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건적 침입 때마다 격퇴한 고려말 구국공신
- 출중한 용맹의 화신 이방실 장군
이방실(李芳實·?∼1362)은 고려 말 용맹이 출중했던 명장이다. 일부 기록에는 1298년에 출생한 것으로 전하기도 한다.
충목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 호종(扈從·임금이 탄 수레를 호위해 따름)한 공으로 왕이 즉위하자 중랑장이 됐고 이어 호군(護軍)이 됐다. 전(田)
100결(結)도 받았다.
홍건적의 1차 침입이 있던 1360년 1월 16일의 일이다. 철화(鐵化)에서 홍건적 100여
명을 베고 27일에는 상만호(上萬戶)가 돼 당시 용강(龍岡)·함종(咸從) 등지까지 물러나 있던 홍건적을 공격했다. 그러나 고려군이 진을 치기도
전에 공격한 홍건적에게 밀려 패할 뻔하기도 했으나 안우(安祐) 등과 후군을 맡아 더 쳐들어오지 못하게 막아냈다.
함종에서 홍건적의 목책(木柵·말뚝을 박아 만든 울타리, 방어시설)을 대규모로 공격해 2만 명을 죽이고 지휘부를
생포했다. 홍건적이 증산현(甑山縣)으로 달아나자 이방실은 2월 16일에 다시 정예 기병 1000기(騎)를 거느리고 그들을 연주강(延州江)까지
추격했다. 홍건적은 수천 명이 얼음에 빠져 죽으며 강을 건넜다.
홍건적이 강 건너편에서 항거할 모습을 보이자
고려군은 군사를 정비하기 위해 물러났다. 그러나 그날 밤 홍건적이 몰래 달아나자 이방실은 이른 새벽에 군사들을 배불리 먹여 뒤쫓았는데 대승을
거둬 안주(安州)에서 철주(鐵州)에 이르는 길에 죽은 홍건적의 시체가 깔렸다고 한다.
선주(宣州)에 이른 이방실은
경기병(輕騎兵)으로 홍건적 수백 명을 죽였는데 적이 결사 항전하자 병사와 말이 지친 것 같아 군사 재정비를 위해 일단 물러났다. 살아남은 홍건적
300여 명은 하룻밤 사이에 의주까지 달아나 압록강을 건너갔다. 이방실은 개선해 3월 26일에 추밀원부사가 됐다.
4월에 홍건적은 또 70여 척의 수군을 거느리고 서해도의 풍주 벽달포(碧達浦)와 서경의 덕도(德島)·석도(席島)
등지에 정박해 봉주(鳳州)의 성문을 불태웠다. 홍건적은 또 안악(安岳)에서 곡식을 약탈하며 황주(黃州)·안주까지 쳐들어왔다. 이방실은 4월
3일에 예주에서 홍건적의 목 30여 급을 베었다.
같은 달 17일 공민왕은 군신들에게 연회를 베풀며 이방실에게
옥대(玉帶·옥으로 만든 허리띠)·옥영(玉纓·옥으로 만든 갓끈)을 내렸는데, 왕비인 노국공주(魯國公主)가 “전하께서는 지극한 보배를 아끼지
않으시고 신하에게 주시나이까”라고 묻자 “우리 종묘사직을 폐허가 되지 않게 하고, 백성들을 물고기 밥이 되지 않게 한 것은 모두 이방실의
공이다. 내가 살을 베어 줘도 이 공에 보답할 수 없는데 이러한 보물쯤이겠는가”라고 대답하며 그의 공을 높이
칭찬했다.
이방실 장군에게는 재미있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어 소개해 본다.
이방실이 소년
시절 서해도에 갔다가 키가 큰 사내를 만났다. 활과 화살을 손에 들고 이방실의 말 앞에서 “영공(令公)은 어디로 가십니까. 모시고
가겠습니다”라고 청했다.
사내의 정체는 도적이었다. 이방실은 도적임을 알아챘지만 두려워하지 않고 허락했다. 10리쯤
가다가 사내가 논 한가운데 앉아 있는 비둘기 한 쌍을 가리키며 “공(公)은 쏠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이방실은 화살 한 발로 두 마리를
명중시켰다.
날이 저물어 빈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됐다. 이방실은 잠깐 말을 보고 오겠다며 차고 있던 활과 화살을
도적에게 주고는 마구간에 웅크리고 앉았다. 도적이 마구간 안으로 활을 쏘아댔고, 이방실은 날아오는 화살들을 일일이 손으로 잡아 마구간에
끼워두었다. 화살이 모두 떨어지자 도적은 이방실에게 살려달라고 빌었다. 이방실은 옆에 있던 상수리나무 위로 몸을 솟구쳐 나뭇가지 끝을 휘어잡으며
한 손으로 도적의 머리칼을 붙잡아 나뭇가지 끝에다 매달았다. 휘어졌던 나뭇가지가 튕겨 솟구치면서 그 탄력으로 도적의 머리칼은 그 자리에서 모조리
뽑혀버린 채 몸은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이방실은 돌아보지도 않고 가버렸다.
세월이 흘러 지위도 높아진 이방실이 다시
예전 자신이 갔던 그곳을 지나다가 어느 농가에서 하루를 머물게 됐다. 그 집은 매우 큰 부잣집이었다. 지팡이를 짚고 나와 이방실을 맞은 주인
노인은 크게 술상을 차려 이방실을 대접했다. 술에 취하자 노인이 눈물을 흘리면서 “내가 젊었을 때는 용맹스러운 것만 믿고 도적이 되어 숱한
사람을 죽이고 약탈을 일삼았습니다. 그러다 한 소년을 만났는데 비할 수 없이 용맹스러운 자였습니다. 그를 해치고자 하였으나 도리어 내가 해를
입고 죽다가 살아났지요. 그 뒤로 개과천선하여 농업에 힘을 쏟아 다시는 사람들의 물건을 빼앗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야기를 마치고 모자를 벗은
노인의 머리는 반질반질해 머리칼이 하나도 없었다.
이방실에게는 누이동생이 있었다. 오빠처럼 용감하고 맹렬한
성품이었다. 항상 작은 나뭇가지를 벽에 꽂아두고 남매가 나뭇가지 위를 올라다니는데, 이방실이 올라가면 나뭇가지가 살짝 움직였지만, 누이동생이
올라가면 움직이지 않았다. 한번은 누이동생이 야윈 사동(使童)을 데리고 여윈 말을 타고 강남으로 건너가려는데, 배를 타려는 사람들이 서로 먼저
건너려고 다투다가 그만 누이동생을 들어 내렸다. 누이동생은 몹시 화가 나서 노를 들어 배를 타려던 사람들을 두들겨 팼는데 그 굳세고 날랜 모습은
마치 새매(수릿과의 새) 같았다고 전한다.
도둑을 교화한 이방실의 인품과 막상막하인 누이동생의 재주는 실로 경탄할
일이다.
이 용맹한 애국 장군 이방실은 1362년 총병관 정세운·김득배·안우·안우경·최영·이성계 등과 함께 홍건적에게
빼앗겼던 개경을 수복했다. 이어 중서시랑평장사에 올랐으나 못된 간신배 김용·박춘에 의해 안우·김득배 등과 함께 피살됐다. 세운 공을 높이 받들고
모셔야 할 장군을 모함으로 죽인 부끄러운 역사를 되풀이하는 어리석음을 이제는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박희
한국문인협회 전통문학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