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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문화유산답사기

군포 동래 정씨 동래군파 종택

작성자최성호|작성시간11.08.07|조회수107 목록 댓글 0

 

동래정씨고택 배치도

 

군포동래정씨동래군파종택 軍浦東來鄭氏東來君派宗宅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95호/경기 군포시 속달동 24-4)

 

동래정씨 동래군파 종택은 현재 자리에서 500년을 이어온 유서 깊은 집이다. 이곳에 자리잡은 사람은 동래군파 파시조인 정란종(鄭蘭宗 1433-1489)의 큰아들인 정광보(鄭光輔 1457-1524)로서 정란종의 묘소가 있는 곳에 자리를 잡으면서 가문이 500년 이어져 온 것이다. 정란종은 이시애 난 등을 평정한 공로로 동래부원군으로 봉해지면서 동래정씨의 파시조가 되었다.

 

이 집은 14대 난종부터 종손의 5대조부인 26대 때까지 13대가 이어오는 동안 단 한사람만 제외하고 모두 군君으로 봉해졌을 정도로 명문가였다. 집주인의 말에 의하면 5대조도 조선이 망하면서 시호를 받지 못하였을 뿐이라고 한다.

 

이 집은 주변 풍광이 매우 아름답다. 이곳으로 입향은 앞서 말한 것처럼 정란종의 묘소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다. 묘소 터도 좋지만 나중에 자리잡은 집터 역시 매우 좋은 자리이다. 묘소가 남향으로 자리잡아 집터는 묘자리 건너편에 자리잡게 되었다.

 

 

 

 

 

 

 

 

 

 

 

 

 

 

 

 

 

 

 

 

 

 

 

 

 

마방에서 중문으로 가는 통로(건너보이는 산에 정란종 묘가 있음)

 

묘를 바라 볼 수 있는 곳에 집터를 잡고 나니 향에 대한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이 집의 향은 크게 둘로 볼 수 있다. 하나는 안채의 향이고 하나는 사랑채의 향이다. 우리나라 집을 지을 때 향을 보기 위한 중심점은 안채 대청이 된다. 그러므로 안채 대청의 향이 집의 주향이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 이 집은 서향집이다.

 

그러나 사랑채는 안채와 같은 방향이 아닌 남향을 취하고 있다. 안채 대청으로 볼 때는 지세를 따라 지었지만 ㄱ자 집으로서 건넌방을 제외한 안방은 남향을 하고 있어 오히려 햇빛에 대한 조건은 남향집일 때보다 더 좋아진 것이다. 사랑채 역시 전체적으로 보면 서향이 되었을 때 오히려 좋은 풍광을 보이고 있음에도 남향을 취한 것은 보다 따뜻하게 겨울을 나고 여름에 강한 서향 빛을 차단하기 위함이다.   

 

 

 

 

 

 

 

 

 

 

 

 

 

 

 

 

 

 

 

안채 전경

 

이 집은 현재 안채와 사랑채 광채가 몸채를 이루고 있고 주변에 작은사랑채, 그리고 새로 지은 사당, 뒷마당에 있는 광채가 있다. 그리고 원래 안채 뒤쪽에 별당이 별도로 있었고 연못 앞쪽에 솟을대문이 있었던 행랑채가 있었는데 현재는 사라지고 없다. 사랑채와 안채는 ㄴ자형의 안채와 사랑채가 마주보며 튼 ㅁ자 형태를 이루고 있다.

 

안채는 전퇴집으로 전면 4칸이고 날개채가 두 칸 반으로 구성되었다. 날개채는 아래부터 두 칸이 부엌이고 두 칸이 안방으로 되어 있다. 이 집에 재미있는 특징은 부엌에 있다. 부엌은 현재 입식부엌으로 개조된 상태이지만 과거 집구조를 이해하는데는 어려움이 없다. 대부분 집에서 그릇을 보관하는 찬장 등의 공간은 전면에 있지 않고 후면에 둔다. 그러나 이 집에서는 전면 안채 앞에 툇칸을 연장해서 사용하고 있다. 이런 구조는 이곳에서 처음 보았을 정도로 매우 특이한 구조이다.

 

 

 

 

 

 

 

 

 

 

 

 

 

 

 

 

 

 

 

사랑채 (오른쪽에 돌출된 건물이 작은 사랑채임)

 

사랑채는 전후퇴집으로서 2고주 5량집이다. 이런 전후퇴집은 조선후기들에 본격적으로 지어지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홑집으로 출발한 집이 조선 중기에는 전퇴집으로 발전하고 후기로 들어서면서 전후퇴집으로 발전해간다. 이런 평면의 발전은 살림집 규모와 용도가 늘어나면서 발생한 현상이다. 사랑채가 전퇴집인 안채와 다른 구조를 갖는 것은 지어진 시기가 다르기 때문이다. 안채는 1783년에 지어졌고 사랑채는 19세기 후기인 1877년에 지어지면서 구조상 차이를 보이게 된 것이다.

 

사랑채 후퇴칸은 다양한 공간으로 분할하여 사용하고 있다. 사랑방에 붙은 후퇴칸은 수복방, 책방, 광, 행사청을 위한 전실 등과 같이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특히 사랑방으로 드나드는 뒷문도 이 후퇴칸을 활용하여 만들었다. 전퇴가 대부분 각실을 연결하는 통로 역할로 한정된다면 뒤퇴는 실에서 기능적으로 다양하게 쓸 공간으로 만드는 것이 일반적인 활용법이다.

 

사랑채는 안채와는 직각방향으로 배치되어 남향을 향하고 있다. 사랑채는 문간채 쪽에는 한칸 누마루가 설치되었다. 이 누마루는 높게 올려 지었는데 누마루에 올라서면 담너머 남서쪽으로 내려다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앞에 있는 연못을 내려다보며 즐길 수 있도록 배치되었다. 지금 연못 위쪽에 있는 집은 예전에는 없었던 것이라 한다. 주인 말에 의하면 집터 위쪽까지 정원이었으며 연못 주변에 꽃나무들이 많이 심어져 있어 경관이 좋았다고 한다. 과거에 이곳에 앉으면 주변이 내려다보이고 연못주변에 화초가 가득하여 술 한잔하면서 풍류를 즐기기에 정말 좋은 곳이었을 것이다.

 

사랑채에는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별한 시설이 있다. 사랑채 맨 끝 쪽에는 행사청이라는 방이 있다. 내부는 마루로 우물마루가 아니라 장마루로 되어 있는데 집 주인의 말로는 예전부터 장마루였으며 서고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행사청'이라는 단어로 볼 때 제사를 위한 제기를 보관하고 제사를 준비하는 장소로 사용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런 장마루는 사랑대청에 붙어있는 광과 중문 옆에 붙어있는 광에서도 보이는데 아마도 중문을 포함한 사랑채를 새로 지으면서 물건을 쌓아두는 광은 간략하게 지으려 했던 것 같다.

 

 

 

 

 

 

 

 

 

 

 

 

 

 

 

 

 

 

 

안마당에서 본 행사청

 

사당은 현재 한 칸으로 복원되어 있으나 원래는 두 칸이었다고 한다. 예전 사당은 전면 두 칸 측면 두 칸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전면 한 칸은 마루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두 칸이 된 것은 한 칸은 불천위인 동래공의 위패를 모셨으며 다른 한 칸은 사대조를 모시는 곳이었다고 한다. 두 칸이었던 사당이 한 칸으로 복원된 것은 다시 복원될 당시 공무원이 두 칸으로 된 사당이 없다는 이유로 한 칸으로 복원되었다고 한다. 이 사당은 한국전쟁 전까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더 이상 제사를 치르기 힘들다고 판단하여 어른께서 위패를 땅에 묻어버리면서 사당이 사라지게 되었다.

 

 

 

 

 

 

 

 

 

 

 

 

 

 

 

 

 

 

 

 

 

 

 

 

 

사 당

 

중문 옆에는 사랑채를 위한 부엌이 있다. 이 부엌 바깥쪽 벽면에는 암키와와 숫키와로 예쁘게 쌓아 치장해 놓았다. 무심코 보면 그냥 담에 장식을 한 것처럼 생각하기 쉬운데 이것은 사랑채 부엌을 위한 환기구이다. 사랑채 부엌 바깥쪽에는 사랑채 누마루가 있고 판장벽이 아닌 흙벽으로 되어 삼면이 막혀있어 환기가 되지 않는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벽에 환기구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리고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에 붙어있는 광채는 1930년대에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돌저귀나 쇠장석들을 보면 조선시대에 지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게 보인다.

 

  

 

 

 

 

 

 

 

 

 

 

 

 

 

 

 

 

 

 

 

 

 

 

 

중문(오른쪽 옆에 중간 방화장 위쪽 숫키와로 만든 구멍이 환기구임) 

 

 

 

 

 

 

 

 

 

 

 

 

 

 

 

 

 

 

환기구 상세

 

이 집은 올해 5월 3일 종택을 포함한 대지 및 전답(18,176㎡)를 문화유산국민신탁에 무상 증여하였다. 종택이 위치한 속달동은 군포시에서 도시개발사업을 추진 중이었다. 그러나 종손과 가족은 종택과 부지가 영구히 보존되어야 한다는데 뜻을 모아 종택과 주변 땅 모두를 문화유산국민신탁에 기증하게 된 것이다.

 

기증한 토지가 공시지가로만 해도 35억에 이른다고 하니 가족 간에 갈등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동래공파 문중은 수십억이라는 현실적 가치보다는 18대 500년 이상을 이곳에 뿌리내리고 살았던 그 역사적 가치를 보전한다는 것이 더 큰 가치를 둔 것이다. 그간 문중재산을 놓고 이전투구하는 모습만을 보아온 나로서는 이런 모습이 생소하게만 느껴졌다.

 

보전하려는 의지가 없는 사람들에게 과거란 돈벌이 수단 밖에 인식하지 않는다. 그것을 떨쳐버리지 못한다면 우리는 언제까지나 문화후진국에 머물 수밖에 없다. 

 

 

 

 

 

 

 

 

 

 

 

 

 

 

 

 

 

 

 

대청에서 본 중문

 

* 문화유산국민신탁이란

문화유산신탁은 영국의 내셔널트러스트를 모방하여 만든 운동으로 노무현 대통령의 공약에서 시작하였다. 2003년 03월 23일 ‘문화유산과 자연환경자산에 관한 국민신탁법’ 제정으로 본격화되었다. 현재 이것을 수행하기 위해서 문화유산국민신탁이라는 법인에 설립되어 활동하고 있으며 지금까지 소개한 동래 정씨 동래군파 종택을 포함 4곳을 기증받아 관리하고 있다.

 

이런 활동을 위하여 회원을 모집하고 있은데 보전회원, 일반회원, 1%회원으로 구분하여 매달 만원 이상회비를 납부하면 회원으로 가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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