 상실감과 함께 학산과 강월까지 슬픔을 함께하는 자연의 이미지로 비애를 표현하여 제문의 정서를 더욱 깊게 하고 있다.

마지막 구절 학산생애鶴山生哀 / 강월함비江月含悲 이 표현은 조선 제문에서 매우 아름다운 애도 표현이다.

 

感樹齋朴公汝樑文감수재박공여량문

 

嗚呼惟靈오호유령胡至於斯호지어사昔日赴召석일부소國有生氣국유생기今也不幸금야불행天何不遺천하불유早事詩書조사시서立定脚跟립정각근摳衣函丈구의함장餘力學問여력학문正色立朝정색립조霜臺淸肅상대청숙危言動天위언동천鬼蜮膽落귀역담낙嗚呼哀哉오호애재吾道其窮오도기궁斯人有疾사인유질孰云仁壽숙운인수天亦難必천역난필有歿以正유몰이정念軫楓宸염진풍신異數自天이삭자천終是聖恩종시성은風露丹㫌풍노단정湖嶺幾日호영기일哭奠菲薄곡전비박有淚如血유루여혈幽明雖隔유명수격精爽不昧정상불매靈其格思령기격사慰我心痗위아심매

 

감수재 박여량에 올린 제문

 

아아, 신령이시여! 어찌하여 이토록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입니까? 지난날 부름을 받아 조정에 나아가셨을 때는 나라에 생기가 돌았건만, 지금 이렇게 불행한 일을 당하니, 하늘도 어찌하여 그대를 버리셨단 말입니까? 젊은 시절부터 시서詩書를 익히며 학문에 힘써, 학문을 닦는 데에 힘을 다하셨고, 정직한 자세로 조정에 서서 사간원의 기풍을 맑고 엄숙하게 하셨습니다. 위태로움을 무릅쓰고 바른말을 하여 하늘을 감동시키셨고, 그 정론에 간사한 무리들이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아아, 우리 도는 이제 막히고 마는 것입니까? 그대에게 병이 닥쳤으니, 누가 장수와 복덕을 논할 수 있겠습니까? 하늘의 운수는 헤아리기 어려운 것이지만, 임금께서는 끝내 크나큰 은혜를 내리셨습니다. 바람과 이슬이 붉은 조정(단지丹墀)에 스미는 이때, 호남湖南과 영남嶺南 사이 먼 길을 오고 가고 하였습니다, 당신의 죽음을 애도하는 제사를 올리니, 눈물은 마치 피처럼 흐릅니다. 비록 이승과 저승이 갈라져 멀어졌으나, 그대의 정신과 기백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신령이시여, 이 자리에 강림하시어, 남아 있는 우리들의 애통한 마음을 위로해 주소서.

 

 

堠人傅후인부

 

堠人姓張후인성장, 名栍명생字立之자입지山陽人也산양인야其先有直躬者기선유직궁자事夏后氏사하후씨有功於通九道之時유공어통구도지시,因掌道路인장도로子孫世襲焉자손세습언秦之五大夫진지오대부漢之大樹將軍한지대수장군皆其後也개기후야自此其苗裔散居於山南水北자차기묘예산거어산남수북, 宗族遍天下종족편천하分派雖遠분파수원同出一源동출일원而後屬漸疏이후속점소居不共井거불공정在一道者재일도자或五里혹오리或十里혹십리或三十里而處혹삼십리이처本是同根본시동근而相視如路人焉이상시여로인언栍為人생위인相貌軒軒상모헌헌質直少文질직소문, 不能隨人桔橰불능수인길고又其性含默寡言語우기성함묵과언어愛顰笑애빈소喜怒不形於色희로불형어색雖見高官大人수견고관대인藐之不顧 막지불고,直一木強人耳직일목강인이人以強項令目之인이강항령목지世居道左세거도좌汨沒於車塵馬足之間골몰어차진마족지간而眼空一世이안공일세閱人多矣열인다의賓旅之東西行過其廬者빈여지동서행과기로자雖不接殷勤之歡수불접은근지환皆知其某也개지기모야忠某也충모야詐某也사모야賢某也현모야佞某也녕모야, 而不敢掛諸齒牙이불감괘제치아以至毀譽得喪이지훼예득상一不動其心일불동기심聽而不聞청이불문視而不見시이불견中立不倚중립불의, 無屈身阿世之態무굴신아세지태, 真儼然有德者之氣象也진엄연유덕자지기상야是以邦有道而不廢시이방유도이불폐邦無道而免刑방무도이면형無偏無私무편무사不比不黨불비불당雖舉世欣慶수거세흔경而慶不與焉이경불여언雖四海憂患수사해우환而患不及焉이환불급언睥睨天地비예천지, 寄傲一世기오일세, 使迷道者知返사미도자지반窮道者不哭궁도자불곡豈不誠毅然大丈夫哉개불성의연대장부재當其干戈亂地당기간과란지兵燹滔天병선도천所謂猛士勇夫소위맹사용부世臣食祿者세신식록자皆望風股慄개망풍고율而栍奮不顧身이생분불고신露宿風餐로숙풍찬, 長立道上장립도상雖未嘗有汗馬執銳之勞수미상유한마집예지로固守封疆之志고수봉강지지不屈於人불굴어인櫛風沐雨즐풍목우頗有指路向道之功파유지로향도지공而徙薪者無恩澤이사신자무은택以倔強爭功者言之이굴강쟁공자언지不無拔劍擊柱之忿불무발검격주지분, 而終始不伐이종시불벌不露辭色불로사색能繼乃祖大樹謙退之遺風也능계내조대수겸퇴지유풍야栍身居草澤생신거초택雖無立登要路之榮수무립등요로지영而生長於匠石之門이생장어장석지문遵守繩墨준수승묵不枉一步불왕일보守口如瓶수구여병, 效金人之三緘효금인지삼함 憎茲多口증자다구慎樞機之開闔신추기지개합加以係聯茂族가이계련무족知名當世지명당세人皆仰之인개앙지

嘗有言曰상유언왈:「士立於世사립어세雖未得躋斯世於康衢擊壤之美수미득제사세어강구격양지미, 而使懷寶迷邦之人이사회보미방지인皆歸於大中至正之道개귀어대중지정지도, 無一夫窘步於侯路之患者矣무일부군보어후로지환자의。」直道難容직도난용, 卒老於道졸로어도,終不展行道之志종불전행도지지惜哉석재

史臣曰사신왈君子哉若人군자재약인木訥哉若以所富者道목눌재약이소부자도所乏非時소핍비시卓立不阿탁립불아史魚之直사어지직處溷不污처혼불오, 有道之智유도지지含章自珍함장자진,內而不出내이불출循道守轍순도수철後人可則후인가칙

 

후인

길을 지키는 사람의 성은 장이고 이름은 생이며 자는 입지立之, 산양 사람이다.

 

그의 선조 가운데 직궁直躬이라는 이가 있어 하후씨夏后氏를 섬겼는데,아홉 갈래 길을 통하게 하던 때에 공을 세워 이로 인해 도로를 맡는 일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 자손들이 대대로 그 일을 이어받았다. 진나라의 오대부五大夫와 한나라의 대수장군大樹將軍 또한 모두 그 후손이라 한다.

 

그 뒤 그 후예들이 흩어져 산의 남쪽과 물의 북쪽에 살게 되었고, 종족은 천하에 널리 퍼졌다. 비록 갈래가 멀어졌으나 모두 한 근원에서 나왔다. 그러나 뒤로 갈수록 서로의 왕래가 점차 뜸해져 같은 우물을 쓰지 않고, 같은 길에 살면서도 어떤 이는 다섯 리, 어떤 이는 열 리, 어떤 이는 삼십 리나 떨어져 살았다. 본래는 같은 뿌리에서 나왔지만 서로를 바라보면 마치 길 가는 사람을 대하듯할 뿐이었다.

은 사람됨이 풍채가 훤칠하고 기질이 곧으며 꾸밈이 적었다. 사람을 따라 아첨하거나 세상 풍속에 영합하지 못하였다. 또한 성품이 말이 적고 침묵을 좋아하였다. 기뻐하거나 노여워함을 얼굴빛에 드러내지 않았으며, 비록 높은 벼슬아치나 권세 있는 사람을 만나더라도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겨 공손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그저 곧고 강직한 나무와 같은 사람이었을 뿐이다. 사람들은 그가 고집이 세고 굽히지 않는다고 여겨강항령強項令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그는 대대로 길가에 살면서 수레의 먼지와 말발굽 사이에서 묻혀 살았지만, 세상을 비워 보는 마음을 지니고 사람들을 많이 겪어 보았다.동서로 오가는 나그네들이 그의 집 앞을 지나갈 때 비록 정성스럽게 맞이하는 환대는 없었으나, 모두가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다.

 

누가 충성스럽고, 누가 간사하며, 누가 어질고, 누가 아첨하는지를 속으로는 분명히 알았지만입에 올려 말하지 않았다.세상에서 칭찬을 받거나 헐뜯음을 당하고, 얻거나 잃는 일에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다. 들어도 듣지 않는 듯하고 보아도 보지 않는 듯하여, 한가운데 서서 어느 편에도 기대지 않았다. 몸을 굽혀 세상에 아부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으니, 참으로 덕 있는 사람의 기상이 있었다.

 

그러므로 나라에 도가 있을 때에도 버림받지 않았고, 나라에 도가 없을 때에도 형벌을 면할 수 있었다.치우침도 없고 사사로움도 없으며, 편당을 짓지도 않았다.

 

온 세상이 기뻐할 때에도 그 기쁨에 함께하지 않았고, 온 천하에 근심이 가득할 때에도 그 근심에 휩쓸리지 않았다. 천지를 굽어보며 한 세상을 비웃듯 살아가니,길을 잃은 사람은 그를 보고 돌아올 줄을 알았고, 궁지에 몰린 사람도 그를 보고는 통곡하지 않았다.

 

참으로 굳세고 의연한 대장부라 할 만하지 않겠는가.전쟁이 일어나 난리가 천지를 뒤덮었을 때,세상에서 맹장이라 불리던 용사들이나 대대로 녹을 먹던 신하들은 바람 소리만 들어도두려워 떨었다.

 

그러나 생은 몸을 돌보지 않고 나아가 들판에서 바람을 맞으며 밤을 지새우고 길 위에 서 있었다.비록 말에 올라 창을 잡고 싸운 공은 없었지만 국경을 지키는 마음으로 굳게 서 있었다. 바람을 맞고 비를 맞으며 사람들에게 길을 가리켜 준 공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남의 집에 불이 나기 전에 장작을 옮겨 화를 막아 준 사람에게는 은혜가 돌아가지 않는 법이다.억울함이 없지 않았고 칼을 뽑아 기둥을 치고 싶은 분노도 있었으나, 내 공을 자랑하지도 않고 얼굴빛에 드러내지도 않았다. 이는 조상인 대수장군이 지녔던 겸손하고 물러서는 유풍을 이어받은 것이었다.

 

은 비록 초야에 살면서 높은 벼슬길에 오르는 영광은 없었지만, 장인과 석공의 집안에서 자라나 규범과 법도를 지켰다. 한 걸음도 그릇되게 내딛지 않았으며, 입을 지키기를 병마개처럼 하여 금인金人이 입을 세 번 봉했던 고사를 본받았다. 말 많은 것을 미워하여 말의 문을 여닫는 데 매우 신중하였다. 또한 널리 사람들과 교류하여 그 이름이 당대에 알려졌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그를 우러러보았다.

 

그는 일찍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선비가 세상에 서서 비록 세상을 태평한 길로 이끌어 격양가를 부르게 하는 공을 이루지는 못하더라도, 보배를 품고 나라를 어지럽히는 사람들을 모두 바른 길로 돌아오게 하여 한 사람도 길 위에서 발걸음이 막히는 일이 없게 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그러나 곧은 길은 세상에 용납되기 어려운 법이다.그는 결국 길가에서 늙어 죽었고,세상을 바로잡으려던 뜻을 끝내 펼치지 못하였다. 애석한 일이다.

사관이 말하였다.“군자다운 사람이로다. 겉으로는 말이 적고 둔해 보이나 마음속에 간직한 것은 도였다. 부족한 것은 시대일 뿐이다.높이 우뚝 서서 아첨하지 않았으며, 더러운 세상에 처해 있으면서도 더러움에 물들지 않았다.이는 세상에 도가 있을 때 지혜로운 사람의 모습이며, 덕을 품어 스스로를 아끼되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도를 따라 살고 옛 자취를 지켰으니, 후세 사람들이 본받을 만하다.”

 

※〈후인전은 길가의 역로를 지키는 미천한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았지만, 실제로는 난세 속에서 도를 지키는 군자의 삶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우의적 인물전이다. 즉 화자의 자신의 처지를 말하고 있다.

글은 계보 서술에서 시작하여 인물의 성격, 난세에서의 행동, 철학적 발언, 그리고 사관의 평가로 이어지는 전형적인 사기史記식 전기 구조를 갖추고 있다. 특히가진 것은 도요 부족한 것은 시대였다는 평은 도덕적 정당성과 현실 정치의 괴리를 드러내는 핵심 구절로, 직도를 지키는 선비의 이상적 인격을 강조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후인전堠人傅문학 구조와 사상

 

후인전堠人傅은 길가에서 역로驛路를 지키는 후인堠人 장생張栍의 삶을 기록한 전기 형식의 산문이다. 그러나 그 내용은 단순한 인물 전기가 아니라, 난세 속에서도 도를 지키는 선비의 자세를 비유적으로 드러낸 우의적寓意的 인물전(우언적寓言的 )이라 할 수 있다.

글의 서두에서는 장생의 선조가 하후씨夏后氏의 치수와 도로 개통에 공을 세웠다는 이야기로 시작하여 그 직분의 유래를 설명한다. 이는 인물의 계통을 먼저 밝히는 사전史傳 문체의 전형적인 도입 방식이다. 이어서 장생의 성품을 질박하고 과묵하며 권세에 굴하지 않는 인물로 묘사함으로써 그의 인격적 특징을 부각시킨다. 특히 그는 세상 사람들의 충사와 선악을 분별하면서도 이를 입에 올려 평하지 않는데, 이는 외물에 흔들리지 않는 중립과 무심無心의 태도를 상징한다.

중간 부분에서는 전쟁과 난리가 일어난 상황을 서술한다. 이때 많은 장수와 공신들이 두려움에 떨며 물러나는 가운데, 장생은 비바람 속에서도 길 위에 서서 사람들을 인도하며 묵묵히 자신의 직분을 다한다. 그는 공을 드러내거나 스스로 자랑하지 않는데, 이는 조상으로부터 이어진 겸퇴謙退의 덕을 계승한 것으로 서술된다. 이러한 묘사는 난세 속에서도 직분을 지키는 대장부적 기상을 강조하는 장치라 할 수 있.

이어 장생의 말로 제시된 구절에서는 이 글의 사상적 핵심이 드러난다. 그는 선비가 세상에 서서 반드시 태평성대를 이루지 못하더라도, 사람들이 바른 도로 돌아오게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한다. 이는 세속적 성공보다 의 실천을 중시하는 유교적 가치관을 보여준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사관史臣의 평이 덧붙여지는데, 여기서 장생은 군자다운 사람으로 평가된다. 특히 가진 것은 도, 부족한 것은 때였다.(소부자도所冨者道 / 소핍비시所乏非時)”라는 평은 그의 삶이 도덕적으로는 충실했으나 시대적 환경 때문에 뜻을 펼치지 못했음을 지적한다. 이는 난세 속에서 직도를 지키는 선비의 운명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결국후인전은 외형상 미천한 역로의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았지만, 실제로는 직도直道를 지키는 군자의 삶을 강조한 교훈적 산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 글은 인물전의 형식을 빌려 유교적 군자상과 처세관을 설파한 우의적寓意的 작품으로 평가된다.

 

雜著잡저

 

自叙寄舎弟자서기사제

 

聽於天而不撓청어천이불요達人以之知命달인이지지명守其分而無辱수기분이무욕君子所以安貧군자소이안빈然事出於不虞연사출어불우禍來於無妄화래어무망所貴夷險一致소귀이험일치惟知憂樂兩忘유지우낙양망如某為臣不忠여모위신불충為子庚孝위자경효禦魅荒域어매황역負罪明時부죄명시寒嚴釀玄威한엄양현위經春猶雪경춘유설籬荊翳白日리형예백일未夕先陰미석선음人有是非不昧者理인유시비불매자리誰無兄弟難抑者情수무형제난억자정心目娟娟依然魂夢之심목연연의연혼몽지리身也踽踽迫乎死生之間신야우우박호사생지간春返桑鄕棲萼無色춘반상향서악무색秋殘榆塞鴈序失行추잔유색안서실행琴樽共歡之何年금준공환지하년風雨聯牀之無日풍우련상지무일履霜露而惕惕리상노이척척哀情乙乙於松楸애정을을어송추,觸風雪之陰霾촉풍설지음매隻影耿耿於棧棘척영경경어잔극山長水遠산장수원誰憐北塞之羈愁수연북색지기수,春去秋來춘거추래空羨南飛之鴻鴈공선남비지홍안形容憔悴형용초췌常愧漁父之歌상괴어부지가,絶域蒼茫절역창망和詩人之詠세화시인지영幾未能炳기미능병, 逐遐荒分찬축하황분저宜天不可誣의천불가무對越上帝대월상제心無愧怍심무괴작命途幸舛명도행천否極泰來者何時부극태래자하시世路險嶮세노험험昨非今是之始覺작비금시지시각望長安於日下망장안어일하隔妻孥於天邊격처노어천변父母心부모심人皆有之인개유지一念長懸於渤海일념장현어발해塤篪和詩所詠也深훈지화시소영야심情每苦於領會정매고어령회悲歌獨自憐비가독자련將何託장하탁窮也命궁야명達也命달야명宵為桃李之顏소위도리지안生以貞死以貞생이정사이정益堅松柏之直익견송백지직歸心絕於落日귀심절어락일伴影一壁寒燈반영일벽한등旅枕驚於中宵려침경어중소知己長天皓月지기장천호월所賴相因者福소뢰상인자복福有數복유삭盈虛倚伏영허의복付諸塞翁부제새옹慘舒諶斯天意참서심사천의學未得力矣학미득력의縱未見勝昔之容종미견승석지용聖豈欺余哉성개기여재竊自效修身以절자효수신이

 

나의 속마음을 스스로 정리하여 아우에게 보내는 글

 

하늘의 뜻을 따르되 굽히지 않는 것은 통달한 사람이 운명을 아는 까닭이며, 분수를 지켜 욕됨이 없는 것은 군자가 가난 속에서도 편안할 수 있는 이유이다.

그러나 일은 뜻밖에서 일어나고 화는 이유 없이 닥친다.그러므로 평탄함과 험함을 하나로 여기고 기쁨과 근심을 함께 잊는 것이 귀하다.

나 같은 사람은 신하로서는 충을 다하지 못했고 자식으로서는 효를 다하지 못하였다.

황량한 변방에서 귀신을 막듯 떠돌며 밝은 시대에 죄를 짊어지고 있다.

추위는 깊어 봄이 지나도 눈과 같고 울타리 가시가 햇빛을 가려 낮에도 벌써 어둡다.

사람에게 옳고 그름이 있음은 이치요 형제를 생각하는 정을 누가 억누를 수 있겠는가.

그대모습은 눈앞에 아른거려 꿈속에도 떠나지 않는데 내 몸은 홀로 죽음과 삶 사이를 떠돈다.

봄이 돌아와도 고향의 뽕나무는 꽃빛이 없고 가을이 남아도 변방의 기러기는 줄을 잃는다.

거문고와 술잔으로 함께 즐기던 날이 언제이며 비 오는 밤 한 이불에 이야기하던 때가 또 언제이겠는가.

서리와 이슬을 밟으며 늘 두려워하고 조상의 묘를 생각하면 슬픔이 이어진다.

바람과 눈 속에서 외로운 그림자 가시덤불 사이에 서 있다.

산은 길고 물은 멀어 누가 이 북방 변새의 나그네 시름을 알아주랴.

봄 가고 가을 오건만 남쪽으로 날아가는 기러기만 부러워할 뿐이다.

얼굴은 수척해져 어부의 노래를 부르기에도 부끄럽고 아득한 변방에서 시인의 읊음을 겨우 따라 화답할 뿐이다.

먼 곳으로 유배되어 떠돌지만 벗과 나눈 정은 하늘이 알 것이다.

하늘을 우러러보건대 내 마음에 부끄러움은 없다.

운명이 어긋났으니 막힌 뒤 다시 열릴 날이 언제인가.

세상 길이 험하여 이제야 지난날의 잘못과 오늘의 깨달음을 알겠다.

장안을 바라보아도 태양 아래 멀기만 하고 아내와 자식은 하늘 끝에 떨어져 있다.

부모를 생각하는 마음은 사람이면 누구나 같으니 그 한 생각이 바다 끝까지 이어진다.

형제의 화답 시를 읊을수록 정은 깊어지고 슬픔은 더욱 가슴을 누른다.

외로운 칼 한 자루 어디에 의탁해야 하는가.

궁함도 운명이요 형통함도 운명이다.

젊은 얼굴은 복숭아꽃 같았으나 살아도 곧고 죽어도 곧아 소나무와 잣나무의 절개를 더욱 굳게 하리라.

지는 해를 바라보며 돌아갈 마음은 끊어지고 차가운 등불 아래 그림자만 벗이 된다.

밤중에 나그네 베개에서 깨어나면 긴 하늘 밝은 달만이 벗이 된다.

복은 서로 따르되 그 수가 있고 성쇠는 서로 기대니 모두 세옹의 말에 맡길 뿐이다.

이 모든 괴로움과 편안함 또한 하늘의 뜻일 것이다.

이 글은 화자가 유배지에서 아우에게 보내며 자신의 처지를 토로한 자서 형식의 글이다. 억울한 유배 속에서도 하늘의 명을 받아들이고 절의를 지키려는 선비의 태도가 두드러지며, 형제와 부모를 그리워하는 인간적 정이 절절하게 드러난다. 특히 궁야명窮也命 달야명達也命 이라 하여 궁달을 모두 운명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생이정生以貞 사이정死以貞이라 하여 절개를 굳게 지키겠다는 의지가 강하게 나타나 유배 문학의 전형적인 정신을 보여준다.

 

江舍銘 강사명강가의 집에 붙이는 명.

 

豐屋天翔 풍옥천상 집이 크고 화려하여 하늘을 날 듯하면,

易著衆 이저중 구설수나 대중의 시기를 사기 쉽다.

高室鬼嚴 고실귀엄 높고 큰 집은 귀신이 그 엄함을 엿본다 하였으니,

先儒戒 선유계 이는 옛 선비들이 경계한 바이다.

敬言所以 경언소이 공경히 말하는 까닭은,

念玆學 염자학 이 가르침을 마음에 새겨 학문으로 삼고자 함이.

蝸成巢 와성소 달팽이가 집을 짓듯 작은 집이지만,

容膝易安 용슬이안 무릎 하나 들일 정도면 충분히 편안하다.

移氣何要 이기하요 기질을 바꾸고 마음을 다스리는 데 (이보다 더 큰 집이나 화려함이) 어찌 필요하겠는가?

 

※「강사명江舍銘은 화자가 강가의 작은 거처에 붙여 자신의 학문적 뜻을 밝힌 명문이다. 넓고 높은 집을 경계하고 달팽이 집처럼 작은 거처라도 마음이 편하면 족하다는안빈락도安貧樂道의 사상을 드러낸다. 특히용슬이안容膝易安이라는 표현은 외물의 크고 작음보다 마음의 평안을 중시하는 유가적 수양관을 잘 보여주는 구절이라 할 수 있다.

 

洛厓遺集卷之二낙애유집권지이

 

簿錄부록

 

與諫長書略醉朴公漉여간장서약취박공록

 

吳某曾是歷清顯오모증시역청현而前後啓請皆不與焉이전후계청개불여언甲寅還覲갑인환근戊午居憂무오거우又自辛酉以後見機不進우자신유이후견기불진以至於今이지어금千萬料外厚被朴翀衢之誣陷천만요외후피박충구지무함親知之義略陳其曲折친지지의략진기곡절幸肅察焉행숙찰언蓋翀衢構捏之由개충구구날지유汝檼被誣之狀여은피무지장南中之人無不明知남중지인무불명지惟恐法司不察유공법사불찰若有俱焚之歎약유구분지탄不無追昔逞憾之疑耳불무추석령감지의이天日重明천일중명全用전용萬物欣欣咸有生意만물흔흔함유생의此時令公又為諫長차시령공우위간장務持公平正大之論무지공평정대지논必無橫罹枉死之冤矣필무횡리왕사지원의若翀衢之告不是虛誣약충구지고불시허무雖親知之間수친지지간安敢開喙於其中耶안감개훼어기중야

 

간장에게 서신을 보내다. 취수 박록

 

오 아무개는 일찍이 여러 차례 벼슬길에 나아가 명성이 드날렸으나, 전후로 여러 차례 조정의 부름이 있었음에도 번번이 응하지 않았습니다.

갑인년(1614)에 돌아와 어버이를 뵈었고, 무오년(1618)에는 상을 당해 여막에 있었으며, 또 신유년(1621)이후로는 세상의 형세를 살펴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도 천만 뜻밖에 박충구의 무함을 크게 입게 되었습니다.

친히 아는 사람으로서의 의리로 그 곡절을 대략 아뢰오니 삼가 살펴주시기를 바랍니다.

대개 ()충구가 꾸며낸 연유와 ()여은이 무함을 당한 실상은 남쪽 지방 사람들가운데 모르는 이가 없습니다.

다만 두려운 것은 법을 맡은 관청에서 이를 살피지 못하여 혹시 함께 불타는 탄식이 생길까 하는 것입니다.

그리되면 옛 일을 되돌아보며 원한을 풀려 한다는 의심을 면하기 어려울까 염려됩니다. 지금은 하늘의 해와 달이 다시 밝아 모든 일을 떳떳한 법도에 따라 처리하고 있으며 만물이 기뻐하며 모두 살아갈 기운을 얻고 있습니다.

이때 공께서 다시 간장이 되셨으니 반드시 공평하고 정대한 논의를 지키실 것이며 결코 억울하게 죽음을 당하는 원통함은 없을 것입니다.

만약 ()충구의 고발이 허위가 아니라면 비록 친히 아는 사이일지라도 어찌 감히 그 일에 대해 입을 열 수 있겠습니까.

 

취수 박록의 탄원서와 광해군 일기. 인조실록. 승정원 일기. 대사헌 증 영의정 송교 이공 행장을 비교하여 보자.

 

필자는 오여은의 14대 후손이다. 사실 이 내용을 적는 것이 매우 조심스럽다 그러나 진실을 알아야 된다는 점에서 교착 검정 차원에 적었다. 아래의 기록들을 종합하여 보면 오여은은 폐모론에 참석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반정 일당들은 폐모론 동조자라는 올가미로 유배를 보냈다. 후대 서인과 동조 세력들은 당시의 상황을 확인하지 않고 몇 백년 동안 반역자로 낙인찍어 왔다. 이후 후손들은 이 멍에를 가슴에 안고 살아 왔다, 선조님의 낙애유집과 실록이 전해지지 않았다면, 이러한 사실을 후대손들은 모르고 살아야 한다. 이제야 당대의 사실을 전하게 되었지만 너무 선조님께 죄송스럽고 한탄스럽다.

 

박록은 왜 오여은에 대한 탄원서를 대사간 박동선朴東善에게 보냈을까?

 

오여은의 결백을 입증하는 시기별 행적 (물리적 부재)

박록은 오여은이 주요 관직을 거쳤음에도 정작 문제가 된 폐모론 논의(계청)에는 참여하지 않았음을 강조하였다.

 

갑인(1614) 환근還覲: 부모님을 뵙기 위해 고향으로 내려가 있었음.

 

무오(1618) 거우居憂: 1617112일 사직을 청하여 부친이 병으로 위독하여 영주에 내려왔다. 이후 161733일 부친 별세로 부친상 중이었다. 폐모론이 거세게 논의되던 1617~1618년에 그는 상주로서 여묘살이를 하고 있었으므로 조정의 논의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신유(1621) 이후: 시국이 어지러움을 보고 기회를 보아 나아가지 않고 은거했다. 1620년 어머니 김해허씨 별세로 여묘살이를 하고 있었다. 1622년 가족을 거느리고 고령에 우거하였다.

 

상중 임관 프레임: 광해군 일기에는 상중인 오여은에게 관직 등을 내린 기록이 실재한다. 박충구는 이를 근거로광해군이 상례(喪禮)를 무시하면서까지 곁에 두려 했던 핵심 심복이라는 논리를 폈다고 판단된다.

 

폐모론 가담 날조: 1617(정사년) 폐모론 당시, 조정의 수많은 관원이 연명(이름을 올림)하여 찬성했다. 박충구는 오여은이 상중이라 실제 자리에 없었음에도,“마음으로는 동조하여 이름을 올렸다거나 “정인홍의 문인로서 배후에서 조종했다는 식의 추측성 고발을 멈추지 않았다고 판단된다.

 

오여은은 폐모론에 참여 하지 않았다는 것을 반정 인물과 인조대 대신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1617426일 광해왕은 예조좌랑 채겸길을 사제관으로 영주에 파견하여 부친 오운의 장례에 사제賜祭하였다.그해 66일 장례를 치루었는데, 상주 오여은이 어떻게 상중에 폐모론에 참석할 수 있었겠는가. 이 사실을 반정 인사들이 몰랐다고 볼 수 있는가?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911251617년 폐모론 참여 대신들 중에는 오여은의 이름은 없다.

 

인목대비 폐비 사건 또는 인목대비 폐모 사건 1618 조선 조정에서 대비였던 인목왕후를 대비에서 폐하고 서궁西宮에 감금, 유폐시킨 사건을 말한다1614부터 등장한 여론이었지만 쉽게 정해지지 않고 16161617 내내 사회적 논란이 되었다.

 

16181월부터는 백관이 정청(庭請)에 참여하여 매일 3회씩 왕에게 대비의 폐출을 주청하기를 26일간이나 지속하기도 하였다. 이때 정청에 참여한 관원은 약 780여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여러 가지 강압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끝내 정청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도 상당수 있었다. 이들은 그 후 대부분 탄핵을 받고 유배되거나 관직을 삭탈 당하였다. 그 결과 마침내 16181월 인목대비의 죄를 거론하며 폐위 삭출하는 절목이 결정되었다(광해군일기10130).

 

오여은 등이 억울하다 생각하게 하는 차자

 

인조실록28, 인조 1178戊戌 1/1 기사 / 1633년 명 숭정(崇禎) 6

대사헌 김광현金光炫이 차자를 올리기를,

...그런데 곧바로 폐모의 절목을 행한 자만은 유독 형을 면하고 현요직에까지 제수하면서 실로 불가함이 없다고 여기고 있으니, 이것이 민심이 승복하지 않는 이유인 것입니다. 그러니 저 성하연成夏衍오여온吳汝穩의 무리가 억울하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인조실록1, 인조 1429戊子 2/5 기사 / 1623년 명 천계(天啓) 3

 

오여은吳汝檼 이이첨의 심복인 동시에 정인홍의 수족으로서 두 역적의 음모와 흉계에 왕래하며 서로 통하지 않은 경우가 없었고, ....

한영韓詠은 폐모를 주장하면서 논한 것이 지극히 흉악하고 참혹한데 앞장서서 무뢰배를 인솔하였으니, 추형追刑하소서.

 

명재유고 제46/ 행장行狀

 

대사헌大司憲 영의정領議政 송교松郊 이공李公 행장 / 계유년(1693, 숙종19) / 이공은 이목李楘을 말한다.

오여온吳汝穩은 정인홍의 수족이 되어 한영韓泳, 유활柳活 등과 폐모론을 주창한 것이 극도로 흉악하고 참혹하였으니 안치하소서.

 

인조실록에는 오여은이 폐모론 주창자가 아니였지만 이목행장에는 오여은이 폐모론 주창자라 하였다. 즉 이목은 오여은이 폐모론과 관련이 없으나 정인홍이 스승 성혼과 과거 문제에 앙심으로 문인 오여은을 폐모론 주창자라 지목한 것을 알 수 있다.

 

인조실록과 승정원 일기에 오여은을 이구동성으로 폐모론을 주장하였다고 올린 상소 기록이다.

 

인조 3년 을축(1625) 212(신묘) 맑음 승정원 일기

장령 이여황과 정언 이경석이 와서 아뢰기를, 석방하라는 명이 유배지를 옮겨 주거나 풀어 주는 데에 뒤섞이게 되었습니다. .... 오여은吳汝檼, .... 임성지任性之 등으로 말하자면, 모두 역적 이이첨李爾瞻의 심복으로서 기회를 타고 마구 날뛰어 극도로 흉악한 짓을 가리지 않고 다 하였으며, 폐모론廢母論을 주장하여 난망亂亡의 재앙을 빚어낸 것은 모두 이 무리의 소행이니, 목숨을 보존한 것만도 다행이라 하겠습니다.

 

인조 3년 을축(1625) 213(임진) 맑음 승정원 일기

장령 이여황과 정언 이경석이 와서 아뢰기를,....오여은吳汝檼,....심종도沈宗道로 말하자면, 모두 역적 이이첨李爾瞻의 심복으로서 기회를 타고 함부로 날뛰어 몹시 흉악하고 악행을 거리낌 없이 저지르는 등 못하는 짓이 없었습니다. 폐모론廢母論을 주장하고

 

인조 3년 을축(1625) 214(계사) 맑음 승정원 일기

지평 김육과 정언 이경증이 와서 아뢰기를,...오여은吳汝檼, .... 심종도沈宗道 등으로 말하자면 모두 기회를 타고 함부로 날뛰어 몹시 흉악하고 악행을 거리낌 없이 저지르는 등 못 하는 짓이 없었습니다.

출처: 승전원 일기. 한국고전번역원DB

 

위 승정원 일기와 인조실록 기록은 대동소이大同小異 하다.

 

장령 이여황, 정언 이경석, 지평 김육, 정언 이경증, 이들은 과연 오여은이 폐모론에 참석한 것으로 알고 있었을까? 이들은 모두 광해왕대에 급제하여 관직에 있었다. 오여은의 부친이자 원로대신 오운이 1617년 사망하여 장례에 사제관을 파견한 것을 관료들이 몰랐다고 볼 수 있는가? 그 상주가 오여은이라는 것을 몰라서 폐모론에 참여하였다고 반정 세력들이 주장 한 것은 이미 오여은은 반정反正 명분의 희생양으로 삼았다고 볼 수 있다. 실록에는 오여은이 폐모론에 참여하였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있다.

 

오여은이 폐모론에 참석하였기에 인조에게 사면이 부당하다고 상소를 올린 인물들이다. 출처: 인조실록

 

이여황李汝璜: 1590(선조 23)-1632(인조 10)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계휘季徽, 호는 용탄龍灘생원으로 1612(광해군 4)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세자시강원설서로 벼슬길에 들어섰다. 이듬해 홍문록(弘文錄: 홍문관의 제학이나 교리를 선발하기 위한 제1차 인사기록)에 오르고 그 해 부친상을 당하였다. 1619(광해군 11) 부수찬이 된 후 수찬을 역임하였다. 1625(인조 3) 홍문관 교리가 되고, 이어서 수찬·교리·우부승지를 차례로 역임한 후 1630년 황해도 관찰사가 되었다.

 

이경석李景奭: 1595(선조 28)-1671(현종 12)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상보尙輔, 호는 백헌白軒. 1613(광해군 5) 진사가 되고 1617년 증광별시에 급제했으나, 이듬해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비 상소에 가담하지 않아 삭적削籍되고 말았다

 

이경증李景曾: 1595(선조 28)-1648(인조 26)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여성汝省, 호는 미강眉江 또는 송음松陰. 19세에 진사가 되었으나, 당시 폐모론이 일어나자 향리에서 두문불출하다가 인조반정 후 참봉으로 알성 문과에 장원 급제하였다. 처음 전적에 임명되어 정언, 예조·병조의 좌랑을 거친 뒤 1626(인조 4) 다시 정언이 되었으나,

 

김육金堉: 1580~1658. 조선 중기의 문신. 자 백후伯厚, 호 잠곡潛谷. 후일 대동법 확대 시행으로 유명하다. 유집에는 그가 1633 9 안변 도호부사安邊都護府使로 부임하여 유배 중 상을 당한 낙애를 도와 장례를 치르게 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1. 1633(인조 11) 78일 사면의 진정한 의미

 

인조실록에는 이날 오여은을 비롯한 일부 인물들을 유배지에서 풀어주라는 명(방축放逐)이 내려진다. 이 사면령이 갖는 이면의 의미는 무엇일까?

 

실질적인 무고誣告의 인정: 인조반정 직후에는 광해군 시절의 핵심 북인들을 일괄적으로 처단하는 분위기였으나, 10년이 흐른 시점에서 조정 내에서도오여은은 실제로 폐모론의 자리에 있지도 않았는데, 정인홍의 문인이며 손자가 사위라는 이유와 박충구의 모함으로 억울하게 엮였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음을 뜻한다.

 

대신들의 변호: 당시 영의정 윤방尹昉 등 중신들이 유배자들의 석방을 건의할 때, 명분상으로는 왕의 자비(은전恩典)를 내세웠지만 실질적으로는죄명이 불분명하거나 과도하게 처벌된 자들을 선별했다. 오여은이 이 명단에 포함된 것은 그가 진범이 아니라는 사실을 조정에서도 인지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2. 박충구의 모함과 가문 간의 원한 (박이장-오여벌 사건)

박이장(박충구의 부친)과 오여벌(오여은의 동생) 사이의 논쟁은 매우 중요한 복선이다.

 

정치적 앙갚음: 조선 시대 당쟁이나 가문 간의 갈등에서 상대 가문의 유력 인사를폐모론이라는 역적죄에 엮어버리는 것은 가장 치명적인 복수 수단이었다.

 

상중喪中 임관의 함정: 광해군 일기에 상중인 오여은에게 관직을 제수한 기록이 남은 것은, 역설적으로 박충구 등이 “그는 상중임에도 관직을 받을 만큼 광해군의 총애를 받는 핵심 측근이다.”라는 프레임을 짜는 데 악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3. 를 중시하는 국가 시스템상의 모순

 

당시 조선 사회에서 부친상을 당한 상주가 여묘살이를 팽개치고 조정에 나아가 폐모론을 논의한다는 것은 인륜을 저버린 행위로 간주되었다. 만약 오여은이 실제로 그랬다면 반정 이후폐모죄보다불효죄로 더 혹독한 비판을 받았어야 한다.

 

하지만 기록상 그의 죄목은 주로정인홍의 당여黨與이자폐모에 동조한 자로만 분류되어 있다. 이는 그가 실제 행동을 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 명단에 이름이 올라간 피해자였음을 뒷받침한다.

 

📜 결론 및 정리

 

오여은은 상중喪中이라는 물리적 부재 상황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숙청 과정에서 가문 간의 원한(박충구의 모함)과 북인 핵심 인사(정인홍의 문인 사장 어른)이라는 상징성 때문에 억울하게 폐모론의 주역으로 몰린 것으로 보인다.

 

인조 11년의 사면은 단순한 특사가 아니라, 조정 대신들이 “그는 사실 그 자리에 없었으며, 10년의 유배는 그의 억울함을 씻기에 충분(혹은 과함)하다는 사실상의 복권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後識후지 蠧窩崔公興璧두와최공흥벽

 

嗚呼予是非之不定久矣 오호여시비지불정구의洛厓公被誣之狀낙애공피무지장觀於朴醉睡所伸卞관어박취수소신변可知其冤枉가지기원왕而世之落石者이세지낙석자至今譁然不已지금화연불이其亦甚矣기역심의孟子曰맹자왈:「誦其詩송기시讀其書독기서知其人지기인可乎가호?」公之文章明蜴峻偉공지문장명척준위蓋如其為人개여기위인題江舍제강사一篇일편尤足以徵公炳幾厭世之素志우족이징공병기염세지소지及其遠竄北荒급기원찬북황以天命自勉이천명자면未嘗為幾微怨尤見於詞令미상위기미원우견어사영啞雞賦아계부〉、〈堠人傅후인부〉、〈詠蘇武영소무〉、〈文山문산等作등작皆非偶然排愁遣興之意개비우연배수견흥지의則此豈染路伾文者칙차개염노비문자所能道者哉소능도자재余觀遺稿여관유고竊傷夫世無真是非절상부세무진시비遂書此以待後之尚論之士수서차이대후지상론지사庶幾有以辨之爾서기유이변지이

 

후지 두와 최흥벽

 

, 옳고 그름이 분명히 가려지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낙애공이 무함을 당한 사정은 박취수朴醉睡가 변론한 글을 보면 그 억울함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세상에서 돌을 던지듯 공격하는 자들이 지금까지도 떠들썩하게 비난을 멈추지 않으니 그 또한 너무 심한 일이 아니겠는가.

맹자가 말하기를그의 시를 외우고 그의 글을 읽으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하였다.

공의 문장은 밝고 시원하며 높고 웅건하여 대체로 그 사람됨과 서로 같다.

특히 강사에 제하다(제강사題江舍)라는 한 편의 글은 공이 세상을 싫어하고 물러나려 했던 본래의 뜻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낸다.

그가 멀리 북쪽 변방으로 유배되었을 때에도 오직 천명을 따르며 스스로를 격려하였을 뿐 조금이라도 원망하거나 불평하는 마음을 글 속에 드러낸 적이 없었다.

아계부啞雞賦),후인전堠人傅,소무를 읊다(영소무詠蘇武),문산文山등의 작품은 모두 우연히 시름을 달래거나 흥을 풀기 위해 지은 글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글이 어찌 길거리의 얕은 문장이나 속된 글을 따르는 사람이 능히 말해 낼 수 있는 것이겠는가.

나는 남겨진 유고를 읽어 보며 세상에 참된 시비가 없음을 은근히 슬퍼하였다.

이에 이 글을 써 두어 훗날 공론을 세울 선비들을 기다리니 아마도 그들이 이 일을 분별하여 밝혀 줄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두와蠧窩 최흥벽崔興璧이 낙애 오여은의 유고를 읽고 남긴 후지이다. 그는 박록(박취수朴醉睡)의 변론서를 근거로 낙애 사건이 무고임을 주장하고, 낙애의 문장을 통해 그 인품을 알 수 있다고 보았다. 특히 제강사題江舍아계부啞雞賦·후인부堠人傅등의 작품을 들어 낙애가 유배 중에도 원망을 드러내지 않고 절의를 지켰다고 평가하였다. 끝으로 당시 세상에 참된 시비가 바로 서지 못한 것을 탄식하며, 후세의 공정한 논평을 기다린다는 뜻을 밝혔다.

 

贈遺증유

 

贈吳司諫隆甫枕盤石仰明月而臥 六友堂 朴檜茂 증오사간융보침반석앙명월이와. 돌을 베개 삼아 누워 밝은 달을 바라보는 오사간 융보에게 드리다. 육우당 박회무

 

矯首何為仰月明 교수하위앙월명

고개를 들어 어찌하여 밝은 달을 바라보는가高人雖醉未忘情 고인수취미망정

높은 인품의 그대는 비록 술에 취했어도 뜻을 잊지 않았네

世間差處皆塵土 세간차처개진토

세상 모든 자리와 영광은 모두 티끌 같은 흙일 뿐臥見青天無限清 와견청천무한청

누워 바라보는 푸른 하늘은 한없이 맑기만 하도다

 

육우당 박회무는 이 시에서 낙애가 비록 술에 취한 듯 보이더라도 본래의 뜻을 잊지 않는 고결한 인물이라 평하였다. 또한 세속의 영달을 티끌로 여기고 자연 속에서 맑은 하늘을 바라보는 선비의 삶을 노래하였다.

 

感懷呈伯氏감회정백씨 二首이수 弟 汝橃제 여벌. 형님을 만난 감회를 읊다. 두수 아우 여벌

 

癸酉十月十七日계유십월십칠일.

自端川下處奉轝出자단천하처봉여출次于衙前沈理家차우아전심리가都事李之華以災傷巡北道還來歷弔도사이지화이재상순북도환래역조仍言護喪之意잉언호상지의不勝感泣불승감읍 

계유년1017일 단천의 거처에서 상여를 모시고 길을 떠나 관아 앞 심리의 집에서 머물렀다. 도사 이지화가 재해 상황을 살피며 북도를 순행하다가 돌아오는 길에 들러 조문하고 상여를 호송하겠다는 뜻을 말하니 감격하여 눈물을 금할 수 없었다.

二十五日이십오일.

到咸興都事送賻도함흥도사송부判官金源來奠送賻판관김원래전송부 25일 함흥에 이르자 도사가 부의를 보내고 판관 김원이 와서 제사를 올리고 부의를 전하였다.

二十六日이십육일.

監司李公溟來奠送賻四種감사이공명래전송부사종別營所送十二種별영소송십이종

26일 감사 이명李溟이 와서 제사를 올리고 부의 네 가지를 보내고 또 별영에서 열두 가지를 보내왔다.

二十七日이십칠일.

都事以災傷向永興도사이재상향영흥歷臨慰問역림위문

27일 도사는 재해 조사로 영흥으로 가는 길에 다시 들러 위문하였.

二十八日이십팔일.

到永興도영흥府使文希聖令公盛備來奠부사문희성영공성비래전又送朝夕奠需우송조석전수

28일 영흥에 도착하자 부사 문희성이 정성을 다해 와서 제사를 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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