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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외교

전제정치(despotism, tyranny , 專制政治)와 그리고 문벌 귀족과 민중

작성자참으로|작성시간13.08.08|조회수352 목록 댓글 1

 

 

 

전제정치(專制政治)와 그리고 문벌 귀족과 민중

 

전제정치(despotism, tyranny , 專制政治)

 

전제정치란 민주주의ㆍ공화제ㆍ입헌주의의 대립개념으로, 국민의 정치참여와 자유권이 없고 지배자가 국가의 모든 권력을 장악하여 초월적ㆍ강권적으로 지배하는 것이다.

 

전제정치는 데스포티즘(despotism)과 티러니(tyranny)라는 2가지의 다른 단어로 표현된다.

티러니는 원래 고전 고대의 정체유형의 하나이다. 왕으로서의 자격이나 적격성이 결여된 자가 권력을 장악ㆍ찬탈하는 사태를 나타내고 그것은 참주정(潜主政)으로 번역된다. 통치의 정통성 결여를 문제로 한다는 함의(含意)는 서구에 계승되어 17세기의 영국에서는 사회계약설과도 연계되어 정통한 권한이 없는 지배 일반을 티러니라고 하는 용법이 확립된다. 그러나 18세기 후반 이후 데스포티즘이라는 관념과 혼합하여 양자의 구별이 어려워진다.

 

데스포티즘은 국민을 자의적 또는 노예적으로 지배하는 정치나 정치적 자유를 억압하는 체제를 말한다. 17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생겨난 조어이다. 원래는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ēs)가 가정에서 노예를 지배하는 주인(despótēs)의 권력을 나타내는데 사용한 데스포티아에서 유래한다. 이 말은 자유인을 노예처럼 지배하고 있다고 하여 동양의 여러 제국(帝國)을 비판할 때에도 사용되었다. 루이 14세(Louis XIV)의 정치에 대한 비판자는 이 용법을 사용하여 기본법을 무시하고 신앙의 자유를 억압하는 절대 권력은 서유럽의 군주국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함의를 내포하여 전제 권력이라는 말을 사용하기 시작한다.

 

데스포티즘이라는 말을 본격적인 정치개념으로서 정착시킨 것은 몽테스키외(Charles-Louis de Secondat, Baron de la Brède et de Montesquieu)의『법의 정신』이다. 전제는 법률에 의거하지 않고 공포를 원동력으로 하는 정체라고 규정하고 군주정이나 공화정과 함께 독립한 카테고리가 된다. 그것은 국민의 자발적 복종을 기대할 수 없는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는 제국에 적합한 통치형태이다. 그것과 동시에 전제는 어떠한 정체에서도 잠재적인 위험이라고 간주된다. 몽테스키외에 있어서 전제정치의 본질은 권력의 집중과 일원화이며 그것을 억제하기 위해서는 권력과 권력이 상호 억제 균형하는 제도가 불가결하다고 한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정치권력의 국가로의 집중을 평가하는 논자는 오히려 ‘합법적 전제’라는 말을 사용하여 전제 비판의 논의에 저항한다.

 

미국 독립이나 프랑스 혁명에서는 전제가 군주정과 동일시되어 공화국의 건설을 목표로 한다. 19세기가 되자 민주화된 사회에서 자유의 보다 교묘한 억압의 가능성에 관심이 집중된다. 토쿠빌(Alexis Charles Henri Maurice Clérel de Tocqueville)은 ‘온화한 데스포티즘’이라는 관념 하에 평준화와 경제적 이익 만능주의가 진전된 사회에서 국가가 강대한 권력을 집중시키기에 이른 상황을 비판적으로 분석한다. 종래의 전제와 같은 폭력적 수단에 의한 억압이 아니라 이익 유도와 같은 소프트한 형태로 지배를 관철하는 신종(新種)의 전제가 등장한다. 또한 민주화된 체제에서 획일화된 다수가 수적인 힘으로 소수자권리를 유린할 가능성(‘다수의 티러니’)도 논의된다. 이러한 논의는 20세기의 대중 민주주의에 잠재된 위험을 예견하는 논의로서 종종 참조된다.

 

근대 이후에 활발하게 사용된 전제정치라는 관념은 이와 같이 자국의 체제가 정치적 자유를 상실할 수밖에 없는 사태에 경종을 울리기 위한 용법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동시에 비서유럽 국가의 정치나 사회에 대한 편견을 조장하고 ‘동양적 전제’라는 획일적인 이미지를 고정시키는 결과도 초래한다. 기후풍토나 국민성으로 보아 동양의 여러 국가에는 전제가 가장 합리적인 통치형태라는 논의나 역사진보에서 뒤쳐져 자유라는 관념을 이해할 수 없는 미숙한 발전단계에 있는 비서유럽 사회는 서유럽 사회가 지도ㆍ지배해야 한다는 논의가 그것이다.

 

 

문벌 귀족과 민중

 

궁궐에 침입한 자들이 외쳤다. "안에서 나오는 사람이 있으면 모두 죽여라!" 신하들은 도망가고 왕은 혹시 해를 입지 않을까 하여 이자겸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대에게 왕위를 넘기겠노라."

 

■ 여진을 무찌르긴 하였으나

1109년 6월, 여진족이 보낸 사절이 개경에 나타났다. "고려가 새로 쌓은 아홉 성을 돌려준다면, 우리는 자자손손에 이르기까지 고려를 잘 섬기겠다." 하고 다짐하였다.

고려의 조정에서는 다시 격론이 일어났다. "그 땅은 본디 우리 조상의 땅이다. 하물며 오랫동안 애써 쌓은 성이니 돌려줄 수 없다." 이러한 주장이 제기되는 한편, "그 땅에서 얻을 것이 무엇인가? 불필요한 전쟁을 계속하느니 돌려주고 평화를 누리자." 하는 주장도 있었다.

고려가 여진족을 밀어내고 아홉 성을 새로 쌓은 것은 2년 전이었다. 여진은 한때 말갈이라 불리며 고구려와 발해에 복속되어 있었다. 고려는 이들을 경제적으로 도와주면서 국경을 안정시켰다. 그러나 12세기 초 완옌부가 여진을 통합하면서 영토 다툼이 심해졌다. 이에 고려에서는 별무반이라는 대부대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귀족이건 평민이건 모두 전쟁 준비에 나서 20만 명에 이르는 대군이 편성되었다.

이 부대를 이끌고 천리 장성을 넘어선 이가 윤관이다. 그는 장성을 넘어 여진족을 내몰고 아홉 성을 쌓았으며, 남쪽의 주민 수만 명을 옮겨 살게 하였다.(1107) 이로써 고려의 국경은 다시 북으로 이동하였다.

 

 ■ 지금 이대로가 좋다

당시 높은 벼슬을 독차지하던 귀족들은 왕이 앞장서서 여진과 전쟁을 벌이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였다. 이들은, 9성을 쌓은 뒤에도 잘못된 전쟁을 이끈 윤관을 몰아내고 9성을 돌려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여진족이 다시는 고려를 침략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자, 귀족들은 9성을 힘들게 지킬 이유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귀족들의 주장에 왕은 결국 물러설 수밖에 없었으니, 9성을 돌려주고 윤관은 벼슬에서 쫓겨났다.

이들은 전쟁보다는 평화를 원했다. 귀족 중심의 사회 구조가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왕의 권력이 커질수록 자신들의 지위가 낮아질까 봐 걱정하였다. 그래서 훗날 여진족이 세력을 키워 금나라를 세우고 고려에 사대 관계를 요구하였을 때도 여진에게 머리를 숙여서라도 전쟁은 피하자는 주장을 폈다.

당시 귀족들은 높은 벼슬과 넓은 땅을 지니고 권세를 누렸다. 왕실이나 지체 높은 가문과 혼인하여 지위를 높이는가 하면, 벼슬자리를 자손에게 물려주고, 자기들끼리 밀어주고 끌어 주며 높은 벼슬자리를 독차지하였다. 이른바 문벌 귀족의 세상이었다. 값비싼 청자 기와로 집을 지어 살고 금으로 불경을 베껴 쓰는 모습을 당시 개경에서는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 중미정의 슬픈 아낙

문벌 귀족의 사치스럽고 화려한 생활 뒤에는 민중의 슬픔이 드리워 있었다. 수많은 노비들이 귀족들의 넓은 땅을 경작하였으며, 농민들이 내는 세금의 많은 부분은 귀족들에게 흘러들어 갔다. 농민들은 해마다 자신이 수확한 생산물의 1/10가량을 나라에 냈으며, 자기 고을에서 생산되는 특산물을 따로 마련하여 나라에 바쳤다. 그리고 수시로 나랏일에 불려 나가 대가 없이 일해야만 하였다. 게다가 못된 관리를 만나거나 흉년이라도 들면 온 집안이 굶주림에 떨 수밖에 없었다.

 

왕이 신하들과 함께 중미정 남쪽 연못에 배를 띄우고 취하도록 마시며 맘껏 놀았다. …… 이 정자를 처음 지을 때 일하러 나오는 백성들은 자기 먹을 양식을 스스로 준비해 와야 하였다. 한 일꾼이 매우 가난하여 음식을 준비하지 못하였으므로 다른 사람들의 밥을 나누어 먹었다. 하루는 그의 아내가 음식을 가지고 와서 남편에게 "친한 사람과 함께 드세요." 하였다. 남편이 물었다. "집이 가난한데 어떻게 장만하였는가? 다른 남자와 가까이하여 얻어 왔는가, 아니면 남의 것을 훔쳐 왔는가?" "얼굴이 추하니 누가 가까이하겠으며, 성질이 옹졸하니 어찌 도둑질을 하겠소. 다만 머리카락을 잘라 팔아서 사 가지고 왔소." 아내가 말하며 머리를 보였다. 그 일꾼은 목이 메어 먹지 못하고, 이를 본 다른 사람들도 함께 슬퍼하였다.


- 《고려사》 〈세가〉 의종 조

평범한 농민 가정의 한 해 살이

수입은 최고 쌀 18가마, 지출은 먼저 가족 네 명이 먹고사는 데 필요한 곡식이 적어도 16.8가마였고, 여기에 세금 1.8가마(생산량 중 1/10), 공사 및 특산물 비용 3가마, 다음 해를 위해 남겨 둘 곡식 씨앗과 기타 경비를 합치면 23.8가마가 나온다.

고려 민들은 해마다 다섯 가마 이상 적자가 나서 빚을 지고 있었다. 이를 메우기 위해 험한 땅을 새로 일구거나 가축을 기르려고 노력해야 했고, 그래도 빚을 해결하지 못해 자식을 파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 개경이냐, 서경이냐

왕을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로 큰 권세를 누린 문벌 귀족 가문 가운데 경원 이씨 집안이 있다. 특히 이자겸은 인종의 외할아버지이자 장인으로서 막강한 권세를 누렸다.

그는 친척들을 좋은 자리에 두루 앉히고 벼슬자리를 팔아먹기도 하였으며, 스스로 왕이라도 된 것처럼 대우받으려고 하였다. 그 세력이 더욱 성함에 따라 뇌물을 드러내고 챙겼으며, 사방에서 받은 음식과 선물이 넘쳐 났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신하들은 어린 왕보다는 이자겸에게 머리를 조아렸고, 마침내 이자겸은 왕이 되기로 마음먹고 난을 일으켰다.(1126)

결국 이자겸의 난은 진압되었으나 궁궐은 불타 버렸으며, 왕의 권위는 크게 떨어졌다. 개경의 분위기 또한 뒤숭숭하였다. 바로 이때 서경 출신의 사람들이 묘청을 중심으로 힘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서경 세력은 수도를 서경으로 옮기자고 주장하였으며, 고려가 황제의 나라임을 강조하였다. 왕도 이들과 함께 서경으로 가서 새로운 정치를 펴겠다고 선언하였다. 서경 세력은 문벌 귀족들이 금(여진)의 요구에 굴복한 것을 문제 삼으면서 금 정벌을 주장하였다.

 이자겸 가계도

문종부터 인종 때까지 7대 80여 년간 경원 이씨는 왕비를 배출하였다. 이자겸은 일찍부터 왕의 외가 친척으로서 권력을 쥐었는데, 예종에게 둘째 딸을 시집보낸 뒤, 인종이 태어나자 다시 셋째 딸과 넷째 딸을 연거푸 인종에게 시집보냈다.

 

 

■ 그래도 남는 문제들

서경 세력이 힘을 모으자, 개경의 문벌 귀족들도 뭉쳤다. 이들은 수도를 옮기는 것, 금과의 대결 모두를 반대하였다. 개경 귀족들은 천도보다는 유교 이념에 충실함으로써 사회 질서를 바로잡자고 주장하였다. 아울러, 민생 안정을 내세워 금과 사대 관계를 맺었다. 이에 묘청 등 서경 세력은 봉기를 통해 서경 천도를 강행하려고 하였다.(1135) 개경에서는 김부식이 중심이 되어 발 빠르게 진압군을 모아 서경으로 향하였다.

양쪽의 대결은 싱겁게 끝나는 듯하였다. 진압군이 서경으로 진격하자 서경 세력이 묘청을 죽이고 항복할 뜻을 밝힌 것이다. 그러나 문벌 귀족들의 횡포에 시달리던 민중은 한번 잡은 칼을 놓지 않고 끝까지 이들과 맞서서 1년 동안 더 싸웠다.

서경의 봉기가 제압됨으로써 문벌 귀족에 대한 서경 세력의 도전은 좌절되었다. 폭넓은 제도 개혁을 통해 정치를 혁신하려던 왕의 뜻이 꺾이고, 사회 개혁을 바라던 민중의 꿈도 꺾여 버렸다.

승리한 문벌 귀족들은 여전히 높은 지위를 독차지하고 온갖 특권과 큰 권세를 누렸다. 그러나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여전히 쌓이고 있었으니, 머지않아 갈등은 한꺼번에 터져 나올 것이었다.

 

▣ 나도 역사가


'고려 귀족의 일생', 혹은 '고려 농민의 한 해 생활'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써서 돌려 읽어 보자.

▣ 과거와 현재의 대화


역사 연구도 독립운동으로 여긴 신채호는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을 최근 1,000년 동안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꼽았다. 그 이유를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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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빛내림 | 작성시간 13.08.08 한민족사의 정치역사는 한 마디로 전제왕권통치와 문벌귀족세력들이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먹고 성정한 통치체제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시대도 이러한 정치 의식은 조금도 개선되지 않고 항상 국민의 이름을 팔아 귀족정치를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정치귀족 세력들의 특권내려 놓기 운동이 불길처럼 타 올라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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