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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외교

조선왕(예종~중종)과 비(妃)의 이야기

작성자변강쇠|작성시간19.04.27|조회수2,396 목록 댓글 0

  

조선왕(예종~중종)과 비()의 이야기

 


예종과 중종



예종(睿宗)


 

예종(睿宗, 1450~1469, 재위 1468~1469)은 조선의 제8대 임금이다. 휘는 황(), 자는 명조(明照) 또는 평남(平南). 시호는 예종양도흠문성무의인소효대왕(睿宗襄悼欽文聖武懿仁昭孝大王)이다. 세조와 정희왕후의 둘째 아들이다.

 

1450년 경오 정월 정축일에 당시 수양대군이었던 세조와 정희왕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세조가 왕위에 오른 뒤 해양대군(海陽大君)으로 봉해졌으나 형인 의경세자가 1457년 까닭없이 갑자기 죽어버리자 8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11살 때인 1460년 한명회의 딸을 세자빈(이후 장순왕후)으로 맞이한다. 그러나 1461년 음력 11월 왕실의 적통인 인성대군을 출산한 후 산후병으로 17세의 나이로 요절한다. 이듬해 1462년 안순왕후를 맞이한다.

 

1468년 음력 9월에 세조로부터 왕위를 이어받아 19살 때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예종은 건강이 좋지 않은 데다 아직 성년인 20살이 되지 않았으므로 왕권을 실질적으로 행사할 수 없었다. 따라서 예종의 국정은 어머니인 정희왕후의 수렴청정과 세조가 지명한 3명의 신하들이 내린 결정을 형식적으로 결재하는 원상제도를 통해 이루어졌다. 예종의 재위 기간은 14개월밖에 되지 않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1468년에 남이의 옥 사건이 일어났으며, 1469년에는 삼포(부산포, 염포, 제포)에서 일본과의 개별 무역을 금지하였고, 그 외에도 병영에 딸려 있는 논과 밭을 일반 농민들이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또한 세조 때부터 편찬하기 시작했던 경국대전을 드디어 완성했으나 이를 반포하지 못한 채 20세라는 젊은 나이에 승하하고 말았다.

 

예종은 원상제도와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으로 왕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한 임금으로 기억되고 있지만 재위 기간 동안 정희왕후의 강력한 통치로 사회가 비교적 안정되어 있었다. 예종은 2명의 왕자와 1명의 공주를 두었으나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인 잘산군이 왕위에 오름으로써 예종의 아들들은 왕위를 계승하지 못했다.

 

1468년에 세조가 승하하여 왕위에 즉위하였으나, 재위 14개월만인 이듬해 1469년 그도 형인 의경세자처럼 20세의 젊은 나이로 죽고만다. 서오릉 중의 하나로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능을 조성하여 능호를 창릉(昌陵)이라 하였으며, 14981223일에 승하한 안순왕후도 이듬해 214일 창릉에 안장되었다. 146117세의 나이로 요절한 원비인 장순왕후는 세자빈으로 죽어 공릉(후일 추존)에 묻혔으며, 성종 때 장순왕후로 추존되었다.

 

가족 관계

 

: 7대 세조

: 정희왕후 윤씨

원비 : 장순왕후 한씨(章順王后 韓氏)

인성대군 분(仁城大君 糞)

계비 : 안순왕후 한씨(安順王后 韓氏)

제안대군 현(齋安大君 琄)

현숙공주(顯淑公主)

혜순공주(惠順公主)

양자 : 9대 성종

후궁 : 귀인 최씨(貴仁 崔氏)

후궁 : 상궁 기씨(尙宮 奇氏)

 

 

장순왕후 한씨(章順王后 韓氏)

 

장순왕후 한씨(章順王后 韓氏, 1445~1461)는 조선 예종(睿宗)의 정비이다. 시호는 휘인소덕장순왕후(徽仁昭德章順王后), 아명은 한냉이(韓冷伊)이다. 상당부원군 충성공 한명회(上黨府院君 忠成公 韓明澮)와 황려부부인 민씨(黃驪府夫人 閔氏)의 셋째 딸로,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세자빈 시절 인성대군을 낳은 뒤 산후병으로 요절하였다.

 

1460년 세자빈(世子嬪)으로 간택되어 당시 세자였던 예종과 가례를 올리고 부부가 되었으니 이때 나이가 16살이었다. 정숙한 성품에 아름다운 용모로 시아버지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책봉 이듬해인 1461년 음력 11, 왕실의 적통인 원손(예종의 장남인 인성대군)을 낳았으나 같은 해 음력 12월에 녹사(錄事) 안기(安耆)의 집에서 산후병으로 향년 17세로 요절했다.

야사에서는 장순왕후와 그의 동생 공혜왕후, 형부 덕종(의경세자), 남편 예종과 아들 인성대군 등 세조의 자손들이 이른 나이에 요절한 것이 단종을 억울하게 죽인 세조에 대한 현덕왕후(顯德王后)의 저주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저주의 첫 대상자로 알려진 덕종의 경우 단종보다도 먼저 사망했으며, 따라서 세조가 덕종의 죽음에 분노해 현덕왕후의 능묘를 파헤치고 폐서인했다는 설명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세조는 총애하던 며느리의 죽음에 비통해하며, 온순하고 너그럽고 아름다운 것을 장(), 유순하고 어질고 자혜로운 것을 순()이라 하여 세자빈 한씨에게 장순(章順)의 시호를 내리고 장순빈(章順嬪)으로 삼았다. 후일, 장순빈의 제부이자 시조카인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그녀를 장순왕후로 추존했다. 능은 경기도 파주시 조리읍 봉일천리 파주삼릉 내에 위치한 공릉(恭陵)이다. 장순왕후로 추숭되면서 왕후의 예에 걸맞은 제사를 지냈다고 하나, 애초에 세자빈의 묘로 지어졌기 때문에 다른 왕후들의 묘소보다 초라한 행색을 갖추었다.

 

가족 관계

 

아버지 : 상당부원군 충성공 한명회(上黨府院君 忠成公 韓明澮)

어머니 : 황려부부인 민씨(黃驪府夫人 閔氏)

언니 : 영천군 윤사로와 정현옹주(세종의 3)의 아들 윤반(尹磻)과 결혼

언니 : 영의정 신숙주의 장남 신주(申澍)와 결혼

남동생 : 낭성군 한보(琅城君 韓堡, 1447~ 1522)

여동생 : 공혜왕후(恭惠王后, 1456~ 1474)

남편 : 예종(睿宗, 1468- 1469)

아들 : 인성대군 분(仁城大君 糞, 1461~1463)

 

 

안순왕후 한씨(安順王后 韓氏)

 

안순왕후 한씨(安順王后 韓氏, 1445?~1498년 음력 1223)는 조선 예종(睿宗)의 계비이다. 시호는 인혜소휘제숙안순왕후(仁惠昭徽齊淑安順王后)이다. 청천부원군 양혜공 한백륜(淸川府院君 襄惠公 韓伯倫)과 서하부부인 임씨(西河府夫人 任氏)의 딸로,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성종 즉위 초 그와 성종의 모후 소혜왕후와의 서열을 놓고 갈등이 있었다.

 

세자빈이었던 장순왕후(章順王后)1461년에 요절하자, 그 이듬해에 동궁의 종5품 후궁인 소훈(昭訓)에 간택되어 세자 시절의 예종과 가례를 올렸다. 1468년 세조가 승하하고 예종이 왕이 되자, 아들을 두고 있던 소훈 한씨가 왕비에 책봉되는데, 이 사람이 바로 안순왕후이다. 그러나 예종은 보위에 오른 지 13개월 만에 훙서하고, 왕비 한씨는 어린 나이로 청상이 되고 만다.

 

한편, 정희왕후(貞熹王后)는 한명회와의 정략으로, 예종의 형인 의경세자의 두 아들 중 잘산군(乽山君)을 예종과 안순왕후의 양자로 삼아 왕이 되게 하였다(성종). 이에 그의 생모인 수빈 한씨(粹嬪 韓氏)는 성종 즉위 당시에는 그대로 수빈이었다가 성종 1년 음력 2월에 남편인 의경세자의 추존(의경대왕)에 따라 인수왕대비가 되었으며, 예종의 후비(后妃)인 한씨는 인혜왕대비(仁惠王大妃)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곧 두 사람의 위계가 문제시 되자, 성종 3년에 신숙주의 의견에 따라, 자성대왕대비(慈聖大王大妃, 정희왕후)의 윤허 아래 인수왕비와 인혜왕대비의 위계를 형제 서열로(의경세자는 세조의 장남이고, 예종은 세조의 차남임) 하는 것으로 결정내려졌다. 성종 6, 의경왕이 덕종(德宗)으로 추존됨과 동시에 인수왕비는 인수왕대비(仁粹王大妃)로 진봉되는데, 이때 인수대비와 인혜대비의 서열 문제가 다시 거론되었으나 역시 인수대비를 웃전으로 하는 것으로 일단락 지어졌다.

 

후일, 성종이 승하하고 그의 장남 연산군이 조선의 제 10대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1497(연산 3), 인수대왕대비와 함께 휘호를 받아 '명의대왕대비(明懿大王大妃)'가 되었다. 소생은 제안대군(齊安大君) ()과 현숙공주(顯肅公主)11녀이다. 여동생이 신수영(연산군 폐비신씨의 남동생)과 혼인하였다.

 

그녀는 1498(연산군 4) 음력 1223일 창경궁에서 승하하였다. 이에 연산군은 그녀의 시호를 안순, 휘호를 소휘제숙으로 하였으며 그 상제(喪制)를 정하는 데 있어 논쟁이 있었으나 결국 남편인 예종과 같이 기년제(1년간 상복을 입는 것)로 정하였다. 능은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 서오릉 내에 위치한 창릉(昌陵)으로, 남편 예종과 합장되었다. 

 

조선 성종(成宗)

 

조선 성종(成宗, 1457년 음력 730~1494년 음력 1224, 재위 1469년 음력 1128~1494)은 조선의 제9대 왕이며 시인, 유학자이다. 휘는 혈(). 사후 시호는 성종강정인문헌무흠성공효대왕(成宗康靖仁文憲武欽聖恭孝大王)이다. 세조의 장남인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로 아버지의 요절로 왕위 계승권에서 제외되었으나, 숙부 예종이 일찍 죽어 정희왕후와 훈신들의 추대로 즉위했다. 즉위 후 태종과 세조에 의해 숙청된 사림파를 등용하고, 성리학적 통치 규범을 지키고 왕도정치를 구현하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여러 후궁들 간의 갈등을 다스리지 못하고 폐비 윤씨를 사사, 이는 훗날 아들 연산군으로 하여금 대량 숙청을 불러오는 빌미를 제공한다.

 

성종은 세조의 맏아들인 의경세자(훗날 덕종으로 추존됨)와 왕세자빈 한씨(소혜왕후로 추존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혈이라 지어졌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도량이 넓어 세조로부터 태조를 닮아 기상과 학식이 뛰어날 것이라는 칭찬을 들으며 무척 귀여움을 받았다. 궁궐에 벼락이 내리쳤을 때도 그의 형 월산대군이나 다른 내관들은 엎드려 있었으나 그는 태연히 서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나이 3살 때 아버지 의경세자가 갑자기 사망하면서 그는 어머니 세자빈 한씨와 함께 궁밖으로 나가게 된다. 조부 세조는 특별히 한씨를 수빈으로 봉하고, 궁궐에 살아도 좋다고 하였으나 한씨는 사저로 물러 앉는다. 잠저 시절14615살이 되던 해에 자산군(者山君)으로

봉해졌다. 그러나 수빈 한씨는 꾸준히 대궐에 출입하면서 한명회, 신숙주 등과 교류하였고, 한명회의 딸 중의 한명을 자산군과 결혼시킨다.

 

1468년 세조가 죽자 의경세자의 동생인 해양대군이 예종으로 즉위하면서 잘산군(乽山君)에 봉해졌다가 예종이 즉위한 지 10개월 만에 승하하였다. 당시 예종의 아들인 제안대군은 4살이었고, 또 형인 월산군은 병환 중이었기 때문에 정희왕후의 명령에 따라 1469(예종 1) 음력 1128일에 조선의 왕으로 즉위하였다. 성종의 즉위 배경에는 정희왕후의 의지 외에 그의 장인이었던 한명회의 생각과 어린 그를 즉위시킴으로서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려던 신숙주 등의 훈신들의 이해관계가 두루 작용한 결과이기도 했다. 

 

13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즉위 초반에는 할머니인 자성대왕대비 윤씨의 수렴청정을 받았다. 당시 유력한 국왕 후보들을 모두 제치고 한명회와 정희왕후의 뜻에 따라 왕위에 올랐던 만큼 섭정을 받은 7년 동안 국정의 모든 결정권은 신숙주, 한명회 등의 원로 대신들에게 있었다. 그러나 수렴청정을 끝낸 1476(성종 7)부터는 원로 대신들이 국정의 중요한 결정에 참여하는 원상 제도를 폐지하여 결재권을 되찾았다. 친정을 시작한 이후 그는 권신들을 축출하고 길재-김숙자의 문하생들을 대거 등용한다.

 

임사홍, 유자광 등의 공신들을 유배시키는 한편, 성균관을 비롯한 각 도의 향학에 전결과 서적을 주어 교육과 문화의 진흥에 힘썼으며, 김종직 등 사림파를 과감히 등용함으로써 신진세력을 형성시키고 정치적 기반을 만들었다. 그해 숙의(淑儀) 윤씨(尹氏)를 왕비로 삼았으나 1479(성종 10)에 폐위하고 이듬해 사사(賜死)하여 연산군 때 사화의 불씨가 되었다.

 

성종의 치세는 문화의 황금기라고 불렸을 만큼 세종과 세조가 이룩해 놓은 치적들을 바탕으로 빛나는 문화 정책을 펴 나간 시기였다. 1474(성종 5)에는 경국대전을 완성하여 반포했으며 1492년에는 경국대전을 보충한 대전속록동국여지승람, 동국통감, 동문선(東文選), 악학궤범등 다양한 서적을 편찬간행했다. 세조 때 폐지된 집현전과 비슷한 역할을 맡은 홍문관을 설치하는 한편, 문신 중에서 뛰어난 재주를 가진 인물을 골라 집에서 독서하게 하는 호당제도를 실시하는 등 문화 발전에 이바지했다. 또한 승려들을 엄하게 통제하고 대부분의 사찰을 폐쇄하는 등 숭유억불 정책을 철저하게 실천했다.

 

대외적으로는 1479(성종 10) 윤필상(尹弼商)으로 하여금 압록강 주변의 여진족을 몰아내고 1491(성종 22) 허종(許琮)을 파견하여 두만강 일대의 여진족 소굴을 소탕하고, 이듬해에는 이계동(李季同)을 함길도 일대에 파견하여 여진족의 침략을 대비하는 등 북방 방비에 힘썼다.

 

조선 시대 초기 문물 제도는 성종 때에 거의 완성되었으며, 백성들은 건국 이후 가장 태평성대한 세월을 맞이했다. 그러나 이러한 태평성대는 성종의 치세 후기에 퇴폐 풍조를 조장하기도 했다. 재위 기간 25년 동안 내내 선정을 베풀었던 성종은 1494년 음력 122438살의 나이에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하였다. 능은 선릉(宣陵)이다. 재위 기간 중 세종세조 때 이룩한 초기 문화가 은성(殷盛)하게 개화했고, 조선 초의 문물제도가 일단 정비되었다. 숙의(淑儀) 윤씨(尹氏)를 왕비로 삼았다가 폐위한 뒤 사사(賜死)하여 연산군 때 사화의 불씨가 되었다. 

 

가족 관계

 

조부 : 세조

생부 : 덕종

생모 : 소혜왕후 한씨(昭惠王后)

양부 : 예종

양모 : 안순왕후 한씨 (安順王后)

정비 : 공혜왕후 한씨(恭惠王后 韓氏)

폐비 : 폐비 윤씨(廢妃 尹氏)(제헌왕후:齊獻王后)

대군 (조졸)

연산군 륭(燕山君 㦕)

대군 (조졸)

계비 : 정현왕후 윤씨(貞顯王后 尹氏)

진성대군 역(晉城大君 懌) - 중종

순숙공주(順淑公主)

신숙공주(愼淑公主)

후궁 : 명빈 김씨(明嬪 金氏)

무산군 종(茂山君 悰)

후궁 : 숙의 김씨(淑儀 金氏)

휘숙옹주(徽淑翁主)

경숙옹주(敬淑翁主)

휘정옹주(徽靜翁主)

후궁 : 귀인 정씨(貴人 鄭氏)

안양군 항(安陽君 㤚)

봉안군 봉(鳳安君 㦀)

정혜옹주(靜惠翁主)

후궁 : 귀인 권씨(貴人 權氏)

전성군 변(全城君 忭)

후궁 : 귀인 엄씨(貴人 嚴氏)

공신옹주(恭愼翁主)

후궁 : 숙의 이씨(昭儀 李氏)

후궁 : 숙의 하씨(淑儀 河氏)

계성군 순(桂成君 恂)

후궁 : 숙의 홍씨(淑儀 洪氏)

완원군 수(完原君 㥞)

회산군 념(檜山君 恬)

견성군 돈(甄城君 惇)

익양군 회(益陽君 懷)

경명군 침(景明君 忱)

운천군 인(雲川君 心+)

양원군 희(楊原君 憘)

혜숙옹주(惠淑翁主)

정순옹주(靜順翁主)

정숙옹주(靜淑翁主)

후궁 : 숙의 남씨(淑儀 南氏)

후궁 : 숙용 심씨(淑容 沈氏)

이성군 관(利城君 慣)

영산군 전(寧山君 恮)

경순옹주(慶順翁主)

숙혜옹주(淑惠翁主)

후궁 : 숙의 권씨(淑容 權氏)

경휘옹주(慶徽翁主)

후궁 : 숙원 윤씨(淑媛 尹氏)

 

성종은 태종때 내려진 적서 차별과 서자의 관직 제한을 구체적인 조항으로 명시하여 반포하고, 이를 경국대전에 수록하게 한다. 이때부터 서자(庶子)들은 본격적으로 차별대우를 받게 된다. 문무관 2품 이상 관리의 양첩 자손에게는 정3품으로 한정하고 천첩 자손에게는 정5품으로 한정한다. ...(이하 중략)... 7품 이하 관리부터 관직이 없는 자의 양첩의 자손에게는 정5품으로 한정하고 천첩 자손 및 그밖에 천인으로 양민이 된 자는 정7품에 한정한다 재가(재혼)하거나 실행한 부녀의 아들 및 손자, 서얼의 자손은 문과를 응시하지 못하게 하라. 이런 조항이 경국대전에 기재케 된 것은 건국 초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그의 조상 태조 이성계가 조선초 창업에 막대한 공을 세운 정안대군 방원을 비롯한 본 부인 한씨의 자식들을 제외하고 계비 강씨의 아들인 방석을 세자로 삼았다. 이이화, 한국의 파벌(어문각, 1983) 이에 방원은 불만을 품고 세자인 방석과 그 옹호 세력인 서얼 출신의 정도전 등을 힘으로 몰아냈다. 그리고는 방원은 적서의 구분을 분명히 하였다라고 공언하였고, 방석 형제를 서얼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신덕왕후 강씨는 후궁이나 첩이 아니라 고려시대의 경처와 향처를 별도로 두는 규정에 의해 얻은 정실부인이었다. 이후 김종직, 김굉필 등은 한때 서자라는 이유로 차별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의견을 피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성종은 유지(유언)을 내려 자신의 사후 100년 동안 폐비 윤씨를 사사한 것을 공론하지 못하도록 규정하였다. 그러나 아들 연산군은 성종의 유지를 앞세운 사림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 유지를 깨고, 폐비 윤씨 사사 사건을 재조사한다. 

 

공혜왕후 한씨(恭惠王后 韓氏)

 

공혜왕후 한씨(恭惠王后 韓氏, 1456년 음력 1011~1474년 음력 415)는 조선 성종(成宗)의 정비이다. 시호는 휘의신숙공혜왕후(徽懿愼肅恭惠王后)이다. 상당부원군 충성공 한명회(上黨府院君 忠成公 韓明澮)와 황려부부인 민씨(黃驪府夫人 閔氏)의 막내딸로,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언니이자 시숙모인 장순왕후와 마찬가지로 20세를 못 넘기고 요절하고 만다.

 

1467년 자을산군(乽山君)과 혼인하여 천안 군부인(天安郡夫人) 한씨(韓氏)로 불리다 1469년 자을산군이 예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자 왕비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1474년 음력 415, 19세의 젊은 나이로 창덕궁(昌德宮) 구현전(求賢殿)에서 훙서하였다. 이에 성종은 공경하고 유순하게 윗사람을 섬김을 공()이라 하고, 너그럽고 부드러우며 인자함을 혜()라 하여 공혜왕후(恭惠王后)의 시호를 올렸으며, 연산군 5(1498)에는 휘의신숙(徽懿愼肅)이라는 존호가 더해지기도 했다. 종묘 정전(正殿)에 왕후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능은 경기도 파주시 조리읍 봉일천리 파주삼릉 내에 위치한 순릉(順陵)이다.

 

가족 관계

 

아버지 : 상당부원군 충성공 한명회(上黨府院君 忠成公 韓明澮)

어머니 : 황려부부인 민씨(黃驪府夫人 閔氏)

언니 : 윤사로(정현옹주의 남편세종의 사위)의 아들 윤반(尹磻)과 결혼

언니 : 신숙주의 아들 신주(申澍)와 결혼

언니 : 장순왕후(章順王后, 1445~ 1461)

오빠 : 낭성군 한보(琅城君 韓堡, 1447~ 1522)

 

 

폐비 윤씨(廢妃 尹氏)

 

폐비 윤씨(廢妃 尹氏,? 1445~ 1482년 음력 816)는 조선의 제9대 왕 성종의 후궁이자, 두 번째 왕비이며, 10대 왕 연산군의 생모이다. 시호는 '제헌'(齊獻), 폐출되었으므로 보통 폐비 윤씨라 부른다. 1473년 성종의 후궁으로 간택되어 숙의에 지위에 있다가 공혜왕후가 죽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봉상시 판사(奉常寺 判事) 증 의정부영의정 함안부원군 윤기견(尹起畎, 또는 윤기무, 尹起畝)와 신씨의 딸로, 권신 신숙주의 외조카이며 윤관의 11대손이다. 본관은 함안(咸安)이다. 성종과의 갈등으로 유명하며, 그로 인해 폐서인 후 사사되었다. 연산군 때 잠시 '제헌왕후'(齊獻王后)로 왕후의 작호가 추숭되었으나 중종반정 이후 다시 삭탈되었다.

 

윤씨는 봉상시판사를 지낸 윤기견과 장흥부부인(연산군 사후 군부인으로 격하) 고령 신씨의 딸로 태어났다. 윤기견의 자녀로는 3명의 이복 오빠와 1명의 친오빠가 있었다. 할아버지 윤응(尹應)은 통훈대부(通訓大夫) 교하현감(交河縣監)이었고, 증조 할아버지 윤득룡(尹得龍)은 조선조정에 처음 벼슬하여 자헌대부(資憲大夫)와 호조전서(戶曹典書)를 역임했다. 고조부 윤희(尹禧)는 고려조에서 정순대부(正順大夫)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를 지낸바 있다.

 

폐비 윤씨의 선계는 본래 파평 윤씨로, 고려 예종때의 장군, 시중 윤관의 11대손녀가 된다. 폐비의 6대조 윤돈(尹敦)5대조 윤희보(尹希輔)가 고려조정에서 출세하여 흥위위 주부를 거쳐 함안백(咸安伯)으로 봉작되면서 함안윤씨로 분가했던 것이다. 따라서 폐비윤씨의 본관을 파평으로 전하는 문헌도 있었다.

 

윤씨는 본래 성종의 후궁으로 입궐했는데, 성종 4(1473) 음력 319일에 간택후궁으로 입궁하여 숙의에 봉해졌다. 성종 5(1474)에 성종의 첫 번째 왕비인 공혜왕후가 승하하자 성종은 별도의 왕비 간택령을 내리지 않았고, 그로부터 2년 뒤에 숙의였던 그녀가 임신중인 몸으로, 왕비로 승격되어 4개월 뒤 원자(연산군)를 낳아 중전의 위치는 더욱 확고해졌다.

 

평소에 질투심이 많았다고 알려져 있다고 하지만, 여자관계가 복잡한 남편인 성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러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야사로 전해지는 이야기에는 성종이 자신의 처소에 들르지 않고 다른 후궁들의 처소만 찾자, 다른 후궁들을 질투하여 잡아다가 추궁, 취조하는 등의 행위를 하다 성종의 눈 밖에 났고, 말싸움 중 왕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낸 것이 발단이 되어 왕대비인 인수대비의 분노를 샀다는 설이 있으며, 다른 설로는 삼사의 탄핵으로 폐출되었다는 설도 있다. 또한 경쟁관계에 있던 성종의 다른 후궁들이 인수대비를 찾아가 윤씨를 비판하며 그녀의 폐위를 부추기기도 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 등으로 윤씨는 마침내 1479년 음력 62일에 왕비에서 폐위되었다.

 

조선 조정에서는 그녀가 폐서인이 된 이후 자신의 행동을 뉘우치고 있는 점, 세자의 생모라는 점 등을 이유로 들어 그녀를 살려 두고자 하였으나, 성종의 모후인 소혜왕후(인수대비)와 엄숙의, 정숙용 등의 사주로 인해 궁녀들이 성종에게 허위 보고를 하면서 1482년 음력 816, 결국 사약을 받아 사사되고 말았다. 윤씨는 죽기 전 자신의 피가 묻은 금삼을 친정어머니 장흥부부인에게 전달하고 아들이 자라거든 이를 전달해 달라고 유언을 남기고 죽는다.

 

훗날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면서 이 사건에 대해 알게 되고, 결국 이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을 처벌하면서 1504년에 갑자사화 등이 일어나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고 그로 인해 한명회 , 한치형 등의 사람들이 부관참시를 당하고 그 이외의 사람들이 사사되거나 유배되었다. 하지만 실제 역사 속의 연산군은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어머니의 죽음을 알고 있었다. 연산군에 의해 제헌왕후(齊獻王后)에 추숭되고, 회묘는 회릉(懷陵)으로 격상되었다.

 

사후 경기도 장단에 매장되었으나 장지가 좋지 않다는 지관의 지적으로 신하들의 건의가 있자, 성종은 1488(성종 19)경 한성부 동대문구 회기동 경희의료원 자리로 이장을 하였다. 뒤에 윤씨의 묘가 회묘, 회릉, 회묘로 변경되면서 이는 지명이 되어 오늘날의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회기동의 지명 유래가 되었다.

 

성종은 폐비 윤씨의 묘를 '윤씨지묘(尹氏之墓)'라 비석을 세우고, 제관 2명을 보내 기일에 제사를 올리도록 하되, 묘의 이름을 영구히 고치지 못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후에 연산군이 즉위하면서 묘는 회묘에서 효사묘(孝思墓)로 바꿨다가 다시 회릉으로 격상시킨다.

 

그 뒤 무덤은 현 위치인 경기도 고양군 원당읍 원신동(현 고양시 덕양구)로 이장하였으며, 서삼릉 내에 위치한 회묘(懷墓)이다. 왕비의 예에 따라 능으로 개장되었기 때문에 비교적 화려한 외관을 갖추고 있다. 1506년 중종 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어 연산군이 그의 어머니 윤씨에게 올린 관작은 모두 삭탈되었고, 회릉 역시 회묘로 격하되었다. 아버지 윤기무는 두 번 결혼했는데, 그 중 양성 이씨가 낳은 배다른 오빠 3명이 있었고, 생모인 장흥군부인 고령 신씨에게서 낳은 친오빠 1명이 있었다.

 

가족 관계

 

할아버지 : 윤응[尹應, 통훈대부(通訓大夫) 교하현감(交河縣監)]

할머니 : 숙인 안동 권씨(安東 權氏, 선공감부정(繕工監副正)을 지낸 권소(權紹)의 딸) - 42

고모 : 윤씨

고모부 : 최첨로(崔添老, 내시령(內侍令)을 역임)

고종사촌 오빠 : 최문손(崔文孫, 태종 때 문과에 급제)

고종사촌 오빠 : 최효손(崔孝孫, 태종 때 문과에 급제)

친정아버지 : 윤기견

친정어머니 : 양성 이씨

친정 오빠 : 윤우(尹遇)

친정 오빠 : 윤해(尹邂)

친정 오빠 : 윤후(尹逅)

친정어머니 : 장흥부부인 고령 신씨

외할아버지 : 신평(申枰)=신숙주의 숙부

친정 오빠 : 윤구(尹遘)-병조참판

시할아버지 : 세조(世祖)

시할머니 : 정희왕후(貞熹王后) 윤씨

시아버지 : 덕종(德宗) : 의경세자(懿敬世子)

시어머니 : 소혜왕후(昭惠王后) : 인수대비(仁粹大妃)

(법적) 시아버지 : 예종(睿宗)

(법적) 시어머니 : 안순왕후(安順王后)

남편 : 성종(成宗)

아들 : 연산군

며느리 : 연산군부인 신씨, 신승선의 딸

외할아버지 : 신평(申枰)-사간원정언

외할머니 : 장흥 마씨

외증조부 : 신포시(申包翅)

외종조부 : 신장

외당숙 : 신숙주(申叔舟, 1417 ~ 1475), 친정어머니 고령 신씨의 사촌 오빠

증외고조부 : 마천목(馬天牧, 1358 ~ 1431, 공신) 

 

정현왕후(貞顯王后)

 

정현왕후 윤씨(貞顯王后 尹氏, 1462~1530)는 조선 성종(成宗)의 계비이다. 아명은 윤창년(尹昌年)이며 시호는 자순화혜소의흠숙정현왕후(慈順和惠昭懿欽淑貞顯王后)이다. 자순대비(慈順大妃)로도 잘 알려져 있다. 영원부원군 평정공 윤호(鈴原府院君 平靖公 尹壕)와 연안부부인 전씨(延安府夫人 田氏)의 딸로,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중종반정 시 중종을 왕으로 세우는 것을 승낙한 인물로 유명하다. 능은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 선정릉 내에 위치한 선릉(宣陵)으로, 남편 성종과 동원이강의 형태로 같이 묻혀 있다.

 

1473년 숙의로 뽑혀 입궁했고, 1479년 중전 윤씨(연산군의 어머니)의 폐위로 새로이 왕비로 책봉되었다. 그가 친정아버지 윤호와 사촌 윤필상 등과 함께 윤씨를 폐출하는 데 일조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폐비 윤씨 폐출 당시 17세였던 정현왕후가 이 일에 얼마나 간여했는지는 미지수이다. 진성대군(晉城大君 : 뒤의 중종)과 신숙공주(愼淑公主)를 낳았는데, 공주는 일찍 죽었다. 이후 폐비 윤씨의 소생 연산군은 그를 생모로 알고 자라다가, 1493년 성종의 묘비명과 행장을 쓸 때 폐비 윤씨의 사사 사건을 알게 되면서 갑자사화를 통해 사림파를 학살하는 원인을 제공했다. 1497(연산군 3) 자순(慈順), 1504년 화혜(和惠)의 존호를 받았다. 1506년 중종반정 때 반정의 주도 세력이 진성대군(중종)을 왕위에 세울 것을 주청하니 이를 승낙하였다.

 

연산군(燕山君)

 

연산군(燕山君, 1476년 음력 117(양력 122) ~ 1506116, 재위 1494~ 1506)은 조선의 제10대 임금이다. 휘는 융(). 성종의 장남으로 폐비 윤씨(제헌왕후) 소생이며, 비는 영의정 신승선(愼承善)의 딸이다. 시호는 폐위되었기에 없으며 살아있을 때 받은 존호는 헌천홍도경문위무대왕(憲天弘道經文緯武大王)이다. 진성대군(중종)의 이복 형이자 처고모부가 된다. 조선왕조의 대표적인 폭군으로 지목되고 있다.

 

1476년 음력 117(양력 122) 조선 성종과 폐비 윤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성종은 첫 아들인 연산군을 총애했고, 대군에 책봉되지 않고 태어나자마자 원자에 책봉되고 생후 1년만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후궁이 많았던 부왕 성종과 폐비 윤씨의 관계는 원만하지 못했고, 윤씨가 성종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낸 것을 기회삼아 후궁들과 인수대비는 윤씨를 왕비에서 폐하고 궁궐에서 축출한다. 1483(성종 14) 세자에 책봉되었고, 허침(許琛)조지서(趙之瑞)서거정 등에게 학문을 배웠다. 역사학자 이덕일에 의하면, 연산군은 자신이 정현왕후의 친아들이 아니며 폐비윤씨가 폐출되었음을 알고 있었다.

 

그는 어려서 모친 폐비 윤씨가 사사되면서 정현왕후의 아들인 것처럼 성장하였다. 흔히 1504(연산군 10) 폐비 윤씨의 사사 내막을 임사홍 등이 폭로함에 따라 피바람이 몰아쳤다고 알고 있으나, 사실과 다르다. 연산군은 즉위이전부터 자신을 돌본 정현왕후가 친 어머니는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실제로 연산군은 즉위한 뒤, 자신의 할머니와 삼촌인 신씨와 윤구를 전라도 장흥에서의 귀양살이에서 해방했으며, 30석과 노란콩 20석을 하사하여 생활이 어렵지 않도록 배려했다.

 

일설에는 이후 폐비 윤씨의 소생 연산군은 그를 생모로 알고 자라다가, 성종의 묘비명과 행장을 쓸때 폐비 윤씨의 사사 사건을 알게 되면서 갑자사화를 통해 사림파를 학살하는 원인을 제공했다는 설도 있다. 역사학자 이덕일에 의하면, 정현왕후는 친정아버지 윤호와 사촌 윤필상 등과 짜고 윤씨를 폐출하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 연산군은 즉위 후 즉위초 비융사(備戎司)를 두어 병기를 만들게 하고 변경지방으로 주민을 이주시키는 한편, 녹도(鹿島)에 침공한 왜구를 격퇴하고 건주야인을 회유 또는 토벌하는 등 국방에 주력하였다.

 

즉위 초기에는 빈민을 돕고 국조보감(國朝寶鑑) 등 여러 서적을 완성시켰으며 국방도 튼튼히 하였다. 연산군은 사창상평창진제창(賑濟倉)의 설치하여 빈민의 어려움을 덜어주었고, 사가독서(賜暇讀書)를 부활하였으며, 또한 경상우도지도, 국조보감, 동국명가집등을 간행하였고, 역대제왕시문잡저, 속국조보감, 여지승람을 완성하는 등, 즉위 초에는 다소의 업적을 이룩하기도 하였다.

 

즉위 이듬해부터 어머니 폐비 윤씨를 왕후로 복권시키는 일을 추진한다. 그러나 사림에서는 사후 백년간 논외에 부친다는 성종의 유언을 들며 폐비 복권을 반대하였다. 이 때문에 감정이 악화된 연산군은 사림파의 제거를 추진한다.

 

1498(연산군 4) 음력 7성종실록을 편찬할 때 김일손이 사초(사관이 기록한 역사 기록)에 수록한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세조의 계유정난을 비난한 것이라는 이극돈, 유자광의 참소에 따라 김일손뿐 아니라 많은 사림을 처형하거나 유배하고 이미 사망한 김종직은 부관참시하였다(무오사화). 이후 이극돈, 유자광, 윤필상 등 훈구파 고관들은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통해 사림파를 일망타진할 계획을 세운다. 무오사화때 처형 및 유배 당한 기록 : 이미 죽은 김종직의 관을 파헤쳐 그 시체의 목을 베는 부관참시형을 집행했다. 또한 김일손권오복(權五福)권경유(權景裕)이목(李穆)허반(許盤) 등은 간악한 파당을 이루어 선왕(先王)을 무록(誣錄)하였다는 죄를 씌워 죽이고, 강겸(姜謙)표연말(表沿沫)홍한(洪澣)정여창(鄭汝昌)강경서이수공(李守恭)정희량(鄭希良)정승조(鄭承祖) 등은 난()을 고하지 않았다는 죄로 귀양을 보냈으며, 이종준(李宗準)최부(崔溥)이원이주(李胄)김굉필(金宏弼)박한주(朴漢柱)임희재(任熙載)강백진(姜伯珍)이계맹(李繼孟)강혼(姜渾) 등은 김종직의 제자로서 붕당을 이루어 조의제문삽입을 방조했다는 죄로 역시 귀양을 보냈다. 한편 어세겸(魚世謙)이극돈(李克墩)유순(柳洵)윤효손(尹孝孫)김전(金銓) 등은 수사관(修史官)으로서 문제의 사초를 보고도 보고하지 않았다는 죄로 파면되었다.

 

연산군은 재위 10(1504년 음력 10월에 임사홍등의 궁중파와 부중파가의 권력투쟁이 발생하자 이를 이용하여 어머니의 한을 풀고자 했다. 사림파 일부는 성종의 유지를 주장해 폐비복위를 반대하였고, 이극돈, 유자광, 윤필상 등 훈구파 고관들은 갑자사화를 계기로 다시 한번 사림파에게 대대적인 타격을 주려 하였다. 연산군은 이들을 이용 사림파를 제거한 뒤, 훈구파 중 부중파 역시 제거를 획책한다. 성종의 두 후궁 및 사림훈구 대신들을 살아 있으면 처형하고 이미 사망했으면 부관참시한 것인데 이를 갑자사화라고 부른다. 사화를 주도했던 이극돈, 윤필상 자신들도 갑자사화로 희생되었고, 이미 죽은 한명회 등은 부관참시되었다. 이때 조모인 인수대비와의 언쟁 중 조모를 상으로 들이받았는데, 그 후유증으로 인수대비는 사망하였다. 인수대비(仁粹大妃)의 초상 때 역월지제(易月之制)라 하여 삼년상 대신 25일상을 치르는 등의 행위가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원각사를 폐하고 장악원을 원각사로 옮겼으며, 기생을 양성케 했다. 각 도에 채청사와 채홍사를 파견하여 소녀들과 말들을 징발하게 하고, 성균관의 학생들을 쫓고 그곳을 유흥장으로 만들고 경연(經筵)을 폐지한 후 사간원도 없애 버렸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유흥을 사람들이 보지 못하게 하려는 목적과 사냥터를 조성할 목적으로 민가를 부수고 사람들을 멀리 쫓아내어 철거민들이 발생하였다. 살던 집이 철거되어 생존권을 침해당한 민중들은 당연히 철거에 항의했고, 대신들도 연산군에게 민중들의 원성이 자자하다는 비판을 하였다.

 

그해 음력 720일에는 연산군을 비방하는 언문 투서가 발견된 것을 계기로 언문을 아는 자를 모조리 잡아들이고 언문 서적을 모두 태워 버리는 등 언문 사용을 금한다. 그에 대해서는 연산군의 문화적 잘못이라는 평이 있다. 더욱이 서총대(瑞蔥臺)라는 유흥장을 만들면서 민중을 강제로 동원하고, 베를 무더기로 바치게 하여 즉 민중들의 노동력과 재산을 수탈하여 민심도 돌아서게 되었다. 또한 자신을 비방하는 한글투서가 발견되었다 하여 한글의 사용을 금지하기도 했다.

 

1505(연산군 11) 음력 69일 신료들이 처음으로 헌천 홍도 경문 위무(憲天弘道經文緯武)라는 존호를 올렸으나 자신에게는 과분하다고 물리친다. 그러나 마지못해 받는 듯 하면서 존호를 받아들인다. 채청사와 채홍사를 파견하여 소녀들과 말들을 징발한 것으로 부족한 연산군은 종친, 빈객 및 문신의 처첩을 빼앗아 간통을 즐기기도 했다. 이에 좌절한 일부 관료들은 사직하거나 낙향하였고, 아내와 딸, 첩을 빼앗기고 사직하거나 숨어버리는 관료들도 있었으며 이는 조혼을 부추겼다. 성균관과 홍문관, 예문관을 유흥장으로 만들고 술과 기생을 자주 불러들여 연회와 만찬을 하였으므로 시중에는 '흥청망국'이라는 유행어가 나타났는데, 여기에서 흥청망청이라는 단어가 파생되기도 하였다.

 

1506(연산군 12) 음력 92일 성희안, 박원종 등이 거병하여, 정치에 별로 관심도 없던 성종의 둘째아들 진성대군(중종)을 왕으로 추대하니, 연산군은 폐위되어 민가에 숨어있다가 체포되어 경기도 김포군 교동(喬桐)에 추방되었다. 이때 장녹수 등 그의 후궁들은 한성부 종로, 남대문 등에서 투석사형 당하였으며 연산군의 어린 아들들도 반정군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강화도에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숨을 거두기 직전 폐비 신씨가 보고 싶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2차례에 걸친 사화로 연산군에 대한 반감은 사림파뿐만 아니라 훈구세력들간에도 커지게 되었다. 홍문관과 사간원을 없애고 경연(經筵)과 상소제도를 중단시키는 등 왕을 견제할 수 있는 여론제도를 크게 위축시킨 데다가, 갑자사화를 계기로 훈구파도 심한 타격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대체로 즉위 초의 일부 업적을 제외하고는 연산군에 대해서는 좋지 않은 평가뿐이다.

 

다만 연산군은 본래가 학문을 싫어하는지라 신하들은 이를 이용하여 반대파를 사초(史草) 문제로 모함하여 무오사화를 일으켜 사림(士林)을 살해하였고 윤씨 사사문제(賜死問題)에 관련된 선비들을 대량 학살하였다는 평가도 있다. 또한 시정을 공박하는 한글 투서를 이유로 한글 사용을 금한 일은 연산군의 결정적인 문화적 실책이다. 그의 치세는 개국 100년의 조선왕조에 한 시대의 획을 긋게 하여, 이후 50년은 사화(士禍)라는 유혈극이 잇따라 일어나 그것은 선조 이후 다시 붕당(朋黨) 및 붕당정치로 확대 악화되고, 한편으로는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국난으로 국운은 쇠퇴의 길을 밟게 되었다.

가족 관계

 

: 9대 성종

: 폐비 윤씨

왕비 : 거창군부인 신씨(居昌郡夫人 愼氏)(임영대군의 외손녀, 단경왕후의 고모)

왕자 원손(元孫)

폐세자 황(廢世子 皇+)

왕자 영수(榮壽)

왕자 총수(聰壽)

창녕대군 성(昌寧大君 誠)

휘신공주(徽愼公主):이수억(李壽億)

공주 : 이복억(李福億)

후궁 : 숙의 이씨(淑儀 李氏)

양평군 인(陽平君 仁)

왕자 돈수(敦壽)

후궁 : 숙의 윤씨(淑儀 尹氏)

후궁 : 숙의 곽씨(淑儀 郭氏)

후궁 : 숙의 권씨(淑儀 權氏)

후궁 : 숙의 민씨(淑儀 閔氏)

후궁 : 숙용 장씨 장녹수(淑容 張氏) - 장녹수(張綠水)

옹주 영수(翁主 寧壽)

후궁 : 숙용 전씨(淑容 田氏)(전전비(田田非):중종반정후 장녹수와 함께 참수됨

후궁 : 숙원 최씨(淑媛 崔氏)

후궁 : 숙원 장씨(淑媛 張氏)

후궁 : 숙원 이씨(淑媛 李氏)

후궁 : 숙원 김씨(淑媛 金氏)(김귀비(金貴非): 중종반정후 장녹수와 함께 참수됨

후궁 : 숙용 우씨(淑容 牛氏):우부리(牛夫里)의 딸

후궁 : 내인 정금(內人 鄭今)

옹주 합금(翁主 咸今)

후궁 : 궁인 김씨(宮人 金氏):김숙화(金淑華), 나주의 기생출신

후궁 : 궁인 안씨(宮人 安氏):후에 麗媛 安氏(여원안씨)로 추봉되었다.

  

폐비 신씨(廢妃 愼氏)

 

폐비 신씨(廢妃 愼氏, 1476년 음력 1129~1537년 음력 48)는 조선 연산군(燕山君)의 왕비이다. 폐위되었으므로 시호가 없으며, 거창군부인(居昌郡夫人)이라고도 불린다. 거창부원군 장성공 신승선(居昌府院君 章成公 愼承善)과 중모현주 이씨(中牟縣主 李氏)의 딸로, 본관은 거창(居昌)이다. 남편 연산군과 함께 조선에서 반정으로 인해 퇴위한 첫 번째 사례로 꼽힌다. 무덤은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에 위치한 연산군묘(燕山君墓)이며, 남편 연산군과 쌍릉을 이루고 있다.

 

외할아버지 임영대군은 세종과 소헌왕후의 아들로, 남편 연산군은 그녀의 칠촌 조카뻘이 되기도 한다. 또 이복 시동생인 중종에게는 형수이자 처고모가 된다. 1488(성종 19) 왕세자로 있던 연산군과 가례를 치르고 입궁한 후, 1494년 연산군 즉위와 함께 왕비에 봉해졌다. 그러나 1506년 연산군이 폐출당하면서 그녀도 군부인의 신분으로 강등되었다. 폐비된 후 중종은 그녀에게 빈()의 예를 사용하게 했다고 한다. 사후 연산군 묘 옆에 배장되었고, 무덤 앞에 서있는 비석명은 '거창신씨지묘(居昌愼氏之墓)'이다. 연산군과의 사이에서는 43녀를 낳았으나 두 아들과 공주 하나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요절하였고, 그나마 두 아들은 연산군이 폐위된 후 사사되었다.

 

가족 관계

 

외조부 : 임영대군

아버지 : 거창부원군 신승선(임영대군의 사위)

어머니 : 중모현주 이씨(세종의 손녀, 임영대군의 딸)

외숙부 : 구성군

오빠 : 익창부원군 신수근

오빠 : 신수영

오빠 : 신수겸

남편 : 10대 연산군

시동생&조카사위 : 11대 중종

조카&아랫동서 : 단경왕후 

 

조선 중종(中宗)

 

중종(中宗, 1488~1544, 재위: 1506~1544)은 조선의 제11대 왕이다. 휘는 역(), 자는 낙천(樂天). 사후 시호는 중종공희휘문소무흠인성효대왕(中宗恭僖徽文昭武欽仁誠孝大王)이다. 성종의 차남으로 정현왕후 소생이다. 반정으로 집권한 두 번째 군주였다. 그러나 사적인 욕심이나 원한으로 반정을 일으킨 세조 찬위, 인조반정과는 다른 각도에서 평가되나, 전반에는 공신 세력에 의해, 후반에는 외척 세력의 전횡에 휘둘렸다. 재위 중반에 조광조 등의 사림을 일시에 기용하였으나 개혁정책에 피로를 느껴 숙청한 뒤, 외척에게 정사를 위임한다. 이는 후일 대윤, 소윤간의 정쟁의 원인이 된다.

 

초반성종과 정현왕후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복 형인 연산군은 폐비 윤씨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정현왕후를 친어머니로 여기면서 자라다가 우연한 기회에 폐비 윤씨의 일을 알게 되었다. 정현왕후와의 관계는 소원해졌지만 연산군은 어린 이복동생에게는 친절하였다. 그뒤 진성대군은 신수근의 딸과 가례를 올린다. 신수근의 아버지는 영의정 신승선으로 연산군의 비 신씨의 친정아버지이기도 했다. 친가로는 이복 형제였지만, 처가로는 처고모부와 조카사위의 관계가 되었다.

 

1494년에 진성대군(晉城大君)으로 봉해졌다가 1506년에 음력 92일 연산군의 폭정에 반발한 성희안(成希顔) · 박원종(朴元宗) · 유순정(柳順汀) 등이 일으킨 중종반정이 성공함에 따라 조선의 새 임금으로 추대되었다. 당시 진성대군은 자신을 국왕으로 세우기 위해서 온 반정군을 적으로 여겼을 정도로 정치에 큰 관심이 없었다.

 

반정군에 의해 추대 제의를 여러 번 받을 때부터 그는 신하가 임금을 택한다(澤君)는 것에 부정적인 시각을 나타냈다. 그러나 공신들의 세력은 막강하였고 중종 반정으로 추대된 이후 그는 이를 타개할 대안을 마련하는데 절치부심하게 된다.

 

하지만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반정세력의 정치적 의도로 국왕으로 등극한 중종은 혁명을 일으킨 공신들의 세력에 밀려 실질적인 권력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한 나약한 국왕이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서도 연산군의 폭정으로 말미암아 문란해진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고자 연산군이 폐지시켰던 모든 법제를 복귀시켰으며, 국왕의 자문을 담당하는 기관인 홍문관의 기능을 대폭 강화하고 신하들의 월과 춘추과시, 사가독서 등을 시행했다. 또한 중종은 왕도정치를 앞세워 공신들의 세력 팽창을 억누르려고 시도했으나 공신들의 힘이 너무나도 막강하여 성공하지는 못했다.

 

박원종, 홍경주 등의 공신 세력의 권력이 강화되고 왕 이상의 권한을 행사하려 하자 그는 사림 세력을 다시 등용하기로 결심한다. 중종은 조광조 등 갑자사화로 밀려났던 사림파를 중심으로 현량과를 실시하는 등 철저한 유교적 개혁 정치를 행하여 문벌세가를 누르고자 하였다. 그러나 지나치게 급진적이고 과격한 조광조의 개혁 정책은 보수적인 기득권층인 훈구 세력의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켰을 뿐 아니라 그를 절대적으로 신임하고 지지하던 중종마저도 싫증을 내게 된다. 특히 조광조의 반정 공신 명부 정리 작업(공신 명부에 올라온 공신들이 진짜 공을 세웠는지를 확인하는 작업)으로 다수의 공신들이 명단에서 이름이 삭제되는 일이 벌어지자 훈구파들의 위기감은 극에 달한다.

 

중종 반정 이후 비대해진 훈구파 권신들과 척신들의 전횡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중종은 보다 강력한 왕권을 확립할수 있는 왕권강화를 원했다. 그러나 조광조는 도학 정치 실현이 목적으로서 목적이 달랐다. 후일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오종록 교수는 "왕권 확립을 꾀하던 중종이 훈구파에 대적하기 위해 정암을 키웠으나 정암 등 사림파가 또 다른 세력으로 부상하는 것을 경계했다""정암과 중종은 동상이몽을 꿨다"고 봤다.

 

조광조는 도학정치가 펴지길 꿈꿨고 중종은 힘센 군주가 되길 갈망한 것이다. 중종은 사림파 역시 하나의 비대해진 새로운 기득권층으로 해석하여 강력한 왕권의 걸림돌로 인식한다. 일설에는 주초위왕 나뭇잎 모함 공작이 중종의 지령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에 의하면 왕의 심복이 한순간에 버림을 받은 것이다. 중종 임금에게 한 궁녀가 궁궐의 나뭇잎 하나를 가져다 바친다. 벌레가 갉아먹은 자리를 따라 나뭇잎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주초위왕(走肖爲王)> , 조씨(+=)가 왕이 된다는 글이다.

 

"조광조의 역심(逆心)을 하늘이 알려준 것이옵니다."

 

반정으로 등극한 중종은 자신 역시 쿠테타로 축출될수 있다는 생각을 하여, 이복 형제들, 성종의 다른 왕자군이나 기타 왕족들을 불신하고 경계했다. 반정으로 등극한 중종은 조광조를 의심하나, 나뭇잎의 글씨는 궁녀가 과일즙을 발라놓은 자리를 개미들이 파먹은 것에 불과한 것이다. 말하자면 음모이다.

 

그날 밤, 홍경주와 남곤, 심정 등은 은밀히 입궐해 중종을 만나 주청한다. "조광조가 붕당을 만들어 국정을 어지럽히고 있사오니 이들을 처단해야 합니다." 중종은 조광조, 김식, 김구 등 사림파를 투옥시킨다. 결국 중종은 1519년 남곤 및 심정, 홍경주와 계획해서 조광조를 비롯한 다수의 사림들을 실각시켰고, 의심 많은 왕 중종은 조광조에게 사약을 내려 죽음을 당하게 된다(기묘사화). 연산군이 갑자사화를 일으켰다는 명분으로 역모를 꾀하여 왕이 된 중종이 기묘사화를 일으킨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조광조를 비롯한 급진적인 사림파들이 몰락한 뒤 견제 세력이 없어지자 다시 공신들의 세력이 부활할 조짐을 보였다. 중종은 공신들의 권력집중을 차단할 목적으로 외척인 윤여필, 윤여해, 윤지임, 김안로 등을 등용한다.

 

처음에는 이들에게 내섬서와 장악원 등의 제조 직을 제수했다가 훈련대장 등을 제수하여 도성의 숙위를 맡겼고, 이후 이들의 자녀들이자 자신의 처남격인 윤임, 윤원로, 윤원형 등이 출사하게 된다. 그러나 외척 세력은 또다른 세력을 형성하여 정쟁의 소용돌이를 만들게 된다. 그 다음에는 외척 세력이 새로이 등장하여 중종의 치세 중기와 후기에는 외척 세력과 반정 공신들 간의 정권 다툼으로 인해 크고 작은 사건이 연달아 일어나 정국이 편안할 날이 없었다. 1531년에는 기묘사화 후 집권했던 심정(沈貞이항(李沆김극복(金克福) 등이 화를 당했고, 1537년에는 심정 일파를 모함한 김안로(金安老허항(許沆채무택(蔡無擇) 등이 주찬되는 등 재위 동안에 화옥(禍獄)이 그치지 않았다.

 

정국이 불안해지자 그 동안 잠잠하던 남쪽의 왜구들이 삼포왜란을 일으켜 경상도 해안 일대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또 북쪽에서는 여진족이 46진 지역을 빈번하게 노략질하는 등 오랑캐들의 약탈이 끊임없이 발생하자 중종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서 비변사를 설치하였다. 그밖에 속삼강행실도, 신증동국여지승람등 다방면에 걸친 책들이 편찬, 간행되었으나 기묘사화 이후로는 문화 발전 정책이 거의 정지되었다. 한편 윤임, 김안로, 윤원형, 윤원로 등의 척신 세력이 발호하였으나 그는 이를 막지 못했다.

 

382개월이라는 긴 세월 동안 왕위에 머물러 있었던 중종은 정국이 혼란을 거듭하는 바람에 이렇다 할 만한 업적을 제대로 남기지 못한 채 왕세자에게 왕위를 넘겨준 다음날인 1544년 음력 1114, 57살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능은 서울특별시 강남구에 있는 정릉(靖陵)으로 능원에 중종 혼자만 묻혀 있다.

 

가족 관계

 

: 9대 성종

: 정현왕후 윤씨

정비 : 단경왕후 신씨(端敬王后 愼氏)

1계비 : 장경왕후 윤씨(章敬王后 尹氏)

왕세자 호() :인종

효혜공주(孝惠公主) 옥하(玉荷)

2계비 : 문정왕후 윤씨(文定王后 尹氏)

경원대군(慶原大君) () : 명종

의혜공주(懿惠公主) 옥혜(玉惠) 혹은 옥란(玉蘭)

효순공주(孝順公主) 옥련(玉蓮)

경현공주(敬顯公主) 옥현(玉賢)

인순공주(仁順公主)

후궁 : 경빈 박씨(敬嬪 朴氏)

복성군(福城君) ()

혜순옹주(惠順翁主) 철환(鐵環)

혜정옹주(惠靜翁主) 석환(石環)

후궁 : 희빈 홍씨(熙嬪 洪氏)

금원군(錦原君) ()

봉성군(鳳城君) ()

후궁 : 창빈 안씨(昌嬪 安氏)

영양군(永陽君) ()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

정신옹주(靜愼翁主) 선환(善環)

후궁 : 귀인 한씨(貴人 韓氏)

왕자

후궁 : 숙의 홍씨(淑儀 洪氏)

해안군(海安君) ()

후궁 : 숙의 이씨(淑儀 李氏)

덕양군(德陽君) ()

후궁 : 숙의 나씨(淑儀 羅氏)

후궁 : 숙원 이씨(淑媛 李氏)

정순옹주(貞順翁主) 정환(貞環)

효정옹주(孝靜翁主) 순환(順環)

후궁 : 숙원 김씨(淑媛 金氏)

숙정옹주(淑靜翁主) 수환(守環) 

 

단경왕후 신씨(端敬王后 愼氏)

 

단경왕후 신씨(端敬王后 愼氏, 1487~1557년 음력 127)는 조선 중종(中宗)의 정비이다. 시호는 공소순열단경왕후(恭昭順烈端敬王后)이다. 익창부원군 신도공 신수근(益昌府院君 信度公 愼守勤)과 청원부부인 한씨의 딸로, 본관은 거창(居昌)이다. 조선의 역대 왕비 중 제일 짧은 7일의 재위 기간을 보유하고 있으며, 역적의 딸로 연좌되어 폐출된 후 영조 때에 부모와 함께 복위되었다. 능은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에 위치한 온릉(溫陵)이다.

 

1499(연산군 5) 12살의 나이에 당시 진성대군에 봉해져 있던 중종과 결혼하여 부부인이 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이 성공하면서 남편이 왕위에 오르자 그녀도 자연스럽게 왕비에 올랐으나 그녀의 아버지인 익창부원군 신수근이 연산군의 처남(폐비 신씨의 오빠)인 데다가 신수근이 중종반정에 가담하지 않은 관계로, 1506(중종 원년) 음력 99일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진성대군(중종)을 왕위에 앉힌 반정세력에 의해 7일 만에 폐위되어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녀가 폐위된 후 새로이 중종의 왕비가 된 장경왕후가 1515년 사망하자, 담양 부사 등이 그녀의 복위를 간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으나, 복위를 반대하는 중신들에 의해 복위되지 못하였고, 훗날 단경왕후의 복위를 간한 사람들은 유배형에 처해졌다.

 

중종은 높은 산에 올라 그녀가 거처하고 있던 사가를 바라보는 일이 많았고, 그 사실을 안 그녀의 사가에서도 중종이 잘 볼 수 있는 곳에 그녀가 자주 입던 붉은 치마를 펼쳐놓았다는 야사가 전해져 오고, 또한 중종의 임종 직전에 신씨를 궁궐 내에 들였다는 소문이 돌기도 하였다. 그만큼 중종은 그녀를 폐위하려는 생각이 없었으며, 그녀를 매우 사랑했다고 하는 야사가 전한다. 그러나 중종실록 등에는 그녀를 폐위 할 때 중종이 크게 반대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위의 야사가 단순히 지어낸 이야기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반론도 있다. 폐위된 이후 중종기에 그녀의 처우에 대해서는 별다른 기록이 없어 명확히 알 수 없으나 인종이 즉위하여 그녀가 거처하는 곳에 폐비궁(廢妃宮)이라는 이름을 주고 생활에 보조를 하기 시작했다. 1557(명종 12) 음력 127일에 71세의 나이에 사망하자 왕후 시부모의 예()에 따라 이등례(二等禮)로 초상을 치렀다.

 

그녀는 계속해서 시호도 없이 폐비 신씨 혹은 신비(愼妃)라고 불리다가, 영조 때인 1739(영조 15) 음력 328일에야 김태남 등의 건의로 왕후로 복위되었다. 이때 그녀의 아버지는 익창 부원군(益昌府院君), 어머니 권씨(權氏)는 영가부부인(永嘉府夫人), 어머니 한씨(韓氏)는 청원부부인(淸原府夫人)으로 격상되었다. 그때 단경이라는 시호와 함께 공소순열(恭昭順烈)이라는 존호를 받았다.

 

가족 관계

 

조부 : 거창부원군 신승선(임영대군의 사위, 정소공주와 문종, 세조의 조카사위)

조모 : 중모현주 이씨(세종의 손녀, 임영대군의 딸, 정소공주&문종&세조의 조카)

: 익창부원군 신수근

: 청원부부인 청주한씨

외조부 : 한충인(인수대비의 사촌동생)

고모이자 윗동서 : 폐비 신씨

고모부이자 시숙 : 10대 연산군

남편 : 11대 중종

시할머니 : 인수대비 

 

장경왕후 윤씨(章敬王后 尹氏)

 

장경왕후 윤씨(章敬王后 尹氏, 1491~1515년 음력 32)는 조선 중종(中宗)의 제1계비이다. 시호는 숙신명혜선소의숙장경왕후(淑愼明惠宣昭懿淑章敬王后)이다. 파원부원군 정헌공 윤여필(坡原府院君 靖憲公 尹汝弼)과 순천부부인 박씨(順天府夫人 朴氏)의 딸로,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그가 사망한 뒤 담양 부사 박상(朴祥)과 순천 군수 김정(金淨)이 폐비 신씨의 복위를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고, 이로 인해 조선 정부는 대간이 세 번이나 전원 교체되는 등 일대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능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서삼릉 내에 위치한 희릉(禧陵)이다.

 

생모가 일찍 죽어, 어렸을 때에는 이모이자 월산대군의 부인인 승평부부인 박씨(昇平府夫人, 박원종의 누이)에게 양육되었다. 1506(중종 1), 내명부 종2품 숙의(淑儀)의 후궁 신분으로 입궐하였다가, 1507년에 단경왕후가 폐위되자 같은 반정공신의 딸인, 다른 후궁들을 제치고 정비에 책봉되었다. 당시 조정은 외숙부인 박원종이 장악하였는데 중전이 되는데에는 외숙부 박원종의 도움이 컸으며, 월산대군의 처조카라는 신분이 장점으로 작용하였다. 1511년에는 중종의 맏딸인 효혜공주(孝惠公主), 1515년에는 적통 대군인 원자(인종)를 낳았으나 산후병(産後病)으로 엿새 만에 25세의 나이로 승하하고 말았다. 능묘중종은 그녀에게 장경(章敬)의 시호와 숙신명혜(淑愼明惠)의 휘호, 영경(永慶)의 전호(殿號)를 내렸고 명종 대에는 선소의숙(宣昭懿淑) 등의 휘호가 더 추상되었다.

 

가족 관계

 

: 윤여필

: 순천부부인 박씨

이모 : 승평부부인

이모부 : 월산대군 (성종의 친형)

외숙부 : 박원종

오빠 : 윤임

남편 : 11대 중종

: 효혜공주

아들 : 12대 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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