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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 오씨

신미년(1631)에 단천으로 양이量移되었고,

작성자吳恭姙(현정)|작성시간26.06.17|조회수49 목록 댓글 0

또 말하기를,“법사法司가 살피지 못하여 옥석이 함께 불타는 탄식이 있으니, 이는 옛 일을 돌이켜 원한을 푸는 의심이 없지 않다.” 하였다.

이때의 간장은 또한 갑진년(1604) 상소에서 논한 옥당玉堂의 인물이었으므로 박공이 이 말로써 그를 격동시키니, 마침내 죄 등을 감하여 갑산부에 안치되었다.

부군께서는 즉시 행장을 꾸렸으나 조금도 얼굴빛에 드러내지 않으셨.

유배지에 이른 뒤에는 천명을 따르며 스스로를 격려하고, 서적과 역사로 스스로를 즐기셨다.

신미년(1631)에 단천으로 양이量移되었고, 계유년(1633)에 은혜를 입어 완전히 석방되었다.

그러나 이때 부군께서는 이미 병이 심하여 길을 떠날 수 없었고, 818일 객관에서 돌아가셨으니 향년 73세였다.

관을 모셔 돌아올 때에는 도사 이지화李之華가 나와 상례를 주관하였고, 지나는 고을마다 수령과 방백이 부의하고 조문하였다.

어느 해 어느 달에 첩석疂石의 갑좌 언덕에 장사 지냈으니 선영을 따른 것이다.

배위는 상주 주씨로 교리 박의 딸이며 신재선생의 손녀인데, 일찍 죽어 자식이 없었다.

뒤의 배위는 고령 박씨로 현감 정완의 딸이다. 아들 둘, 딸 셋을 두었으니 장남 익환益煥: 문과수찬, 차남 익엽益熀: 생원호군, 지극한 효행으로 이름나고 호는 성재誠齋, 경암공의 후사로 나갔다. 딸들은 각각 정릉, 허종무, 이종배에게 출가하였다.

그 밖의 아들 익휘, 익위와 손자·증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못한다.

아아, 부군께서는 어려서부터 가정의 법도와 가르침 속에 젖어 자랐고, 물러나서는 경암공과 금곤옥계金昆玉季서로 닦고 갈고 닦으며, 날마다 일상의 동정 사이에서 차분히 학문을 쌓았으니, 모두 시서의 가르침과 도의의 요체였다.

이로써 처음 벼슬길에 나아갈 때 명망이 크게 떨쳤고, 장차 원대한 일을 기대 받았으나 성품이 본래 간결하고 강직하여 세상과 쉽게 맞지 않았다.

늦게 과거에 올랐으나 조정의 형세는 이미 크게 어그러져 있었고, 부모가 생존하여 연로하였으므로 세상의 환난을 곧장 맞닥뜨릴 수 없었다.

비록 억지로 명을 받아 관각에서 글을 짓는 자리에 있었으나 간관과 수령의 직임은 간절히 사양하여 결국 물러났다.

이로써 6년 동안 여묘하였고 조정에 선 날은 많지 않았다.

그때 정인홍이 합천에 있으면서 권세를 틀어쥐고 위세를 부리니, 사람들이 모두 그의 기세를 보고 굽실거리지 않는 이가 없었고, 사류 또한 그의 더러움에 물든 이가 많았다.

부군께서는 집 가까운 강과 바위에서 일찍이 더불어 노닐며 지내셨으나,이때에 이르러 급히 영주로 돌아가 마음속으로는 (그와) 인연을 끊기로 맹세하였다.

다만 지나치게 드러내어 행동하지는 않았으나, 마음에 기뻐하지 못한 것은 오히려 이 일로 인한 원망 때문이었다.

부군께서는 이미 칠십의 나이에 온갖 험난을 겪었으나 하루라도 억지로 누르지 않고 처한 바에 따라 편안히 여기며 천명을 따랐다.

때로는 사물에 의탁하여 뜻을 부쳐 비분한 심회를 풀었으니아계부,후인전,소무,문산등의 시를 보면 알 수 있다.

대체로 부군께서는 갑인년(1614) 이후 시세를 살펴 나아가고 물러났으며, 임명이 여러 차례 내려졌으나 혹은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거나 혹은 분연히 나아갔다가 곧 물러나 난세에 처신하여 침묵을 지키는 의리를 잃지 않았다.

서궁 폐모 사건은 마침 무오년(1618) 상중에 일어났는데, 어찌하여 세상 사람들 가운데 돌을 떨어뜨리고 붓을 휘두르듯 남을 헐뜯는 자들이 이토록 끝없이 물고 늘어졌는가.

만일 부군께서 박충구 등이 무고한 바와 조금이라도 비슷한 점이 있었다면 계해년(1623) 반정 때 북당에 속한 자들은 모두 복권되지 못하였으니 어찌 홀로 내지로 옮겨지고 마침내 특별히 완전 사면을 받았겠는가. 이는 진실로 하늘과 같은 밝은 임금의 살핌이 사실이 아님을 밝혀준 것이니, 그렇지 않았다면 부군 평생의 뜻은 거의 후세에 드러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 행적과 억울하게 모함당한 사실은 마땅히 공정한 기록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부군께서는 평소 저술을 힘쓰지 않았고 오직 유배 중 89년 동안 학문에 힘썼으니 기록할 만한 일이 많았을 터이나 화란을 겪은 뒤 거의 흩어져 없어졌다.

지금은 다만 시부·만사와 친구들과 주고받은 글 몇 편만이 전할 뿐이다.

행적과 덕행, 그리고 훗날의 무고된 사실은 마땅히 훌륭한 필력 있는 사람이 전해야 하나 지금 부군이 돌아가신 지 이미 260여 년이 지나 옛 말과 행적이 날로 사라지고 집안에서도 자세히 전하지 못한다.

남에게 부탁하여 드러내려 하면 꾸며낸다는 혐의가 있을까 두려워 삼가고 또 삼가 감히 하지 못하고 참으로 두렵고 슬프며 마음 둘 바를 모르겠다.

이에 집안 족보에 실린성재 일록과 당시 여러 현인들의 글 가운데 밝힐 수 있는 것들을 간략히 보충하여 자손들이 대대로 피눈물을 머금고 한을 품은 사실을 한 편의 가장家狀으로 만들어 후손들이 상고할 수 있게 하고자 한다.

또 혹시 세상의 어진 군자가 가엾이 여겨 한마디를 내려 준다면 이 글을 사실에 근거한 자료로 삼고자 한다.

후손 근호覲鎬피눈물로 삼가 기록하였다.

 

行狀

公諱汝隠字隆甫공휘여은자융보姓吳氏성오씨高敞人也고창인야麗朝翰林學士諱學麟려조한림학사휘학린以文章顕於當也이문장현어당야具後数世有諱季孺구후수세유휘계유賛成事封牟陽君찬성사봉모양군入我朝有諱滎蔭判官아조유휘형음판관錄日原従勲陞嘉善록일원종훈승가선是生諱碩福縣監贈左通禮號三友시생휘석복현감증좌통례호삼우中廟反正중묘반정受功券수공권是為公高祖也시위공고조야曽祖諱彦毅縣監贈左承旨號竹塢증조휘언의현감증좌승지호죽오與退溪先生相友善여퇴계선생상우선先生銘其墓선생명기묘祖諱守貞淑陵參奉贈吏曺參判조휘수정숙릉참봉증이조참판考諱澐通政慶州府尹고휘운통정경주부윤早遊退溪南溟两先生之門 조유퇴계남명량선생지문深見奨許심견장허竹牖先生是也죽유선생시야妣貞夫人金海許氏비정부인김해허씨生貟士廉之女생원사염지녀嘉靖辛酉十一月十八日가정신유십일월십팔일生公于宜寜嘉禮里第생공우의령가례리제公生而頴邁공생이영매逈有才器형유재기文藝夙就문예숙취竹牖公奇爱之죽유공기애지手書廉謹忠信四字為戎수서염근충신사자위융公服膺終身공복응종신未甞頃刻忘焉미상경각망언辛卯中司馬신묘중사마翊年壬辰 익년임진賊人入寇적인입구沿海列邑연해열읍望風瓦解망풍와해咸寜以下尤甚함령이하우심仲弟敬菴公奉毋夫人중제경암공봉무부인避亂入榮川피란입영천公随大人竹牖公後공수대인죽유공후與大將郭公여대장곽공募兵給餉모병급향規模指畫규모지화了然不失요연불실歧江以西鼎津以北기강이서정진이북得免兵燹득면병선招諭使鶴峯金先生據實馳啓초유사학봉김선생거실치계竹牖公特除承文院判校죽유공특제승문원판교公進資歴司宰監直長공진자력사재감직장父子勲錄부자훈록甚奇壯焉심기장언已酉出金泉道察訪이유출김천도찰방新經大亂신경대란郵卒散亡우졸산망無以鎮安무이진안公在任五年공재임오년政化民安정화민안流逋盡還유포진환治聲藉菀치성자울癸丑始大闡계축시대천朝議以公之才可掌文苑之任조의이공지재가장문원지임薦授弘文撿閱천수홍문검열時光海政亂시광해정란朝象洶擾조상흉요公乞暇省親于榮川寓所공걸가성친우영천우소是甲寅三月也시갑인삼월야未幾有大君之禍미기유대군지화人多以炳幾先退稱歎인다이병기선퇴칭탄乙卯을묘長子益煥又擢嵬科장자익환우탁외과公以連疂科공이련첩과慶心戎盛경심융성병진由玉署除司諌유옥서제사동時竹牖公在青松任所시죽유공재청송임소告病徑還고병경환公亦以親劑懇辞請歸공역이친제간사청귀尾及孝理미급효리人不知其何為也인불지기하위야丁巳竹牖公下정사죽유공하啜粥廬墓철죽여묘距家数里거가수리日省母夫人 일성모부인祈寒暑雨기한서우猶不廢焉유불폐언巳未服闋사미복결又除弘文典翰우제홍문전한召命促迫소명촉박不獲已強赴불획이강부旋即呈述而還선즉정술이환庚申又丁太夫人憂경신우정태부인우盧墓終制 노묘종제一如前丧일여전상先是爱洛江山水선시애낙강산수置别業于其上치별업우기상以為終老之計이위종노지계因自號曰洛厓인자호왈낙애壬戌除侍講院輔德임술제시강원보덕屡辭不赴루사불부𠦸家移寓於洛厓 𠦸가이우어낙애絶意名途절의명도托迹江湖탁적강호語不及時事得失어불급시사득실吟哦自適음아자적題詩于江舎曰제시우강사왈噫噓噫희허희人間萬事己可知인간만사기가지天放優遊従所好천방우유종소호観此可知執意之卓犖矣관차가지집의지탁락의癸亥仁廟改紀계해인묘개기北人仁弘盡敗북인인홍진패南中士𩔖多被其禍 南中士𩔖다피기화公亦在被誣中공역재피무중逮宣廟甲辰체선묘갑진敬菴公以正言경암공이정언䟽論玉堂囬互之狀소론옥당호지장而并及龍潭이병급용담其子翀衢因是蓄憾기자충구인시축감措陷尤甚조함우심禍將不測화장불측醉睡朴公貽書諌長취수박공이서동장極言公見幾不進之事극언공견기불진지사誤被誣枉之寃오피무왕지원而惟恐法司不察이유공법사불찰若有玉石俱焚之歎약유옥석구분지탄則不無追昔逞感之云云칙불무추석령감지운운諌長亦甲辰之玉堂동장역갑진지옥당故醉睡고취수公以是激之공이시격지於是遂减等安置于甲山 어시수감등안치우갑산公即日束裝공즉일속장頓無幾微見於色돈무기미견어색到配之後도배지후一切以天命自勉일절이천명자면書史為娛서사위오不知縲苦在身也불지류고재신야辛未量移端川 신미양이단천癸酉蒙思全釋계유몽사전석時病忽沉 시병홀침不任進道불임진도八月十八日팔월십팔일終于寓舘종우우관享年七十三향년칠십삼奉櫬還鄕봉츤환향都事李之華出力庀丧所徑守牧도사이지화출력비상소경수목方伯致賻迎吊방백치부영적以某月日葬于疂石座甲之原 이모월일장우첩석좌갑지원配尚州周氏배상주주씨校理博之女慎齋先生孫교리박지녀신재선생손早卒無育조졸무육後配高靈朴氏후배고령박씨縣監廷琬女현감정완녀生二男三女생이남삼녀男即益煥文科修撰남즉익환문과수찬次益熀生貟護軍차익엽생원호군有至行號誠齋유지행호성재出為敬菴公後출위경암공후女適鄭稜許宗茂李宗培녀적정릉허종무이종배室子益煇益煒실자익휘익위其餘孫曽以下不盡錄 기여손증이하불진록嗚乎오호公自少擩染於家庭典訓공자소유염어가정전훈又與敬菴公聯業征邁우여경암공연업정매惟日講明進修者유일강명진수자皆詩禮之學道義之旨也개시례지학도의지지야性簡亢清粹성간항청수不喜苟合불희구합晩而出仕만이출사國事大謬국사대류不欲求進불욕구진且年七十有餘矣차년칠십유여의備經艱險비경간험随遇安命수우안명有時托物寄興유시탁물기흥以叙憤慨之懐이서분개지회観於啞鷄賦堠人傳蘇武文山諸詠관어아계부후인전소무문산제영可知之矣가지지의盖公自甲寅以後개공자갑인이후相時進退상시진퇴除命屡下제명루하或呈辞不赴혹정사불부或赴旋遞 혹부선체不决居亂容黙之義불결거라난용묵지의西宫錮変서궁고변乃在於戊午疚哀之日내재어무오구애지일而夫何世之好落石吹毫之徒이부하세지호낙석취호지도齒斷猶未己치단유미기如使公有一毫近似여사공유일호근사於奸之所誣어간지소무則癸亥以後凡繫北黨之惡칙계해이후범계북당지악俱無甄復구무견복獨公中焉移就内地독공중언이취내지末焉特命全宥苟非天日之明구비천일지명俯燭無實부촉무실公之平生之志공지평생지지幾乎不暴白於後世者矣기호불포백어후세자의公平居不喜著述공평거불희저술其於涪江之行八九年기어부강지행팔구년必多有可紀之作필다유가기지작而禍患之餘이화환지여㪚散失殆盡산실태진只有詩賦挽誄及知舊徃往復等若干篇而己지유시부만뢰급지구왕복등약간편이기至若行治履歴與夫後来辨誣之蹟지약행치이력여부후래변무지적蕩然無所考據탕연무소고거豈不歎哉개불탄公之出後孫應澈與其嗣孫聖烈공지출후손응철여기사손성렬收拾散餘為一冊 수겁산여위일책而將謀繡梓来余示之曰래여시지왈府君紀德之狀부군기덕지장禾有屬筆화유속필請一言以誌청일언이지余學謏識淺여학소지천何敢當是役하감당시역竊念余亦在外裔之列절념여역재외예지열終不可孤矣종불가고의謹按家狀而畧叙如右근안가장이략서여우以備也이비야論引之尚論者攷焉논인지상논자고언歳乙丑四月下浣세을축사월하완鐡城李述謹撰철성이술근찬

행장

 

공의 휘는 여은汝檼이고 자는 융보隆甫이며 성은 오씨이다. 본관은 고창高敞이다. 고려 때 한림학사를 지낸 학린學麟이 문장으로 이름을 떨쳐 그 시조가 되었고, 그 뒤 여러 대를 내려왔다.

그 후손 가운데 휘 계유季孺가 있어 찬성사를 지내고 모양군牟陽君에 봉해졌다. 조선에 들어와서는 휘 형이 음판관으로 공을 세워 공신에 녹훈되고 가선대부로 승진하였다. 그가 낳은 휘 석복碩福은 현감을 지냈으며 좌통례로 추증되었고 호는 삼우三友이다. 중종반정 때 공훈록에 올랐는데 이분이 공의 고조이다.

증조 휘 언의彦毅는 현감을 지냈고 좌승지로 추증되었으며 호는 죽오竹塢이다. 퇴계 선생과 서로 친하게 지냈으며, 돌아가자 퇴계 선생이 묘지명을 지어 주었다. 조부 휘 수정守貞은 숙릉 참봉을 지냈고 이조참판으로 추증되었다.

부친 휘 운은 통정대부 경주부윤을 지냈는데, 일찍이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 두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깊이 인정받았다. 세상에서 죽유선생竹牖先生이라 불린 분이다.

모친은 정부인 김해 허씨로 생원 허사렴의 딸이다.

명나라 가정 신유년(1561) 1118일에 공을 의령 가례리 집에서 낳았다.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뛰어나고 기상이 남달랐으며 재능과 기량이 탁월하였다. 문장 또한 일찍 이루어졌다. 죽유공이 특별히 사랑하여 친히 염근충신廉謹忠信네 글자를 써 주었는데, 공은 이를 평생 마음에 새겨 잠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신묘년(1591)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이듬해 임진년에 왜적이 침입하여 해안의 여러 고을이 바람에 쓰러지듯 무너졌으며 특히 함안과 의령 일대의 피해가 심하였다. 아우 경암공은 모친을 모시고 영천(영주)으로 피난하였고, 공은 부친 죽유공을 따라 남았다.

이때 죽유공이 대장 곽재우와 함께 군사를 모집하고 군량을 공급하며 군사 조직과 전략을 세우는 일을 맡았는데 그 계획과 지휘가 매우 분명하였다. 그 덕분에 기강 서쪽과 정진 북쪽 지역은 병화의 피해를 면할 수 있었.

초유사 학봉 김성일이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자 죽유공은 특별히 승문원 판교에 임명되었고, 공도 공로로 승진하여 사재감 직장이 되었다. 부자가 함께 공훈에 기록된 것은 참으로 장한 일이었다.

기유년(1609)김천 찰방으로 나갔다. 큰 난리를 겪은 직후라 역졸들이 흩어져 관청이 안정되지 못하였으나 공이 재임한 5년 동안 정사가 안정되고 백성이 편안해졌다. 흩어졌던 백성들도 모두 돌아왔으며 치적의 명성이 크게 퍼졌다.

계축년(1613)에 대과에 오르니 조정에서 공의 재능과 학문이 문한을 맡기에 적합하다고 하여 홍문관 검열에 추천하였다. 당시 광해군 말기라 정사가 어지럽고 조정이 크게 소란하였다. 공은 영천(영주)에 있던 부모를 찾아뵙겠다며 휴가를 청하였다. 이때가 갑인년(1614) 3월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군의 변이 일어나자 사람들은 공이 미리 물러난 것을 두고 형세를 밝게 본 처신이라 칭찬하였다.

을묘년(1615)에 장남 익환이 또 문과에 급제하였다. 집안에 과거 급제가 거듭되었으나 공은 이를 마음으로 크게 기뻐하지 않았다.

병진년(1616)에 홍문관에서 나와 사간원 사간으로 임명되었다. 이때 부친 죽유공이 청송 관직에서 병을 이유로 돌아오고 있었으므로 공은 효도를 이유로 간절히 사양하였다. 그 뜻이 매우 완곡하여 사람들이 그 깊은 뜻을 알지 못하였다.

정사년(1617)에 죽유공이 돌아가자 죽을 먹으며 묘막에서 살았다. 집에서 몇 리 떨어진 곳에 묘막을 짓고 날마다 모친을 찾아뵈었으며 혹독한 추위와 여름의 비바람에도 하루도 빠지지 않았다.

상기가 끝나자 다시 홍문관 전한에 임명되었으나 부름에 억지로 응해 입경하였다가 곧 사직하고 돌아왔다.

경신년(1620)에 또 모친상을 당하여 다시 묘막에서 삼년상을 마쳤다.

그보다 앞서 공은 낙동강의 산수를 사랑하여 그 위에 별업을 마련하고 노후를 보낼 뜻을 두었다. 그래서 스스로 호를 낙애洛厓라 하였다.

임술년(1622)시강원 보덕에 임명되었으나 여러 차례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마침내 집을 떠나 낙애로 옮겨 살면서 벼슬길에 뜻을 끊고 강호에 몸을 맡겼다. 세상 일의 득실을 말하지 않고 시를 읊으며 스스로 즐겼다.

그가 강가 집에 붙인 시에 말하기를, 인간 세상의 만사는 이미 알 만하니 하늘이 준 여유 속에 마음대로 노니노라.”이로써 공의 뜻이 얼마나 굳고 뛰어났는지 알 수 있다.

계해년(1623)인조가 즉위하자 북인과 정인홍의 무리가 모두 몰락하였다. 남쪽 지방의 선비들 가운데 그 화를 입은 이가 많았는데 공 또한 모함을 받아 그 속에 포함되었다.

예전 선조 갑진년(1604)경암공 오여벌이 정언으로 있을 때 상소하여 홍문관의 잘못을 논하면서 용담 박이장을 함께 비판하였다. 그 아들 박충구가 이 일로 원한을 품고 더욱 심하게 모함하였다. 화가 장차 예측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취수醉睡 박공 록(朴漉)이 간장諫長에게 글을 보내어, 부군께서 형세를 살펴 물러나 나아가지 않은 일과 공이 형세를 보고 미리 물러난 사실과 억울한 모함을 강력히 변호하였다.

또 말하기를,법사(法司)가 살피지 못하여 옥석이 함께 불타는 탄식이 있으니, 이는 옛 일을 돌이켜 원한을 푸는 의심이 없지 않다.”하였다.

이때의 간장은 또한 갑진년(1604) 상소에서 논한 옥당玉堂의 인물이었으므로 박공이 이 말로써 그를 격동시키니, 그러나 결국 형벌이 감해져 갑산에 유배되었다.

공은 즉시 짐을 꾸려 떠났고 얼굴빛에 조금도 변화가 없었다. 유배지에 이르러서는 모든 것을 하늘의 명이라 여기고 책을 읽으며 지냈다. 마치 자신이 갇혀 있다는 사실조차 잊은 듯하였다.

신미년(1631)단천으로 이배되었고, 계유년(1633)에 은혜를 입어 석방되었다. 그러나 병이 갑자기 깊어져 길을 떠날 수 없었으며 818일 객관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73세였다.

상여를 모시고 돌아올 때 도사 이지화가 힘써 장례 일을 도왔고, 지나가는 고을마다 수령과 감사가 부의와 조문을 보냈다. 어느 해 어느 달에 첩석의 갑좌 언덕에 장사하였다.

첫 배위는 상주 주씨로 교리 주박의 딸이며 신재 선생의 손녀이다. 일찍 죽어 자식이 없었다. 뒤에 고령 박씨 현감 박정완의 딸을 맞아 두 아들과 세 딸을 낳았다.

장남 익환은 문과에 급제하여 수찬을 지냈고, 차남 익엽은 생원으로 호군이 되었으며 효행이 지극하여 호를 성재라 하였다. 그는 경암공의 후사가 되었다. 딸들은 각각 정릉, 허종무, 이종배에게 시집갔다. 그 밖의 아들 익휘, 익위 손자·증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못한다.

, 공은 어려서부터 가정의 가르침 속에서 자라 경암공과 함께 학문을 닦으며 시서와 도의를 날마다 강구하였다. 성품은 간결하고 강직하며 맑고 순수하여 세상에 아첨하지 않았다. 늦게 벼슬에 나갔으나 나라의 형세가 이미 크게 어지러웠다.

나이가 이미 칠십이 넘었고 많은 험난함을 겪었으나 형편에 따라 운명을 받아들이며 살았다. 때로 사물에 의탁하여 시를 지어 울분을 토로했는데아계부,후인전,소무,문산등의 시에서 그 뜻을 알 수 있다.

공은 갑인년(1614) 이후 시대의 형세를 보아 벼슬에 나아가거나 물러나면서 난세 속에서 침묵으로 절의를 지키는 도리를 잃지 않았다. 서궁의 변은 마침 무오년(1618) 상중에 있었던 때였는데도 후세 사람들 가운데 돌을 던지듯 비난하는 자들이 아직도 그치지 않는다.

만약 공에게 모함과 같은 일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인조반정 뒤 북당 인물들이 모두 복권되지 않았을 때 공만이 내지로 옮겨지고 끝내 특별히 사면될 리가 없었을 것이다. 이는 임금의 밝은 판단이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공은 평소 저술을 많이 하지 않았다. 다만 유배지에서 지은 작품이 많았으나 화를 겪는 동안 거의 흩어져 버렸다. 지금 전하는 것은 시와 부, 만사와 서간 몇 편뿐이다. 그 행적과 억울함을 밝히는 기록은 거의 남지 않았으니 어찌 탄식하지 않겠는가.

공의 후손 응철과 사손嗣孫 성열이 흩어진 기록을 모아 한 책으로 만들고 목판으로 새기려 하며 나에게 보여 주면서 공의 덕을 기록한 글을 부탁하였다.

나는 학문이 얕고 식견이 부족하여 감히 맡기 어려웠으나 나 또한 외가로 이어진 후손이므로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이에 가장家狀을 참고하여 대략 위와 같이 기록하여 후세의 논자가 살펴볼 수 있게 한다.

 

을축년(1925) 4월 하순 철성 이술李述삼가 짓다

 

墓碣銘묘갈명 并序병서

 

公諱汝檼공휘여은字隆甫자융보號洛厓호낙애吳氏오씨世為高敞人세위고창인考諱澐고휘운文科문과慶州府尹경주부윤早遊退溪조유퇴계南冥兩先生之門남명양선생지문克承獎許극승장허世所禰竹牖先生세소녜죽유선생娶金海許氏취김해허씨生員士廉女생원사염녀以嘉靖辛酉十一月十八日이가정신유십일월십팔일生公于宜寧嘉禮里第생공우의령가례리제公幼而穎悟공유이영오有才器유재기長而文藝夙就장이문예숙취聲望藉蔚성망자울中宣祖辛卯司馬試중선조신묘사마시光海癸卯광해계묘大闡대천以學術薦이학술천授弘文館檢閱수홍문관검열時權奸擅柄시권간천병國之危亡有漸국지위망유점無意進取무의진취遂乞暇省親于榮川寓所수걸가성친우영천우소實甲寅三月也실갑인삼월야未久미구而有永昌之禍이유영창지화人皆以炳幾先退為高矣인개이병기선퇴위고의先是선시公愛洛江山水공애낙강산수置別業為終老計치별업위종노계自號洛厓자호낙애因又挈家棲遲인우설가서지絶意名途절의명도托跡江湖탁적강호與世相忘여세상망逮癸亥反正체계해반정彛倫復敍이륜부서倻黨群兇咸就顯戮야당군흉함취현륙而公亦在被誣中이공역재피무중在宣廟甲辰재선묘갑진公弟敬菴公疏論玉堂回互之狀공제경암공소론옥당회호지장而並及大司諫朴某이병급대사간박모其子翀衢畜憾逞毒기자충구축감령독構捏尤甚구날우심竟至有安置甲山之命경지유안치갑산지명湘累十年之間상루십년지간幾微怨懟之心기미원대지심不見於色불견어색反躬省飭반궁성칙只俟天日지사천일天日昭明천일소명洞燭深冤통촉심원辛未乃蒙量移之恩신미내몽양이지은癸酉薦蒙蕩釋之典계유천몽탕석지전公之平素秉執之志공지평소병집지지於是乎暴白於東人觀聽어시호박백어동인관청豈不快哉개불쾌재公時病革공시병혁奄忽易簀於旅館엄홀역책어여관實是年八月十八日실시년팔월십팔일享年七十三향년칠십삼奉櫬而還봉츤이환方伯及所經列邑守牧방백급소경열읍수목各致賻典弔問각치부전조문斯豈非公議之不可誣者耶사개비공의지불가무자야以某月某日이모월모일葬於榮川之疊石坐甲之原장어영천지첩석좌갑지원配尚州周氏배상주주씨校理博之女교리박지녀後配高靈朴氏후배고령박씨縣監廷琬女也현감정완녀야嗚呼오호公性簡亢공성간항不苟合불구합晚出仕路만출사로見時運大否견시운대부不求進불구진而托物寄懷이탁물기회以洩憤慨이설분개觀於관어啞鷄아계》《堠人후인》《蘇武소무》《文山문산諸作제작可知也가지야自甲寅以後자갑인이후相時進退상시진퇴不失居亂容默之義불실거란용묵지의西宮之變서궁지변乃在於戊午居廬之日내재어무오거려지일撫躬橫罹讒口무궁횡리참구畢命於絶塞羈旅필명어절색기려使公之經學之術사공지경학지술公輔之器공보지기竟未得大有為於一世而止경미득대유위어일세이지抑公之命歟억공지명여世道之不幸歟세도지불행여公之遺文공지유문禍患之餘散佚화환지여산일存者不多존자불다而未免巾箱中塵蠧之厄이미면건상중진두지액且距公之世三百年于茲차거공지세삼백년우자尚闕墓道之顯刻상궐묘도지현각其為子孫之茹痛기위자손지여통後生之齎恨후생지재한容有極乎용유극호雖然수연當時醉睡朴公漉貽諫長書略曰당시취수박공록이간장서략왈吳某曾是歷揚清顯오모증시력양청현而前後啓請不與焉이전후계청불여언。」又曰우왈:「朴翀衢構誣之由박충구구무지유吳汝檼被誣之狀오여은피무지장南中之人無不明知남중지인무불명지。」又曰우왈:「朴某之言不是虛誣박모지언불시허무雖親知之間수친지지간安敢開喙於其間耶안감개훼어기간야?」蠧窩崔公興璧後識略曰두와최공흥벽후지략왈:「洛厓被誣之狀낙애피무지장觀於朴醉睡所申辨관어박취수소신변可知其冤枉가지기원왕而落石之論이낙석지론至今譁然不已지금화연불이其亦甚矣기역심의。」孟子曰맹자왈:「誦其詩송기시讀其書독기서不知其人불지기인可乎가호?」,公之文章明暢俊偉공지문장명창준위蓋知其為人개지기위인又曰우왈:「觀公遺稿관공유고益傷關夫世無真是非익상관부세무진시비遂書此以待後之尙論之士수서차이대후지상론지사庶幾有以辨之서기유이변지。」二老有德君子也이노유덕군자야其言可以為金石證案矣기언가이위금석증안의嗚呼오호不泯者百世之尙論嗚呼불민자백세지상론!,何損乎一時冤屈哉하손호일시원굴재日公出後裔孫應澈君抱公遺稿來示駿榮일공출후예손응철군포공유고래시준영責以墓碣銘책이묘갈명駿也萬非其人준야만비기인拒之固辭거지고사益動익동乃不得終辭내불득종사而公之先系及平日事行이공지선계급평일사행立朝履歷립조리력與夫子女孫曾여부자녀손증載在紀德之狀재재기덕지장掇其大略如右철기대략여우而為之銘이위지명

銘曰명왈

 

維吳高敞유오고창文獻大方문헌대방

肇自麗代조자려대至于本邦지우본방

宏儒巨卿굉유거경磊落相望뢰낙상망公紹厥緖공소궐서寔篤前光식독전광

其器瑚璉기기호련其章黼黻기장보불妙歲陞庠묘세승상晚而釋褐만이석갈

玉署春坊옥서춘방清顯歷揚청현역양際值昏朝제치혼조日月頹綱일월퇴강

炳幾厭勢병기염세高舉迴翔고거회상維洛之上유낙지상一區別莊일구별장

杜門求志두문구지與世相忘여세상망

長陵反正장릉반정百度更백도갱장彛倫復敍이륜복서群兇顯戮군흉현륙

彼何人斯피하인사畜憾逞毒축감령독熒惑聰明형혹총명指玉誣石지옥무석

載蒙恩遣재몽은견十年荒北십년황북幾微怨尤기미원우不見於色불견어색

隨遇安命수우안명反躬省飭반궁성칙天鑑孔昭천감공소幽冤暴白유원박백

黯黮彼石암담피석光明是玉광명시옥天乎命乎천호명호捐館何促연관하촉

方伯悼惜방백도석列郡奠賻열군전부不有公議불유공의此何以獲차하이획

歸葬于榮귀장우영疊石之麓첩석지록晦顯屈伸회현굴신此理不惑차리불혹

百世在前백세재전永垂令名영수령명有如不信유여불신視此刻銘시차각명

 

歲丙寅寒食節세병인한식절豊山後人柳駿榮撰풍산후인류준영찬

 

묘갈명 병서

 

공의 이름은 여은汝檼, 자는 융보隆甫, 호는 낙애洛厓이며, 성은 오씨로 대대로 고창 사람이다.

부친의 이름은 운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경주부윤을 지냈다. 일찍이 퇴계와 남명 두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깊은 인정을 받았으므로, 세상에서 죽유선생이라 일컬었다. 김해 허씨 집안에 장가들었는데, 생원 사렴의 딸이다.

가정嘉靖 신유년(1561) 1118일에 의령 가례리 집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영특하여 재주와 기량이 남달랐으며, 성장해서는 문장과 학문이 일찍 이루어져 명성이 널리 퍼졌다.

선조 신묘년(1591)에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광해군 계묘년(1613)에 대과에 올라 학문으로 천거되어 홍문관 검열에 임명되었다.

당시 권간이 권력을 잡아 나라가 점점 위태로워지자, 벼슬에 나아갈 뜻이 없어 휴가를 청하여 영천(영주)의 거처로 돌아가 부모를 봉양하였으니, 이는 갑인년(1614) 3월의 일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영창대군 사건이 일어나자, 사람들은 모두 공이 기미를 밝게 보고 미리 물러난 것을 높이 평가하였다.

이보다 앞서 공은 낙동강의 산수를 사랑하여 별장을 마련하고 여생을 마칠 계획을 세웠으며, 스스로 낙애라 호를 지었다.이에 더하여 가족을 데리고 은거하며 벼슬길을 단념하고 강호에 자취를 의탁하여 세상과 잊고 살았다.

계해년(1623) 인조반정으로 인륜이 다시 바로잡히고, 간신 무리들이 모두 처형되었으나, 공 또한 무고를 입은 사람들 가운데 포함되었다.

선조 갑진년(1604)에 공의 아우 경암공이 상소하여 홍문관 관원들의 부당함을 논하면서 대사간 박모(박이장)를 함께 지적하였는데, 그의 아들 충구가 원한을 품고 더욱 모함을 꾸며내어 마침내 갑산으로 유배시키라는 명이 내려졌다.

그리하여 십여 년의 유배 생활 동안에도 원망하는 기색을 조금도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돌아보며 수양하고 하늘의 밝은 판단을 기다렸다.

마침내 하늘의 밝은 이치가 드러나 깊은 억울함이 밝혀져, 신미년(1631)에 이르러 유배지를 옮기는 은혜를 입었고, 계유년(1633)에는 다시 풀어주는 조치를 받았다.

이에 공이 평소 지켜온 절의와 뜻이 온 세상 사람들 앞에 드러나게 되었으니, 어찌 통쾌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때 공은 병이 위독하여 객지의 관사에서 갑자기 세상을 떠났으니, 바로 그해 818일이었다. 향년 73세였다.

관을 모셔 돌아올 때, 감사와 지나가는 여러 고을 수령들이 모두 부의와 조문을 보냈으니, 이는 공의 명망이 헛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어느 해 어느 달에 영천(영주) 첩석疊石의 갑좌 언덕에 장사 지냈다.

배위는 상주 주씨로 교리 박의 딸이었으나 자식이 없었고, 후배는 고령 박씨로 현감 정완의 딸이다.

, 공의 성품은 간결하고 강직하여 함부로 남과 어울리지 않았으며, 늦게 벼슬길에 나아갔으나 시대가 크게 어지러운 것을 보고 출세를 구하지 않고 사물에 뜻을 붙여 울분을 풀었다.

아계부·후인부·소무·문산등의 작품을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갑인년(1614) 이후로는 시세를 살피며 나아가고 물러남을 분명히 하여 난세에 침묵을 지키는 도리를 잃지 않았다.

그런데 서궁의 변이 마침 상중에 있던 때에 일어나, 뜻밖에 참소를 받아 끝내 변방에서 생을 마쳤으니, 만일 그의 경학과 정치적 역량이 세상에 펼쳐졌더라면 크게 쓰이지 못했겠는가.이는 운명인가, 아니면 세상의 불행인가.

그의 유문은 화를 겪는 사이 흩어져 남은 것이 많지 않고, 남은 것마저도 먼지와 좀에 훼손되었다.

또 세월이 이미 삼백 년이 지났으나 아직 묘도에 비문이 세워지지 않았으니, 자손들의 한과 후학들의 안타까움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당시 취수 박록이 간장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오모는 일찍이 청요직을 두루 거쳤으나, 전후의 탄핵에 관여한 바 없다.”또 말하였다.박충구가 모함한 경위와 오여은이 억울하게 죄를 입은 사실은 남쪽 지방 사람들이 모르는 이가 없다.”

또 말하였다.이 말은 결코 거짓이 아니며, 가까운 사이에서도 감히 이를 부정할 수 없다.”

또 두와 최흥벽의 글에는,“낙애가 무고를 당한 사정은 박록의 변명을 보면 알 수 있으며, 그 억울함은 지금까지도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맹자가 이르기를,그 시를 외우고 그 글을 읽으면서 그 사람을 알지 못한다면 되겠는가?” 하였다.

공의 문장은 밝고 힘차니, 그 사람됨을 알 수 있다.

또 말하기를,공의 유고를 보니 세상에 참된 시비가 없음을 더욱 한탄하게 된다. 후세의 공정한 논평을 기다린다.”하였다.

이 두 사람은 덕망 있는 군자이니, 그 말은 금석과 같이 믿을 만한 증거가 된다.

, 후세의 공정한 평가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니, 한때의 억울함이 어찌 그 명성을 손상시키겠는가.

어느 날 후손 응철이 공의 유고를 가지고 와서 나에게 묘갈명을 부탁하였다.

나는 감히 그 일을 맡을 사람이 아니라고 사양하였으나, 끝내 물리칠 수 없어 공의 가계와 생애, 벼슬 이력과 자손을 간략히 서술하고 이에 명을 짓는다.

 

銘曰명왈

 

維呉高敞 文献大方 / 肇自麗代 至于本邦고창 오씨 가문은 문헌(역사와 학문)이 성대하니, 고려 시대부터 시작되어 우리 조선에 이르렀도다.

宏儒巨卿 磊落相望 / 公紹厥緖 寔篤前光큰 선비와 높은 관직자가 잇따라 나타났으니, 공이 그 계통을 이어 앞선 조상의 영광을 참으로 두텁게 하였도다.

其薦瑚璉 其章黼黻 / 妙歳陞庠 晩而釋褐그 재능은 제사의 그릇과 같고 문채는 화려한 수와 같으니, 젊은 나이에 학교에 올랐고 늦게나마 과거에 급제하였도다.

玉署春坊 清顯歴敭 / 際値昏朝 月漸頽綱홍문관과 세자시강원 등 맑고 높은 관직을 두루 거쳤으나, 어두운 조정(광해군 시기)을 만나 도덕과 기강이 점차 무너졌도다.

炳幾厭勢 高舉迴翔 / 維洛之上 一區別庄기미를 살피고 권세를 싫어하여 높이 날아 세상을 피했으니, 낙동강 가의 한 구석 별장에 머물렀도다.

杜門求志 與世相忘 / 長陵反正 百度更張문을 닫고 뜻을 구하며 세상과 서로 잊고 지냈는데, 인조반정(장릉반정長陵反正)이 일어나 모든 제도가 새로워졌도다.

彛倫復叙 羣㐫顯戮 / 彼何人斯 畜憾逞毒인륜이 다시 차례를 찾고 흉악한 무리가 처벌받을 때, 그 어떤 사람이 원한을 품고 독기를 부렸는가.

熒惑聦明 指玉誣石 / 載蒙恩遣 十年荒北임금의 총명을 어지럽히고 옥을 가리켜 돌이라 모함하니, (공은 도리어 죄를 입어) 10년 동안 북쪽 거친 땅(함경도 유배지)으로 보내졌도다.

幾微怨尤 不見于色 / 随遇安命 反躬省飭조금의 원망이나 허물도 얼굴색에 나타내지 않았고, 처지에 따라 운명에 순응하며 스스로를 돌이켜 살피고 삼갔도다.

天鑑孔昭 幽冤暴白 / 黝黙彼石 光明是玉하늘의 살핌이 매우 밝아 깊은 원한이 드러나 밝혀졌으니, 검고 침묵하던 저 돌들 속에서도 이 옥은 광명을 발하였도다.

天乎命乎 捐舘何促 / 方伯悼惜 列郡奠薦하늘인가 운명인가, 돌아가심이 어찌 그리 촉박한지. 관찰사가 슬퍼하고 고을들마다 제물을 올려 제사하였도다.

不有公議 此何以獲 / 歸葬于榮 疊石之麓공론이 있지 않았다면 어찌 이런 대접을 받았겠는가. 영주 첩석산 기슭에 돌아가 묻히셨도다.

晦顯屈伸 此理不惑 / 百世在前 永垂令名어둠과 밝음, 굽힘과 폄이 이 이치에서 어긋나지 않으니, 백 세대 뒤에도 길이 좋은 이름을 드리우리라.

有如不信 視此刻銘만약 믿지 못하겠거든, 여기 새긴 명문을 보라.

 

병인년한식절풍산 후인 유준영 지음

 

墓誌銘묘지명

 

公諱汝檼공휘여은字隆甫자융보姓呉氏성오씨高敞人고창인號洛厓호낙애上祖諱學麟상조휘학린麗朝翰林려조한림歴數世력수세有諱季孺유휘계유以贊成事封牟陽君이찬성사봉모양군國初국초諱滎蔭判官휘형음판관錄原從勲록원종훈陞嘉善승가선是生諱碩福시생휘석복縣監현감贈左通禮증좌통례中廟改玉중묘개옥受功券수공권始南下시남하家咸安茅谷里가함안모곡리號三友호삼우諱彦毅휘언의縣監현감贈左承旨증좌승지號竹塢호죽오退溪先生銘其墓퇴계선생명기묘是為公曾祖시위공증조祖諱守貞조휘수정淑陵參奉숙릉참봉贈吏曹參判증이조참판考諱澐고휘운宰東都尹재동도윤遊退溪유퇴계南冥兩先生門남명양선생문甚荷奬與심하장여世稱竹牖先生세칭죽유선생妣金海許氏貞夫人비김해허씨정부인生員士廉女생원사염녀嘉靖辛酉十一月十八日가정신유십일월십팔일生公于宜寧佳禮里第생공우의령가례리제公自幼才哭不凡공자유재곡불범及長급장與仲弟敬菴公汝橃聯床講劘여중제경암공여벌련상강마蔚為規範울위규범為鄕黨所推위향당소추大人公書대인공서廉謹忠信염근충신四字授公사자수공公以為終身符공이위종신부宣廟辛卯선묘신묘中司馬試중사마시翌年倭夷入寇익년왜이입구公隨先公後공수선공후捐財扶義연재부의推郭公再祐為大將추곽공재우위대장指畫甚多지화심다亂定란정啓聞錄勲계문록훈授司宰監直長수사재감직장己酉기유, 金泉道察訪김천도찰방化洽政平화흡정평吏民咸服사민함복癸丑계묘始大闡시대천授弘文館檢閱수홍문관검열時光海斁倫시광해두륜有西宮之變유서궁지변公見機先退공현기선퇴人多偉之인다위지丙辰병진除司諫院司諫제사간원사간以親癠懇辭이친제간사陳孝理不赴진효리불부丁巳정사居先公憂거선공우啜粥廬墓철죽여묘服闋복결又除弘文館典翰우제홍문관전한赴召處還부소처환庚申경신丁先妣憂정선비우守墓終制如前수묘종제여전壬戌임술除侍講院輔德제시강원보덕累辭不赴누사불부晩置別業於洛江之上만치별업어낙강지상自號曰洛厓자호왈낙애惟以漁樵自適유이어초자적不復言時事불복언시사癸亥계해仁廟改紀인묘개기倻黨就戮야당취륙忤公者오공자以汚跡構誣이오적구무投甲山투갑산未幾量移端川미기양이단천癸酉계유特宥특유時公年七十三시공년칠십삼縲苦之餘류고지여病劇而歿于館병극이몰우관乃是年八月十八日也내시년팔월십팔일야及櫬還州급츤환주郡賻吊者衆군부적자중葬疊石坐甲之原장첩석좌갑지원前配尚州周氏전배상주주씨校理博女교리박녀無育무육後配高靈朴氏후배고령박씨縣監廷琬女현감정완녀生二男三女생이남삼녀長益煥장익환文科修撰문과수찬, 次益熀차익엽生員護軍생원호군號誠齋호성재有篤行유독행出為敬菴公後출위경암공후女適鄭稜녀적정릉許宗茂허종무李宗培이종배餘男益煇여남익휘益煒익위孫曾以下손증이하不盡錄불진록嗚呼오호公之被誣공지피무觀於朴公醉睡漉관어박공취수록崔公蠧窩興璧之識최공두와흥벽지지可辨가변而足為百世之信案矣이족위백세지신안의後之尚論之士후지상론지사亦因此而闡發幽潛역인차이천발유잠則公之一時之屈칙공지일시지굴亦何損之有哉역하손지유재孫某等抱遺書責손모등포유서책墓銘顧非其人묘명고비기인辭不獲사불획略叙顚末如右략서전말여우

銘曰명왈

 

玊可玷숙가점心不可疵也심불가자야石可礴석가박道不可虧也도불가휴야

公之心與道공지심여도不疵而不虧불자이불휴則昭千如칙소천여白日之不可欺也백일지불가기야

清洛之南청낙지남于以忘飢우이망기疊石之東첩석지동于以孝思우이효사

摭餘芳而為銘척여방이위명無謂我謏辭무위아소사

 

歲赤虎之流火郎세적호지유화國子生宣城金緯奎謹撰국자생선성김위규, 근찬

 

묘지명墓誌銘

 

공의 휘는 여은汝檼이고 자는 융보隆甫이며 성은 오씨이다. 본관은 고창이며 호는 낙애洛厓이다.

상조上祖는 고려 때 한림을 지낸 휘 학린學麟이다. 여러 세대를 내려와 휘 계유季孺가 있어 찬성사를 지내고 모양군牟陽君에 봉해졌다.

조선 초에는 휘 형이 음판관으로 공을 세워 공신에 녹훈되고 가선대부로 승진하였다. 그가 낳은 휘 석복碩福은 현감을 지냈으며 좌통례로 추증되었다. 중종반정 때 공훈록에 오르면서 비로소 남쪽으로 내려와 함안 모곡리에 살게 되었고 호는 삼우三友였다.

증조 휘 언의彦毅는 현감을 지냈고 좌승지로 추증되었으며 호는 죽오竹塢이다. 퇴계 이황이 그의 묘지명을 지어 주었다. 이분이 공의 증조이다.

조부 휘 수정守貞은 숙릉 참봉을 지냈고 이조참판으로 추증되었다.

부친 휘 운은 동도부윤(경주부윤)을 지냈으며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 두 선생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크게 인정받았다. 세상에서는 죽유선생竹牖先生이라 불렀다.

모친은 김해 허씨 정부인으로 생원 허사렴의 딸이다.

공은 명 가정 신유년(1561) 1118일에 의령 가례리 집에서 태어났.공은 어려서부터 재능이 남달랐고 성장하면서 아우 경암공 여벌(汝橃)과 함께 한 이불에서 자며 학문을 토론하였다. 학문과 품행이 뛰어나 향리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부친이염근충신廉謹忠信네 글자를 써 주었는데 공은 이를 평생의 지표로 삼았다.

선조 신묘년(1591)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이듬해 왜적이 침입하자 공은 부친을 따라 의병 활동에 참여하였다. 재산을 내어 군사를 돕고 곽재우를 대장으로 추대하는 데 힘썼으며 군사 계획에도 많은 역할을 하였다.

난리가 끝난 뒤 공로가 보고되어 사재감 직장이 되었다.

기유년(1609)에는 김천 찰방으로 나가 교화가 잘 이루어지고 정사가 공평하여 관리와 백성들이 모두 따랐다.

계축년(1613)에 대과에 오르니 조정에서 크게 천거되어 홍문관 검열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당시 광해군 때 윤리가 무너지고 서궁의 변이 일어나자 공은 형세를 살피고 미리 물러났다. 사람들은 그의 처신을 높이 평가하였.

병진년(1616)에 사간원 사간으로 임명되었으나 부모의 병을 이유로 간절히 사양하며 효도를 이유로 나아가지 않았다.

정사년(1617)에는 부친상을 당해 죽을 먹으며 묘막에서 살았다. 상기를 마친 뒤 다시 홍문관 전한에 임명되어 잠시 부름에 응했다가 곧 돌아왔다.

경신년(1620)에는 다시 모친상을 당해 묘를 지키며 삼년상을 마쳤다.

임술년(1622)에는 시강원 보덕에 임명되었으나 여러 번 사양하였다.

만년에 낙동강 위에 별장을 지어 스스로 낙애洛厓라 호하였다. 고기 잡고 나무하며 스스로 즐겼고 다시는 세상 일을 말하지 않았다.

계해년(1623) 인조반정이 일어나 역당들이 처벌되었는데 공과 원한이 있던 자들이 억지로 죄를 꾸며 갑산으로 유배하였다.

얼마 뒤 단천으로 이배되었고 계유년(1633)에 특별히 사면되었다.

그러나 이때 공은 이미 73세였고 오랜 유배 생활로 병이 깊어 그해 818일 객관에서 세상을 떠났다.

상여를 고향으로 모실 때 여러 고을에서 부의와 조문이 이어졌다. 첩석 갑좌 언덕에 장사하였다.

첫 부인은 상주 주씨로 교리 주박의 딸이며 자식이 없었다.

둘째 부인은 고령 박씨로 현감 박정완의 딸이다.

자식은 23녀로 장남 익환은 문과에 급제하여 수찬을 지냈고, 차남 익엽은 생원으로 호군이 되었으며 효행이 지극하여 호를 성재라 하였다. 그는 경암공의 후사가 되었다. 딸들은 각각 정릉, 허종무, 이종배에게 시집갔다. 그 밖의 아들 익휘, 익위와 손자·증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못한다.

, 공이 모함을 받은 사실은 취수 박록의 글과 두와 최흥벽의 후기를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이 기록들은 후세에도 믿을 수 있는 증거가 될 것이다. 후세의 논자들이 이를 근거로 숨겨진 사실을 밝힌다면 공이 일시적으로 겪은 억울함이 어찌 그의 명예를 해치겠는가.

후손들이 유고를 가지고 와 묘지명을 부탁하였다. 묘명을 짓기에 내가 적임자가 아니나, 사양해도 얻지 못하여 대략의 전말을 위와 같이 서술하고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銘曰명왈

 

玊可玷숙가점, 心不可疵也심불가자야. 옥은 흠집이 날 수 있으나, (공의) 마음은 허물이 있을 수 없네.

石可礴석가박, 道不可虧也도불가휴야. 

돌은 부서질 수 있으나, (공이 지킨) 도는 이지러질 수 없네.公之心與道공지심여도, 不疵而不虧불자이불휴,

공의 마음과 도가 허물없고, 이지러짐이 없으니.

則昭千如즉소천여, 白日之不可欺也백일지불가기야. 

그 밝음이 천년토록, 대낮의 햇빛처럼 속일 수 없으리라.

清洛之南청락지남, 于以忘飢우이망기.

맑은 낙동강 남쪽에서 굶주림도 잊은 채 (은거하며) 지냈고,疊石之東첩석지동, 于以孝思우이효사.

첩석산 동쪽 기슭에서 효심으로 (조상을) 생각하도다.摭餘芳而為銘척여방이위명, 無謂我謏辭무위아소사.

남겨진 꽃다운 향기(덕행)를 채집하여 명을 지으니, 나의 이 글을 알랑거리는 헛된 말이라 하지 마라.

 

적호년유월 국자생선성김위규삼가 짓다.

 

實錄실록

吳君武烈袖遺稿一局而示余曰오군무열수유고일국이시여왈:「此吾先祖洛厓公遺集也차오선조낙애공유집야斷爛餘存단난여존不過全鼎之一臠불과전정지일련迄于今藏在巾笥者흘우금장재건사자莫非子孫零殘故也막비자손영잔고야請吾丈一言以識之청오장일언이지지。」余讀訖여독흘喟然嘆曰위연탄왈隱見有時은견유시早晩何關焉조만하관언且夫是非不兩立차부시비불양립公私不並行공사불병행在上君子재상군자有以按其本而據其實유이안기본이거기실則自有下落處칙자유하낙처理皎然也리교연야毛施모시王嬙왕장天下皆稱美色천하개칭미색而魚見之深入이어견지심입獸見之驟走수견지취주非他類異故也비타뢰이고야類也者也뢰야자야如拔茅茹여발모여各以彙征者也각이휘정자야當昏朝斁倫之時당혼조두륜지시群兇用事군흉용사忠良遠舉충량원거公能炳幾於君臣之際공능병기어군신지제, 而知諫不聽이지간불청乞暇養親於榮川草谷里걸가양친어영천초곡리而結數架於洛江之厓이결삭가어낙강지애扁之曰편지왈洛厓江舍낙애강사以終孝養이종효양吟嘯自適음소자적公可謂知微知彰공가위지미지창而深有得於介石不終日之義也이심유득어개석불종일지의야朋黨已成붕당이성互相矛盾호상모순朝著大謬조저대류絶意於其間得失절의어기간득실高蹈隱淪고도은륜以待天下之清이대천하지청又取諸匹夫立志之象也우취제필부립지지상야召命累下소명루하懇辭呈遞간사정체默巖棲匹處묵암서필처不忘江湖之憂불망강호지우以子弟之連捷科甲이자제지련첩과갑恒有惡盈之戒항유악영지계丙辰병진由玉署除司諫유옥서제사간時竹牖公自青松任所告病徑還시죽유공자청송임소고병경환因以親癠懇辭遞職인이친제간사체직丁巳정사丁外艱정외간已未이미服闋복결是年又除弘文館시년우제홍문관旋即呈遞還鄕선즉정체환향庚申경신遭內艱조내간守墓終制수묘종제前後如一전후여일六年居廬육년거여自是絶類離群자시절뢰리군念絶粉華념절분화托跡江湖탁적강호以為終老之計이위종노지계逮夫仁廟改玉체부인묘개옥北人盡敗북인진패朴翀衢以為吳某倻黨所與박충구이위오모야당소여誣陷極甚무함극심安知前日敬菴公疏中玉堂回互之論안지전일경암공소중옥당회호지론足以藉蠆尾之毒也耶족이자채미지독야야于時龍潭亦在玉堂우시용담역재옥당因是蓄憾故也인시축감고야禍將不測화장불측朝野憤冤조야분원醉睡朴公漉貽書諫長취수박공록이서간장極言誣枉之冤극언무왕지원又曰우왈若法司不察약법사불찰必有玉石俱焚之歎필유옥석구분지탄於是減等安置於甲山荒北之地어시감등안치어갑산황북지지君子處剝之時군자처박지시而不咨嗟憂戚이불자차우척不變其所守불변기소수無湘累楚囚之悲무상루초수지비日以書史自娛일이서사자오與蔡元定舂陵時事여채원정용릉시사死生禍患사생화환古今一致고금일치苞苴自安於性命之能如是포저자안어성명지능여시及天日重明급천일중명覆盆必照복분필조癸酉계유有全釋復官之命유전석복관지명時病不能上道시병불능상도竟卒於寓館경졸어우관時人惜之시인석지竊觀公履歷절관공리역每於記매어기啞鷄아계》《堠人후인》《蘇武소무》《文山문산等篇등편概見矣개견의被誣事피무사醉睡朴公與諫長書盡之矣취수박공여간장서진지의嗚呼오호當時朝廷時論已定당시조정시론이정道內諸君子信筆自載도내제군자신필자재復何贅說哉복하췌설재毫性雖潔호성수결吹之則有疵취지칙유자米性雖精미성수정簸之則有秕파지칙유비以是求之이시구지名下無完人也명하무완인야必矣필의為之畫於卷端위지화어권단

丙寅臘月上澣병인맹월상한

國子生靈山朴璣烈謹撰국자생령산박기열근찬

 

실록

 

어느 날 오군吳君 무열武烈이 유고 한 책을 품에 안고 와 나에게 보여 주며 말하였다.

이는 우리 선조 낙애공洛厓公의 유집입니다. 다만 세월이 지나며 많이 흩어지고 훼손되어 지금 남아 있는 것은 온 솥의 고기 중 한 점에 불과합니다. 지금까지 상자 속에 남아 있는 것도 자손들이 제대로 보존하지 못하여 흩어지고 남은 것뿐입니다. 부디 선생께서 한마디 글을 남겨 기록해 주십시오.”

나는 책을 다 읽고 나서 깊이 탄식하며 말하였다.

숨겨지고 드러나는 데에는 때가 있는 것이니, 그것이 이르거나 늦은 것이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또한 옳고 그름은 함께 설 수 없고, 과 사는 함께 행해질 수 없다. 위에 있는 군자가 근본을 살피고 사실에 근거하여 판단한다면 마침내 자연히 옳고 그름이 가려질 것이다.

모장과 서시, 왕소군은 천하에서 모두 아름다운 미인으로 불렸지만 물고기는 그들을 보면 깊이 잠기고 짐승은 놀라 달아났다. 이는 그들이 다른 종류이기 때문이 아니라 각기 서로 다른 무리에 속하기 때문이.

마치 띠풀을 뽑으면 뿌리가 서로 이어져 함께 뽑히듯, 무리는 서로 같은 무리를 따른다.

어지러운 임금이 윤리를 무너뜨리던 시절에는 흉악한 무리들이 권력을 잡고 충직하고 선한 사람들은 멀리 물러났다.

그때 공은 군신 사이의 형세를 밝게 살펴 간언이 받아들여지지 않음을 알고 휴가를 청하여 영천(영주) 초곡리로 돌아가 부모를 봉양하였다. 그리고 낙강 가에 집 몇 칸을 짓고 낙애강사洛厓江舍라 이름 붙여 효도를 다하며 시를 읊고 노래하며 스스로 즐겼다.

공은 참으로 미세한 조짐을 보고 큰 결과를 아는 사람이었으며, 주역개석介石처럼 굳게 지켜 하루도 지나지 않는다는 뜻을 깊이 체득한 인물이라 할 것이다.

당시 붕당이 이미 형성되어 서로 대립하며 조정이 크게 어지러웠다. 공은 벼슬의 득실에 마음을 두지 않고 높이 물러나 숨어 살며 천하가 맑아질 때를 기다렸다.

또한주역에서 말하는 말 한 필이 외롭게 서 있는 상처럼 홀로 뜻을 지키는 처신이었다.

조정에서 여러 번 부름이 내려왔으나 간절히 사양하거나 사직하고 돌아왔다. 깊은 산속에서 홀로 살았지만 강호의 근심, 곧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은 잊지 않았다.

자식들이 과거에 연달아 급제하자 오히려 재앙이 가득 찰까 염려하였.

병진년(1616)에 홍문관에서 나와 사간으로 임명되었는데 이때 죽유공이 청송에서 병으로 돌아오자 공은 부모의 병을 이유로 간절히 사직하였다.

정사년(1617)에는 부친상을 당해 묘막에서 살았고, 기미년(1619)에 상기를 마치자 다시 홍문관 전한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돌아왔다.

경신년(1620)에는 모친상을 당하여 다시 묘막을 지키며 상을 마쳤다. 이렇게 전후 6년 동안 묘막 생활을 하였다.

그 뒤로는 세속을 떠나 무리와 떨어져 살며 화려한 세상과 인연을 끊고 강호에 몸을 맡겨 노년을 보내려 하였다.

그런데 인조가 즉위하여 북인이 몰락하자, 박충구가 오 아무개는 북당과 같은 무리라고 하며 심하게 모함하였다.

생각해 보면 옛날 경암공 오여벌이 올린 상소 가운데 홍문관의 잘못을 논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 용담 박이장이 홍문관에 있었으므로 그 원한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화가 장차 헤아릴 수 없게 되자 조정과 지방의 사람들이 모두 분개하였다.

이때 취수 박록이 사간장에게 편지를 보내 공이 억울하게 모함을 받았음을 강력히 변론하며 말하였다.

만약 법사가 사실을 밝히지 못한다면 옥과 돌이 함께 타버리는 일이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형벌이 감해져 갑산에 유배되었다.

공은 북쪽의 거친 땅에서 유배 생활을 하면서도 군자가 쇠운을 만났을 때처럼 근심하거나 슬퍼하며 절개를 바꾸지 않았다.

마치 초나라에 잡혀 간 굴원의 탄식도 없었고, 날마다 책을 읽으며 스스로 즐겼다.

또한 채원정이 순릉에서 겪었던 일처럼, 생사와 화복은 예나 지금이나 같은 것이라 여기고 자신의 성명에 맡기며 편안히 지냈다.

마침내 하늘의 밝은 판단이 다시 드러나 계유년(1633)에 완전히 사면되어 복관 명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공은 이미 병이 깊어 길을 떠날 수 없었고 결국 객관에서 세상을 떠났다. 사람들은 이를 몹시 애석하게 여겼다.

내가 공의 행적을 살펴보니 그의 뜻은아계,후인,소무,문산등의 작품에서 대략 알 수 있었다.

모함을 받은 사건은 이미 취수 박록이 사간장에게 보낸 편지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 당시 조정의 공론은 이미 정해져 있었고 지방의 여러 군자들도 글로 기록해 두었으니 내가 다시 장황하게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붓털이 아무리 깨끗해도 불면 흠이 생기고, 쌀이 아무리 정밀해도 까불면 겨가 생긴다. 이처럼 세상에서 이름 있는 사람에게 완전무결한 인물은 없는 법이다.

이에 이 글을 책의 첫머리에 써 둔다.

 

병인년(1926) 그달 상순, 국자생령산박기열삼가 쓰다

 

 

右洛厓先生吳公遺集詩若文雜著우낙애선생오공유집시약문잡저並附錄狀碣上下二卷병부록장갈상하이권甚零星也심령성야公以竹牖為父공이죽유위부敬菴為弟경암위제家建承襲之懿가건승습지의淵源造詣之篤연원조예지독有非同時諸君子所可冀及유비동시제군자소가기급則文章著述之侈儉칙문장저술지치검亦其餘事역기여사而況在三百餘年斷爛之後者乎이황재삼백여년단란지후자호勇赴大難용부대난特進勳資특진훈자職掌弘文직장홍문不次陞薦불차승천鍾鼎之器종정지기黼黻之才보불지재庶有以大展巖廊서유이대전암랑康濟皇猷강제황유而不幸遭時昏廢이불행조시혼폐斂退湖山렴퇴호산伴白鷗반백구點烟波점연파把一竿除萬事파일간제만사炳然先見병연선견優游自適우유자적洛上題一須낙상제일수足以追芒碭之隱倫족이추망탕지은륜元祐之遺賢矣원우지유현의而匪躬難濟이비궁난제剝床之災已近박상지재이근重被恩譴중피은견終於羈旅종어기여及夫蒙宥舁返급부몽유여반方伯弔典방백조전列郡致賻열군치부苟非㭗於時論구비울어시론洽乎眾望흡호중망安能有是哉안능유시재昔唐柳州석당유주賦遷謫부천적多出怨尤다출원우宋滕甫송등보乞量移걸량이只自辨明지자변명若公則安於所遇약공칙안어소우略無絲毫形諸言意략무사호형제언의至於지어蘇武소무》《文山문산》《堠人후인》《啞鷄아계》,莫不寓意自警막불우의자경使人讀之사인독지有可勉勵유가면려有可規戒유가규계其賢古人遠矣기현고인원의後孫某階후손모계夫愈久而愈昧부유구이유매將鋟棗而壽其傳장침조이수기전役之始역지시責永祖以識其末책영조이지기말顧晚生涼學고만생량학不敢擬議於前輩出處之道불감의의어전배출처지도而竊慨乎我東黨論之構陷良善이절개호아동당론지구함량선吹毛摘疵취모적자鮮有完義之君子선유완의지군자無乃妒賢嫉能之成習也무내투현질능지성습야茲集之成자집지성寧不為來後立朝蔽賢者明鑑哉영불위래후립조폐현자명감재因書所感於中者인서소감어중자以為洛厓集跋이위낙애집발

柔兆攝提格淸和節上澣유조섭제격청화절상한檜山黃永祖謹회산황영조근

 

 

오른쪽의 낙애선생 오공 유집은 시와 문장, 잡저와 부록, 가장과 묘갈을 위아래 두 권으로 엮은 것이니, 참으로 빛나는 별과 같은 문집이라 할 만하다.

, 공은 죽유竹牖를 아버지로, 경암敬菴을 아우로 두었으니, 집안의 아름다운 학문 전통을 이어받아 그 연원은 깊고 학문적 성취 또한 두터워, 당시 여러 군자들이 감히 바랄 수 있는 경지에 이른 것이 아니었다.

그 문장은 화려함을 자랑하지 않고 검약하고 담박하였으니, 이는 다만 그의 여가에 속하는 일일 뿐이다.하물며 삼백여 년의 세월 속에서 문헌이 많이 흩어지고 훼손된 뒤에도 이렇게 남아 있는 것이 어찌 가볍게 여길 일이겠는가.

공은 큰 난리에 용감히 나아가 국가의 위난을 구하려 했고, 특별히 공훈을 인정받아 자급이 올랐으며 홍문관의 직임을 맡고 차례를 뛰어넘어 천거되었다.

그릇으로 말하면 종정鐘鼎에 올릴 만한 인물이고, 재능으로 말하면 나라를 아름답게 꾸밀 보필의 재주를 갖춘 사람이었다.

진실로 조정의 높은 자리에서 크게 뜻을 펼쳐 나라를 편안하게 하고 왕업을 도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어두운 시운을 만나 조정이 폐색되자, 그는 물러나 호수와 산에 은거하며 흰 갈매기를 벗 삼고 물결 위 안개 속에서 노닐었다.

손에 낚싯대를 들고 만사를 떨쳐버리니 일찍이 세상의 형세를 꿰뚫어 보았고 한가히 노니는 가운데 스스로 즐겼다.

낙수 가에 한 번 머물며 시를 지은 것만으로도 이는 마치 망탕芒碭에 숨은 은자나 송나라 원우 연간의 유현을 따를 만하다.

그러나 몸을 돌보지 않고 세상을 구하려다 마침내 박상剝床의 화와 같은 재난을 당하여 마침내 다시 큰 죄책을 입고 유배지에서 생을 마쳤다.

뒤에 사면되어 관을 메어 돌아오자 방백이 조문 의식을 행하고 여러 고을에서 부의를 보냈다.

만약 당시의 여론이 그를 신뢰하지 않았고, 사람들의 기대가 모이지 않았다면 어찌 이런 일이 가능했겠는가.

옛날 당나라의 유주柳州 유배의 슬픔을 글로 지어 원망과 탄식이 많았고, 송나라의 등보滕甫는 거처를 옮겨 달라 청하며 다만 스스로를 변명하는 말만 하였다.

그러나 공은 처한 상황을 편안히 받아들이고, 조금도 원망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그 마음의 뜻을 글과 말로 드러낸 일이 거의 없었다.

다만소무蘇武,문산文山,후인堠人,아계啞鷄와 같은 글 속에 자신을 경계하고 스스로를 일깨우는 뜻을 담았을 뿐이다.

사람이 이것을 읽으면 스스로 힘써야 할 바를 깨닫게 되고, 또 경계해야 할 바를 알게 된다.

그의 어짊은 실로 옛 사람에 비해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

후손 아무개는 세월이 흐를수록 이 문집이 더욱 사라질까 두려워 마침내 판목에 새겨 오래 전하려 하였다.

이에 간행의 처음을 맡으면서 영조永祖에게 말미의 글을 써 달라 부탁하였다.

나는 늦게 태어나 학문이 얕아 선배들의 출처出處의 도를 감히 논할 수는 없으나, 다만 우리 동방의 당론이 서로 얽혀 선량한 사람을 모함하고 털끝만한 허물도 들추어내어 온전한 의리를 지킨 군자가 드물게 된 현실을 개탄할 뿐이다.

이는 아마도 어진 이를 시기하고 능한 이를 미워하는 풍습이 오래도록 굳어졌기 때문이 아닐까.

이 문집이 이루어졌으니 훗날 조정에서 어진 이를 가리는 사람들에게 거울이 되지 않겠는가.

이에 마음속에 느낀 바를 적어낙애집의 발문으로 삼는다.

 

유조섭제격청화절상한회산황영조黃永祖삼가 쓰다.

이 발문은 낙애 오여은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핵심 구절

용부대란勇赴大難 국가 위기에 몸을 던짐

안어소우安於所遇 략무원우略無怨尤 유배에서도 원망 없음

래후립조폐현자지명감來後立朝蔽賢者之明鑑 후대 정치가의 거울

당쟁으로 희생된 절의 관료라는 평가가 명확하다.

 

後叙후서

 

孟子曰맹자왈:「誦其詩송기시讀其書독기서不知其人불지기인可乎가호?」夫誦且讀矣부송차독의而猶或不知者이유혹불지자非惑歟비혹여觀於洛厓吳先生遺稿관어낙애오선생유고可以留想矣가이유상의蓋公以聰穎之才개공이총영지재承襲家庭之訓승습가정지훈德器夙就덕기숙취人皆以遠大期之인개이원대기지龍蛇之變용사지변舉義糾旅거의규려從郭忠翼公종곽충익공協贊軍籌협찬군주忠靖亂事충정란사聞錄勳문록훈出而莅民출이리민民歌來暮민가래모而政尚廉平이정상렴평鎮撫難散진무난산治聲藉菀치성자울朝著紊亂조저문란絶意名途절의명도慎幾求退신기구퇴築別業於洛上축별업어낙상息交斂跡식교렴적口不道朝政得失구불도조정득실優游吟哦우유음아以為畢老之計이위필로지계人多以炳幾偉之一인다이병기위지일배蓄憾伺機축감사기構誣難之於罷舉之鴻구무난지어파거지홍而竟賦於長沙之鵩이경부어장사지복頓無慍見於色辭之間돈무온견어색사지간篤信天命독신천명不知瘴癘之在身불지장려지재신與知舊酬答여지구수답亦未嘗有一語悲憤之懷역미상유일어비분지회及夫蒙宥復官급부몽유복관尚未還鄉상미환향而竟疾不起이경질불기嗚呼命也夫오호명야부忠也충야廉也염야謹也근야信也신야出處之大方也출처지대방야此蓋先公竹牖翁之得於陶山旨訣차개선공죽유옹지득어도산지결而手書四字이수서사자籍記佩服적기패복為終身之符위종신지부則其不為趨權附勢也必矣칙기불위추권부세야필의彼惑於妨賢病國之黨習피혹어방현병국지당습而生疑於可信之地者이생의어가신지지자何足可辨哉하족가변재, 後孫應澈甫후손응철보與其嗣孫聖烈甫여기사손성열보蒐拾詩文若干於數百年斷爛之中수겁시문야간어삭백년단란지중方欲繡梓沐梨방욕수재목리而使其門少仁鐸君責其一言於卷端이사기문소인탁군책기일언어권단余不敢以不文終辭여불감이불문종사略敘其槪략서기개以寓景仰之忱云爾이우경앙지침운이余不敢以不文終辭

商山後人상산후인 周鶴宣주학선

 

후서後叙

 

맹자가 말하였다.그 시를 외우고 그 글을 읽으면서, 그 사람을 알지 못한다면 어찌 옳다 하겠는가?”

대저 이미 외우고 또 읽었으면서도 오히려 그 사람을 알지 못한다면, 이는 미혹됨이 아니겠는가.

이제 낙애 오선생의 유고를 살펴보면, 그 사람을 능히 마음속에 그려볼 수 있다.

대체로 공은 총명하고 뛰어난 자질로 집안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덕과 기량이 일찍부터 이루어졌으니, 사람들이 모두 그 큰 성취를 기대하였.

용사龍蛇의 난리에 이르러 의병을 일으켜 무리를 규합하고, 곽충익공을 따라 군사 계책을 도와 난리를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마침내 공훈이 기록되었다.

밖으로 나가 백성을 다스릴 때에는 백성들이내일도 오시기를 바란다고 노래할 만큼 정사가 청렴하고 공평하였으며, 흩어진 민심을 안정시키고 다스림의 명성이 조정에까지 퍼졌다.

그러나 조정이 어지러워지자 벼슬길에 뜻을 끊고, 기미를 살펴 물러날 것을 구하여 낙동강 가에 별업을 짓고, 교유를 끊고 자취를 감추며, 입으로는 조정의 득실을 말하지 않았다.

유유히 시를 읊으며 늙음을 마칠 계책으로 삼으니, 사람들은 이를 두고 시기를 알아 물러난 훌륭한 인물이라 하였다.

그러나 한 무리의 사람들이 원망을 품고 기회를 엿보다가, 마침내 무함을 꾸며 큰 죄로 몰아넣었다.

이에 장사長沙의 적소에서 굴원의 복조부와 같이 자신의 처지를 읊었으나, 얼굴빛이나 말 사이에 조금도 원망하는 기색이 없었고, 명을 독실히 믿어 장려瘴癘가 몸에 이른 것도 알지 못하는 듯하였.

옛 벗들과 주고받는 글에서도 일찍이 한 마디도 슬픔과 분노를 드러낸 적이 없었다.

뒤에 사면을 입어 벼슬이 회복되었으나, 고향으로 돌아가지도 못한 채 마침내 병으로 일어나지 못하였다., 이것이 운명인가!

()과 청렴(), 삼감()과 신의()는 벼슬에 나아가고 물러남의 큰 법도이다.

이는 선친 죽유옹이 도산(퇴계의 학맥)에서 얻은 요체로서, 친히 이 네 글자를 써서 기록해 두고 몸에 지니며 평생의 지표로 삼았으니, 권세에 아첨하고 세력에 붙지 않았음은 필연이다.

, 저 어진 이를 해치고 나라를 병들게 하는 당파의 습속에 미혹되어, 믿어야 할 바를 의심하는 자들이야 어찌 변별할 가치가 있겠는가.

후손 응철사손嗣孫성열이 수백 년 동안 흩어지고 해어진 가운데서 시문을 모아 간행하려 하였고, 문중의 인탁 군이 나에게 권두에 한마디를 부탁하였다.

나는 글이 부족함을 핑계로 끝내 사양하지 못하고, 대략 그 개요를 서술하여 우러러 사모하는 뜻을 붙일 뿐이다.

 

상산후인 주학선은 삼가 쓰다.

 

洛厓吳先生遺集後叙낙애오선생유집후서. 송해익宋海翼惟我洛厓先生유아낙애선생生於名庭생어명정克受庭訓극수정훈兄弟交相勉勵형제교상면려飭身修行칙신수행故一時嶺中先輩고일시영중선배莫不許之以後進之英髦막불허지이후진지영모名家之風韻矣명가지풍운의三十登賢館삼십등현관五十始通籍오십시통적誓不爲匿近權要서불위익근권요歷颺名途역양명도雖由瀛選수유영선牢卧不起者뇌와불기자이혼조야상명불부망以昏朝倻相名不副望칙잠복낙애則潛伏洛厓교수림하膠守林下고기시야固其時也且丙辰辭以親癠차병진사이친제丁巳遭外艱정사조외간庚申丁內艱경신정내간六年居憂육년거우跡不出世적불출세癸亥改玉계해개옥羣士雖就戮군사수취육而公實超然於禍海風檣矣이공실초연어화해풍장의所謂朴而章之子翀衢소위박이장지자충구蓄憾於公之弟敬庵公축감어공지제경암공以玉堂彈及其父이옥당탄급기부因此構誣인차구무擠之以倻黨제지이야당竟不免窮北之竄경불면궁북지찬而天日孔昭이천일공소旋復量移선복양이遄降蕩釋之典천항탕석지전而又有仙館巖이우유선관암仙鶴巖선학암大藏巖대장암夫子之所記所存者부자지소기소존자都輸入於巖之幾層精神도수입어암지기층정신而巖始有名於幾千百年이암시유명어기천백년則公之巖칙공지암自此而得其棲於無窮矣자차이득기서어무궁의不但爲兹邱之賀불단위자구지하而實爲斯巖之賀焉이실위사암지하언日其從子壹陽일기종자일양持公咳唾之餘拾지공해타지여섭曁記德之狀기기덕지장以示蒙陋이시몽루而嘆其棲巖之有號無序이탄기서암지유호무서則公昔爲吾家梅石賢賓칙공석위오가매석현빈數承鐫誨삭승전회而顧不可以無文辭이고불가이무문사之略綴數語지략철삭어以爲托棲之高趣焉이위탁서지고취언則雖畢命於絶塞徼칙수필명어절색요而玉上靑蠅이옥상청승渙然氷釋矣환연빙석

淸濁分門청탁분문邪正異路사정이로此不可瞥眼淆之차불가별안효지而巧舌之吹影鏤塵이교설지취영루진禍人機穽화인기정至於此極乎지어차극호海翼忝在外裔해익첨재외예案其遺集안기유집則庶可仰想其十年見機之作칙서가앙상기십년견기지작洛厓高蹈之淸낙애고도지청而奉讀其堠人傳이봉독기후인전啞鷄賦아계부則尤不禁涕横於百載之後矣칙우불금체횡어백재지후의略付一言憾慨之衷략부일언감개지충於僉君子敍述之下焉어첨군자서술지하언

 

낙애오선생유집후서.

 

오직 우리 낙애선생은 명문가에서 태어나 가정의 가르침을 잘 이어받고 형제들이 서로 권면하며 몸을 닦고 행실을 수양하였으므로 당시 영남의 선배들 가운데 그를 후진의 영재로 인정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명문가의 풍도를 지녔다.

서른에 현관에 들고 쉰에 비로소 관적에 올랐으나 권세 가까이 숨거나 아첨하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벼슬길에 나아가 이름을 드날렸으되 비록 망선瀛選(청요직)에 올랐어도 굳게 누워 나아가지 않은 것은 혼란한 조정과 간신이 이름에 걸맞지 않았기 때문이니 이에 낙애에 은거하여 숲 아래에 굳게 지킨 것이 실로 그때의 처신이었다.

또 병진년에는 부모 병환으로 사직하고 정사년에는 부친상을 당하고 경신년에는 모친상을 당하여 육년 동안 상중에 있으면서 세상에 나아가지 않았다. 계해년에 정국이 바뀌었으나 많은 선비들이 화를 입었음에도 공은 실로 화란의 바다에서 돛을 단 배처럼 초연히 벗어났었다.

이른바 박이장朴而章의 아들 충구가 공의 아우 경암공에게 원한을 품고 홍문관의 탄핵으로 그 아버지에게까지 미치게 하여 이로 인해 모함을 꾸며 왜당이라 몰아붙여 끝내 북방 유배를 면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하늘의 밝은 판단으로 곧 죄가 감해지고 이내 사면의 은전이 내려졌다.

또 선관암, 선학암, 대장암 등 선생이 기록하고 남긴 것들이 모두 바위의 여러 층에 정신처럼 스며들어 그 바위가 비로소 수천백 년에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에 공의 바위는 이로부터 무궁히 깃들 곳을 얻게 되었으니 이는 단지 이 언덕의 경사가 아니라 실로 이 바위의 경사이기도 하다.

어느 날 종자 일양이 공의 여필餘筆과 기록들을 모아 덕행을 적은 글과 함께 나 같은 부족한 사람에게 보여주며 바위에 이름만 있고 서문이 없음을 한탄하였다.

이에 공은 옛날 우리 집 매석의 훌륭한 빈객으로 여러 번 가르침을 주셨으니 어찌 글 몇 마디라도 남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에 대략 몇 마디를 엮어 그 은거의 높은 뜻을 드러내노니 비록 변방에서 생을 마쳤다 하더라도 옥에 붙은 파리와 같은 참소는 환히 얼음 녹듯 풀릴 것이다.

, 청과 탁은 갈리고 사와 정은 길이 다르니 이를 한눈에 혼동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교묘한 말이 없는 것을 있는 듯 꾸며 사람을 해치는 함정이 여기까지 이르렀도다.

나는 외손 후예로서 그 유집을 살펴보니 그가 십 년 동안 때를 살펴 지은 글과 낙애의 높은 은둔과 맑음을 우러러 상상할 수 있었다.

또 그의 후인전아계부를 읽으니 더욱 몇 백 년 뒤인 지금에도 눈물이 절로 흐름을 금할 수 없었다.

이에 삼가 한마디 감회를 덧붙여 여러 군자의 서술 아래에 붙인다.

 

後識후식

 

吾先祖洛厓公遺詩文若干篇오선조낙애공유시문약간편并諸賢誌狀병제현지장為一冊위일책其寂寥矣기적요의公襲詩禮之家공습시례지가而薰陶於師友之間이훈도어사우지간志潔而行修지결이행수學優而道充학우이도충積於內者既宏而深적어내자기굉이심후著於外者又光明洞達저어외자우광명동달凡出處進退이험치난夷險治亂이험치란終始종시一於義而無所苟焉일어의이무소구언凡出處進退범출처진퇴灑然其襟次之曠쇄연기금차지광而確乎有不可奪之節이확호유불가탈지절見幾之明견기지명介石之貞개석지정既能色舉於昏朝斁倫之際기능색거어혼조두륜지제翩然歸養閒居於十畝之間편연귀양한거어십무지간而斐然之績이비연지적終成食外之虞종성식외지우斑鵩荒徼반복황요遺文蕩佚유문탕일今其存者금기존자殆若象豹之一斑而已태약상표지일반이이惟幸公議未泯유행공의미민群疑已釋군의이석儒先讚述유선찬술後先揄揚후선유양彼一時之昧昧피일시지매매固無與於百世之論고무여어백세지론亦無足以加損於府君之芬者역무족이가손어부군지분자獨其殘膏賸馥之寄在於零篇斷蠧之間者독기잔고승복지기재어령편단두지간자未能公之一世之眼미능공지일세지안而久私巾衍之祕이구사건연지비此則固殘孫之恨也차칙고잔손지한야我先君子為是之懼아선군자위시지구屢加摩挲嘆咤欽欷루가마사탄타흠희裒稡成帙성질繕寫已定선사이정以及弁端之文이급변단지문識後之語식후지어具徵於立言之家구징어립언지가井然有序정연유서庶可付梓서가부재但患物力未敷단환물역미부登木尚遲등목상지而不幸先君遽爾齎志以沒矣이불행선군거이재지이몰의不肖孤大懼此役之終未克成불초고대구차역지종미극성而重貽先君之慽於冥冥之中이중이선군지척어명명지중遂敢謀諸宗수감모제종衆醵金募工중갹금모공既役之日기역지일略叙顚末략서전말並記弘感如此云爾병기홍감여차운이

後孫在春후손재춘

 

후식

 

우리 선조 낙애공의 남겨진 시문 몇 편과 여러 선현들이 지은 묘지와 행장을 모아 한 책으로 엮었으나, , 그 분량이 참으로 적고 쓸쓸하.

공은 시례詩禮의 가문을 이어받고 스승과 벗들 사이에서 교화를 받아 자랐다.

뜻은 맑고 행실은 닦였으며 학문은 뛰어나고 도는 충실하였다.

안에 쌓인 것은 이미 크고 깊었고 밖으로 드러난 것은 밝고 환하였다.

벼슬에 나아가고 물러남과 편안함과 위태로움, 나라의 치란에 이르기까지 처음과 끝이 모두 의에 따랐으며 조금도 구차함이 없었다.

그 마음은 넓고 시원하였고 절개는 굳어 빼앗을 수 없었다.

앞일을 알아보는 밝은 식견과 돌처럼 굳은 절개를 지녔다.

이미 어두운 조정에서 벼슬에 나아갔다가 윤리가 무너진 시국을 보고훌쩍 물러나 열 묘의 작은 땅에 은거하였다.

그러나 끝내 유배되어 변방에서 떠돌게 되었고 남겨진 글들도 많이 흩어졌다.

지금 남아 있는 것은 마치 코끼리나 표범의 몸에서 한 점 무늬만 남은 것과 같다.

다행히 공정한 여론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고 많은 의혹도 이미 풀렸.

유학자 선배들이 찬양하고 기록하여 앞뒤로 그 이름을 드높였다.

한때의 어두운 시비는 백세의 평가에 참여할 수 없으며 공의 훌륭한 덕을 조금도 더하거나 덜지 못한다.

다만 남아 있는 글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못한 채 오랫동안 집안에만 감추어져 있었으니 이것이 후손의 한이었.

우리 선친(오성열)께서 이를 걱정하여 여러 번 글을 어루만지며 탄식하고 감탄하였다.

마침내 글을 모아 책으로 만들고 정서 작업도 마쳤으며 서문과 발문까지 갖추어 차례가 분명하게 정리되었고 이제 목판에 새기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재력이 부족하여 간행이 늦어지는 사이 불행히도 선친께서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셨다.

나는 이 일을 끝내 이루지 못하여 선친께서 저승에서까지 근심하실까 두려웠다.

그래서 종족들과 상의하여 여러 사람이 돈을 모아 장인을 불러 간행하게 하였다.

이 일을 시작한 날에 그 경위를 간략히 적고 이와 같이 마음의 감회를 함께 기록한다.

 

후손 재춘삼가 기록하다.

 

 

후기

14대손 홍재

문집 간행을 마치는 후손의 마음

 

선조의 글이 세월 속에 흩어져 겨우 몇 편 남았으나, 그 뜻과 절의는 오히려 더욱 또렷하다. 후손이 미약하여 선조의 덕을 온전히 밝히지 못함이 부끄럽지만, 남은 글을 모아 세상에 전함으로써 선조의 뜻을 잊지 않게 하는 것이 후손의 도리라 여긴다. 바라건대 후세의 독자가 이 글을 읽고 한 사람 선비의 지조와 학문을 헤아릴 수 있기를 바란다.

 

嗚呼世遠文散 오호 세원문산

아아, 세월은 아득해지고 글은 흩어졌으나,而公之志節 이공지지절 不與歲月俱泯 불여세월구민

공의 뜻과 절개는 세월과 더불어 함께 사라지지 않았다. 讀其書者 독기서자 可以想其為人焉 가이상기위인언

그 글을 읽는 이로 하여금, 그 사람됨을 상상케 한다.洛厓 吳公 人物評

 

낙애오공여은洛厓吳公汝隱은 세이시례전가世以詩禮傳家한 사족士族의 후로 태어나 유이영오幼而穎悟하고 장이독학長而篤學하여 경사經史에 심잠沈潛하고 문사文辭에 준발俊發하였다. 장년壯年에 과제科第에 올라 옥당玉堂과 춘당春坊 등 청화지직淸華之職을 역임歷任하니 명망名望이 일시一時에 높았으며 사림士林이 모두 그 기국器局을 추중推重하였다.

이나 세도世道가 다간多艱하여 조국朝局이 분연紛然하고 당의黨議가 일치日熾하니 공은 숙부夙負한 절의節義를 굽히지 아니하고 출처出處를 의로써 삼았다. 당시當時 권세權勢의 사이에서 아첨과 구용苟容이 만조滿朝에 가득하였으나 공은 홀로 지조志操를 굳게 지켜 진퇴進退를 자지自持하였으며, 마침내 화기禍機에 연루되어 북요北徼의 절역絶域에 유적流謫되는 불행不幸을 당하였다.

만리장해萬里瘴海와 같은 변황邊荒에서 공은 곤액困厄한 경우境遇를 당하고도 지기志氣를 잃지 아니하였다. 를 읊어 심지心志를 기탁寄託하고 학을 닦아 덕업德業을 자수自守하니, 그 글에는 충분忠憤과 고절高節이 자연自然히 드러난다. 비록 신은 적소謫所에 있었으나 심은 끝내 도의道義를 떠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고지古之 지사인인志士仁人이 환난患難에 처함과 다름이 없었다.

에 공은 그곳에서 생애生涯를 마치니 지업志業을 다 펴지 못한 한이 실로 깊다. 그러나 그 청절淸節과 학식學識은 사림士林에 전해지고 시문詩文 또한 후인後人에게 남아, 독자讀者로 하여금 의리義理의 광을 다시 보게 한다. 아우 경암공敬菴公과 가문家門의 제현諸賢이 그 유문遺文을 수습收拾하여 전하려 하였으나 세변世變과 병선兵燹으로 산일散逸된 것이 많으니, 오늘 남은 몇 편 또한 표반豹斑의 일반一斑과 같을 뿐이다.

그러나 한 편의 시라도 지기志氣가 우하면 천재千載에 빛나는 법이다. 낙애공洛厓公의 글은 비록 많지 아니하나 절의節義와 청조淸操가 그 사이에 뚜렷하니, 이는 일시一時의 영욕榮辱으로 가감加減될 것이 아니요 후세後世의 공론公論이 반드시 밝힐 바이다.

에 후손後孫이 산일散佚된 유고遺稿를 모아 일책一冊으로 엮어 전하려 하니, 이는 한 집안의 사사私事일 뿐 아니라 또한 사림士林의 공기公器를 보존하는 일이기도 하다. 의 명절名節이 이에 다시 드러나면, 세인世人이 의리義理의 중함을 알고 사대부士大夫의 출처出處가 무엇을 본받아야 할지 또한 스스로 깨닫게 될 것이다.

 

洛厓 吳公 年譜 낙애 오공 연보

 

이 연보는 낙애 본인 시문. 경암문집. 성재 기록 단천반친일기. 등을 바탕으로 작성된 기초 연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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