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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대 철종 이변 | ← | 26대 고종 이형 | → | 27대 순종 이척 | ||
| 대한제국 역대 황제 | ||||||
| 칭제건원 | ← | 초대 고종 이형 | → | 2대 순종 이척 | ||
| 묘호 | 고종(高宗) | ||
| 시호 | 통천융운조극돈윤정성광의명공대덕요준순휘우모탕경응명립기지화 신렬외훈홍업계기선력건행곤정영의홍휴수강문헌무장인익정효태황제 (統天隆運肇極敦倫正聖光義明功大德堯峻舜徽禹謨湯敬應命立紀至化 神烈巍勳洪業啓基宣曆乾行坤定英毅弘休壽康文憲武章仁翼貞孝太皇帝) | ||
| 연호 | 개국(開國)[1], 건양(建陽)[2], 광무(光武)[3] | ||
| 휘 | 명복(命福)[4] / 재황(載晃) / 형(𤌇)[5] | ||
| 자 | 명부(明夫) / 성림(聖臨). | ||
| 호 | 주연(珠淵) | ||
| 출생지 | 조선 한성 정선방 흥선군 사저 | ||
| 사망지 | 식민지 조선 경성 덕수궁 함녕전 | ||
| 즉위식 | 1864년 1월 21일 (음력 1863년 12월 13일) | ||
| 장례식 | 1919년 3월 3일 | ||
| 배우자 | 명성태황후(明成太皇后) | ||
| 아버지 | 이하응(李昰應) | ||
| 어머니 | 순목대원비 민씨(純穆大院妃 閔氏) | ||
| 생몰기간 | 1852년 9월 8일 ~ 1919년 1월 21일 (66세 150일) | ||
| 재위 기간 | 전체 | 1864년 1월 21일 ~ 1907년 7월 20일 (43년 190일) | |
| 조선 국왕 | 1864년 1월 21일 ~ 1897년 10월 12일 (33년 274일) | ||
| 대한제국 황제 | 1897년 10월 12일 ~ 1907년 7월 20일 (9년 283일) | ||
| 대한제국 태황제 | 1907년 7월 20일 ~ 1910년 8월 29일 (3년 42일) | ||
| 식민지 조선 이태왕 | 1910년 8월 29일 ~ 1919년 1월 21일 (8년 148일) | ||
이렇게 보듯 재위기간이 영조(52년), 숙종(46년)를 제외하고 가장 긴 임금이다.(그 다음이 선조의 41년이다.) 게다가 태황제 3년을 더하면 숙종을 뛰어넘고, 이후 이태왕으로서의 기간을 더하면 56년(+ 15일)로 영조를 거뜬히 뛰어넘는다. 아마 망국 + 독살(?)되지 않았다면 살아있는 기록이 되었을 인물(...). 참고로 같은 해 태어난 메이지 덴노의 재위기간은 45년 5개월이다. 죽기는 고종보다 7년 이른 1912년에 죽었다.
정식 시호는 고종통천융운조극돈윤정성광의명공대덕요준순휘우모탕경응명립기지화신렬외훈홍업계기선력건행곤정영의홍휴수강문헌무장인익정효태황제(高宗統天隆運肇極敦倫正聖光義明功大德堯峻舜徽禹謨湯敬應命立紀至化神烈巍勳洪業啓基宣曆乾行坤定英毅弘休壽康文憲武章仁翼貞孝太皇帝). 참으로 길다...역시 황제.[6] 약칭 고종태황제.
1. 사진 ¶
2. 개요 ¶
사실상 조선 최후의 군주이자 독립운동가. 물론 27대인 아들 순종이 있지만 그는 그냥 허수아비로 평생을 살았기에 사실상 고종이 최후의 군주라 할 수 있다.
'잘해보려 했는데 시대가 따라주지 않았다', '운도 안 따라줬고 결과도 안 좋았지만 주어진 상황 속에서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는 식으로 긍정적 평가를 받거나, 조선 멸망 후 안습한 왕족들의 삶 등으로 인한 동정표도 많이 받으나, 그의 근대화 노력이라 알려진 것이 실상은 일본이 계속 방해를 해서 뜻이 잘 되지 않았지만 마지막 왕으로 조선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나름 노력한 왕이다. 솔직히 말해서 민씨 일가의 부패와 동아시아 왕조들의 고질적인 두루뭉술하고 무능한 행정, 서양문화와 기술에 대한 불이해를 제외하면 딱히 병크라고 부를 행동은 없다. 그는 전형적인 조선의 군주의 모습을 보였다. 그게 망국 상황이라서 문제지. 그리고 1907년 고종은 일본의 압박으로 강제 퇴위를 하게 되고,조선의 군대는 해산된다.
3.1. 즉위과정 ¶
헌종과 철종이 잇따라 요절하면서 왕통이 단절되자, 당시 왕실 최고어른인 신정왕후 조 대비는 방계 왕족 중에 그나마 영조와 사도세자에게 닿아 있는 흥선군 이하응의 차남, 이명복을 차기 국왕으로 지목하니 이가 바로 고종이다. 그런데 정통성이 있는지를 엄밀히 따지자면 좀 복잡해진다. 은신군이야 사도세자의 친아들이니 문제가 없지만 은신군의 아들이자 흥선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은 양자였기 때문이다. 남연군도 인조의 아들인 인평대군의 후손이니 직계 왕통과 연관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미 철종조에 이르면 상당히 먼 것이다. 하지만 철종이 후사 없이 죽었고 철종의 형인 35세의 이경응은 왕위를 계승하긴 너무 늙었으니 왕위 계승 가능한 왕족들은 양자니 친자니 하는 복잡한 문제 다 떠나서 족보만 따지면 흥인군과 흥선군의 아들들밖에 없었다. 흥선군은 조대비에게 고종을 철종이 아니라 헌종의 양자로 들여 왕위 계승시키란 말을 하여 조대비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헌종의 아버지 효명세자, 즉 문조의 아내였던 신정왕후는 순원왕후가 철종을 헌종이나 익종이 아니라 순조의 아들로 입적시켜 왕위를 계승시켰기 때문에 찬밥 신세였는데 고종이 그런 신정왕후의 마음을 읽고 공식적으로 익종과 헌종의 혈통이 계승되게 하자고 한 것이다. 덕분에 흥인군의 아들인 이재원, 이재긍 형제는 왕위 계승에서 탈락했고 이명복이 즉위하게 된다. 그의 나이 12세였다. 그의 나이가 어린 관계로 조대비가 섭정했고 조대비가 대소사를 대원군에게 물어 처리한다는 선언을 함에 따라 대원군도 권력의 정점에 선다.
그의 아명(兒名)은 명복(命福)이다. 말 그대로 오래살라고 붙인 이름. 원래 그의 휘는 재황(載晃)이었으나, 피휘를 위해 형으로 고쳤다.(고종의 휘인 형(𤌇)이 희(熙)와 부수인 火의 모양만 다를 뿐이라서 같은 글씨인 줄 알지만 둘은 엄연히 다른 글씨다. 헤이그 밀사에 보낸 편지의 사인에 고종 스스로가 영문으로 이형이라고 썼다고 한다.##)
3.2. 친정 시작 ¶
어린 시절에는 대원군이 하는대로 끌려갈 수밖에는 없었지만, 즉위 10년이 지나 22세의 성인이 되자 최익현의 상소를 계기로 대원군을 옹호하는 신하들을 강하게 벌주며 자기 주도적으로 대원군을 실각시키고 친정을 하게 되었다. 자세한 것은 흥선 대원군 항목 참조.[9]
고종은 즉위 초기에 박규수, 이경하를 비롯한 대원군파, 중도의 안동 김씨들, 흥인군, 김병학을 비롯한 대원군 반대파를 골고루 등용하여 조정의 균형을 잘 맞추었고 대원군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민승호, 민겸호를 비롯한 여흥 민씨들에게 힘을 실어준다. 고종은 대원군의 개혁을 대부분 계승하여 호포제, 사창제, 서원철폐 등을 고수했고 만동묘는 복구는 시켜주었으되 국가가 제사를 주관하게 하여 유림의 명분은 충족시키고 힘은 돌려주지 않는 교묘한 방법을 썼다. 당백전 만큼은 아니지만 화폐 경제를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있던 호전(청전)을 혁파했고 문세도 없애 민생을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3.3. 운요호 사건과 개항 ¶
그러던 중 1875년 운요호 사건이 터진다. 측량을 구실로 접근한 운요호는 조선군이 위협사격을 하자 즉각 공격을 감행했고 영종도 수비대가 일본 수병 36명(전원 전장식 단발총 무장)의 상륙에 전혀 저항하지도 못하고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그런데 바로 그 영종도는 1868년에는 무장한 선원 200명의 공격을 격퇴해냈던 전과가 있다. 초지진도 운요호 한 척이 초토화했다는데, 그보다 겨우 4년 전에는 미 해군 포함 2척과 슬루프함 2척의 함포사격을 하루종일 받으면서도 미군 상륙 개시 전까지 계속 응사하던 포대였다[10] 그럴 수 밖에 없는것이, 1874년 1월부, 즉 고종의 친정 이후 강화도 일대의 군영에 돌릴 예정이던 예산들이 모조리 박살났던것. 청전 폐지로 갑자기 격심한 디플레이션을 야기되고 있었고 그 상태에서 강화도 일대 군영의 주요 수입원이던 경강수세를 혁파하여 가뜩이나 재정력이 부족했다. 때문에 운요호 사건 시점에서 경기도 서해안의 주요 수군영은 몇 달째 군수지원이 끊긴 상태였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들은 부득한 조치들이었다. 국가 1년 예산의 15배도 넘어가는 경복궁을 중건하는 과정에서 1866년 11월에 당백전을 찍어낸 대원군의 화폐 정책 때문에 당시 조선의 화폐유통은 인플레이션이 벌어지는 상황이었다. 이후 2년 만에 말도 안되는 악화[11]인 당백전이 폐지되었는데 인플레이션[12]이 벌어진 상황에서 당백전이 폐지되자 조정의 재정난이 극도로 심화된다. 이 문제를 해결 하기 위해서 대원군이 주력한 것이 관리들이 밀수입한 청의 동전 청전 유통을 강화 하는 것이었다[13].
그런데 이 청전도 악화이다[14] 이 청전은 삽시간에 상평통보 유통량의 40%를 점유하였고, 조선내에서는 화폐에 대한 불신풍조가 다시 일어났다. 당백전으로 불안했던 경제사정에서 인플레이션이 다시 시작된 것도 당연한 수순. 이렇게 당백전의 발행과 경복궁 중건으로 인한 재정위기를 그나마 넘어가기 위해서 도입된 청전이 한순간에 조선을 다시 휘청이게 만드는데 걸린 시간은 겨우 4~5년. 인플레이션 상황에서 화폐부실 문제로 1874년 청전이 폐지되자 다시 올랐던 인플레이션을 포함해서 역작용으로 디플레이션이 이어진 것이고, 이 과정에서 조선 정부는 다시 극심한 재정난으로 돌아가야 했다. 경강수세가 폐지된 것도 이 때문이다[15].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이 등골빼먹는 수준으로 조선 정부의 재정적 여력을 악화시켰다는 것과 당백전과 청전의 유통과정에서 발생했던 인플레이션과 폐해들을 고려하지 않으면 왜 고종이 부작용을 감수하면서도 다시 폐지하지 않을 수 없었는지를 이해할 수 없다. 천천히 폐지하는 것이 어떻게냐는 비판조차 말이 안되는 것이 화폐개혁을 시간을 두고 진행한 경우는 거의 100% 그레샴의 법칙이 왜 무서운지 알게된다. 단적으로 당백전이 발행되자 말자 조선에서는 상평통보가 씨가 말랐고, 당백전이 폐지된 이후에도 애초에 관북 이상 지방과 영남 지방은 청전 같은 악화는 쓰지도 았았기 때문에 부작용은 더더욱 집중되었다. 그 부작용은 안그래도 허약한 조선 조정의 재정난을 악화시켰을 것이다. 그러므로 왜 청전을 폐지해서 군사력을 더 떨어뜨렸느냐라는 것은 억지비판이 된다.[16]
각설하고 운요호의 무력에 조선은 놀라긴 했지만 이최응과 박규수를 비롯한 조정 대신들과 고종은 문호개방에 관심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나라문을 열고 관을 설치하여 통상을 하면 백성에게 이득이 될 것이다. 라는 결론을 내리기에 이르러 유림과 대원군의 결사반대조차 옳지 않다고 씹고 강화도 조약을 체결한다. 자세한 것은 해당항목 참조.
3.4. 임오군란 ¶
그러던 중 민씨 일가가 장악하고 있던 선혜청의 부패로 인해서 가뜩이나 별기군 창설 이후에 푸대접받고 있던 구식 군인들이 13개월이나 월급을 못 받는 상황이 벌어진다. 그나마 훈련도감을 비롯해서 특별한 소속이 있는 군인들은 제때 월급을 받을 수 있었으나 별기군 창설 이후 수많은 구식 군인들은 특별한 소속 없이 방치되었고 그들은 왕십리에서 채소를 재배해서 부업으로 겨우 먹고사는 지경에 이르렀다. 군인들의 불만이 위험 수위에 이르자 그들에게 1개월 치 급료가 지불되었는데 문제는 급료로 지불된 쌀이 겨와 모래가 섞인 썩은 쌀들이었다. 분노한 군인들이 항의하자 고지기들은 겁도 없기 군인들에게 꺼지라고 큰소리를 쳐댔고 분노한 군인들은 고지기를 묵사발로 만들었다. 이 소식을 들은 고종은 13개월이나 급료를 받지 않고도 규율을 지킨 것이 가상하다고 칭찬하다면서 나라에서 월급 못 준 것이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니 잘 타이르란 정상적인 결론을 내린다. 근데 민씨 일가의 수장인 선혜청 제조 민겸호는 왕의 명령을 씹고 주모자들을 감금한다.(...)
이에 구식군인들 사이에서 민겸호가 잡아간 군인들을 죽일 것이란 소문이 돌았고 폭발한 군인들은 선혜청 제조 민겸호, 흥인군 이최응을 비롯해 원성을 하고 있던 고관대작들을 닥치는대로 죽였고 일본군 교관들과 민간인도 살해했다. 일본 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는 간신히 목숨만 건져서 달아났고 겁에 질린 고종은 허겁지겁 대원군을 모셔와 군인들을 달래달라고 요청하며 다시 전권을 내어주었다. 군인들은 대궐에 나타난 대원군을 보고 환호했다. 대궐에 몰려든 군인들은 민중전을 내어 줄 것을 대원군에게 요구했지만 대원군은 중전은 이미 승하하셨으니 안심하고 물러나란 말을 하여 군인들을 해산시키고 별기군을 해체하고 강화도 조약을 비롯하여 일본과의 모든 통상조약의 파기를 선언한다.
그런데 이홍장의 지시로 청나라 군대가 들이닥쳐 대원군을 자신들의 진지로 초청하는 체 하며 그를 납치하여 청으로 끌고 가는 돌발상황이 발생한다. 동시에 홍계훈의 기지로 목숨을 건졌던 민비가 청나라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돌아와 다시 집권하게 된다. 청이 나름 친청적인 면모를 보인 대원군을 납치해간 이유는 대원군의 쇄국 재개가 일본을 자극하여 동북아의 균형을 망치지 않을까 우려해서 였다는 설이 있다. 한편 정여창의 눈에 들어 출세한 23세의 젊디젊은 원세개는 북양군벌의 철수 이후 조선에 잔류한 청군을 지휘하며 조선에서 총독이라도 되는양 행세하게 된다.
3.5. 갑신정변 ¶
이 와중에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서재필 등의 젊은 급진 개화파들이 일본이 지원을 얻어 정변을 일으키니 이것이 곧 1884년의 갑신정변이다. 우정국 사건을 시작으로 민영익을 베어넘긴[17] 그들은 민씨일파, 고종과 명성왕후를 확보하여 경우궁으로 옮기고 전영, 후영의 장수들과 고종의 내관들을 비롯하여 자신들의 집권에 방해되는 이들과 그들이 부르기엔 수구당, 실질적으로 온건 개화파에 해당하는 이들을 입궐시켜 닥치는대로 베어죽였다[18]. 고종은 눈물을 흘리며 제발 그들을 살려달라고 김옥균 등에게 애원했지만 흥분한 급진 개화파들은 고종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급진 개화파는 정강 14조를 발표하여 개각을 선언했지만 눈치 빠른 명성왕후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차리고 신정왕후께서 넓은 곳으로 옮기길 원한다고 말하자 다케조에 신이치로 공사가 얼마든지 방어할 수 있다고 자신하여 넓어 방어하기 어려운 창덕궁으로 옮겨가는데 이것이 패착이 되어 원세개가 지휘하는 1500명의 청군과 이에 합세한 조선군이 몰려들면서 급진 개화파는 완전히 궁지에 몰린다. 급진 개화파는 고종을 데리고 인천으로 달아나 후일을 도모하려 했지만 고종이 죽어도 대비가 계신 창덕궁에서 죽을 것을 고집하여 결국 고종을 놔두고 자기들만 양복으로 갈아입고 상투를 자른 후 일본으로 도주하는 처지가 된다. 이중에 박영효의 형인 박영교, 홍영식은 남아 전영과 후영의 병사들에게 합세하려는 고종을 칼로 막아서려다가 흥분한 병사들에게 도륙당해 죽는다. 결국 이들의 반정으로 인해 개화 이야기는 쑥 들어가고 말았고 급진 개화파의 친족들은 무참한 죽임을 당한다. 그리고 청의 조선에 대한 종주권은 오히려 공고해지고 말았다. 한편 일본은 적반하장으로 조선에 한성 조약을 강요하며 배상을 받아냈고 청에겐 무력시위를 하여 1885년에 톈진 조약을 체결하는데 성공했다.
3.6. 동학농민운동, 청일전쟁, 갑오개혁 ¶
갑신정변 이후 10년간 조선은 청이 주도권을 잡고 유럽, 미국, 일본의 세력이 기웃거리는 묘한 공백 상태에 빠진다. 원세개가 총독에 준하는 권력자가 되어 조선에 군림하긴 했지만 그의 행보는 다른 열강을 의식했는지 의외로 소극적이었고 별 의미없는 10년이 훌떡 지나간다. 그 10년간 고종은 5영을 3영으로 개편했다가 다시 4영으로 개편하는 군제 개혁에 착수했는데 기존 정변에서 거의 쓸모가 없었던 군에 대한 불신 때문에 급히 행한 것이었고 별다른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그리고 개혁을 위해 내무부를 설치하여 궁내사무와 군국사무를 겸하게 했고 이 과정에서 친위세력인 여흥 민씨들을 기용했다. 육영공원을 비롯한 학교, 제중원 등의 근대식 병원, 전신, 전기 등이 이 시기에 들어왔다. 하지만 고종의 개혁들은 어디까지나 임오군란, 갑신정변 등의 대혼란 이후에 극도로 불안해진 나머지 자신의 왕권 유지를 기본 전제로 하고 있었고 서양 문물에 대한 몰이해 때문에 매우 소극적이었고 두루뭉술했다. 정권 유지에 대한 집착은 정권 유지 기반인 재정 확보에 매달리게 했고 내무부는 개혁 조치가 아니라 고종의 비자금 확보에 더 주력했다. 서양 문물에 대한 몰이해 때문에 들여온 일부 무기와 군함도 거의 쓸모가 없었다.
한편 계속된 교세 확장에 고무되고 기존에 금지된 천주교, 개신교의 합법화에 자극받은 동학이 대대적으로 합법화를 요구하게 된다. 1892년 교주 최시형의 허락 아래에 공주에서 동학교도들의 집회가 열려 충청 감사 조병식을 통해 동학 합법화의 뜻을 전달했다. 조병식은 "나라에서 하는 일을 감영에서 와서 따지면 뭘 어쩌라는 거냐?"라는 반응을 보이면서도 동학 단속을 완화했다. 이후 삼례에서 더 큰 집회가 열렸지만 충청도에서 거둔 것 이상의 성과는 없었다. 1893년 동학대표들은 서울로 상경하여 최제우를 신원하고 동학을 합법화해달라는 상소를 올렸다. 이에 고종 이하 조정은 매우 긴장했고 고종은 이단을 탄압하는 것이 열성조의 법이란 입장을 분명히 했고 유림들도 앞을 다투어 동학을 탄압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결국 조정은 동학을 대대적으로 탄압하기에 이른다. 그러자 동학 지도부는 보은에 전국의 모든 교인들을 집합시켰고 보국안민, 척왜양창의의 깃발을 휘두르는 수만명의 교인이 보은에 집결했다. 경악한 조정은 어윤중을 내려보내 동학교도들을 달래려고 시도한다. 한편 조정은 동학교도들이 서울로 진공할 것을 크게 우려하고 있었는데 강화도와 평양의 병력을 수원과 용인에 급파하고 서울의 군사들을 대기시키자는 논의에 고종은 외국 군대를 동원하자는 의견을 내놓는다. 조정은 고종의 주장에 크게 반대했지만 고종은 청나라 군사를 쓰는 것이 가능하지 않겠냐는 입장을 고수했다. 어차피 원세개가 지휘하는 청군이 조선에 주둔하고 있었으니 청군의 힘을 빌리자는 것이었다. 한편 어윤중은 동학교인들을 타일러서 해산시키는데 성공했다. 사실 해산이 신속했던 것은 동학 지도부가 전봉준을 비롯한 과격파에 스스로가 놀랐기 때문이었다. 전봉준 등은 전라도 금구로 이동하여 또 집회를 가졌고 고부 군수 조병갑의 학정에 분노하여 마침내 봉기하게 된다. 자세한 것은 동학농민운동 항목 참조.
조정은 황토재에서 관군이 패퇴했다는 소식을 듣자 홍계훈과 장위영 병력을 급파하지만 장성 전투에서 또 패전보를 듣고 전라 감영까지 함락당하자 마침내 민영준을 보내 원세개와 접촉하여 청군의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원세개는 이에 간단한 일이라고 호언장담했고 이에 이홍장도 파병을 결정하여 아산만에 청군이 도착한다. 그런데 농민군은 홍계훈의 독일제 쿠르프 야포 포격에 잇달아 패해 더 이상 북상하지 못하고 있었고 청군의 등장에 일본군이 톈진 조약을 빌미로 덩달아 인천에 나타나면서 조선도 청도 농민군도 당황한다. 농민군은 이러다가 나라가 외세의 전쟁터가 되겠다고 전주 화약을 맺고 물러났고 조선 정부는 청과 일본에 모두 철수를 요구한다. 청나라는 이에 곧바로 응했지만 일본은 "우리가 알기론 동비들이 소탕되지 않았다."란 억지를 부리며 철수를 거부한다. 그러자 청나라는 일본군이 혹시 뒤통수 맞을 것을 두려워하여 저러는가 싶어서 동시에 철수하잔 제안을 했으나 일본은 이도 거부한다. 이에 조선의 요청을 받은 러시아, 미국, 영국이 중재에 나섰으나 일본은 거부했고 역으로 청나라에게 같이 동학운동을 진압하고 조선의 내정 개혁에 착수하잔 제안을 한다. 청나라는 "동학란은 이미 다 끝났고 조선의 개혁은 조선 사람들의 일인데 왜 니들이 더 난리냐?"라고 거부했고 일본은 기다렸다는 듯이 선전포고도 없이 공격을 퍼부어 청나라 군함들을 침몰시키니 이것이 바로 청일전쟁의 시작이다. 일본은 경복궁을 점령하고 조선의 독립선언을 강요한 다음에 고종을 위협하여 청나라의 모든 조약을 파기하고 모든 청군은 조선을 떠나라는 명령서를 받아낸다. 일본은 대원군을 포섭하여 고종에게서 앗은 전권을 위임한다. 대원군은 민씨들을 숙청면서 내정 개혁에 착수하려 했지만 문제는 대원군 역시 고종과 마찬가지로 별 힘이 없었다. 실세는 김홍집, 어윤중, 김윤식, 박정양을 비롯하여 일본의 후원을 받는 개화파들이었다. 군국기무처가 설치되고 갑오개혁이 실시된다. 이 시기에 드디어 노비제, 신분제가 폐지되었고 도량형의 통일, 화폐개혁, 조세의 금납화, 재정 일원화가 실시되었다. 재가 허용, 조혼 금지, 과거제 폐지, 연좌제 폐지도 실시되었으며 지방관의 사법권도 박탈했다.
한편 자신이 일본에게 이용만 당했다는 것을 깨달은 대원군은 전봉준, 이홍장 등과 접촉하면서 힘을 합해 일본군을 몰아내고 자신에게 권력을 쥐어달란 로비를 하고 있었는데 청군이 평양 전투를 비롯해서 일본군에게 개발살나고 동학농민군도 우금치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자세한 것은 청일전쟁과 동학농민운동 항목 참조. 어쨌거나 조선의 주도권을 장악한 일본이 삼국간섭으로 요동을 토해내는 것을 본 고종과 명성왕후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할 생각을 가지고 인아거일,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몰아내는 외교정책을 수립하기 시작한다.
3.7. 을미사변 ¶
청일전쟁 와중에 일본은 김홍직 내각을 통해 조선과 동맹을 체결했고 20개조 개혁안을 통해 고종의 실권을 상당수 뺏고 명성왕후의 정사 개입도 금지했다. 이 와중에 청군, 동학군과 내통한 것이 걸린 대원군은 완전히 실각한다. 일본은 갑신정변의 주역인 박영효를 내무대신으로 서광범을 법무대신으로 내세웠고 고종으로 하여금 홍범 14조를 고묘하게 했다. 이 시기 고종의 호칭은 대군주로 왕비가 왕후로 세자가 태자로 바뀐다. 한편 고종과 명성왕후는 러시아 대사 베베르와 접촉하면서 "우리가 믿을 것은 러시아 황제 폐하 뿐이다."라고 노골적으로 니콜라이 2세와 러시아 제국에게 러브콜을 보낸다. 이에 베베르도 고종 부부의 주장에 부응하면서 본국에 조선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주장했지만 러시아 정부는 소극적이었다.
이 와중에 이준용 역모 사건이 터진다. 대원군의 장손 이준용이 박준양, 이태용 등과 합세하여 김홍집 내각을 없애고 고종과 순종, 명성왕후를 죽이고 스스로 왕좌에 앉으려 한 것이다. 이를 박영효와 서광범이 밝혀내어 자신들의 권위를 공고히 한다. 궁궐 수비대를 훈련대로 바꾸자는 자신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19] 역모를 꾀했다고 하는데 체포령이 떨어지자 박영효는 허겁지겁 일본 공사관을 통해 일본으로 망명했다. 그는 명성왕후, 유길준, 이노우에의 모함으로 자신이 실각했다고 주장한다. 박영효에 의해 실각한 김홍집이 복귀했고 박정양, 이완용, 이운용, 이범진, 민영환 등의 정동구락부 출신의 친미파, 친러파들이 득세한다. 박영효 중심의 친일 내각이 완전히 실각한 것이다. 고종은 일본군에 의해 훈련받던 훈련대도 해산해버린다. 이에 분노한 일본은 군인 출신의 미우라 고로 공사를 부임시켰는데 이노우에 가오루는 바로 귀국하지 않고 보름이나 그와 같이 지내며 모종의 계획을 꾸몄다. 그리고 그 결과가 을미사변이다. 을미사변엔 대원군도 동석하여 대충 명분 비슷한 것을 갖추었고 홍계훈과 이경직을 죽이고 명성왕후를 시해한다. 이 와중에 낭인들은 고종 앞에서 칼을 겨누고 순종의 머리채를 끌어잡는 등 행패를 부렸다. 미우라는 고종의 부름에 입궐하는 척하며 입궐하여 친미파, 친러파를 내쫓고 친일파 이재면, 조희연, 유길준으로 새로운 내각을 구성한다. 그리고 각국 공사들의 추궁에 훈련대의 짓이라고 거짓말을 한다. 하지만 워낙 증인이 많아서 곧 거짓말인게 드러난다.
새로운 내각의 핵심은 유길준이었다. 그의 주도 하에 을미개혁이 실시되고 유명한 단발령이 실시되어 고종과 순종이 같이 머리카락을 자른다. 연금상태의 고종은 러시아와 미국의 외교관들과 접촉하며 일본의 독살을 우려하여 아예 그들이 만들어온 음식을 먹으며 연명했다. 그 와중에 명성왕후가 단순히 어디 피한 것이 아니라 살해되었단 정황이 포착되면서 근왕파와 민심이 매우 요동치기 시작한다. 이재순, 이도철 등의 근왕파들은 이완용, 이범진 등의 친미, 친러파, 그리고 미국과 러시아의 외교관들과 합세하여 고종을 미국 공사관으로 탈출시키려는 춘생문 사건을 일으키지만 일부 대대장의 밀고로 군부대신 어윤중에 의해 진압당한다. 정동구락부 인물들은 각국 공관에 대피한다.[20] 한편 고종은 유림들에게 밀사를 보내 대대적으로 의병 궐기를 촉구했고 고종 33년,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궐기하여 수령들을 참수하고 여러 고을을 점거했다.
3.8. 아관파천 ¶
을미의병으로 인해서 한양에 주둔한 군세 대부분이 각 지방으로 내려가 감시가 소홀해지자 고종은 궁녀가 타는 가마를 타고 순종과 함께 러시아 대사관으로 피신한다. 베베르는 인천항에 정박시켜놓은 러시아 수병 117명을 동원해 즉각 공사관에 배치함으로 공사관을 지켰는데 단순히 117명이 문제가 아니라 러시아 제국이 고종을 보호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한 제스처였다. 고종은 즉각 친일 대신들을 죽이라는 교지를 내렸고 왜놈 세상이 끝났다고 흥분한 군중이 김홍집, 정병하, 어윤중 등을 노상에서 참혹하게 살해했고 유길준 등은 황급히 일본으로 망명한다. 일본 세력은 이렇게 조선에서 완전히 일소되고 만다.
3.9. 독립협회 ¶
아관파천 이후에도 고종은 한동안 러시아 공사관과 기존의 궁을 오가면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부각된 단체가 독립협회이다. 원래는 독립문을 건립하기 위해서 발족했던 단체였으나, 이후 독립신문 발간 등의 독자적인 활동을 하면서 조직이 그대로 생명력을 이어가면서 별도의 단체가 되었다. 초기 독립협회는 친정부적인 형태로 출범하였으나, 개창자중 대표적인 인물인 필립 제이슨, 그리고 이후에 활동하는 박영효 계열 등의 영향으로 친미친일적 급진개화 단체의 성격이 강해졌다. 고종의 환궁 이후에는 이후 개혁방안을 두고 황국협회와 대립하는 와중에도 나름의 역할을 하였으나, 중추원 설립 과정에서 보인 과욕으로 인하여 이후 정세에서 배제당한다.
이와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독립협회, 독립문, 독립신문, 중추원, 광무개혁 항목 참고.[21]
이와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독립협회, 독립문, 독립신문, 중추원, 광무개혁 항목 참고.[21]
3.10. 광무개혁, 대한제국 선포 ¶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르는 동안 조선 내외부에서는 외세의 간섭을 막고 자주적으로 근대국가를 세우자는 주장이 자주 벌어졌고, 외부에서는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러시아의 견제를 위해 고종의 환궁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에 아관파천이 시작된지 1년뒤인 1897년 2월에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환궁하였다. 또한 고종은 환궁직후 국호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光武)로 고치며 원구단을 축조하여 그곳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여 조선이 자주국가임을 선포하였다.
조선을 대한제국으로 고친 직후 고종은 광무개혁을 추진하였다. 광무개혁의 추친방향은 구본신참(舊本新參)으로,
옛 조선의 제도를 근본으로 하며 새로운 제도를 그것에 맞춘다는 뜻이다. 우선 대한제국의 통수권, 입법권, 행정권, 인사권, 외교권 모두를 황제의 대권으로 규정하여 전제 군주 체제를 강화하고자 하였고[22] 황제의 재정을 마련하기 위해 내장원을 설치하여 황실의 재정을 담당케 하였다.
옛 조선의 제도를 근본으로 하며 새로운 제도를 그것에 맞춘다는 뜻이다. 우선 대한제국의 통수권, 입법권, 행정권, 인사권, 외교권 모두를 황제의 대권으로 규정하여 전제 군주 체제를 강화하고자 하였고[22] 황제의 재정을 마련하기 위해 내장원을 설치하여 황실의 재정을 담당케 하였다.
또한 지방행정의 경비를 줄이고자 갑오개혁때 설치하였던 지방의 23부를 13도로 개편하였다. 군사적인 면에서도 황제의 복장을 프러시아의 군복을 착용케하였고, 황제 직속의 최고 군통수기관인 원수부를 설치하여 황제가 직접 군권을 장악하고 서울 및 지방에 군사수를 대폭 증강시키며 무관 학교를 설립하여 제국의 군사력을 증강시키고자 하였다. 또한 외교면에서도 자주적인 외교를 추진하였다. 청나라와의 불평등한 조약들을 수정하였고 간도에 간도관리사를 파견하고, 연해주에도 '해삼위 통상사무'(해삼위는 블라디보스토크를 명한다)를 설치하였다. 경제, 사회면에서도 정부의 조세 수입을 늘리고자 양전사업을 실시하여 토지 소유 문서인 지계를 발급하였으며 화폐를 은본위에서 금본위로 바꾸려 시도 하였지만 제정 부족으로 실패하였다.
고종은 이 개혁을 통하여 조선을 근대적인 국가로 전환하려 시도하였지만 결국 일제의 러일전쟁의 승리와 한일 의정서체결의 따라 일본의 내정 간섭이 심화되면서 광무개혁은 사실상 중단되고 말았다. 게다가 근대화에 대한 이해 부족과 고종이 지나치게 정권 유지에만 집착을 한 통에 그나마의 어설픈 개혁조차도 그다지 효율적으로 이루어지진 못했다. 게다가 일본이 명치유신 이후로 조선과 거의 넘사벽의 경제력을 구축하면서 수십만의 정예군을 거느린 반면에 조선은 재정 부족으로 전성기에도 3만명 이상의 근대식 군대를 보유하지 못했으며 그나마도 숙련도가 어느 정도인지는 미지수다. 무기부터가 마구잡이로 사들인 거라서...
3.11. 러일전쟁 ¶
당시 조선은 삼국간섭 이후로 꾸준히 신경쓰던 인아거일 정책을 통해 러시아의 힘으로 일본을 막으려 했고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화하기 위해서 당연히 러시아와 일전을 벌여야 했다. 러시아-일본간의 갈등은 첨예해졌고 결국 1904년에 러일전쟁이 터진다. 일본은 또다시 선전포고도 없는 기습으로 만주의 러시아 군대를 공격했고 조선을 강제로 동맹국이라 쓰고 빵셔틀이라 읽는다으로 끌어들였다. 일본군은 십수년치의 국가예산를 소모했으며 러시아 군대를 상대로 러시아 군대보다도 많은 희생자를 내며 신승한다. 사실상 일본의 가용병력 대부분이 죽거나 다친 상황에서 러시아는 100만명 이상의 병력을 더 동원하여 한판 벌일 수 있었는데 피의 일요일 사건이 터져 러시아 내부가 뒤숭숭해지고 러시아의 경제 사정도 좋지 않은 편이라 러일전쟁은 미국의 시어도어 루즈베르 대통령의 중재 아래에 포츠머스 조약을 맺고 일본의 전략적인 승리로 끝을 맺는다. 단 러시아는 일본에게 한푼의 배상금도 주지 않았다. 어쨌거나 최후의 대일 견제세력인 러시아가 물러나면서 조선은 그야말로 일본 앞에 차려진 한끼의 밥상이 되고 만다.
3.15. 사망 ¶
평소 야참으로 마시던 식혜를 마시고 잠에 들었다가 다시 깨어나 목이 마르다며 차를 마시곤 사망하였다.
이로인해 독살설이 제기 되기도 하였지만, 명확하게 결론 나진 않았다.
1월 21일 고종이 승하하여 그의 인산일로 하여금 3.1운동이 전개되게한, 3.1운동의 배경이 되었다.
여러 노력끝에 마지막에 죽음으로써 민족이 뭉치게 된격.
이로인해 독살설이 제기 되기도 하였지만, 명확하게 결론 나진 않았다.
1월 21일 고종이 승하하여 그의 인산일로 하여금 3.1운동이 전개되게한, 3.1운동의 배경이 되었다.
여러 노력끝에 마지막에 죽음으로써 민족이 뭉치게 된격.
4. 평가 - 마지막 안간힘? ¶
과거에는 근대화에 힘을 썼다거나[23], 일제에 맞서 대한제국을 선포하는 등의 행위로 좋은 평가를 받았으나, 사실은 그저 카이저나 짜르 같은 전제군주를 꿈꾸는 인물에 불과했다. 까놓고 말해서 500년 내내 전제군주국이었던 나라의 국왕으로 즉위한 사람에게 그 이상을 요구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일 것이다[24] 물론 나름대로 적극적으로 근대화에 신경을 썼긴 했지만 결과를 본다면 딱히 큰 성과를 내지못했다. 커피나 자동차로 대변되는 자기 취미를 가졌다는 것도 훌륭한건 아니다. 게다가 고종은 명성황후처럼 직접 매관매직을 주도했는데 대한제국 선포이후 그 정도는 심해진다.[25]아 장사하자 먹고살자 오늘도 방실방실 막장 대한제국의 하늘 그런데 대한제국군 항목의 해군 파트에서 볼수 있듯이 돈을 모으는데는 나쁜 의미로 능숙했지만 돈을 제대로 쓸줄은 몰랐다. 게다가 왕실 유지를 위해 걷는 내탕금도 과다해서 여러 개혁 이후에도 국가 세수는 여전히 부족했다.
다만 고종의 비자금이 당시 독립운동 및 반외세운동을 하던 이들에게 흘러들어가서 상당한 자금지원을 했다는 것도 밝혀지고 있다. 을미의병과 을사의병에서 활약한 최익현, 이인영, 민종식, 정환직, 허위, 신돌석 등은 모조리 고종의 밀지나 자금지원 중 하나, 혹은 둘다를 받고 활동했다. 이는 고종의 사망전후까지 이어져서 을미의병부터 1920년대까지의 국내외 대일본투쟁에는 직간접적으로 고종과 연결되지 않은 인물을 오히려 찾아보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이는 전근대적일지언정 '국왕'이라는 매력적인 명분이 주어지고, 무엇보다 실제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고종의 비자금만한 자금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따지고 보면 바로 그 무렵은 아직 전근대라면 전근대인 시기였다.
또한 조약으로 광산 개발권 등 각종 이권을 외국에 힘없이 내준 점도 비난받는 부분이긴 하나 당시 조선은 근대화 개혁이 표류하면서 스스로는 개발할 기술도 능력도 부족했던 점(...)과 대신 이권을 한 나라에게 몰아 주는 게 아니라 여러 나라에게 흩뿌려서 줘서 최대한 많은 열강들이 조선에 발을 걸치게 하려는 의도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애당초 러시아, 청, 일본을 제외한 열강들에게 있어 조선에서 얻는 이득은 있으면 좋고 없으면 말고 수준이라 청나라, 러시아가 조선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되자 열강들은 조선을 일본에게 넘기는 걸 쉽게 인정한다. 게다가 이권을 내주면서 얻은 자금이라도 제대로 쓴 거냐면 위에서 말했듯 그것도 아니였다.
사후에 조선에 미친 제일 확실한 영향으론 왕비인 중전 민씨와 마찬가지로 그의 사망시 국상일에 맞춰서 3.1 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것 정도. 실제로 33인이라는 인물중에는 고종의 밀사 역할을 하거나 고종을 지지하였던 오세창, 이상설, 한용운과 같은 부류 외에도, 독립협회 문제나 동학관련으로 고종에 불만이 많았던 손병희, 윤치호, 안창호와 같은 부류가 존재했다. 이들이 고종을 지지하건 반대하건 고종의 영향력 자체는 엄청났기 때문에 3월 1일이 된 것이다[26].
그 외 업적으로 백범 김구 선생을 살려준 것 정도가 꼽히기도 하지만, 김구 선생의 명성황후 시해관련 일본인 살해건은 백범일지의 기록과 달리 실제 불투명한 점이 많아 고종이 그를 살려줬는지 아닌지 알 수 없다. 백범일지에 따르면 고종이 궁전내에 최초로 설치된 전화기로 전화를 걸어서 살려줬다는데, 그 당시 고종은 아관파천으로 러시아 영사관에서 살고 있었다.(…)[27]
그외에 중국으로 망명해서 망명정부를 수립하려고 했다는 학설도 존재[28]하는데, 만일 실제로 임시정부에 고종이라는 구심점(+자금줄)이 존재하였다면 임시정부의 활동은 그 수준을 달리하였을 것은 분명하다.
사실 많은 이들이 간과하는 고종의 진정한 공로는 일본에게 끝까지 저항했다는 사실 그 자체이다. 당시 고종을 비판했던 수많은 국내의 지식인들(특히 친일자손 지식인들 이유는 지도자가 무능하지만 않았어도 자신들도 잘살수 있었을테니까...... 자신들의 선조들 잘못도 있지만)과 명사들은 결국 일제에 굴복해서 변절의 길을 걸었다.[29] 고종 역시 일제에 타협하거나 적어도 용인하는 형태로 움직일 수도 있었다[30]. 제국주의 시기 식민지의 이전 군주들은 이런 형태로 다루어진 사례가 상당히 많다. 실제로 고종이 이런 길을 걸었다면 일제의 조선병합은 한결 수월하였을 것이다.[31] 고종의 막장 행보가 아니었다면 이들이 친일로 넘어가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당시 상황을 보면 그렇지도 않다.[32] 사실상 고종이 마지막까지 일제에 저항했기 때문에 3.1 운동이 생겨날 수 있었던 것이고 이는 독립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5. 수난과 시련의 왕 ¶
역대 조선의 27명의 임금들 중 가장 수난과 시련을 많이 겪게 된 임금으로 평가를 받아왔다. 더군더나 서구열강의 동양 정복이 진행되어가고 있고 일본이 서구의 문호개방을 통해서 무장화와 침략화로 진행되는 시기에 왕이 되었던만큼 급변하는 세계사의 소용돌이가 진행되던 시기에 왕좌에 올랐고 이미 그가 왕이 된 후의 세계는 점차 문호개방과 열강들의 침략화가 진행되어가고 있던 때였다.
이러한 영향 때문에 1866년에 일어났던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 1876년 일본의 운요호 사건과 강화도 습격사건을 거쳐서 1882년 임오군란, 1884년 갑신정변, 1894년 동학농민운동, 청일전쟁과 일본군의 경복궁 난입사건,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 1896년 아관파천을 거치게 되었고 1897년 대한제국을 개국하여 황제로서 체면을 세우는 듯하였으나 1904년 러일전쟁, 1905년 을사조약, 1907년 헤이그 사건까지 겪게 되더니 결국에는 친일매국노들에 의해서 자신도 왕좌에서 억지로 물러나야만 했었다.
이미 물러난 후에는 1910년 경술국치라는 치욕과 굴욕을 맛보면서 살아있는동안 태자였던 순종과 함께 망국을 지켜보게 되었던 태황제가 되었다. 그리고 1919년에 파란만장한 수난과 시련을 안으며 그렇게 서거하였다.
6. 개인사 ¶
머리는 명석했던지, 당시 선교사나 외교 사절들은 그의 교양이나 지식에 감탄했다는 기록이 있다.(키는 작지만 너그러운 얼굴에 상냥하고 이야기가 잘 통했다 한다. 반면에 뒤에 자주 서있던 순종은 키는 크지만 어리버리하게 생겼다고 좀 까고 있다.) 직접 상대국인 일본의 평에서는 면전에서는 유약한 것처럼 보이지만 뒤로는 반항을 계속한 인물이라는 식의 이야기가 많다. 이토 히로부미는 헤이그 밀사 사건 이후 고종을 찾아가 "한건 하셨더군요, 폐하. 그런데 앞으로 대일본 제국에게 맞서려면 좀더 공공연하게 하시는 게 어떨까요?"라고 조롱하기도 했다.[35] 실제로 고종의 대일본 전략이기도 했다. 그러나 단지 그것은 개인적일 뿐, 이미 망해가는 나라를 붙잡기에는 그의 역량도, 뒤를 받쳐줄 만한 힘도 너무 부족했다.[36] 그리고 그 결과는 조선의 멸망이었다.
오른쪽 여자가 고종이 총애한 귀비 엄씨.
동갑의[38] 일본의 메이지 덴노는 1867년에 즉위한것보다 4년 빠른 1863년에 즉위했다. 물론 각국의 상황이 달랐지만, 비슷한 시기에 즉위한 두 왕이 통치한 두 나라의 모습이 극명하게 달라진 사실만으로도 고종의 평가는 하향되는 감이 있다. 1904 대한민국에서는 그걸로 역능욕을 먹였지만
그러나, 이 시기 양국의 차이는 국력과 시대적 상황의 차이이지 당시 국왕의 역량 차이 정도로 해결될 문제도 아니었고, 개인적 역량과 환경 대처 능력만 따지면 오히려 메이지 덴노 쪽에 문제가 더 있었다.
메이지 덴노는 처음에는 허수아비로 활동한 인물[39]로 황태자 시절에 워낙 방탕했기 때문에 오죽하면 강성이었던 코메이 덴노를 독살 시키고 메이지 덴노를 올렸다는 이야기[40]까지 돌 정도였다. 더구나 메이지는 일본식 유교에 심취한 골수 봉건주의자였으며,이건 고종도 그랬지만 고종은 그래도 외국인이라도 좋아했지 부친 코메이 덴노와 함께 대표적인 쇄국파였고 사진 찍기를 싫어해서 어진 역시 그림으로 그린 것만 남아있을 정도로 현대 문물에 대한 거부감이 강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1880년대 중반에 이르러 메이지 헌법 제정및 황실전범의 제정에서 모르는 것은 이토 히로부미에게 질문해서 이해하면서 군주기관설에 충실하게 헌법을 운용하는 능숙한 군주로 성장해나갔다.
하지만 이런 인물이 조선 고종으로 등장했다면 정치체제가 전혀 다른 조선에서는 별로 다를게 없거나 더 처참했을지도 모른다. 여하간 고종은 잔머리는 좋았다. 주위 정세가 시궁창이라 그렇지(...).
다른 시각으로 보면 조선의 국왕과 일본의 덴노는 입장의 차이라는 것이 있다. 요컨대 조선의 국왕은 자기 나름대로 생각하며 현실적인 정치를 해나가야하는 것이고 일본의 덴노의 경우에는 현실을 무시하고 전통을 따라도 좋은, 경우에 따라서는 그런 전통을 강조해야할 필요가 있는 상징적인 장식이다. 그건 그 시절에도 그러하여 실제로 이토 히로부미 역시 덴노를 허수아비라고 말한 전력이 있다는 소문이 있다.
하지만 매천야록에서 보이는 것 처럼 을미사변 이후 5일만에 엄귀비를 불러들였다는 것을 보면 글쎄...[41][42][43]딱히 고종이 명성황후 민씨와의 관계에서 후계자가 없었던 것도 아니었고, 명성황후가 보통 상황에서 죽은 것도 아니고 외적에 의해 참살당한 상황에서 일주일도 안되어 애첩을 도로 들인 것을 보면 역량이 좋다고 보기도 힘들 듯 하다. 아무리 엄귀비가 명성황후를 닮았다고 하지만...
그 외에도 명성황후 민씨의 사치가 심한 것을 알았을텐데도 정작 이를 통제하려한다거나 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커피니 양식이니 자동차니 하는 것에 취미를 붙여 돈을 써댄 것을 보면 글쎄...솔직히 백성들의 삶에 관심이나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게다가 선교사들이나 외국인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점이 있으니 죽음을 매우 두려워하는 인상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을사조약을 체결할때라든가 일본군이 경복궁에 난입할때라든가 강하게 나서야 할 시점에 초반부에는 반대의 뜻을 분명히 하면서 저항하다가도 사태가 기울어졌다고 판단하면 두손 두발 다 들어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고종이 유일하게 끝까지 격렬하게 저항한 건 퇴위당할 때 정도다.
자동차에도 취미가 있었는데, 고종은 캐딜락을 타고 다녔다. 이와 관련된 일화로 일제강점기때 손병희가 캐딜락을 구입했는데, 자신의 차가 고종의 캐딜락보다 좋다는 사실을 알고 임금의 자동차보다 좋은 것을 탈수는 없다면서 고종과 캐딜락을 서로 바꾸어 탔다는 이야기가 있다.
어린 시절부터 글씨나 문장에도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14세 때 의정부 청사가 중건되면 편액을 자신이 직접 쓰겠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고 고종 7년에 오례편고가 완성되자 자신이 직접 서문을 쓰겠다고 나서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고종의 어필은 많이 남아 있다. 아버지가 추사 김정희에게 글씨와 그림을 배운 예술가이기도 했었으니 그런 아버지에게 글씨를 배운 자신감도 있었던 모양.
커피와 함께 냉면, 군밤등을 즐겼다고 한다. 특히 군밤은 후술할 떡밥과도 관련 될 정도로 매우 즐겼다고 한다.
6.1. 고종과 군밤떡밥 ¶
- 12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는데, 왕위에 오르자마자 군밤장수를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죄목은 '공짜로 군밤을 주지않은 것' 물론 이 군밤장수는 신하들의 반대로 사형은 면했다. 야담(野談)이므로 승정원일기의 기록과는 많이 다르다. 바로 아래 문단 참조.#[44]
군밤장수 이새끼! 내가 직접 나서겠다! 군밤왕 이명복사실 고종의 서장자인 완친왕(완화군)이 군밤을 좋아했다는 일화가 있기 때문에 아들의 이야기가 잘못 와전되어서 나온 카더라일지도 모른다.아니면 부전자전이든지현재로서는 진실인지 거짓인지도 모호해서 사건의 진실여부를 알 수 없게 되었지만 고종에게 군밤 관련 이미지는 계속 따라다니게 될것으로 보인다.조선의 빵 사건?? - 위에서 나온 군밤이야기에서 일부 진실부분이 있다면 실제로 고종이 즉위 초기부터 최소 즉위 중반기까지는 밤을 좋아했던건 사실로 여겨진다.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다른 왕 시절 기록보다 유독 고종시절의 기록에 밤에 대한 진상기록이 많았기 때문이다.[45]
다만 나중엔 커피로 갈아탔다이 진상기록에서 밤의 진상이 늦는 경우 유독 관찰사[46]들이 대죄를 자주 청했는데 매번 봐준걸 보면 꽤 인자한 성격이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생각해 보면 저런 군밤장수 사형 요구 루머가 공공연히 돌아다닐 정도인데, 고작 밤 따위로 죄를 족족 주었으면 민심이 엄청나게 흉흉해 졌을 것이고 고종도 그것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아들인 완친왕이 군밤을 좋아했다는 일화가 있는걸 보면 완친왕의 이야기가 고종의 이야기로 잘못 알려지고 왜곡된 것일지도. - 경술국치 이후에는 순종이 창덕궁 후원에서 주운 밤[47]을 손수 구워다가 고종에게 자주 바쳤으며, 고종은 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이 순종이 구워 온 밤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다.# 고종이 군밤을 좋아했던건 어느정도 사실인듯 싶다.
레알 군밤왕
7. 최후 ¶
그리고, 유난히 독살설이 많은 조선 임금들[48] 중의 화려한 대미(?)를 장식한다. 항상 야참으로 마시던 식혜[49]를 마신 뒤 잠자리에 들었다가 목이 마르다고 차를 마셨는데, 그 뒤 복통을 호소하다 사망하였기 때문에 식혜에 독이 있었다는 소문이 쫙 퍼져 결국 3.1 운동의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일본 황족인 이방자 여사 역시 회고록을 통해 독살설을 지지했다. 해외에 나가 망명 정부를 차려 독립 운동을 하려했던[50][51] 고종의 뜻을 알아챈 일본에서 직접 누군가에게 지시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애초에 고종은 강제병합 직전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해서 망명정부를 수립하려는 시도를 벌인 기록도 존재한다. 망명정부에 거리낌이 없었다는 증거가 된다.
고종독살설의 증거로 제기되고 있는 것은
- 일제의 발표에 의하면 사인은 지병인 뇌일혈인데, 전조증상이 분명한 뇌일혈에 비해서 고종은 사망 당일까지 건강상태가 상당히 양호하였다. 때문에 독살이 아니라도 적어도 뇌일혈에 의한 사망 가능성은 낮다.
- 고종 사망후 염습한 이들의 증언에 의하면 3일만에 완전히 부패하여 이가 빠지고 살점이 떨어졌는데, 이는 조선시대에 독약으로 자주 사용된 비상의 비소성분으로 사망시 나타나는 전형적인 증상이다[52]. 고종 사망은 1월 21일 한 겨울이기 때문에 정상적인 경우라면 3일만엔 부패하는 경우는 당연히 있을 수 없다.
- 고종에게 최후의 간식을 올린 것으로 보이는 시녀들이 이후 의문사 하였다.
- 이 시기 데라우치 총독을 비롯한 고위층에서 모종의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는 기록도 존재하는데, 이를 고종 암살설과 연계시킬 수도 있다.
그런데 2010년, 일본이 일부러 고종을 독살할 뚜렷한 이유가 없었다는 주장이 국내 연구자에 의해 제기되기도 했다. 같은 시기 일본에 머물고 있던 영친왕과 이방자의 결혼이 본래 1919년 1월25일에 예정된 상태므로,불과 4일 후에 결혼식이 예정된 상황에서, '내선일체'의 이데올로기를 홍보할 좋은 기회였던 일본이 일부러 신랑의 아버지인 고종을 제거해 물의를 일으킬 근거가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고종 망명설을 부정하거나 사전에 막아 버리는 것이 더 낫다는 입장에서 그렇다는 이야기다.
더욱이 고종의 사망 때문에 실제로 영친왕과 이방자의 결혼은 1년 뒤로 미루어졌으며, 그 사이에 3.1운동이 발생하여 반일정서가 고조됨과 동시에 공화정 수립으로 민심이 이동했으므로, 일본은 큰 호기를 놓친 셈이다.
그러다 최근에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의 지시로 친일파 대신들이 약을 탔다는 증거가 처음으로 발굴되었다는 기사가 나왔는데, 기자의 설레발 혹은 제목 낚시. 기사를 잘 읽어보면 "데라우치가 고종을 독살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음요. 님 혹시 들은 내용없음?" 라고 구라토미가 질문한 것 뿐인데, 이를 독살의 증거라고 확대 해석한 것. 이 질문은 당시에도 독살설이 있었다는 증거이지 독살 자체의 증거는 아니다. 어쨌든 고종의 유해가 남아있으므로 나폴레옹 처럼 현대 과학 기술로 검사해보면 독살당한 것이 사실인지 규명해 볼 수 있겠으나 황제의 능을 발굴해야 한다는 문제가 있으므로 실현될지는 미지수다.
능은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의 홍릉(洪陵)[54]. 명성황후와 합장되어 있다. 고종의 능은 전통적인 조선식 왕릉과는 다른 양식으로 꾸며져 있다. '황제릉'의 형식으로 꾸민 것이라고. 본래 홍릉은 명성황후가 을미사변으로 시해되고 처음에는 오늘날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에 묻혔었는데 1919년에 고종이 승하하고 당시 경기도 양주군 미금면 금곡(오늘날의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으로 이장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원래 홍릉이 있던 자리에 들어선 것이 고종의 후궁 귀비 엄씨의 묘소인 '영휘원'인데 오늘날에도 '구홍릉'이라는 이름이 남아 있으며 이 근처에는 수목원이 있다.
뒷날 아들 순종이 죽은 후에도 홍릉 근처에 능을 써서 이 능역을 합쳐 '홍유릉'이라고 부르며 홍유릉 뒤편에는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나 의친왕, 덕혜옹주 등 조선 마지막 왕실 일원들의 묘소도 함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홍유릉 일대는 대한제국 황족들의 가족묘인 셈.
8. 현대 매체에서의 고종 ¶
조선이 근대화되는 시점의 군주였고 재위기간도 길었기 때문에 사극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왕 중 한 명. 그런데 정작 고종 시대를 다룬 사극은 아버지 흥선대원군이나 부인 명성황후를 중심으로 한 사극들이 많아서 고종 본인은 주역에서 한발짝 벗어난 모습으로 등장하곤 한다. 자신의 치세가 사극에서 자주 다뤄지나 정작 본인이 사극의 주역이 된 적은 없다는 점에서는 사극 속 취급은 어쩐지 중종과 비슷하다.
고종은 즉위 전에 익성군(翼成君)에 봉해지긴 했으나 아주 잠깐동안 봉해졌다가 바로 즉위하였고, 따라서 특별한 벼슬이나 군호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즉위 전 어린시절의 고종이 등장하는 매체에서는 대부분 아명인 이름이 코렁스러운 이명복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사극에서는 주로 아버지와 부인 등쌀에 기를 못 펴는 우유부단한 군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래도 마냥 무능하다기보다는 동정적인 시선으로 묘사되곤 한다. 실제 고종에 대한 평가는 많은 논란이 있지만 사극 속에서는 '나름대로 열심히 하려 했는데 시대가 따라주지 않았다(운이 없었다)'는 식의 평가에 맞춰 그려지는 경우가 대부분. 명성황후가 대표적인 예.
대체역사소설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왕인데 이런 소설들에서도 아들 순종처럼 30%는 훌륭한 군주로 나머지 70%는 개찌질이 왕고집 무능한 군주로 묘사되고 있다.
드라마 닥터 진에서는 아버지인 이하응과 함께 아명인 이명복으로 등장한다. 물론 본격적인 군왕의 모습은 아니고, 어린 시절의 모습만이 그려진다. 어린시절 이름이 명복이었으니 나름 이름고증엔 충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나름대로 머리도 좋았고 재위기간이 길어지면서 노회한 면모도 보였으며, 개화에 대한 생각은 있었던 인물로 묘사하면서도 깔 부분은 제대로 깐다. 가령 전제적인 황제권 강화에만 집착하는 면모도 묘사하고 있고 민씨 일족의 전횡에 전혀 손을 대지 않았던 것을 비판했으며, 무엇보다 우유부단하고 황제에서 퇴위되기 직전 말고는 전혀 강단 있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던 군주로 묘사하고 있다. 마지막권 말미에는 망국 이후의 고종의 후일담을 짤막하게 다루고 있는데 여기서 고종에 대한 총평을 볼 수 있다.
9. 고종이 등장한 대중매체 ¶
영화
드라마
기타
드라마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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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조선 왕조가 성립된 1392년을 원년으로 하고 있지만 실제 사용은 1894년(개국 503년)과 1895년(개국 504년)뿐이었다.
- [2] 1896년(건양 1년) 1월 1일부터 1897년(건양 2년) 8월 16일까지 사용.
- [3] 1897년(광무 1년) 8월 17일부터 1907년(광무 11년) 8월 11일까지 사용.
- [4] 아명. 어릴 때 이름.
- [5] 흔히 희(熙)라고 알지만 다른 글씨다. 자세한 내용은 하단 참조.
- [6] 참고로 엔하위키에서 상당히 오랜 기간 한 글자가 빠져 있었다(...).
- [7] 딱 봐도 의친왕과 영친왕의 모습은 어딘가 모르게 주변과 어우러지지 못한다. 더불어 덕혜옹주의 출생 시기 및 영친왕의 일시 귀국 시점 등 시기적으로도 저 사진의 모습이 나타날 수 없다.
- [8] 이전 왕들의 영정들에 비해 다소 촌스러워 보이는데, 이는 흥선대원군의 복장 간소화 조치로 인해 곤룡포의 문양과 머리에 쓰는 익선관의 크기까지 대폭 축소되었기 때문이다.
- [9] 흔히 명성황후나 그일족과 힘을 함쳤다는, 야사에서 기인한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민씨 세력이 그렇게까지 강하지 못했다. 애초에 외척세력이 미친듯이 득세하던 세도정치를 엎고 등정한 흥선대원군이 과거의 전철을 밟으며 제대로 된 지지기반이 있는 왕비를 뽑았을 리가 없다. 물론, 흥선대원군의 생각과는 달리 명성황후 민씨 본인이 고분고분한 사람이 아니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여기서 한가지 알아두어야 할 게 명성황후는 가까운 가족과 친지가 없던 고아였다. 그런데 어떻게 여흥 민씨가 척족세력으로 고종 때 득세를 했을까? 여흥 민씨는 고종 뿐 아니라 흥선대원군, 그 아버지 남연군에게 처가이면서 외가이자 사돈이었다. 심지어 고종 뒤의 순종까지도 부인이 여흥 민씨였다. 단순히 명성황후 때문에 민씨 세력이 득세했다고 해석할 수 없는 부분이다.
- [10] 그런데 미군이 이토록 포격을 오래 한 것은 제네럴 셔먼호 사건의 영향이 좀 있었다. 제네럴 셔먼호는 무장 상선이었기 때문에 미국측에서 제너럴 셔먼호를 격침시킨 조선군의 군사력을 과대 평가하여 일단 화력 제압을 시도해서 오래 포격한 것이다. 게다가 조선의 화망도 매우 정교하고 밀집되어 있어서 남북전쟁에 참여했던 미군 베테랑들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였고 워낙 잘 은폐된 포대의 위치 때문에 미군은 조선군 대포의 위치를 처음에는 가늠도 못했다. 결국 초지진 포격전은 미군도 조선군 합쳐 2명의 사상자가 전부였고 본격전 전투는 어재연이 지키던 광성보에서 터진다. 자세한 것은 신미양요 항목 참조.
- [11] 명목가치는 이름 그대로 상평통보의 100배. 실질가치는 6배 정도.
- [12] 당백전이 발행되고 조선의 물가는 엄청나게 폭등했다. 단적으로 쌀값은 당백전 유통 6개월만에 6배로 폭동한다.
- [13] 애초에 청전 유통이 합법화 된 것도 1867년의 일로 이것도 대원군의 작품이다. 그리고 유통되던 당백전을 회수하는 과정도 당백전을 청전으로 바꿔준 다음에, 당백전을 다시 녹여버리는 것이었다.
- [14] 청전은 상평통보의 1/3의 가치밖에 없는 악화였다. 애초에 왜 관리들이 청나라 동전을 밀수 했겠는가.
- [15] 이후 고종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왕실 재정에 집착하고, 모든 국가 재정을 자신이 장악하려고 하였는데 이런 초기의 문제 때문일 수도 있다.
- [16] 어쨌거나 그 뒤로 고종은 새로 화폐 발행하는 데에 상당히 신중을 기하는 모습을 보여주긴 한다. 묄렌도르프가 당오전 주조를 주장하자 김옥균의 차관 도입에도 힘을 실어주기도 했다. 그런데 일본이 뒤통수 치는 바람에 차관 도입은 실패하고 당오전은 당오전대로 막장으로 굴러가서 효과는 못봤다.(...)
- [17] 서양 선교사 겸 외교관, 의사인 호레이스 알렌의 도움으로 죽진 않았다.
- [18] 이 사람들이 죽어나갔기 때문에 고종의 인재풀이 더 줄어들었다. 광무개혁을 보면 고종은 인재난에 시달리는데, 갑신정변 또한 이런 배경중 하나이다.
- [19] 훈련대는 일본군이 훈련하는 부대고 시위대는 미군이 훈련하는 부대다. 일본을 경계하던 고종이 이걸 받아들일리 만무했다.
- [20] 여담으로 일본은 이 사건을 핑계 삼아 미우라 고로를 풀어준다. 왜냐고? 서양이 조선에 간섭하는데 우리가 간섭못할게 어디있냐?란 논리로(...)
- [21] 워낙에 모순적인 부분도 많고 흔히 교과서 등에서는 쉽게 언급할 수 없는 부분도 많아서 일반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단체이다.
- [22] 이미 조선은 전제군주정이었으니 이걸 반동이라 부르기도, 당시에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를 비롯해 전제군주정이 보편적인 세계의 모습이었으니 고종이 크게 뒤떨어졌다고 보기도 뭣하다. 솔직히 이 상황에서 입헌군주정 실시해봐야 딱히 답도 없었고...
- [23] 사실 과거에만 있는 평가는 아니다.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한 반발 심리에서 무리하게 고종의 광무개혁을 추앙하는 분위기도 있다. 이태진 교수라든가.
- [24] 광무개혁 참조.
- [25] 매천야록에 따르면 관찰사의 경우 10만~20만냥, 일등 수령이면 최소 5만냥 선의 벼슬의 구체적인 값까지 제시되어 있다.
- [26] 실제로 고종의 장례는 3월 3일에 예정되어 있었다. 장래를 치루는 당일이 아니었던 이유는 장례를 치르는데 방해가 될 수 있다라는 이유였다. 여담으로 3월 2일이 제외된 것은 일요일이어서. 농담같지만 기독교 인사들의 반대이유였다.
- [27] 앞서도 언급했지만 고종은 러시아 영사관과 궁을 오갔기 때문에 얼마든지 개연성은 존재한다. 오히려 문제는 의외로 많이 문제점이 제기되는 백범일지 자체의 신뢰도 문제이지만.
- [28] 결론은 화려한 독살로 끝나서 실제로 그랬는지 아닌지는 알 길이 없지만
- [29] 고종을 비판했던 사람들은 거의가 개화파를 잇는 인사들이었고, 이들에게 일본이란 물리쳐야 할 대상이면서 근대화의 교사라는 양면성이 존재했기 때문에...
- [30] 이 경우는 물론 말 할 것도 없이 역사적 평가는 최악이 된다. 삼국지의 유선을 생각해보자. 그리고 동시에 반대세력이 과격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단적으로 베트남국이 이런 식이 되었다.
- [31] 순종은 비교적 온순한 식민지 군주였지만, 일제에 의해서 옹립되었다는 근원적 문제에 더해서 독차사건으로 바보가 되었다는 평이 널리 퍼져 있어서 큰 의미 부여는 안되었다. 단적으로 고종이 죽은 이후 대부분의 독립운동 단체들 가운데 군주정(유교적인 전제군주정이든 근대적인 입헌군주정이든)이라는 정치체제를 주장한 단체는 거의 대부분 사라졌다.
- [32] 한일병합 이전 개화파의 주장은 단 한마디로 요약하면 우리에게 전권을 다오로 요약된다. 친청, 친러, 친일, 친미는 정권 획득을 위한 연줄만들기 과정이었고, 자기들끼리 대립했다. 이런 상황에서 신화속 영웅이나 전생체험 먼치킨이라도 나온다면 모를까 이들을 만족시키면서 동시에 관료제를 유지하고 백성들을 이해시킨다는 것은 신화적 업적이다. 당시 중추원설립 과정에서 보여준 과욕이나 광무개혁 항목에서 설명하고 있는 부족한 현실 인식 등을 보면 고종의 레벨을 어디까지 올려야 이들을 재교육시키고 설득시켜서 자신의 뜻을 따르게 할 수 있는지 의문스럽다.
세뇌 내지 최면술이라도 사용해야 되나? - [33] 많은 조선 사람들은 인물사진의 주인공은 1년 내에 죽고 풍경사진의 나무는 얼마 안가 시들고 찍힌 성벽은 얼마 안가 허물어진다는 미신을 믿었기 때문에 사진기만 들이댔다 하면 두려워하며 도망가곤 했다.
- [34] 물론 1800년대 후반 이야기이긴 한데 조선 말고도 당시 대다수 아시아나 아프리카 멀리 중남미, 심지어 유럽 일부에서도 흔했던 일이다. 사진을 찍으면 영혼을 흡수한다는 미신은 워낙에 흔했으며 아시아에서 가장 개방되었다던 일본에서도 사진찍다가 불길하다며 돌팔매질당한 이들의 기록이 20세기 초반까지도 있었다. 그리고 아직도 이런 인식을 가진 이들이 세계 곳곳에 있으니 무턱대고 사진찍지 말라는 여행가들 충고가 많다. 잘못하다간 죽을 수도 있단다….
- [35]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도 이 내용이 나온다.
- [36] 하지만, 그 당시 조선의 상황이라든지, 제국주의 국가들의 역량, 당시 사대부들의 태도 등을 고려해봤을 때 그 어떤 왕일지라도 조선의 쇠락을 막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만약 망하지 않았다 해도 태국처럼 막후에서 지배를 받았을지도 모르는 일.
- [37] 매천야록에는 귀비 엄씨는 명성황후와 용모가 닮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응?
- [38] 1852년으로 고종이 양력 9월 8일(음력 7월 25일), 메이지가 11월 3일로 2개월 빠르다.
- [39] 처음부터 사츠마와 쵸슈 거대 번들에게 휘둘렸다. 당시 유신정부의 주요 인사들은 양대번에서 독점했으니 두 국왕은 결국 이들을 상대한 격이다.
- [40]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할 때 들었던 이유중 하나로까지 등장한다. 일본 내에서는 메이지 덴노 대역설까지 돌고 있다.
- [41] 다만 매천야록이 야사라는 점은 감안하고 보자.
- [42] 그리고 그 당시 왕비와 함께 고위급 상궁들이 죽어 내명부를 조율할 여인이 없었다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세자빈 민씨가 있긴 했으나 을미사변의 충격과 시어머니 민씨의 갈굼으로 인해 세력이 없다시피했고 정신적으로도 문제가 있었다. 게다가 명성황후의 투기로 다른 후궁도 없던 상황이었다.
- [43] 또한 끄때까지만 해도 명성황후의 죽음이 공인되지도 않은 시점인데다가 박시백 화백등은 고종이 임오군란 때처럼 조금만 기다리면 어디서 명성황후가 나 살아있다! 하고 돌아왔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 [44] 맹꽁이 서당에서 나온 고종과 군밤장수 이야기의 출처가 여기다. 고종이 상당히 찌질하게 묘사되어 있다. 다만 당시 고종실록과 승정원일기에서 일부러 기록을 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세도정치기를 지나면서 이쪽도 기록의 왜곡이 어느정도 진행되어가던 시기였다. 게다가 애시당초 승정원일기는 시행된 왕명을 기록한 사료이기 때문에 시행되지 않은 왕명인 군밤장수 어명 기록이 당연히 승정원일기에 기록될리가 없다. 단, 고종실록에 대해서는 좀 의문인게, 고종실록은 고종이 죽고 난 다음에 일본총독부가 실질적으로 작성했다. 이전에 고종실록을 조선왕조 실록으로 이어놨었는데,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은 조선왕조 실록에 포함되지 않는다.
- [45] 정확히는 황율(黃栗).
- [46] 대부분 경상도 관찰사
- [47] 창덕궁 후원의 언덕을 동산(東山)이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밤나무가 많아서 가을에는 산책 중에 길에 떨어진 밤을 주울 수 있다고 한다.
- [48] 조선왕 독살설 참고.
- [49] 또는 홍차라는 설도 있다.
- [50] 실제로 신한혁명당은 망명정부 계획을 수립하고 고종을 모시고 해외로 나가려 했다. 그 외에 고종의 측근들인 이회영, 이시영 들은 이미 망명하여 고종과 연락하면서 망명계획을 세웠음을 알 수 있는 자료 또한 꽤나 많이 발견된다.
- [51] 이미 고종 망명 시도 이전에도 이상설, 전협 등에 의해서 의친왕 망명 시도가 있었으나, 이것 역시 실패한다.
- [52] 비소중독의 경우는 세포단위부터 사망하기 때문에 부패가 이른 편이다.
- [53] 일제시대 자작작위와 은사금 3만원을 받았던 인물로 고종의 5촌조카이기도 하다. 친조카인 영선군은 정적이었던 것 등, 고종은 일가와 사이가 상당히 안 좋았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 [54] 한 가지 재미있는 건 강화도에 있는 고려 고종의 능호도 홍릉으로 한자까지 똑같다.
- [55] 이 만화 자체는 제국주의 비판 만화다. 오해하지 말자. 오히려 명성황후가 여기선 고종 대신 조선을 움직이는 날카로운 인물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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