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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국방

병자호란 직전 창궐한 우역과 조선군의 작전 능력 고갈에 대한 고찰

작성자짜르르|작성시간19.03.05|조회수172 목록 댓글 0


병자호란 직전 창궐한 우역과 조선군의 작전 능력 고갈에 대한 고찰

 

16365월부터 16382월까지 조선에서 대창궐한 우역이라는 소 전염병은 조선군의 작전 능력 고갈은 물론, 조선의 국가 생산 능력까지 한 번에 날려먹은 사건이란 견해가 최근 나오고 있습니다

 

현재로서는 17세기에 발생한 우역의 병원체를 구분할 만한 증거가 충분치 않으며 어떠한 병원체가 만주에서부터 시작하여 조선, 그리고 일본까지 번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전 광해군 대에 돌았던 우역에 비하면 엄청난 파괴력을 가져왔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16365월에 최초 감염보고가 평안감사의 장계를 통하여 보고되었고 이는 만주 일대에서, 특히 심양에서 발병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당시 기록들을 보면 청군의 활동 범위 내에서 이러한 병이 심각했다고 합니다.

 

기록을 보면 군사활동이나 사냥을 마치 고 귀환하는 청 태종은 전염병을 피하려고 귀환 시간을 밤으로 잡는 예가 많았고, 전후 소현세자가 머무르는 곳에서도 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니 사람과 짐승을 가리지 않는 병이 창궐했던 모양입니다.

 

이처럼 청의 군사 활동은 넓은 영역에서 살아가던 다양한 사람과 가축, 야생동물 간의 접촉 을 유발했고 이는 전염병 발생의 필요충분조건인 병원체, 숙주, 환경의 3요소를 충족할 수 있는 빈도를 높이는 데 이바지하게 됩니다.

 

이러한 전염병은 조선에서 청으로 군수 물자를 실어 나르는 소나 말에게도 큰 피해를 끼쳤고, 청 역시 몽골에서 따로 소를 구매하여 물량을 보충하고 있었죠. 사실 이러한 우역은 조선에서 이미 16세기에도 여러 차례 발생하였고, 국가 차원에서 수의학과 정책적 수단을 통해 적극 대응한 경험이 충분했습니다.

 

17세기 우역에 관한 첫 기록 은 정묘호란이 일어난 해의 10월이었지만 병자호란을 전후로 하여 창궐한 우역은 16세기와 정묘호란 당시에 일어났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파괴력을 선사합니다.  

 

우역에 관한 처방전은 당시 사람에게 유행하던 홍역이나 천연두의 치료법을 응용한 것이었지만, 당시 사람들은 소에게 전염되는 우역과 사람에게 전염되는 전염병은 분명히 다른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었습니다.

 

16368월에 들어서서 평안도 일대에 급속도로 퍼진 우역은 그야말로 파괴적이었습니다. 정묘호란 이 후 후금과 조선 사이에는 인마의 왕래가 빈번하였는데, 이는 병원체의 확산을 부추겼고, 평안도 내에서는 살아남은 소가 없다고 긴급 보고를 올릴 정도였습니다.

 

전염력도 상당해서 8월에 창궐한 평안도 우역이 1달이 채되지 않아서 황해도를 거쳐 수도권 일대까지 퍼지게 되었고 이는 자연스럽게 조선군의 기동성 및 군수지원체계를 무너뜨리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당시 대부분의 군수물자 및 무기류는 대부분 소를 이용하여 이송시켰고 특히나 화포의 경우는 소가 아니면 싣고 올 수 없었을 지경입니다.

 

서북 방위를 중요시했던 조선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우역의 창궐로 인한 소, 특히 군용 목적으로 쓸 소들이 전염병으로 대부분 폐사하는 것은 치명적인 것이었으며 자연스럽게 조선군이 163612월에 침공한 청군에 적극적으로 방어전에 임하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16세기 중엽에 이미 우역에 대한 치료법 및 국가 차원의 방역이 확립되었음에도 초기 제압이 실패한 것은 전에 보지 못했던 증상과 전염력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병자호란 전후에 서북에서 발생한 우역은 이전보다 치사율이 높았고, 별 다른 대응책을 마련할 수 없었다는 주장을 통해 당시 사람들이 이때의 우역 이 이전의 우역과는 특성이 다르다는 것을 명확히 알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 승정원 일기에 아예 소가 멸종될 것이다, 라는 섬뜩한 문장까지 올라올 정도면 치사율도 상당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게다가 전쟁이 발발하면서 대규모의 청군이 남하하자 전염병은 삽시간에 전국으로 번집니다. 청군이 가져온 것도 있으나 청군과 접전한 뒤 조선의 패배로 전쟁이 끝나면서 귀환하는 장병들이 가져온 병원균이 곳곳에 퍼지기 시작합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충청도의 피해가 가장 적었는데, 이는 정세규 휘하 충청 속오군이 거의 궤멸적인 타격을 입으면서 상대적으로 귀환자가 적었고 이 때문에 우역에 대한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는 것이 됩니다.

 

전라-경상 일대까지 우역이 번져서 거의 소의 종자가 사라질 지경이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말과 사람에게도 전염되기 시작합니다. 천연두까지 청군의 등장과 함께 퍼지면서 홍타이지도 긴장을 했을 지경이었으니까요.

 

남한산성을 포위한 이래 강화조약을 체결할 때까지 청군이 집중적으로 머물렀던 경기도 광주군 일원의 피해는 매우 심각했고 대체적으로 치사율은 66.7%였으나 각 지역마다 상이하게 차이를 보입니다. 제주도의 경우는 75%의 치사율을 보일 정도로 치명적이었죠.

 

얼마나 심각한지 청에 요청을 해서 몽골에서 소 185마리를 긴급 구매하여 각 지역에 배분하는 등 조선 조정이 방비책에 몰두할 정도였습니다. 이러한 우역은 1637년 내내 기승을 부리다가 16382, 겨울이 되면서 잠잠해졌으며 1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입힌 피해는 어마어마했죠.

 

조선군의 작전 능력 고갈은 물론, 국가 생산 능력까지 한꺼번에 날려버린 대사건이었고 북부의 조선군이 죽어나간 소들로 인하여 제 때 군수물자와 장비, 그리고 식량을 배분하지 못하는 사례도 있는 것을 보면 전쟁 자체에도 많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여지고 있습니다.

 

출처

병자호란 전후(1636-1638) 소의 역병(牛疫) 발생과 확산의 국제성, 김동진/유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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