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을 국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태종과 세종
정종
흔히 조선시대 국왕들을 일컬을 때에 ‘태 정 태 세 문 단 세 …’ 등등으로 부른다. 국왕들을 이렇게 부르는 것은 이름이 아닌 묘호(廟號)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묘호는 임금이 승하한 뒤 그 신위(神位)를 종묘에 봉안할 때에 일컫는 추존(追尊) 칭호를 말한다. 조선시대의 국왕은 이처럼 대부분 묘호(廟號)가 있었다. 묘호가 없다고 생각하는 임금이 있다면 중간에 쫓겨난 연산군과 광해군을 떠올릴 것이다. 아마 단종을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지 않을까 예상된다. 단종은 세조에 의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당한 채 사사(賜死)되어 묘호가 없었다. 한 참 뒤인 숙종 24년(1698)에 복위되어 ‘단종(端宗)’이라는 묘호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복위되기 전까지 묘호가 없었던 기간이 상당히 길었다.
일반적으로 국왕을 가리킬 때에 묘호에 너무 익숙한 나머지 국왕에게도 ‘이름’이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경우를 종종 접한다. 그러나 국왕에게도 이름이 있었다. 다만 중국의 황제에게 보내는 문서나 중국 황제가 조선의 국왕을 거명할 때를 제외하고 불린 적이 없었다. 국왕의 이름은 국왕보다 윗사람이 아니면 함부로 부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국왕의 일생을 적은 행장(行狀)을 비롯하여 국왕과 관련한 문헌에는 ‘휘(諱)한다’고 쓸 뿐 기록하지 않는다. 상소문이나 각종 문서에 국왕의 이름과 같은 글자를 써야 한다면 다른 글자로 대체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한 이유로 국왕의 이름을 지을 때에 어려운 글자를 택하는 편이었다.
국왕의 이름 대신 승하한 국왕을 일컫는 칭호로 몇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묘호이다. 둘째, 중국에서 내린 시호(諡號)를 ‘사시(賜諡)’라고 하는데 사시에 왕(王)이나 대왕(大王)을 붙인 형태이다. ‘사(賜)’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내려준다’는 뜻을 지닌 한자이다. 사시는 보통 2글자를 내려주는데, 본고의 주인공인 정종은 ‘공정’(恭靖)이란 시호를 받아 ‘공정왕’ ‘공정대왕’이라 불리었다. 혹은 태종의 시호 ‘공정(恭定)’과 구별하기 위해 정종은 ‘공정대왕’, 태종은 ‘태종공정대왕’으로 칭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태종공정대왕’을 통해 묘호+사시+대왕으로 구성되는 국왕의 칭호를 한 가지 더 추가할 수 있다. 다음으로 묘호에서 조(祖)・종(宗)을 뺀 한 글자와 묘(廟)를 결합시킨 ○+廟의 방식이다. 인조를 인묘(仁廟), 경종을 경묘(景廟), 영조를 영묘(英廟) 등으로 일컫는 경우들이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덧붙인다면, 국왕이 승하하고 난 뒤 묘호나 시호를 정하지 않았을 때에 부르는 칭호로 ‘대행(大行)’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대행’이라는 말은 『문헌통고(文獻通考)』에 따르면 한나라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승하한 국왕은 ‘대행대왕(大行大王)’, 승하한 왕후는 ‘대행왕후(大行王后)’ ‘대행왕비(大行王妃)’ 등으로 불렀다.
지금까지 언급한 내용들은 ‘국왕을 어떻게 부르는가’하는 것이었다. 사실 현대 사회에서 누구를 어떻게 부르는가 하는 문제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먼 친척은 얼굴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현실에서 큰아버지, 작은 아버지, 삼촌, 숙모의 호칭 정도면 생활하는 데 불편함이 없다. 왕고모니 당숙이니 이런 말이 어색하게 들리는 시대가 된 것이다. 호칭이 생활하는 데 큰 지장을 주지 않으므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거나 아예 그럴 마음조차 없는 분위기이다. 그러나 전통시대에는 ‘칭호’가 그 사람을 중심으로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나타내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칭호는 바로 그 사람의 정체성과 관련되기 때문에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주요 수단이었다. 칭호 문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해’와 ‘달’로 비유되는 국왕이었다. 조선시대의 피라미드식 신분 관계에서 국왕은 최고 정점에 위치해 있으므로 국왕을 중심으로 그 밖의 모든 인물들과의 관계가 정립되기 때문이다.
국왕이 새로 즉위하면 당장 왕실 내부의 친속간 칭호 문제부터 새로이 재편되었다. 칭호를 어떻게 하느냐는 ‘제사’ 의례와 관련되었다. 국왕이 제사를 지낼 때에 축문(祝文)의 머릿말에 제사받는 사람을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를 반드시 명기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안에서 종종 정치적 논쟁으로 비화되었다. 특히 아들이 왕위를 계승하지 않고 방계에서 대통(大統)을 이을 경우에 발생했다. 예를 들면, 광해군을 몰아내고 반정을 통해 즉위한 인조가 생부인 정원대원군(定遠大院君)의 사당에 제사를 지내려고 할 때에 그를 어떻게 부를지가 정치적으로 쟁점화되었다. 왕위 계승의 원칙으로 본다면, 인조는 선조의 뒤를 이어 즉위했으므로 낳아주신 부모에 대해 더 이상 ‘부모’라 부를 수 없다. 인조가 국왕이 되기 전에 맺었던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국왕이 되면서부터 달라지기 때문이다.
세종과 태종
왕위 계승에서 방계에서 왕위를 잇는 경우 혹은 형이 아우의 뒤를 잇거나 숙부가 조카의 뒤를 이어 즉위하더라도 ‘부자의 의리’가 형성되었다. 이는 왕위 계승의 원칙이었다. 그 때문에 국왕이 되는 순간 이전에 맺었던 관계를 새로이 재편해야 할 필요가 생겼다. 우선 낳아준 부모나 형제, 가까운 친인척들의 호칭부터 바꿔야 했다. 방계에서 왕위를 잇는다면 자기를 낳아준 친부모는 백부・백모 혹은 숙부・숙모라 칭해야 마땅하다. 그리고 그 분들이 돌아가시면 3년상이 아닌 1상을 치렀다. 앞에서 예로 들었던 인조의 경우를 보면, 선조 다음에 광해군이 즉위했지만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면서 결과적으로 선조의 왕위를 인조가 이은 셈이었다. 선조와 인조는 혈연적으로 조(祖)-손(孫) 관계였지만 왕위 계승으로 인해 새롭게 부(父)-자(子) 관계로 재편되었다. 혈연적인 관계가 왕위 계승으로 인해 관계의 변화를 초래했다. 그리하여 인조가 생부인 정원대원군을 ‘원종(元宗)’으로 추숭하여 선조-원종-인조로 설정함으로써 혈연적으로든 왕위 계승으로든 순서대로 맞추었다. 그 과정에 신하들과의 마찰로 10여년이란 긴 기간 동안 치열한 논쟁이 전개되었다. 선조-인조의 부자 관계만을 인정한 신하들과의 대립이었다. 다음으로 헌종의 뒤를 이은 철종의 사례인데 매우 특이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철종은 친속으로 보면 헌종의 숙부뻘이지만 헌종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하면서 헌종과 부자의 관계가 형성되었다. 그로 인해 철종은 헌종을 위해 3년상을 치렀다.
사대부 집안과 비교해 본다면, 왕위 계승과 비슷한 모습을 양자(養子)를 정하는 과정에서 볼 수 있다. 다만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동종(同宗)의 지자(支子)를 세워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어, 형이 아우의 뒤를 혹은 숙부가 조카의 뒤를 잇는 경우는 불가능했다. 양자로 들어가면 친부모는 백(伯)・숙(叔) 부모가 되어 그들을 위해 1년상을 치르고 양부모를 위해 3년상을 한다는 점에서 동일했다.
국왕이나 왕실에서의 일은 크든 작든 사대부 이하 사람들의 본보기가 되어 그 내부만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았다. 또한 조선 사회를 운영하는 원리로 ‘법(法)’도 중요했지만 ‘예(禮)’가 담당하고 있는 비중이 몹시 컸다. 그러한 점에서 ‘왕실례(王室禮)’는 무엇보다 관심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법’ 논쟁처럼 왕실 전례(典禮)를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이 치열한 것은 당연했다. 조선시대의 법전인 『경국대전』조차 ‘예’ 관련 부분을 많이 수록하고 있고, 국가 예서(禮書)인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속오례의(續五禮儀)』 등의 편찬을 통해서도 입증된다. 조선시대의 ‘예’ 논쟁이 단순한 공리공담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다.
그렇다면 위의 호칭에 대한 조선시대의 기본 생각을 가지고 본고의 주제인 정종으로 들어가 보자.
태조 이성계
태조가 조선을 건국한 뒤 세자 책봉(冊封)을 둘러싸고 ‘왕자의 난’이라는 큰 사건에 직면했다. 태조에게는 첫번째 부인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 소생의 여섯 아들과 두번째 부인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 소생의 두 아들이 있었다. 신의왕후는 조선을 건국하기 전에 죽었으므로 조선이 건국되었을 당시 정식 왕후는 신덕왕후였다. 그리하여 세자 책봉 문제에 신덕왕후의 입김이 작용할 가능성이 높았다. 더구나 태조의 신덕왕후에 대한 총애가 각별하여 그러한 가능성에 무게를 실어주었다. 마침내 신덕왕후 소생의 둘째 아들(막내아들)을 왕세자로 삼게 되었다. 태조는 정도전(鄭道傳)으로 하여금
왕세자의 보호를 맡겼는데 신의왕후 소생의 다섯째 아들 방원(후일 태종)이 정도전 등의 세력을 제거하는 일이 일어났다. 일명 ‘정도전의 난’이라고도 부르는 이 사건이 바로 제1차 왕자의 난이었다. 정권을 잡은 방원의 심복들은 방원을 세자로 책봉하려 했다. 그러나 방원 스스로 사양하여 태조의 둘째 아들 방과가 책봉되었고 왕위에도 올랐다. 그가 바로 조선의 제2대 국왕인 정종이었다.
정종은 왕위에 올랐지만 실권은 방원에게 있었다. 그 뒤 정종 2년(1400)에 태조의 넷째 아들 방간이 왕위 계승의 야심을 가져 제2차 왕자의 난이 발발했다. 당시는 개국 공신들이나 왕자들이 사병(私兵)을 거느리고 있어, 어느 정도 권력을 장악했다고 하더라도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방원이 난을 진압했고, 정종은 방원을 세자로 책립했다. 정종이 방원을 왕세자로 삼았지만 접견할 때에는 반드시 군사를 벌여 세워 호위했다. 1,2차 왕자의 난으로 형제간 살육을 경험한 터였고 방원의 위세가 대단했다는 증거였다. 얼마 뒤 왕위를 방원에게 물려주었다. 그가 제3대 임금인 태종이었다.
정종과 태종・세종 간의 관계는 정종이 동생이었던 태종을 ‘세자’로 책립한 데서 비롯되었다. 태종이 세자로 책봉될 당시 정종의 동생 자격인 ‘왕세제(王世弟)’가 아닌 아들 자격인 ‘왕세자(王世子)’로 책봉되었다. 더구나 왕위를 계승하면 부자의 의리가 형성되므로 정종과 태종 간 부자 관계의 성립은 기정사실화되었다. 그리하여 정종이 승하하자 태종은 아들로, 세종은 손자의 항렬로 상복(喪服)을 입었다. 3년상은 36개월이 아닌 27개월이었는데, 조선초기에는 ‘이일역월以日易月’ ‘역월제(易月制)’라 하여 하루로써 한 달을 대신하는 제도를 채택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태종은 아들이 아버지를 위해 입는 참최(斬衰) 27일, 세종은 손자가 할아버지를 위해 입는 자최(齊衰) 13일의 복을 입었다. 여기까지는 세 임금 사이의 관계가 새로 정립된 관계대로 잘 유지되고 있었다.
정종은 세종 1년(1419)에 승하했다. 당시 태종은 ‘상왕(上王)’으로 물러나 있으면서 국정을 세종에게 맡기고 있었으므로 정종의 국상(國喪)은 세종이 주관했다. 태종과 세종이 정종을 국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모습은 정종의 부고(訃告)를 명나라에 알리면서부터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조선시대에는 국왕이 승하하면 정례적으로 중국에 승하한 사실을 알리고 시호를 청하는 사신[고부청시사(告訃請諡使)]을 파견했다. 세종은 시호를 청하는 주본(奏本)에 할아버지가 아닌 ‘백부(伯父)’로 쓴다든가, 행장(行狀)에 국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전권서국사(前權署國事) 휘경(諱曔)’으로 썼다. ‘권서국사’라는 말은 임시로 나라 일을 담당한다는 뜻이다. 명나라로 보내는 글에 정종을 ‘국왕’으로 표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대해 명나라에서도 조선에서 표현한 그대로 ‘조선국(朝鮮國) 전권서국사(前權署國事) 이모(李某)’라고 써서 보냈다. 정종과는 달리 태종은 승하한 뒤 그 행장에 ‘전국왕(前國王) 성이씨(姓李氏) 휘모(諱某)’라고 썼고, 명나라에서도 ‘조선국왕(朝鮮國王) 이휘(李諱)’라고 써서 보냈다. ‘국왕’으로 표기하여 정종과 대별되었다. 이후 다른 국왕들의 행장도 태종과 동일한 방식으로 기재했다.
정종을 국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모습은 무엇보다 묘호와 시호 논의에서 볼 수 있다. 결정적인 것은 시호보다 묘호였다. 조선시대에 국왕이 승하하고 나면 중국에 시호를 청하는 일 외에도 조선의 국왕과 신하들이 묘호와 시호를 정해 올렸다. 태조는 건국한 임금에게 붙이는 묘호인데, 태조가 승하한 태종 8년(1408)에 ‘태조’라는 묘호를 정하는 과정에서 이의없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런데 정종은 달랐다. 사실 앞에서부터 설명을 위해 계속 ‘정종’이라고 표현했지만 그 당시에 맞지 않는 부적합한 칭호이다. 정종이란 묘호는 정종이 승하한 그 당시에 붙여진 칭호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정종의 묘호를 정하는 논의에서 ‘예전에도 묘호를 정한 예(例)가 없었으니 지금도 없는 것이 좋겠다’고 하며 묘호를 정하지 않았다. 묘호를 정해 올리지 않았다는 것은 왕위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직접적인 표현이었다. 그런데 태종이 세종 4년(1422)에 승하하자 곧바로 묘호 논의에 들어가 ‘태종’으로 정해 올렸다. 태종은 살아 있었을 때부터 승하하면 마땅히 묘호가 ‘태종’이 될 것이라고 세종과 당대 신하들의 입에서 거론되고 있었다. 승하한 정종의 묘호 논의는 제쳐 두고 살아있는 태종의 묘호부터 입에 담고 있었던 것이다. 세종과 그 신하들의 정종과 태종에 대한 상반된 인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모습이다. 정종은 묘호를 정하지 않았으므로 세종대부터 이후의 국왕이나 신하들은 모두 중국에서 내린 시호에 ‘대왕’ 혹은 ‘왕’을 붙인 ‘공정왕’ ‘공정대왕’으로 불렀다. 이 칭호가 묘호가 정해질 때까지 ‘정종’을 가리키는 공식 칭호였다. 공정대왕을 거론할 때만이 아니라 문헌에도 그렇게 기록했다. 칭호가 그 사람의 정체성을 나타낸다는 말이 이를 뜻했다. 종묘에 들어갈 때에 일컫는 칭호가 묘호임에도 결과적으로 공정대왕은 묘호가 없이 종묘에 들어간 셈이었다.
묘호를 정할 때에 개국한 군주를 태조, 혹은 고조(高祖)라 칭하고 뒤를 이은 군주의 경우 공덕이 있으면 태종, 공덕이 없으면 태종이라 칭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한나라의 사마천이 지은 『사기(史記)』와 가의(賈誼)가 지은 『신서(新書)』에 따르면, ‘태종’이라는 묘호는 태조와 함께 건국할 때에 공덕(功德)이 지극히 큰 이에게 붙인다는 뜻을 싣고 있다. 태조-태종으로 묘호를 정하는 방법을 설명한 문헌들이다. 조선의 태종은 태조를 도와 개국의 공이 혁혁하여 위 기록에 그 누구보다 부합하는 인물이었다. 이는 공정대왕만이 아니라 그 당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심지어 공정대왕은 태종에게 왕위를 선위(禪位)하면서 그 교서에 태종이 조선을 재조(再造)했으며 국가가 그의 소유라고까지 표현했다. 이러한 사실들을 통해 공정대왕의 묘호를 정하지 않은 이유가 태조-태종으로 이어지는 왕통(王統)의 정립을 천명하려는 것임을 대략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묘호를 올리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 두 가지 정도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첫째, 고려시대 원간섭기 동안 국왕들에게 조(祖)・종(宗)이 들어간 묘호를 올리지 않았던 제도를 그대로 준수했다는 점이다. 둘째, 태종과 세종이 공정대왕을 국왕으로 전혀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도이다. 첫째 이유를 보면 그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원나라 간섭기 동안 고려의 국왕들은 승하한 뒤 ‘忠○王’의 칭호를 갖게 되었다. 고려가 조(祖)・종(宗)이 들어간 묘호를 사용하는 것을 참람하다고 여겨 원나라에서 내린 시호만을 가지고 승하한 국왕을 일컫도록 한 것이었다. 이를 공정대왕에게 그대로 적용시켜 조・종이 붙는 묘호 없이 명나라에서 내린 시호 2글자만으로 칭하자는 가정이다. 조선을 건국한 지 얼마되지 않아 고려의 제도가 조선초기까지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이 가정은 반박의 여지가 많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앞서 ‘예전에 묘호를 정한 전례가 없다’고 했는데 그것까지 포함해서 논박하고자 한다. 태조가 조선을 건국하자마자 태조의 직계 4대조를 목왕(穆王)・익왕(翼王)・도왕(度王)・환왕(桓王)으로 추존했고, 태종이 그 11년(1411)에 목조(穆祖)・익조(翼祖)・도조(度祖)・환조(桓祖)로 더 올려주었다. 태종 8년에 승하한 태조에게도 ‘태조’라는 묘호를 올린 경험이 있었다. 태종대에 묘호를 올린 경험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는데 그러한 전례가 없다고 한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더구나 왕위에 즉위한 적도 없는 추존 4대조에게조차 ‘조(祖)’가 붙는 묘호를 올리면서 공정대왕에게만 유독 ‘묘호를 정한 전례가 없다’고 하는 것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 또한 살아있는 태종에게조차 ‘시호+왕’이 아닌 ‘태종’이라는 묘호를 올릴 것이라고 한 점으로 미루어보면 고려의 제도를 준수하려는 의지는 없었다고 보여진다. 그렇다면 자연히 두 번째 가정으로 귀결된다. 공정대왕의 묘호를 정하지 않음으로써 태조-태종으로 이어지는 왕위의 승계를 확정지으려는 다분히 의도적이며 정치적 행위로 간주할 수밖에 없다는 방향으로 치닫는다.
`묘호 다음으로 조선의 국왕과 신하들이 정해 올린 ‘시호’에서도 공정대왕에 대한 부당한 대우를 확인할 수 있다. 시호는 일명 ‘역명(易名)’이라고도 한다. 살아있을 때에 이름을 불렀다면 죽어서는 그 이름을 꺼려 생전의 행적(行迹)에 의거하여 시호를 지어 그 이름을 대신하는 것을 말한다. 태조를 비롯해 조선시대 역대 국왕들의 시호는 8글자로 정해 올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공정대왕의 시호는 처음에 세종이 시호를 올리지 말자고 제안했다가 신하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다만 6글자 ‘온인공용순효(溫仁恭勇順孝)’라고 정했다가 명나라에서 내린 시호 ‘공정(恭靖)’의 ‘공(恭)’자와 함께 쓸 수 없다는 이유로 ‘공용(恭勇)’ 2글자를 제거해버렸다. 이로써 다른 국왕들보다 4글자가 적었다.
태종은 공정대왕이 승하했을 당시 ‘아들’이 입는 복으로 상복을 입었다. 그러나 그 뒤부터 공정대왕에 대해 ‘아버지’ 대신 ‘형’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태종은 즉위한 뒤 명나라에 즉위를 인정해 달라는 고명(誥命)과 인신(印信)을 청하면서 공정대왕에 대해 ‘친형(親兄)[공정왕(恭靖王) 휘(諱)]’이라고 표기했다. 아버지가 아닌 ‘형’의 뒤를 잇는다고 표현한 것이었다. 태종은 세자가 되면서 맺었던 ‘부자’ 관계를 즉위하자마자 전면 부인한 것이었다.
태종은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나 있으면서 세종 4년까지 살았다. 그 동안 뒷짐만지고 있었다기보다 세종의 뒤에서 군림하고 있었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대소사의 결정에 태종의 입김이 만만찮게 작용했고 정종의 국상과 관련한 일도 마찬가지였다. 국왕인 세종이 국상(國喪)을 주관하고 있어 공정대왕에 대한 부당한 일을 전적으로 세종이 주도한 것처럼 생각하기 쉽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나 국상을 치르는 동안 실질적으로 태종의 윤허를 기다리는 일이 잦았다. 태종이 살아있는 동안 세종은 제반사를 태종에게 자문을 구했으며 중요한 사안은 더욱 그러했다. 태종이 사망하기까지 세종은 태종의 정치적 영향을 벗어나기 어려웠다.
그럴 경우 ‘묘호’의 결정이라는 중차대한 일에 태종의 입김이 작용하지 않았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렇다고 국왕으로 재위했던 이의 ‘아들’ 자격으로 왕위를 받았고 상복도 아들의 복으로 입었는데 전(前) 국왕에게 묘호를 정하지 않으려는 논의에 대놓고 간여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실제 실록에서도 그러한 자취를 발견하기 어렵다. 세종이 공정대왕과 정안왕후(定安王后)에게 ‘조(祖)’ ‘황조고(皇祖考)’ ‘황조비(皇祖妣)’ ‘효손(孝孫)’ 대신 ‘백부(伯父)’ ‘황백고(皇伯考)’ ‘황백비(皇伯妣)’ ‘효질(孝姪)’이라는 칭호를 사용했을 때조차 태종은 잘못했다는 조금의 언지조차 비친 적이 없었다. 세종의 결정에 태종의 침묵 혹은 묵과는 암묵적인 동의로 해석될 여지가 충분했다. 태종은 세종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구체적으로 사실화했다고 보는 편이 맞을 듯싶다.
공정대왕을 부인하려는 태도는 태종만이 아니라 세종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세종은 더 가혹했다고 볼 수 있다. 세종 즉위 초에 공정대왕과 태종 둘 다 국왕의 자리에서 물러나 있어 공정대왕은 ‘노상왕(老上王)’, 태종은 ‘상왕’이라 불렀다. 그러다가 세종이 태종에게 ‘태상왕(太上王)’이라는 존호를 올리기를 원했고 실행으로 옮겼다. 그 당시 몇몇 신하들은 공정대왕은 그대로 ‘상왕(上王)’으로 두자며 세종의 뜻에 부합하는 모습을 보였다. 태조・공정대왕・태종은 승하하기 전에 국왕의 자리에서 물러나 ‘상왕’으로 있었던 임금들이었다. 조선시대에 ‘상왕’의 존재는 세조에게 왕위를 물려준 단종까지였다. 그 가운데 태조와 태종만 ‘태상(太上)’이란 존칭을 받았다. 또 세종은 앞서 말한 것처럼 공정대왕에게 시호를 정해 올리지 말자고 애초부터 반대했었다. 세종은 그 뒤에도 하륜(河崙)이 공정대왕을 ‘기생지군(寄生之君)’이라 표현했던 말을 인용하면서 그 표현을 비판하기는커녕 지지하는 태도를 보였다. 태종이나 세종의 태도가 그러할진대 신하들의 반응은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다.
그 밖에 공정대왕을 제외시키고 태조-태종과의 관계만 인정하는 모습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먼저 세종은 태조・태종의 『보감(寶鑑)』만을 편찬하도록 명했다. 보감은 실록을 바탕으로 역대 국왕의 덕업과 아름다운 행실을 보여주기 위해 편찬된 책이다. 공정대왕의 보감은 정조 6년(1782)에 이르러서야 세상에 나왔다. 다음은 세종 15년(1433)에 건립한 문소전(文昭殿)에 태조와 태종의 신위판(神位版)만을 모셨다는 사실이다. 문소전은 원묘(原廟)에 속하는 사당으로 국가 사당인 종묘와 성격을 달리하는 왕실의 가묘(家廟)적 성격을 띤 사당이었다. ‘원(原)’이 ‘이중’ ‘거듭’이라는 뜻[重]으로 이미 정묘(正廟)인 종묘가 있고 다시 세운 사당을 말한다. 종묘가 왕위 계승의 순서[위차(位次)] 위주로 운영된 반면 원묘는 혈통 중심의 순서[세차(世次)] 위주로 운영되었다. 세종 15년에 기존에 있었던 원묘들을 통합하여 문소전이라는 새로운 원묘를 만들면서 태조와 태종만 봉안한 것이었다. 이 일들보다 더 직접적으로 태조-태종의 관계를 언급한 모습은 세종이 야인 평정으로 하례를 받고 난 뒤에 내린 교서에 잘 드러나 있다. 태조-태종-세종으로 이어지는 야인 정책을 나열하면서 태종에 대해 ‘태조의 대통(大統)을 이어 유업을 계승했다’고 표현했다. 세종의 평소 의중이 잘 반영된 내용의 교서였다. 변계량(卞季良)과 같은 사람은 태종이 공정왕의 후사가 되었으므로 태종은 공정왕의 아들, 세종은 손자로 칭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뭇 의논의 논박으로 끝내 중지되었다.
태조・태종과 공정대왕 간의 차별은 국왕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왕후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왕후가 승하하면 휘호(徽號) 4글자와 시호 2글자를 정해 올렸다. 태조의 비인 신의왕후는 ‘승인순성(承仁順聖) 신의왕태후(神懿王太后)’, 태종의 비인 원경왕후는 ‘창덕소열(彰德昭烈) 원경왕태후(元敬王太后)’라 정해 올렸다. 공정대왕의 비인 정안왕후는 공정대왕이 태종에게 선위한 뒤 태종이 올린 존호(尊號)인 ‘순덕(順德)’ 이외에 시호인 ‘정안(定安)’ 2글자만 올려진 상태였다. 신의왕후・원경왕후와 정안왕후를 대비해 보면 국왕들간의 차별만큼 왕후들 간의 확연한 차이를 볼 수 있다.
이상은 조선 내부에서 공정대왕을 국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설상가상으로 공정대왕은 조선에서만이 아니라 국외적으로도 ‘국왕’으로서의 자격을 인정받지 못했다. 조선은 제후국이므로 왕위를 계승하면 천자국인 중국에 즉위 사실을 알리고 책봉을 받아야 한다. 그리하여 국왕이 승하한 뒤 중국에 부고를 알리고 시호를 청하기 위해 파견된 사신은 새로이 왕위를 이은 사람에게 왕작(王爵)을 승인, 책봉해 달라고 청하는 임무가 더 있었다[고부청시청승습사(告訃請諡請承襲使)]. 조선의 국왕들은 대부분 그러한 절차를 밟아 책봉되었다. 그런데 공정대왕은 그러한 측면에서 문제의 소지를 안고 있었다.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난 뒤 곧바로 아우인 방원[정안공(靖安公]을 왕세자로 책립했다. 그 시점이 공정대왕 2년 1월말-2월초 사이였다. 7개월 뒤 9월에 공정대왕은 명나라에 사신을 파견해 조선의 국왕으로 책봉 받기 위해 인신(印信)과 고명(誥命)을 청했다. 명나라에 청한 지 2달 쯤 뒤 공정대왕은 왕세자에게 선위(禪位)하고 태종의 즉위 사실을 명나라에 알렸다. 명나라에서는 공정대왕이 요구한 고명과 인신을 보내고 아우를 ‘후사’로 삼은 것을 허락하여 사신을 보냈다. 명나라의 사신을 ‘천사(天使)’라고 부른다. 그런데 열흘이 못되어 아우에게 ‘선위’한 사실을 듣고 이상하게 여겨 사신을 돌아오게 했다. ‘조선권지국사(朝鮮權知國事) 이경(李曔)’을 국왕으로 인정하겠다는 고명과 인신을 보냈다가 태종에게 선위한 소식을 듣고 중지한 것이었다. 그 결과 공정대왕은 대외적으로 명나라로부터 책봉을 받지 못한 채 권좌에서 물러났다. 중국 조정에서 책봉을 받지 못한 사실은 명나라에서든 조선에서든 공정대왕을 ‘권서국사자(權署國事者)’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크나큰 빌미가 되었다. 이와 같은 사실이 ‘국왕’과 ‘권서국사자’라는 ‘칭호(稱號)’ 사이에서 공정대왕을 더욱 애매한 상태로 위치지운 원인이 되기도 했다.
위 여러 정황들을 종합해 보면, 태종과 세종의 의도아래 공정대왕의 묘호가 정해지지 않았으며 공정대왕을 국왕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도로 정리된다. 그러나 공정대왕이 ‘국왕’으로 군림했다는 증거도 여러 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왕릉인 ‘후릉(厚陵)’에 장사지내고, 비록 4글자이지만 시호를 정해 올렸으며, 종묘에 부묘(祔廟)하는 등 상례 절차를 ‘국장(國葬)’으로 치룬 사실 및 명나라에서 시호를 내린 일 등은 국왕이었기에 가능할 수 있는 일들이었다.
그 뒤에 세종이 승하하고 문종이 병약하여 단명하고, 어린 단종이 즉위하면서 정정(政情)이 불안해졌다. 숙부인 수양대군(후일 세조)이 단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찬탈의 성격을 띠며 즉위했다. 세조는 즉위하는 과정에 성리학적 명분에 저촉되었고 정국 운영도 다분히 전제적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공정대왕의 묘호 논의는 제기조차 힘들었다.
묘호가 없었던 공정대왕에 대해 묘호를 추상해 달라는 요구는 예종・성종・중종대에 제기되었다. 예종은 제사지낼 때의 축문(祝文)에 공정대왕에게만 묘호가 없음을 의문으로 여겨 ‘종(宗)’을 칭하자고 직접 나섰다. 그러나 신하들의 반대로 추진하지 못했다. 성종・중종대에는 공정대왕의 후손들에 의해 거론되었다. 성종은 왕위에 즉위한 적도 없는 생부를 ‘덕종(德宗)’으로 추숭하고 종묘에도 부묘하면서 공정대왕의 묘호 논의는 완결 짓지 못했다. 중종대에도 마찬가지였다. 태종대 이후의 임금들은 모두 그의 자손들이므로 후손의 입장에서 선왕(先王)이 거행하지 않은 일, 그 일이 의리명분에 저촉되는 일이라 하더라도 쉽사리 추진하기 어려웠다. 대체로 꺼리는 경향이었다. 그 때문에 중종대에 이르기까지 ‘조종조(祖宗朝)에서 시행하지 않았던 일이므로 가벼이 의논하기 어렵다’는 이유를 댔다. ‘조종지성헌(祖宗之成憲)’을 중시하는 태도였다.
공정대왕에 대한 부당한 대우는 종묘에서도 나타났다. 성종대에는 추숭한 덕종을 부묘하기 위해 공정대왕을 임시로 종묘 정전의 협실(夾室)로 옮기는 조처를 단행했다. 생부를 추숭하는 것도 원칙에 어긋나는데 부묘까지 하는 것은 지나친 처사였다. 더구나 국왕으로 재위했던 임금을 협실로 옮기는 것은 잘못 중의 잘못이었다. 협실은 익실(翼室)이라고도 하는데 종묘 정전과 영녕전 정전에 날개 모양으로 붙어 있는 건물의 명칭이다. 연산군대에는 성종을 종묘 정전에 부묘하고자 하니 고조(高祖)에 해당한 태종과 공정대왕이 사대(四代)를 벗어나는 상황에 부닥쳤다. 그러자 태종의 신주는 불천지주(不遷之主)로 삼아 그 신주를 모신 곳을 세실(世室)로 정해 종묘 정전에서 영원히 제사를 받도록 결정했다. 불천지주는 옮기지 않는 신주, 세실은 대대로 그 신실(神室)에 신주를 모신다는 의미이다. 반면, 공정대왕은 친연(親緣)이 다했다고 하며 영녕전 익실로 옮겼다. 세종대에 형성된 두 임금에 대한 인식이 성종을 거쳐 연산군대에 이르기까지 변함없이 이어져 온 결과였다.
여기에 더해 성종대부터 공정대왕을 폄하하는 발언까지 등장했다. 제대로 왕위를 이은 계체지군(繼體之君)이 아니라는 둥, 선위를 받은 것이 ‘덕(德)’이 있어서가 아닌 ‘지위(地位)’가 태종보다 앞서기 때문이며 심지어 일컬을 만한 공렬(功烈)이 전혀 없다는 등이었다. 연산군대에는 태종으로 이어지는 계보만 인정하여 ‘공정대왕은 친종(親宗)이 아니다’고 까지 폄하하여 시간이 흐를수록 정도가 심해졌다. 중종대에는 공정대왕은 겸양의 덕이 지극히 커서 공정대왕에 대한 여러 부당한 대우의 근원이 공정대왕의 ‘겸양의 덕’에서 비롯되었다고 이해했다. 예를 들면, 후릉의 수호군(守護軍)을 노비로 하고 그 아들들의 작질(爵秩)도 강등하게 한 것이 모두 공정대왕의 유교(遺敎)였다고 인식했다.
공정대왕에 대한 ‘겸양의 덕’은 이후 명종과 선조대를 지나도록 변함없이 지속되었다. 이와 같은 인식의 완전한 불식은 조선후기 현종대에 공정대왕의 유명(遺命)이 맞는지 실록에서 확인한 뒤 이루어졌다. 유명이 뚜렷하게 드러난 곳이 없다는 보고였다. 또한 현종대에는 그때까지 방치되어 온 공정대왕과 정안왕후의 능인 후릉을 수개했다. 능의 단장은 왕실의 왕통 계보 정리와 관계가 있었다. 숙종대로 접어들면서 왕실의 족보인 『선원록(璿源錄)』을 정리하면서 공정대왕의 묘호가 빠진 것을 확인하고 추상하자는 논의로 이어졌다. 숙종 7년(1681)에 서인(西人)들을 중심으로 묘호 추상을 주장했고, 숙종도 찬성하여 공정대왕에게 ‘정종(定宗)’이라는 묘호를 올렸다. 물론 부족했던 시호 4글자도 더 올려 다른 국왕들처럼 8글자의 시호를 갖게 되었다. 이때부터 더 이상 ‘공정왕’ ‘공정대왕’이라는 칭호 대신 정종이라는 묘호를 일컫게 되었고, 문헌에서도 그와 같이 기록했다.
조선시대에 성리학적 의리 명분에 어긋나 문제를 유발시킨 왕실 전례 문제는 조선 전기에 대부분 발생했다. 여기에는 태종이나 세종・세조 등 후대에서도 걸출의 군주들이라는 평을 받는 임금들이 연관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을 둘러싸고 발생한 전례를 바로잡기가 쉽지 않았다. 태종은 태조의 계비(繼妃)였던 신덕왕후를 종묘에 부묘하지 않고 그 능인 정릉(貞陵)을 폐릉시킨 장본인이었다. 또한 태종과 세종은 공정대왕의 묘호를 정하지 않고 국왕으로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다. 세조는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등・사사하고,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顯德王后)의 신주를 종묘에서 내쳤다. 후손들의 입장에서 열성들이 거행하지 않은 일을 가벼이 의논하기 어렵다는 이유를 명분으로 삼을 만했고, 해결되지 않은 채 조선후기까지 가게 된 것도 충분히 납득된다.
조선전기에는 앞서 본 바와 같이 조종의 성헌을 이유로 공정대왕의 묘호를 올리지 않았다. 반면, 조선후기에는 정반대의 상황이 연출되었다. 열성(列聖)들이 거행하지 않은 일을 후손이 바로잡는 것을 효의 측면에서 ‘계술(繼述)’이라고 주장하며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한 명분으로 삼았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전란의 후유증을 극복하고 사회정의를 세우기 위해 성리학적 ‘의리명분’이 그 어느 시대보다도 강조되면서 반대의 상황을 연출하게 되었다. 그래서 조선전기까지 소급하여 성리학적 의리명분이라는 기준에 미흡했던 일들을 ‘계술’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총정리하기 시작했다. 숙종대에 공정대왕의 묘호를 정해 올리게 된 것도 이와 같은 배경 아래 가능할 수 있었다.
이현진
ㆍ서울대학교 대학원 국사학과 박사학위 취득
ㆍ논문 「조선 후기 종묘정비와 세실론 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